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공무도하가」를 기존 학계의 해석과 달리 이렇게 유추 해석해 봅니다. 백수광부는 이승에 제 처자를 남겨두고 저승으로 건너갑니다. 이승과 저승 사이의 경계에 가로놓인 것은 강물입니다. 세계의 지표면에 뱀처럼 구불구불 흘러나가는 강들은 저마다 죽음과 결부된 많은 전설과 설화들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하이네가 노래한 로렐라이 전설을 안고 흐르는 라인강도 그렇고, 아폴리네르의 세느강도 그렇고, 신화 속에 나오는 레떼강도 그러합니다. 강물은 끊임없이 흘러간다는 맥락에서 흐르는 시간, 혹은 순환하는 세계라는 은유를 끌어당깁니다.
어쩌면 백수광부는 늙어죽은 것인고, 물에 빠져 죽은 것은 하나의 상징이거나 은유일지도 모릅니다. 머리가 허옇게 셌다는[백수(白首)] 것은 그것에 대한 암시로 읽을 수도 있겠지요. 실제로 물에 몸을 던진 것은 백수광부가 아니라 그의 아내입니다. 제 남편이 방금 강물에 몸을 던져 자살했는데, 그것을 목격한 아내가 그 자리에서 공후를 타면서 구슬프게 노래를 지었다는 것은 자연스럽지가 않은 정황이지요. 백수광부는 죽은 지 이미 오래이고, 그의 처자는 시름에 겨워하며 매일 강가에 나와 강물을 바라봅니다. 강물은 자기 속에 꿈틀거리는 슬픔의 심상을 비쳐 보이는 내면의 거울인 것이지요. 강 건너 저쪽의 저승 세계에 가 닿았을 남편을 모습을 그리워하면서 말입니다. 그리고 공후를 타고 노래를 불렀겠지요. 죽은 남편과 저 사이를 가로막고 흐르는 강물에 대한 원망과 죽은 자에 대한 그리움은 속절없이 깊어만 갑니다. 신화적 상징의 세계에서 물은 죽음과 재생, 그리고 정화의 상징물로 이해됩니다. 공후를 타고 노래를 하던 어느날 새벽 백수광부의 아내는 백발이 성성한 제 남편이 강물로 걸어 들어가는 환영을 보고 홀연히 그 환영을 뒤따라 물 속에 뛰어들었을 수도 있겠지요. 이 대목에서 이 설화가 나르시소스 신화의 한 변주라는 심증이 굳어집니다. 곽리자고가 새벽에 목격한 것은 백수광부의 아내가 물속에 몸을 던지는 사건이고, 그이가 부른 노래 가사를 통해 그 사정을 미루어 짐작했으리라 유추할 수 있습니다.
「공무도하가」는 우리 시 문학사 안에서 갓난아기가 세상에 태어나 제 어미의 젖을 처음 물고 받아먹은 초유(初乳)와 같은 작품입니다. 이땅에서 숨결을 받고 명멸해간 숱한 시인들이 「공무도하가」라는 초유를 받아먹고 상상력의 몸피를 키웠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공무도하가」의 제일의적 주제는 개별자를 습격해서 생명을 앗아가는 죽음과 그 죽음을 감내해야 하는 산 자의 슬픔입니다. 한 철학자는 죽음의 존재태를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먼저 사실로서의 죽음, 둘째, 확신으로서의 죽음, 셋째, 경과로서의 죽음이 그것입니다. 첫 번째 죽음의 존재태는 살아 있는 자가 경험할 수 없는 영역에 속하지요. 두 번째의 것은 생생한 삶의 불가결한 이면으로 우리가 선험적으로 알고 있는 죽음입니다. 모든 예술가들이 작품 속에서 구체화하는 것은 이 죽음입니다. 세 번째의 것은 어느 정도 체험의 영역에서 겪는 죽음입니다. 사람이 늙거나 중병에 들었을 때 우리는 죽음 직전까지 "경과로서의 죽음"을 직접적인 체험으로 겪게 되지요. 죽음은 우리가 태어나는 순간에 이미 삶을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 혹은 현존의 일부로 존재합니다. 때로는 삶이 너무 괴롭기 때문에 그것에서 풀려나는 영원한 안식의 세계, 삶 저 건너편에 존재한다는 죽음의 피안에서의 평화를 그리워하기도 합니다. 노발리스는 「밤의 송가(頌歌)」에서 이렇게 썼지요 ; "깊은 슬픔 속에 몰아넣은 그 무엇이 이제 우리를 달콤한 동경과 함께 이승에서 데려간다. 죽음 속에서 영원한 삶은 비로소 발견된다. 너는 죽음이다. 너만이 우리를 튼튼하게 한다."
"삶의 예정 조건"인 죽음이 초래한 부재와 상실이 우리 내면에 일으키는 슬픔을 노래한 시들은 「공무도하가」와 정서적 친연성을 드러냅니다. 김소월은 「초혼(招魂)」에서 이렇게 씁니다 ;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 /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 /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 /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 // 심중(心中)에 남아 있는 말 한마디는 /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구나. /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 /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 // 붉은 해는 서산 마루에 걸리었다. / 사슴이의 무리도 슬피 운다. / 떨어져 나가 앉은 산 위에서 /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 부르는 소리는 비껴가지만 /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 /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 /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 초혼은 죽은 자의 혼을 부르는 의식이지요. 백수광부의 아내가 공후를 타면서 부르는 노래와 초혼 의식은 상통하는 데가 있습니다. 「공무도하가」나 「초혼」은 죽음 위에 세워져 있는 삶의 덧없음을 말해줍니다. 사랑하는 이를 먼저 떠나보내고 그것을 감당해야만 하는 산 자들의 가없는 슬픔으로 이 시가들은 큰 공감을 불러일으키지요. 죽음은 산 자들이 일굴 수 있는 일체의 가능성을 무화합니다. 서로 살 부비는 일, 열락(悅樂)의 벼랑에 서는 일, 서로 슬픔과 외로움, 혹은 기쁨과 충만감을 나눌 수도 없습니다. 죽은 자의 자리는 텅 비어 있습니다.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은 것은 그 비어 있음이 불러일으키는 슬픔의 부피가 그만큼 크다는 뜻이겠지요.
기형도는 「빈집」에서 이렇게 씁니다 ;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스물 아홉의 나이에 요절한 젊은 시인이 살아 있을 때 지은 시인데, 어떻게 이렇게 죽음의 실감으로 가득 차 있을까요 ? 이 시는 일종의 유언처럼 읽히지 않나요 ? 시의 화자가 사랑했던 것들에게 작별을 고하는 인사말 같지 않나요 ? 죽음에의 예감이 너무나 깊게 패여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