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드폰 약정기간이 끝나가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정말 궁금하다!) 여기저기서 연락이 온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분들이 어쩜 그리 나의 이동통신 생활을 염려해주는지, 이러쿵저러쿵해도 아직은 살 만한 세상이지 싶다. 그럼에도 그분들 제안을 매번 정중히 사양한다. 상대방은 두어 번 더 권하다가 못내 아쉬운 듯 전화를 끊는다. 그런데 하루는 꽤 끈질긴 분과 통화를 나눴다. 이렇게 좋은 기회를 알아보지 못하는 쇤네의 아둔함이 안타까웠는지, 도대체 왜 핸드폰을 바꾸지 않느냐며 이유를 말해보란다. 결국 나는 그분께 마음 속 깊은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핸드폰을 만들 때 콜탄이라는 광물이 쓰이는데요. 콜탄이 매장되어 있는 곳이 아프리카의 고릴라 서식지래요. 그러니까 핸드폰을 새로 만들 때마다 고릴라 서식지가 파괴되는 거예요. 정말이어요. 믿어주셔요. 《고릴라는 핸드폰을 싫어해》라는 책도 있는걸요. 그래서 핸드폰이 망가져 도저히 사용할 수 없기 전에는 바꿀 생각이 없습니다.”
그분은 곧장 알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아마 명단에 이렇게 메모하지 않았을까?
‘고릴라에 미친놈이니 앞으로 전화하지 말 것!’
내가 고릴라 때문에 핸드폰 바꾸지 않는다고 하면 사람들은 뻥치지 말라고 한다(나 ‘윤리’운동 하는 사람인데…). 그런다고 뭐가 바뀌냐고 나무라기도 한다(내가 콜탄이랑 고릴라 서식지 이야기할 때 어디 갔었나?). 만약 내가 ‘콜탄 불법채취 반대 및 아프리카 고릴라 서식지 지키기 국제운동연대’ 상임대표로서 핸드폰바꾸지않기운동을 펼쳤다면 어땠을까? 젊은 친구가 훌륭한 일을 한다고 칭찬 받고, ‘아시아의 젊은 리더 30인’에 선정되고, 시간이 흘러 마침내 ‘고릴라들의 아버지’로 칭송받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냥 ‘다시는 전화하지 말아야 될 놈’이다.
하찮은 일과 하찮게 여겨질 일
‘하찮다’라는 말은 ‘그다지 훌륭하지 않다, 대수롭지 않다’는 뜻이다. 오래된 핸드폰을 교체하지 않는 것은 그다지 훌륭한 일은 아니니 하찮은 일이 맞다. 그러나 하찮은 것과 하찮게 여겨지는 것은 미묘한 차이가 있다. 핸드폰을 교체하지 않고 주구장창 쓰는 일은 하찮은 일이지만 그렇다고 하찮게 여겨질 일은 아닌 것이다.
세상은 하찮은 일을 그냥 하찮게만 여긴다. 하지만 성서를 통해 펼쳐지는 하나님 나라에서는 하찮은 것들에 대해 사뭇 다른 평가를 내린다. 세상은 많이 배우고 똑똑한 사람들을 거액 주고 모셔가지만, 하나님 나라는 어리석은 사람들을 선택한다. 세상은 강하고 힘 있는 사람들에게 굽신거리지만, 하나님 나라는 약한 사람에게 잘 보이려 한다. 세상은 S전자 주식이 최고라는데, 하나님 나라는 과부의 동전 두 닢이면 된다고 한다. 전화를 받을 때 “여보세요” 대신 “○○동” 하며 동네이름을 대는 사람들이 사는 큰 집을 짓다가 버린 돌이 하나님 나라에서는 머릿돌이 된다. 요컨대 하나님 나라에서는 이 세상에서 훌륭하다고 생각되는 것이 거부되고, 이 세상에서 하찮게 여겨지는 것들이 전면에 등장한다.
이 땅에 발붙이고 사는 나로서는 이것을 이해할 능력이 솔직히 떨어진다. 그럼에도 성서의 일관된 진술은, 그리스도인들이 고대해마지않는 하나님 나라가 하찮은 것들의 집합일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갖게 한다. 그렇다면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가 이뤄지길 바라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바로 지금 여기에서 크고 훌륭하고 대단한 것으로부터 하찮은 것으로의 대전환이 필요하다.
편리에서 불편으로
MBC 예능 <무한도전> 팬들 사이에서 지금도 레전드급으로 회자되는 ‘나비효과’ 편은 우리가 편리를 추구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세상을 파멸시킬 수 있음을 명쾌하게 보여준다. 멤버들은 둘로 나뉘어 각각 몰디브 리조트와 북극 얼음호텔에 가게 된다. 여권까지 걷어가길래 혹시나 했지만 도착한 곳은 역시나 모처에 마련된 세트장이었다. 1층을 몰디브 리조트, 2층을 북극 얼음호텔로 꾸민 제작진의 꿍꿍이는 1층 몰디브 리조트에서 더위를 피하기 위해 에어컨을 틀자 밝혀진다. 2층 북극 얼음호텔에 설치되었던 에어컨 실외기가 돌아가면서 내뿜는 뜨거운 바람이 얼음을 녹였고, 녹은 물은 곧장 파이프를 통해 1층 몰디브 리조트로 밀려든다. 멤버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서로를 탓하기만 할 뿐, 자신들의 행동을 바꾸지 않는다.
결정적 변수는 몰디브에도, 북극에도 가지 못하고 저 멀리 한국에 남은 멤버의 행동 하나하나였다. 그는 샤워를 3분 넘게 하고, 쓰지도 않는 전등을 켜 놓고, 외출을 하면서 보일러를 끄지 않고, 장바구니 대신 비닐봉지를 사용하고, 대중교통 대신 자가용을 이용하는 등의 편리한 선택만을 골라한다. 그때마다 2층 북극 얼음호텔에 설치된 난로에 불이 들어와 얼음을 녹인다. 서서히 북극 얼음호텔은 녹아내리고 몰디브 리조트는 물에 잠긴다. 모두가 멸망할 처지에 놓이자 그제야 양측은 한 마음으로 한국의 멤버에게 텔레파시를 보낸다. “그만해! 그만하라고!”
모든 사람이 편리함만 좇다 보니 세상에 예상치 못한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다. 이 치킨게임은 누군가가 먼저 불편함을 떠안아야 끝날 것이다. 이제는 자발적으로 불편한 삶을 사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편리를 추구하는 삶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전환점을 넘어섰지만 돌아오지 못할 지점은 넘기진 않았다”는 말은 우리에게 한줄기 빛과 같다.
풍족에서 결핍으로
얼마 전 ‘블랙프라이데이’(black friday)가 화제였다. 미국의 추수감사절 다음날인 11월 마지막 금요일이, 기업들은 집중적으로 할인판매를 실시하고 소비자들이 마구 물건을 사는 최대의 쇼핑기간이란다. 이날을 기점으로 기업들의 장부가 빨간색의 적자에서 검은색의 흑자로 바뀐다고 하여 블랙프라이데이란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미국 좋아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한국에서도 ‘코리아 블랙프라이데이’를 한다고 호들갑을 떨었지만 결국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평이 주를 이루는 것 같다.
그런데 블랙프라이데이에 딴죽을 걸고 맞불을 놓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1992년부터 11월 말에 ‘아무 것도 사지 않는 날’(Buy Nothing Day)을 정하여 지키는 사람들이다. 시장주의 경제질서를 어지럽히는 불온한 자들임에 틀림없다. 이 운동은 과도한 소비로 인해 발생하는 환경파괴, 노동착취, 불공정거래, 쇼핑중독 등을 고발하고 반성을 촉구하는 것으로 한국에서는 1999년부터 녹색연합이 주도하고 있다.
세상은 소비능력을 충분하게 갖추는 것, 그리고 그 소비능력을 과시해 풍족함을 누리는 것이 미덕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미덕을 통해 덕을 끼치기보다는 의도치 않게 남을 괴롭게 하는 일들이 벌어지기도 한다. 요컨대 오늘날 발생하는 문제들은, 없어서가 아니라 더 가져서 생기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이미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 남과 비교하는 마음만 갖지 않는다면 지금 갖고 있는 것으로도 충분히 잘 살 수 있다.
부자에서 가난한 사람으로
이제 예수님의 몸이라는 별명을 가진 교회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종종 교회에 갈 때마다 섬뜩함을 느낀다. 그럭저럭 먹고살 만한 사람들이 말쑥하게 차려입고 성경책을 챙겨든 채 교회에 나와 웃고 인사하면서 무언가를 열심히 하는 모습들을 본다. 이게 나쁜 건 아닌데, 오직 이것만 가득하니 영 마음이 찜찜하다.
예수님은 누구신가? 온 교회의 머리와, 멀쩡히 잘 하던 목수 일을 갑자기 집어치우고 일정한 직업도 없이 사는 부랑자였다. 만국인의 구주시며, 돈이 없어서 친구에게 물고기 뱃속을 뒤적거려보자던 분이다. 모든 왕의 왕이요, 반체제 인사이고, 그리고 애주가였다. 매주 일요일 예수님의 몸 된 교회는 머리, 구주, 왕 같은 사람들로 넘실거리지만, 실직자, 부랑자, 거지, 반체제 인사, 술주정뱅이는 거의 없다.
나는 개신교 사람들이 가톨릭교회의 수장인 프란치스코 교황에 대한 호불호와 상관없이 그가 역설하는 핵심 메시지인 “가난한 사람을 위한 교회, 그리고 가난한 교회가 되라”는 권면을 마음 깊이 새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난한 사람을 위한 교회가 되자고 하면 “아멘!” 소리가 나온다. 그것은 괜찮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참에 우리 스스로 가난한 교회가 되자고 하면 “워메!” 소리가 나올 것이다.
성서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을 편애하고,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은 가난한 사람들이다. 비겁하게, 마음이 가난한 거다, 심령이 가난한 거다 핑계대지 말자. 교회의 주인공은 부자에서 가난한 사람이 되어야 하며, 교회는 본질적으로 부자 교회에서 가난한 교회로 바뀌어야 한다.
세계에서 동네로
언제부턴가 교회들은 세계선교에 경쟁적으로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참 좋은 일이다. 그런데 세계선교에 열심을 내는 교회라면 응당 자신들이 자리 잡은 동네에서도 평판이 썩 괜찮아야 한다만, 종종 그렇지 못한 경우를 본다. 서로 무관심하거나, 갈등하거나, 아예 원수처럼 지내는 경우도 있다.
사실 일개 교회가 세계 그 자체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다른 나라의 어느 한 지역, 한 마을을 섬긴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렇다면 같은 마음으로 자신들이 자리 잡은 동네도 잘 섬기면 좋겠다.
동네를 섬기는 것보다 세계를 무대로 선교사를 파송하고 단기 팀을 파견하고 재정을 일으켜 후원하는 것이 더 스케일이 커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생각이지, 하나님 입장에서는 여기 동네나 다른 나라 동네나 매한가지일 것이다.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신다고 믿는다면, 굳이 하나님이 왜 이 동네에 교회를 세우셨는지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다. 하나님을 사랑하여 예배공동체로서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면, 이웃을 사랑하여 동네를 섬기는 선교공동체도 되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제일 큰 계명으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똑같다고 하셨다.
세계선교를 할 때 최대한 현지인을 존중하고 그곳의 문화를 이해하고 언어를 배운 후에 가서 조건 없이 섬겨야 한다. 마찬가지로 동네 사람을 존중하고, 동네의 역사와 문화, 지역적 특성을 공부한 뒤 조건 없이 섬길 수 있어야 한다.
번잡스럽지 않은 방법으로
마지막으로 감히 신앙생활에 대해 한마디 하고자 한다. 단언컨대 한국 개신교만큼 자신들의 종교의 경전을 소홀히 대하는 곳이 없다. 교회에 와서 열심히 봉사하고 심지어 전도도 하는데 정작 신앙의 깊은 맛을 느낄 수 없는 교인이 드물지 않다. 성서를 읽고 기도를 하는 것은 신앙의 기본인데 우리는 얼마나 기본에 충실하고 있을까?
예상하건대 우리가 매일 조금씩이라도, 어떤 사심도 배제한 채, 앞뒤 맥락을 살펴가며 성서를 읽는다면 오늘날 교회가 세상에 끼치는 해악은 상당 부분 해소될 수 있지 않을까. 또 우리가 소망하는 바를 너무 번잡스럽지 않은 방법으로 하나님께 고하고, 담담히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며, 성서를 통해 내 마음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려 든다면 종교개혁이 남의 나라 일이 아닐 것이다.
바쁜 현대인에게 성서를 못 읽을 이유, 기도하지 못할 이유는 무궁무진하다. 그러나 성서를 읽지 않고 기도하지 않는다면, 교인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는 없다. 성서를 읽고 기도를 함으로써 비로소 우리의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믿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언제부턴가 핸드폰을 바꾸라는 연락이 오지 않는다. 확실히 블랙리스트에 오른 게 틀림없다. 사람들이 볼 때는 그저 하찮은 일이겠지만, 나는 핸드폰을 바꾸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이 찾으시는 고릴라 한 마리를 나도 함께 찾고 있다고 믿는다.
어느 한 사람이 길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고 생각해보라. 사람들은 그것을 우스운 일, 미친 짓거리, 하찮은 것으로 여길 것이다. 그러나 만약 열 명이, 백 명이, 천 명이 함께 노래를 부르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의 ‘사건’이 된다.
한 사람은, 한 사람이 벌이는 하찮은 일은, 세상에서는 멸시 받고 천대 받지만 진실로 하나님 나라를 도모하는 일이 된다. 그 믿음을 갖고 오늘을 사는 하찮은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고 싶다.
박제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