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산님 추천한 시들―
고향길 / 신경림
작성자:최병무
작성시간:2023.06.30 조회수: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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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길 / 신경림
아무도 찾지 않으려네
내 살던 집 툇마루에 앉으면
벽에는 아직도 쥐오줌 얼룩져 있으리
담 너머로 늙은 수유나뭇잎 날리거든
두레박으로 우물물 한 모금 떠 마시고
가위소리 요란한 엿장수 되어
고추잠자리 새빨간 노을길 서성이려네
감석 깔린 장길은 피하려네
내 좋아하던 고무신집 딸아이가
수틀 끼고 앉았던 가겟방도 피하려네
두엄더비 수북한 쇠전마당을
금줄기 찾는 허망한 금전꾼되어
초저녁 하얀 달 보며 거닐려네
장국밥으로 깊은 허기 채우고
읍내로 가는 버스에 오르려네
쫓기듯 도망치듯 살아온 이에게만
삶은 때로 애닯기만 하리
긴 능선 검은 하늘에 박힌 별 보며
길 잘못 든 나그네 되어 떠나려네
- 신경림 시집 <달넘세>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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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남과 돌아옴 / 박정선
1.
신경림은 1955년 문학예술에 <낮달>을, 1956년 같은 잡지에
<갈대>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단하였다. 70년대에 들어와
민중의 삶과 비애를 노래함으로써 독자적인 시적 성취를 이룬
그는 이후 다양한 모색과 시도를 통하여 꾸준한 시세계의
변모를 이루어 왔다. 다음에 인용한 <고향길>과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은 동일하게 고향과 유년, 떠남 등을 다루고
있으나, 그것을 노래하는 방식과 이를 대하는 화자의 태도는
서로 상반된다.
아무도 찾지 않으려네
내 살던 집 툇마루에 앉으면
벽에는 아직도 쥐오줌 얼룩져 있으리
담 너머로 늙은 수유나뭇잎 날리거든
두레박으로 우물물 한 모금 떠 마시고
가위소리 요란한 엿장수되어
고추잠자리 새빨간 노을길 서성이려네
감석 깔린 장길은 피하려네
내 좋아하던 고무신집 딸아이가
수틀 끼고 앉았던 가겟방도 피하려네
두엄더미 수북한 쇠전마당을
금줄기 찾는 허망한 금전꾼되어
초저녁 하얀 달 보며 거닐려네
장국밥으로 깊은 허기 채우고
읍내로 가는 버스에 오르려네
쫓기듯 도망치듯 살아온 이에게만
삶은 때로 애닯기도 하리
긴 능선 검은 하늘에 박힌 별 보며
길 잘못 든 나그네되어 떠나려네
- 고향길, 1985
고향 혹은 유년시절은 대부분의 시인들에게 있어서 현실의
상처와 아픔을 보듬어줄 수 있는 모성적 공간이다.
많은 시인들이 유년과 고향을 노래함으로써 자족적인 공간
으로서의 고향에 대한 갈망과 그리움과 향수를 표현하였다.
조화와 화해의 공간으로서의 고향에 대한 지향은 단지
鄕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신성하고 화해로운 사고와
경험이 사라져 가는 고통스러운 현실에 대한 반어적 태도를
포함하기도 한다. 이때에도 고향은 현실의 고통을 더욱 가혹한
것이 되게 하는 부정적인 현실의 반대항으로서 자리한다.
고향에 대한 지향이 그리움의 정서를 표현하기 위한 것이든
고통스러운 현실을 역전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것이든,
고향은 끊임없는 그리움과 갈망의 대상이 되어왔다.
그러나 <고향길>의 화자는 고향에 대한 이러한 일련의 태도로
부터 벗어나 있다. 그는 고향에서 <아무도 찾지 않>겠다고
말한다. <아직도 쥐오줌 얼룩져 있>을 고향집이지만 화자는
<내 살던 집 툇마루에 앉>아서도 유년의 자족적인 공간으로
되돌아가지 못한다. 화자는 <감석 깔린 장길>과 화자가
좋아했던 <고무신집 딸아이가 / 수틀끼고 앉았던 가겟방>을
피한다. 과거의 기억과 추억이 묻어 있는 익숙한 장소들을
피해 <노을길>을 <서성이>고 <달을 보며> 거닐고자 한다.
고향에서도 화자는 <가위소리 요란한 엿장수> 혹은 <금줄기
찾는 허망한 금전꾼>이며 <나그네>이다. 화자에게 고향은
자족적인 화해의 공간도 아니며 그리움의 대상도 아니다.
그에게 <고향길>은 고향으로 가는 길, 고향을 향해 가는
길이 아니라 고향을 떠나오는 길이다. 고향길에서 서성이다
<읍내에 가는 버스>에 오르며 화자는 스스로를 <길 잘못 든
나그네>라고 말한다. 고향으로 가는 길은 <잘못 든> 길이며
화자는 안주할 곳을 찾지 못하고 떠도는 <엿장수>이거나
<금전꾼>이거나 <나그네>로서 살아간다. <쫓기듯 도망치듯
살아온 이에게>는 고향조차도 쫓겨나듯 떠나야 할 공간인
것이다.
신경림에게 있어서 고향은 아름다운 화해의 공간도 아니며
현실의 아픔과 고통을 보듬어줄 수 있는 공간도 아니다.
화자는 <고향길>에서 서성이며 길을 잘못 든 사람처럼
황급히 고향을 떠난다. <쫓기듯 도망치듯 살아온> 애달픈 삶
속에서 고향은 더 이상 아름답고 화해로운 공동체의 모습을
유지하지 못하는 훼손된 공간이기 때문이다. 신경림은 그의
초기시에서 고향을 박탈당한 뜨네기들의 삶과 이들의 떠남을
주로 노래하였다. 인용한 작품에서 <고향길>이 귀향이 아닌
떠남의 모티브와 겹쳐지고 있다면 시인의 최근 시집에 수록된
작품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은 떠남의 모티브가 고향
혹은 유년시절에로의 돌아감으로 수렴된다.
어려서 나는 램프불 밑에서 자랐다,
밤중에 눈을 뜨고 내가 보는 것은
재봉틀을 돌리는 젊은 어머니와
실을 감는 주름진 할머니뿐이었다.
나는 그것이 세상의 전부라고 믿었다.
조금 자라서는 칸델라불 밑에서 놀았다,
밖은 칠흑 같은 어둠
지익지익 소리로 새파란 불꽃을 뿜는 불은
주정하는 험상궂은 금점꾼들과
셈이 늦는다고 몰려와 생떼를 쓰는 그
아내들의 모습만 돋움새겼다.
소년 시절은 전등불 밑에서 보냈다,
가설극장의 화려한 간판과
가겟방의 휘황한 불빛을 보면서
나는 세상이 넓다고 알았다, 그리고
나는 대처로 나왔다.
이곳 저곳 떠도는 즐거움도 알았다,
바다를 건너 먼 세상으로 날아도 갔다,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을 들었다.
하지만 멀리 다닐수록, 많이 보고 들을수록
이상하게도 내 시야는 차츰 좁아져
내 망막에는 마침내
재봉틀을 돌리는 젊은 어머니와
실을 감는 주름진 할머니의
실루엣만 남았다.
내게는 다시 이것이
세상의 전부가 되었다.
-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1998
화자는 어린 시절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삶의 경험들을
진술한다. <램프불 밑에서>의 유년 시절에서 시작하여
<칸델라불 밑에서>의 시절과 <전등불 밑에서>의 소년 시절을
거쳐 <대처>로 나오기까지의 시간을 통해, 화자는 삶과
세상에 대하여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을> 듣는다.
유년으로부터 혹은 고향으로부터 떠나 <대처>로 나오는
일은 보다 많은 것을 듣고 볼 수 있는 경험의 시간을 제공한다.
고향을 떠나 <대처>에서 많은 곳을 다니며 많은 것을 경험
했지만 그럴수록 화자의 <시야는 차츰 좁아>진다.
결국 화자의 <망막에는> 유년의 <램프불 밑에서> 보았던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만> 남게 되고 그것이 <다시>
<세상의 전부>가 된다. 이 작품에서는 <램프불 밑에서>의
유년 시절과 <칸델라불>, <전등불 밑에서>의 소년 시절이
고통과 아픔으로 서술되지 않는다. <칠흑 같은 어둠> 혹은
<주정하는 험상궂은 금전꾼> 등의 표현을 통하여 비천한
삶의 흔적을 엿볼 수 있으나 고통스러운 삶을 현재적인 것으로
노래한 초기시의 흐름과는 달리 여기서의 화자는 현실적
고통에 대하여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다. 회고하고 고백하는
어조와 과거형 서술어의 사용 등은 보다 효과적으로
대상에 대한 거리를 취할 수 있도록 돕는다.
<고향길>에서의 화자는 비록 개인이지만 민중의 삶과
민중의 목소리를 담아내고 있는 개인이라면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에서의 화자는 보다 내면화된 화자이며
내면의 성찰을 통해 고백적인 목소리를 담아내고 있다.
고향길의 화자의 목소리가 외부를 향하고 있다면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의 화자의 목소리는 내면을 향하여 있다.
이는 고향길에서는 떠남이,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에서는
돌아옴이 주된 모티브가 되고 있다는 점과도 맥락을 같이 한다.
신경림의 시적 여정은 <고향길>에서의 떠남과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에서의 돌아옴 사이에 자리한다.
시인은 고향으로부터 떠나와서 다시 고향으로 돌아간다.
이러한 떠남과 돌아옴은 다양한 이미지를 통해 변주된다.
2.
신경림의 시에서 떠남은 때로 없음 혹은 죽음의 이미지와
함께 나온다. 신경림에게 있어서 떠남은 없음과 죽음에 대한
일종의 저항이거나 분노이다. 그의 초기시는 부재하는 것
혹은 죽어가는 것들에 대한 노래를 담고 있다.
이때 없음 혹은 죽음은 정치적이고 현실적인 폭력과 관련된다.
강 하나 건너왔네 손도 몸도 내어주고
갯비린내 벽에 쩌른 엿도가집 행랑방
감나무 빈 가지 된서리에 떨면서
내 여자 몸 무거워 뒤채는 그믐밤
고개를 넘어섰네 뜻도 꿈도 내던지고
협궤차 삐걱대던 면소재지 그 새벽도
못 박힌 손바닥에 팔자로 접어뒀네
내 여자 숨이 차서 돌아눕는 시린 외풍
험한 산길 지나왔네 눈도 귀도 내버리고
엿기름 달이는 건넌방 큰 가마솥
빈내기 화투 소리 늦도록 시끄러운
내 여자 내 걱정에 피말리는 한자정
강 하나 더 건넜네 뜻도 꿈도 내던지고
험한 산길 또 지났네 눈도 귀도 내버리고
- 밤길, 1979
인용한 작품에서 떠남은 <내던지고> <내버리>는 행위를
수반한다. 화자는 <강>을 건너고 <고개>를 넘고 <험한 산길>을
지나면서 <손도 몸도 내어주고> <뜻도 꿈도 내던지고>
<눈도 귀도 내버>린다. 산과 강을 떠도는 뜨네기로서의 삶을
사는 화자는 육체도 마음도 감각도 없이 쫓기듯 살아간다.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는 떠돌이로서 일상의 경험을 박탈당한
화자는 <몸 무거>운 <내 여자>의 <피말리는> 한숨과
걱정을 뒤로한 채 산을 넘고 강을 건넌다.
이 작품에서 떠남은 안식처를 박탈당하는 일과 동일하다.
새로운 시작이나 희망으로서의 떠남이 아니라 삶의 안식할
수 있는 공간의 박탈인 동시에 <손>과 <몸>, <뜻>과 <꿈>,
<눈>과 <귀>의 박탈로서의 떠남이다. 화자는 피폐한 삶의
조건들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떠나는 삶을 강요당한다.
이 떠남은 어두운 <그믐밤>의 <한자정>에 <밤길>을 가는
암담하고 막막한 정황과 관련된다. 화자에게 있어서 떠남은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수없이 반복되는 무엇이다.
그는 반복해서 강을 <하나 더> 건너고 산길을 <또> 지나간다.
그때마다 <뜻>과 <꿈>, <눈>과 <귀>를 <내버리>는 일도
반복된다. 떠남은 <엿도가집 행랑방>의 아내와 <협궤차
삐걱대던 면소재지>와 <엿기름 달이는 건넌방 큰 가마솥>과
<빈내기 화투 소리> 등으로 이루어진 고향 풍경의 박탈과
함께 이루어진다. 일상적인 삶의 조건을 박탈당한 화자에게
있어서 떠남은 없음이요 부재이다. 없음 혹은 부재에 대한
의식은 가난 혹은 죽음의 이미지를 통해 구체화된다.
신경림의 시에서 물질적 조건의 결핍으로서의 가난과 생명의
부재로서의 죽음은 함께 말해진다. <빈 움막>과 <빈 금구덩이>만
남은 <폐광>에서 <친구들의 아버지>는 <낙반으로 깔려죽고>
<젊은이들은 / 하나하나 사라져선 돌아오지 않>으며(- 廢鑛)
<가난한 우리의 / 친구들>은 <미치고 다시 미쳐서 죽>는다.
(- 山邑日誌) 이때 가난과 죽음은 개인의 차원을 넘어선
폭력적인 현실과 관련된다. 신경림의 초기시는 국가와 시대에
대한 좌절과 비애의 정서 속에서 술을 마시며 <묵내기 화투를
치고> <색시 젓갈장단에 유행가를 부르고>(- 겨울밤)
<마작으로 / 밤을 새우>며 <아편을 사>고 <육백>을 치는
가난하고 힘없는 민중들의 삶을 직접적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시대의 어둠과 암울함을 암시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작품을
찾는 일도 그리 어렵지 않다.
젊은 여자가 혼자서
상여 뒤를 따르며 운다
만장도 요령도 없는 장렬
연기가 깔린 저녁길에
도깨비 같은 그림자들
문과 창이 없는 거리
바람은 나뭇잎을 날리고
사람들은 가로수와
전봇대 뒤에 숨어서 본다
아무도 죽은 이의
이름을 모른다 달도
뜨지 않은 어두운 그날
- 그날, 1973
인용한 작품은 없음과 죽음의 이미지를 통해 암울한 풍경을
보여준다. <젊은 여자>가 <상여 뒤를> 따라가는 풍경에는
<만장도 요령도> 없고 <문과 창>도 없으며 <달>도 없다.
<젊은 여자>가 혼자서 상여를 따르고 있고 <사람들은
가로수와 / 전봇대 뒤에> 가려져 있다.
<도깨비 같은 그림자들>만이 있는 수척하고 암울한 풍경이
죽음의 배경으로 그려지지만 <아무도 죽은 이의 / 이름을
모른다>. 없음의 이미지를 통해 죽음은 더욱 참혹하고 비참한
것이 된다. 시인은 <그날>의 분위기를 보여주는 것에 작품의
대부분을 할애하고 있으나 이러한 묘사와 서술이 <그날>을
어떤 구체적인 시간을 지시하도록 하는 것은 아니다.
<그날>에 대한 모호하고 암울한 묘사들은 <그날>이 특정한
날짜가 아닌 <달도 / 뜨지 않는> 어둠의 시대를 지시하게 한다.
<만장도 요령도>, <문도 창도>, 마침내 <이름>마저 없는
죽음의 행렬은 부재와 죽음으로 가득 찬 현실의 또 다른
모습이다.
죽은 아이들이 돌아들 오는구나
비석치기 사방치기 자치기 하면서
늦콩 열린 들길 산길을 메우고
엿장수 가위소리에 어깨춤을 추는구나
어허 넘자 요령소리에 비칠걸음 치는구나
사라졌던 것들이 돌아들 오는구나
가시내들 삼베치마 삼승버선 입고 신고
올곡 선뵈는 장골목을 메우는구나
엿장수 가위소리에 덩더꿍이 뛰면서
휘모리 숨찬 가락 흥이 절로 나는구나
잃어진 것 잊혀진 것들이 돌아들 가는구나
살아 있는 것들 데불고 가는구나
도가집 사랑, 깊은 골방에서
엿장수 가위소리에 넋마저 빼앗겼구나
들판을 고갯길을 선창을 메우면서
가는구나 살아 있는 것들
죽은 아이들 사라진 것을 따라가는구나
- 엿장수 가위소리에 넋마저 빼앗겨
인용한 작품 <엿장수 가위소리에 넋마저 빼앗겨>에 오면
죽음의 이미지가 지니는 비통함과 고통스러움이 다소 완화
되며 죽음은 일정한 리듬감과 음악성 속에서 노래된다.
소박한 가락 속에서 죽음은 흥겨운 것이 된다.
<엿장수 가위소리에 어깨춤을 추>고 <덩더꿍이 뛰면서>
<죽은 아이들이 돌아>오고 <살아 있는 것들>은 <죽은 아이들>,
<사라진 것을 따라>간다. 죽은 이를 위한 <요령소리>는
슬프거나 비참한 소리가 아니라 흥겨운 가락이 되며 죽음의
공간은 <비석치기 사방치기 자치기>등의 놀이와 <어깨춤>과
<휘모리 숨찬 가락>으로 이루어진 공간이 된다. <잃어진 것
잊혀진 것들이> <살아 있는 것을 데불고 가>고 <살아 있는
것들>이 <죽은 아이들 사라진 것>을 따라가면서 삶과 죽음은
하나의 가락 안에서 서로 어우러진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찾아지는 삶과 죽음의 어우러짐에 대하여,
시인이 이전 작품들 속에서 지속해왔던 떠남과 떠남에서
비롯된 부재와 죽음이라는 주제가 어떤 화해에 이르렀다거나
그로써 그의 현실에 대한 태도가 온건한 방향으로 이동했다고
판단하는 것은 성급하다. 시집 <농무>에서 신경림은 가난하고
소외된 민중의 삶에 주목하고 그들의 삶과 그들의 목소리를
시적 울림으로 삼아 민중의 고통스럽고 암울한 삶을 그려내었다.
<농무>이후 <새재>나 <달넘세>로 넘어오면서도 역시 시인은
비참하고 억울한 민중들의 삶에 관심을 두었고 동시에 형식적인
측면에서 민요의 율격을 실험한다. 인용한 작품 <엿장수 가위
소리에 넋마저 빼앗겨> 역시 민요의 율격과 <~구나>의 반복,
병렬적인 통사 구조, 토속적인 어휘 등을 통해서 민요의
세계를 그 안에 수용하고 있다.
신경림의 시에서 민요의 세계를 담고 있는 작품들은 대부분의
민요가 그러하듯 서민들의 애환과 정한을 우회적으로
드러낸다. 달구방아와 관련된 민요를 차용한 작품 <어허 달구>는
<한 세월 장똘뱅이로 살>다가 <흙 속 죽음 되어 누운>, <밟히고
잘리고 짓뭉개>진 <잡초>같은 삶을 노래하며 <가는구나 모두들
가는구나>로 시작하는 <길 2>는 <이승에서 저승 넘어가는
길목>의 <검은 강 검은 숲>을 <흥도 안 나는데 어깨춤을
추면서> 가는 죽음의 길을 형상화하고 있다.
<엿장수 가위소리에 넋마저 빼앗겨> 역시 <길 2>와 유사한
맥락 안에서 읽힌다. 죽음의 이미지는 경쾌한 민요조의 가락
안에서 형상화되지만 그 배경에는 <죽은 아이들>, <사라졌던
것들>, <잃어진 것>, <잊혀진 것>에 대한 한과 설움이 자리한다.
신경림은 작품 안에 민요를 수용하면서, <농무>에서 보여
주었던 현실감각과 민중적 저항성이 지녔던 치열함이 무디어진
대신에 삶을 바라보는 보다 넓은 시선을 확보한다.
<농무>를 비롯한 전기시의 세계에서는 ‘나’ 혹은 ‘너’가 아닌
‘우리’의 목소리를 통해 민중들의 삶의 정황들을 힘있게
드러냈다면 후기시로 넘어갈수록 ‘우리’로부터 분화된 ‘나’와
‘너’의 목소리가 다양한 개인의 삶과 개인의 정서를 통해
변주된다.
3.
‘우리’라는 민중적 공동체의 세계에서 ‘나’ 혹은 ‘너’의
개별적이고 내면적인 세계로 이동하면서 신경림은 한편으로는
스스로의 시적 세계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통해 유연한 사고와
다양한 시각을 수용하고자 하며 한편으로는 시대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통해 우화적인 알레고리로써 시대를 풍자하고자
한다. 시집 <길>은 기행시집이다. 그러나 이 시집에 이르면
떠남은 더 이상 부재나 죽음의 이미지로서 자리하지 않는다.
시인은 이 고장 저 고장을 여행하면서 여행지의 풍경과 감상을
진술한다. 전기시의 화자는 비록 고향에 있다 하더라도
안주할 곳을 찾지 못한 뜨네기였지만 시집 <길>의 화자는
반복되는 떠남과 만남을 통해서 화자 자신을 포함한 개인과
현실에 대해 보다 근본적인 시선을 던지는 화자이다.
<길 잘못 든 나그네되어 떠>나는 떠남으로서의 <고향길>에서
시작하여, 고향을 떠나 <대처>로 나와 <이곳 저곳>을
떠돌고 <많은 것>을 경험하면서 결국 그러한 경험과 체험이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으로 수렴되기까지의 과정은
가난하고 힘없는 떠돌이의 삶을 ‘우리’의 삶으로 체험해내고
그 삶 속으로 들어가는 것으로부터 여행지의 경험을 통해
다양하고 자잘한 ‘너’의 삶을 보여주는 것으로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전기시에서의 떠남이 훼손된 고향 혹은
고향상실에서 비롯된 죽음과 부재에 해당된다면 후기시에서의
떠남은 보다 다양한 삶의 흔적들과의 만남이며 이를 통한
고향으로의 귀환에 해당된다. 시집 <길>의 시적 화자는
분단의 상처(- 끊어진 철길, - 철길 등), 세태의 모습(- 꿈의
나라 코리아, - 산동네, -나무 1 등)을 풍자하는 한편
반성적인 사유를 통해 스스로를 성찰의 대상으로 삼기도
한다.
옛사람의 그림 속으로 / 들어가고 싶은 때가 있다 / 배낭을
맨 채 시적시적 / 걸어들어가고 싶은 때가 있다 / 주막집도
들어가 보고 / 색시들 수놓는 골방문도 열어보고 / 대장간에서
풀무질도 해보고 / 그러다가 아예 나오는 길을 / 잃어버리면
어떨까 / 옛사람의 그림 속에 / 갇혀버리면 어떨까 / 문득
깨달을 때가 있다 / 내가 오늘의 그림 속에 / 갇혀 있다는 것을
/ 나가는 길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 두드려도 발버둥쳐도 /
문도 길도 / 찾을 수 없다는 것을 / 오늘의 그림에서 /
빠져나가고 싶을 때가 있다 / 배낭을 메고 밤차에 앉아 /
지구 밖으로 훌쩍 / 떨어져나가고 싶을 때가 있다
- 그림 1990
화자는 <옛사람의 그림 속으로 / 들어가고 싶은 때가 있다>고
서술한다. <아예 나오는 길을 / 잃어버리면 어떨까> 가정하다가
<문득> 자신이 <오늘의 그림 속에 / 갇혀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화자는 <두드려도 발버둥쳐도 / 문도 길도 찾을 수
없>는 <오늘의 그림 속에> 갇혀 있으며 그러므로 <옛사람의
그림 속으로> 돌아갈 수도 <지구 밖으로 훌쩍 / 떨어져나>갈
수도 없다. <옛사람의 그림 속으로 / 들어가>는 것과
<지구 밖으로 훌쩍 / 떨어져나가>는 것은 모두 <오늘의 그림>에
대한 일정한 태도에 해당한다. 화자는 현실을 떠나 과거로
회귀할 수도 없고 현실 바깥으로 초월할 수도 없다. <오늘의
그림 속에> 갇혀 있는 화자는 아무리 <두드려도 발버둥쳐도>
<오늘>의 시선으로 <오늘>의 풍경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오늘의 그림>은 화자의 삶의 근거가 되는 동시에 그를 가두고
제한하는 무엇이다. <오늘의 그림>은 오늘의 삶을 지탱하게
하고 유지하게 하지만 그것으로 인하여 화자의 시선과 사고는
제한된다. 작품 <고장난 사진기>는 제한되고 미리 규정되어
버린 시선의 문제를 제기한다.
나는 늘 사진기를 들고 다닌다
보이는 것은 모두 찍어
내가 보기를 바라는 것도 찍히고 바라지 않는 것도 찍힌다
현상해보면 늘 바라던 것만이 나와 있어 나는 안심한다
바라지 않던 것이 보인 것은 환시였다고
나는 너무 오랫동안 알지 못했다 내 사진기는
내가 바라는 것만을 찍어주는 고장난 사진기였음을
한동안 당황하고 주저하지만
그래도 그 사진기를 나는 버리지 못하고 들고 다닌다
고장난 사진기여서 오히려 안심하면서
- 고장난 사진기
화자는 <사진기>를 들고 다니면서 <보이는 것은 모두> 찍는다.
<모두> 찍었으므로 화자가 <보기를 바라는 것>과 보기를
<바라지 않는 것>이 함께 찍힌다. 그러나 <현상해보면 늘
바라던 것이 나와 있>다. 그러므로 화자는 <바라지 않던 것이
보인 것은 환시였다고> 스스로를 안심시킬 수 있다.
화자는 <사진기>가 <고장난 사진기>라는 것을 알고 잠시
<당황하고 주저하지만> 그것이 <고장난 사진기여서 오히려
안심하>며 <그 사진기를 버리지 못하고 들고 다닌다>.
<바라는 것만을 찍어주는 고장난 사진기>는 <바라는 것>만을
보고 <바라는 것> 안에서 사고하는 화자의 자신의 시각을
풍자적으로 드러낸다. 시인은 많은 것을 보고 경험하며
<보이는 것을 모두 찍어>두었다고 믿었지만 결국은 <바라는
것>만을 선택하는 인간의 모습을 대상화하여 풍자한다.
이는 시인 자신에 대한 반성이면서 동시에 현실의 틀 속에
안주하여 고정된 사유의 틀을 벗어버리지 못하는 인간의 삶에
대한 씁쓸한 연민과 비판이기도 하다. 자기 자신에 대한 반성과
성찰은 시대의 모습에 대한 반성과 비판으로 이어진다.
<오늘의 그림>에 갇혀 <바라는 것>만을 보는 스스로의 모습에
대한 반성은 높이 오르려고 하고 큰 것만을 바라는 현실에
대한 비판과 맥락을 함께 한다.
마침내 하늘 끝까지 날아오른다
내려다보니 세상은 온통
검은 땅과 푸른 물뿐
그래서 새는 쇳된 소리로 노래한다
세상은 온통 검은 땅뿐이라고
세상은 온통 푸른 물뿐이라고
제가 나서 한때 자라기도 한
더 어두운 골과 깊은 수렁
점점이 핀 고운 꽃들은 보지 못하는
높은 데로만 먼 데로만
날아오르는 우리 시대의 새여
- 우리 시대의 새, 부분 1993
인용한 작품에서 시인은 작고 여린 것들을 보지 못하고
더 높이 더 멀리 오르려고만 하는 새를 통해 우리 시대의 모습을
우화적으로 보여준다. <더 높이 오르고 더 멀리> 날아서
<마침내 하늘 끝까지 날아오>르자 새의 눈에 보이는 것은
<검은 땅과 푸른 물뿐>이다. 그래서 새는 <세상은 온통
검은 땅뿐이라고 / 세상은 온통 푸른 물뿐이라고> <쇳된
소리로 노래한다>. <더 높이> <더 멀리> 날아오른 새는
<제가 나서 한때 자라기도 한 / 더 어두운 골과 깊은 수렁 /
점점이 핀 고운 꽃들>에 대해 망각한다. <높은 데로만 먼 데로만>
날아오르려는 것은 주변의 자잘한 삶의 결들에 대한 망각을
수반하는 것이다. 시인은 작품 <거인의 나라>에서도
<큰 소리로만 말하고 / 큰 소리만> 들으며, <큰 것만>을 보고
바라고 좇는 현대의 시각을 <거인의 나라>에 비유하여
자잘한 삶의 무늬, 삶의 흔적들을 놓치고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을 꼬집는다.
4.
신경림의 전기시에서 떠남은 죽음과 부재의 의식을 수반하며
참혹하고 비참한 현실에 대한 좌절과 비애를 포함한다.
가난하고 헐벗은 민중의 목소리를 ‘나’의 목소리로 삼음으로써
시인은 민중의 삶을 ‘우리’의 삶으로 인식해 내고자 하였다.
일상적 조건들을 잃어버리고 쫓기듯 떠도는 민중들의 삶에
있어 떠남은 박탈이고 가난이며 죽음이다.
민중의 삶을 노래한 전기의 작품들에서는 외부를 향한
실천적 목소리가 주조음을 이루었다면 후기 작품에서는 보다
내면화된 목소리를 통하여 개인과 사회를 반성하고 성찰한다.
이는 현실의 테두리에 갇혀 현실의 편견과 선입관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화자 자신에 대한 반성과 큰 것, 높은 것만을
추구하는 현대 사회에 대한 비판이라는 두 가지의 방향성을
지닌다. 시인은 갇힌 개인에 대한 비판을 통해 현대인의
안일한 모습과 이전의 시적 이념을 반성하며 위선과 허위의
현실을 풍자적 알레고리를 통해 비판하면서 자잘하고
다양한 삶의 흔적들을 포용한다.
/ 박정선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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