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더우드 동상을 밀쳐낸 자리에 대신 들어선 ‘흥아유신기념탑(1942년)’
미나미 총독의 휘호일자를 1941년 12월 8일로 소급하여 표시한 까닭
“섭섭함을 불금(不禁)” [중추원 부의장 이진호(李軫鎬, 창씨명 李家軫鎬)]
“정(情)은 떠날 수 없다” [중추원 고문 한상룡(韓相龍)]
“불후(不朽)의 공적 찬연(功績 燦然)” [연희전문학교 교장 윤치호(尹致昊, 창씨명 伊東致昊)]
“내선일체(內鮮一體)에 큰 공적(功績)” [조선귀족회장 이해승(李海昇) 후작]
“영원(永遠)히 못 잊을 자부(慈父)” [화신 사장 박흥식(朴興植)]
“좀 더 모시고 싶었다” [경성방직 사장 김연수(金秊洙)]
“통치사(統治史)에 획기적(劃期的)” [중추원 참의 이병길(李丙吉) 후작]
여기에 소개하는 내용들은 『매일신보』 1942년 5월 30일자의 지면을 장식한 기사의 소제목(小題目)이다. 제7대 조선총독(재임 1936.8.5~1942.5.29)이던 미나미 지로(南次郞; 1874~1955)가 현직에서 물러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여러 친일인사와 친일귀족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다는 꼴이 그의 치적을 찬양하고 칭송하는 말을 뱉어내는 것이었다.
원래 기병장교(騎兵將校) 출신으로 조선군사령관(1929.8.1~1930.12.22), 육군대신(1931.4.14~1931.12.13), 관동군사령관(1934.12.10~1936.3.6)을 거친 미나미 총독은 ‘전시체제기’와 맞물려 무수한 시국구호와 시정방침을 탄생시켰고 식민지 조선에 대해 내선일체를 앞세운 황민화정책과 병참기지의 역할을 지속적으로 강요했던 인물이었다. 대표적으로 그는 1937년 4월 20일 제2차 도지사회의의 석상에서 국체명징(國體明徵), 선만일여(鮮滿一如), 교학진작(敎學振作), 농공병진(農工倂進), 서정쇄신(庶政刷新)을 시정근본방침으로 내세웠는데, 이것이 흔히 ‘미나미즘(南イズム, Minamism)’으로 일컫는 5대 정강(五大政綱)이다.
여기에 더하여 그는 이른바 ‘지나사변(支那事變, 중일전쟁)’이 개시된 직후 1937년 7월 13일에 총독부 제2회의실에서 열린 재성(在城; 재경성) 신문통신사 대표자 간담회 석상에서는 “내선융화(內鮮融和)는 이미 과거사이며 이제는 내선일체(內鮮一體)를 구현해야 할 시기”라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강변하기도 했다.
…… 동양(東洋)의 안정세력(安定勢力)인 일본(日本)의 실력(實力)으로써 동양인(東洋人)을 위(爲)한 동양인(東洋人)의 동양(東洋)을 만드는 위대(偉大)한 사명(使命)에 향(向)하여 진실(眞實)한 내선일체(內鮮一體)로 용왕매진(勇往邁進)하여야 할 것이다. 내선융화(內鮮融和)는 이미 과거사(過去事)이다. 금일(今日)에는 내선일체(內鮮一體), 차(此) 내선일체(內鮮一體)가 금일(今日)의 동양(東洋)의 중심세력(中心勢力)이 되어야 할 것이며 더욱 내선일체(內鮮一體)의 구현(具現)이 금일(今日)과 같이 긴급(緊急)하고 적절(適切)한 시기(時期)가 다시 없을 줄로 여(余)는 확신(確信)한다.
1938년 3월 4일에 이르러서는 ‘육군특별지원병령’의 공포와 조선교육령(개정)의 시행에 즈음하여 유고(諭告)를 발표하여 ‘황국신민(皇國臣民)’의 본질에 투철하게 하여 ‘일시동인(一視同仁)’의 성지(聖旨)를 받들며 ‘일본정신(日本精神)’의 배양에 노력할 것을 새삼 강조하였다. 그리고 이를 위해 ‘국체명징(國體明徵)’, ‘내선일체(內鮮一體)’, ‘인고단련(忍苦鍛鍊)’의 3대교육방침(三大敎育方針)을 전면에 내세운 것도 이때의 일이었다.
특히 1940년의 정초에는 이른바 ‘기원 2600년’을 맞이하는 신춘성명서(新春聲明書)를 통해 “금년이야말로 흥아유신(興亞維新)의 추(秋; 해)”라는 점을 내세우면서 3대 강령(三大綱領)을 새로이 발표하였는데, 여기에는 “1. 황기 2600년(皇紀二千六百年)과 천업회홍(天業恢弘); 2. 흥아유신(興亞維新)의 달성(達成); 3. 대륙전진 병참기지(大陸前進 兵站基地)인 반도(半島)의 대사명(大使命)” 등이 포함되었다. 이보다 반 년 앞선 1939년 8월 11일에는 내각 고유(內閣 告諭)를 통해 매월 1일을 흥아봉공일(興亞奉公日)로 제정하는가 하면, 여기에다 1940년 봄에는 장충단공원에서 조선신문사 주최의 ‘흥아일본전망대박람회(興亞日本展望大博覽會)’가 성대하게 개최된 사실에서도 확인되듯이 이 시기는 ‘흥아’의 관념이 그 어느 때보다도 강조되고 있던 때였다.
실제로 『동아일보』 1939년 7월 7일자에 수록된 「지나사변 제2주년(支那事變 第二周年)에 제회(際會)하여 미나미 총독 담(南總督談), 흥아유신달성(興亞維新達成)에 유력(有力)한 초석(礎石)을 필기(必期)」 제하의 기사에는 흥아유신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내용이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 세계(世界)는 이제 대변혁(大變革)의 기운(機運)을 잉(孕)한 격류중에 있다. 아구간(亞歐間, 아시아와 유럽 사이) 스스로 인과상련관계(因果相聯關係)를 가지고 지나사변(支那事變)의 상모(相貌)는 더욱 기 복잡(其複雜)한 특징을 명백히 하였다. 차(此) 형세(形勢)에 처하여 아 제국(我帝國)은 항일지나(抗日支那)를 지원하는 제3국(第三國)의 적성(敵性)에 대하여 지금 단호 그 반성자숙(反省自肅)을 촉(促)하여써 사변구극(事變究極)의 목적달성에 일로매진(一路邁進)할 단계에 선 것이다. 사태추이의 최악(最惡)의 경우에 국민적 태세에 다시 일단(一段)의 고고한 각오를 할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아 반도(我半島)에서의 전시태세(戰時事態)를 과거 2년의 과정에 있어 회고(回顧)할 때 형이상하(形而上下)에 긍(亘)한 국민적 부하(國民的 負荷)의 수행에 결(缺)한 바 없이 아등(我等) 감격(感激)으로써 고무되어 왔거니와 이제 안전(眼前)에 전개하는 흥아대유신의 산 역사 위에 점(占)하는 아 반도의 지위와 사명에 감(鑑)할 때 아직도 현상의 정도에 만족(滿足)할 것이 아니오, 다시 더욱 흥기(興起)하여 내선일체(內鮮一體)의 진실경(眞實境)에 도달하고 동방대도의(東方大道義)의 원리를 이곳에 천명입증하여 동양민족(東洋民族)의 단결에 의한 흥아유신 달성에 유력한 초석을 기여하기를 강내(疆內) 2천 3백만 관민제군(官民諸君)과 함께 필기(必期)하는 것이다.
그런데 연세대학교 신촌캠퍼스를 찾아가면 이곳 구내에 남아 있는 흥아유신 시기의 흔적 하나를 확인할 수 있다. 박물관 건물과 인접한 곳에 자리한 ‘연세역사의 뜰’ 구역 안 옛 수경원 정자각(綏慶園 丁字閣) 후면에 배치되어 있는 ‘흥아유신기념탑’이 바로 그것이다. 오벨리스크 형상을 한 이 비석의 전면에는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의 표시가 또렷하고, 후면에는 ‘소화 16년(1941년) 12월 8일’이라고 새겨져 있다.
흥아유신기념탑의 비문 내용
(전면) 興亞維新記念塔/ 朝鮮總督 南次郞書[흥아유신기념탑/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 씀] (후면) 昭和十六年十二月八日[소화 16년(1941년) 12월 8일] |
이와 관련하여 『매일신보』 1942년 4월 25일자에 수록된 「흥아유신기념탑(興亞維新記念塔), 연전교정(延專校庭)에 동상(銅像) 대신 건립(建立)」 제하의 기사는 미나미 총독의 글씨가 새겨진 이 기념물의 건립 경위를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24일 오후 0시 반 네모진 화강석(花岡石)의 뾰족탑 흥아유신기념탑(興亞維新記念塔)이 학원의 기개를 상징하는 듯 교정의 한 가운데 드높게 세워졌다. 신동아의 지도자를 양성하는 반도학원 안에 개인의 공로는 여하간 적국인의 동상을 두어둘 수는 없다 하여 대현정(大峴町)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에서는 지난번 이사회에서 초대 ‘언더우드’ 교장의 동상을 없애기로 하여 동교 27주년 기념일인 이날을 당해서 이토(伊東; 윤치호) 교장 이하 직원과 학생대표자들이 모인 가운데 지난 11년 동안 서 있던 이 동상을 떼어버리고 그 자리에다 일동이 경건한 마음으로 국민의례를 하고 미나미(南) 총독의 휘필이 새겨진 흥아유신기념탑을 세웠다. 탑을 둘러싼 면면에는 개인공로자에 대한 섭섭한 정보다는 새 역사 창조의 웅대한 구상을 그리는 생각이 흥아탑의 뾰족한 끝을 우러러 보는 여러 눈과 눈에 샛별같이 빛나고 있었다. (사진은 연전의 흥아유신탑)
여길 보면 원래 미국인 선교사이자 연희전문학교 초대 교장(재임 1915.4~1916.10)이던 호레이스 G.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元杜尤, 1859~1916)의 동상이 있던 자리를 그대로 활용하여 ‘흥아유신기념탑’이 들어선 사실이 기술되어 있다. 그런데 이 기념탑의 건립은 이 기사가 말해주듯이 창립기념일(매년 4월 넷째 금요일)인 1942년 4월 24일에 이뤄졌는데, 정작 비석의 뒷면에는 날짜를 소급하여 ‘소화 16년(1941년) 12월 8일’이라고 새겨놓은 표시가 남아 있다. 이것은 도대체 무슨 까닭일까?
알고 보면 이날은 바로 진주만 공격 및 말레이 침공과 더불어 태평양전쟁의 개전을 알리는 대미대영 선전포고(對米對英 宣戰布告)의 조서(詔書)가 내려진 바로 그날이었던 것이다. 이와 함께 1941년 12월 12일에는 각의(閣議)의 결정에 따라 기존의 ‘지나사변(支那事變, 중일전쟁)’과 이번의 새로운 전쟁을 아울러 이른바 ‘대동아전쟁(大東亞戰爭)’이라는 명칭을 붙이기로 하였고, 곧이어 해를 바꿔 1942년 1월 2일에 이르러서는 ‘대조봉대일(大詔奉戴日, 매월 8일)’이 새로 제정되기도 했다. 따라서 이런 맥락에서 보면 구태여 날짜를 소급하여 표시한 것은 “전쟁결의를 새로 다진다는 의지를 드러내려는 취지”가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이 대목에서 언더우드 동상이 해체되어 소멸된 연유에 대해 잠깐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에 관해서는 우선 『매일신보』 1942년 1월 30일자에 수록된 「학원(學園)의 미영색 격멸(米英色 擊滅), 세브란쓰의전(醫專) 교명변경(校名變更), 연전(延專)의 미인동상제거(米人銅像除去)」 제하의 기사가 눈에 띈다.
총후에 남아 있는 미영(米英)의 색채를 깨끗이 씻어버리고 있는 이때 미, 영의 재정적 원조를 많이 받아왔던 ‘미션’ 계통의 두 전문학교에서 미영색을 일소해버린 낭화!
그 하나는 사립의학전문학교로서 하나밖에 없는 ‘세브란쓰’의전(世醫專)에서는 이번에 단연 학교 명칭을 갈기로 되었다. 동 의전에서는 지난 12월 동교 이사회에서 오긍선(吳兢善) 교장을 비롯하여 이사 제씨들이 협의한 결과 ‘세브란쓰’라는 명칭을 욱의학전문학교(旭醫專)로 고치기로 결정하고 방금 학무당국에 인가신청 중에 있다. 동 의전은 지금으로부터 40년 전 제중원(濟衆院)이란 이름의 병원이었었는데 30년 전부터 ‘세브란쓰’란 명칭을 붙이어 조선초의 최초 의학전문으로서의 기구를 갖추었던 것이다. ‘세브란쓰’란 미국사람의 이름인데 그는 창립 초부터 전 교장 ‘에비슨(魚丕信)’ 박사의 권고에 의하여 다액의 자금을 보내어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동교에 많은 공로와 원조를 주었다. 그는 대정 원년(大正 元年, 1912년)에 작고하였으나 그 뒤에도 여전히 그 아들이 계속적으로 동교를 위하여 자산동결령(資産凍結令)이 있기 전까지 일조를 하여왔다. 그러나 동교에서는 국민교육기관으로써 미국사람의 이름을 본뜬 교명은 도저히 국민적 양심이 허락지 않으므로 글자 그대로 빛나는 욱(旭, 아사히)의전으로 고치기로 된 것이다.
이에 대하여 동교 이영준(李榮俊) 부교장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직 정식의 허가는 없으나 신청중인 것은 사실입니다. ‘세부란쓰’란 분은 이 학교기금의 태반을 기부한 분으로 기왕에 공헌이 많았던 것만은 사실이며 인간적으로 이 학교로서는 영원히 기념할 만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미영격멸의 오늘에 있어서, 더욱이 황민교육을 맡은 우리로서는 도저히 이러한 비시국적인 이름을 둘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모름지기 새 이름이 말하는 대로 반도에 빛나는 학교로써 힘을 다하려 합니다.”
또 하나는 부내 신촌정(新村町)에 있는 연희전문학교(延專)에서는 과거 15년 동안 교정에 세워두었던 동교 초대 교장 ‘에취, 지, 언더우드(元斗尤)’ 박사의 동상(銅像)을 없애고 미국색을 학원 안에서 몰아내기로 되었는데 이 동상 대신에는 이 자리에다는 큰 돌로다 대동아공영권의 지도를 새여 길이길이 격멸미영을 기념하기로 되었다.
이에 따르면 적성국가(敵性國家)의 원조와 연결된 ‘미션스쿨(mission school)’의 흔적을 일소하는 차원에서 영어식 교명(校名)을 변경하고, 여기에다 서양인과 관련한 기념조형물도 함께 철거하기로 한 것이 언더우드 동상의 제거로 연결되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그리고 이 기사에는 언더우드 동상을 치운 자리에 ‘대동아공영권 지도’를 새긴 조형물을 세워 미영격멸(米英擊滅)의 기념으로 삼기로 했다는 소식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 계획은 이내 무산되고 그 대신에 그 자리에 미나미 총독의 글씨를 새긴 ‘흥아유신기념탑’을 세우는 것으로 변경되었는데, 이에 관한 내막은 『매일신보』 1942년 4월 12일자에 수록된 「총독휘호(總督揮毫)의 흥아유신기념탑(興亞維新記念塔) 연전(延專) 언더우드 교장(校長) 동상(銅像) 자리에 건립(建立)」 제하의 기사에 다음과 같이 정리되어 있다.
아세아인을 위한 아세아건설을 교육의 지표로 삼는 반도학원에 적성국인의 동상을 남겨둠은 부당하다고 지난번 부내 신촌정(新村町) 연희전문학교(延專)에서는 교정에 있던 초대 교장 미국사람 언더우드의 동상을 제쳐버리고 그 대신 동아공영권 지도를 새긴 비석을 세우기로 되었었는데 이번 이것을 고치어 더 적극성을 띄인 그 이름도 ‘흥아유신기념탑(興亞維新記念塔)’이라는 드높은 돌탑을 전의 동상 자리에 세우기로 되었다. 이번 세우는 화강암(花岡岩) 기념탑은 높이가 15척이나 되는 것으로 특히 미나미(南) 총독이 여기에 ‘흥아유신기념탑’이라고 건필을 휘둘러 이 학원의 감격을 더욱 높여주기로 되었다. 탑은 석공(石工)의 손으로 벌써 전부 만들어져 총독의 글씨를 받는 대로 바로 세워져 청년학생들의 가슴에 흥아건설전에 분전할 맹서를 굳게 새겨줄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언더우드 동상의 좌대 위에 올라 선 ‘흥아유신기념탑’은 일제의 패망과 더불어 불과 3년 남짓에 그 용도가 완전히 폐기되는 수순을 거치게 된다. 그러다가 1948년 가을에 일제의 손에 의해 사라졌던 언더우드 동상이 복구된 것도 잠시, 다시 한국전쟁의 와중에 파괴되는 바람에 1955년 봄에 재차 건립한 것이 지금 연세대학교 언더우드관 앞 정원에 서 있는 바로 그 동상이다.
[*] 이 글은 『민족사랑』 2024년 12월호에 게재하였던 것을 수정 보완하였다.
각주 01) 이것의 출처는 『매일신보』 1942년 5월 30일자에 수록된 「섭섭하여라 미나미 총독(南總督), 7년 동안 우리들의 자부(慈父), 반도인 황민화(半島人 皇民化)에 큰 치적(治積), 인정총독(人情總督)을 찬양(讚揚), 각계인사(各界人士)의 석별(惜別)의 담(談)」 제하의 기사이다.
각주 02) 1937년 7월 7일에 발발한 노구교사건(蘆溝橋事件; 루거우차오)을 일컬어 처음에는 ‘북지사변(北支事變)’이라고 하였으나 1937년 9월 2일 각의 결정으로 이 명칭은 이내 ‘지나사변(支那事變)’으로 변경되었다.
각주 03) 이 내용은 『매일신보』 1937년 7월 15일자에 수록된 「중대(重大)한 시국(時局)에 처(處)할 반도관민(半島官民)의 각오(覺悟), 미나미 총독(南總督) 신문대표(新聞代表)에 피력(披瀝)」 제하의 기사에서 가져왔다.
각주 04) 여기에 나오는 ‘흥아봉공일(1939년 9월 1일부터 시행)’은 이른바 대동아전쟁(大東亞戰爭, 태평양전쟁)의 개시와 함께 1942년 1월 2일에 이르러 ‘대조봉대일(大詔奉戴日, 매월 8일)’이 새로 제정되면서 폐지되었다.
각주 05) 수경원(綏慶園; 옛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신촌리 151번지 일대)은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1899년에 ‘장종’으로 추숭하였다가 1901년에 다시 ‘장조의황제’로 추존)의 생모였던 영빈 이씨(暎嬪 李氏, 1696~1764)의 묘역이다. 처음에는 ‘의열묘(義烈墓)’라 하였으나 정조 12년(1788년)에 ‘선희묘(宣禧墓)’로 고쳤고, 다시 광무 3년(1899년)에 사도세자가 ‘장종’으로 추존된 것과 관련하여 ‘수경원(綏慶園)’으로 봉원(封園)되는 과정을 거쳤다. 해방 이후 1970년에 이르러 문화재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그해 9월 8일 서오릉(西五陵) 쪽으로 천장(遷葬)되었다. 원래는 연세대학교와 수경원은 별개의 구역이었으나 학교 측에서 이곳을 매입하였고, 봉분이 있던 자리에는 지난 1974년에 이 학교의 교회 건물인 루스 채플(Luce Chapel)이 들어서게 되었다.
각주 06) 실제로 ‘대조봉대일’ 설정과 관련한 내각 고유(內閣 告諭)의 내용에는 “실(實)로 8일(八日)이야말로 황국(皇國)에 생(生)을 향(享)할 자(者)는 다 같이 영원(永遠)히 망각(忘却)할 수 없는 날이다. 신질서건설(新秩序建設)의 대사명(大使命)을 부하(負荷)한 기념(記念)할 날이다.”라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 눈에 띈다.
각주 07) 참고로 연희전문학교는 1944년 5월 10일에 ‘경성공업경영전문학교(조선총독부 고시 제785호)’로 전환인가 되었고, 이때 보성전문학교의 경우에도 함께 ‘경성척식경제전문학교(조선총독부 고시 제784호)’로 바뀌었다.
각주 08) 언더우드 동상의 좌대 후면에 부착된 동판에는 그간 3차에 걸친 동상 건립 연혁이 정리되어 있는데, 그 내용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이 연희학원 창설 은인의 동상은 당시 이 학원의 한인 직원으로 조직된 우애회 발기와 일반사회의 협동으로 1928년 4월 24일에 세웠더니, 왜정 말기에 그네의 손에 빼앗기었고 해방 후 동문 및 사회유지 일동의 손으로 1948년 10월 16일에 두 번째 세웠더니, 6.25사변으로 공산군의 손에 또 파괴되었다. 이에 동문 유지 일동은 힘을 모아 이를 세 번째 세우노니 이제부터 영구한 평안이 있을 지어다. 1955년 4월 22일. 연희 동문 유지 일동.”
01 『매일신보』 1937년 5월 5일자에는 다음 년도 예산편성과 관련하여 이른바 ‘미나미즘(南イズム)’이라 일컫는 ‘국체명징’, ‘선만일여’, ‘교학진작’, ‘농공병진’, ‘서정쇄신’ 등 5대 정강을 구현할 수 있는 각종사업을 강화할 것이라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02 『매일신보』 1939년 12월 15일자에는 미나미 총독이 신춘성명을 통해 그간의 ‘시정5대정강’을 바탕으로 다시 ‘3대 강령’을 설정하여 이른바 ‘황기 2600년’과 ‘흥아유신’의 수행에 집중할 것이라는 사실을 공표한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03 미나미 총독이 1940년 정초에 휘호한 ‘흥아유신(興亞維新)’ 글씨이다. 그는 신년시필(新年試筆)로 ‘선만일여(鮮滿一如, 1937년)’, ‘내선일체(內鮮一體, 1938년)’, ‘동아건설(東亞建設, 1939년)’, ‘흥아유신(興亞維新, 1940년)’, ‘세계유신(世界維新, 1941년)’, ‘대승지춘(大勝之春, 1942년)’ 등의 구절을 즐겨 썼다. (조선총독부, 『시정삼십년사(施政三十年史), 1940)
04 『조선신문』 1940년 4월 18일자에 게재된 ‘흥아일본전망대박람회’의 광고문안이다. 조선신문사 주최로 열린 이 박람회는 ‘기원 2600년’을 기념하고 4년간 ‘지나사변’의 전개와 중화민국 남경국민정부[통칭 ‘왕정위 정권(汪精衛政權, 왕징웨이 정권)]의 성립을 포함한 동아 신질서 건설을 꾀하는 내용을 담아 40여 일간에 걸쳐 장충단공원에서 거행되었다.
05 연세대학교 구내 옛 수경원 정자각 후면에 남아있는 ‘흥아유신기념탑(1942.4.24일 제막)’의 잔석이다. 앞쪽의 글씨는 미나미 지로 조선총독이 썼고, 뒤쪽에는 태평양전쟁 선전포고일을 나타내는 ‘소화 16년(1941년) 12월 8일’의 표시가 새겨져 있다.
06 적성국가의 흔적이라고 하여 언더우드 동상이 제거되고 그 자리에 ‘흥아유신기념탑’이 대신 들어선 사실을 알리고 있는 『매일신보』 1942년 4월 25일자의 보도내용이다.
07 연세대학교 구내 언더우드관 앞 정원에 서 있는 언더우드 동상의 현재 모습이다. 이 동상은 원래 1928년에 최초 건립되었다가 1942년에 일제에 의해 철거되었고, 다시 해방 이후 1948년에 재건되었으나 한국전쟁 시기에 파괴되는 바람에 1955년에 재차 복구되는 과정을 거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