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의 대두
Adolf Hitler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는 오스트리아 하급관리의 네 번째 자녀로 태어났다. 젊은 시절을 오스트리아 북부 린츠에서 보냈고, 중·고등학교 시절은 별다른 특징이 없는 학생이었다. 그는 1907년 빈 예술학교에 입학신청을 했으나 거절당했다. 이후 그저 그림을 그리는 젊은이로 빈에서 지냈다. 모친과 친척이 남겨준 유산 덕택에 히틀러는 이 시기를 빈궁하게 보내지 않았다.
1908년 히틀러는 빈 예술학교에 다시 도전했으나 또다시 실패해 인생의 좌절을 맛보았다. 그림엽서를 그리며 생활을 이어 나갔는데 이 좌절의 기간에 책을 많이 읽었다. 역사, 군사, 예술분야의 책을 읽고, 바그너의 오페라도 자주 감상했다. 건축가의 꿈을 꾸기도 했으나 히틀러가 가장 관심을 가진 것은 인종학에 관한 것이었다.
히틀러는 금발, 푸른 눈의 아리안족이 영웅의 인종이며, 이 인종은 더럽고 불결한 열등인종과 섞여져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특히 유대인과의 혼혈은 아리안족의 비극일 뿐만 아니라 인류의 비극이라고까지 생각했다.
이즈음 범게르만주의자인 쇠네러(Georg von Schonerer)를 알게 되었다. 쇠네러는 히틀러에게 유대인이 나쁜 민족인 이유는 이들이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악한 종교(유대교를 가리킴)를 포기하지 않고 신봉하며, 천성적으로 사악한 인종적 특질을 지녔다고 가르쳤다.
또한 당시 빈의 시장이었던 카를 뤼거는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빈 시민에게 반유대주의를 교묘히 선전했는데 히틀러는 이러한 뤼거의 주장에 열광적으로 동조했다.
빈에서 생활하는 동안 히틀러는 그를 무시하던 기존 사회 체제를 증오했고, 열등감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바로 이때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히틀러는 참전했다. 그의 따분한 일상생활에서 벗어나게 도와준 준 전쟁을 감사하게 여겼고, 자진해 독일군에 입대해 용감히 싸웠다. 그는 독일의 무공훈장인 '철십자훈장'을 두 번이나 받았다. 전쟁을 경험하며 히틀러는 규율, 조직생활, 지도력, 권위, 투쟁, 잔혹함을 익혔다. 이러한 것들은 후일 그의 정치생활의 기본 원칙으로 활용되었다.
히틀러는 독일이 전쟁에 패배하고 혁명이 일어난 데 충격을 받았다. 이 사건은 인종적 민주주의라는 그의 편견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많은 귀환 병사들처럼 그도 '도둑맞은 승리'를 주장했고, 독일의 패배는 혁명을 주도한 공산주의자들과 악한 종교를 믿는 유대인의 음모 때문이라고 외쳤다. 그는 공화국의 참여자들이야말로 전쟁 범죄자라고 공공연히 주장했다.
1919년 히틀러는 독일 노동자당에 가입했다. 이 당은 전후에 생겨난 민족주의적·군국주의적 성격의 군소 정당 가운데 하나였다. 히틀러는 뛰어난 웅변술, 열정, 조직력을 발휘해 당의 지도자로 부각되었고, 당의 명칭을 국가 사회주의 노동당(NAZI)으로 바꾸었다.
히틀러
히틀러
ⓒ 청아출판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세계대전 이후 불안한 정세 속에서 히틀러는 대중선동과 조직력을 강화해 나치당을 주목받는 위치로 올려놓았다. 이때 나치당은 70여 개의 비슷한 정당 중의 하나였으나 히틀러의 지도력 덕분에 급격히 발전했다. 결국 나치당이라는 공당(公黨)의 성격보다 히틀러의 당이라는 성격이 도드라지게 된다.
무솔리니처럼 히틀러도 대중에게 강력한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활용했다. 군복, 깃발, 휘장을 사용해 나치당원을 보통사람과 외모부터 구별시켰고, 대중 집회에 나서서 연설로 청중을 매료하는 놀라운 흡인력을 발휘했다. 꽉 쥔 두 주먹, 몸을 떨며 요란한 자세로 토해내는 열정적인 그의 연설은 확신으로 가득했다.
그는 베르사유 조약을 거부하자고 외쳤고, 청중들에게 동의를 구하며 분위기를 달궜다. 격앙된 연설장에서 청중은 압도당하고 이성의 냉철함은 자연스레 포기했다.
히틀러의 대중연설은 언제나 열광적인 성공을 거두었고 덩달아 나치당의 세력도 커졌다.
히틀러와 나치당
히틀러와 나치당
ⓒ 청아출판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1923년 11월 히틀러는 바이마르 공화국을 전복하기 위한 예비단계로 바이에른 주의 정권 탈취를 시도했다. '뮌헨 폭동', 또는 '맥주홀 폭동'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에서는 나치당이 열세를 드러내며 실패하였고, 히틀러는 체포되었다.
그러나 히틀러는 폭동주동자로서 재판받으며 그의 소신을 마음껏 펼쳤고, 그로 인해 오히려 명성을 얻었다. 그는 피고인이었으나 죄책감 대신에 베르사유 조약의 부당함과 유대인의 음모를 소리 높이 외쳤다. 그의 정치적 입장은 우익계열의 주목을 받았다. 재판관조차 실정법의 위반자로서 히틀러를 5년형에 선고했으나 곧 집행유예로 풀어주겠다고 은밀히 약속했다. 감옥 안에서 히틀러는 후한 대접을 받으며 그의 정치적 입장을 밝히는 저술을 했다. 그것이 바로 유명한 《나의 투쟁(Mein Kamphf)》이라는 책이다.
무력혁명에 실패한 히틀러는 정권 획득의 수단으로써 의회 민주주의를 이용하기로 작전을 바꾸었다. 무력 방법은 가능성이 희박한 대신 선거에서 다수 의석을 얻는 것은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나치당의 선전 전문가 괴벨스는 훗날 이때를 회고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노골적으로, 정권을 잡기 위해서만 민주적 방법을 쓴다. 그리고 일단 정권을 잡으면, 우리가 야당일 때 우리가 허락받은 모든 비판을 새로이 야당이 된 세력에게는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이 같은 나치당의 입장은 명백히 독재 정치를 지향한 것이었으나 그들의 세력은 약화되기는커녕 오히려 증대되어 가기만 했다. 독일인들은 의회 민주주의를 원치 않았던 것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