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건의 고려 건국과 후삼국 통일
918년 궁예를 제거하고 왕위에 오른 왕건은 고려를 개창했다. 그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 여러 장군들의 지지와 더불어 출중한 그의 실력 때문이었다. 왕건은 궁예의 부장으로 활동하면서 나주, 진도를 획득하여 후백제의 대외교섭로를 차단하는 등 후백제와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다.
왕건은 궁예나 견훤과는 달리 송악 출신의 호족이었다. 그의 선대에 관한 기록은 주로 바다와 연관된 것들이 많다. 특히 해상무역을 통해 부를 획득한 왕건의 부친 왕륭은 궁예에게 의탁하여 후고구려의 수도를 송악으로 유치하기도 했다. 때문에 왕건이 고려를 건국한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수도를 철원에서 송악으로 옮긴 것이었다.
왕건은 강력한 호족을 기반으로 고려를 세웠다. 그는 자신과 같은 반독립적인 호족세력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지 못한다면 커다란 화가 될 것이라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패강진 출신을 비롯한 많은 호족들은 왕건에게 호의적이었지만, 마선장군 환선길, 이흔암 등은 모반을 도모하기도 했다. 때문에 왕건은 힘센 호족들과 혼인관계를 맺으며 권력을 공고히 했다.
왕건은 궁예와 달리 신라에 대해 우호적인 정책을 펼치고 후백제와는 전쟁을 택했다. 또한 발해의 유민들을 동족의 예로 받아들여 이들을 후삼국통일에 활용하였다. 이후 후백제에 시달리던 신라가 935년 고려에 자진 항복하자 왕건은 전쟁 없이 신라를 통합하게 되었다. 그 해에 후백제에서는 내분이 일어나 견훤이 투항해왔으며, 왕건은 견훤을 앞세워 후백제를 정벌했다. 936년 왕건은 마침내 후삼국통일을 이루게 되었다.
고려의 통일은 정권의 통합뿐만 아니라 신라의 폐쇄적인 골품제를 타파하고, 새로운 지배층이 편성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호족을 제압하지 않고서는 안정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안 왕건은 호족들에게는 요직을, 중소 호족에게는 향촌 사회의 지배권을 일부 인정해주었다. 대신 지방 향리의 자제를 수도에 볼모로 두는 기인제도와 여러 공신에게 지방 통치에 책임을 묻는 사심관 제도를 실시해 호족을 견제했다. 그렇지만 호족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한편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해 왕건은 호족들의 과다한 세금 징수를 규제하였고, 춘궁기에 곡식을 주고 추수기에 갚게 하는 흑창을 설치하기도 했다.
왕건의 고려 건국과 후삼국 통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