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과
운현궁(雲峴宮)
운현궁(雲峴宮)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의 사저(私邸)이자
조선 제26대 임금인 고종의 잠저(潛邸)로 고종은 이곳에서 출생하여 12세까지
성장하였다.
1863년 12월 고종이 왕위에 오르자 이 집은 ‘운현궁’이라는 칭호와 함께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거처다운 면모로 확장되고
증축되기에 이르렀다.
즉위 이듬해 9월 노안당(老安堂)과 노락당(老樂堂)이 준공되었고,
1870년에는 이로당(二老堂)이
준공을 보았다.
대원군의 조상인 은신군(恩信君)과 남연군(南延君)의 사당(祠堂)도
대원군이 섭정하던 1863년~1873년 사이에 새로
지어지는 등
운현궁의 그 웅장함은 궁궐과 비길만하여 담장의 둘레가 수리(數理)에 이르렀다고 한다.
운현궁에서 반갑게 맞아주신 예문관의
박성진 선생의 말을 빌리자면
현재의 운현궁은 절정기에 달했던
규모의 5분1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니 당시 운현궁의 위세를 가히 짐작할 수 있겠다.
운현궁에 4개의 대문이 있었는데,
서남쪽으로 나있는 정문 격인 솟을대문(大門) 외에
고종이 창덕궁과 운현궁 사이를 쉽게 왕래하도록 만든 경근문(敬謹門)이
있었고,
흥선대원군이 입궐을 편히 할 수 있도록 만든 대원군 전용의 공근문(恭勤門)이 있었다.
운현궁은 대원군 집권 10년간의
개혁정책 대부분이 구상되고 실천되었던 곳이다.
대원군의 권력은 막강하여 중앙뿐만 아니라 전국에까지 그 영향력이
국가 관료기구를 통하지
않고서도 직접 집행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운현궁은 가히 조선말기 개혁정치의 산실로 정치의 중심지였다고 볼 수 있으며,
대원군이
하야(下野)한 후에도 조선정치의 상징적 공간으로 수많은 사건들과 연관되었다.
현재 운현궁은 서울 종로구
운니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사적 257호로 지정되어 문화유산으로 보호되고 있다.
남아있는 운현궁 일곽으로는 사랑채인 노안당과 안채인
노락당과 이로당,
그리고 이로당 북쪽에 안 별당채인 영로당(永老堂)이 남아있다.
노안당(老安堂)은 대원군이 일상적으로 거처하던
사랑채로,
고종 즉위 후에는 국가의
주요정책이 이곳에서 논의되었다.
‘노안당’이라는 현판의 노안(老安)이라는 글귀는
《논어》의 노자안지(老者安之)에서 빌려온
것으로
아들이 임금이 된 덕택으로 좋은 집에서 편안하게 노년을 살게되어 스스로 흡족하다는 뜻인데
글씨는 추사 김정희 선생의 글씨를
집자(集子)하였다고 운현궁 안내서에 되어있다.
그러나 이는 잘못 알고 설명된
것이 아닌가 싶다.
현판에 ‘서위 석파선생 노완(書爲 石坡先生 老阮)’이라고 쓰여 진 것으로 보아
당시 추사 선생이 대원군에게 직접
써준 것을 현판으로 제작한 것이 분명하다고 본다.
또 안내서에 ‘집자(集子)’라고 표시되어 있는 것도 ‘집자(集字)’라고 고치는 것이
옳다.
참고로 원래의 현판은 서울역사박물관에 보관중이며,
지금 걸려있는 현판은
철재(?齋) 오옥진(吳玉鎭) 선생의 각(刻)으로 2006년부터 걸게 되었다.
노안당 안으로 들어가면 영화루(迎和樓)라는 노마루가 있다.
이곳은 대원군이 손님을 맞아
접대하던 곳으로 왼편 위에 무량수각(無量壽閣)’이라는 추사의 예서체 현판이 있다.
이 글씨는 원래
1840년 추사가 제주도로 유배길을 가던 길에 해남 대흥사에 들러
초의선사에게 써주고 간 ‘무량수각’의 현판을 탁본하여 모사한
것으로 보인다.
노안당 바로 뒤에 있는 건물은
운현궁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중심이 되는 노락당(老樂堂)이다.
이곳에서 고종 3년(1866년) 고종과 명성황후의 가례가 열렸다.
이
건물은 사대부가의 건축미와 아름다운 창살문양이 그대로 남아 있고,
지붕의 용마루를 받치고 있는 종도리에는 용문양이 그려져
있어
노락당의 권위와 위상을 잘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보통 건물 안쪽만 휑하니
들여다보고 돌아서는데 눈높이를 높여 볼만 한 곳이다.
노락당 다음 건물은 이로당(二老堂)이다. 이 건물은 노락당과 더불어 안채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어
여성들만이 살 수 있게 입구(口)자형의 별도의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이곳은 금남구역으로 대원군의 부인인 부대부인
민씨가 운현궁의 살림을 맡아서 하던 곳으로
명성황후도 여기에서 궁중법도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
이로당의 담 넘어
영로당은 현재 사유재산으로 일반인의 출입이 자유롭지 못하다.
동쪽에는 대원군의 손자인 연선군(永宣君) 이준용(李埈鎔)이 1910년 이후에
지었다는
양관(洋館)이 있는데, 이 건물도 어떤 용도로 활용하고 있는지 확인을 못하였다.
또 하나 눈여겨 볼 것은 운현궁의
석빙고(石氷庫)이다.
이로당 동행각 밑으로 난 통로를 지나면 넓은 뒷마당이 나오고 담 쪽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