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이 유배생활을 하던 청령포,
3면이 강으로 둘러싸이고 뒷편은높은 산으로 막혀 있다.
청령포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거룻배를 타야 하는데, 지금은 한겨울 추위로 강이 꽁꽁 얼어 있다.
세상은 온통 눈으로 덮혀있다.
날씨가 어찌나 추운지 표정으ㅔ 나타나 있다.
청령포로 건너가니 수백년 된 소나무 숲 사이로 두채의 집이 쓸쓸히 모습을 드러낸다.
단종어가를 짓게된 내용을 일거보고 있다.
청령포 수림지
청령포에는 단종의 유배처를 중심으로 수십년에서 수백년 된 소나무 숲으로 이루어져 있다.
두채의 집 중에서 기와집은 단종이 머물던집, 초가집은 시종들이 살던 집이다.
궁녀및 관노들이 머물던 행랑채
단종어소 - 단종이 유배생활을 하며 머물던 집
단종어소는 승정원 기록에 따라 기와집으로 당시의 모습을 재현하였다.
단종이 머물던 집
담장 밖에 있는 소나무 한그루가 멋진 자태를 뽐내며 담장 안으로 들어와 있다.
단종어가 안뜰에 있는 '단묘재본부시유지(端廟在本府時遺址) '
1763년에 세운 것으로 162cm 높이의 돌로 만들어졌는데, 앞면에는
단묘재본부시유지(端廟在本府時遺址)-'단종이 이곳에 계실 때의 옛터'라는 글이
영조대왕의 친필로 새겨져 있다.
청색 옷을 입고 있는 단종과 단종을 뵈러 온 사람이 인사드리는 모습
건너편에 보이는 여인은 단종을 시중들던 시비
단종의 침실 바로 옆에 시비의 방이 있다.
관음송(觀音松 )
이 소나무는 높이 30m로 두 가지로 갈라졌는데, 갈라진 나무 둘레는 각각 3.3m와 2.95m이다.
단종이 유배생활을 할 때 갈라진 나무사이에 앉아 쉬었다는 이야기로 볼때 600년 정도로 추정한다.
이 나무가 당시 단종의 비참한 모습을 보았다 하여 볼 관(觀), 때로는 오열하는 소리를 들었다 하여
소리음(音)자를 써 관음송이라 한다.
청령포 일대를 둘러볼 수 있도록 산책로가 만들어져 있다.
망향탑
청령포 뒷산 육육봉과 노산대 사이 층암절벽 위에 있는 탑으로 단종이 유배생활을 할 때
한양에 두고 온 왕비 송씨를 생각하며 여기 저기에서 돌을 주워 쌓아 올렸다는 탑으로
단종이 남긴 유일한 유적이다.
청령포의 삼면은 이렇게 절벽이나 강으로 둘러쌓여 있다.
노산대(魯山臺) - 단종이 상왕에서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청령포로 유배된 후 해질 물렵이면
한양을 바라보며 시름에 잠겼던 곳으로 노산대라 부른다.
금표비(禁標碑)
단종이 유배되어 있었던 이곳에 일반 백성들의 출입과 행동을 제한하기 위하여 영조가 세운 비석.
뒷면에 동서로 300尺, 남북으로 490尺 이내로는 금지한다는 내용인데, 당시 단종에게도 같은 제약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청령포를 보고 나서 이제는 단종이 잠들어 있는 ‘장릉’으로 떠납니다.
첫댓글 오랜 친구끼리... 좋은 추억을... 좋은 얘기 나누며... 술이 달콤했겠다. 샘난다....
부럽다. 맘대로 시간을 내어 저렇게 갔다 올 수 있는 능력!!!!!! 얼마나 시원했겠냐? 게다가 따끈한 정종에 매운탕?
강릉에서 1박했는데, 상천이가 추천한 식당에서 가자미 정식으로 식사를 하면서 각1병씩 했는데, 몸을 녹여주는 소주맛, 영선이는 그 맛이 어떤지 잘 알꺼야.
보통추위가 아니던데 ....따끈한 아랫목을 차고 나서는 선각자의 후예들이라..청령포에 어려있는 단종... 어린 힘없는 임금의 혼을 어루만져드리고 온듯한 느낌이다. 용환이의 소개하는 첫 마디가 멋지다...사진에서 보며 느끼는 그림들이 산수화가 아니라 실제 사진인가 싶을 정도인데 그 추위에 구도까지..삭풍이 어떨때는 에밀레 종 소리 여운 같기도 하겠다 싶어지네...
이 추위에 산행을 나서는 기상과 체력이 정말 부러우며... 모두들 굳건한 고구려인의 후예 답다.
야!~ 소리도 없이 다녀오다니!~? 나도 눈 나리는 한겨울에도 한번 가고 싶었는데....혹한을 뚫고 보성의 건아들 씩씩하다.!~
여담 하나:[청령포의 단장곡] 의금부도사 왕방연이 단종을 모시고 한 여름 땡볕에 청령포 유배길에 오랐다.
목이 탄 상왕이 물한 모금 마실 것을 청했으나 물을 올릴 수가 없엇다... 세조의 엄명이였다...
//왕방연은 돌아오는 길에 시조 한 수를 지었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
한양으로 돌아온 왕방연은 벼슬을 버리고 봉화산아래 중량천변에 배나무를 심고 묵객으로 생을 마감했다.
희인이도 바로 이 왕방연의 시를 몇번 읊었지.
그래서 장릉에는 왕방연을 기리는 사당도 지어 놓았지.
배나무를 심은 사연은 이러 했다...
단종이 승하한 날이면 자신이 농사지은 배를 바구니에 가득 담아 영월을 향해 놓고 고두배(叩頭拜)하며 생을 마감했다.
그런데 배맛이 유난히 단데다 물이 많고 시원했답니다.
이후 이 일대 태릉지역에서 생산되는 배를 여러분이 잘 아시는 먹골배라 부르게되었다.
7호선 태릉밑에 먹골역이 있어요...태릉 배밭 안 가본 사람 없지요?ㅎㅎㅎ
이상 김우곤의 사족이였습니다.
역시 우곤이의 해설이 꼭 필요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