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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해] 부활 제2주일 | 하느님의 자비 주일(2010-04-11) ■ |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구세주의 평화를 주십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러나 현대인들에게는 토마스와 같은 신앙 추구도 중요합니다. 억압과 죄에 짓눌려 사는 사람들을 죽음에서 해방시키는 부활의 힘을 깨닫고 증언하여야 합니다.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믿고 그 성취를 위하여 최선을 다할 때에 우리는 비로소 예수님께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하며 신앙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또한 오늘은 '하느님의 자비 주일'입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영원한 생명의 문이 인류에게 열렸습니다. 파스카 신비 안에 빛나는 하느님의 크신 사랑에 더욱 감사하며, 우리 자신이 주님의 자비를 드러내는 증인이 되도록 기도합시다. |
[금주 독서 / 복음 말씀] : 부활 제2주일 : [독서 : 사도 5,12-16 / 독서 : 묵시 1,9-11ㄱ.12-13.17-19 / 복음 : 요한 20,19-31]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토마스가 없었을 때 부활하신 분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수난의 흔적을 보여 주시며 메시아의 평화를 나누어 주셨다. 이는 구원의 업적을 완성하실 성령의 강림을 미리 체험하는 것이다. 그러나 토마스는 말한다. "나는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소!" 토마스 사도는 합리적이고 명확한 사람이었다. 그를 믿음으로 이끌기는 쉽지 않다. 그러한 성격은 실제적이고 감각적인 것을 요구하는 현대인들과 매우 비슷하다. 주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이해하시고 여드레 뒤에 다시 나타나시어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하고 토마스의 요구에 응하신다. 토마스의 모습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토마스에게 그러하셨듯이 우리에게도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을 외치게 하신다.
[제1독서 : 사도 5,12-16] : 예수님께서는 죽음과 모든 악을 물리치신 권능이 사도들에게 전수되었다. 사도들은 많은 기적을 행하고 병자들을 고쳐 준다. 사도들이 행하는 기적은 고통에 찌든 얼굴에 웃음을 띠게 하는 생기의 현존을 알리는 표징이며 성난 마음을 가라앉혀 주는 우정의 행동이다. 또한 그것은 더 나은 세상으로 바꾸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며 회개한 이의 성실한 임무 수행이다. 오늘날에도 그리스도인들의 이러한 삶은 부활하신 분의 현존을 세상에 분명하게 드러내 줄 것이다.
[제2독서 : 묵시 1,9-11ㄱ.12-13.17-19] : 요한은 정치 권력에 박해받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를 써 보낸다. 하루는 그에게 "사람의 아들"과 사제 그리고 왕의 모습을 하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셨다. 요한은 그분을 교회의 주님으로 이해한다. 그분께서는 바로 우리가 주일마다 복음의 봉독과 성찬례의 거행 안에서 만나는 주님이고 임금이며 사제이고 심판관이신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복 음 : 요한 20,19-31] :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거듭거듭 평화를 기원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화는 죽음을 이기심으로써 아버지께서 주신 평화이다. 그리스도의 뚫린 옆구리와 손에 난 상처는 죽음을 이긴 평화의 상징이다. 요한은 예수님의 그 상처를 이야기하면서 십자가 아래에서는 이해할 수 없었던 예언의 성취를 말하고자 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찌른 사람을 보게 될 것이다."(요한 19,37; 즈가 12,10). 이제 두려움과 고통과 비겁은 사라지고 전적인 믿음과 사랑의 외침이 터져 나온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
■ [다해] 부활 제2주일(2010-04-11) | 기도문 ■ |
저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 당신은 저의 배반과 변덕 심술과 오만을 모두 용서해주십니다. 당신을 생각하며 이웃을 단죄하지 않도록 도와주십시오. 제 스스로 어둠의 나라를 만들어 저와 이웃을 가두는 일을 그만두게 해주십시오. 당신의 부활로 온 세상이 새 생명으로 태어났음을 알게 해주십시오. 부활은 당신에게서 끝난 것이 아니라 그 은총이 살아가는 모든 이에게 지금도 계속되고 있음을 알게 해주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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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해] 부활 제2주일(2010-04-11) | 강론 및 묵상 ■ |
[주일강론-1] : 보지 않고도 믿는 것이 부활이다 |
요한 20,19-31 : 토마스의 불신
카라바조(Caravaggio, 1571~1610)는 17세기 회화세계에 혁신을 일으킨 화가입니다. 그는 바로크시대의 대표적 화가로서 빛을 그림에 접목한 사람입니다. 그는 종교적인 주제로 많은 작품을 남겼지만, 성화의 소재를 대부분 거리의 서민들에게서 취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성화는 늘 친숙합니다.
그가 그린 <토마스의 불신>도 우리의 의문을 친숙하게 대변해 줍니다. 이 성화의 배경은 요한복음 20장 19~31절입니다.
토마스는 그날 저녁 거기에 없었습니다. 그는 그 중요한 저녁, 예수님께서 성령과 용서하는 권한을 주시던 그 저녁에 거기에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토마스는 왜 거기에 없었을까요? 그는 더 이상 믿지 않았습니다. 그는 더 이상 희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더 이상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 실망해버렸습니다. 그는 그가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보았던 예수님의 죽음을 보고 모든 것을 포기해버렸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뵈었다는 다른 제자들의 말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요한 20,25)
우리도 토마스처럼 행동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 속에 감추어진 그 너머의 것을 보지 못한 채, 자기 시야를 좁혀버립니다. 그래서 우리도 토마스의 세계에 빠져 그저 먹고, 즐기고, 짝 짓고, 의미 없는 잡담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토마스와 같은 우리에게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옆구리를 보여주십니다.
이 성화에는 등장인물이 네 명 나옵니다. 예수님은 황금분할선상에 자리 잡고 있고, 세 제자들이 오른쪽에서 예수님을 향해 다가섭니다. 그리고 의심하는 토마스의 머리와 다른 제자들의 머리가 정확히 중심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시선은 토마스의 손가락에 모아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두 손 사이에 토마스의 손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한 손으로 옷자락을 걷고, 다른 한 손으로는 토마스의 손목을 붙잡아 상처의 갈라진 부분으로 당기고 있습니다. 그 손등에는 못 자국도 또렷하게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습니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요한 20,27)
토마스는 자기 손가락으로 예수님의 상처를 헤집는 동안 다른 제자들도 눈으로 상처를 더듬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촉각과 느낌으로 그분의 상처를 더듬고 있습니다.
토마스는 그분을 보았고, 그분을 만졌습니다. 그리고 고백합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 그는 그렇게 고백함으로써 자기 주위를 둘러쳤던 불신의 테두리를 무너트렸습니다.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보고 믿는 것이 믿음입니까?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확인입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보이지 않은 가능성까지 믿어 주는 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우리가 보지 않고도 믿어줄 때 부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보고야 믿겠다고 할 때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의심만 남습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행복이 그리운 오늘입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것이 부활이라는 말씀이 뇌리에 머무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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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자료 : 손용환 신부(가톨릭신문) I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
[주일강론-2] : 평화와 용서로 감싸주시는 주님 |
쌍둥이라고도 불리는 토마스 사도에 관한 복음은 우리에게 믿음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묵상하게 합니다. 토마스 사도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타나셨을 때 다른 제자들과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부활한 주님을 뵈었다고 기뻐하는 모습 속에서, 토마스는 이렇게 반응합니다.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요한 20,25).
토마스는 부활의 신비 앞에 자신의 마음을 굳게 닫고 있는 전형적 인물로 나타납니다.
토마스는 열두 사도 중 하나였습니다. 주님을 곁에서 직접 체험했던 이른바 직제자였습니다. 주님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하면,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신비 앞에선 굳게 닫혀있습니다.
어쩌면 이 모습은 우리 안에 내재돼 있는 닫히고 고집스런 마음일 수 있습니다. 닫히고 고집스런 마음으로는 주님의 신비를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믿음은 정지된 것이 아니라 알면 알수록 점점 커져만 가는 신비 속으로 함께 성장해 나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이런 폐쇄적인 마음 안에 주님을 가둬 놓곤 합니다. 그래서 누구보다 우리는 주님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자신의 사고 틀에 주님을 가둬 언제든지 꺼내 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주님에 대해 너무 잘 안다고 생각해서, 이제는 더 많이 기도하지 않습니다. 주님에 대해 너무 잘 안다고 생각해서, 이제는 더 많이 묵상하지 않습니다. 주님에 대해 너무 잘 안다고 생각해서, 이제는 더 많이 사랑을 실천하지 않습니다. 주님에 대해 너무 잘 안다고 생각해서, 심지어는 주님을 자신의 잣대로 재보기도 하고 판단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유로우신 주님은 이미 우리 생각 틀에서 벗어나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공동체 안에서 살아계신 주님 현존을 느끼고 체험하는 모습을 보기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토마스처럼, 우리의 보다 큰 문제는 주님 부활을 믿지 못하는 마음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을 아주 잘 아는 듯이 생활하는 믿음의 우월감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그렇지 않다면 토마스는 주님을 만난 자리에서 자신이 호언한대로 못자국과 상처를 찾기 위해 주님 몸을 당연히 살폈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에서는 주님께서 시선을 돌려 토마스에게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하고 말씀하신 후에야,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요한 20,27-28). 우리 신앙은 주님 현존에 대한 외관상 증거나 목격담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 체험과 믿음을 근거로 삼을 때 살아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토마스는 주님 사랑의 시선을 누구보다 더 받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주님에 대해 너무 잘 안다고 생각하는 우월감이 다른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 뵈었을 때에 자신만 빠졌다는 서운하고 미운 마음으로 변한 것일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토마스가 공동체 안에서 자신에게 너무나도 높은 가치를 매기고 있다는 사실에서 연유된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토마스를 질책하기 보다는 당신을 만져봐야만 믿겠다는 요청을 들어주시며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주님은 당신을 보고도 믿지 않던 이들에게도 당신을 드러내 보이십니다. 주님은 의심하고 불안해하는 우리를 성령이 주시는 평화와 용서로 감싸주시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결국 우리가 주님의 사랑받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사도들에게 성령의 숨결을 불어 넣어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2-23).
성령은 우리 믿음을 일깨워 용서와 사랑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함께 하거나 사랑을 나눈 체험이 공동체를 형성하는 뿌리가 됩니다. 사도들은 공동체 안에서 이런 소중한 체험들을 서로 나누고 믿음이 부족한 형제들을 격려했습니다. 서로를 격려하고 배려해주는 평화의 삶 속에서 우리도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말씀자료 : 홍승모 신부(평화신문) I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
[주일강론-3] : 토마스 사도의 행복선언문 |
인간의 인식 세계에는 오감을 통해 인식할 수 있는 세계와 직관이나 영감을 통해 인식할 수 있는 세계가 있다 합니다. 합리성을 강조하는 현대는 오감의 세계에만 중요성을 두고 오감을 통해 모든 세계를 해석하려 합니다만 분명한 사실은 인간의 세계에는 오감만을 통해서 파악할 수 없는 세계가 있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실체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고유한 방법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토마 사도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요한 복음에 나오는 유일한 행복선언문으로서 예수님을 보지 않고도 믿어야만 하는 사람들, 즉 미래의 신앙인들이 예수님을 직접 경험했던 사람들보다 불행한 것이 아니라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선언함으로써 신앙에 있어 예수님에 대한 직접체험이 신앙의 중심은 아님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 이야기는 신앙의 세계에 대한 접근방법을 생각하게 합니다. 인간은 일반적으로 합리적이고 감각적인 방법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려 합니다. 마치 토마사도의 자세처럼 보고 만지는 자세입니다. 물론 그러한 자세는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영역에서는 매우 긍정적인 모습입니다만 관계적이고 영적인 영역에서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이러한 영역에서는 오감을 통한 체험을 넘어서는 그 무엇이 필요하게 됩니다.
토마 사도께 하는 예수님의 말씀,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라는 말씀이 내포하고 있는 자세입니다. 오감 너머에 있는 무엇, 체험을 통한 확인과 이해를 넘어서는 만지고 확인하기 힘든 사랑과 믿음의 자세가 그러한 세계의 접근방법입니다.
그러나 필자가 오늘 복음을 보면서 묵상하고자 하는 바는 토마사도를 대하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다른 제자들이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하고 말하자 토마스는 『나는 내 눈으로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어 보고 또 내 손을 그분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라고 대답합니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서운함을 느끼고 그러한 마음을 표현할 상황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사실 보다 관계가 더 중요할 때가 있고, 사실적인 이해보다 관계적인 사실을 요구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주부들은 경험 합니다만 누구와 싸웠을 때 남편이 자신을 감정적으로 편들어 주지 않고 싸움의 원인과 결과, 그리고 상대편의 잘못과 자신의 잘못을 낱낱이 따져 가르치려 할 때 서운함을 느끼는 모습이 이러한 사실의 단적인 예입니다.
예수님도 아마 비슷했으리라 상상해 봅니다. 3년을 같이 생활했고, 또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미리 예고한 제자들이었기에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반응을 기대했을 것이고, 이러한 면에서 보면 토마 사도의 이야기는 예수님에게 조금은 서운하게 들렸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예수님은 그러한 서운함을 표현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토마사도가 원하는 바를 통해 당신의 마음, 서운함을 넘어서는 진정한 의도를 드러낸다는 점입니다. 만지고 확인하게 할 뿐 아니라 한 단계 더 성숙하도록 토마 사도가 가야할 신앙의 길에 대해 이해를 구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감정을 넘어섬」 「타인의 욕심 배려」 「일차 감정 뒤에 숨은 진정한 마음 표현」 예수님의 모습에서 볼 수 있는 교훈입니다.
사실 인간은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이 의도가 나쁜 수단에 의해 실패하는데, 이 나쁜 수단의 대표적인 것이 감정적인 일차적인 반응입니다. 예를 들면 공부안하는 아이를 야단치는 엄마와 거기에 반항하는 아들입니다. 여기서 어머니가 아이를 야단치는 것은 아이에 대한 사랑이라는 너무나 좋은 의도입니다만 그러나 그러한 의도는 결국 「야단」이라는 「감정적이고 일차적인 행위」 때문에 오히려 관계 악화라는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오기 쉽습니다.
아마 어머니가 힘들겠지만 속상한 마음을 다스려 「야단」 대신 좀 더 성숙한 모습, 당신의 사랑이라는 속마음을 전했다면 물론 공부는 못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관계는 악화되지 않았을 것이고, 어머니의 마음과 공부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의 욕구와 감정을 다스리고 타인의 바람을 배려하는 이러한 모습은 물론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요, 때로는 계산적인 세계 속에서 현실적인 손해를 가져 올 수 있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이야기할 수 있는 사실은 비록 힘들다 하더라도 겉마음이 아닌 속마음, 즉, 일차 감정 안에 숨어 있는 진정한 마음을 보고, 이러한 선한 마음을 타인의 감정을 배려해 표현할 수 있을 때만이 우리의 선한 의도는 긍정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이고, 바로 이러한 점이 선한의도를 세상에 실천해야할 우리 신앙인들이 토마사도를 대하는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발견해야 할 교훈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말씀자료 : 홍금표 신부 I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
[주일강론-4] :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이 행복하다 |
오늘 복음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성령을 주고 그들을 파견하셨습니다. 복음서는 그것이 안식일 다음 날 저녁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그것은 오늘의 주일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믿음이 생기면서 제자들은 모여들었습니다. 그들은 모여서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 가르치신 것과 하신 일을 회상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그들과 함께 나누신 이별의 식사를 기억하고 성찬을 거행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 자리에 예수님이 나타나셨다고 말합니다. 우리도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 하신 말씀과 실천을 말씀의 전례에서 만나고, 그 말씀과 실천이 우리 안에도 살아 있게 하려고 그분의 몸이라는 빵을 먹고 그분의 피라는 포도주를 마십니다.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인 토마스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여드레 후 같은 장소에 토마스를 포함하여 제자들이 모여 있을 때 예수님이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여드레 후면 일주일 후를 뜻합니다. 두 번째의 발현도 주일의 같은 집회에서 있었다는 말입니다.
토마스는 예수님에게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합니다. 그것은 초기 교회가 예수님에 대해 하던 신앙 고백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따르는 사람은 그분 안에 하느님의 생명이 하는 일을 본다는 고백입니다.
오늘 복음은 발현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면서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성령을 주시면서 제자들을 파견하셨습니다.
죄를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라는 말씀은, 제자들의 뜻에 맡겨진 용서라는 뜻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긍정적으로 한번 말하고, 그것을 강조하기 위해 부정적으로 다시 한 번 더 말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성령을 불어넣고 제자들을 파견하신 것은 하느님이 용서하신다는 기쁜 소식을 사람들에게 알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면서 성령을 주신 것으로 복음이 말하는 것은 창세기 2장(7절)에서 얻은 발상입니다. 하느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 진흙을 빚어 사람의 모상을 만들어놓고, 거기에 숨을 불어넣으셨습니다. 그랬더니 살아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예수님이 숨을 불어넣으셔서 제자들이 새로워졌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 앞에 도망갔었지만,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을 선포하기 위해 목숨을 내어놓았다는 말이고, 하느님의 용서를 믿지 않던 사람들이 하느님의 숨결을 받아 용서를 믿고 선포하는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제2독서로 들은 요한묵시록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것으로 말합니다. ‘나는 처음이며 마지막이고 살아 있는 자다.’ 예수님에게서 삶을 배워야 한다는 말입니다.
옛날 유럽 중세 교회가 과제로 안고 있던 문제는 사람들이 각자 자기 행위에 대해 책임을 느끼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중세 초기에 유럽으로 유입되어 정착한 게르만족은 난폭하고 그들의 부족 수령에게만 무조건 순종하는 종족이었습니다. 그들 각자는 자기 행위에 대해 책임을 질 줄도 모르거니와 죄의식도 없었습니다. 오로지 부족의 수령이 시키는 대로 할 따름이었습니다.
그 시기에 교회가 도입한 것이 개인고백을 동반하는 고해성사 제도였습니다. 신앙인은 각자 자기의 잘못을 성찰하여 죄를 찾아내고, 본당 신부에게 와서 그 죄를 고백하는 제도입니다. 고백한 사람은 하느님이 용서하신다는 신부의 선포를 듣고, 보속을 받아 행합니다. 보속을 주는 것은 죄인이라고 깨달은 사람이 용서를 얻기 위해 난폭하게 과도한 보속을 하지 않도록 하는 장치이기도 하였습니다.
이 성사가 오늘도 존속하기에 우리는 오늘의 복음에서 죄를 용서해주지 않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라’는 말씀을 고해를 듣는 신부의 임의에 맡겨진 용서라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 과거의 시대적 여건에서 발생한 개인고백 고해성사를 아직도 강요하는 데서 오는 부작용입니다.
한 시대에 필요하였던 법을 다른 시대에도 강요하면 엉뚱한 해석이 나타납니다. 용서하시는 하느님을 선포하는 고해성사가 하느님이 용서하시지 않기에 궁여지책으로 교회가 마련한 고해성사인 양 오늘은 엉뚱하게 해석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용서하시는 하느님을 가르치셨습니다. 하느님은 죄인을 버린다고 주장하는 유대교 앞에 예수님은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가르치셨습니다. 오늘의 교회가 어떤 방식으로든 하느님의 자비를 은폐한다면,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것이고 하느님을 아버지로 믿지 않는 것입니다.
죄의 용서는 고해소에 앉은 신부들에게 주어진 특권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비하신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고, 예수님을 따르는 공동체가 실천해야 하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숨결이신 성령은 용서하고 살리시는 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도 토마스가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는 말로 신앙을 고백하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기원후 100 년경 요한복음서가 기록될 당시 교회는 예수님을 직접 보지 못한 세대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말씀은 예수님을 보지 못하였지만, 그분을 믿고 그분의 삶을 실천하는 당시의 신앙인들이 행복하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을 직접 만나지 못하였어도, 그분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시면서 그분에 대해 가르치고 그분의 자비와 용서를 실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목숨을 걸고 지키신 것은 하느님이 용서하고 사랑하시는 아버지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 아버지의 자녀 되어 살고 싶은 사람은 그분의 자비와 용서와 사랑을 배워 실천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교회는 그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교회에는 높은 사람도, 낮은 사람도 없습니다. 하느님에 대해 통달한 사람도 없습니다. 오로지 예수님으로부터 하느님에 대해 배워서 하느님의 일인 섬김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숨결이신 성령을 받아 이웃에게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와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크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 되라.”(마르 10,43)는 예수님의 말씀이 살아 있는 공동체입니다. 자비와 용서와 사랑은 인류 역사 안에 항상 있었습니다. 자비와 용서와 사랑이 실천되는 곳에 하느님은 살아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이 하느님의 일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 스스로 그 일을 실천하다가 당신 아버지에게로 가셨습니다......◆
[말씀자료 : 서공석 신부 I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
[주일강론-5] : 토마스의 부활 체험 여정 |
시작 기도 오소서, 성령님. 복음 말씀을 듣는 제 마음에 굳은 믿음을 길러 주소서.
독서 오늘 복음에서는 세 장면이 겹쳐지는 듯합니다. 세 무리의 사람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납니다. 먼저는 문을 닫아 걸고 있던 제자들이, 그다음에는 그날 함께 있지 않던 토마스가, 그리고 마지막에는 우리가 있습니다. 만남은 이렇게 시간상으로 연속되고, 그 폭은 점점 더 확장되어 갑니다.
지난 주 복음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때는 ‘주간 첫날’ 입니다. 주님 부활의 날, 살아 계신 그분의 현존을 다시 체험하는 날입니다. 더구나 제자들은 마리아 막달레나한테서 주님을 뵈었다는 말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문을 닫아걸고 있습니다. 그들의 두려움, 주님의 오심을 맞아들이기 위하여 문을 열지 못하는 약함과 부족한 믿음, 이 모든 것도 제자들 가운데 오시어 현존하시는 주님을 가로막지 못합니다. 그분은 문이 잠겨 있어도 집 안으로 들어오시는 분이십니다. 부활하신 분께서 제자들에게 주시는 것은 ‘평화’ 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수난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평화를 약속하셨습니다. 14장에서는 오늘의 복음에서와 같이 평화와 성령이 함께 언급됩니다. 성령께서 오시면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시리라는 말씀과 함께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하시며 (27절), 마음이 산란해지거나 겁을 내지 말라고 하시고는 수난을 향해 나아가셨습니다. 또한 16장에서도 수난의 때가 가까웠음을 말씀하시며 당신께서 그 말씀을 하시는 것은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 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33절)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평화는, 앞의 두 본문을 떠오르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 그분의 평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은” 그 평화는 수난이 없는 평화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고난 속에서도, 예수님께서 떠나가신 다음에도 주님의 성령 안에서 이 세상을 이기는 평화입니다.(16, 33 참조) 그러기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른 것이 아니라 당신 손과 옆구리의 상처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에페소서에서는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라고 말합니다. (2, 14) 그분께서는 “십자가를 통하여 양쪽을 한 몸 안에서 하느님과 화해시키시어, 그 적개심을 당신 안에서 없애셨습니다.” (에페 2, 16) 제자들이 가야 할 평화의 길은 어쩌면 바로 그런 길이었을 것입니다. 당신이 가신 그 평화의 길을 가라고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내십니다.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주라는 사명은, 현재 문맥에는 무엇인가 맞지 않는 감이 없지 않습니다. 유다인들이 두려워 숨어 있는 이들에게,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주라니 어쩌면 제자들은 그들이 두려워하는 이들, 그들을 박해할 수 있는 이들을 용서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다음에 나오는 토마스 사도 이야기는, 직접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던 제자들의 이야기에서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는 말씀으로 건너가는 중간 단계가 됩니다. 토마스 사도는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사실 때 그분을 따랐던 제자였고, 직접 그분을 만났고 그분을 알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앞 장면에 나온 제자들과 연결됩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께서 나타나신 그 주일 저녁에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있지 않았고, 그래서 오늘 우리처럼 직접 눈으로 주님을 뵙지는 못한 이들과 같은 선상에 자리하게 됩니다. 그에게 주어진 것은, 예수님께 대한 직접 체험이 아니라 다른 제자들의 증언이었습니다. 우리의 상황도 그러합니다. 그런데 토마스는 다른 제자들의 말을 믿지 못합니다. 이로써 그는 예수님을 눈으로 뵙지 못했고 믿기 어려워하는 후대 사람들을 대변합니다. 그런데 의심하던 토마스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어 다른 제자들의 말을 확인해 주십니다. 그럼으로써 토마스는 다시 ‘보고서 믿는’ 이들의 무리에 속하게 됩니다.
결정적인 것은 마지막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29절) 이것은 우리를 위한 말씀입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예수님과 함께 살았던 제자들보다도, 토마스 사도보다도 우리가 더 복되다고 말합니다. 믿음은 예수님의 목격 증인이었던 사도들한테서 시작하여 수많은 사람의 증언으로 이어진 고리를 통해 오늘 나한테까지 전해졌습니다. 그들의 증언에 힘입어 부활하신 예수님께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이라고 고백할 때 (28절), 예수님은 그 믿음을 보시고 “너는 행복하다.” 고 말씀하십니다.
성찰 보이지 않는 주님께 대한 믿음이 있다면, 그분께서 언제나 살아 계시며 우리 가운데 현존하신다는 믿음이 있다면 성령의 힘으로 이 세상 어둠 속에서도 두려움을 이기는 평화를 지닐 것입니다. 그런 평화를 지닌 이는 복됩니다.
기도 행복합니다, 마음속으로 순례의 길을 생각할 때 당신께 힘을 얻는 사람들! (시편 84, 6)..............◆
[말씀자료 : 안소근 수녀(성도미니코선교수녀회) I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
[주일강론-6] : 교회, 부활신앙을 사는 공동체 |
묵상길잡이 : 부활장면을 찍어 둔 비디오라도 있다면, 부활을 믿도록 하는데 도움이 되겠는가? 그러나 죽음과 부활이라는 모순적인 상황을 신앙으로 받아들일 마음이 없는 이들에겐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할 것이다. 부활은 이미 신앙의 대상이지 감각의 대상이 아니다.
1. 부활장면 찍어 둔 비디오는 없나?
중. 고등부 학생들에게 부활교리를 하던 중이었다. 신부님의 교리를 열심히 듣고 있던 한 중학생이 갑자기 손을 번쩍 들고는 "신부님, 부활 장면 찍어둔 동영상 같은 것은 없습니까? "하였다. 예수님의 부활장면을 찍어 둔 비디오라도 있으면 좀 쉽게 믿을 수 있겠다는 태도였다. 그러자 "임마, 그 때 비디오가 어디 있었겠어!" 하면서 다른 학생들이 점잖게 나무랐다.
오늘 복음의 토마 사도뿐 아니라, 현대 자연과학적인 교육을 받아온 우리들에겐 "예수님은 죽은 지 3일만에 부활하셨다."는 부활교리를 믿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예수 부활의 장면을 찍어 둔 비디오 테입이 있다면 누구나 예수 부활을 믿을 수 있겠는가? 결코 그렇지 못할 것이다.
부활이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뜻한다. 이는 "참으로 죽었다면 절대로 살아날 수 없다."는 자연과학적인 상식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은 "죽은 사람도 다시 살릴 수 있는 하느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믿는 신앙이 없이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복음서에도 예수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고, 무덤에 묻히셨다고 예수님을 완전히 '죽어버린 자'로 여긴 제자들은 부활한 예수를 눈으로 보면서도 알아보지 못하였다. 죽은 자도 살릴 수 있는 하느님의 권능을 믿는 자만이, 죽음과 부활이라는 모순적인 상황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수용할 수 있는 사람만이 부활을 믿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은 이미 믿음의 대상이지 감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2. 부활을 증거하는 삶
예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그럴 수도 있겠다."는 단순한 지적(知的)인 동의인가? 이것으로는 부활을 믿는다고 할 수 없다. 부활신앙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느님이 살아 계심을 믿는 것이며, 죽음 후의 영원한 생명을 믿는 것이 아니겠는가?
오늘 제2독서에서 요한 사도는 "나는 처음이고 마지막이고 살아있는 자다. 나는 죽었지만, 보라, 영원무궁토록 살아있다." (묵시1,17-18)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 부활신앙은 또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25)하신 예수를 구세주로 믿고, 우리도 예수님처럼 살 때 그분과 함께 부활할 것을 믿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부활신앙은 이 지상의 삶이 끝나는 그 연장선상에서 영원한 생명이 시작된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은 눈에 보이는 이 현상적인 삶에 집착하지 않고, 영원을 향해 열린 새로운 삶을 살게 해준다. 그래서 부활한 예수를 체험한 사도들은 현실의 욕심을 뛰어넘어 "신자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리고 재산과 재물을 팔아 모든 사람에게 저마다 필요한대로 나누어주곤 하였다."(사도 2,44-45)
사도들은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믿었기에, 이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흉내낼 수 없는 완전한 자기 비움과 철저한 나눔의 공동생활을 할 수 있었다. 부활을 믿는 신앙은 우리의 삶을 철저히 변화시키는 원동력이다. 우리의 삶이 지독히 자기중심적이며, 이 세상이 전부인양 집착하는 것은 부활한 예수님이 들어간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이 아닌가?
3. 설익은 신앙인?
우리 주변엔 "나는 죽고 난 후의 영원한 생명 같은 것에는 별 관심이 없다. 다만 세상에 살면서 좀더 인간답게, 멋있게 살려는 것뿐이지!"하며 신(新) 세대다운 신앙인으로 자처하는 이들이 많다. 이런 수도자도 가끔 만난다. 이는 '무신론적인 휴머니스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좋게 보면 사춘기적인 순수함이고, 신앙인으로 성숙해 가는 과정이라 하겠다. 멋있어 보이려고 진한 유혹을 이길 수 있고, 엄청난 불이익을 감수 할 수 있을까? 멋있어 보이려고 순교를 할 수 있을까? 부활에 대한 확신,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이 없는 신앙은 성숙한 참 신앙이라 할 수 없다.
복음은 토마 사도의 불신앙을 전해주고 있다. 그러나 토마 사도가 특별히 의심이 많은 사람이라서 예수의 부활을 믿지 못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토마 사도가 예수의 부활을 처음부터 믿지 못한 이유는 예수님이 처음 발현했을 때, 사도들의 무리 안에 함께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이들의 공동체이다. 우리는 주일미사에 참례하면서 말씀과 성체 안에서, 그리고 믿음이 두터운 형제들 안에서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만난다. 교회를 떠날 때, 그리스도를 볼 수 없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교회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보여주는 성사이다.]고 하는 것이다. 부활한 예수님은 믿음공동체 안에서 만날 수 있다. 교회를 떠날 때 믿음도 시든다. 주님 당신 성령을 통해 저희에게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믿는 믿음을 주소서. 아멘............◆
[말씀자료 : 유영봉 몬시뇰 I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