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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례백제연구원 - 慰禮百濟硏究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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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유적 탐방-2 스크랩 다시 쓰는 백제초도 하남위례성고-1편
오심죽(吾心竹) 추천 0 조회 888 09.02.02 17:1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다시 쓰는 百濟初都 河南慰禮城考-1편 >>>-오심죽///

 

---<<< 目 次 >>>---

1. 序論

2. 本論

   1) 하북위례성 諸主張 批判

      1. 河北↔河南에 대하여

       2. 河南이란 어디인가?

       3. 三角山 부아산에 대하여

       4. 負兒山은 어디인가?

       5. 미추홀은 어디인가?

       6. 말갈(동예)의 잦은 침입으로 하북→하남 遷都說에 대하여

   2) 馬韓王이 溫祚王에게 내어준 東北 100里 문제

   3) 稷山慰禮城 주변의 地型地勢 및 地名由來

       1. 천안시 입장면(笠場面)

        2. 천안시 북면(北面)

        3. 천안시 직산읍(稷山邑)

        4. 천안시 성환읍(成歡邑)

        5. 아산시 인주면 밀두리(仁州面 密頭里)

   4) 백제초도 하남위례성 예상 疆域圖(온조왕 元年)

   5) 직산 위례성의 옛 문헌--신증동국여지승람/삼국사기

      1.직산현  2.목천현  3.천안부  4.온양현  5.아산현  6.신창현

      7.안성현  8.양성현  9.평택현  10.진위현 11.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편 원문

   6) 직산 하남위례성 13년간의 溫祚王城 유력지 

           *백제의 도읍 변천사

         1. 한성백제(풍납성)

         2. 한성백제(남평양성)

         3. 웅진백제(공산성)

         4. 사비백제(사비성)

         5. 고구려--졸본부여(오녀산성)

     <직산백제 위례성시대--BC18~BC6, 13년>

       1. 부소산과 위례성(입장면 양대리, 호당리)

        2. 원통골과 오리골(직산읍 판정리, 입장면 흑암리) 

        3. 사산성(직산읍 군동리)

        3. 궁리와 안양리(성환읍 안궁리)

   3. 結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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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실로 2천년전 백제초도의 역사를 다시 쓰고자하니, 작금의 내노라하는 최고의 석학들이 지켜보는 것 같아

촌부의 손이 떨리고 감히 두려움이 앞섭니다.

  하지만 삼국사기 이후 몇 백년의 논란의 대상이며, 한국 고대 상고사의 수수께끼를 풀고자 몽매함을 접고,

백제초도 하남위례성 13년간의 도읍지를 밝혀 논쟁의 종지부를 찍고자 나서 봅니다.

  현장을 발로 뛰고 위례성이 있다는 위례산성, 성거산 일대를 얼마나 헤메고 다녔던가?

무조건 발로 뛰고, 땀 흘려 찾는다고 찾아낼 일이라면 벌써 누군가 시도하고 찾아냈으리라.

 

  한국사의 잘못된 판단과 이론이 후세이 끼친 공?이라면 너무 많은 인재들이 백제초도사를 가지고 지금도

논란을 벌이며, 지역의 이익을 위해 아전인수, 견강부회하며 그 얼마나 합리화 하려했던가?

(이 글을 쓰는 저 역시 그런 범주에서 자유롭지 못함)

이젠 소모적 논쟁의 종지부를 찍고, 미래지향적,창조적인 일들에 매진해야 합니다.

 

  우선 고기록이 지적한 직산위례성 주변을 주도 면밀히 답사하고, 연구하고, 고민했던가?

하남위례성으로 불리는 한성백제의 풍납토성과 세검정,중랑천변의 하북위례성을 비교 검증함으로써

한국 고대사의 모순을 밝히려 합니다.

 

  일부 백제의 대륙건도설에 따른 백제초도 하남위례성설도 있기는 하지만 정사로 기록된

삼국사기 이후부터의 문제를 풀어 나가고 향후 역사 유물이 실재를 인정할때 그 부분은 논하기로 합니다.

 

  잘 못된 것도 역사라면 역사인데 명쾌히 논증하지 못하고, 명예, 지역주의가 결부되어 자기 주장의 합리화에

상상력을 얼마나 발휘했던가?

직산인으로 자신의 태어난 고장의 역사를 남의 펜 끝에 의존하는 것이 안타깝고, 

직산의 지형지물에 비교적 밝은 사람이 직산을 한 두번 답사 차원에서 다녀간 사람보다는 유리할 것 같고,

백제초도를 밝히는데 강 건너 불 보듯 있을 수 없어 이 글을 쓰며,

미처 고금의 뛰어난 석학들이 주마간산으로 간과했던 부분을 지적하고 새로운 연구 방향을 알림으로써 

백제초도 13년간의 도읍지, 직산 하남위례성의 진실을 밝히는데 견마의 노고라도 보태고자 이 글을 써봅니다.

 

 

2. 본론

  

   (1) 위례성 제주장

 

   (가) 기존의 河北慰禮城說

 


 

다산의 혜안은 바로 그러한 숙제를 명쾌히 풀어 주고 있으며, 그 논리 전개는 지금의 후학들에게 참고될 만한 것이 많아 그 골자를 옮겨 적어 본다. 다산의『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에 실린「위례고(慰禮考)」는『삼국사기』백제본기,『북사(北史)』,『수서(隋書)』등의 기사를 종합하여 다음과 같이 위례의 위치를 비정하고 있다.

“○ 이때[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8년]에 말갈과 낙랑이 해마다 침략했는데, 이는 위례성이 한수(漢水) 북쪽에 있어서 두 적과 가까이 인접해 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서 말한 말갈은 함흥(咸興)의 예인(濊人)이요, 낙랑은 춘천(春川)의 토착 지배자다. 위례는 한양 동북쪽에 있음이 분명하다. 위례(慰禮)라 함은 우리말에 광곽(匡郭)의 둘레를 울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위례와 발음이 비슷하다. 성책(城柵)을 세우고 흙을 쌓아 광곽을 만들었기 때문에 위례라고 한 것이다.
○ 온조왕 13년에 한수 남쪽으로 옮겼다. 바로 옛 광주읍(廣州邑)인데, 당시에는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이라고 했다.
○ 온조왕 당시에 분명히 한수 북쪽에서 한수 남쪽으로 옮겼으니, 위례성은 본래 한수 북쪽에 있었음이 확실해 의심의 여지가 없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원년조에] 부아악(負兒岳)에 올랐다는 말 이하의 사실은 온조왕 13년의 일인데, 역사가가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운 것의 근본을 나중에 기록했기 때문에 원년(元年)에 기록된 것이다.
○ 정인지(鄭麟趾)의 지지(地志)에는 직산현(稷山縣)을 위례성이라고 했으니, 여지서(輿地書)를 이어받아 드디어 없어지지 않는 모범을 만들었다.
가난한 선비가 높은 벼슬아치의 책이 틀렸다고 일일이 나무라는 셈이지만, 사실이 그렇다. .... 온조왕이 패수(浿水)·대수(帶水) 두 물을 건너 위례에 도읍했다는데, 직산 북쪽이 진실로 패수와 대수의 두물인가? 또한 온조왕이 한수 동북쪽 백성을 뽑아 위례성을 수리했는데, 직산이 한수 동북쪽에 있는가? 온조왕이 말갈과 낙랑을 피하야 한수 남쪽으로 도읍을 옮겼는데, 그렇다면 직산이 말갈과 낙랑의 이웃이던가?『북사』와『수서』에 보면 백제의 시조가 옛 대방 땅에 나라를 세웠다고 분명히 말했으니, 이것[직산]이 어찌 또한 옛 대방 땅이겠는가? 만일 직산설을 따른다면 고금(古今)의 역사책에 기록된 것이 모두 틀렸을 것이니, 하나[직산설]를 고집하려고 백을 버릴 것인가? 그럴 수는 없다.
○ 정인지와 서거정의 기록이 진실로 잘못이라 하더라도, 그 옛 늙은 정승들의 말에는 반드시 근거가 있을 터이니, 그저 허망하다고만은 말 할 수가 없을 것이다. 백제의 역사를 보면 개로왕(蓋鹵王)이 고구려의 침입을 예견하고 태자 문주(文周)를 먼저 남쪽으로 보내 도망치게 했는데, 개로왕이 해를 입자 문주가 웅진(熊津)으로 도읍을 옮겼다. 직산은 문주가 잠시 살았던 곳인 듯하다. 직산이 한성에서 남쪽으로 웅진까지 가는 도중에 있기 때문에, 여기서 잠시 머무르면서 북쪽으로 옛 도읍의 소식을 듣고, 남쪽으로 새 도읍의 일을 처리했음이 이치에 맞을 것이다.”

백제의 건국지, 즉 첫 도읍지가 어디였는가를 둘러싸고 고려시대 13세기 무렵『삼국유사』로부터 비롯된 혼동은 이처럼 다산의 고증에 이르는 약 600여년 동안 이어져 왔다. 고고학자료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지금에는 백제의 건국지가 한강 하류의 옛 경기도 광주(廣州) 즉, 현재의 서울시 송파구·강동구 일원임은 분명하게 되었다. 고려~조선시대에 걸쳐 지식계의 다수 지지를 받았던 직산 위례성설은 고고학적 조사를 통해 사실과 다름이 확인되기도 하였다. 충남 천안 북면에 실재하고 있는 위례산성(慰禮山城)에서는 5세기 무렵의 백제토기편과 더불어 7세기 무렵의 사비시기 백제 삼족기 등이 출토되고 있어 한 때 백제의 산성으로 활용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하지만 백제의 초도지와는 거리가 먼 것임이 드러났다. 한성 함락 후 문주에 의해 잠시 활용되었을 것이라는 다산의 견해는 그러한 고고학자료와도 부합되는 탁견임을 새삼 알 수 있다. 


 

☞『三國史記』 기록에 의하면 백제의 첫 도읍지는 온조왕 즉위년조에 등장하는 '하남위례성'이라 볼 수 있다.
1) 백제본기 온조왕 원년조 기록에는 작도 과정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百濟始祖溫祚王 … 遂至漢山 登負兒嶽 望可居之地 … 十臣諫曰 惟此河南之地 北帶漢水 東據高岳 南望沃澤 西阻大海 … 溫祚都河南慰禮城 …"
그러나 初都地로서의 하남위례성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강 남쪽의 위례성'이라는 뜻이 되기 때문에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河南'에 대응하는 개념으로서의 '慰禮城' 또는 '河北慰禮城'을 별도로 상정하고 '(하북)위례성'에서 '하남위례성'으로의 천도를 기정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러한 견해의 대표적인 학자로서 조선말의 실학자 茶山 丁若鏞을 들 수 있으며, 이후 대다수의 학자들이 그의 견해를 수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2) 茶山 丁若鏞이 『與猶堂全書』6 「疆域考」'慰禮考'에서 이와 같이 주장한 이래 거의 대부분의 학자들이 '河北慰禮城'의 실체를 의심없이 받아들여 왔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三國史記』 「百濟本紀」 온조왕 13년과 14년조에는 원년조에 등장하는 '하남위례성'으로의 천도 사실을 묘사하는 상세한 기록이 존재하기 때문에
3) 十三年 春二月 … 王謂臣下曰 國家東有樂浪 北有靺鞨 … 必將遷國 … 予昨出巡 觀漢水之南 土壤膏 宜都於彼 以都久安之計 … 秋七月 就漢山下立柵 移慰禮城民戶 … 八月 遣使馬韓 告遷都 遂 定彊場 北至浿河 南限熊川 西窮大海 東極走壤 … 九月 立城闕 … 十四年 春正月 遷都.
원년조의 기록을 13년과 14년조의 사실을 소급 기록한 것으로 보는 위와 같은 견해는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가정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필자로서는 굳이 '하남위례성'으로 천도하기 이전의 도성 혹은 왕성의 존재를 '하북위례성'이란 다분히 추론적인 개념으로 상정하고 그 실체를 고증할 필요가 있을지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온조왕 14년조의 천도 사실을 그대로 인정한다면 천도 이후에 사용된 '위례성'은 곧 '하남위례성'이 되어야만 하고, 상식적으로 '하남위례성'에 대응하는 '하북위례성'의 존재 역시 천도 이전의 것만 인정 가능하다. 그러나 천도 이전의 기록에서 '하북위례성'의 단서를 찾고자 할 때는 안타깝게도 온조왕 8년조 말갈의 침입 기사만 나타나고 있어
4) 八年 春二月 靺鞨賊三千來圍慰禮城.
실제로 '하북위례성'의 실체를 추적하기에 턱없이 부족한 자료라 생각된다. 바로 이러한 점이 현재의 상태에서 '하북위례성'의 실체를 논하기 어려운 첫 번째 이유이다.
물론 온조왕 13년조 이후의 '위례성'이 '하남위례성'이 아닌 '하북위례성'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특히 온조왕 17년 봄 "낙랑이 침입해와 위례성을 불살랐다"
5) 溫祚王 十七年 春 樂浪來侵 焚慰禮城.
는 기록과 41년 2월 "위례성을 수리하는 데 漢水 동북 모든 부락의 15세 이상되는 사람들을 징발하였다"
6) 四十一年 … 二月 發漢水東北諸部落人年十五歲以上 修營慰禮城.
는 기록이 그러한데, 단언할 수는 없지만 이와 같은 기록이 바로 '위례성'이 '河南'보다는 '河北'에 있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대목의 하나라 할 수 있다. 즉, 온조왕 14년조 하남 천도의 주된 배경으로 낙랑과 말갈의 위협을 들 수 있는데, 불과 4년이 지난 온조왕 17년에 낙랑이 천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위례성을 강을 건너서까지 불사르고 돌아갔을까 하는 점과 강 이남의 도성을 수리하는 데 굳이 강 동북 모든 부락의 장정을 동원할 필요가 있었겠는가 라는 점이 그것이다. 따라서 이상과 같은 기사에서는 그나마 위례성의 '하북'설이 설득력을 지닐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이 또한 다분히 심정적인 추론일 뿐 결정적으로 '하북위례성'의 존재를 입증시키는 증거로는 보기 곤란하다.
한편 이상의 논의에서 핵심적인 문제가 되는 '河北'과 '河南'의 '河'의 위치 또한 풀어야 할 과제이다. 물론 거의 모든 연구자들은 온조왕 원년조와 13년조의 기록으로 미루어 남과 북의 경계가 되는 '河'를 '漢水'로 인정해 왔으며, 또한 '한수'는 곧 오늘날의 '漢江'임을 당연한 전제로 삼고 있다. 이렇듯 한강을 경계로 한 '하남'과 '하북' 위례성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동의하고 있으나 구체적으로 '하북위례성'이 어디에 위치해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저마다 다른 견해를 내놓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일부 학자는 '하북위례성'의 위치를 한강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것으로 보기도 하여 새로운 시각의 필요성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하북위례성'의 후보지로 가장 흔히 거론되는 곳은 크게 두 곳으로 압축할 수 있다. 앞서 茶山이 "하북위례성의 옛 자리가 경성 동북쪽 십리되는 곳 三角山 東麓에 있다"고 함으로써 대부분의 문헌 연구자들이 삼각산 동록설을 따르게 되었으나 실제로 이 일대에서는 위례성의 흔적으로 볼 만한 어떠한 증거도 발견된 바가 없다.
이후 고고학적 증거를 바탕으로 주장된 '하북위례성'의 후보지로는 서울 동대문구·중랑구·성동구 일대의 中浪川 유역을 들 수 있다. 이 일대에는 일제 때까지만 해도 土壘의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었다 전하며...중략 ///

      < 풍납토성-한국고대사...국립문화재연구소... 신희권 논문 중에서 >


 

 

 ☞ 온조가 BC18년에 첫 도읍한 하북위례성의 위치를 정약용, 김용국은 삼각산 동록으로,

이병도는 세검정 부근으로, 최몽룡, 권오영, 차용걸, 성주탁은 중랑천 일대로 보았다.

이중에서 세검정 부근은 백제가 개루왕 5년에 북한산성을 쌓은것으로 나와 있어 제외될 수밖에 없다.

 

  한편 북한산 동록인 혜화문 밖 10리 한양동에는 토성지가 없는 반면 중랑천 일대는 일제시대에 나온

{조선보물고적조사보고자료}에 따르면 중곡동과 면목동 일대에 크고 작은 토루가 있다고 하여

하북위례성으로 볼 수 있는 가능성이 높은 데다 그 옆의 아차산의 동봉에는 백제시대의 토성이 있어

현재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곳을 하북위례성 터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 곳은 거대한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낙랑과 말갈로부터 수없이 공격을 당하던 백제 초기의 미약한

소규모의 집단으로는 큰 산 전체를 지킨다는 것은 무리이고 한강을 남쪽에 끼고있어 퇴로가 없다는 점이 맹점이다.

 

  {남한비사}를 쓴 구민회는 북한산 아래인 우이동에는 옛 성터가 남아 있고 왕궁터가 있다고 하였는데,

최근 향토사학자 한종섭은 방학동에 있는 175m의 시루봉 동북쪽 능선에서 "해 다니는 길 엄"자의 금석문을

발견하였다.

필자와 함께 답사해 본 결과 그 곳은 극동아파트 옆길로 올라가는 곳으로 물길을 따라 계곡을 올라가면 절터로

추측되는 석축이 나오는데 그 부근에서 백제 초기의 타날문토기편이 나오고 있다.

이 곳에서 좀더 올라가면 왼쪽으로 시루봉을 낀 넓은 분지가 나타난다.

현재는 묵은 논과 밭으로 그 곳에서도 백제 초기의 흑색연질토기편이 나오고 있으며,

밭 가운데에 주초석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커다란 돌들이 여러 개 남아 있다.

좀더 올라 그 산의 능선에 오르면 삭토한 흔적이 있고, 토성의 북문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은

초기 옹성과 같이 엇갈린 형태를 띠고 있어 토성문의 매우 초기적인 형태를 이루고 있다.  

 남쪽으로는 방학천, 동으로는 중랑천이 있어 해자의 역활을 하고 있어 이 곳을 하북 위례성으로 비정할 수 있었다.

        <오순범---한성백제사 중에서...인터넷 퍼옴 >

 

 

 

 ☞ 백제가 처음에는 위례(慰禮)에 도읍을 정했었다. 위례는 지금 한양(漢陽 서울)의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른바 하남위례(河南慰禮)란 곳은 지금 광주(廣州)의 고읍(古邑)이다.

《동국지리고(東國地理考)》에 상세히 보인다.

북으로는 도봉산(道峯山)과 삼각산(三角山)이 막혀 있고 남으로는 한강(漢江)을 띠고 있다.

그리고 비옥한 들이 천 리에 뻗쳐 있고 남해(南海)의 이익을 독점하고 있으니,

이야말로 천연적인 요새라 할 수 있는 땅이다.

       <정약용---백제론 중에서>    

 

 

 ☞  백제 도성 - 부아악負兒嶽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원년조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온조와 비류가 고구려에서 떠나 남쪽으로 내려온 뒤의 상황이다.

그들은 마침내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嶽에 올라 살만한 땅을 바라보았다. 비류는 바닷가에 가서 살려 했다. 열 명의 신하가 간하기를,
"이 하남河南의 땅은 북으로 한수漢水를 두르고[帶], 동으로 큰 산[高岳]을 의지하고[據], 남으로 옥택沃澤을 바라보며[望] 서로는 대해大海가 막았으니[阻] 이 천험지리는 얻기 어려운 지형입니다. 이곳에 도읍을 세우는 것이 어찌 마땅치 않겠습니까?"
비류는 듣지 않고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에 살았다.

백제의 첫 도읍지가 어디인지는 미스테리다. 최근에 직산은 백제의 첫 도읍지를 자기네 고장이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사실 오랫동안 직산은 백제의 첫 도읍지로 여겨졌다. [삼국유사]를 쓴 일연이 주석을 통해 "위례는 지금의 직산이다"라고 말한 것이 그 시초이다.

훗날 서거정이 직산의 제원루濟源樓에 올라서 "제원"을 "백제의 근원"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서거정 자신도 직산이 일국의 수도였다는 것을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늘 부아악이 여기서 200리나 떨어져 있는데 어찌 살만한 곳으로 골랐으며, 또 이른바 강이란 무슨 강을 가리키는가 의문을 가졌었다. 내가 이곳을 지나간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갈 길이 바빠 한 번도 들어가 볼 겨를이 없었고, 그 지세를 바라보니 편협하여 가득히 차 있는 부여의 기상이 없으니, 도읍을 정할 만한 곳이 아니므로 마음 속 깊이 스스로 의심했다.

그러나 서거정은 책자들을 참조해서 백제가 처음 직산에 도읍하였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처럼 말한다.

온조 이후에 직산에서 남한산성으로 옮겼으니, 이곳이 바로 지금의 광주廣州다. 그 후 다시 북한산성으로 옮겼는데 이곳이 바로 지금의 한도漢都요, 뒤에 금강으로 옮긴 곳은 지금의 공주며, 또 사자하泗?河로 옮기니 지금의 부여다.

정약용은 이에 대해서 "제원"이라는 이름은 다른 지역에도 있으며, 부아악은 북한산이니 직산에서 너무 멀고, 도읍은 한수 이북에서 한수 이남으로 옮긴 것이며, 직산은 문주왕이 달아나며 공주에 도읍하기 전 잠시 머무른 임시 거처였을 거라는 추정을 한 바 있다.

정약용은 부아악에 올랐다는 온조 원년의 기록이 온조 13년의 기록이 잘못 쓰인 것이라 생각했다. 온조 13년의 기록은 이렇다.

봄2월에 서울의 한 늙은 노파가 남자로 변했다. 범 다섯 마리가 성 안으로 들어왔다. 왕모王母가 세상을 떠나니 나이 예순한 살이었다. 여름 5월에 왕이 신하들에게 말했다.
"우리나라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 국경을 침범하므로 편한 날이 적다. 더우기 요즘은 요망한 조짐이 여러번 일어나고 국모가 세상을 떠나시고 형세가 편안치 않으니 서울을 옮겨야 하겠다. 전일 순행해서 한수 남쪽을 바라보니 땅이 기름져 그곳에 도읍하여 오래도록 편안할 계책을 도모해야 하겠다."
가을 7월에 한산 아래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민호를 옮겼다.

온조 원년의 구절과 이 구절은 매우 모순되어 아무리 생각해도 둘 중 하나의 기록은 잘못 되었을 수밖에 없다.

1. 두 기사는 모두 하남, 즉 강 아래 땅을 가리키고 있다. 이때 강은 한수로 지금의 한강이다.
2. 한강 이남에서 한강 이남으로 옮기는 경우 북쪽을 방어한다는 의미가 없다.

이때 직산에서 하남으로 도읍을 옮겼다는 것은 애초에 기사(13년)가 의미하는 바와 충돌한다. 따라서 온조 원년에 도읍한 곳이 어딘지는 몰라도 북에서 남으로 이동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위 기사들은 모두 이상한 점을 가지고 있어서 쉽게 이야기할 수가 없다.

1. 우선 13년조 기사를 보면 한수 남쪽을 이야기하고 나서, 정작 위례성 민호는 한산 아래로 옮겼다고  되어 있다. 한산 아래가 한강 이남일 수는 없다. 유일한 합리적인 해석은 이 기사가 천도와는 별개의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맞는 말이다. 왜냐하면 이때까지는 아직 천도할 성을 못 세웠기 때문이다. 이해 9월조 기사와 그 다음해 기사를 보자.

9월, 성곽을 세웠다.
14년 봄 정월에 도읍을 옮겼다.

이무렵 위례성은 뭔가 큰 일이 벌어졌던 것이 틀림없다. 천도는 물론 급히 민호를 옮겨야할 만큼. 그리고 이 일이 5월에 결정된 뒤 9월까지 성곽을 쌓고, 그 후 궁궐을 만들어 정월에 천도를 한 것이다. 심지어 궁실은 15년 정월이 되어서야 완성되었다. 그리고 17년에는 낙랑이 침범해서 위례성을 불태워버렸다. 위례성은 그만큼 취약했던 것이다. 그후 하남에 있는 도읍도 위례성이라 불렀던 것이 아닐까? 즉 하남과 하북의 성을 모두 위례성이라 부른 듯 하다.

2. 역시 13년조 기사에서 동에 낙랑이 있고, 북에 말갈이 있다는 말은 낙랑을 평안도 일대에 비정하는 한 성립되지 않는 말이다. 신채호는 이 때문에 [삼국사기] 기사에는 동과 서를 혼동한 것이 많다고 했는데, 나는 그 말로도 백제의 위치를 설명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나는 함흥으로부터 강원도 북부에 이르는 지역이 낙랑의 영동7현이었던 점을 주목한다. 이 때문에 후일 이 지역에 최리의 낙랑국(호동왕자가 멸망시킨)이 존재할 수 있었다고 보고 있으며, 온조가 언급한 부분도 이것이라 생각한다. 서기 30년에 낙랑 남부도위가 폐지된 후 3세기 초에 대방군이 설치될 때까지 낙랑의 남쪽 지방은 권력의 공백지대가 되었다. 이곳에 말갈족이 있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이들이 북쪽의 말갈이었을 것이다.

3. 따라서 온조 13년조 기사를 놓고 보면 위례성은 한강 이북에 있다가 낙랑-말갈 등의 침입에 의해 한강 이남으로 내려간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이미 한강 남쪽을 지목하고 있는 원년 기사와 충돌한다. 그래서 정약용은 원년 기사가 13년 기사가 잘못 기재된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정약용은 왕모가 죽은 후 형제가 갈라섰다는 것이 더 타당한 설명이라 본 것 같다.

4. 그런데 문제는 원년 조 기사에 나오는 저 산이름이다. 부아악. 이것은 지금의 북한산을 가리키는 것이다. 북한산 위에서는 지금 백제 궁성으로 지목하고 있는 풍납토성이나 몽촌토성이 모두 보이지 않는다. 김포 평야가 보일 뿐이다. (한도사님 감사)

부아악이 북한산인 것은 분명하다. 최근 신라의 화엄십찰 중 하나인 청담사靑潭寺가 북한산 바로 아래인 은평구 진관내동에서 발견되었다. 최치원이 신라 효공왕孝恭王 8년(904)에 쓴 [당대 천복사 고 사주 번경대덕 법장화상 전唐大薦福寺故寺主飜經大德法藏和尙傳](법장은 중국 화엄종의 고승으로 의상과 친분이 돈독했다)에 보면 청담사가 부아산에 있다고 나온다.

漢州負兒山靑潭寺也


진관내동 공사 현장에서 발견된 청담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기와장

온조 원년의 기록과 13년조의 기록이 후대에 혼동된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온조가 처음 올랐던 산이 북한산이라면, 첫 백제의 도읍은 북한산에서 내려다보이는 곳이 아니었을까?

하남으로 옮겨갔던 백제의 도성은 근초고왕 때 다시 강북으로 옮겨진 것으로 나온다. [삼국사기]를 따르면 근초고왕 26년(371)에 한산으로 도읍을 옮겼다고 했다. 아마도 이것을 북성, 하남에 있던 성을 남성이라 불렀던 모양이다. [삼국사기] 개로왕 21년(475)조를 보면

고구려의 대로 제우와 재증걸루, 고이만년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 북성을 공격해 7일만에 함락시키고 남성을 옮아치니 성내가 공포에 질렸다.

개로왕은 기병 수십 명을 데리고 서쪽문을 통해 달아나다가 재증걸루 등에게 붙잡혀 처형 당하고 만다. 위 기사로 볼 때 백제의 도성이 북성과 남성 두 개가 있었음이 분명하다.

정약용은 이 북성, 남성이 모두 한강 이북에 있는 성으로 생각했다. 한강 이남에 있다면 서쪽으로 달아날 수 없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그것은 정약용이 현재의 하남 지방으로 위례성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풍납토성이 위례성이라면 서쪽으로 달아나는데 문제가 없다. 이때 또 한가지 문제가 남는다. 그것은 개로왕이 아차성 밑에서 처형되었다는 기사다.

아차성이란 지금의 아차산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도성에서 서쪽으로 달아나던 개로왕을 아차산 쯤에서 잡아서 처형했다면 남성도 강북에 있었던 것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고구려 장수들은 개로왕을 결박하여 압송했다[縛送]. 굳이 압송한 것을 보면 한강을 건너와서 처형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기록이 소략하니 후인은 구구억측을 늘어놓을 수밖에 없다. 그저 바라는 것은 이번 청담사지 발굴처럼 옛 흔적을 이 땅 스스로 내보여주는 것 뿐이다 

          <연합뉴스...백제도성 부아악>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 : 이병도(李丙燾)는 하남위례성의 위치에 대해서 지금의 광주(廣州) 춘궁리(春宮里)와 남한산성 일대의 지역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백제가 처음 도읍한 곳은 하남위례성이 아니라 하북위례성(河北慰禮城)이며, 그 위치는 서울 세검동(洗劍洞) 일대의 골짜기라고 비정(比定)하였다.《국역삼국사기 352쪽 주》

 

 

  (나) 하북위례성설의 비판

 

1) 하북↔하남에 대하여

 

    위 글에서 보듯이 다산 정약용 이후 많은 지식인들이  <하북>↔<하남>을 단순 대응어로 생각해서 그의 논박이

    명쾌하고 합리적이라 주장한다. 

    하지만 단어가 아무리 남-북의 대응어라 해서 그렇게 논리를 추정하는 것과 연계하여 말갈의 침입 등으로

    천도하였다는 확대 논리는 문제를 너무 쉽게 해석하려한 결과이리라.

    다산의 하북위례성이 한양의 옛고도라하고...고성의 흔적이 있었다는데...추측에 불과할 뿐 주변의 지명 혹은

    위치를 정확히 제시하지 못하고...그렇게 전해진다는 식으로 결론지었다.

    이렇게 역사를 짜맞추기 한다면 유치원...초등생도 웃을 일이다. 

 

    생전 500여권의 방대한 저술과 실학을 집대성한 그가 김부식의 삼국사기 기록에 빠지고, 누락시킨 부분을

    일연선사가 보충하고, 보완한 삼국유사의 기록마저 부정하고, 

    조선조 최고의 성군 세종대왕과 당대 최고의 문장가이며 석학인 서거정이 제원루기에서 직산위례성을 인정했고,

    온조왕묘를 설치해가며 향축을 내려 제사하게 했던 것 조차 잘못된 판단했다고 일축하고,

    자신의 주장이 명쾌하고 합리적인 것 처럼  서술한 다산의 하북위례성설 역시 참고는 할지언정

    일고의 가치가 없다고 본다. 괜시리 학문하는 선비들에게 실학자인 자신의 이론이 당시 최고인양 포장했는데

    반론과 비평을 가할 수 있는 있지만  그것을 추종하는 사학자들도 문제이리라.

    더나가 장수왕의 남진으로 한성이 불타고, 개로왕이 아차산에서 잡혀 죽고, 신라의 구원병 1만명을 데리고 온

    아들 문주왕이 웅천(공주)으로 도망을 가다가 잠시 머문 정도가 직산이라는 등...강아지도 웃을 일이다. 

    참고로 정약용 역시 한강이북 북한강변 양수리가 그의 고향이다.

 

 <다산 정약용(1762~1836, 카톨릭 세례명-안드레아) 생가...남양주시 조안면>

 

 2) 하남(河南)이란 어디인가?

 

    그렇다면 도대체 하남이란 어디인가? 구체적으로 어느곳인가?

    기존의 주장대로 한수이남의 지역을 통칭해서 하남이라 합니다. 

    고기록의 자료가 한강이남이 하남이라는 기록은 없지만 대체로 한강이남의 지역을 하남이라 지칭함에

    별무리가 없어 보입니다.

    여기서 하남이란 지역의 단서를 찾을 수 있는 근거와 기록이 남았습니다.

    온조왕과 더불어 졸본부여를 떠난 열명의 신하 중에 있습니다.  과연 누구일까요? 

 

  시조 : 조성(趙成)


시조 조성(趙成)은 백제의 개국공신(開國功臣)이다.
직산조씨갑자대동보에 의하면 시조 조성(趙成)은 한(漢)나라 성제(成帝, 11대 황제, 재위기간 : 기원전 32 - 7) 때

주몽(朱蒙)의 셋째 아들 온조(溫祚)를 도와 위례성(慰禮城)에서 백제(百濟)를 건국하고,

한산(漢山)으로 천도(遷都)하여 마한(馬韓)을 멸망시킨 후 백제창업의 기초를 확립하는데 훈공을 세워

경양군(慶陽君)에 봉해졌으며, 뒤에 다시 예성부원군(醴城府院君)으로 개봉되었다가

하남백(河南白)에 이봉(移封)되었다고 하며,

그의 아들 조준연(趙俊連)과 손자 조입충(趙立沖)이 함께 금오대장군(金吾大將軍)을 역임한 것으로 전한다.

그 후 시조의 손자 조입충(趙立沖)으로부터 고려 말기에 이르기까지의 계보가 전해지지 않아

후손들은 고려 말에 중정대부(中正大夫)로 합문지후사(閤門祗侯使)에 올랐던 조원우(趙元祐)와

병부 낭중(兵部郞中) 조원경(趙元慶),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지낸 조복원(趙復元),

태자 첨사(太子詹事) 조영원(趙永元), 조선 때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역임한 조응원(趙應元) 등 다섯 계통으로

갈라져서 각각 중시조로 받들고 대를 이어왔다. 

하남백(河南伯, 직산의 옛 이름)에 개봉되어 후손들이 직산을 본관으로 삼았다.  

시조의 묘소는 충남 천원군 직산면 군동리에 있고 매년 10월 2일에 향사한다.

 

***하남백(河南伯) 조성(趙成)이 직산이 백제초도 하남위례성의 옛 땅임을 증명합니다. 

    백제의 개국공신인 조성에게 온조왕은 위례성의 옛땅인  직산지방을 封土로 주며 <河南伯>이란 작위를 줍니다.

    처음에 조성은 경양군(慶陽君)으로 봉해집니다.

    경양군은 지금의 경기도 평택시 아산만 부근인 팽성 노양리, 계양일대에 있으며,

    옛 직산현의 경양창(慶陽倉) 및 경양포(慶陽浦)가 있던 곳입니다. 해상교통의 요로입니다.

    또한 고려때에는 하양창(河陽倉)이 있었으며, 현령과 염장관(鹽場官)을 겸하게 했습니다.

    해양물류와 어자원,소금의 중요성은 인류 생존의 필수 입니다. 

    안성천+진위천이 합수하며, 지금의 평택항이 있는 곳에는 중국을 오가던 大津(대진, 한진나루)가 있었습니다.

    경양포 건너편 공세곶은 조선시대 三道海運의 중심, 朝稅米를 나르던 貢稅倉이 있던 곳입니다.

    그리고 위례성이 있었던 직산 용안치에는 그의 묘소가 慰禮 王城을 마주보며 있습니다.

 

 <직산조씨 시조 신도비---경양군, 백제 개국공신 하남백 조성의 신도비---직산읍 군동리 마을 입구 >

 

***하남(河南)---하남은 지금의 직산지방을 말함이며, 경양군은 지금의 평택시 팽성읍 노산리 직산현 망해산

    봉수대 아래에 있다.  둔포의 탁천 하류에 경양포구 있었다.

    1970년대초 아산만 방조제를 막기전 경양포구는 활발한 직산의 포구였으며, 내륙 깊숙한 둔포와 연결된다.

***하북(河北)---지금의 평택시 진위면 하북리를 일컬으며, 용인의 부안산에서 발원한 물이 진위천을 흘러

    기흥~신갈 ~오산천으로 흐르고,진위초등학교가 위치한 하북리를 통과한다.

    이는 아산만~안성천을 기점으로 하남, 진위천 유역을 하북으로 온조왕대에도 불렸을 것으로 추정 할 수 있다.

 

***백제 개국공신 하남백...조성(趙成)의 묘소...직산읍 군동리 용안치 연암 중봉하에 있다고 직산현지에 기록함.

    그의 묘소는 동쪽을 바라보며 백제의 진산 부소산(458m)과 위례성을 바라보고 있다.

 

 *** 백제개국공신 조성의 관작명 경양군(慶陽君)...경양현...평택시 팽성읍 노산리..아산만과 둔포의 탁천에 있다.

      건너편 아산의 인주면(仁州面)에는 밀두리가 있고, 공세곶 조세창에는 삼도해운판관비가 있다.

     <1872년 직산현 고지도...서울대 규장각 >

 

 <해동도...직산현 경양면...경양창...왼쪽 상단 > 

 

***해동도---직산현의 慶陽面...// 

 

 

***진위현(1872년 고지도)---아산만을 중심으로 북쪽의 진위천 유역은 고구려 부산현...조선때 경기도에 예속됨.

    지금 생각컨대 경양현의 북쪽 진위천 유역은 하북(河北), 안성천 유역은 하남(河南)이 유력시됨. 

 

       ***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 하북리(下北里)---(하북초등학교...옛 진위현 읍치)---평택현과 양성현 경계 //

 

 < 광여도...진위현 읍치와 진위천 >

 

***그리고 천안전씨 시조 전섭(환성군--천안군의 옛지명)과 목천(백제 대목악군,목주)마씨의 시조 마려입니다 // 

 

 <10명의 신하 중...천안을 본향으로 하는 분...전섭, 마려 > 

 

1) 전의전씨 전섭 //

 

전씨세보(全氏世譜)》에 따르면 정선전씨(旌善全氏)의 도시조(都始祖, 가장높은, 처음)는 환성군(歡城君) 전섭(全攝)이며, 그는 백제(百濟) 개국공신으로 고구려 동명성왕(주몽, 朱蒙)의 세째 아들 온조(溫祚)가 남천(南遷, 남쪽으로 옮겨가는) 시(時, 때)에 부여 위례성(慰禮城)에 도읍을 정하고 백제(百濟)를 개국할 때 배종(陪從, 같이 모시면서 도운)한 오간(烏干),  마려(馬藜), 을음(乙音), 해루(解婁), 흘우(紇于), 한세기(韓世奇), 곽충(郭忠), 범창(?昌), 조성(趙成) 등과 함께 백제(百濟) 개국에 공(功)을 세워 십제공신(十濟功臣, 10명의 공신)의 한사람으로 환성군(歡城君)에 봉해졌다.

그러나 삼국통일의 전란 속에 전섭의 후손에 관한 기록은 7세에 걸쳐 소멸되었다. 신라통일 이후 8세손 전선이 신라 성덕왕 22년 당나라에 입국하여 중국의 문물을 국내에 소개한 인물로 신라때 벼슬이 추부시랑(秋部侍郞)에 오르고 정선군(旌善君)에 봉해졌다.

모든 전씨는 환성군(歡城君) 전섭(全攝)을 도시조(都始祖, 가장높은, 처음)로 하고 정선군(旌善君) 전 선(全渲)을 득관중시조(得貫中始祖, 본관(本貫)을 처음 얻게 된 중시조로하고 있다.

  모든 전씨는 정선을 대종(大宗, 종가, 직계)으로 하며, 전국 대동보(大同譜, 전국 통합 족보)를 전국통합으로

발행한다.

  정선전씨(旌善全氏)는 환성군(歡城君) 전섭(全攝)을 시조(始祖)로 1대(一代) 18파(十八派)로 분파(分派)하였다.

       

      <천안전씨,전의전씨 백제 개국공신 환성군 전섭(全攝)의 묘...천안시 풍세면 삼태리 > 

 

 

2) 목천마씨(木川馬氏)  마려 //

 

 마(馬)씨는 삼한시대 부족국가에서 시작된 우리나라 토착 성씨다. 마한의 첫 군주인 마겸(馬謙)이 비조(鼻祖)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마씨 문중에서는 백제 건국의 십제공신(十濟功臣)으로 좌보(左輔)의 벼슬을 역임한 마려(馬黎)를 시조로 받들고 있다.

 마려는 오간(烏干) 등 10명의 신하와 함께 온조왕을 따라 고구려에서 병사들을 인솔하여 위례성에 십제국(十濟國.후에 백제로 개칭)을 세워 온조를 왕으로 추대했다.

 형 마신(馬信)은 고구려에 남아 동명왕을 보필했다. 그러나 이후의 후손은 알 수 없다. 백제가 멸망한 후에 백제의 복구를 도모했던 마육황(馬陸況.또는 마육침)을 중시조로 할 뿐이다. 1세조도 마육침(馬陸沈)이다.

 마육침은 서기 660년 당나라 소정방과 신라 김인문이 이끄는 13만 나당 연합군에 의하여 백제가 멸망하자 군사를 일으켜 옛 목지국의 성거산(충남 직산)을 근거지로 백제 부흥전을 도모했던 장군이다. 

 마육침의 8대손인 마순흥(馬順興)은 고려 정종 때 문하시중 평장사에 오르고 목천군에 봉해졌다. 그의 아들 마점중(馬占中)이 문종 때 목주군에 봉해지자 본관을 목천으로 하였다.

 

***역사란 쉽게 잊혀지고,지워지지 않습니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나지 않습니다.

   하남위례성 직산을 중심으로 백제의 개국공신들이 잃어버린 칠백년 백제왕도를 베고 누워 있습니다.

   하북--한강이북에 이런 족보를 간직한 분이 있습니까???

   하남이란 직산조씨 시조이며, 백제의 개국공신인 하남백이란 작위에서 우리는 그 단서을 찾았습니다.

   하남(河南)은 바로 직산지역을 일컫는 말입니다. 

 

3) 삼각산 부아산에 대하여

 

○ 삼각산(三角山)ㆍ남산(南山)

《조선부(朝鮮賦)》 주(注)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삼각산은 곧 왕경(王京)의 진산(鎭山)으로서 산세가 가장 높은데, 왕궁은 그 산의 산허리에 있다. 산마루를 바라보니 높은 산들이 마치 톱니처럼 생겼다. ○ 홍제원(弘濟院) 동쪽으로부터 반 리도 채 못 가서 하늘이 한 관문(關門)을 만들었는데, 북쪽으로는 삼각산에 접하고 남쪽으로는 남산에 접하였으며, 그 사이로는 말 한 필만이 통과할 수 있어서 험하기가 이보다 더할 수가 없다. ○ 동쪽으로 여러 산을 바라보면 모두 팔짱을 끼고서 둘러싸고 있는 형세이다. 삼각산에서 남산에 이르기까지 산빛은 모두 희면서도 약간 붉어 바라보면 마치 흰 눈이 온 것 같다.

  <해동역사 지리고 13편...산수 > 

 

 

    은평구 진관내동에서 발견된 신라 화업십찰 중 하나인 <부아산>이란 청담사지의 명문 기와에 관심이 쏠린다.

    이 역시 살펴보면 백제 온조왕이 한성지역을 통치하던 시대의 지명이 아니다.

    백제가 고구려 장수왕(서기475년)에 의해서 불타고 공주로 천도하면서 후일 신라가 한강유역을

    자기이 영토로 삼으며, 백제의 지명을 개칭해서 불렀을 것으로 생각된다.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北漢山 新羅 眞興王 巡狩碑)는 서울특별시 용산구 용산동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신라시기의 석탑이다. 국보 제 3호이며 1962년 12월 20일에 국보로 지정되었다.

신라 진흥왕 16년(555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학자에 따라 그 뒤에 세운것으로 보기도 한다.

비신 높이가 1.54m, 너비가 0.69m, 두께가 0.16m이다. 조선시대에는 무학대사의 비로 알려져 있었으나,

1816년에 김정희가 이 비를 조사하여 그 참모습이 밝혀지게 되었다.

 

 <백제 제26대 성왕(?~554년) 재위 : 523~554년 음력 12월 >

538년 봄에 수도를 웅진에서 사비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라 하였다. 불교를 진흥했으며 중국의 남조와 활발하게 교류하여 일본에 불교를 전파하기도 했었다. 고구려의 내정이 불안한 틈을 타서 한강유역을 부분적으로 수복했지만 곧 신라에게 빼앗겼다.

553년 음력 7월 한강 유역의 대부분을 신라에 빼앗겼다. 음력 10월에 왕의 딸이 신라에 시집갔다.

554년 일본에서 병사를 모으는 한편, 왕자 여창(餘昌:27대 威德王)과 함께 친히 군사를 동원하여 신라 공격에 나섰다.

554년 음력 12월 아들인 여창이 신라로 쳐들어가 구타모라(久陀牟羅)에 요새를 쌓고 있었는데

이를 위로하러 가던 중 관산성 전투에서 신라군에게 잡혀 살해당하고 말았다. <위키 백과사전>

 

  비의 건립연대는 비문에 새겨진 연호가 닳아 없어져 확실하지 않으나, 진흥왕(眞興王) 16년(555)에 왕(王)의 국경순수기념비(國境巡狩記念碑)의 하나로 북한산(北漢山) 비봉(碑峰)에 세워졌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진흥왕은 553년 백제로부터 한강 하류지역을 탈취하고, 554년 관산성전투(管山城戰鬪)에서 승리하여 이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한 후, 555년에 직접 북한산주(北漢山州:지금의 서울)를 순행하여 '척정봉강'(拓定封疆)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비문 중에 '남천군주'(南川軍主)가 나오므로 남천주가 설치된 568년 이후로 보는 견해가 있지만, 신라 주의 치폐관계는 문헌을 통해서는 잘 알 수 없으므로 555년이 건립연대일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眞興王巡狩碑興太王及衆臣等巡狩管境之時記□分甲兵之□□□年□□□□覇主設□賞□所用高祀□□□□□□相戰之時新羅太王德不□兵故□□□□□强建文大득人民□□□□□□□□□□□□□□□□□□□□如有忠信精誠□□□□□□徙可加賞舜物以□□心引□□衆路過□城陟□□見道人□居石窟□□□□刻石誌辭□□尺干內夫智一尺干沙喙□□智近干南川軍主沙夫智及干未智大奈末□□□沙喙屈丁次奈天指□□幽則□□□□□劫初立所造非□巡守見□□□□□刊石□□□記我万代名 

     

  제1행에서 "진흥태왕(眞興太王)과 중신(衆臣)이 순수관경했을 때 세웠다"는 구절이 확인되며, 민심을 수습하고 공을 세운 자들에게 포상을 내린다는 등의 내용이 있습니다.

 대부분이 진흥왕의 영토확장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비의 건립연대는 비문에 새겨진 연호가 닳아 없어져 확실하지 않으나, 창녕비가 건립된 진흥왕 22년(561)과 황초령비가 세워진 진흥왕 29년(568) 사이에 세워졌거나 그 이후로 짐작하고 있다.<국립박물관>

  

** 위와같이 백제의 성왕은 한강을 빼앗긴 후 관산성에서 죽고, 이후 한강유역은 신라의 차지가 된다.

    신라는 한강유역을 차지하며, 북한산성(북한성)이 있는 이곳에 전승 축하의 기념비를 세운다.

** 왜 하필 북한산 그 높은 바위 위에 비석을 세웠을까? 

    이유는 간단하지 않으가? 

    상징성이다. 백제의 수도가 있던 곳에 비석을 세움으로써 신라인의 자긍심을 높이고자 함이다.

    황초령비,마운령비,창령비 또한 고구려와 가락국의 영토 깊숙한 곳이다. 

    신라의 대외적으로 국력신장의 상징이요, 민심수습의 결단이리라. 

 

 <신라 화엄종의 시조...의상대사>

신라시대 고승(高僧). 속성은 김씨(金氏). 한국 화엄종(華嚴宗)의 시조이다. 19살 때 경주 황복사(皇福寺)에 출가하여 650년(진덕왕 4) 원효(元曉)와 함께 구법(求法)을 위해 당(唐)나라로 가던 중 난을 당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국하였다가, 661년(문무왕 1) 당나라 사신의 배를 타고 중국에 들어가 양주(揚州)에 머물렀다. 그 뒤 종남산 지상사(至相寺)로 지엄(智儼)을 찾아가 그의 문하에서 구도(求道)에 정진하여 화엄의 이치를 깨달았다. 670년 귀국하여 낙산사(洛山寺) 관음굴(觀音窟)에서 신라에 화엄대교가 퍼지기를 기원하며 《백화도량발원문(白花道場發願文)》을 지어 관세음보살에게 바쳤다. 676년 왕의 뜻을 받아 태백산에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하고 화엄을 강술하여 해동화엄종(海東華嚴宗)의 시조가 되었다. 이후 화엄대교를 전하기 위하여 팔공산 미리사(美里寺), 지리산 화엄사(華嚴寺), 가야산 해인사(海印寺), 웅주(熊州) 보원사(普願寺), 계룡산 갑사(甲寺), 삭주(朔州) 화산사(華山寺), 금정산(金井山) 범어사(梵魚寺), 비슬산(琵瑟山) 옥천사(玉泉寺), 전주 국신사(國神寺) 등의 화엄10찰(華嚴十刹)을 짓고 강술과 전교에 힘썼다. 그에게는 3000여 명의 제자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 오진(悟眞)·지통(智通)·표훈(表訓)·진정(眞定)·진장(眞藏)·도융(道融)·양원(良圓)·상원(相源)·능인(能仁)·의적(義寂) 등을 사람들은 10대덕(十大德)이라 불렀으며 이들은 항상 의상을 모시면서 화엄학을 수학하였다. 저서로는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勝法界圖)》 《십문간법관(十門看法觀)》 《입법계품초기》 《소아미타의기(小阿彌陀義記)》 《일승발원문(一乘發願文)》 등이 있다. 시호는 해동화엄시조원교국사(海東華嚴始祖圓敎國師). <네이버 백과사전>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불교의 화엄사상을 통해서 분열된 민심을 수습하고, 전쟁과 가난과 기아 등으로 고통 받는

   백성들을 위무하기 위해서 화엄10대 종찰을 짓는다.

   이때 멸망한 백제의 도읍지 한성 북한산 아래 청담사를 세우고, 백제 건국의 주산인

   부아악(부아산)의 이름을 따서 상징적인 의미로 負兒山(삼각산) 靑潭寺라 부른 것이다. 

 

 **아무리 청담사 기와의 고고학적 유물자료가 백제의 부아산이라 기록은 했지만 꼭 그곳이 부아산 아래이기 때문에

    <부아산 청담사>라 기록만 하는 것은 아니다.

    백제 한성의 도읍지에 백제 온조왕이 오른 부아산의 지명을 명문화 함으로써 백제 유민들을 위무하고

    통치기반을 넓히려는 의도로 해석 할 수 있다. 

    그러한 예로 백제의 옛땅에 있는화엄10대 종찰 중에는 <웅주의 보원사, 계룡산 갑사, 전주의 국신사>를

    예로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삼각산 인수봉 //

 

       ***북한산성...//

 

***북한산에서 본 남산...관악산...청계산...//

 

 

***삼각산(三角山) 유래→세귀퉁이 뫼→소귀,쇠귀→우이(牛耳)...백제어 연구...도수희 //

 

 

***삼각산 인수봉...//

 

***삼각산 인수봉...//

 

 

***삼각산에서 본 한강...//

 

***삼각산에서 본 도봉산...//

 

 

 4) 부아산은 어디인가???

 

   삼국사기에 나오는 온조일행이 도읍을 정하기 위해서 올랐다는 부아산???

   북한산 삼각산--인수봉???

   한산(광주)의 부아산??? 어딜까요... 삼국사기를 읽어보죠.

 

 그들은 마침내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嶽)에 올라 살만한 땅을 바라보았다.

비류는 바닷가에 가서 살려 했다. 열 명의 신하가 간하기를,
"이 하남(河南)의 땅은 북으로 한수漢水를 두르고[帶], 동으로 큰 산[高岳]을 의지하고[據],

남으로 옥택(沃澤)을 바라보며[望] 서로는 대해大海가 막았으니[阻] 이 천험지리는 얻기 어려운 지형입니다.

이곳에 도읍을 세우는 것이 어찌 마땅치 않겠습니까?" 비류는 듣지 않고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에 살았다.

 

 ***역사적 유물로 발견된 최고의 장소는 삼각산입니다(윗글...화엄종찰 청담사 명문 기왓장)

 ***그러면 후세의 인물들은 어디라고 기록했을까요???

    하북위례성설을 믿었던 대동여지도를 그린 김정호...그는 어디에 표시했을까요??

 

 

***역사의 의문입니다.

   자신이 그린 한산 부아산을 이렇게 그리는 사람도 있습니까???

   삼각산에다 부아산이라 표시하지 않고, 용인(옛 광주의 한산)에다 표시하는 미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김정호 이전에 그린 고지도 역시 많이 있지만 자신이 직접 발로 뛰고 그린 그림이라고 우린 배웠습니다.

   또한 삼각산이 부아산이라며, 하남의 대칭인 하북위례성이라던 사람들은 어찌 설명 할까요???

   설마하니 고산자 김정호가 마약먹고 환각 상태에서 그리진 않았겠죠??? 

 

 

 

***위 지도는 광여도의 수원부와 용인현의 지도입니다.

   여기도 수원부의 광교산 옆에 부아산이라고 그렸고, 용인현의 지도에도 분명 부아산이라고 그렸습니다. 

 

 ***여지도...용인 부아산 //

 ***동여도...수원부의 부아산 //

 ***동여도...용인의 부아산 //

 

***이상합니다...실학자들은 이 지도를 못봤겠죠??

   자신들이 살았던 비슷한 同時代의 지도들이 이렇게 엉터리라면 뭐하러 그리겠습니까??

   조선의 관리들이 무능해서 일까요??? 

   옛날 사학자들은 그냥 자신의 주장과 논리만 고집스럽게 얘기했나요?? 

   그렇게 무지몽매 했을리는 없고...정보가 부족했었겠고... 

***조선후기 실학자들이 사는 동시대의 지명이 서로 상이할리도 없고...그렇게 유명한 삼각산 부아산을

   왜?? 그리지 않았을까??? 의문입니다. 

***지도를 제작한 김정호 역시 몰랐는데 다른 사람들이야 오죽했을까???

   임금님이 사는 곳이라 감히 무서워 못그렸을까???

 

 

 ***경강부임진도...북한산성과 경성이 보입니다. 

 

 

 

***도성연융북한합도 //

 

***삼각산을 부아악,부아산이라 표현한 곳은 많은 지도를 눈씻고 찾아봐도 없습니다.

   단지 용인현에 부아산은 눈부실 정도로 뚜렷히 그렸습니다. 

***역사는 기록과 유물로 증명합니다...생떼는 쓰지마세요...//

 

***삼국사기 온조왕조의 한산 부아산은  바로 용인대 뒷산이며, 한남정맥의 기점이며,

   아산만(안성천),진위천과 경기 오포와 광주읍을 지나 한강으로 흐르는 수계의 분수령입니다.

 

 ***용인대학교와 부아산(負兒山)...//

 

 

***부아산 아래의 고개...석성산...//

 

***부아산 정상에서 본 수원...한남정맥 능선..//

 

***부아산 정상에서 본 수원, 신갈...한남정맥...//

 

***부아산 정상에서 본 용인시와 석성산...//

  

***다산의 말처럼 "가난한 선비가 높은 벼슬아치의 책이 틀렸다고 일일이 나무라는 셈이지만, 사실이 그렇다."

   다산의 말을 200년이 지난 직산의 후학이 돌이켜 생각컨대 이 말을 땅속에 계신 다산께 돌려주고 싶다.

   유적과 유물이 명쾌히 직산 하남위례성을 증명할때, 쾌도난마처럼 밝혀질때 이 글을 쓰는 나 역시 

   200년 아니 10년의 미래가 마냥 두렵기만하다고... //

 

5) 미추홀은 어디인가???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모두 지금의 인천광역시 문학산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마한왕이 동북100리 지경>을 주었다는데 왜?? 지금의 인천 문학산 아래일까?? 

    그러면 200리를 내주어야 하는데...아니면 온조에게는 100리를 내주고...

    비류에게는 지금의 인천부근 100리를 내주었단 말인가??? 앞뒤가 맞지않고 빙빙빙 헷갈립니다.

 

    또한 비류는 온조와 헤어져 5개월만에 부끄러 미추홀에서 자결했다는 기록도 있고... 

    미추홀이란 어원도 좀처럼 명쾌히 밝혀지지 않고...상고사란 수수께끼인가??

    베일을 밝혀 보겠습니다.

 

1) 미추홀은 무슨 뜻인가???

 

   일부에서는 <용의성>이란 우릿말로 풀이하는데 억지의 냄새가 납니다. 

   그러면 무엇인가???

   미추홀은 순수한 우릿말로 밀머리에서 온 말입니다.

   밀머리--밀물과 썰물이 들락거리는 머리>>> 한자표기로 밀두(密頭) >>> 동음이의어 미추(彌鄒)입니다.

 

<미추홀(彌鄒忽)은 밀두리(密頭里)...밀머리/ 현재-아산시 인주면 밀두리>

 

三國史記 百濟本紀...

...沸流欲居於海濱...沸流不聽,分其民,歸彌鄒忽以居之,溫祚都 河南慰禮城,以十臣爲輔翼,國號 十濟...

   沸流以彌鄒土濕水鹽,不得安居,歸見慰禮,都邑定鼎,人民安泰,遂慙悔而死, 其臣民皆歸於慰禮

   後以來時百姓樂從,改號百濟.../

 

<밀머리(순우리말)--밀두리(이두문자)--미추홀(百濟語) : 論爭에 종지부를 찍습니다>

 

1.밀두리(密頭里) : 순우리말로 ...<밀머리 : 밀물의 머리쪽/밀물과 썰물이 들락거리는 머리>...란 뜻입니다.

                         밀머리를 한자음을 빌려(이두문자)...밀두리(密頭里)라 한것입니다.

2.미추홀(彌鄒忽) : 밀머리--→密頭里 (이두식표현....음훈차)

   도수희 저 <한국의 지명>---密(밀)의 동음이의어 1) 三--셋(석삼) 2) 推--밀(밀추)

   밀추를 부여족인 백제어로 바꿔서 표현합니다.

                         

3.결론 : 밀머리--→密頭里(이두문자)--→彌鄒忽(부여족의 백제어)

           彌鄒忽(城)은 밀두리...밀머리(밀물의 머리쪽)와 같은 뜻입니다/

 

*아산시 인주면 밀두리(남쪽 마을)에는 馬韓時代의 地名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새때배기---솟대박이 : 소도(蘇塗...天神에게 제사 지내는 聖地,죄인들의 피난처)

  세대박이---돛이 세개 달린 배...大洋을 넘나들던...중국사신이 오갔던 커다란 무역선,帆船입니다.

            지금의 당진(唐津),남양만 당항성의 의상,원효대사 얘기...등 이곳은 대중국 무역항이며,

            백제초도 위례성의 관문입니다...지금도 평택항에는 페리호가 중국 산동반도를 오갑니다// 

     

*아산 인주 밀두리 옆에는 貢稅串(공세곶)이 있습니다...지형이 아산만과 삽교천의 합수머리에 있어

  육지가 서해바다로 나가는 뱃머리인양 돌출되었습니다...그래서 밀물과 썰물의 머리쪽 지형에 해당되지요...

  미추홀(밀두리)은 충청,전라,경상도 海運의 요충지입니다.

 

*百濟(十濟)初都 당시 馬韓에는 中國에서 남쪽으로 이주하거나, 도망, 피난 온 유민들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비류와 온조 역시 졸본부여에서 南下한 사람들입니다///

 

*아산만 : 안성천과 진위천의 합수점인 동시에 용인,광주의 慶安川과 분수점.

 

 1. 안성천--칠장산,고삼지,서운산,위례산,성거산 등의 한남-금북정맥에서 발원함.

 2. 진위천--부아산 서북쪽 신갈,기흥저수지와 동남쪽 이동(송전)저수지,水原의 광교산에서 물이 발원하며,

    특히 용인의 負兒山은 경기도 광주의 慶安川과 牙山灣의 分水嶺이 되는 한남-금북정맥임.(용인...학고개)

 3. 비류와 온조...열 명의 신하들은 경안천과  아산만 상류이며, 한남-금북정맥의 주봉인

     한산 부아악(용인)에 올라 이쪽,저쪽의 지형과 물길을 살펴서 직산위례성에 도읍하고 BC18~BC5(13년)

     한산 광주로 遷都한 것입니다.(온조왕14년 정월//七月 築城漢江西北 分漢城民)

 4. 옛날부터 용인의 부아산(負兒山)과 멱조현(覓祖峴)에는 孝婦에 관한 說話가 지금까지 전해 옵니다.

 

 

 

 

***아산 영인산성에서 본 입암산과 좌측--밀두리(미추홀)와 삽교천...우측--아산만방조제 /// 

 

***아산시 영인산성에서 본...서해 아산만... ///  

 

 ***영인산성에서 본 서해대교...평택항구...///

 

 ***영인산성에서 본 밀머리(밀두리,미추홀)와 삽교천 방조제...///

 

 ***牙山縣 邑治(아산시 영인면)---온조왕 43년 가을 8월에 牙山原에서 5일간 사냥했다... //

 

6) 말갈의 잦은 침략에 하북→하남 천도설에 대하여

 

 말갈(靺鞨)의 명칭을 보면 중국측에서 漢子化하기는 하였지만 

史書기록시 말갈족 자신들이 자신들을 일컸던 명칭을 염두에 두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렇다면, 말갈의 원래의 발음은 이와 유사했으리라 생각된다.
그런데, 고구려, 발해 시대에 그 구성원중의 하나인 말갈족언어의 관리를 위해 별도의 조직을 운용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어, 발해어가 통용되었거나, 의사소통에 큰 어려움이 없는 정도의 유사성을

가졌었다고 정할 수 도 있겠다.
그래서, 우리 고대어와 연결지어 보니 '말'+'갈', '말'+'겨레'등이 떠오른다.
'말'은 크다는 뜻이고 '갈'은 작다는 뜻이다. 또한, '갈'은 '갈래', '겨레'등과 동원류로 볼 수도 있겠다.
일일 사극에 자주 등장하는 "대소 신료들 ......" 와 연결지어 보면,

'말갈'은 '크고 작은(많은 부족,마을)'을 칭하는 말에서 왔다고 추정할 수도 있겠다.

말갈족이 큰 구심점없이 소부족 단위로 여러나라에 服屬해온 점을 감안할 때 일리가 있다고 생각된다.
'갈'을 '갈래', '겨레'와 동윈으로 보면, '큰 갈래', '큰 겨레'로 해석되어 '큰 의미에서의 같은 族屬'을 호칭하는

것이라고 추정할 수가 있겠다.
이렇게 보면, 온조왕때 하남위례성을 침입한 말갈은 고구려 북쪽 또는 함경도지방에서 남하한 것이 아니라,

온조백제 주변에 토착하고 있던 다소 독립적인 부족이었다는 결론에 이른다. 
또한, 거주지역이 같다는 이유로 말갈을 숙신, 읍루, 물길과 같은 원류의 민족 또는 집단으로 취급하는 것도

상당한 무리가 있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말갈족이 거주하여온  지역은 기원전 수세기전부터 중국의 정치상황, 만주지역, 한반도의 정치상황에

따라 많은 집단들이 이주해 오고 나가는 연출을 계속해 왔기 때문에 활동성이 미미한 土着部族集團을 제외하고는

같은 집단으로 보기엔 무리가 있다.
고구려, 발해는 말갈족을 軍事集團으로 활용해 왔기 때문에 활동이 미미한 토착집단과 동일시 하기

어렵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나는 말갈족을 古朝鮮, 夫餘시대부터 있어온 우리민족의 한 갈래라고 생각하며,

그 동안 高句麗, 渤海시대에 다소 異質的으로 취급되었던 것은 그들이 支配階層을 형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女眞族, 滿洲族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생각된다. 

 

 정약용은 이에 대해서 "제원"이라는 이름은 다른 지역에도 있으며, 부아악은 북한산이니 직산에서 너무 멀고, 도읍은 한수 이북에서 한수 이남으로 옮긴 것이며, 직산은 문주왕이 달아나며 공주에 도읍하기 전 잠시 머무른 임시 거처였을 거라는 추정을 한 바 있다.
정약용은 부아악에 올랐다는 온조 원년의 기록이 온조 13년의 기록이 잘못 쓰인 것이라 생각했다.

온조 13년의 기록은 이렇다.
봄2월에 서울의 한 늙은 노파가 남자로 변했다. 범 다섯 마리가 성 안으로 들어왔다. 왕모王母가 세상을 떠나니 나이 예순한 살이었다. 여름 5월에 왕이 신하들에게 말했다.
"우리나라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 국경을 침범하므로 편한 날이 적다. 더우기 요즘은 요망한 조짐이 여러번 일어나고 국모가 세상을 떠나시고 형세가 편안치 않으니 서울을 옮겨야 하겠다. 전일 순행해서 한수 남쪽을 바라보니 땅이 기름져 그곳에 도읍하여 오래도록 편안할 계책을 도모해야 하겠다."
가을 7월에 한산 아래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민호를 옮겼다.

 13년조 기사에서 동에 낙랑이 있고, 북에 말갈이 있다는 말은 낙랑을 평안도 일대에 비정하는 한 성립되지 않는 말이다. 신채호는 이 때문에 [삼국사기] 기사에는 동과 서를 혼동한 것이 많다고 했는데, 나는 그 말로도 백제의 위치를 설명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나는 함흥으로부터 강원도 북부에 이르는 지역이 낙랑의 영동7현이었던 점을 주목한다. 이 때문에 후일 이 지역에 최리의 낙랑국(호동왕자가 멸망시킨)이 존재할 수 있었다고 보고 있으며, 온조가 언급한 부분도 이것이라 생각한다. 서기 30년에 낙랑 남부도위가 폐지된 후 3세기 초에 대방군이 설치될 때까지 낙랑의 남쪽 지방은 권력의 공백지대가 되었다. 이곳에 말갈족이 있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이들이 북쪽의 말갈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온조 13년조 기사를 놓고 보면 위례성은 한강 이북에 있다가 낙랑-말갈 등의 침입에 의해 한강 이남으로 내려간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이미 한강 남쪽을 지목하고 있는 원년 기사와 충돌한다. 그래서 정약용은 원년 기사가 13년 기사가 잘못 기재된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정약용은 왕모가 죽은 후 형제가 갈라섰다는 것이 더 타당한 설명이라 본 것 같다.

 ***<blog.empas.com.sbpark58 님의 글--퍼옴>

 

 1. 윗 글처럼 말갈은 백제 온조왕 당시 북쪽을 계속 공격했습니다. 그것이 두려워 남쪽으로 옮겼다는 주장입니다.

     말갈과 낙랑의 백제 침략기를 삼국사기 원문으로 보겠습니다 //

 

<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 

元年, 夏五月, 立<東明王>廟.

#23卷-百濟本紀1-溫祚王-02年

○二年, 春正月, 王謂群臣曰: "<靺 {靺鞨}>連我北境, 其人勇而多詐, 宜繕兵積 , 爲拒守之計." 三月, 王以族父<乙音>, 有智識膽力, 拜爲右輔, 委以兵馬之事.

#23卷-百濟本紀1-溫祚王-03年

○三年, 秋九月, <靺鞨>侵北境, 王帥勁兵, 急擊大敗之, 賊生還者十一二. 冬十月, 雷. 桃李華.

#23卷-百濟本紀1-溫祚王-04年

○四年, 春夏, 旱, 饑, 疫. 秋八月, 遣使<樂浪>修好. 

#23卷-百濟本紀1-溫祚王-05年

○五年, 冬十月, 巡撫北邊, 獵獲神鹿.

#23卷-百濟本紀1-溫祚王-06年

○六年, 秋七月辛未{辛卯}晦, 日有食之.

#23卷-百濟本紀1-溫祚王-08年

○八年, 春二月, <靺鞨>賊{兵}三千來圍<慰禮城>, 王閉城門不出. 經旬, 賊糧盡而歸. 王簡銳卒, 追及<大斧峴>, 一戰克之, 殺虜五百餘人. 秋七月, 築<馬首城>, 竪<甁山>柵. <樂浪>太守使告曰: "頃者, 聘問結好, 意同一家, 今逼我疆, 造立城柵, 或者其有蠶食之謀乎? 若不 舊好,  城破柵, 則無所猜疑. 苟或不然, 請一戰以決勝負." 王報曰: "設險守國, 古今常道, 豈敢以此, 有 於和好? 宜若執事之所不疑也. 若執事恃强出師, 則小國亦有以待之耳." 由是, 與<樂浪>失和.

#23卷-百濟本紀1-溫祚王-10年

○十年, 秋九月, 王出獵, 獲神鹿, 以送<馬韓>. 冬十月, <靺鞨>寇北境. 王遣兵二百, 拒戰於<昆彌川>上. 我軍敗績, 依<靑木山>自保. 王親帥精騎一百, 出<烽峴>, 救之. 賊見之, 卽退.

#23卷-百濟本紀1-溫祚王-11年

○十一年, 夏四月, <樂浪>使<靺鞨>襲破<甁山>柵, 殺掠一百餘人. 秋七月, 設<禿山>·<狗川>兩柵, 以塞<樂浪>之路.

#23卷-百濟本紀1-溫祚王-13年

○十三年, 春二月, 王都老 化爲男. 五虎入城. 王母薨, 年六十一歲. 

夏五月, 王謂臣下曰: "國家東有<樂浪>, 北有<靺鞨>. 侵 疆境, 少有寧日.  今妖祥屢見, 國母棄養, 勢不自安, 必將遷國. 予昨出巡, 觀<漢水>之南, 土壤膏 . 宜都於彼, 以圖久安之計." 秋七月, 就<漢山>下, 立柵, 移<慰禮城>民戶. 八月, 遣使<馬韓>, 告遷都. 遂畵定疆 , 北至<浿河>, 南限<熊川>, 西窮大海, 東極<走壤>. 九月, 立城闕.

#23卷-百濟本紀1-溫祚王-14年 

○十四年, 春正月, (+來)遷(+<漢山>)都. 二月, 王巡撫部落, 務勸農事. 秋七月, 築城<漢江>西北, 分<漢城>民.

#23卷-百濟本紀1-溫祚王-15年

○十五年, 春正月, 作新宮室, 儉而不陋, 華而不侈.

#23卷-百濟本紀1-溫祚王-17年

○十七年, 春, <樂浪>來侵, 焚<慰禮城>. 夏四月, 立廟以祀國母.

#23卷-百濟本紀1-溫祚王-18年

○十八年, 冬十月, <靺鞨>掩至, 王帥兵, 逆戰於<七重河>, 虜獲酋長<素牟>, 送<馬韓>, 其餘賊盡坑之. 十一月, 王欲襲<樂浪><牛頭山城>, 至<臼谷>, 遇大雪, 乃還.

#23卷-百濟本紀1-溫祚王-20年

○二十年, 春二月, 王設大壇, 親祠{祀}天地, 異鳥五來翔.

#23卷-百濟本紀1-溫祚王-22年

○二十二年, 秋八月, 築<石頭>·<高木>二城. 九月, 王帥騎兵一千, 獵<斧峴>東, 遇<靺鞨>賊, 一戰破之, 虜獲生口, 分賜將士. 

#23卷-百濟本紀1-溫祚王-24年

○二十四年, 秋七月, 王作<熊川>柵. <馬韓>王遣使責讓曰: "王初渡河, 無所容足, 吾割東北一百里之地, 安之, 其待王不爲不厚. 宜思有以報之, 今以國完民聚, 謂莫與我敵, 大設城池, 侵犯我封疆, 其如義何?" 王慙, 遂壞其柵.

#23卷-百濟本紀1-溫祚王-25年

○二十五年, 春二月, 王宮井水暴溢. <漢城>人家馬生牛, 一首二身. 日者曰: "井水暴溢者, 大王勃興之兆也, 牛一首二身者, 大王幷 國之應也." 王聞之喜, 遂有幷呑<辰>·<馬>之心.

#23卷-百濟本紀1-溫祚王-26年

○二十六年, 秋七月, 王曰: "<馬韓>漸弱, 上下離心, 其勢不能又{久}.  爲他所幷, 則脣亡齒寒, 悔不可及. 不如先人而取之, 以免後艱." 冬十月, 王出師, 陽言田獵, 潛襲<馬韓>, 遂幷其國邑, 唯<圓山>·<錦峴>二城固守不下.

#23卷-百濟本紀1-溫祚王-27年

○二十七年, 夏四月, 二城降, 移其民於<漢山>之北, <馬韓>遂滅. 秋七月, 築<大豆山城>.

#23卷-百濟本紀1-溫祚王-28年

○二十八年, 春二月, 立元子<多婁>爲太子, 委以內外兵事. 夏四月, 隕霜害麥.

#23卷-百濟本紀1-溫祚王-31年

○三十一年, 春正月, 分國內民戶, 爲南北部. 夏四月, 雹. 五月, 地震. 

六月, 又震.

#23卷-百濟本紀1-溫祚王-33年

○三十三年, 春夏大旱. 民饑相食, 盜賊大起, 王撫安之. 秋八月, 加置東西二部.

#23卷-百濟本紀1-溫祚王-34年

○三十四年, 冬十月, <馬韓>舊將<周勤>, 據<牛谷城>叛. 王躬帥兵五千, 討之, <周勤>自經. 腰斬其尸, 幷誅其妻子.

#23卷-百濟本紀1-溫祚王-36年

○三十六年, 秋七月, 築<湯井城>, 分<大豆城>民戶, 居之. 八月, 修葺<圓山>·<錦峴>二城, 築<古沙夫里城>.

#23卷-百濟本紀1-溫祚王-37年

○三十七年, 春三月, 雹大如 子, 鳥雀遇者死. 夏四月, 旱, 至六月乃雨. <漢水>東北部落饑荒, 亡入<高句麗>者一千餘戶, <浿>·<帶>之間, 空無居人.

#23卷-百濟本紀1-溫祚王-38年

○三十八年, 春二月, 王巡撫, 東至<走壤>, 北至<浿河>, 五旬而返. 三月, 發使勸農桑, 其以不急之事擾民者, 皆除之. 冬十月, 王築大壇, 祠{祀}天地.

#23卷-百濟本紀1-溫祚王-40年

○四十年, 秋九月, <靺鞨>來攻<述川城>. 冬十一月, 又襲<斧峴城>, 殺掠百餘人, 王命勁騎二百, 拒擊之.

#23卷-百濟本紀1-溫祚王-41年

○四十一年, 春正月, 右輔<乙音>卒, 拜北部<解婁>爲右輔. <解婁>, 本<扶餘>人也. 神識淵與{奧}, 年過七十, 旅{ }力不愆, 故用之. 

二月, 發<漢水>東北諸部落人年十五歲以上, 修營<慰禮城>.

#23卷-百濟本紀1-溫祚王-43年

○四十三年, 秋八月, 王田<牙山>之原五日. 九月, 鴻 百餘集王宮. 日者曰: "鴻 , 民之象也, 將有遠人來投者乎!" 冬十月, <南沃沮><仇頗解>等二十餘家, 至<斧壤>納款. 王納之, 安置<漢山>之西.

#23卷-百濟本紀1-溫祚王-45年

○四十五年, 春夏大旱, 草木焦枯. 冬十月, 地震, 傾倒人屋.

#23卷-百濟本紀1-溫祚王-46年

○四十六年, 春二月, 王薨.

     < 온조왕대---낙랑과 말갈의 침입 일지 >

 1. 1년---말갈이 우리 북쪽에 연접해 있고, 그 사람들은 용감하고 거짓이 많으니..중략....계획을 세우시오.

 2. 3년---말갈이 북쪽경계를 침범하니 왕은 굳센 군사를 거느리고 급히 공격하여 대패시키니, 적은 살아서

              돌아간 자가 열에 한 둘이었다. 

 3. 4년---8월에 낙랑에 사신을 보내어 수호하였다.

 4. 8년---2월에 말갈적 3천명이 위례성을 포위해오니 왕은 성문을 닫고 출전하지 않았다.

              10일 지나자 적의 군량이 다하여 돌아갈때...대부현에서...500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7월에 마수성과 병산책을 세웠다. 

              낙랑태수가 사람을 보내어 말하길 "지난날에 빙문과 우호를 맺어 한 집안 같이 여겼는데

              지금은 우리 땅 근처에 성, 책을 세우니 혹시 잠식할 모의가 있는 것이 아니오.

              만약 구호를 변치않아 성을 헐고, 책을 부수어 버린다면 의심바 없으나,

              그렇지 않는다면 한번 싸워 승부를 결정합시다."하니

              온조왕이 답하기를 "험을 만들어 나라를 지키는 것은 고금의 상도이나 어찌 감히 이로써 우호에

              변함이 있겠는가? 마땅히 집사(낙랑태수)는  의심하지 마시오.

              만약 집사가 강함을 믿고 군사를 출동한다면 소국도 역시 대응할 것이오" 하였다. 

              이로인하여 낙랑도 화평을 잃게 되었다. 

 5. 10년---겨울 10월에 말갈이 북쪽 경계를 침구하여 왕은 군사 200명을 보내어 곤미천 위에서 막아 싸우게

               하였다. 우리 군사가 패하여 청목산에 의거하고 스스로 보전하였다.

               왕은 친히 정기병 100명을 거느리고 봉현으로 나아가 구원하니 적이 보고 물러갔다.

 6. 11년---여름 4월에  낙랑이 말갈로 하여금 병산책을 습격하게하여 쳐부수고 100여명을 죽이거나 약탈해 갔다.

               가을 7월에 독산,구천의 두 책을 만들어 낙랑의 통로를 막았다. 

 7. 13년---봄 2월에 왕도의 노파가 남자로 변하고 호랑이 5마리가 성으로 들어왔다.

               왕모가 돌아가니 향년 61세였다.

               여름5월 왕은 신하에게 말하기를 "국가가 동으로는 낙랑이 있고, 북으로는 말갈이 있어서 강토를

               침략하므로 편한 날이 없는데...중략...내가 어제 한수의 남쪽을 순시해 보니 토지가 매우 기름지고,

               마땅히 그곳에 도읍하여 길이 안전할 계책을 도모할 것이다" 하였다

 8. 17년---봄 정월에 낙랑이 침범해와서 위례성을 불태워 버렸다.

 9. 18년---겨울 10월에 말갈이 엄습해 오니 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칠중하에서 역전하여 추장 소모를 사로잡아

               마한으로 보내고, 그 나머지 적은 다 묻어 죽였다. 11월 왕은 낙랑의 우두산성을 습격하려고

               구곡에 이르렀다가 큰 눈을 만나 이내 돌아왔다. 

 10. 22년---가을 9월에 왕은 기병 1천명을 거느리고 부현의 동쪽에서 사냥을 하다가 말갈적을 만나서

                한번 싸움에 깨뜨리고 사로잡은 자는 장사에게 나누어 주었다.

 11. 38년---봄 2월에 왕이 순무하여 동으로 주양에 이르고, 북으로는 패하에 이르렀는데 50일만에 돌아왔다.

 12. 40년---가을 9월에 말갈이 술천성을 공격하고, 11월에 부현성을 습격하여 100여명을 노략하고 죽이니

                 왕은 굳센 기병 200명에게 명하여서 치게 하였다

 13. 41년---2월에 한수 동,북의 여러 부락 사람으로써 나이 15세 이상 된 자를 징발하여 위례성을 수리하였다.

 14. 43년---겨울 10월에 남옥저의 구파해 등 20여호가 부양에 이르러 의탁을 원하니 왕은 받아들여 한산의

                 서쪽에서 편히 살게 하였다.

 15. 46년---봄 2월에 왕이 돌아가셨다.

 

***온조왕대의 말갈과 낙랑의 침입에 대한 기록입니다.

    온조왕이 말갈족이 무서워서 하북에서 하남으로 천도했다는데 과연 그럴까요???

    온조왕대의 정치상황과 마한과 낙랑,그리고 말갈의 틈에서 백제의 살아 남기 위한 전략은 무었일까요??? 

    해답은 비교적 간단합니다.

***1. 남쪽으로는 웅천(공주)의 이남은 마한왕의 지역이라서 은혜와 의리를 중시 여기는 온조왕으로서는

        침략하기는 시기 상조입니다. 온조왕 25년때 비로소 진마(마한,진한)을 병탄할 마음이 있었다 기록했습니다.

        이 때문에 백제의 생존전략은 북쪽과 동북,동쪽으로 세력을 확장 길 뿐입니다.

 

    2. 하북(세검정,삼각산 동록이던간에)에서 하남(풍납성)으로  도읍을 옮긴다고 마한왕께 사신을 보내서

        천도를 알린다는 것은 무리한 해석입니다.

        불과 몇 리 밖에 떨어져 있는 한성지역의 위례 도성을 사신까지 마한왕에게 보내서 통고한다는 것이 문제이고,

        도읍을 천도 할때는  적어도 이 지역과 저 지역의 거리차가 어느 정도 멀리 옮길때 천도라는 말을 씁니다.

        천도와 더불어 백제의 일방적 통고일지는 몰라도 초기 백제강역을 동서남북으로 획정했는데 말입니다.

 

    3. 중요한 것은 남쪽으로 더 이상 진격해서 마한의 땅을 뺏기는 시기상조라 판단한 온조왕은

        직산지방에 위례성이 있었기에, 전략적 군수물자와 인원보충이 용이치 않고, 도성의 오호입성으로

        변란과 해괴한 일이 일어나고, 더욱 기름진 농경지를 찾아서 북쪽의 대수,패수~주양~웅천(공주)~서해의

        중심지로 도읍을 옮겨 길이 안전하고, 영구적인 백제 강역을 확정하려는 목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온조왕은 졸장부가 아닙니다. 낙랑의 사신과의 대화에서 말갈과 낙랑과의 일전을 불사하더라도

        낙랑과 말갈을 격파하지 않고서는 백제의 항구적이고, 지속적인 평화와 태평성대를 도모 할 수 없다고

        판단한 온조왕의 전략적이고  합리적인 천도입니다.

       그래서 대수,패수~주양~웅천~서해의 중심부에 강력한 왕성을 세우려 했던 것입니다.

 

 

  2) 마한왕이 온조왕에게 내준 동북 100리 강역의 문제

 

 ***아래의 기사 내용을 참조바람.<blog.empas.com.sbpark58 님의 글--퍼옴>

 

백제국(伯濟國), 마한(馬韓)의 동북에 자리 잡다
한강유역에 등장하는 철기는 그 시점이 다소 불분명하지만, 점토대토기의 후신(後身)으로서 대략 기원전 100년 무렵에 출현하는 경질무문토기(硬質無文土器)와 더불어 낙랑(樂浪) 등 중국 군현지역으로부터 들어 온 한(漢)의 단조(鍛造) 철기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 무렵부터 고고학적 시대 구분상으로는 원삼국시대(原三國時代)라 하는데, 주로 토기의 변화를 기준으로  3시기로 나눌 수 있다.
기원전 100년부터 기원전후까지는 경질무문토기만 사용되는 시기이고,
기원전후~기원후 200년까지는 경질무문토기와 더불어 격자무늬나 승문, 즉 새끼줄무늬로 표면을 두드린
타날 문토기가 함께 하는 시기이다.
마지막 기원후 200년부터 250년까지의 기간에는 낙랑토기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새로운 형태의 솥인 장란형토기(長卵形土器)와 보조 취사용기인 심발형토기(深鉢形土器)가 등장한다. 장란형토기와 심발형토기는 풍납토성이 만들어지기 이전에 있었던 마을의 환호(環壕), 즉 마을의 범위를 나타내는 인공 도랑 속에서 출토되고 있어 풍납토성의 축조시기를 가늠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삼국지(三國志)』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한(韓)조에는 고고학 시기 구분의 원삼국시대에 존재하였던 여러 정치체의 이름이 열거되어 있고 마한에 속한 백제국은 그 가운데 하나로서 8번째 등장하고 있다. 국(國)으로 이름 붙인 이들 정치체는 아직 국가(國家) 단계에는 이르지 않았으나 일정한 지역을 토대로 뭉친 크고 작은 마을들의 결합체로서 마을 사이에 위계도 확인되며, 주수(主帥)로 표현된 통솔자도 존재하였다. 삼국지 한전에 거명된 국들의 순서에는 그들의 지리적인 위치가 반영되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는데, 북쪽으로부터 남으로 이어지는 차례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백제가 국가로 성장한 공간이 지금의 서울 송파구· 강동구· 강남구 일원임은 틀림없으므로 그 전신이었던 백제국의 위치 역시 이 일대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백제국의 모습은 결국 고고학적으로 드러난 한강유역의 원삼국문화를 통해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한강유역의 원삼국문화는 중도유형문화(中島類型文化)라 불리기도 하는데, 1980년대 초반 춘천 중도(中島)유적에서 경질무문토기 등 새로운 고고학자료가 알려지면서 유래된 것이다.
중도유형문화는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은 토기의 양상과 더불어 출입구 달려 평면형태가 ‘여(呂)’자형 또는‘철(凸)’자형인 특징적인 주거지,
그리고 강변의 자연사구 표면에 냇돌을 얇게 쌓아 올려 만든 즙석식적석묘(葺石式積石墓) 등을 주요 문화요소로 한다. 중도유형문화의 분포는 북한강 및 남한강 중상류지역, 임진강 중상류지역 등이 중심이지만 출입구가 달린 주거지는 강원 영동지역에까지 넓게 펴져 있다.
 


이 문화의 역사적 성격은‘예계(濊系)’종족과 밀접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는데, 강원 영서(嶺西)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이들은『삼국사기』백제본기(百濟本紀)에 백제와 적대적인 세력으로서 삼국사기 찬자들이‘말갈(靺鞨)’로 오인한 세력임이 틀림없다. 고고학자료에 종족과 관련된 명문(銘文)이 남아 있지 않는 한 특정 고고학자료를 남긴 종족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기는 어려우며, 전술한 삼국사기와 같은 문헌사료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중도유형문화를 예계집단과 관련된 것으로 볼 수 있게 하는 또 다른 근거는 광개토왕릉비문(廣開土王陵碑文)에서 찾을 수 있다. 거기에는 영락(永樂) 5년(395) 광개토왕에게 빼앗긴 백제 북방의‘58성(城) 700촌(村)’의 이름과 함께 그 출신자들을 왕릉을 지키는 수묘연(守墓烟)으로 뽑아 배치하면서 종족명을 병기하고 있다. 백제의 북방은 대체로 한강유역의 북쪽지역으로 보아도 좋을 것인데, 이곳 출신자의 종족 이름에는‘한(韓)’과‘예(穢)’가 섞여 있어 한강유역 특히 한강 이북 지역은‘예’가 중심이면서 일부‘한’도 함께 있었던 곳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삼국사기』백제본기에 기록된 온조집단의 정착 시점인 기원전 18년 무렵의 한강유역은 고고학적으로 중도유형문화의 이른 시기에 해당된다. 온조집단이 처음 한강유역에 이르렀을 때의 사정은『삼국사기』백제본기 온조왕 24년(6)의 기사에 잘 나타나 있다.“처음 도하(渡河)해 왔을 때에는 발 디딜 땅조차 없던 것을 (마한왕이) 마한의 동북지역 100리의 땅을 할애하여 자리 잡게 하였다”는 것이다. 이 내용은 백제가 마한에 대한 적대적인 행위를 하는 것을 마한왕이 항의하는 가운데 나온 표현이기는 하지만 처음 백제 건국 세력이 한강유역에 정착하던 때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마한의 동북 변방, 즉 마한지역과 예계 종족 지역 사이의 틈바구니였던 한강유역에 자리 잡은 온조집단은 이후 지속적인 성장을 거듭하면서 마침내『삼국지』동이전 한조에 마한의 여러 정치체 가운데 하나로 열거된 백제국으로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
백제국의 이러한 지정학적 위치는『삼국사기』백제본기 온조왕대의 일련의 대외 관계 기사들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처음 낙랑과 수호하고 평화롭게 지내다가 낙랑이 말갈, 즉 예계 집단을 앞세워 자주 침입해옴에 따라 낙랑 변방에 성책을 쌓는 것을 계기로 낙랑과 불화하게 된다. 낙랑으로 통하는 길을 막는 조치가 뒤 따랐다. 이에 한강 이남으로 천도하면서 마한에게 미리 천도를 알리고 예계 세력의 추장을 사로잡아 마한에게 보내는 등 우호적인 관계를 이어 간다. 그러나 마한과의 경계에 웅천책을 세우는 등 일련의 대립관계가 조성되고 이어서 마한의 통합이 약화되는 틈을 타 마한의 국읍을 병합한다. 이에 저항하는 마한 잔여세력을 소탕한 다음 그 민호를 한산의 북쪽으로 옮겨 후환을 없애면서 마침내 마한이 멸망하게 된다. 참고로 그 과정을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다.

온조왕 4년 : 낙랑에 사신을 보내어 우호관계를 맺다(遣使樂浪修好)
       3년 : 말갈이 북쪽 경계를 침범하다(靺鞨侵北境)
       8년 : 말갈적 삼천이 위례성을 포위하다(靺鞨賊三千來圍慰禮城)
             마수성을 쌓고 병산책을 세움에 낙랑태수가 사신을 보내어 말하기를 “이즈음까지 빙문하여
             우호를 맺임이 일가와 같았는데, 지금 우리 강역에 붙여 성책을 세우는 것은 혹 잠식하려는
             음모가 있는 것이리라. 옛 우호를 깨뜨리지 않으려면 성을 허물고 책을 부수어 의심되는
            바를 없애야 할 것이다. 굳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일전으로써 승부를 겨루자는 것이리라.”
            이에 왕이 답하기를“설험하여 나라를 지키는 것은 고금의 상도인데, 이로써 어찌 화호를
            깨뜨린다 할 것인가? 그쪽 당국자의 생각일 뿐임이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군사를 
            낸다면 소국 역시 그를 기다릴 것이다.”이로써 낙랑과 실화하였다. 
           (築馬首城竪甁山柵.樂浪太守使告曰, 頃者聘問結好意同一家. 今逼我疆造立城柵
            或者其有蠶食之謨乎. 若不?舊好 ?城破柵則無所猜疑. 苟或不然 請一戰以決勝負.
            王報曰, 設險守國古今常道. 豈敢以此有?於和好宜若執事之所不疑也. 若執事悖强出師則
            小國亦有以待之耳. 由是與樂浪失和.)
      10년 : 신기한 사슴을 잡아 마한에 보내다(獵獲神鹿 以送馬韓)
      11년 : 낙랑이 말갈을 시켜 병산책을 습격하고 부수고 100여인을 죽이고 약탈하다...독산· 구산
             두책을 세워 낙랑으로 통하는 길을 막았다.
             (樂浪使靺鞨襲破甁山柵殺掠一百餘人...設禿山狗川兩柵以塞樂浪之路) 

      13년 : (풍납토성이나 몽촌토성의 축조 시점에 비추어 250년

              이후의 어느 무렵으로 비정됨)               

             한산 아래 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민호를 옮기다...마한에 사신를 보내어 천도를 알리다
             (就漢山下立柵移慰禮城民戶...遣使馬韓告遷都)
      14년 : 천도하다. 왕이 부락을 순무하여 권농에 힘쓰다...한강 서북에 성을 쌓아 
             한성민을 나누어 옮기다.
             (遷都. 王巡撫部落 務勸農事..築城漢江西北 分漢城民)
      15년 : 궁실을 새로 짓다...낙랑이 내침하여 위례성을 불태우다...종묘를 세우고 국모를 제사하다.
             (作新宮室...樂浪來侵焚慰禮城...立廟以祀國母)
      18년 : 말갈이 몰래 들어옴에 왕이 칠중하에서 쳐서 그 추장 소모를 사로잡아 마한에 보내고
             그 밖의 적은 모두 구덩이에 묻었다. 낙랑 우두산성을 치려다 큰 눈을 만나 되돌아 와다.
             (靺鞨掩至. 王帥兵逆戰於七重河 虜獲酋長素牟 送馬韓 其餘賊盡坑之. 王欲樂浪牛頭山城..
              遇大雪內還)
      24년 : 웅천책을 세우다. 마한왕이 견사하여 잘못됨을 꾸짖어 말하길“왕이 처음 건너 왔을 때에는
             발 디딜 땅 조차 없어 내가 동북 일백리를 내어 안착하게 하였다.

             왕이 후의로써 대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거늘  지금 나라가 갖추어지고 백성이 모임에

             적수가되지 않는다 여겨 성지를 크게 설치하고 우리 강역을 침범하려 하니 무슨 도의가 이와

             같은가?”이에 왕이 부끄러이 여겨 마침내 책을 허물었다.
             (作熊川柵. 馬韓王遣使責讓曰 王初渡河無所容足 吾割東北一百里之地安之.
              其待王不爲不厚宜思有以報之. 今以國完民聚 謂莫與我敵 大設城池侵犯我封疆 其如義何.
              王慙 遂壞其柵)
     26년 : 마한이 점차 약해지고 위 아래가 서로 마음이 떠남에 그 세가 불능 지경인지라,
            만약 다른 세력에 병탄되면 순망치한의 후회가 될 것임에 먼저 들어가 취함으로써
            후의 어려움을 면하는 것만 못하리라 하고, 겉으로는 전렵을 핑계로 마한을 잠습하여
            마침내 그 국읍을 아울렀다.오직 원산·금현 두 성만이 굳게 지키고 항복하지 않았다.
            (馬韓漸弱 上下離心 其勢不能 又?爲他所幷則 脣亡齒寒悔不可及 不如先入而取之 以免後難...
             王出師陽言田獵潛襲馬韓 遂幷其國邑. 唯圓山錦峴二城 固守不下)
     27년 : 두성이 항복함에 그 백성을 한산의 북쪽으로 옮겼다. 마침내 마한이 멸망하였다.
            대두산성을 쌓았다.(二城降. 移其民於漢山之北. 馬韓遂滅. 築大豆山城)
    

 

  ***마한왕이 내어준 동북 100리 강역

     위 글에서 주목해야 할 대목이 있다. 이 내용은 <백제초도 위례성을 찾아서-1편>의 내 주장과 일치한다.

     위례성의 고고학적 유물자료를 찾다가 우연히 읽은 기사중에서 내가 생각했던  주장이 너무같아 많은

     공감과 희열을 느꼈다.

 

 『삼국사기』백제본기에 기록된 온조집단의 정착 시점인 기원전 18년 무렵의 한강유역은 고고학적으로 중도유형문화의 이른 시기에 해당된다. 온조집단이 처음 한강유역에 이르렀을 때의 사정은『삼국사기』백제본기 온조왕 24년(6)의 기사에 잘 나타나 있다.“처음 도하(渡河)해 왔을 때에는 발 디딜 땅조차 없던 것을 (마한왕이) 마한의 동북지역 100리의 땅을 할애하여 자리 잡게 하였다”는 것이다. 이 내용은 백제가 마한에 대한 적대적인 행위를 하는 것을 마한왕이 항의하는 가운데 나온 표현이기는 하지만 처음 백제 건국 세력이 한강유역에 정착하던 때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마한의 동북 변방, 즉 마한지역과 예계 종족 지역 사이의 틈바구니였던 한강유역에 자리 잡은 온조집단은 이후 지속적인 성장을 거듭하면서 마침내『삼국지』동이전 한조에 마한의 여러 정치체 가운데 하나로 열거된 백제국으로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

 

   <백제초도 위례성을 찾아서-1편...왕도,왕성고찰>

 

1) 온조왕 24년7월(서기6년)---왕이 웅천책(이병도-안성천,신채호-공주)을 세우니 마한왕이 책망하기를...

    왕이 처음 하수를 건너 용족할 곳이 없자 내가 동북 1백리의 떼어 안거케 하였으니 왕을 대우함이 두터웠다

    할 것이다.마땅히 이에 보답할 생각이 있어야 할 것이어늘 이제 나라가 완전하고, 인민이 많이 모여들어

    대적할 자가 없다하고 크게 성지(城池)를 만들고 우리의 강역을 침범하니 의리가  그러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온조왕이 부끄러히 여겨 드디어 책(柵)을 헐었다.

    (王作熊川柵 馬韓遣使責讓曰 <王初渡河 無所容足 吾割東北一百里之地安之 其待王不爲不厚 宜思有以報之

     今以國完民聚 謂莫與我敵 大設城池 侵犯我封疆 其如義何 > 王慙 遂壞其柵 )

 

2) 기존 마한왕이 있던 곳이 어디일까??? 의문이 드는 대목인데...

    첫째로 익산 건마국, 둘째 공주(웅진)일대, 기타지역 일대를 들 수 있다.

    그 이유는 온조왕대에 말갈족(동예로 추정)이 수시로 북쪽에서 침입하여 위례성을 공격했다는 기록이다.

    한강(한수)는 지금의 북쪽 비무장지대 혹은 방치(放置)한 지역으로 여겨진다.

    특히 동북쪽 남한강과 북한강을 기준으로 말이다.

    이곳 완충지대... 비무장지대, 방치한 지역을 온조일행은 마한왕에게 받았다고 여겨진다.

    왜냐하면 마한왕이 좋은 땅을 쉽게 내어줄리가 없지 않겠는가? 

 

3) 지금도 마찮가지지만 험준한 령과,치가 버티는 산맥과 하천이야말로 국가와 부족간 천연의 자연 비무장지대이다.

    금북정맥의 능선에서 동북으로 험준한 산맥...한강이야말로 완충녹지요, 충돌을 피하는 비무장지대이다.

    졸본에서 남하한 신흥 정치세력이 기반을 닦고, 세력을 확장하려면 충돌은 피할 수 없다.

    그래서 마한이 방치한 지역,비무장지대에 백제초도를 건국한 온조세력을 말갈(이병도-동예)가 공격한 것이다.

 

4) 온조왕 13년 위례성에서 한성(경기도 광주)으로 옮기전에 7월에 책을 쌓고, 위례성 민호를 옮겼다.

    8월에 마한에 사신을 보내어 천도를 알리고, 강역을 획정하였는데...북은 패하(예성강)에 이르고,

    남은 웅천(안성천,공주)에 한하고, 서는 대해에 이르고, 동은 주양(춘천)에 극하였다...이다.

    ( 8월...遣使馬韓 告遷都 遂劃定疆場 北至浿河, 南限熊川, 西窮大海, 東極走壤 )

    여기서 웅천(안성천 혹은 공주)을 남쪽에 한정 한다는 대목이 있는데,

    이때는 마한왕이 별문제 삼지 않고 승락했다는 말이 된다. 이상합니다.

 

    그런데 웅진을 지금의 공주라고 생각해서, 책(柵)을 세웠다하면 당연히 마한은 온조왕을 책망했을 것이다.

    차령이남 웅천(공주)은 마한의 강역이고...안성천(웅천)까지 마한왕은 백리지경(百里地境)을 내어준  것이다.

    그런데 웅천을 안성천에 비유하면 온조왕조의 두 기록의 상충되는 문제가 자연스레 풀립니다.

    수원~용인~광주~이천~여주~안성의 한수이남의 강역은 쉽게 말해서

    방치한 지역 내지는 완충지대...말갈(동예)과의 비무장지대인 셈이 됩니다.

   

 ***이병도박사의 <위례고>에서 북한산 세검정이 초도 위례성이라 한다면, 다산 정약용의 <아방강역고>

     정릉동,삼양동 일대라 한다면, 마한왕은 동북 200리가 넘는 지역을 봉토를 내어준 것 입니다.

     두 분 역시 삼각산을 부아산으로 비정하고, 하남위례,하북위례를 대칭되는 개념으로 해석했는데

     모두 잘못된 판단입니다. 

     또한 이병도박사의 주장처럼 한수이남은 마한에 속하였으니, 대방고지에 입국했다는 것은 즉 한수이북에

     건도입국하였다는 것으로 위례가 한북에 위치하였음을 알 수 있다...는 <위례고>의 주장은 재고되어야 함.

     또한 이박사,정다산 역시 서거정의 <직산 제원루기>를 일고의 가치가 없다고 논박을 하지만 학문하는

     학자로서의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서거정 역시 세종대왕은 물론 조선 6대왕 45년을 섬기며 당대 최고위 관직을 두루두루 거치며,

     조선 제일의 천재 문장가요,역사가요, 정치가 입니다.

 

     이병도박사의 주장...웅천--안성천, 신채호의 주장...웅천---공주라 한다면

     온조왕 13년 8월 한성 천도때에는 안성천이건, 공주 웅진이건 백제의 사신에게 책망을 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때는 말이 없다가 온조왕 24년 7월에는 백제가 백성들이 많이 모이고, 힘있어도 마한왕은

     사신을 백제에 보내어 목책 세운 것을 엄중히 질타합니다. 온조왕은 부끄러워 헐어 버렸습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볼때 백제초도 위례성의 위치는 웅천근처(안성천이던 공주이던)에 있어야 합니다.

     마한의 동북 백리지경을 공주라 볼 경우 한성(광주)은 무려 300리(공주~풍납성...직선거리 120km)입니다.

     또한 동북 백리지경을 안성천이라 볼 경우도 한성(광주)까지는 직선거리로 160리(안성천~풍납성...65km)가

     넘습니다. 중대한 논리의 모순점이 발견됩니다.      

 

5) 마한왕은 졸본에서 남하한 비류와 온조에게 동북 백리지경을 내주었고, 온조는 직산 위례성에,

    비류는 10명 신하의 반대를 뿌리치고(그 중에는 몇명 찬성도 있었겠죠? 5:5, 7:3이라든지...찬반이 갈려서)

    해빈 미추홀(인주---지금의 인천광역시 혹은 아산 인주면 밀두리)에 살기를 원하며 미추홀에 정착합니다.

    그렇다면 마한왕은 비류와 온조 일행에게 동북 <200리의 지경>을 내주었다 표현해야 맞죠.

    그러나 기록은 <동북 100리 지경>을 내주었다고 되었습니다.

    위 설명대로 차현(차령,공주 정안)~웅천(안성천)이 마한국의 북방한계선(남북거리 : 35km)이고,

    안성천(웅천)~한수(한강)구간은 말갈(동예)와의 <<완충지대,비무장지대, 방치(放置) 지역>>입니다.

    말갈(동예) 역시 자기의 영토를 침입한 적, 온조왕을 계속 공격한 것입니다.

 

    쉽게 생각하면...만약 개인이 집을 비우고 이사를 가면, 이사가기 전에 옛집은 빌려준 사람에게 반환하는게

    상식입니다.,아니면 재계약을 하던지 말입니다.

    온조는 재계약한걸 보여집니다.

    완충지대,비무장지대,방치지역인 한성(광주)으로 이사하고...옛집은 그대로 사용합니다.

    한성의 새집으로 이사하며 마한왕에게 울타리 경계를 알리는데...한강~안성천(웅천)까지는 강역을 획정합니다.

    이때는 마한왕이 인정합니다.

    그런데 남의 집 웅천(공주)에 책(울타리)을 세울때는 사신을 보내서 온조를 책망하는 겁니다.

    바꿔말하면 안성천 이남은 마한왕이 온조일행에게 내어준 강역<<직산 위례성>>이 된다는 결론입니다.,

 

 

6) 온조왕 26년,27년 마한의 국읍을 병합하고...36년 湯井城(지금의 아산 탕정면)을 쌓았다.

    마한의 옛땅이며, 졸본에서 남하한 온조왕에게 내어준 백리의 땅을 병합한 것이며, 백제초도를 회복한 것이다.

    8월에는 고사부리성(高沙夫里城,전라도 고부,古阜)도 쌓았다.

    온조왕 43년 8월에 아산원(牙山原,현재의 아산)에서 5일 동안 사냥하였다.

    이곳 삽교천의 곡교천 일대가 전략적 요충지 임을 암시합니다. ///

 

7) 온조왕 37년 우박이 계란만하여 새가 맞아 죽었고,심한 기근으로 고구려로 도망해 가는 수가 1천여호에

     달해 패수(예성강), 대수(임진강)사이가 비어 사는 사람이 없었다.

     ...한성백제의 서북경계를 알 수 있으며, 移住한 帶方故地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 지역임을 증명합니다.

 

***수 많은 사학자들이 찾으려했던 백제초도 하남위례성...<하북위례성>의 諸主張이 허구임이 증명되었습니다.

 

***<하남↔하북>의 논리에 막혀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허비했던가?

    마한왕이 봉토한 동북 100리 강역을 의구심을 갖고, 상고해 보았더라면 이런 문제는 비교적 쉽게 풀릴 것인데

    한탄스럽기만 합니다.<삼국사기>의 내용 중에 역사적 사실이 명기되었는데 말입니다.

 

***동북 100리의 남방한계선 웅천(熊川)이 공주가 되던 혹은 안성천이 되던  모두 공집합처럼 직산의 강역을

    관통합니다.

    고기록을 믿지 않고, 실학이라는 명분 아래  견강부회하려 했던 논리의 중대한 모순점입니다.

 

3) 직산 위례성 주변의 지형지세 및 지명유래

 

***직산의 부소산(扶蘇山, 458m,459.1m) 과 부소문령(부수문이,부소문이,부소문치)

    백제의 온조왕이 부소산 중턱에 문을 달았다해서 유래됨. 부소 →松(소나무)란 의미임...도수희 백제어연구 //

    백제의 마지막 도읍지 사자하(백마강) 부여의 부소산과 같은 산임.

    백제 온조왕 일행이 남하 하기전 고향인 졸본부여 비류수의 상류지역 송양에서 유래하며,

    고구려의 주몽왕이 비류국 송양왕과의 마찰부분이 삼국사기에 전함.

    이들이 하천의 상류지역에 머문 사실로  미루어 하남위례성에 도읍지를 정함에 고향의 산수와 유사한 곳에

    고향의 산이름을 붙이고, 왕성을 세우고, 성민들이 이지역에 부락을 이루어 살았음을 짐작 할 수 있다.

    扶蘇山은 금북정맥의 주능선으로 위로는 칠장산에서 한남정맥과 분기하며, 안성천의 최상류+금강 북쪽의

    최상류가 분기하는 지역으로 이곳이 사통팔달 요충지임을 알 수 있다. 

    직산의 위례성과 부소산 밑에  부수문이,부소문령이 백제어에서 유래됨이 확인됨으로써

    백제초도의 鎭山으로 稷山의 河南慰禮城 역사를 밝히는데 매우 重要한 地名이다.

 

***깊은골(심곡)---백제 온조왕이 직산에 도읍을 정하고 이곳에서 머물렀다고 전함.

    목천현의 최상류 지역으로 산방천(山方川) 상류에 위치하며, 금강(錦江)의 발원지임.

    또한 백제의 진산(鎭山)인 부소산 아래에 위치하며,분지형으로 아늑하고 포근하며,

    부소문고개에서 눈에 잘 뵈지않아 입구는 병목과 같아 천혜의 요지임.

 

***부소산의 해발 높이는 458m, 459.1m로 되어 있습니다. 정확한 것은 국립지리원 등고선도를 보고 정정 예정임 //

 

***곡간리(谷干,谷澗)--만뢰지맥과 분기하는 곳...깊은골 넘어엔 백제의 식량 창고인 곡간리(谷干,곡대)가 위치함. 

    곡간리는 백제 온조왕이 곡간을 두었다 해서 유래함. 

***군단이(軍團)--부소문령 아래 마을로 백제때 군사를 머물러 두었다해서 유래한 마을임.

***납안리(納安)--위례성 동남 기슭에 장생이마을 초입부터 산정 밑까지 약 1km에 걸쳐 수백기의

    적석총(積石塚)이 일정한 크기와 간격으로  공동 무덤처럼 산재함.

    마을의 이름도 여기서 유래하여 지금의 납골당처럼 납안리(納安)라함. 

 

 

***부소산(458m)을 중심으로 우측엔 안성의 서운산성(瑞雲山城 혹은 靑龍山城으로 불림),

    왼쪽엔 위례산성,성거산성이 있고, 남쪽으로 병천의 봉항산(鳳項山), 목천의 작성산성(鵲城山城)이 있고,

    서북쪽으로는 직산의 사산성(蛇山城,176m)있슴.

***부소산은--고구려의 사신도(四神圖)처럼---좌청룡 우백호 남주작 북현무의 산세와 산성이 있슴.

  

***멀리 서해바다와 아산만이 보이고, 진위천+안성천이 합수되며,

    평택,성환,안성의 평야지대가 100리 평야을 이룸.  

<성거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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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거산(聖居山)은 충청남도 천안시에 있는 579m의 이다. 고려 태조는 직산의 수헐원에 들렸다가 동쪽의 성거산을 바라보니 오색이 영롱하여 그 아름다움을 보고 영험한 산이라 여겨 제사를 지내도록 했으며 성거산(聖居山)이라 칭했다는 《직산현지》의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정상에 성거산성이 자리잡고 있다. 이 산성은 군사통신기지 설치 당시에 성곽이 많이 파괴되어 옛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백제는 산성이나 읍성을 축조할 때 반드시 익성(翼城)을 축조하는 축성법을 사용하였다. 따라서 성거산성은 위례산성의 익성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렇게 본다면 성거산성도 삼국시대에 축성된 것이 분명하다.[1]

 

 

 <서운산성---청룡산성>

1985년 6월 28일 경기도기념물 제81호로 지정되었다. 차령산맥의 주봉인 서운산에서 뻗은 서쪽 능선에 서남 방향으로, 골짜기처럼 비탈진 경사면을 삼태기 모양으로 둘러싼 반면식() 토축산성이다. 안성시에서 관리하고 있다.

동서 양쪽 끝이 높게 축조된 말안장 모양의 북벽은 대부분 자연지세를 이용하였다. 해발 535~460m에 있으며 성벽 둘레는 약 620m, 높이 6~8m이나 현재는 길이 300m, 높이 1m 정도만 남아 있다. 성문은 소실되었으며 남문과 북문 터로 추정되는 입구만 낮은 형태로 남아 있다.

출토되는 유물로 미루어 삼국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보이나, 임진왜란 때 의병장 홍계남()이 북상하는 일본군을 방어하기 위해 의병을 지휘하여 수축()하였다고 전한다. 성 안에는 높이 2m, 너비 1m의 석불이 있고 용굴()이라 부르는 작은 동굴이 있다. 남문터 밑으로는 근래에 세운 사찰인 약천암과 토굴암이 있으며 동남쪽으로 1km 정도 아래쪽에 청룡사()가 있다.

 

 

  

***성거산성(聖居山城,579m) ---직산현의 주산으로 고려 태조 왕건이 직산현 수헐원을 지날때 오색구름이 산에서

   피어 오르므로 신령이 계신 산이란 뜻에서 성거산이란 이름을 짓고, 조선의 세종 등의 임금이 온양온천으로

   거동 할 때에서 제관을 보내어 제(祭)를 올렸다고 함. 

***이 직산지역은 마한 목지국 진왕의 도읍지며, 백제 온조왕이 왕업을 닦으 곳으로, 고려 태조 왕건도 이곳

    성거산 아래의 왕자산(王字山)에서 王業을 이루어 성거산---성인,성현들이 계신 산이란 뜻에서

    이 이름을 붙인 것으로 생각됨...고려 태조 왕건의 고향 개성에도 똑같은 地名의 聖居山이 있슴.

 

 

 

 

 *** 안성천 유역과 성환,평택의 소사평(素沙坪) 주변 //

 

 

***직산현 동쪽...경부고속도로옆 입장천의 상류지역...불그머리,오리골,원통골 주변도 // 

 

***직산현의 온조왕묘(溫祚王廟) 터...조선 세종11년(1429년) 설립~1597년 정유재란시 직산의 소사벌 전투에서

    조선군과 명나라 군대에 위해 패퇴하던 왜군에 위해 소실됨.

    봄가을 향과 축을 내려 제사했다는 기록이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임.

***조선 인조때 경기도 광주의 남한산성에 재건함 // 

***진왕정(辰王井)-- 마한 목지국 54개국의 진왕이 마셨다는 우물.

    지금도 마을에서는 매년 진왕제(辰王祭)를 올리고 있슴.  온조왕묘 바로 아래 같이 있슴. 

 

***불그머리(赤井,龍井里)---붉은 우물이라고도 하며 불은 우물이라고도함.

    백제때 나라에서 어용수(御用水)로 사용키 위해서 우물을 구리로 두르고 보호했다고함. 

***입장천을 바라보며 용머리 산이 뻗어 있는데 지금은 경부고속도로의 관통으로 목이 잘린 형상임. 

    용안치 능선 너머엔 원통골(元通)과 오리골,진채봉이 있어  백제초도 위례성의 王城이 유력시되는 지역이며,

    산 능선에는 토축 흔적이 남아 있으며, 옛날에 山城이 이곳에 있었다고 전함.

 

 

 

***사산성(蛇山城,176m)---직산의 진산이며, 산 위에는 뱀머리바위(蛇頭岩)이 있어 이 산 이름이 유래함. 

     백제시대의 산성임. 

 

◎  위례성 부근의 지명유래 

 

 1. 입장면 연혁

천안군 2읍 10개면의 하나로 본래 직산군 이동면(二東面)과 삼동면(三東面) 지역으로, 이동면의 사장동(沙場洞), 기로촌(耆老村), 상장리(上場里), 하장리(下場里), 홍천동(弘泉洞), 동계리(東溪里), 효아촌(孝兒村), 구덕리(九德里), 신대리(新垈里), 양대리(良垈里), 시랑리(侍郞里), 도장리(道壯里), 당곡리(堂谷里), 호계리(虎溪里), 복덕리(福德里)의 15개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 지방 행정구역 통폐합에 의해 삼동면(三洞面) 하리(下里), 연봉리(延峯里), 우지곡리(于只谷里), 산정리(山井里), 차중리(次中里), 흑암리(黑岩里), 차상리(次上里), 토산리(土山里), 가좌동(可座洞), 용두리(龍頭里), 강당리(講堂里), 적정리(赤井里), 신두리(新頭里), 독정리(獨井里), 발림리(發林里), 도낭리(道郎里), 가연리(加連里)의 17개리와 경기도 안성군 입장면(笠場面)의 신흥리(新興里) 일부와 간곡면(干谷面)의 구정리(九井里) 일부를 병합하여 안성군에서 편입 된 입장면의 지명을 그대로 사용하고 천안군 입장면이 되어 도하, 연곡, 산정, 흑암, 가산, 용정, 신두, 독정, 도림, 유리, 기로, 상장, 하장, 홍천, 효계, 양대, 대장, 호당, 신덕리의 19개리를 관할하였다. 그 후 1963년 1월 1일 천안읍과 환성면이 천안시로 승격되므로 천원군 입장면이 되었섰다. 1989년 1월 1일(천안군 조례 1084호 1988.12.31) 도하리를 성환읍에 편입시키고18개리를 관할하게 되었다. 동쪽은 경기도 안선군 서운면과 충청북도 진천군 백곡면, 남쪽은 북면과 성거읍, 서쪽은 경기도 미양면과 서운면에 접하고 있다. 입장면의 입(笠)자는 본래 (笠)라는 설도 있다. 그 후 1991년 1월 1일 천안군으로 명칭변경, 1995년 5월 10일 천안시.군 통합으로 천안군을 천안시로 명칭변경하였다.

 1. 시장리

직산군 이동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시랑리 도장동이 병합하여 시장리의 시자와 도장동의 장자를 따서 시장리라 하고 입장면에 편입 되어 천안군 입장면이 되었다. 천안읍과 환성면이 천안시로 승격될 때 천원군 입장면 시장리가 되었다가 다시 환원되었다. ◎ 두멍골 : 입장 제 2저수지 서남쪽에 있는데 지형이 두멍같이 깊숙이 생겼다고 한다.
◎ 구시랑이
:
구실향. 도장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 백제때 시랑(侍郞)아홉이 이곳에 살았다 한다. 백제때 구실향이 있었다고도하며 백제와 관련이 있는 지명인것 같다.
◎ 고래울 : 범우래 뒤에 있는 골짜기. 지형이 고리처럼 생겼다 한다.
◎ 범우래
:
범우리 시랑리라고도 하며 두멍골 옆에 있는 마을. 예전에 이곳에서 범이 울었다 한다.1952년 입장 제 2저수지가 생김으로 시랑리가 저수지 가운데 들게되므로 이곳으로 옮겼다.
철이 단범 하던 곳이다.
◎ 갓골 : 뒷골 위쪽에 있는 골짜기.
◎ 도장골(道場) : 시장리에서 가장 큰 마을 도장을 베풀고 무술을 연마하였다 한다.
◎ 등구제 : 도장골 남쪽에 있는 산. 산 모양이 용의 머리처럼 되었는데 산제당이 있었다.
◎ 두멍골 샘 : 두멍골에 있는 샘. 옛날에 흰여우가 샘을 지키고 있었다고 한다.
◎ 동산(東山) : 도장골 뒤에 있는 산. 옛기와 조각이 지금도 나온다고 한다.
◎ 방아다리 : 도장골 앞에 있는 들. 지형이 방아다리처럼 생겼는데 현재 저수지가 되었다.
◎ 백정(白丁)촌 : 구시랑골 밑에 있는 골짜기. 옛날에 백정들이 살았고 형평운동을 벌렸다.
◎ 수리고개 : 보무래에서 성거읍 오목리 가는 고개.
◎ 섬배기 : 잿말 위쪽에 있는 골짜기.
◎ 잿말 : 도장골 왼쪽에 있는 골짜기.
◎ 사창잇돌 :
도장골 오른쪽에 있는 골짜기.
◎ 부처짓골 : 소정이 오른쪽에 있는 골. 옛 절터가 있다.
◎ 술샘 : (전설)수리고개에 있는 샘인데 샘물이 슬기로움이 있어서 목마른 사람이 마시면 갈증이 풀리고 요기가 되는데, 욕심이 많은 사람이 욕심껏 마시기 위하여 우물을 더 팟더니 술기운이 없어 졌다고 한다.
◎ 진절머리고개 : 수리고개 위에 있는 고개. 고개가 너무 높고 험해서 오르자면 진절머리가 난다고 한다.
◎ 장승거리들 : 방아다리 아래쪽에 있는 들. 장승이 있었는데 저수지자리가 된다.
◎ 심산(沈山) : 동구재 밑에 있는 마을. 심(沈)씨가 동네를 개척하여 이루어 놓았다고 한다.
◎ 숯굳이 : 부처지골 옆에 있는 골. 숯을 굽던 곳이 있었다.
◎ 유동골 : 소정이 왼쪽에 있는 골짜기.

 

2. 호당

직산군 이동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당곡리 호계리 복덕리가 병합되어 호계리의 호자와 당곡리의 당자를 따서 호당리라 하고 입장면에 편입 되었다. ◎ 산신제 : 호견 부락에서 지내는데 정월 초 이튿날 생기복덕을 보아 닫는 사람을 선정하여 당주로 정하는데 당주 집에서는 산신제 일체의 준비를 한다. 리장 보조인 축관등이 제를 지내며 각 집에서도 떡을 하여 안택을 빈다. 제를 지낼 때 시루 올려라 하고 소리치면 각집의 떡시루에 불을 때며 각 집에서도 제를 올린다. 당일은 온동네 사람의 출타를 금하고(옛날에도 제삿날을 정하면 출타를 금하기도 하였다.) 제물은 삼색실과와 통돼지(여의치 못할 때는 돼지머리)를 놓고 지내며 제사 참석자는 당집 앞 찬 물샘에서 목욕한 다음에 제사를 지내고 각호의 소지를 올린다.
◎ 금성암(錦城庵) : 호계 동남쪽에 있는 절.
◎ 당골(당곡) : 호계 북서쪽에 있는 마을. 산제당이 있었으며 철의 담범일을 하였다.
◎ 개장짓골 : 고낫골 위에 있는 골짜기.(효계리 위쪽에 있는 골짜기)
◎ 방아골 : 당골 남동쪽에 있는 골짜기.
◎ 호겨니(호계 호계리) : 호당리에서 으뜸되는 마을. 위례성 밑이 되는데 옛날에 호랑이가 자주 나타났다고 한다.
◎ 방밋골 : 호겨니 왼쪽에 있는 골짜기. 쟁이(匠人)들이 모여 살던 곳.
◎ 범박골 : 우물목 아래에 있는 골. 주물을 부어 만든 철의 틀을 만들던 곳.
◎ 사리목 : 범박골 왼쪽에 있는 골짜기.
◎ 우물목 고개 : 정항령이라고도 하며 호당리에서 북면 납안리 도촌으로 넘어가는 고개.
◎ 해산골 : 개강짓골 건너 쪽에 있는 골짜기.
◎ 우렁골 : 우렁속 같이 매우 깊이 들어가 있는 골.
◎ 사기점 펀덕 : 사기를 굽던 사기점이 있었다.
◎ 쇠골 : 산신제 지내는 곳. 철의 일을 하던 곳.
◎ 장터 : 광산이 잘 될적에는 호계니에 장이 섯다고 하며 싸전은 잘 되었다고 한다.
◎ 험난골 : 비탈이 심하여 매우 험난 하다고 한다.

3. 홍천리

직산군 이동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홍천동이 홍천리로 되어 입장면에 편입되었다. 우물가에 붉은 꽃이 많이 피므로 홍천 또는 홍천동(弘泉里)이라 하였다고 한다.

◎ 고래울 : 홍천동 위쪽에 있는 골짜기.

◎ 버꾸라지들 : 홍청동 남쪽에 있는 들.

◎ 중보들 : 중보평 홍천동 북쪽에 있는 큰 돌. 중보가 있다.

◎ 황새목이 : 고래울 동쪽에 있는 골짜기 지형이 황새목처럼 생겼다고 한다.

◎ 진채봉 : 옛날에 군대가 주둔 하였던 곳이라 한다.

(전설) : 옛날에 이곳에 조선 오리나무가 우거져 있었고 삼태미 안 같아서 부자가 난다고 하였으며 샘을 위하던 부락이라 한다.

4. 유리

직산군 삼동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때 애동 내유리 외유리가 병합하여 유리라 하고 입장면에 편입 되었다.

◎ 유리(柳里) : 버들가지. 유관리라고도 하며 문화 유씨들이 원주민이며 그를 상징하기 위하여 버드나무를 많이 심어 버드나무가 동네 앞에 숲을 이루었다고 한다.
◎ 밤골(방골) : 안버들아지 오른쪽에 있는 골짜기.
◎ 배삼동 : 배삼딩이. 배삼곶이. 배를 매던 자리. 배를 만들었던 자리(造船所)라고도 하며 아산만에서 이곳까지 배가 드나들었다고 전해 온다.
◎ 쑥골 : 애동이라고 하는데 안버들아지 서쪽에 있는 마을. 쑥이 많이 있었다고 한다.
◎ 양말건제(梁末巾堤) : 버들아지에 있는 방죽. 양말건이 만들었다고 전하여 온다.
◎ 점말(店村) : 바깥 버들아지 남쪽에 있으며 현재 옹기를 굽는 옹기점이 있다.
◎ 학교말 : 점말 서쪽에 있는 마을. 중학교가 있다.
◎ 마구들 : 옛날에 행암을 돕기 위하여 마굿간을 설치하고 행인의 말과 사람의 숙박시설이 있었다고 하며 서울 다니는 길목이다.
◎ 연방죽 : 연을 심은 연꽃 방죽이 있었는데 없어 졌다.

(전설) : 유리 뒷동산이 솔밭이었는데 나무가 무성하면 부락이 길하고 나무가 없으면 불길하다고 하는 말이 예부터 전해 왔는데 뒷동산을 벌목하여 나무가 없어지므로 부락이 불길한 일만 생기고 사고가 자주 나무로 동네에서 굿을 크게 하고 나무를 다시 심기로 하였다.

5. 효계리

직산군 이동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페합으로 동계리 효아촌이 병합하여 효아촌의 효자와 동계리의 계자를 따서 효계리라 하고 천안군 입장면에 편입되었다. 천안군이 천원군으로 바꾸어지므로 천원군 입장면 효계리가 되었다가 환원되었다.

◎ 나무제 : 새춘이 부락에서 수령 500년 이상된 느티나무에 제를 올리는데 정월 초승 길일을 택하여 날을 정하고 생기복덕을 보아 닫는 사람을 제관으로 삼고 돼지머리 삼색실과를 제물로 놓고 지내며 비용은 부락비용으로 하고 밤 8시경에 지내고 지낸 음식은 부락민이 모여 함께 먹는다.
◎ 쇄춘이 : 효아촌 효계리에서 가장 큰 마을. 옛부터 효자가 많이 났다고 한다. 바깥 쇄춘이, 안쇄춘이가 있으며 예전에 철의 생산지이다.
◎ 동계리 : 쇄춘이 북서쪽에 있는 마을.
◎ 담뒷들 : 바깥쇄춘이 뒤에 있는들. 내(川) 동쪽이 된다. 앞에 솔경잇들이 있다.
◎ 오리나무골 : 조선 오리나무가 많이 있다고 한다.
◎ 구레보들 : 솔경잇들 아래에 있는 들.
◎ 은보들 : 안쇄춘이 앞에 있는 들.

6. 기로리

직산군 이동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기로촌 사장동이 병합하여 기로리라 하고 천안군 입장면에 편입 되었다가 군명이 천원군으로 바꾸어져 천원군 입장면 기로리가 되었다가 환원되었다.

◎ 기로촌(耆老村) : 산수가 좋고 이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 오래 삶으로 기로 또는 기로촌이라 불려 내려 왔다고 한다.
◎ 사장골(沙長) : 사기점골 이라고도 하는데 기로 저수지 앞쪽에 있는 마을. 사기조각이 나온다고 하며 격장리라고도 한다.
◎ 호무내 : 기로 저수지 동쪽에 있는 마을. 청나라 사람들이 이곳에 호무를 심었다 한다.
◎ 중앙광산(中央鑛山) : 기로리에 있는 금광. 1919년 영국사람이 개발 하였는데 제2차세계대전 때 일본 사람이 차지 했다가 해방후 한국인이 운영했다고 한다.
◎ 잿들 : 숲거리 밑에 있는 큰 들.
◎ 잔디말 : 원적골 밑에 있는 들. 전에는 집이 있었다고 한다.
◎ 안말(內洞) : 기로촌 안쪽에 있는 마을.
◎ 원적골 : 양달말 동쪽에 있는 골짜기.
◎ 숲거리 : 양달말 내 건너쪽에 있는 마을. 숲이 많이 있었다고 한다.
◎ 동산말(東山村) : 기로촌 위 동쪽에 있는 마을.
◎ 데캉(新興) : 신흥이라고도 하며 사장골 밑에 있는 마을. 청국 사람이 많이 살았다고 한다.
◎ 기로저수지 : 기로리에 있는 저수지로 입장면에서 제일 먼저 막은 저수지라 한다.
◎ 불무재 : 도림리로 가는 고개로 쇠를 녹이기 위하여 불무질을 하던 곳이기도 하다.
◎ 모래고개 : 모래가 많이 내려와 모래고개라 한다.
◎ 함정고개 : 양대가는 고개로 산짐승을 잡기 위하여 함정을 옛날에 많이 팟다고 한다.
◎ 비렁이들 : 예전에 들에 물을 대기 나빠서 농사를 짓기가 어려우므로 농사 못짓는 해가 많다. 이 들에서 농사를 짓다가는 비렁이가 되기 일쑤였다고 한다.
◎ 청다리 : 청나라 사람들이 놓은 다리가 있었는데 없어졌다.

7. 양대리

직산군 이동면 지역으로 산수가 좋으므로 양대라 하였다고 하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당시 양대리 단일리가 병합없이 양대리로 천안군 입장면 양대리가 되었는데 군명이 천원군이 되므로 천원군 입장면 양대리가 되었었다. ◎ 부소문이 고개(扶蘇門嶺) : 양대리에서 북면 운용리로 넘어가는 고개. 백제 때 이곳에 부소문을 달았다고 하며 소나무 고개의 뜻을 지녔다고 한다.
◎ 국사봉(國師峯) : 국수봉(國師峯)이라고도 하며 옛날에 나라에서 제사를 올리던 곳이라 하고 이곳에서 광산을 할 때에도 이 국사봉에 제를 매년 올렸다고 한다.
◎ 한림봉(翰林峯) : 양대 북쪽에 있는 산. 한림 민복(閔福)의 묘가 있다.
◎ 세련이 : 한림봉 밑에 있는 마을.
◎ 양대골 : 양대 뒤에 있는 골짜기. 붉고 흰 사기조각이 많이 나타난다.
◎ 사초골 : 부소문이고개 북쪽에 있는 골짜기.
◎ 유독너덜 : 부소문이 고개 동서쪽에 있는 골짜기. 유독 풀이 많이 있다고 한다.
◎ 점말 : 양대 서쪽에 있는 마을. 사기점이 있었다.
◎ 통점 : 양대골 위쪽에 있는 마을. 옛날에 놋그릇을 생산 하는 놋그릇점이 있었다고 한다.
◎ 직산금광 정련소(稷山金鑛精煉所) : 쇳대봉에 있었는데 금을 제련 하던 제련장이었으며 현재도 그 터와 건물 일부분이 남아 있다. 기계청 이라고도 한다.
◎ 말마골 : 갈마 음수형이라 하며 말안장 같이 생긴 산등이 있는 골이다.
◎ 모이골 : 최씨네의 묘가 있고 인문석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지고 흔적만 남아있다.
◎ 광명학교터 : 남녀공학의 기독교계 학교가 양대 남쪽 위에 있었다. 여학생 3명이 3.1운동 때 만세를 주도 했다.
◎ 주막거리 : 광산이 이곳에 있었을 당시 장이 서고 주막이 있었으며 기생이 많았다.
◎ 헌병대자리 : 일인 헌병대가 있었으며 광부들의 3.1만세 때 광부 여러명을 사살하였다.
◎ 입장 3.1운동 만세비 : 광명학교 여학생이 주도한 만세운동과 광부들이 주도한 시위 운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양대부락 중간길 옆에 1990년 4월 기념비를 세웠다.
◎ 미국인주방 : 미국 사람이 광산할 당시 점심식사와 손님 접대하던 집이 현재 보존되어 있는데 중국인 벽돌공이 쌓았다 한다.

 

8. 도림리

직산군 삼동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발림리, 도랑리, 가련이, 경기도 안성군 입장면 신흥리 일부를 병합하여 도랑리의 도자와 발림리의 림자를 따서 도림리라 하고 천안군 입장면 도림리가 되었다가 군명이 천원군이 되어 천원군 입장면 도림리가 되었었다.

◎ 미륵제 : 보덕에서 지내는데 미륵 2구가 있어 이 미륵에 제를 올리며 음력 정초에 길일을 택하여 이장이 제관이 되고 삼색실과와 돼지머리를 제물로 놓고 부락의 평안을 빈다. 전에는 미륵이 하나밖에 없었는데 몇해전 장마에 한 구가 더 나와 2구가 되었다. 제를 지낸 음식은 나누어 먹는다.

(전설) : 삼형제 바위가 있는데 소원 성취 해달라고 떡을 해가지고 가서 고요한 밤에 바위에다 치성을 드리면 소원이 성취된다고 하여 부락민 다수와 인근 부락민 까지도 와서 치성을 드린다고 한다.
(전설) : 불당골. 약물탕. 장님이 이 물을 먹고 눈을 떴다고 하며 한해가 심하여도 이 샘은 마르지 않으며 부락민이 신성시 해 왔다고 한다.
(전설) : 우물이 동네에 있는데 동네사람이 이 우물의 물을 다마시거나, 그 위에 묘를 쓰면 물이 안나온다 하여 묘를 못쓰게 하는데 몇해 전에 성거읍 사람이 묘를 몰래 썼다. 동네 사람들이 나서서 묘를 파버려서 다른 곳으로 이장하여 갔다고 한다.

◎ 보덕원(普德院) : 보덕골이라고도 하며 도림리에서 가장 큰 마을. 조선시대 행인의 편의를 도와 주기 위하여 보덕원이라고 하는 원을 설치하여 행인의 도움을 주었다.
◎ 가련리(加連里) : 보덕원 남쪽에 있는 마을.
◎ 바람산 : 풍산. 청다리라고도 하며 새터 뒤에 있는 산. 풀무로 바람을 이르켰다.
◎ 새춧골 : 보통거리 위쪽에 있는 마을. 쇠를 생산 하던 곳이다.
◎ 불무골(재) : 새터에서 기로리로 넘어가는 고개. 철을 녹여 물건을 만들기 위해 불무를 하던 것이다.
◎ 보통거리 : 보덕원 위쪽에 있는 마을. 구들장이 많이 나온다.
◎ 대장간 터 : 부락 앞이 되는데 철일을 하였다고 한다.
◎ 안샘터 : 부락민의 상수도 수원이 되는 샘이다.
◎ 불당골 : 절이 있었는데 빈대가 많아서 없어졌다고 한다.
◎ 매봉재 : (전설) 천지개벽 때에 이곳이 물이 잠기고 매하나 앉을 만치 남아 있었다고 한다.
◎ 용바위 : (전설)용이 누었다 일어 났다고 하며 형상이 바위에 자국지어 있다.
◎ 범박골 : 주물로 물건을 생산 하려면 흙으로 틀을 만들고 쇠물을 부어야 되는데 이 틀을 만들던 곳이다.
◎ 옆둔재 : 엽둔고개, 엽둔티, 엽전리, 율둔티 라고도 하는데 가련이에서 충청북도 진천으로 넘어가는 고개. 옛날에 도둑이 많아서 엽전을 가지고 가는 사람은 모두 빼앗겼다고 한다. 이곳이 엽전을 생산 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9. 독정리

직산군 삼동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독정리 이동면의 상장리 일부를 병합하여 독정리라 하고 천안군 입장면 독정리가 되었는데 군명이 천원군이 되므로 천원군 입장면 독정리가 되었었다.

◎ 동정이(獨井里) : 우물 하나가 있어 이 우물로 온동네 사람이 다 사용하므로 독정이라 하였다고 전해 온다.
◎ 볏가리(점촌) : 독정이 남쪽에 있는 마을. 앞에 큰 들이 있고 벼가 잘 되어 집집마다 볏가리가 쌓여 멀리서 이 동네를 보면 집은 안보이고 볏가리만 보였다고 한다. 옛날에 옹기점이 있어 흙으로 옹기를 만들어 초막을 짓고 말리기 위하여 빛이 쪼이면 터지므로 빛을 가렸기 때문에 빛을 가리는 초막이라는 온 말에서 마을 지명이 온 것 같다.
◎ 가을말 : ?가리 앞 냇가에 있는 마을.
◎ 행촌(杏村) : 살구말 이라고도 하는데 ?가리 위쪽에 있는 마을. 살구나무가 많았다 한다.

(전설) : 새우잡이 고래라고 하고 안성 서운면 가는 고개인데 옛날에 대홍수가 나서 이곳이 물에 잠겼었는데 새우를 잡았다 하며 새우잡이 배가 다니기도 하였다 한다.
(전설) : 망골에 큰 부자가 살았는데 직산 당골에서 보이므로 도적들이 찾아 와 못살게 하므로 안보이는 곳으로 이사하기 위하여 이곳 독정이로 이사해 와서 살았다고 한다. 이곳은 기와와 구들장이 나온다고 한다.

◎ 쇠골구레 : 독정이에서 등너머 안성 땅 경계인데 수렁이 많아서 소가 빠져 죽었다고 한다.

 

10. 가산리

직산군 삼동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토산리, 가좌동이 병합하여 가산리의 가자와 토산리의 산자를 따서 가산리라 하고 천안군 입장면 가산리가 되었느데 군명이 천원군으로 개칭되어 천원군 입장면 가산리가 되었었다.

◎ 톨미(토산兎山) : 가산리에서 가장 큰 마을. 뒷산이 토끼 모양으로 생겼다고 한다.
◎ 조효자정문 : 톨미 앞에 있는 통정대부 조립(趙砬)의 효자 정문.
◎ 숫골고개 : 가재울 동남쪽에 있는 고개. 가산리에서 유리로 넘어가는 고개.
◎ 가재울(가좌동.可座洞) : 톨미 동쪽에 있는 마을. 가재가 많았다고 한다.
◎ 승적골 : 불여우가 많이 살았다고 하며 이동네서 불여우 같은 짓을 하면 승적골 불여우라고 부른다 한다.
◎ 작수벌 : 옛날에 소나무가 울타리 같이 무성하였다 한다.
◎ 능골 : 임금의 묘로 사용하려다 취소하였다 한다.

(전설) : 가재울 주위의 산이 삼태미 같이 생겨 동네가 길하다고 전해오고 있다.

◎ 신아궁 : 도깨비가 많아 신아궁이라 했다고 한다.

11. 연곡리

직산군 삼동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연봉리, 우지곡리, 경기도 안성군 우곡면 구정리, 일부를 병합하여 연봉리의 연자와 우지곡의 곡자를 따서 연곡리라 하고 천안군 입장면에 편입되었는데 군명이 천원군으로 개칭되어 천원군 입장면 연곡리가 되었었다.
◎ 갈산(葛山) : 가리산이라고도 하는데 연봉 동남쪽에 있는 마을.
◎ 쇠골 : 우지곡(于只谷). 우지곡리, 우곡, 가리산이 옆에 있는 마을.
◎ 승불제(承佛堤) : 쇠골 방죽이라고도 하는데 쇠골에 있는 방죽.
◎ 연봉(蓮峯) : 연곡리에서 으뜸 되는 마을. 연화봉 밑이 된다. 뒷산이 연꽃 같아서 연화봉이라고 하였다고 하는데 고속도로로 인하여 잘려 나가서 봉은 없어졌다 한다.
◎ 잼벌 : 항상 물이 마르지 않는 들이라고 한다.
◎ 가장골 : 이곳에서 생산되는 쌀이 좋아서 살이 찌거나 몸무게가 나간면 가장골 쌀얼마나 먹었느냐고 물어보는 것이 이동네 인사였다.
◎ 갈산(전설) : 우지곡 마을이 삼태미 같아서 작은 부자는 있어도 큰 부자는 없다고 한다. 삼태기에 물건이 담기면 넘어서 흐르기 때문에 더 담을 수 가 없기 때문이라 한다.
◎ 감사들 : 어떤 감사가 지나다가 이곳에서 쉬어 갔다고 전하여 온다.
◎ 죽배미 : 예전에 이곳 농가를 짓다가는 죽먹기도 어려웠다 한다.
◎ 장승백이 : 옛날에 이곳에 장승이 있었다 한다.
◎ 말무덤 : 암행어사가 말을 타고 가다가 말이 이곳에서 죽으므로 묻고 갔다고 한다.

 

12. 산정리

직산군 삼동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산정리 차중리가 병합하여 산정리라 하고 천안군 입장면 산정리가 되었는데 군명이 천원군으로 개칭되어 천원군 입장면 산정리가 되었었다.

◎ 우물제 : 산정부락에서 지내는데 우물이 네 군데 있었다. 음력 정월 초이튿날 생기 복덕을 보아 닫는 사람을 제관으로 정하고 새벽에 제를 지내며 삼색실과와 포하나 돼지머리(돼지고기)를 제물로 쓰고 제를 지낸 음식은 제사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나누어 먹고 제 지내기 전에 샘을 청소하고 황토를 샘길에 편다. 제사를 지내기 전에는 부락 사람의 출타를 금한다. 또 돼지를 잡아서 돼지의 피를 온 동네 집집마다 대문에 뿌렸다고 한다.
◎ 평장골 : 산 끝 우물 왼쪽에 있는 골짜기. 옛날에 무덤이 있었다고 한다.
◎ 정효자비 : 산우물과 차중리 사이에 있는 효자 정종덕(鄭種德)의 비. 3년 시묘를 살았다고 한다.
◎ 해산골 : 산 끝 우물 뒤쪽에 있는 골짜기. 옛날 전란때 어떤 여인이 이 골에 피난하다가 아이를 해산 하였는데 그 아이가 커서 장수가 되었다고 한다.
◎ 끝산우물 : 말산정. 꿩말.(사우물 위쪽 구석에 있는 마을)
◎ 하산정(下山井) : 아래 산우물.
◎ 차중리(次中里) : 산우물 남쪽에 있는 마을. 차상리 아래가 된다.
◎ 산우물: (전설) 산밑에 좋은 우물이 있어서 이 물을 먹고 앉은뱅이가 걸어가고 죽게된 사람이 살아났다 하여 산우물이라고 하였다 한다.
◎ 일봉산 : 정월 대보름 날 달보러 이 산에 올라가서 달맞이 한다고 한다.
◎ 도랑미 : 산비탈로 물 똘이 있어서 도랑미라 한다.

(전설) : 차중리 뒤산이 풍채혈이라 재산이 왔다 갔다 한다고 전해 온다. ◎ 금광 : 중앙광산이 이곳에도 있었다고 한다.
◎ 징채산 : 징을 치는 징채같이 생겼다고 한다.
◎ 월보들 : 전에는 타군의 봇물을 대어서 농사를 지어 왔으므로 월보 들이라 하였다.
◎ 정제(井祭) : 차중리(次中里) 정월 초이틀날 지내며 생기복덕을 보아 닫는 사람중 고령자를 선정하여 제관이 되며 검정돼지를 잡는데 흰털이 한 개라도 있어서는 안된다고 한다. 삼색실과와 술과 포로 제물을 하며 새벽에 지내고 전날 샘을 청소하고 황토를 펴서 부정한자는 샘근처의 출입을 금하고 정제 지내기 전에는 동네 사람들의 출타를 금한다.

13. 흑암리

직산군 삼동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흑암리 차상리가 병합하여 흑암리라 하고 천안군 입장면 흑암리라 하였다가 군명이 천원군으로 개칭되어 천원군 입장면 흑암리가 되었다가 환원되었다.
◎ 흑암리(검바위) : 바위가 2개 있는데 검어서 검바위라 한다.
◎ 우물제 : 검바위에서 음력 정월 초이틀날 생기복덕을 보아 제관을 선택하여 선택된 제관은 5일간 담배와 여자 부정한 일을 못하며 탈없이 지내야 되고 삼색실과와 검정돼지를 잡으며 머리는 부락 입구의 해나무에 놓고 나무제를 지낸다. 네 다리는 우물 네 개가 있는데 하나씩 놓고 지낸다. 샘은 당일 식전에 청소하여 아침전에 정제를 지낸다. 당일 정제가 끝나야 출타할 수 있다.
◎ 진제 : 검바위 서쪽에 있는 높은산. 예전에 진터가 있었다 한다.
우엉골 : 검바위 앞에 있는 골짜기.
◎ 행자목골 : 예전에 큰 은행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14. 용정리

직산군 삼동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용두리 강당리 적정리가 병합하여 용두리의 용자와 적정리의 정자를 따서 용정리라 하고 천안군 입장면 용정리라 하다가 천안군의 명칭이 천원군으로 개칭되어 천원군 입장면 용정리가 되었었다.

◎ 우물제 : 불그머리에서 정제를 지낸다. 샘이 세 개 있는데 정월 초삼일 생기복덕을 보아 닫는 사람으로 제관 축관을 정하고 삼색실과, 술을 제물로 놓고 지낸다. 당일 샘청소를 하고 오전에 우물제를 지낸다. 당일에 한해 정제 전에는 출타를 금한다고 한다. 이 동네는 축문을 한글로 읽는데 (유세차 00년 0월 00삭유학 000감소고우 영천지신 장진소례 가가태안 사사비화 함구백제 점수오복 근이청작 지천 우신상향)이라 읽는다.
◎ 강당 : 강당리(講堂里) 불그머리 아래쪽에 있는 마을. 옛날에 안씨가 강당을 짓고 후진을 가르쳤다고 한다.
◎ 불그머리 : 적적(赤井). 불그물. 불은우물이라고도 하며 용정리에서 가장 큰 마을. 불그머리에 큰 우물이 있는데 물맛이 썩 좋으므로 백제때 나라에서 쓰기 위하여 우물 둘레를 구리로 둘러 만들었다고 한다. 우물 근처의 흙이 붉은 색이므로 붉은 우물이 되었다고도 하고 효자가 떠나지 않는 마을이라 불궤리(不 里)라고도 한다. 서양사람들이 금광할 때 이곳에 살면서 붉은벽돌로 샘주변을 쌓아 적정이라 하였다고도 한다.
◎ 옥녀봉(玉女峯) : 태봉산(胎封山) 불그머리에 있는 산. 산모양이 수려하고 단정하여 옥녀와 같다 하며 옛 임금의 태를 묻었다 한다.
◎ 정문거리 : 불그머리 남쪽에 있는 전주 최씨 정문. 선조 때 효자 최돈(崔墩)과 그 아우 基 아들 극인(克認), 극성(克誠), 극해(克諧), 극량(克良)의 3형제, 극해의 아들 주민(柱旻)과 주민의 아들 황(滉), 찬(燦)의 형제가 모두 효자로써 4대 효자로 벼슬을 받은이가 8사람이 되어 이곳을 지나는 사람마다 크게 감탄하고 정문있는 길을 정문거리라 불러 지금까지 부른다.
◎ 양관터 : 미국사람 양인들이 광산할 때 일본사람 보다 먼저 와 머물던 곳.
◎ 개떡골 : 논이 더러워 흉년에 개떡 몇조각과 논을 바꾼 논이 있어 개떡 바꾼골이라 한다.
◎ 봉바위 : 이 바위에서 부엉이가 자주 울었다 한다.
◎ 용머리 : 용두리 앞에 있는 산등인데 부리 모양이 용의 머리같이 생겼다.
◎ 정 샘 : 불그머리에 있는데 어떤 대감이 지나가다가 이 우물 물을 마시고 물맛이 좋아 정말 좋은 샘이라고 정샘이라고 하였다고 전해 온다.
◎ 목비산 : (전설) 중국사람이 와서 조선에 큰 장수가 날것이라고 산목을 잘라 혈을 끊으므로 장수가 못나게 하였다 하며 끊을 적에는 피가 나왔다 하고, 산목을 잘랐다 하여 목베인 산이라 한다.

(전설) : 안터의 뒷산이 옥녀봉인데 앞산이 송장날이라 부락이 잘 되려면 송장날인 앞산이 없어야 되는데 이 산이 있으므로 부락이 불길하다고 전해온다.

◎ 보샘 : 물이 항상 깨끗이 흘러 나온다.

15. 신두리

직산군 삼동면 지역인데 마을 머리에 섶이 많이 있으므로 섶머리, 또는 신두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당시 다른 리와 병합없이 신두리로 천안군 입장면에 편입되었다가 군명이 개칭되므로 천안군 입장면 신두리가 되었다가 환원되었다.
◎ 정제 : 섶머리에서 우물제를 지내는데 정월 초승 길일을 택하여 생기복덕을 보아 닫는 사람을 택하여 제관을 삼고 돼지머리, 삼색실과를 제물로 하고 이장 반장이 참석하여 축은 구두로 하고 우물 청소는 전날에 한다. 제사를 지낸후 동네사람이 모여 나누어 먹는다.
◎ 숲거리 : 섶머리 옆에 있는 뚝 바깥쪽에 여러 가지 나무를 많이 심어서 길게 숲을 이루었다.
◎ 밤나무정이 : 익선원에서 역전까지 밤나무밭이었다고 한다.
◎ 뽕나무정이 : 잠실이 있고 뽕나무가 많이 심어있었다고 한다.
◎ 까치골 : 숲이 우거져 까치가 많이 살었다고 한다.
◎ 우물제 : 신두리 2구에서도 정제를 올리는데 음력 7월 7석에 샘청소하고 샘제사를 지내는데 통돼지, 북어포를 놓고 이장 새마을 지도자가 지낸다.

 

16. 신덕리

직산군 이동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구덕리 신대리가 병합하여 신덕리의 신자와 구덕리의 덕자를 따서 신덕리라 하고 천안군 입장면 신덕리가 되었다가 군명 개칭으로 천원군 입장면 신덕리가 되었었다.

◎ 구덕리(九德里) : 신덕리에서 가장 큰 마을. 입장역이 있었다. 신라 때부터 거북놀이가 시작된 곳이라고 전해온다.
◎ 반월리(半月里) : 구덕리 남쪽에 있는 마을. 지형이 반월모양으로 생겼다고 한다.
◎ 우물제 : 반중 부락에서 정제를 지낸다. 음력 정월 십사일 새이복덕을 보아 닫는 사람을 뽑아 제관, 축관 보조인, 3인이 지내고 삼색실과와 돼지머리, 포를 제물로 하고 당일 샘청소를 하여 덮어 놓았다가 저녁에 일찍 지낸다. 음식은 많이 장만하여 부락민이 나누어 먹으며 부락일을 협의 한다.
◎ 밤나무정이 : 구덕리 서쪽 길가에 있는 마을. 밤나무가 많이 있었다고 한다.
◎ 뽕나무재 : 뽕나무가 많이 있었다고 한다.

17. 상장리

옷장터, 상장이라 하며 본래 직산군 이동면의 이동장 위쪽이 되므로 옷장터, 상장이라 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상장이라 하였으며 후에 입장면에 편입되었다.

18. 하장리

직산군 이동면 지역으로 이동장 아래쪽이 되므로 하장, 아래장터라 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하장리라 하여 입장면에 편입되었다. 싸전거리, 장거리등이 있다.

▲ T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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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례산(전설)

입장면 호당리(虎堂里)에는 백제군(百濟軍)이 고구려군에게 패하고 울었다는 위례산(慰禮山)이 있다. 위례산 둘레에는 지금도 옛날을 말해주는듯이 백제의 성터가 남아 있다.

한편 위례산정(慰禮山頂)에는 용(龍)이 놀았다는 용샘이 있는데 이 용샘은 공주(公州)까지 뚫려 있다는 이야기도 전해오고 있고 서해(西海) 까지 이어졌다고도 전해오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흙으로 메워져서 샘바닥이 보이고 지름이 5m정도 밖에 안되는 조그마한 샘이지만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마르지 않아서 신비감을 자아내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산마루에는 전쟁 때 백제 임금의 화살막이를 했던 3m정도의 높은 돌이 꽂혀 있고 동남쪽으로 내려오면 말구유로 쓰였다는 큰 돌이 두쪽으로 깨어진 채 있으며 동쪽으로는 어느 장군이 시험하기 위하여 돌에 주먹질을 하여 주먹모양으로 파진 바위가 있다. 어쨌든 전쟁과 관련이 많은 이 산에 또 하나의 기이한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옛날 백제가 공주에 수도를 정하고 있을 무렵 어느 임금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날로 남침해 오는 고구려의 군사를 막기 위하여 왕은 이곳 위례산까지 와서 군사들의 사기를 높여주고 전쟁을 독려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때 백제의 임금은 용왕(龍王)의 아들이 사람으로 변신하여 온갖 재주를 다 지닌 분이었다. 그렇기때문에 왕이 이곳에 올때는 용(龍)으로 화(化)하여 공주에서 위례산 용샘까지 땅속 물줄기를 타고 단숨에 왔다고 한다.

그 때 백제의 국경선은 이곳까지 밀려와 고구려 군대는 틈만 있으면 백제를 공격했다. 백제왕은 산마루에 화살막이를 큰 돌로 만들어 세우고 그곳에서 백제군을 지휘했다. 백제왕은 천연적(天然的)으로 유리한 이곳의 지형을 이용하고 온갖 조화를 부려 고구려 군사들이 침입해 올 때마다 물리치고 승리를 거두었다. 그야말로 고구려 군사들은 날로 피를 흘리고 쓰러졌다. 수천명이 넘게 죽어간 것이다. 고구려군은 그래도 계속 이 위례산을 쳐들어왔다.

그것은 고구려가 이곳을 점령하면 지금의 천안까지 고구려의 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이곳에서 너무 많은 피를 흘려 그대로 물러 설 수는 없었다. 고구려는 처음에는 500명씩 군사를 보내어 위례산을 공격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군사를 투입시켜도 고구려군은 계속 패하기만 했다. 백제군이 승리를 거듭하는 것은 두말 할것도 없이 백제 임금이 이곳까지 와서 여러가지 조화를 부려 전쟁을 지휘 하였기 때문이었다. 백제(百濟) 임금은 이처럼 날마다 새벽에는 용으로 변하여 공주에서 이곳 용샘으로 나와 전쟁을 지휘하고 밤에는 공주로 가서 낮에하지 못한 정사(政事)를 살폈다. 그렇기 때문에 백제는 날로 강한 나라가 되고 있었다. 그간 두려웠던 고구려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런던 어느 날이었다. 이날도 백제왕은 새벽에 위례산(慰禮山)으로 군사를 지휘하러 간 날이었다. 왕실에서는 날마다 낮에는 어디론가 갔다가 밤에만 나타나는 임금을 이상하게 여겼다. 특히 불만이 많던 처남(妻男)은 동생인 왕비에게 임금이 간곳을 물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왕비는 자기 오빠에게 임금은 사람이 아니라 용(龍)이라는 말을 했다.

가뜩이나 왕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왕의 처남은 임금을 죽이기로 작정했다. 임금의 처남은 용이 좋아한다는 제비를 잡아 낚시밥으로 만들어 가지고 임금이 용으로 되었다가 사람이 되어 나오는 강가로 갔다. 마침 해가지고 어둠이 강가에 내려앉기 시작했다. 임금이 돌아 올 시간이었다. 왕의 처남은 낚시를 강물에 던져놓고 용이 와서 물기를 기다렸다.

백제의 임금은 용(龍)이 되어 공주(公州)로 되돌아 오고 있었다. 하루종일 산성(山城)에서 소리를 지르며 전쟁을 지휘한 까닭에 그는 피로한데다 시장끼까지 느껴졌다. 그때 마침 용이 가장 좋아하는 제비가 보였다. 그는 너무도 배가 고팠기 때문에 얼른 그것을 물었다. 그러자 왕의 처남(妻男)은 힘껏 낚시대를 당겨 용(龍)을 낚았는데 그 용은 우성면 동대리 마을에 가서 떨어져 죽었다. 그뒤 용이 썩는 냄새가 너무나 지독하여 이곳을 구린내라고 전한다.

한편 용을 낚은 장소를 지금도 조룡대(釣龍臺)라고 전하며 임금이 죽은 이튿날 위례산 전투에서는 백제군이 패하고 말았다. 백제군은 무릎을 꿇고 통곡을 했다. 이처럼 싸움에서 지고 울었다 해서 이 산을 위례산(慰禮山)이라 했다고 전한다.

위례성(慰禮城)

입장면과 북면 경계에 있는 산이며 높이 524m이다. 토석혼축으로 쌓은 둘레 1696척 높이8척의 성채가 현재도 있고 그 안에 큰 우물(용샘)이 있다. 백제시조 온조(溫祚)가 그의 형 비류(沸流)와 함께 유리왕을 피하여 남쪽으로 와서 비류는 미추홀에 온조는 이곳에 각기 도읍하였다.

그때따라 온 신하가 오간(烏干) 마려(馬黎)등 열명의 신하가 되므로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라 하였다가 비류가 미추홀의 수토가 맞지 아니하여 도읍하지 10년만에 그 신하를 데리고 위례성으로 와서 합하게 되여 지역이 좁으므로 B.C14년에 한산으로 옮겨 백제가 되었다 한다. 1989년 5월 서울대학교 박물관팀이 일부 발굴하여 본 결과 백제 초기의 기와, 토기, 창촉, 철낫류, 노승 무늬토기가 출토 되었다. 이 성을 보호하기 위하여 조선조 말에 사방 5리를 일인에게 광권을 주지 않았다.

 

2. 북면

 

본래 목천군의 동북쪽이 되므로 북면이라 하여 회촌(檜村), 운암(雲岩), 호덕
(好德), 비룡(飛龍), 내룡(內龍), 장항(獐項), 역촌(驛村),동지(東芝), 채동(蔡
洞), 은석(銀石), 대산(垈山), 소평(小坪), 대야(大冶), 곡간(曲干), 매당(梅
堂), 송정(松亭), 운계(雲溪), 구항(拘項),와곡(瓦谷), 오동(梧桐), 상량(上
梁), 만지(晩止), 동곡(東谷), 문현(門峴), 변정(卞正), 양곡(陽谷), 전곡(田
谷), 내명덕(內命德), 외명덕(外命德), 구동(龜洞), 사창(社倉), 상사(上沙), 사
담(沙潭), 삼용(三龍),군단(軍蛋), 심곡(深谷), 납안(納安), 도촌(道村)을 관할
하다가 1914년군면 통폐합에 따라 천안군에 편입되어 오곡, 연춘, 상동, 은지, 
용암,매송, 명덕, 사담, 양곡, 전곡, 납안, 운용 대평등 13개리로 개편되어
천안군 북면이 되었었다.  
동쪽은 병천면, 남쪽은 성남면, 북쪽은 입장면과 경기도, 충청북도,서쪽은 목천

면에 접하고 있다.

 

 <운용리>

목천군 북면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삼용리, 군단리, 심곡리, 납안리 일부를 병합하여 

운용리라 하고 천안군 북면에 편입되었다.  1963년 1월 1일 천안읍과 환성면이 통합하여 천안시로 승격됨에 

따라 천원군 북면 운용리가 되었었다.

깊은골 : 심곡이라고도 하는데 부소문이 고개 동북 깊은골이다.  옛날에는 마을
         이 있었으며 골이 깊고 물이 좋아서 전염병과 어린이 복학(複虐)이 없
         었다하며 온조왕이 처음 이곳에 있었다고 전한다.

부소문이고개 : 부소문령(扶蘇門領) : 부소문이라고도 하는데 운영리에서 입장면
         양대리로 넘어가는 높은 고개 백제때 온조왕이 위례성에서 도읍하였을
         때 이곳에 문을 세웠다 하며 소나무 산 고개라고 하는 뜻도 된다고 한
         다.

삼용리(三龍) : 군단이 남쪽에 있는 마을로 지형이 용처럼 생겼다 한다.

장생이 : 새절터라고도 하며 군단이 서쪽골 위에 있는데 백제때 온조왕이 위례성
         에 도읍할 당시 시장이 섰다 한다.  절이 있었고 장승이 있었다는 설도
         있다.

마당재 : 깊은골 뒤에 있는 산.  마당처럼 평평하여 군사가 훈련하였다 한다.

군단이(軍丹) : 운용리에서 가장 큰 마을 백제때 군대가 주둔하였다고 한다.

산신제 : 군단이에서 정월 중 택일하여 지내며 생기복덕을 보아 닫는 사람으로
         제관 축관 외 5인 정도가 참석하며 소머리 삼색실과 쌀 3되 3홉을 제물
         로 놓고 각호의 소지를 올려주는데 저녁 7시경 지내며 제지낸 음식은
         나누어 먹고 제관들은 며칠간 몸을 정결히 한다.

위례성우물 : (전설) 위례성 안에 있는데 백제시조 온조왕이 밤이면 용이 되어
         우물로 들어가서 부여 백마강에서 놀다가 날이 밝으면 이 우물로 나와
         서 왕 노릇하다가 처남의 꾀임에 빠져 죽었다 한다.

구수바위 : 위례성안 산등성이에 있는데 돌을 다듬어 만든 것이 구유처럼 되었는
         데 백제 온조왕이 이곳에 도읍할 적에 사용하던 것이라 하며 비 받침이
         라고도 하고 반쪽밖에 없는데 또 반쪽은 굴러 내려 그 밑 고랑에 묻혀
         있는 것을 조영호씨가 장소를 잘 안다고 한다.

독갓바위 : 바위가 삿갓을 쓴 것 같이 생겼다.

대궐터 : 위례성안 동북쪽 말랭이 펀펀한 곳을 대궐이 있었다는 대궐터라고 전한
         다.

올림이골 : (전설) 옥녀봉 밑이 되는데 옥녀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놀다 올라가
         곤 하였다고 전해진다.

 

<대평리>

목천군 북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대산리, 소평리, 대야리, 곡
간리가 통합하여 대산리, 대야리에서 대자를 따고 소평리에서 평자를 따서 대평
리라 하였고 천안군 북면에 편입되었다가 1963년 1월 1일 천안읍과 환성면을 통
합하여 천안시로 승격되므로 천원군 북면 대평리가 되었었다.

가다골 : 가덕동 소평리 가더기라 부르며 평전말 옆에 있는데 장사 지내기 전 이
       곳에 시체를 놓았다고 장사 지냈다 한다.

밤나무골 : 밤나무가 많이 있어 밤나무골이다.

두루봉 : 산제당골이 있는데 예전에 곡간이 사람들이 산제를 모시던 곳이다.

쇠죽곡 : 예전에 이곳에서 철의 일을 하였다.

개천골 : 산이 둘러있고 하늘만 보이는 골이다.

조비장골 : 비장을 지내던 조비장의 무덤이 있다.

곡간리(曲干) : 마을이 산속 깊이 있어서 개울을 따라 꼬불꼬불 올라가는데 온조
       왕이 위례성에서 도읍할 당시 이곳에 곡식을 쌓아 두었던 곡간이었다 한
       다.  곡대라고도 부른다.

중방박골 : 남응중(南應中)터. 곡간 동쪽뒤에 있는 곳인데 철종때 척신들의 횡포
       를 막고 종실중 어진분을 왕으로 추대하려고 하는 역명을 일으키려는 일
       을 주선하다가 붙잡혀 죽었다.  그 집터가 이곳에 있었는데 파서 헤쳐버
       렸다고 하며 그 당시 화약을 빻았던 절구통이 지금도 남아서 뒹굴어 다
       닌다.

전설 : 혁명을 거사하려고 무기를 운반하는데 남의 눈을 피하기 위하여 상여로
       연춘리 쪽에서 와서 며칠마다 장사를 지내며 무기를 묘로 위장하여 보관
       하였다 하며 이곳에 사는 안씨들과 한씨가 가담했고 윤씨가 살았는데 일
       부는 가담했고 가담 안한 윤씨의 고발로 붙들렸다고 전해진다.  남응중
       의 누이가 있었는데 응중에게 벼 한말 방아를 찧어서 쌀 한말 나오거든
       거사를 시작하고 만약 한말에서 조금이라도 빠지면 기다리라고 했는데
       벼 한말을 방아찧으니 아홉되가 나오므로 한되 더 나올 시기를 참지 못하
       고 거사를 시작하려다 실패했다고 한다. 

대산 : 싸리재, 싸리재 밑의 마을.

싸리재고개 : 대평리에서 충청북도 진천군 백곡면으로 넘어가는 고개.  산이 높
       고 깊어서 싸리가 고복같이 즐비하게 있다 한다.

안각골 : 안갓골.  안강골이라 부르고 평전말 남쪽에 있다.  
       안씨의 강당터가 있었다.

대야촌(大冶) : 댓골, 대야동이라 부르며 옛날에 철의 일을 하던 큰 대장간이 있
       었다.

장사터 : 옛날에 큰 부자가 살았는데 입장으로 이사했다고 한다.

노적골 : 옛날에 이곳에서 놋그릇을 만들고 특히 놋젓가락을 많이 만들었다고 한
       다.

조고리골 : 조골이라고도 하며 도적골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도적들이 많이 있었
       다 하고 쇠를 채취했다고도 한다.

갈월넘이 : 진천군 갈월로 넘어 다니는 고개.

지장골 : 지장을 심었던 골이라 하며 궐터가 있다.

불부골 : 철을 생산하기 위하여 불무하던 골.

점말 : 질그릇과 옹기를 생산하였다.

챙경이골 : 공인(工人)들이 살던 곳.  철을 생산하는 철공인, 그릇을 생산하는
       공인, 장이들이 이곳에 모여 집단으로 거주했다.

용어물 : (전설) 물맛이 좋고 물이 잘 나오는 샘인데 어떤 사람이 이 우물가에
       서 개를 잡아 이 물에 씻으므로 샘물이 나오지 않았는데 지금은 조금씩 
       나온다.

 

목천군 북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도촌, 납안리 일부를 병합하
여 납안리라 하여 북면에 편입되었다.
  
부등이들 : 도촌아래에 있는들로 부등넝쿨이 많이 있다고 한다.

씨앗골 : 도촌뒤에 있는데 모양이 씨앗처럼 생겼다 하며 큰골 뒤 작은골이다.

사리목 고개 : 도촌에서 성거읍 천흥리로 넘어가는 고개 길의 모양이 꾸불꾸불
         하여 새끼를 사리어 놓은 것 같이 생겼는데 속설에 사리목과 통한다하 
         여 흔행길은 일체 다니지 아니하며 대원군 섭정시 천주교인들 박해할 
         적에 이곳에서 은신한 사람이 많으면 경상 전라도의 사람도 이곳에서
         피난했고 교인들의 연락처로 이용됐으며 불란서 신부도 세명이나 있었
         다 한다.
  
수촌(秀村) : 뺄터.  납안리 아래쪽에 있는 마을로 산수가 수려하고 빼어났다
         고 하여 뺄터라고 했다 전한다.
  
우물목고개 : 도촌에서 입장으로 넘어가는 고개.
  
산신제 : 도촌, 시월중 택일하여 생기복덕을 보아 닫는 사람으로 제관, 축관, 고
         양주(제물 및 제를 주관하는 집)가 부락민 다수와 통돼지 삼색실과, 메
         를 제물로 놓고 지내며 각호의 소지를 올려주고 밤 10시∼11시 사이에
         지내며 제를 지낸음식은 나누어 먹는다.  제관들은 몸을 정결히 하고 
         며칠을 지내야 하며 목욕하고 지낸다.

도촌(道村) : 소학동(巢鶴洞)이라고도 하며 납안리 서쪽에 있는 마을로 사리목
         과 가깝고 옛날에는 상북에서 제일 큰 부락이었다고 한다.  대원군 섭
         정시 병인교란때 경상도 내포방면 천주교 교우들이 많이 살았고 불란
         서 페롱권신부, 리델이신부, 칼레강신부 등이 이근천에서 피신해 있었
         다고 한다.  이때 천주교인 중 5인이 체포되어 공주 영문에서 사형되었
         다 한다.  사형자는 최베드루천여, 최라자로종여, 배문호, 고요셉, 체
         서방며느리로 목천군 북면 소학동에 살다가 본읍 포교에서 잡혀 공주로
         옮겨 11월 8일 사형이 집행되었다.
  
납안이(納安) : 도촌 아래에 있는 마을로 위례성 전투에서 전사한 무덤이 수백기
         있는데 돌무더기로 되어 있다.
  
산신제 : 납안부락에서 10월 또는 정월에 택일하여 지내며 생기복덕을 보아 닫는
         사람으로 제 지낼 사람을 선정하며 돼지머리 삼색실과등을 제물로 하고
         각호의 소지를 올려 주며 밤 10시경 제를 올리고, 제를 지낸 음식은 나
         누어 먹는다.    
         선정된 제관들은 탈없이 지내야 하며 몸 가짐을 삼간다. 

 

 

 3. 직산읍 

 

본래 직산현의 서쪽 변두리가 되므로 서변면(西邊面)이라 하여 군서(郡西), 신대(新袋), 자은방(自隱防), 

삼거리(三巨里), 수헐(愁歇)의 5개 관할구역과 동변면(東邊面)의 군동(郡東), 방축(防築), 남산(南山), 

판정(板井), 산직(山直)의 5개리와 일서면(一西面)의 덕령(德令), 상남(上南), 양전(良田), 당곡(當谷), 

송기(松基), 부대(富垈), 자은가리(自隱加里), 석곡(石谷), 마산(馬山), 독정(獨井), 미륵산(彌勒山), 갈산(葛山), 

신성(新成), 시목( 木), 모산(毛沙)의 15개리, 그리고 천안군 북이면의 입암리(立岩里), 업성리(業成里)의 

각 일부를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병합하여 군동, 남산, 판정, 군서, 삼은, 수헐, 상덕,양당, 고송, 자은, 

석곡, 마정, 신갈, 모시리의 14개리로 개편하였고 성산의 이름을 따서 성산면(城山面)이라 하였다.  

천안군 성산면이 되었다가 1920년 직산군의 이름을 따서 면명을 직산면으로 다시 바꾸었으며, 

천안읍과 환성면이 통합하여 1963년 1월 1일 천안시로 승격되므로 천원군 직산면이 되었다가 다시 

환원되었다.

 

<군서리>

본래 직산군 서변면 지역으로 직산현의 읍치지인 읍내의 서쪽이 되므로 서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군서리라 하고 성산면에 편입되었다.  
후에 성산면이 직산면으로 개칭되었고, 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직산읍 군서리가 되었다.

객사터(客舍) : 동헌 터 동쪽에 있는 객사 터.  1930년 경에 객사를 불하하여 삼은리의 삼거리로 옮겨져 

                    공회당으로 사용하다가 헐리어 보관하고  있으며 다시 동헌앞에 복원함.
교동(校洞) : 향교 골.  상꽂말, 당곡말이라고도 하며 옥고말 서쪽에 있는 마을.
                직산 향교가 있고 사직단이 있었다고 한다.
망치(望峙) : 바람재라고도 하는데 동헌 터 뒤에 있는 산. 옛날에 불무가 설치 되었던 곳.
삼봉리(三峯里) : 향교 골 남쪽에 있는 마을.  성산밑이 되는데 세 봉우리가 형성되었다.
도영지(倒影池) : 장명다리 아래에 있는 못.
(전설) : 예전에 남산이 있는 부엉바위가 굉장히 험상궂어 날마다 곡식 천석을  허비하는 상이므로 

직산 고을이 이것으로 인하여 가난해진다고 하여 그대로 두면 직산 고을이 큰 일이라고 해서 여러모로 생각한 

끝에 그  험상한 기운을 제거하기 위하여 이곳에 큰 못을 파서 바위 그림자로 거꾸로 비치게 하여 기능을 

상실케 하였는데 임진왜란 후 수축하지 못하였다. 

그 후 부터는 직산 고을에 큰 부자는 안나고 작은 부자들만 난다고 전해온다.

 
제원정(濟源亭) : 백제의 근원이 되는 땅이라는 제원루가 객사 뒤에 있었다고 한다.
새터(新垈) : 옥고말 남쪽에 새로된 마을.
영소정(靈沼亭) : 객사 터 동쪽에 있는 행궁 터. 조선조 18대 현종 6년(1665) 4월에 현종이 온양온천에 

                      거동할 때 행궁을 짓고 못을 파 후 연씨를  뿌리고 영소정이라 하였는데 제19대 숙종이 

                      온양온천에 거동할 때 곳에 올라서 시를 지었으며 우암 송시열의 시문이 있다.
호서계수아문(湖西界首衙門) : 직산면사무소였던 구직산현 아문 2층으로 되어 있는데 앞면에는 

                                       호서지방에 들어오는 첫 머리 경계에 있는 고을이란
                                       뜻으로 호서계수아문(湖西界首衙門)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옥골 : 옥고말, 옥현이라고도 하며 군서리에 가장 큰 마을. 직산현의 옥이 이곳에 있었는데 

        지금은 옥현(玉峴)이라 한다.
옥골방죽(玉洞堤) : 옥골에 있는 방죽.
장명다리(長命橋) : 군서리 앞들 가운데 있는 다리.  

                         옛 사형장이 장명교 건너에 있었는데 이 다리를 건너지 않아야 명이 길다고 하여 장명교라
                         했다고 한다. 
길마고개 : 군서리에서 성환으로 넘어가는 고개.

 

<군동리>

직산군 동변면의 지역으로 직산현 읍치지인 읍내 동쪽 마을이므로 동리라 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때 

군동리라 하여 성산면에 편입되었는데 성산면이 직산면으로 면명이 개칭되었고, 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직산읍 군동리가 되었다.

○ 쇠재(금성) : 군동리에서 가장 큰 마을 남쪽 부엉바위가 철옹성 같이 되었으며 대장간이 있었다.

○ 온조묘터(溫祚廟) : 백제 시조 온조왕의 사당이 판정리 산 24-29번지에 있었는데 정유재란 때
                             불에 탔다고 하며 그 후에 도 지방민들이 당집을 짓고 제를  지내왔는  6.25때 미군들이 

                             헐어버렸다고 하며 그 자리에 불교신자들이 당을 짓기 위해 왔다고 한다.

○ 조성비(趙成碑) : 하남백(河南白) 조성(趙成)의 비(碑)가 동네 위에 있고 묘가 단고개 위에 있다.
○ 구억촌(九億村) : 쇠재옆 구석에 있는 마을. 오랫동안 보전되라는 뜻에서 불러진 이름이라고 한다.
○ 단고개 : 단현(壇峴).  군동리에서 성환읍으로 넘어가는 고개. 직산현의 여단이 있었다.
○ 방축말 : 방축리라고도 하며 쇠재 남쪽에 있는 마을.  성덕 방죽이 있다.
○ 사거리 : 구억말 북쪽에 있는 마을.  네 갈래 길이 있다.

 

<수헐리>

직산군 서변면의 지역으로 시름세, 수흘리라 부르는데 고려 태조 왕건이 이 곳에 있는 원에서 쉬면서 

동쪽의 산을 바라보니 오색구름이 영롱함을 보고 신선이 사는 산이라 하여 제사를 지내고 근심을 풀어 잘 쉬어 

갔으므로 시름세 또는 수헐이라 하였다 하며, 그 때 제사 지내던 산은 신이 사는 산이라 하여 

성거산(聖居山)이라 하였다고 한다.  수헐리 이곳은 고려초 이전부터 길손이 쉬어가는 원이 있었던 곳이며 

수헐의 지명도 오래된 것 같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에도 그대로 수헐리라 하여 성산면에 편입되었다가 

성산면의 면명이 직산면으로 개칭되었고, 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직산읍 수헐리가 되었다.

거리막 : 시름세 동남쪽 큰 길가에 있는 마을.
마룻들 : 시름세 앞에 있는 큰 들.  옛날 서해 바다물이 이곳까지 들어왔다고하며 나루터였다는 전설도 있다.
찬샘골 : 시름세 동쪽에 있는 골짜기.  찬물나는 샘이 있다.
탑골 : 시름세 북쪽에 있는 골짜기 탑이 있다.
수헐원터 : 시름세에 있는 수헐원 터.  고려 태조가 이곳에서 쉬면서 성거산에 제사를 지냈고, 

              조선 4대 세종대왕 23년(1441) 3월 19일에 소헌왕후 심씨가 온양온천에 거동할 때 비가 와서 

              땅이 질고 날이 추워 세종대왕이 사람들과 말이 피곤함을 염려하여 이곳에 머물면서 진무(鎭撫)
              두 사람에게 명하여 술과 밥을 싣고 다니며 연도의 사람들을 구제하였다고 한다.

<판정리> 

직산군 동변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판정리 산직리가 병합하여 판정리하 하고 성산면에 

편입되었다. 1920년 성산면이 직산면으로 개칭되어 직산면 판정리가 되었다.

판정(板井) : 늘우물, 늘으머리하고도 하는데 판정 마을에 수량이 많이나고 물맛이 매우 좋은 우물이 있어 

                 널판으로 우물 밑과 옆을 짜서 샘을 보호하였다고 한다.

정제 : 판정 마을에서 우물제를 지내는데 옛날에는 정월 초승 길일을 택하여 제를 올렸다. 

         요즈음에는 음력 섣달 그믐날 밤 12시에서 1시 사이에 지내는데 생기복덕을 보아 닫는 사람으로 

         그의 집에서 제물을 장만하여 지내게 된다. 숫소머리와 삼색실과, 떡 3되 3홉을 제물로 놓고 지내며 

         제관은 리장이나 반장이 된다. 옛날에는 제(祭) 날이 부락 사람들의 담배대를 모두 제날이 거두어 갔고 

         출타를 금했다. 현재 그런 것은 없어졌고 제 지낸 후 밤과 대추를 샘부근에  버리는데 아들 못 낳는 부인  

         이 먼저 주어먹으면 아들을 낳는다고 하여  밤중에 숨어 있다가 몰래 주어먹는 여인이 많았다. 

         7월 7석에도 지내는 소를 잡았다. 동네에서 소를 잡아가지고 각 호마다 균등히 나누어 주었다가 가을에 

         모든 비용을 쌀로 계산하여 받는다.
         섣달 그믐 정제(井祭)는 전날 샘을 청소하여 지내고 칠석에는 당일 청소하여 지내며 샘이 두 군데 

         있는데 갈비 한짝씩 놓고 정오에 제를 올린다. 각 호의 평안을 비는 소지를 올리며 하루를 즐겁게 지낸다.

순복골 : 금광이 성할 때 제련장이 있었던 골.

원통이골 : 판정리 후미골. 옛날 직산 조씨들의 묘가 많이 있었는데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없어졌다. 

              후손들이 찾는 효심은 있으나 못찾고 있어 원통하다고 하였다고 한다. 

전기통거리 : 널우물 서북쪽에 있는 마을. 입장면 도하리와 용정리에서
                  사금을 캘 때 이곳에 변전소가 설치되었던 곳이라 한다. 

산직말(산직촌) : 널우물 서북쪽에 있는 마을. 남씨의 산직집이 있다. 

팔명당 : 예전에 부락이 있었는데 현재는 없으며 판정리 서쪽에 있었다. 

안역골 : 군부대 산 일대의 도로 위가 된다. 

학의샘 : 판정샘과 300m가량 떨어져 있는데 판정샘과 연결되어 있다고
            전하여 오며 한군데 물을 품으면 한데의 물도 같이 줄어든다고 한다. 

서낭당 : 음력 정월 초승 각 자가 서낭제를 지낸다.

산신제 : 산진말에서 섣달 그믐 날 밤 1시에 부락 사람 중 생기복덕을 보아 닫는 사람을 택하여 제관으로 

            정하고, 제관은 여자 한 사람과 보조인이 지내는데 제물은 소머리 삼색실과와 포, 떡 3되 3 홉1을
            놓으며 비용은 부락 자금으로 하고 모자라면 모금한다. 

            제를 지내기  전에 황토를 온동네에 두루 펴며 금줄을 치고 외지인의 출입을 금한다.

 

4. 성환읍 

본래 직산군의 지역이었으며 직산읍 서쪽의 세 번째 면이 되므로 삼서면(三西
面)이라하여 성환내리(成歡內里), 중리(中里), 외리(外里), 남산(南山), 농촌(農
村), 와우(瓦宇), 가동(佳洞), 신리(新里), 복모(伏毛), 수포(水浦)의 11개리를 
관할 하다가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이서면(二西面)의 우헐(牛歇), 
신대(新垈), 송덕(松德), 금곡(金谷), 매곡(梅谷), 광주(光珠), 방축(防築), 신
무(新茂), 임리(林里), 각금(各今), 왕지(王池), 금신(金新), 율가(栗加), 13개
리와 일서면(一西面)의 당곡(堂谷), 일부와 이북면(二北面)의 중령(中令), 하령
(下令), 궁리(宮里), 안양(安陽), 지족향(知足鄕) 수천(水川), 홍경(弘慶), 대하
(大下), 대정(大井), 신정(新井), 사동(巳洞), 학선(鶴仙)의 12개리, 아산군(牙
山郡), 삼북면(三北面)의 중왕리(中旺里)와 평택군 동면의 와야리(瓦也里)의 일
부와, 경기도 양성군(陽城郡) 영통면(令通面)의 궁리(宮里), 상리(上里)의 각 일
부를 병합하여 성환도찰방(成歡道察防)의 이름을 따라 성환면(成歡面)이라 하고 
천안군에 편입 되면서 우신, 송덕, 매주, 신방, 왕림, 율곡, 와룡, 신가, 복모, 
어룡, 성환, 성월, 수포, 양령, 안궁, 수향, 대흥, 학정 18개리로 개편 되었으
며 그후 1973년 7월 1일 대통령령 제 6543호에 의하여 읍으로 승격되었다. 1989
년 1월 1일 (천원조례 제 1084호 1988. 12. 31) 도하리가 입장면에서 편입되어 
19개리가 되었다. 동쪽은 입장면과 직산읍, 남쪽은 직산읍, 서쪽은 아산시, 둔포
면과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북쪽은 평택시와 경기도, 안성시, 공도면에 인접
해 있다. 
1914년 지방행정구역 통폐합 때 수포리(水浦里)가 성환면에 있었는데 그후 평택
으로 편입되어 성환면에서 분리되었다
 <수향리>

직산군 이북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지족향리, 수천리를 병합
하여 수천리의 수자와 지족향리의 향자를 따서 수향리라 하고 성환면에 편입되었
는데 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성환읍 수향리가 되었다.

지질캥이 : 지족향(知足鄕). 지족향리 수향리에서 가장 큰 마을. 백제때 재상들
        이 물러나 이곳에 은거하면서 이만하면 족하다는 뜻으로 마을 이름을
        지었다고 하며 또한 백제때 지족향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이곳에
        예전에 관이 있던 터라고도 한다. 지명에 옥이 있었다는 옥터 자리와
        향교가 있었다는 향교자리가 초등학교 남쪽에 있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관터였던 것은 분명 한 것 같다
자무실 : 잠실. 지질캥이 동쪽에 있는 마을. 세종때 잠실을 두고 농민에게 누에
        치기를 장려하였으며 많이 길렀다고 한다.
점촌 : 무대 위쪽에 있는 마을. 옹기점이 있었다.
무내 : 수천(水川)이라고도 하고 신천(新川) 몰내라 부르며 학정천이 옆이 된다.
성재 : 지질캥이에 있는데 성이 있었다고도 하고 성주가 살던 곳이라고도 한다.
용정골 : 용이 나와 하늘로 올라갔다는 샘이 이 골에 있다.
새우대 : 농사를 지어도 김장 새우젓 값도 못나오는 천수답 이었다고 한다.

 

<안궁리>

 

직산군 이북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궁리, 안양리와 경기도 
양성군 영통면 궁리, 일부가 병합되어 안양리의 안자와 궁리의 궁자를 따서 안궁
리라 하고 성환면에 편입되었다가 면이 읍으로 승격되므로 성환읍 안궁리가 되었
다.

궁들 : 궁평(宮坪), 망건다리들 이라고도 하며 안궁리 둘레에 있는 큰 들. 조선
       조 말 궁에서 추수해 가는 궁답이 많았다. 망건다리는 신가리 부근에
       있다. 본래 이름은 맹간교이다.
가용 : 궁말 서쪽에 있는 마을.
궁리내장보(宮里內腸洑) : 궁말 안쪽에 있는 보.
궁말 : 궁리(宮里) 궁들에 있는 마을.
아교(阿橋) : 애고다리. 궁말에 있는 다리. 다리가 좁고 길어서 처음 건너는
       사람은 겁이나서 저절로 애고 소리가 나온다고 한다.
새터말 : 신촌(新村). 가룡 뒤쪽에 새로된 마을.
안양(安陽) : 안양리. 궁리 동남쪽에 있는 마을.
청망잇들(淸亡) : 청망평, 가룡앞의 큰 들. 고종 31년(1894) 6월에 청국의
        섭지초(葉志超)가 월봉산에 진을 치고 새벽밥을 먹다가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이들에 밀려와서 크게 패하였다.  청군이 망했다 해서
        청망(淸亡)이 들이라고 한다.
하단들 : 궁막 앞에 있는 들.

 

 <성환리>

직산군 삼서면 지역으로 성환외리, 성환 남산리, 이북면 대정리, 각 일부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병합하여 조선시대 성환도 찰방이 이곳에 있었으므
로 성환리가 되고 성환면에 편입되었는데 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성환읍 성환리
가 되었다.

남산(南山) : 성환 남쪽에 있는 산 너머에 있는 마을.
바깥말 : 외리(外里) 성환 바깥쪽에 있는 마을.
교통(橋洞) : 학교가 있는 마을.
빗거리 : 구 성환 면사무소 앞에 있는 길. 현재 성환 농협이 있는데 구 면사무소
         안으로 이전하였다.
연못터(蓮池) : 연지 터. 척수루 앞에 있던 연못 터. 지금은 주택이 들어서고
         우물만 남아 있다.
신선동(神仙洞) : 성환리 남쪽에 새로 형성된 마을.
이성환(裡成歡) : 안성환. 성환 안쪽에 있는 마을.
찰방터 : 성환 북동쪽 조금 높은 돈대위에 있는 터. 조선시대 성환도 찰방이
         있어 공주의 일신, 경천, 단평, 유구, 연기의 평천 금사, 목천의 연춘,
         청주의 장명, 천안의 김제 신운 등의 역을 관할하다가 고종32년
         (1895)에 폐지되었다. 현재는 그 터에 늙은 느티나무 세 그루가 서
         있고 주택이 들어섰으며 소규모 공장들이 있다.
한부개제(韓夫介堤) : 한부개라는 사람이 방죽을 만들었다고 하며 성환리에 있
다.
최옥제(崔玉堤) : 최옥이라는 사람이 만든 방죽이라 전해오며 성환리에 있는 방
죽.
척수루(滌愁樓)터 : 찰방터 앞에 있는 척수루터. 앞에 연못이 있고 연못 터 옆에
         사정(射亭)의 터가 있다. 이 척수루는 온갖 업무에 시달린 복잡한
         머리를 식히고 사람들이 모여 활을 쏘면서 즐기던 곳이기도 하며
         역졸들의 무술 연마장으로 쓰던 곳이다.

막거리 : 이곳에 주막이 있어 지나는 행인이 쉬어가고 술을 마시고 갔다 한다.

 

<도하리>

직산군 이북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도감리와 삼동면 하리가 
병합하여 도감리의 도자와 하리의 하자를 따서 도하리라 하고 입장면에 편입되었
다가 1989년 1월 1일(천원군 조례 제 1084호 1988. 12. 31)로 입장면에서 성환읍
으로 편입
되어 성환읍 도하리가 되었다.

보령산 : 산신제, 관양수 마을에서 지냈는데 음력 정월 초사흗날에 지낸다.
         생기복덕과 길한 사람을 가려 제관 축관을 정하고 아주머니 한사람,
         떡시루 지고 갈 사람과 같이 가서 지내며, 삼색실과와 떡쌀 세되
         세 홉을 놓고 하고 밤 10시에서 11시 사이에 지낸다. 방개울
         (산제당에 있는 골이름, 샘이 있는데 항상 물이 있음) 물로 목욕하고
         그 물 정수로 지낸다. 제를 지낸 후 동네 각 호마다 소지를 올리고
         안녕을 빈다. 제를 지내게 된 유래는 동네 젊은이들이 이유 없이
         죽어갔기 때문에 지내게 되었다 하며 언제부터 인지는 모른다고 한다.
(전설) : 이곳 관양수는 배가 가는형(선주형)이라 우물을 안파고 샘 하나로 물을
        먹었다. 샘을 많이 파게 되면 배의 밑을 뚫는 격이라 배가 가라앉아
        동네가 망하므로 샘 하나로  불편해도 살았다고 전해 온다.
춘수골 : 옻샘.  춘수동에 있는 우물 물이 몹시 차서 옻오른 데 목욕을 하면
         낫는다고 한다.
하리(下里) : 관양수라고도 하며 도하리 아래쪽에 있는 마을. 좋은 우물이 있다.
방아다리 : 예전에 이곳에 물레방아가 있었다.
한식골 : 예부터 동네 총각들이 공치던 곳
도야(都也) : 옛날에 이곳에 쇠를 녹이던 큰 가마가 있었다. 
쇠무덤이 : 쇠를 생산하고 남은 것을 쌓았던 더미가 있었는데 현재는 연암축산
         원예전문대학 부지로 매립되었다고 한다. 
버럭더미 : 광산에서 파낸 흙 더미.
골밭 : 기와장이 많이 나오며 부자가 살았다고 전해지며 행인의 편의를 보아
        주었던 원(院)터가 있었다고도 한다.
도하리 : 지형이 또아리(똬리) 같이 생겼다고도 하고 마한시 대 도읍지라는
         설도 있다. 궁(宮)자와 도(都)자가 붙은 지명이 있기 때문이다.

 

<홍경리>

직산군 이북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홍경리, 대하리, 대정
리 
일부가 병합되어 대정 대하리에서 대자를 홍경리에서 홍자를 따서 대홍리라 하
고 성환면에 편입되었는데 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성환읍 대홍리가 되었다.

개방(開防) : 갯방죽, 한 우물(큰우물) 남서쪽에 있는 마을. 전에 방죽이 있었
         는데 사금(砂金) 캐느라고 없어졌다.
대정리(大井里) : 한 우물(큰우물). 이 우물은 길가던 스님이 영기 있는 우물
         이라 하여 해마다 음력 2월 2일이면 마을 사람들이 정성을 다하여
         제사를 지내던 우물로써 하나밖에 없는 우물이라 한 우물이라 한다.
대동네 : 광해군때 민폐를 덜기 위하여 소사(素沙)들에 대동 법을 실시할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홍경사 앞에 세웠다. 이민구(李敏求)가 비문을 지었
다.
대하(大下) : 대흥 저수지 아래에 있는 마을.
복병(伏兵)재 : 복병티. 뱃봉재라고도 하는데 홍경리 앞에 있는 낮은 재(고
개).
          정유재란때 명나라 장수 참정(參政) 양등산(梁登山) 부총(副總)
          해성(解生)이 이곳에서 숨어 있다가 왜군을 크게 쳐부수었다고 한
다.
한우물 : 대정리(大井里) 홍경리 동쪽에 있는 마을 우물이 있는데 청일전쟁때
         일본군이 이곳에 진을 치고 싸웠다고 한다.
홍경원(弘慶院)터 : 홍경사 앞에 있는 원(院)집터. 왕래하는 행인들의 편의를
         위하여 고려 제8대 현종때 함께 원을 두어서 출몰하는 도적의 피해를
         막았다.
홍경잇돌(弘慶院坪) : 홍경원 앞에 있는 큰 돌. 조선 제7대 세조 10년(1464)
         3월 17일에 세조가 온양온천에서 돌아오는 길에 이곳에서 하룻밤을
        자고 갔으며 제14대 선조 30년9월8일에 명나라 장수 양등산과 해성이
        이곳에서 왜적을 크게 막아 왜적 서울 진입을 막았다.
홍경사비(弘慶寺碑) : 홍경사 터에 있는 비. 높이 214cm 넓이 10cm 고려 8대
         현종 17년에 한림학사 최충(崔沖)이 어명을 받아 글을 짓고 백현례
         (白玄禮)가 글씨를 썼는데 홍경사의 사적을 자세히 적었으며 국보
         제7호로 지정되었다.
(전설) : 비 갓위에 돌 세 개를 던져 올려 놓으면 아들을 낳는다고 하여 아들
        없는 여인들이 돌을 던져서 비 갓위에 올려 놓으려고 돌을 많이 던져
        비갓이 파손되었다.
홍경사터(봉선홍경사터) : 큰 길가의 홍경사 터. 고려 제8대 현종이 그 아버지
        뜻을 받들어 현종 7년(1016)에 이곳에다 큰 절을 짓기 시작하여 200여
        칸의 절을 완성했으며 봉선 홍경사라 하고 승려들을 많이 모아 불법을
        연구하게 하였으며 행인들을 도적으로부터 보호하였는데 공주 명학소의
        망이 망소이 난때 불 타서 소실되었다고 한다.

5. 아산시 인주면 밀두리·密頭里

 

밀머리 : 밀물의 머리쪽이라는 뜻으로 밀두, 밀머리라 하였다함.

감나뭇골 : 밀머리 동남쪽에 있는 마을. 감나무가 많았다함.

: 밀머리 서쪽에 있는 마을. 새로 뚝을 막고 마을을 이룩하였음.

세때배기 : 밀머리 남쪽에 있는 마을. 솟대박이가 있음.

: 세때배기 안쪽에 있는 마을

홍탁골 : 관청리의 "홍탁골"

당집터 : 밀머리 안산에 있는 산제당의 .

밀두천 : 밀머리에 있는 .

홍탁보 : 홍탁골에 있는 .

솟대박이 : 세때배기 남쪽, 기슭 길가에 있는 솟대를 세웠다고 .

밀두교 : 밀머리 사이에 있는 다리.

 

 

【인주면 마을 7】

 337-830 충청남도 아산군 인주면 밀두리1구

 1992. 6. 26., 김연아 조사


밀두리 1구는 인주면의 면 소재지로 자연부락 이름으로는 용이 많았다는 데서 지어진 밀머리라는 이름에서 유래했고, 주민은 총 266명으로, 69세대가 살고 있다. 남녀별 현황으로는 남자 138명, 여자 128명으로서 비교적 작은 규모의 마을이다. 주민들은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으나 아산군의 관광지 개발과 인근의 낚시터로 인해 도로가 잘 닦여진 편이고 상점이 많았다.

인주면의 공공기관은 면사무소와 농협, 우체국이 있었고, 교육시설은 없어 부근의 신성국민학교, 인주중학교, 고등학교는 온양이나 천안으로 통학한다. 대부분 기독교를 믿고 있으며, 공세리에 성당이 하나있고, 밀두리 1구에도 교회가 하나 있다. 전래하는 민속행사는 없다.

 

 이 저 공세리라고 하는 것에 가서 즉, 말하자면 세금 받는데, 조공을 받은 데래. 거기가 공세리라는 데가. 그래서 글자 그대로 공세리여. 그래서 공세리. 전이는 공서, 공서, 공소지였었고. 이 저 행정기관은 공세리여, 공세리로 되있는 겨. 그래가지구 저 그때는 면소재지이고, 고 밑으로 내려와서 신성리는 새테구, 새테. (조사자: 신성리를 옛날에는 새터라고 부른 거예요?) 잉. 새테구. 또 여기루 올라와서 이제 밀두리가 밀머리구. 그, 그런데 인저 밀머리는 아까 내가 얘기한대로 무슨, 무슨, 뭐 거짓말인지 참말인지 몰라두 거기 저 용천리. 용이 항상 거기 있었다고 해서 용의 머리허구 어, 어, 모습 혀가지구서는 아까처럼 빽 빽빽 밀(密)자, 머리 두(頭)자해서 밀머리라구 머리. 머리가 인저 머리 두자로 되가지구 밀두리라고 되있는 겨. 그래서 그 신성리 밑으로 저 인제 새끼쳐 나가는디, 그 그 밑으로는, 저 해변 쪽으로는 전부 경기도 땅, 수원 땅이어서 밥해 가지고 충청도 땅이서 먹었었대. 그래가지구 그때는 이제 양반, 상놈, 중류, 저 상, 양반 쭉 이제 상인이다 중인이다 하인이다 할 적이 인제 수원 땅에서는 충청도는 하인이 많이 되거든. 그 그러니 중인이여. 경기, 이 수원 땅이는 그러니께 말하자면 양반이구, 그래서 그 하대를 받았대. ///

 

 

  4) 백제초도 하남위례성 예상 疆域圖

  <온조왕 원년...기원전18년 하남위례성 예상 강역도>

   서해 삽교천 신창면~도고산~송악산~각흘고개~곡두재~봉수산 차현(차령고개)~천안공원묘원

   ~ 고려산~봉항산~서운산~칠장산~안성시 삼죽면~양성~진위천~아산만 ///

 

  

 

 

 <팔도분도---온조왕 원년 bc18년--하남위례성 강역 예상도>

 

  <청구팔역도---온조왕 기원전 18년---위례강역도 >

 

  <호서도---하남위례성 강역 예상도>

 

 

  

<아산 인주면 밀두리(해빈 미추홀)과 직산 위례산성>

 

  <금강유역도(웅천,백마강,사자하) 주변도...온조왕13년--南限熊川> 

 

 <직산 위례성...차현(차령) 남쪽 경계---온조왕 13년 남한웅천(南限熊川...남으로 웅천(공주)에 한정하고...> 

 

  <해빈 미추홀...직산위례성...용인(한산) 부아산---온조왕13년 서궁대해(西窮大海...서쪽으로 대해에 다하고..>

 

 <서울 삼각산(북한산)...송파(풍납성)...한산 부아산(용인) > 

 

  <패수---예성강의 평산현 저탄(猪灘)---온조왕 13년 북지패수(北至浿河...북으로 패하에 이르고...) >

 

  <한강(한수)유역도...예성강,임진강,한강...북한산...광주 > 

 

   < 한성 주변과 춘천(주양)---온조왕13년 동극주양(東極走壤...동쪽으로 주양에 극하고...) >

 

 <해동지도---목천현, 직산현의 위례성 > 

 

   

 

 5) 직산 위례성의 옛 문헌

 

< 신증동국여지승람>

1. 직산현(稷山縣) >


동쪽으로 진천현(鎭川縣) 경계까지 33리이고, 경기도 안성군(安城郡) 경계까지 21리이다. 북쪽으로 같은 군(郡) 경계까지 25리이며, 남쪽으로 천안군(天安郡) 경계까지 10리이며, 목천현(木川縣) 경계까지 21리이다. 서쪽으로 평택현(平澤縣) 경계까지 22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1백 89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위례성(慰禮城)으로 백제(百濟)의 온조왕(溫祚王)이 졸본부여(卒本扶餘)로부터 남쪽으로 와서 나라를 열고, 여기에 도읍을 세웠다. 뒤에 고구려에서 이곳을 사산현(蛇山縣)으로 만들었고, 신라에서도 그대로 사산현(蛇山縣)으로 하고, 백성군(白城郡)의 영현(領縣)을 만들었다. 고려 초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으며, 현종(顯宗) 9년에 천안부(天安府)에 소속시켰고,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본조 태조 2년에 고을 사람 환자(宦者) 김연(金淵)이 명 나라에 들어가 황제를 모시고 있다가 사신이 되어 귀국하자, 이 고을을 지군사(知郡事)로 승격시켰다. 태종(太宗) 원년에 다시 낮추어 감무를 두었고, 13년에 전례에 의해서 현감(縣監)으로 고쳤다.
【관원】 현감(縣監)ㆍ훈도(訓導) 각 1인. 『신증』 연산군 을축년에 경기도로 옮겨서 소속시켰고, 금상(今上) 초년에 예전대로 회복시켰다.
【군명】 위례성(慰禮城). 사산(蛇山).
【성씨】 본현(本縣) 최(崔)ㆍ유(兪)ㆍ백(白)ㆍ조(趙)ㆍ전(全) 모두 촌성(村姓)이다. 경양(慶陽) 김(金)ㆍ조(趙)ㆍ백(白) 모두 속성(續姓)이다.
【형승】 북쪽으로는 한강(漢江)을 띄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에 웅거해 있으며, 남쪽으로는 기름진 들을 바라다 보며,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막혀 있다. 《삼국사(三國史)》 〈백제기(百濟記)〉 온조왕(溫祚王)의 옛터 이찬(李?)의 제원루시(濟源樓詩)에, “온조 옛터에 한 누각 있으니, 여기 올라 사방으로 바라보면 뜻이 유유자적하네.” 하였다.
【산천】 사산(蛇山) 고을 서쪽 3리에 있는 진산(鎭山). 성거산(聖居山) 고을 동쪽 21리에 있다. 고려 태조(太祖)가 일찍이 고을 서쪽 수헐원(愁歇院)에 거동했다가 동쪽을 바라보니, 산 위에 오색 구름이 있기에, 이는 신(神)이 있는 것이라 하여 제사지내고, 드디어 성거산(聖居山)이라 일컬었다. 우리 태조와 세종이 온천에 갈 적에 역시 여기에서 제사지냈다. 양전산(良田山) 고을 서쪽 22리에 있다. 휴류암(??岩) 고을 남쪽 5리에 있다. 양(羊)과 말[馬], 인물의 형상과 같다. 망해산(望海山) 경양현(慶陽縣)에 있다. 억적포(億賊浦) 고을 서쪽 60리에 있다. 경양포(慶陽浦) 경양현(慶陽縣)에 있는데, 해포(海浦)이다. 아주제천(牙州梯川) 고을 북쪽 23리, 홍경평(弘慶坪)에 있다. 물 근원은 경기도 안성군(安城郡) 남쪽 청룡산(靑龍山)에서 나와서 진위현(振威縣) 동하포(冬河浦)로 흘러 들어간다.
【토산】 밴댕이[蘇魚]ㆍ숭어[秀魚]ㆍ웅어[葦魚]ㆍ준치[眞魚]ㆍ안식향(安息香)ㆍ산무애뱀[白花蛇]. 『신증』 참조기[黃石首魚], 붕어[?魚].
【봉수】 망해산(望海山) 봉수 남쪽으로 아산현(牙山縣) 연암산(?巖山)에 호응하고, 북쪽으로 양성현(陽城縣) 괴태길곶(槐台吉串)에 호응한다.
【누정】 제원루(濟源樓) 객관 동북쪽에 있다. ○ 서거정(徐居正)의 시(詩) 서문에, “사신으로 영남(嶺南)에 갈 때, 직산을 지나게 되었었다. 직산 객관 동북쪽에 한 누각이 있기에 올라가서 조금 쉬다가 주인에게 묻기를, ‘이 누각 이름이 무엇인가.’ 하니, 주인은 알지 못하여 좌우 사람에게 물으니, 고을 사람이 ‘제원’이라 하였다. 그러나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객들은 제원이란 뜻을 알지 못하였다. 이에 서거정이 말하기를, ‘이 고을은 백제의 옛 도읍이니, 이 누각을 제원(濟源)이라 한 것은 백제의 근원이 여기에서 시작했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대개 백제의 시조 온조란 분은 본래 고구려 동명왕 주몽의 아들로서 난을 피하여 남쪽으로 도망했던 것인데, 역사서에 쓰기를 ‘온조가 부아악(負兒岳)에 올라가서 살 만한 곳을 살피다가 하남(河南) 위례성(慰禮城)에 도읍을 했으니, 이곳을 세상에서 직산이라 한다.’ 하였다. 서거정은 일찍이 생각하기를 부아악이란 여기서 2백리나 떨어진 곳이니 어찌 살 만한 곳을 잡을 수 있으리오. 또 이른바 하남(河南)이라는 하(河)는 어느 물을 말한 것인가. 서거정이 이곳을 지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길이 급하여 한 번도 가보지는 못하고, 바라다만 보니, 지세가 편협해서 웅장한 기상이 없으니, 도읍을 세울 곳이 못 되어 맘속으로 깊이 의심하였다. 지난해에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를 편찬하면서 여러 가지 책을 상고해 보니, 직산이 백제의 첫 도읍이었던 것은 의심할 것이 없었다. 온조왕의 뒤에 직산으로부터 남한산성으로 도읍을 옮겼으니, 이는 곧 지금의 광주(廣州)이고, 또 북한산성으로 옮겼으니 바로 지금의 한도(漢都)이다. 뒤에 금강(錦江)으로 옮겼으니 지금의 공주요, 또 사비하(泗?河)로 옮겼으니 지금의 부여다.
백제는 한(漢)나라 성제(成帝) 때로부터 당(唐)나라 고종(高宗)때를 거쳐 대개 5백여 년이 걸린 터로서 온조왕은 도망하여 파천(播遷)한 중에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설치해서 신라 고구려와 더불어 서로 솔밭처럼 버티어 삼국을 이루었으니, 호걸스럽고 영특하고 위대한 재주가 아니라면 그럴 수 있었겠는가. 그 뒷세대에 와서는 여러 번 그 나라를 옮겨 강한 것을 믿고 군사 쓰기를 좋아하여 순치(脣齒)와 보거(輔車)의 형세를 알지 못하고, 강한 적과 싸움을 얽어 세력이 날로 줄어드는 데다가 더욱이 의자왕(義慈王)은 어둡고 음탕해서 아첨하는 자의 말만 받아들이고, 성충(成忠)의 간언을 거절하다가 당 나라 군사가 바다를 건너오자 나라가 곧 망했으니, 아, 슬픈 일이로다. 이에 이 누(樓)에 오르니 감개를 이기지 못하여 시(詩)를 지어 조상한다.
시(詩)에, ‘백제 옛터에 풀이 절로 우거졌는데, 내 여기 오니 감개하여 마음이 상하네. 다섯 용(龍) 천안부(天安府)에서 싸워 끝나고, 한쌍 봉황(鳳凰) 위례성(慰禮城)에서 울었네. 시조(始祖)의 사당이 깊은데 단풍나무 가리웠고, 성거산(聖居山)이 옹위했는데 푸른 구름 비꼈어라. 누(樓)에 올라 가을 바람에 나는 생각, 어느 곳에서 철적(鐵笛) 소리 들려오는가.’ 하였다.” 했다.

【학교】 향교(鄕校) 고을 서쪽 1리에 있다. 성환역(成歡驛) 현의 북쪽 8리에 있다. ○ 찰방(察訪)하는 본도의 속역(屬驛)이 11이니, 신은(新恩)ㆍ김제(金蹄)ㆍ광정(廣程)ㆍ일신(日新)ㆍ경천(敬天)ㆍ평천(平天)ㆍ단평(丹平)ㆍ유구(維鳩)ㆍ김사(金沙)ㆍ장명(長命)ㆍ영춘(迎春)이다. ○ 찰방(察訪) 1인. 통수원(通水院) 성환역(成歡驛) 옆에 있다. 말원(末院) 고을 남쪽 8리에 있다. 수헐원(愁歇院) 고을 서쪽 7리에 있다. ○ 고려 김지대(金之岱)의 시(詩)에, “꽃은 지고 새 울어 봄 졸음 무거운데, 연기 깊고 들 넓어 말 가기 더디어라. 푸른 산 만리에 옛날 노님 멀어졌는데, 긴 피리 한 곡조 어디서 부는가.” 했다. 홍경원(弘慶院) 고을 북쪽 15리에 있다.
○ 고려 현종(顯宗)은, 이곳이 갈래길의 요충(要衝)인 데다가 사람 사는 곳이 멀리 떨어져 있고, 무성한 갈대숲이 들판에 가득해서 행인이 자주 약탈하는 강도(强盜)를 만나기 때문에, 중 형긍(逈兢)에게 명하여 절을 세우게 하고, 병부 상서(兵部尙書) 강민첨(姜民瞻) 등이 일을 감독해서 병진년부터 신유년에 와서 집 2백여 칸을 세우고, 봉선홍경사(奉先弘慶寺)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또 절 서쪽에 객관 도합 80칸을 세우고 광연통화원(廣緣通化院)이라 하고, 양식을 쌓고 마초(馬草)를 저장해서 행인들에게 제공했다. 이에 비석을 세우고 한림학사(翰林學士) 최충(崔?)에게 명하여 비문을 짓도록 하였는데, 지금은 절은 없어지고 원(院)과 비석만 남아 있으므로 드디어 절 이름을 따서 홍경원(弘慶院)이라고 불렀다.
○ 이색(李穡)의 시에, “큰 들 넓고 넓어 손바닥처럼 평평한데, 뭇 산이 사면에 멀리 뾰족뾰족 푸르네. 중도에 푸른 기와 큰 길에 비치는데, 큰 비석 우뚝 서서 높다랗게 솟았네. 우는 새 바람 따라 위아래로 나는데, 말[馬] 가까이 잠자리들이 나는 것 보겠네. 평생에 멀리 놀아 안계(眼界)가 넓고, 운몽택(雲蒙澤) 가슴속이 시원히 트였네.학야(鶴野)로부터 달리는 말을 몰았고, 동산(東山)에 올라 노(魯) 나라를 작게 여겨 공자(孔子)의 상달(上達)을 배웠네. 고향으로 돌아올지로다. 살 만한 남은 땅 있으니, 어찌 이불 가지고 들어가며 종알종알하리. 나는 구름 갑자기 오니, 빗방울 가는데[微], 평택(平澤)에 한 점 저녁 햇빛 비치네. 내 말 왕자성(王字城) 앞을 달리니, 맑은 바람 솔솔 손의 옷에 부네. 흥이 일어 글 읊으며 억지로 꿰맞추니, 다른 날 남의 비방 듣는 것 근심하지 않네.” 하였다.
○ 이첨(李詹)의 시(詩)에, “말[馬]을 홍경사(弘慶寺)에 쉬게 하고, 다시 옛 비문을 읽네. 글자가 지워진 것은 들 중이 때린 것이요, 이끼가 남은 것은 봄에 들 불탄 흔적일세. 현산(峴山)에는 장차 떨어지는 해요, 진령(秦嶺)에는 정히 뜬구름일세. 현묘(顯廟)께서 효도를 극진히 하여 규모를 후손들에게 남겨 주었네.” 하였다.
『신증』 신원(新院) 고을 동쪽 20리에 있다.
【교량】 아주천교(牙州川橋)ㆍ대천교(大川橋).
【불우】 구암사(龜菴寺)ㆍ만일사(萬日寺)ㆍ신암사(新菴寺) 모두 성거산(聖居山)에 있다. 미라사(彌羅寺) 양전산(良田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고을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鄕校)에 있다. 온조왕묘(溫祚王廟) 고을 동북쪽 3리에 있다. 우리 세조(世祖) 11년에 비로소 세웠고, 봄과 가을에 향(香)과 축(祝)을 내려서 제사 지내게 했다. 성황사 고을 서쪽에 있다. 여단(?壇) 고을 북쪽에 있다.
【고적】 위례성 성거산에 있다. 흙으로 쌓았는데, 둘레가 1천 6백 90척이요, 높이가 8척이며, 성안에 우물 하나가 있다. 지금은 반쯤 무너져 있다. ○ 온조왕(溫祚王)은 고구려 동명왕의 셋째 아들이다. 동명왕이 훙(薨)하자 온조왕은 그 형 비류왕(沸流王)과 함께 유리왕(琉璃王)을 피해서 한수(漢水)를 건너 남쪽으로 와서, 비류왕은 미추홀(彌雛忽)에 도읍하고, 온조왕은 위례성에 도읍했다. 온조왕은 오간(烏干)ㆍ마려(馬黎) 등 10명의 신하로 보좌를 삼아 처음에 십제(十濟)라고 일컬었으니, 이때가 전한(前漢) 성제(成帝)의 홍가(鴻嘉) 3년이었다. 뒤에 자기가 여기 올 적에 백성들이 즐겨 추종하였다 하여 나라 이름을 백제라고 고쳤다. 천흥사(天興寺) 성거산(聖居山) 아래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고, 당 나라 때 세운 구리로 만든 기둥만 있다. 경양폐현(慶陽廢縣) 고을 서쪽 44리에 있다. 본래 고려의 하양창(河陽倉)인데, 뒤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영(令)을 두고 염장관(鹽場官)을 겸임했으며, 본조 태조 5년에 와서 직산에 예속시켰다. 구실향(救實鄕) 고을 동남쪽 13리에 있다. 사산성(蛇山城) 흙으로 쌓았는데 둘레가 2천 9백 48척이요, 높이가 13척이며, 안에 우물 하나가 있었는데, 지금은 폐쇄되었다.
【명환】 본조 이영구(李英?) 맑고 근신해서 정사를 잘 한다는 이름이 있었다.
【인물】 신라 심나(沈那) 힘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다. 백제와 싸울 때, 가는 곳마다 부서지지 않는 진(陣)이 없었으니, 백제 사람들이 비장(飛將)이라고 일렀다. 소나(素那) 심나(沈那)의 아들. 웅걸(雄傑)하여 아버지의 풍모가 있었다. 일찍이 아달성(阿達城)을 지킬 적에 말갈(靺鞨)이 비밀리 군사를 몰아 갑자기 쳐들어와서 늙은이와 어린이를 노략질하니 소나가 칼을 빼들고 크게 외치기를, “너희는 신라(新羅)에 심나(沈那)의 아들 소나가 있다는 걸 아느냐. 싸우고 싶은 자는 어서 오너라.” 하고, 드디어 힘껏 쳐서 적을 무찌르니, 적은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고 다만 소나를 향해서 활을 솔 뿐이었다. 진시(辰時)부터 유시(酉時)까지 화살이 소나의 몸에 마치 고슴도치처럼 모여 드디어는 죽고 말았다. 그 아내가 울면서 말하기를, “죽은 사람이 항상 말하기를, ‘대장부가 마땅히 나라 일에 죽어야 하니 어찌 침상 위에 누워서 부인의 손에 죽는단 말이냐.’ 하더니 이제 죽은 것은 그 뜻이로다.” 했다. 임금이 듣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소나(素那)의 부자는 참으로 대대로 충의(忠義)를 이었도다.” 하고, 잡찬(?飡)으로 추증하였다.
고려 백문보(白文寶) 자는 화보(和父)로, 호는 담암(淡庵)인데, 성격이 청렴하고 개끗하며 정직했다. 공민왕(恭愍王) 초년에 전리판서(典理判書)가 되었을 때, 십과(十科)를 설치해서 선비를 뽑아 쓰자고 청하였다. 신우(辛禑)가 대군(大君)이 되자 임금이 문보(文寶)를 스승으로 삼았다. 벼슬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고, 직산군(稷山君)을 봉했으며, 시호를 충간(忠簡)이라 한다.
【효자】 본조 봉유지(奉由智) 효행(孝行)으로 정문(旌門)을 내렸으며, 벼슬이 지군사(知郡事)에 이르렀다.
【제영】 할계언시희(割鷄言是?) 성석린(成石璘)의 시(詩)에, “직산(稷山)이 비록 조그만 고을이지만 그래도 충분히 나의 인덕(仁德)을 시험해 볼 만하네. 사랑하고 돌보는 것은 불쌍한 외로운 이부터 시작하고, 세(稅)를 받는 데는 부자인지 가난한지를 묻는다. 닭을 잡는다는 것은 희롱의 말이요,송아지 머물러 둔다는 말 지킬 만하네. 어려서 배운 것, 마침내 어디다 쓰리, 모름지기 혜택을 백성에게 미치게 함이로세.” 하였다. 아조고허유(鴉?古墟幽) 안숭선(安崇善)의 시에, “소나무 소리 깊은 동산이 고요하고, 가마귀 울어대니 옛터 그윽하도다.” 하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연혁】 본래 백제의 사산(蛇山)이었다.
【방면】 동변(東邊) 끝이 5리. 서변(西邊) 끝이 5리. 일동(一東) 처음은 5리, 끝은 10리. 이동(二東) 처음은 10리, 끝은 20리. 삼동(三東) 처음은 15리, 끝은 20리. 일남(一南) 처음은 5리, 끝은 10리. 이남(二南) 처음은 10리, 끝은 15리. 일서(一西) 서남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25리. 이서(二西) 처음은 5리, 끝은 10리. 삼서(三西) 처음은 10리, 끝은 15리. 일북(一北) 처음은 5리, 끝은 10리. 이북(二北) 처음은 10리, 끝은 25리. 경양(慶陽) 처음은 40리, 끝은 45리. 언리(堰里) 서북쪽으로 처음은 35리, 끝은 45리. 외야곶(外也串) 수원(水原) 서남쪽 경계에 넘어가 있는데, 진의 북서쪽은 바다와 접해 있다.
창고 읍창(邑倉)ㆍ해창(海倉) 경양면(慶陽面)에 있다.
【교량】 아교(牙橋) 북쪽으로 27리에 있는데, 진위(振威)의 큰길로 통한다. 맹간교(盲看橋) 아교의 서쪽에 있는데, 평택(平澤)과 통한다.
【토산】 게.


 

[주D-001]순치(脣齒)와 보거(輔車)의 형세 : 입술과 이, 볼과 잇몸[輔車]은 서로 의지하여 있어야 함을 말한 것이다.
[주D-002]운몽택(雲夢澤)……트였네 : 사마상여(司馬相如)의 〈자허부(子虛賦)〉에, “가슴 가운데 운몽(雲夢) 같은 것 팔구(八九)를 삼켜도 조금도 걸림이 없다.”는 말이 있다. 운몽은 초국(楚國)에 있는 큰 못이다.
[주D-003]학야(鶴野) : 정령위(丁令威)가 학(鶴)이 되어 돌아왔다는 전설 때문에 요동(遼東) 들판을 학야(鶴野)라 한다.
[주D-004]동산에……배웠네 : 맹자가, “공자가 동산에 올라서는 노 나라를 작게 여기고 태산(泰山)에 올라서는 천하를 작게 보셨다.” 하였고, 공자가 말하기를, “군자는 아래에서 배워서 위로 달한다.”[下學而上達] 하였다.
[주D-005]어찌……종알종알하리 : 한유(韓愈)의 글에, “지금 벼슬하는 이들은 삼성(三省)에 숙직 차례가 되면, 이불을 가지고 들어 가면서 계집종을 돌아보며 집안일 부탁하는 말이 종알종알하는데 오늘 은원외(殷員外)는 만리 밖 회골(回?)로 사신이 되어 가는 장도(壯途)에 오르지만, 기색을 나타내지 않는다.
[주D-006]닭을……말이요 : 공자의 제자 자유(子游)가 무성(武城) 원이 되었는데, 공자가 그 고을에 들어가서 학생들의 현가(絃歌)하는 소리를 듣고 웃으며, 자유에게 “닭을 잡으면서 소 잡는 큰 칼을 쓸 필요가 있느냐.” 하였다. 그것은 작은 고을에 천하를 다스리는 예악(禮樂)을 가르친다는 말이었다. 조금 뒤에 공자는, “나의 말은 희롱이었다.” 하였다.
[주D-007]송아지 머물러 둔다 : 진(晉)나라 양편(羊篇)은 청렴한 관원이었다. 자기의 소[牛]를 관사(官舍)에서 길렀는데 송아지를 낳았다. 그 뒤 옮겨 갈 때에 그 송아지는 관사에 두고 갔다.

 

 

 

2. 목천현(木川縣)


동쪽은 청주(淸州) 경계까지 19리이고, 북쪽은 직산현(稷山縣) 경계까지 19리이며, 서쪽은 천안군(天安郡) 경계까지 17리이다. 남쪽은 전의현(全義縣) 경계까지 22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2백 47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대목악군(大木岳郡)인데, 신라에서 대록군(大麓郡)으로 고쳤고, 고려는 목주(木州)로 고쳐서 청주에 예속시켰다. 명종(明宗) 2년에 감무를 두었고, 본조 태종 13년에 전례에 의해서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현감을 두었다.
【관원】 현감(縣監)ㆍ훈도(訓導) 각 1인.
【군명】 대목악(大木岳)ㆍ대록(大麓)ㆍ목주(木州)ㆍ신정(新定).
【성씨】 본현 우(牛)ㆍ마(馬)ㆍ상(象)ㆍ돈(豚)ㆍ장(場)ㆍ심(沈)ㆍ신(申)ㆍ왕(王) 세상에 전하는 말에, “고려 태조가 나라를 세운 뒤에 목주 사람이 여러 번 배반한 것을 미워하여 그 고을 사람들에게 모두 짐승 이름으로 성(姓)을 내렸다. 뒤에 우(牛)는 우(于)로 고치고, 상(象)은 상(尙)으로 고치고, 돈(豚)은 돈(頓)으로 고치고 장(場)은 장(張)으로 고쳤다.” 한다.
【산천】 작성산(鵲城山) 고을 동쪽 5리에 있는 진산(鎭山). 흑성산(黑城山) 고을 서쪽 11리에 있다. 추암산(鷲巖山) 고을 서쪽 12리에 있다. 용혈(龍穴)이 있는데, 비를 비는 곳이다. 세성산(細城山) 고을 남쪽 8리에 있다. 성거산(聖居山) 고을 서북쪽 14리에 있으니, 직산현 조에 자세하다. 길상산(吉祥山) 고을 북쪽 15리에 있다. 또 진천현조(鎭川縣條)에 보인다. 산방천(山方川) 고을 동쪽 20보(步)에 있다. 근원은 고을 북쪽 산방동(山方洞)에서 나와서 청주 진목탄(眞木灘)으로 흘러 들어간다.
【토산】 철(鐵) 산방천에서 생산된다. 사기그릇[磁器]ㆍ꿀[蜂蜜]ㆍ대추[棗]ㆍ지치[紫草]ㆍ안식향(安息香).
【누정】 동작루(東作樓) 선덕(宣德) 갑인년에 세웠다. ○ 유사눌(柳思訥)이 이름을 짓고 기문을 지었다. 『신증』 관찰사(觀察使) 정미수(鄭眉壽)가 소심(小心)이라고 이름을 고쳤고, 최보(崔溥)가 기문을 지었다.
【학교】 향교(鄕校) 고을 서쪽 2리에 있다.
【역원】 연춘역(延春驛) 고을 동쪽 3리에 있다. 탑원(塔院) 고을 동쪽 23리에 있다. 황신원(黃信院) 고을 남쪽 10리에 있다. 신원(新院) 고을 남쪽 5리에 있다. 혹 남원(南院)이라고도 한다. 정항원(井項院) 고을 서쪽 14리에 있다. 말원(末院) 고을 서쪽 15리에 있다. 『신증』 불지방원(佛地方院) 고을 동쪽 35리에 있다.
【교량】 장명교(長命橋) 산방천(山方川)에 있다.
【불우】 전곡사(轉谷寺)ㆍ보문사(普門寺) 모두 성거산(聖居山)에 있다. 은석사(恩石寺) 작성산(鵲城山)에 있다. 승천사(勝天寺) 흑성산(黑城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고을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고을 동쪽 1리에 있다. 여단 고을 북쪽에 있다.
【고적】 흑성산성(黑城山城)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2천 2백 90척이고, 높이가 6척이며 가운데 못이 하나 있는데, 가물 때는 비를 빈다.
【인물】 고려 우학유(于學儒) 활달하여 기개가 있었다. 의종(毅宗)과 명종(明宗) 양대에 왕궁을 숙위(宿衛)해서 충성되고 근신하였다. 이고(李高) 등이 난을 일으킬 적에 우학유와 함께 모의하고자 하니 우학유가 말하기를, “공의 뜻은 크도다. 그러나 우리 아버지가 항상 나를 경계해서 말하기를, ‘무관이 문관에게 굽혀 지내고 있으니, 이 일이 어찌 분하지 않느냐. 그것들을 없애기란 썩은 가지 꺾기보다도 쉬운 일이지만 문관이 해를 당하면 역시 발길을 돌리기 전에 화가 우리들에게 미칠 것이니 또한 너는 마땅히 삼가라.’ 하였는데, 우리 아버지는 비록 돌아갔어도 그 말이 아직도 귀에 있는지라, 죽어도 따르지 않겠노라.” 했다. 벼슬이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에 이르렀다.
『신증』 【효자】 본조 서만(徐萬) 아버지를 효성스럽게 섬겨 초하루 보름에는 반드시 술과 반찬을 갖추어 바쳤다. 아버지가 겨울에 병이 들어 생선을 먹고자 하므로서 서만은 얼음을 두드리면서 하늘을 향해 부르짖으니, 물고기 네 마리가 뛰어 나와서 갖다가 바쳤다. 아버지가 죽자 3년 동안 여묘하면서 한 번도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성종(成宗) 11년에 상으로 벼슬을 주었다.
【제영】 위린산수차중기(爲憐山水此中奇) 권진(權軫)의 시(詩)에,“나그네 길 봄바람에 말 발굽 더디니, 이 가운데 산수가 기이한 것 어여뻐라. 나무 그늘 땅에 가득하고 뜰은 고요한데, 달이 배꽃 위에 올라오니 저절로 시가 되네.” 하였다. 사면산여화(四面山如?) 유계문(柳季聞)의 시에, “사방으로 둘린 산 마치 그림과 같은데, 천년 동안 이 땅이 스스로 기이하네.” 하였다. 흑산막막운차사(黑山漠漠雲遮寺)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서원(西原 청주(淸州)) 잔치 파할 때 아직도 이른 아침이러니 목성(木城)으로 돌아오는 길 다시 멀고 머네. 흑산이 아득한데 구름은 절을 막았고, 푸른 들판 넓고 넓은데 물이 다리[橋]를 치네, 늙어 가니 자못 벼슬 재미 적은 것 알겠고, 술 깨서 나그네의 혼이 녹아나네. 늦게 공관(公館)에 들어가니 거처가 고요한데, 떨어지는 버들개지와 나는 꽃 함께 적막하네.” 하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
【방면】 읍내 끝이 10리. 근동(近東) 동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20리. 일원(一遠) 동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30리. 이원(二遠) 동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40리. 남면(南面) 처음은 15리, 끝은 20리. 북면(北面) 처음은 5리, 끝은 30리. 서면(西面) 처음은 7리, 끝은 20리. 세성(細城) 남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20리.
【성지】 작성(鵲城)ㆍ세성(細城) 모두 옛터가 있다.
【토산】 감ㆍ은어[銀口魚].
【사원】 도동서원(道東書院) 인조(仁祖) 기축년에 세웠고 숙종 병진년에 사액하였다. 주자(朱子) 문묘에 보인다. 정구(鄭逑) 충주(忠州)에 보인다. 김일손(金馹孫) 자는 계운(季雲), 호는 탁영(濯纓), 본관은 김해(金海), 연산군 무오(戊午)년에 화를 입었다. 벼슬은 헌납(獻納),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황종해(黃宗海) 자는 대진(大進), 호는 후천(朽淺), 본관은 회덕(懷德), 벼슬은 장원서 별제(掌苑署別提)이다

 

 

3. 천안군(天安郡)


동쪽으로 목천현(木川縣)과의 경계까지 13리, 남쪽으로 공주(公州)와의 경계까지 48리, 전의현(全義縣)과의 경계까지 33리, 서쪽으로 온양군(溫陽郡)과의 경계까지 11리, 아산현(牙山縣)과의 경계(境界)까지 16리, 북쪽으로 직산현(稷山縣)과의 경계까지 20리, 평택현(平澤縣)과의 경계까지 6리, 서울과의 거리가 2백 19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동서도솔(東西?率)의 땅이었다. 고려 태조 13년에 동ㆍ서의 도솔을 합쳐서 천안부(天安府)로 하고 도독(都督)을 두었다. 이첨(李詹)의 문집을 살펴보니, “왕씨의 시조가 예방(倪方)의 말을 듣고 탕정(湯井)ㆍ대목(大木)ㆍ사산(蛇山)의 땅을 나누어서 천안부를 설치하였다.”고 했는데 옳은 듯하다. 성종 때에 환주도단련사(歡州都團鍊使)로 개칭하였고, 목종(穆宗) 때에 폐지하였다. 현종(顯宗) 때에 다시 천안이라 일컫고 지부사(知府事)를 삼았으며, 고종 43년에 몽고의 군사를 피하여 선장도(仙藏島)로 들어갔다가 뒤에 다시 옛 땅으로 돌아왔다. 충선왕(忠宣王) 때에 영주(寧州)로 개칭하였고, 공민왕 때에 다시 천안부로 하였다. 본조(本朝)에 와서는 태종 13년에 영산군(寧山郡)으로 고쳤다가 16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관원】 군수ㆍ훈도(訓導) 각 1인.
【군명】 도솔(兜率)ㆍ환주(歡州)ㆍ임환(任歡)ㆍ영주(寧州)ㆍ영산(寧山)
【성씨】 본군 신(申)ㆍ장(張)ㆍ전(全)ㆍ하(河)ㆍ심(沈)ㆍ노(盧)ㆍ경(敬)ㆍ전(田) 모두 촌성(村姓)이다. 왕(王)ㆍ맹(孟) 모두 속성(續姓)이다. 풍세(?歲) 방(方)ㆍ서(徐)ㆍ경(敬)ㆍ화(花)ㆍ하(河) 돈의(頓義) 이(李) 모산(毛山) 박(朴)ㆍ이(李)ㆍ현(玄)ㆍ김(金) 신종(新宗) 방(方) 덕흥(德興) 상(尙)
【형승】 삼국(三國)의 중심이다 《 고려사》 세속에 전하는 말에 의하면 술사인 예방(倪方)이 태조에게 아뢰기를, “삼국의 중심으로 다섯 용이 구슬을 다투는 형세입니다. 그러므로, 3천 호의 고을을 설치하여 그곳에서 군사를 조련하게 되면 백제가 저절로 항복하게 될 것입니다.” 하므로, 태조가 산에 올라 두루 살펴보고 비로소 천안부를 설치하였다. 한 방면의 요충지대이다. 강호문(康好文)의 《대소원기(大召院記)》에 있다.
【산천】 왕자산(王字山) 고을 동북쪽 12리에 있으며, 진산(鎭山)이다. 고려 태조가 군사를 이곳에 머물러 두었을 때에 윤계방(尹繼芳)이 이곳을 다섯 용이 구슬을 다투는 형세라고 아뢰어 보루를 쌓고 군사를 조련하며, 왕자성(王字城)이란 이름을 하사하였다. 왕자는 바로 그 산의 모양이다. 화산(華山) 풍세현(?歲縣)에 있으며, 고을에서 43리의 거리이다. 유려왕산(留麗王山) 고을 동쪽 11리 목천현(木川縣)의 경계에 있다. 수조산(水潮山) 고을 동남쪽 2리에 있다. 쌍령고개[雙嶺峴] 고을 남쪽 40리이며, 공주(公州)와의 경계에 있다. 차현(車峴) 고을 남쪽 45리에 있다. 자세한 것은 공주 조에 있다. 대천(大川) 풍세현(?歲縣) 북쪽에 있으며, 고을과의 거리는 9리이다.
【토산】 사기그릇[磁器]ㆍ오지그릇[陶器]ㆍ숭어[秀魚]ㆍ조기[石首魚]ㆍ지황(地黃)ㆍ산무애뱀[白花蛇]ㆍ준치[眞魚]ㆍ게[蟹].
【봉수】 대학산(大鶴山) 봉수 고을 남쪽 18리에 있다. 남으로는 공주의 쌍령(雙嶺)에 호응하고, 북으로는 아산현(牙山縣)의 연암산(燕巖山)에 호응한다.
【누정】 선화루(宣化樓) 객관 동쪽에 있다. ○ 이승소(李承召)의 시에, “돌아오는 길에 잠깐 옛 영주(寧州) 땅에 쉬니, 객관 동쪽 모퉁이에 작은 누각이 있네. 구름 밖의 푸른 멧부리 상투를 드러낸 듯, 나무 사이의 서늘한 바람 가을을 알리네. 우연히 대자리에 누워 돌아가는 꿈을 꾸니, 이리저리 하염없이 나그네 되었네, 어버이 그리운 마음에 누각에 올랐건만 이 근심 가실 길이 없네.” 하였다.
【학교】 향교 고을 동쪽 6리에 있다.
【역원】 신은역(新恩驛) 고을 북쪽 10리에 있다. 금제역(金蹄驛) 고을 남쪽 23리에 있다. 영풍원(寧?院) 고을 남쪽 45리에 있다. 대평원(大平院) 고을 남쪽 35리에 있다. 삼기원(三岐院) 고을 남쪽 6리에 있다. 안정원(安定院) 풍세현(?歲縣)에 있다. 가을원(加乙院) 고을 북쪽 15리에 있다. 남원(南院) 고을 남쪽 2리에 있다.
○ 강호문(康好文)의 누기(樓記)에, “영주(寧州)는 역사가 오래되었다. 옛날 우리 성조(聖祖)께서 견훤(甄萱)을 칠 적에 군사 10만을 주둔하여 진지를 구축하고 군사를 조련하여 위엄을 드날렸으니, 그 군영을 설치한 곳을 고정(鼓庭)이라 하고, 그 성을 왕자(王字)라 하였다. 이 고을의 설치는 여기에서 시작된 것이며 사당의 모습이 온 고을을 비추어 고을 백성들을 복되게 하기 거의 5백 년이다.
지난 계축년 봄에 내가 조정의 명령으로써 이 고을을 지키게 되었는데, 태조의 사당을 배알하고 물러나와 아전과 백성들과 함께 지도와 호적 등을 펼쳐 놓고, 이 고을의 옛일을 물어 보았더니, 이 고을이야말로 삼국의 중간에 위치하여 참으로 한 방면의 요충지대임을 알았다. 그러므로, 전사(傳舍)ㆍ주막ㆍ여관 등의 시설이 다른 고을에 견주어 더욱 시급하였다. 예전에 고을 남쪽에 원(院)이 있어서 길손들을 접대하였으나, 그것이 왜구에 의해 불타버린 뒤 다시 짓는 이가 없어 길손들이 여간 고통이 아니었다. 내가 이 일을 계획하여 재목과 기와를 모았으나 마침 나라에서 탐라(耽羅)의 역사(役事)가 있어 이 일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제 군수 임군(任君)이 후임으로 와서 정사가 화평하고 은혜가 미치니, 백성들이 즐겁게 명령을 따라 주어 높이 솟은 원이 한달 남짓 만에 완성하였다. 길손들이 제집에 돌아간 듯 비바람이나 춥고 더움의 괴로움이 없어졌으니 참으로 잘된 일이라 하겠다. 원이 예전에는 동쪽으로 향하였고 누각이 매우 높았던 것을 임군이 풍수(風水)를 보고 지면의 형세를 따라서 남향으로 고쳐 지었는데, 길거리를 가로질러 놓여 있다. 또한 건축이 오래 가도록 하였으니, 대개 누각이 너무 크고 높으면 바람과 비를 지탱할 수가 없어서 기울고 퇴락하기 쉬우므로, 이 누각을 지을 적에 높지도 낮지도 않게 하여 그 규모와 체제를 고을에 알맞게 하였다.
여름철이 되면 뜨거운 구름이 내려 쪼여 돌과 쇠를 녹일 듯하고 더위와 장마로 무덥고 습기가 차며, 수렁길이 잇달아 부역으로 왕복할 때에 이고 지고 다니자면 온몸에 땀이 흐르고, 목마른 목구멍에서는 먼지가 날 지경이다. 이렇게 지치고 답답할 적에 이 누에 오르면 맑은 바람과 시원한 기운이 저절로 일어나 정신이 넓어지고 시원해지고 상쾌함이 마치 때묻은 옷을 빨래한 듯, 뜨거운 것을 식히는 듯, 한없이 넓은 곳에서 노니는 듯하다. 북풍이 울부짖고 찬 기운이 매섭게 살을 에는 듯하고 눈보라가 하늘을 덮고 해는 지고 갈 길은 먼데 아득히 사람 사는 집이라곤 없고, 고드름이 수염에 달리고 혀는 오그라들고 손은 시리며, 마소도 얼어서 쓰러질 적에 이 누에 들어오면 땔나무가 쌓여 있어 더운 물로 녹이고 불로 데워서 몸이 녹고 기운이 따뜻해지는 것이 마치 두꺼운 솜옷을 입고 양지에 앉아 있는 듯하다. 이러한 시절에 남북으로 장사를 다니는 사람이나 동서로 다니는 행인들이 서로 보면서 말하기를, ‘아, 이 원루(院樓)는 임군수가 지은 것이라.’ 하여, 이 원루로 말미암아 그 지은 사람을 생각하게 되고, 그 사람을 생각하게 되면 그의 정사를 사모하게 될 것이니, 이리하여 임군의 은혜는 당시에 더해졌으며, 후세에까지 길이 미칠 것이다. 사관의 붓을 빌리지 않더라도 훌륭한 명성을 남기게 될 것이니, 이 누를 지은 것이 우연한 일이 아니로다.
근래에 풍속이 점점 각박해져서 교대하는 관리들이 서로 시기하고 의심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공적과 재능이 자기보다 나은 것을 꺼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 않다. 진실로 세상에 유익한 일이라면, 다른 사람이 했더라도 내가 한 것처럼 기뻐할 따름이다. 내가 이번에 전라도의 막영(幕營)으로부터 영주(寧州)를 거쳐 서울로 가는 길에, 이를 위하여 가던 길을 멈추고 누에 올라 거닐며 오래도록 관람하였다. 가만히 생각하니, 이른바 고정(鼓庭)과 왕자성은 완연히 예전과 같아서 왕씨를 일어나게 한 공적은 오늘에 있어서도 힘입음이 있다고 하겠다. 진실로 성조(聖祖)의 창업이 어려웠음을 생각한다면 오늘날 수령이 된 사람은 그 흥망을 책임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내 마음에 걸려서 하루도 편안히 지내지 못하는 까닭이다. 이제 임군이 나의 뜻을 잘 이어받아 마침내 이룩한 업적이 있으니 이는 기록할 만한 일이다. 뒤이어 군수가 되는 사람은 나로써 경계를 삼고 임군으로써 모범을 삼는다면 또한 영주 백성들의 행복이 되겠다. 임군의 이름은 군석(君碩)이요, 벼슬은 봉상대부(奉常大夫)이며, 아무 고을 사람이다. 원루를 낙성한 때는 을묘년 가을이요, 기문을 쓴 때는 정사년 봄이다.” 하였다.
대소원(大召院) 고을 서쪽 8리에 있다. 풍천원(楓川院) 고을 북쪽 6리에 있다.
【불우】 광덕사(廣德寺)ㆍ개천사(開天寺)ㆍ만복사(萬福寺)ㆍ대학사(大鶴寺) 모두 화산(華山)에 있다. 유려왕사(留麗王寺) 고려 태조가 유숙하였으므로 이 이름이 되었다. 성불사(成佛寺)ㆍ마점사(馬占寺) 모두 왕자산에 있다. 고려 태조의 말이 머물었기 때문에 이름을 마점이라 하였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고을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고을 동쪽에 있다. 여단(?壇) 고을 북쪽에 있다.
【고적】 고려 태조묘(太祖廟)ㆍ왕자성(王字城)ㆍ고정(鼓庭) 모두 왕자산 밑에 있다. 지금은 옛터만 있다. 풍세현(?歲縣) 고을 남쪽 27리에 있으며, 자천(?川)이라고도 한다. 본래 백제의 감매현(甘買縣)이었으며, 신라 시대에 순치(馴雉)로 개칭하여 대록군(大麓郡)의 속현이었던 것을 고려 초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고, 현종(顯宗) 9년에 이 고을에 예속시켰다. 회고정(懷古亭) 고을 서쪽에 있다.
○ 이곡(李穀)의 기문에, “지정(至正) 기축년 윤달에 내가 한(韓)으로부터 영주를 거쳐 서울로 가게될 때에 군수 성(成)군이 고을의 정자 이름을 부탁하면서 말하기를, ‘옛날 태조께서 백제를 치려 할 때, 술자의 말이, 왕자성은 다섯 용이 구슬을 다투는 형국의 땅이니 진지를 구축하고 군사를 조련하면 삼국을 통합하여 왕이 되는 것을 당장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고 하여, 풍수를 살펴 이 성을 경영하고 군사 10만을 주둔하여 마침내 견훤을 항복시켰는데, 그 진영을 쳤던 곳이 고정(鼓庭)이라고 군의 문헌[郡乘]에 이렇게 실려 있습니다. 예전에 정자가 고정에 있어서 거기에서 관도(官道)를 내려다 보면 이른바 구슬을 다투는 형국이라는 왕자산의 산 밑인데, 왕자는 산의 모양입니다. 내가 그 정자가 퇴락하고 좁으며 또 이름도 잃어버렸음을 안타깝게 여겨, 이제 옛 것을 헐어 버리고 새로 확장하여 지었으니, 이제 이름을 지어 주시어 사람들로 하여금 이 정자의 지음이 우연이 아님을 알게 하여 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다. 나의 고향이 이곳에서 3백 리 남짓한 거리이므로 내가 여기를 지나 다닌 것도 여러 차례이기에 영주의 일을 내가 잘 알고 있다. 백성들이 일정한 직업이 없고, 관리가 일정한 거처가 없다면 어느 겨를에 정자를 중축하였겠는가. 병술년 봄에 내가 사신으로 왔을 때에는 이귀을(李龜乙) 군이 군수로 있었는데, 풀밭을 일구어 밭을 만들고, 가시덤불을 베어내고 길을 열어 주었으니 그가 참으로 훌륭한 관리임을 알았다. 지난해 가을에 근성(覲省)차 돌아올 때는 지금 성군이 군정을 맡은 지 반년쯤인데 이군의 치적보다도 더 낫다고 하였다. 부임한 지 두어 달 동안에 민정을 모두 알아서 이로운 일은 일으키고, 해로운 것은 힘써 없애버리고, 농사를 권장하고 학문을 힘쓰게 하며, 과세를 고르게 하고 흉년을 구제하는 등 질서 있게 행하므로 백성들이 모두 기뻐 복종하였다. 곧 명령을 내리기를, ‘너희들은 이곳에 살게 된 유래를 알고 있느냐. 이곳은 왕업을 일으킨 땅으로서 태조의 신궁(神宮)이 있다. 이제 그 건물들이 허물어져서 위로는 비가 새고 벽에 구멍이 뚫려 신령을 모실 수가 없는데도 신령께서 돌보고 흠향하신다고 하겠느냐. 사람이 근본에 보답할 줄을 모르면 이는 공경하지 아니하는 것이다. 또 관사(館舍)와 공해(公?)는 손님을 받들고 관부(官府)를 위엄 있게 하는 것인데, 이제 모두 황폐하고 수리되지 않았으니 이는 게으름을 나타내는 것이다. 공경하지도 않고 게으른 데 대해서는 적용시킨 떳떳한 법이 있으니, 이는 수령만의 책임이 아니라 너희 백성들도 어찌 벌을 벗어날 수가 있겠는가.’ 하니, 모두 말하기를,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하였다.
이리하여 온 고을 사람들이 지체 높은 집안도 막론하고 집집마다 골고루 부역을 책정하고 재목을 다스리고 기와를 구워서, 먼저 신궁의 예전(禮殿)과 재방(齋房)을 새로 지어 건물을 모두 다 웅장하고 아름답게 한 뒤에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엄숙히 지냈으며, 다음은 관사와 공해를 수리하여 짓고 백성들을 격려하고 감독하여 금년의 농한기에는 반드시 공사를 끝내어 일체 완성하지 않은 것이 없게 하려 하였으나, 때마침 나라에서 정사를 새롭게 하기 위해 먼저 관리를 임명한다는 말을 듣고 ‘나는 가게 될 것이니 너희들은 일단 공사를 중지하라.’ 하고, 그 재목과 기와의 수량을 조사하여 기록해 두게 하고, 주관하는 이에게 주의시키기를, ‘잃어버리지 말고 새로 오는 원[新官]을 기다려 나의 뜻이 달성되도록 하라.’ 하고 또 말하기를, ‘이 정자는 한 고을의 명승지를 차지하였으며, 사방으로 통하는 요지에 놓여 있으니 짓지 않을 수 없다.’ 하여 날을 서둘러 성취하였다. 아, 성군(成君)이 이 고을을 조왕(祖王)의 남은 은덕이 있는 곳이라 하여, 나아가서는 태조의 초상은 뵙고 엄연하신 창업의 자세에 대하여 극히 공경하고 황송히 여겼으며, 물러나서는 고정(鼓庭)에 노닐면서 아득한 행군(行軍)의 자취를 길이길이 사모하여, 마음과 힘을 다하여 근본에 보답하고 옛 것을 회복하는 일을 힘쓰지 않았었는가. 그의 행실이 이러하므로 내가 정자의 이름을 회고(懷古)라 하였다. 정자가 작아서 기문을 쓸 만한 것이 못 되지만, 이것으로 말미암아 그 나머지를 볼 것이므로 아울러 기록하노라. 성군의 이름은 원규(元揆)이며 본관은 창녕(昌寧)이요, 동한(東韓)의 이름난 집안 동암(東庵)의 외손이다.” 하였다.
모산부곡(毛山部曲) 고을 북쪽 36리에 있다. 이곳을 지나서 아산현(牙山縣) 북촌(北村)에 들어간다. 신종부곡(新宗部曲) 고을 서쪽 80리에 있다. 지나서 예산현(禮山縣) 북촌에 들어간다. 덕흥부곡(德興部曲) 고을 서쪽 69리에 있다. 지나서 신창현(新昌縣) 서촌(西村)에 들어간다. 돈의향(頓義鄕) 고을 서쪽 62리에 있다. 지나서 아산현 서촌에 들어간다.
【명환】 고려 제궁(弟弓)ㆍ엄식(嚴式) 태조 13년에 대승(大丞) 제궁으로 도독부사(都督府使)를 삼고, 원보(元甫) 엄식으로 부사를 삼았다. 손변(孫?) 판관에 등용되었는데, 정사를 가장 잘하였으므로 승진하여 공역서승(供驛署丞)에 임명되었으며, 고종 때에 여러 차례 승진하여 예부 시랑(禮部侍郞)이 되었다. 성원규(成元揆)ㆍ강호문(康好文).
【우거】 고려 전신(全信) 과거에 올라 벼슬이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에 이르렀다. 사람됨이 일을 처리할 적에 엄중하여 청탁을 받아들이지 아니하였다. 여러 차례 지방관으로 임명되었는데, 백성들이 자기들을 버리고 갈까 염려하였다. 평생 살림살이에는 마음을 쓰지 아니하였다. 만년에 스스로 호를 백헌(柏軒)이라 하였다.
【효자】 고려 양호(梁好) 젊어서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와 어버이를 봉양하였다. 부모가 병에 걸렸을 때에 그 대변을 가져다가 병의 차도를 알기 위해 달고 쓴 것을 맛보았으며, 세상을 떠난 뒤에는 3년 동안 시묘(侍墓)하였다. 아버지가 일찍이 막내아들 순(純)이 토지와 집이 없음을 불쌍히 여겼으므로 양호가 아버지의 뜻을 좇아서 자기의 몫을 아우에게 주었다. 이 일이 임금에게 알려져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제영】 빈 뜰 고요하여 만뢰(萬?)가 쥐죽은 듯한데 원나라 절동(浙東)사람 계명숙(季明叔)의 시에, “말탄 길손이 저물녘에 천안에 와서, 문 안으로 들어가 말에서 내려 한가로이 서성거리네. 빈 뜰 고요하여 만뢰가 쥐죽은 듯한데, 낙엽만이 쓸쓸히 난간을 울리네. 푸른 하늘엔 구름 없어 맑게 씻은 듯하고, 밤빛에 맺힌 이슬 반짝이는데, 호상(胡床 큰 걸상)에 홀로 앉아 잠 못 이루니, 달은 날아 오고 바람이 차갑구나.” 하였다. 발[簾]에 뿌리는 비바람이 봄 추위를 돌리네 이곡의 시에, “허물어진 옛 성에서 비에 막히니 마음이 답답하고, 가려하나 갈 수 없어 공연히 서성거리네. 군수는 백성 생각에 밥 먹을 겨를도 없다 하니, 지나는 길손이 어지러이 간여함을 감당하기 어려우리. 하물며 지난해에는 서리가 일찍 내려, 가을 곡식이 이슬 맛도 못 보았다 하네. 조용히 읊조리느라 해 지는 줄도 몰랐는데, 발에 뿌리는 비바람이 봄추위를 돌리네.” 하였다. 달이 밝아 맑은 이슬이 빈뜰에 반짝이네 설장수(?長壽)의 시에, “계공(季公)의 고향이 신안(新安)에 이웃했는데, 가정(稼亭)[이곡(李穀)]의 기상은 아직 꿋꿋하구나. 지금까지 50년 전의 일인데, 웅장한 문장과 어려운 운자를 뉘라서 간여하리. 내 와서 읊조리며 옛일을 생각하노라니, 달이 밝아 맑은 이슬이 빈뜰에 반짝이네. 고금의 재주와 힘이 멀리 미치기 어려운데, 푸르고 푸른 만 리 옛 하늘 바람이 차기도 하구나.” 하였다. 밥 짓는 연기는 두서너 집뿐일세 강호문의 시에, “늘그막에 황폐한 고을을 얻으니, 밥 짓는 연기는 두서너 집뿐일세. 백성들은 흩어지고 마을은 없어지고, 왜구의 침략 바다가 멀지 않구나. 보통 방어조차 고생스러운데, 남북으로 전송하고 영접하는 일이 잦구나. 뉘라서 이 고을 원님되기 즐겁다 하리, 시름 깊어 귀밑털이 희어지네.” 하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
【고읍】 풍세(?歲) 서남쪽 25리에 있다. 본래는 백제의 감매현(甘買縣)인데 후에 제천(?川)으로 고쳤고, 신라 경덕왕(景德王) 10년에 순치(馴雉)로 고쳐 대록군(大麓郡)의 영현(領縣)으로 고쳤다가, 고려 태조 23년에 풍세로 고쳤으며 현종 9년에 예속되었다.
【방면】 상리(上里) 동쪽으로 끝이 5리이다. 하리(下里) 서쪽으로 끝이 5리이다. 군남(郡南) 끝이 10리이다. 대동(大東) 남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20리이다. 소동(小東) 남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15리이다. 일남(一南)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이남(二南)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내서(內西)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북일(北一) 처음이 5리, 끝이 15리이다. 북이(北二) 처음이 5리, 끝이10리이다. 신종(新宗) 본래는 신라의 부곡(部曲)인데, 예산(禮山)의 북쪽 경계 너머에 있다. 서쪽으로 끝이 80리이다. 덕흥(德興) 본래는 덕흥부곡이다. 신창(新昌)의 서쪽 경계 너머에 있다. 서쪽으로 끝이 68리이다. 모산(毛山) 본래는 모산부곡이다. 아산(牙山)의 동쪽 경계 너머에 있다. 서북쪽으로 끝이 40리이다. 돈의(頓義) 본래는 돈의향(頓義鄕)이다. 아산 서쪽 경계 너머에 있다. 끝이 62리이다. ○ 신종ㆍ덕흥ㆍ모산ㆍ돈의는 모두 좁은 갯가[浦]의 들판이다.
【성지】 왕자산 고성(王字山古城) 군에서 20리 떨어져 있다. 고려 태조가 남쪽으로 견훤을 정벌할 때에 이곳에 주둔하여 보루(堡壘)를 쌓아 관병(觀兵)하였다. 산 밑에 유적이 있다. 도리치 고루(道理峙古壘) 도리치에 있다. 고성(古城) 북쪽 10리에 있는데, 흙으로 쌓은 유적이 있다.
창고 읍창ㆍ모산창(毛山倉) 아산 시포(市浦)에 있다. 신종ㆍ덕흥ㆍ둔의에는 모두 창이 있다.
【토산】 감ㆍ대추ㆍ붕어.

 

4. 온양군(溫陽郡)


동쪽으로는 천안군(天安郡) 경계까지 22리이고, 남쪽으로는 예산현(禮山縣) 경계까지 26리이고, 서쪽으로는 신창현(新昌縣) 경계까지 13리이고, 북쪽으로는 아산현(牙山縣) 경계까지 13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2백 51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탕정군(湯井郡)이었는데, 신라 문무왕(文武王) 때에 주(州)로 승격시켜 총관(摠管)을 두었다가, 뒤에 주를 폐하고 군으로 하였고, 고려 초기에는 온수군(溫水郡)으로 고쳤으며, 현종(顯宗) 9년에 천안부(天安府)에 붙였고, 명종(明宗) 2년에는 감무(監務)를 두었던 것을, 본조 태종 14년에 신창(新昌)과 병합하여 온창(溫昌)이라 칭호를 고쳤더니, 16년에 이를 다시 나누어 온수현(溫水縣)을 설치하였는데, 세종 24년에 임금이 온천에 거둥하여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군으로 승격시켰다.
【관원】 군수ㆍ훈도 각 1인.
【군명】 탕정(湯井)ㆍ온수(溫水)ㆍ온창(溫昌)ㆍ온천(溫泉).
【성씨】 본군 정(鄭)ㆍ이(李)ㆍ방(方)ㆍ강(康)이 있으며, 윤(尹) 촌성(村姓)이다.
【산천】 연산(燕山) 군 북쪽 2리에 있는 이 고을 진산(鎭山)이다. 배방산(排方山) 군 동쪽 8리에 있는데, 산마루에 네 개의 봉우리가 똑같이 대치하고 있어 가장 기관(奇觀)을 이루고 있는데, 이를 속칭 과안봉(過雁峯)이라 한다. 서달산(西達山) 군 남쪽 3리에 있다. 송악산(松岳山) 군 남쪽 23리에 있다. 화산(華山) 군 남쪽 11리에 있다. 거차라산(巨次羅山)ㆍ월라산(月羅山) 모두 군 서쪽 7리에 있다. 광덕산(廣德山) 군 서남쪽 13리에 있다. 가문현(佳文峴) 군 남쪽 30리에 있다. 포천(布川) 군 동쪽 7리에 있다. 천안군 풍세동(?世洞)에서 발원하여 신창현 견포(犬浦)로 들어간다. 가리천(加里川) 군 동북쪽 1리에 있다. 그 근원이 셋이 있으니, 하나는 군 서쪽 전족령(全足嶺)에서 나오고, 하나는 가문현에서 나오며, 다른 하나는 군 동쪽 잉읍현(仍邑縣)에서 나오는데, 신창현의 견포로 들어간다. 온천(溫泉) 군 서쪽 7리에 있다. 질병 치료에 효험이 있어 우리 태조ㆍ세종ㆍ세조가 일찍이 이곳에 거둥하여 머무르면서 목욕하였는데, 유숙한 어실(御室)이 있다. 신정(神井) 임원준(任元濬)의 긴(記)에, “천순(天順) 8년 봄 2월에 우리 주상(主上) 승천체도 열문영무 전하(承天體道烈文英武殿下)께서 남쪽으로 충청도를 순수(巡狩)하시면서 속리산(俗離山) 복천사(福泉寺)에 거둥하사 혜각존자(慧覺尊者)를 만나 보시고, 그 뒤 3월 초 1일에 온양군의 온탕(溫湯)에 거가를 머무르셨다. 그러한 지 4일 만에 신천(神泉)이 홀연 솟아올라 뜰에 가득히 흘러 찼다. 성상께서 크게 기이하게 여기시고 명하여, 그곳을 파니, 물이 철철 넘쳐 나오는데 그 차기는 눈과 같고, 맑기는 거울 같고, 맛은 달고도 짜릿하고, 성질은 부드럽고도 고왔다. 명하여 수종한 재상들에게 반포해 보이시니, 서로 돌아보며 놀라고 기뻐하지 않는 자가 없었고, 또 서로 이르기를, ‘옛날에 없던 것이 지금 새로 생기어 탕정(湯井)의 물은 따뜻하고 이 우물은 차니, 이는 실로 상서의 발로이다.’ 하여, 8도에서 표문[表]을 올려 하례하고 칭송하니, 드디어 주필 신정(駐?神井)이란 이름을 내렸다.” 하였다.
【토산】 옻[漆]ㆍ대추[棗]ㆍ감[枾]ㆍ복령(茯?).
【성곽】 배방산성(排方山城)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3천 3백 13척에 높이는 13척이며, 안에 우물 두 개가 있고, 군창(軍倉)이 있다.
【누정】 대청루(大淸樓) 객관 동쪽에 있다. 군수 최린(崔潾)이 중건한 것이다. 이숙함(李淑?)이 빙설루(氷雪樓)라 이름을 고치고 지은 기문이 있다.
【학교】 향교 군 서쪽 1리에 있다.
【역원】 시흥역(時興驛) 옛날에는 이흥역(理興驛)이라 호칭하였는데, 군 남쪽 8리에 있으며, 승(丞)이 있다. 본도에 속역(屬驛)이 일곱 개가 있으니 창덕(昌德)ㆍ일흥(日興)ㆍ급천(汲泉)ㆍ순성(順城)ㆍ흥세(興世)ㆍ장시(長時)ㆍ화천(花川)이다. ○ 승(丞) 1인이 있다. 애원(艾院) 군 동쪽 18리에 있다. 신원(新院) 군 동쪽 2리에 있다. 혹은 태산원(泰山院)이라고도 일컫는다. 망빈원(望賓院) 군 동쪽 13리에 있다. 용두원(龍頭院) 군 남쪽 24리에 있다. 송현원(松峴院) 군 동쪽 7리에 있다. 오산원(烏山院) 군 동쪽 10리에 있다. 임반원(任潘院) 군 동쪽 20리에 있다.
【불우】 과안사(過雁寺)ㆍ기린사(麒麟寺)ㆍ남산사(南山寺) 모두 서달산(西達山)에 있다. 목사(木寺) 배방산(排方山)에 있다. 외암(?菴)ㆍ현우사(玄雨寺). 중암(中菴) 모두 화산(華山)에 있다. 석암사(石菴寺) 송악산(松岳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군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연산(燕山)에 있다. ○ 고려 고종(高宗) 23년에 몽고(蒙古)의 군사가 와서 성읍을 포위하였는데, 아전 현려(玄呂) 등이 성문을 열고 나가 싸워 크게 격파하고, 적의 머리 2급(級)을 베었고, 화살과 돌에 맞아 죽은 자가 2백여 명이나 되었으며, 노획한 군기도 매우 많았다. 왕이 성황신이 음으로 도운 공이 있었다 하여 신호(神號)를 더 봉하였다. 여단 읍 북쪽에 있다.
【고적】 남산(南山) 고려 태조(太祖)가 유검필(庾黔弼)에게 명하여 양정군(陽井郡)에 성을 쌓았다. 이때 후백제의 장수 김훤(金萱)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청주(淸州)를 침공하였다. 하루는 검필이 본군의 남산에 올라 앉아서 졸고 있었는데, 꿈에 한 거대한 사람이 말하기를, “내일 서원(西原)에 반드시 변란이 있을 것이니, 마땅히 속히 가서 구원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검필이 놀라 깨어 청주로 달려가서 후백제의 군사와 더불어 싸워 격퇴하고, 독기령(禿岐嶺)까지 추격하여 죽이고 잡은 자가 3백여 명이나 되었다. 개흥부곡(開興部曲) 군 서쪽 14리에 있다. 상곡부곡(上谷部曲) 군 남쪽 13리에 있다. 목촌부곡(木村部曲) 군 동쪽 10리에 있다. 박산부곡(朴山部曲) 군 남쪽 12리에 있다. 독촌부곡(禿村部曲) 군 북쪽 10리에 있다. 묘산부곡(卯山部曲) 읍 동쪽 20리에 있다.
【명환】 고려 이성(李晟) 충렬왕(忠烈王) 때에 과거에 올라 감무(監務)에 임명되었다.
【효자】 본조 맹희도(孟希道) 효행이 있어 정문을 세워 표창받았다. 신창현(新昌縣) 인물 조에 자세히 나와 있다.
【제영】 필불영천용(?沸靈泉湧) 이승손(李承孫)의 시에, “콸콸 영천이 솟아나는 것은, 활활 타는 화덕(火德)이 통함이로다.” 하였다. 교전상운합(郊殿祥雲合) 이숙치(李叔?)의 시에, “들 밖의 궁전엔 상서로운 구름이 모여 가득하고, 신령한 샘에는 따뜻한 옥류(玉溜)가 맑구나.” 하였다. 행궁비수령(行宮非繡嶺) 이맹상(李孟常)의 시에, “이 행궁이 수령궁이 아니거니, 대가(大駕) 임행하신 곳 어찌 저 곤명(昆明) 땅이랴.” 하였다. 봉강토덕형(封疆土德亨) 박원형(朴元亨)의 시에, “읍호(邑號)를 올리니 천은(天恩)이 무겁고, 계역을 바로하니 토덕이 형통하는도다.” 하였다. 팔영(八詠) 이숙함(李叔?)의 시와 그 서문에, “내가 산수(山?), 영숙(永叔)과 같이 온천행궁(溫泉行宮)의 직려(直廬)에 입직하고 있으면서 때로 서하(西河)ㆍ고양(高陽)ㆍ언양(彦陽) 등 여러 상공(相公)과 더불어 왕복 수창(酬唱)하며 스스로 그 회포를 풀고 지냈는데, 영숙이 그 사이에 팔경(八景)의 제목을 얻어, 나에게 먼저 고체시(古體詩)를 지으라 요구하여, 장차 화교(和敎)의 장본으로 삼으려 하니, 그야말로 키질해 까부르면 쭉정이와 겨가 먼저 나가는 법이다. 이를 보는 자 그 나의 광참(狂僭)함을 용서하라.” 하였다. 행궁의 상서로운 구름[行殿祥雲] “봄바람에 어가(御駕)가 호서(湖西)에 거둥하사, 온천 이곳에 깊숙히 어연(御輦)을 머무르셨네. 궁전 위에 애애(靄靄)하게 떠오르는 구름송이, 상서의 광채가 흩어졌다가는 다시 모여든다. 북녘으로 아득하게 봉래궁(蓬萊宮)과 연하여, 성주(聖主)의 효성어린 생각 바라보는 가운데에 있네. 저 구름은 무정한 듯하면서도 도리어 유정한 것이런가. 하물며 다시 비를 주어 전공(田功)을 도움에랴.” 하였다. ○ 임원준(任元濬)의 시에, “바위 위의 꽃과 시냇가의 버들이 연(輦) 길에 비치니, 온천 한 지역에 봄이 길이 머물렀네. 봉가(鳳駕)가 때로 구천(九天)으로 좇아 내려오시니, 아름답고 이상스런 상서가 모두 함께 모여들었어라. 상서로운 구름 욱욱(郁郁)하게 행궁을 뒤덮으니, 현란(絢欄)한 오색 광채 공중에 떠 있어라. 저 구름 흩어졌다 다시 모여 천지와 사방에 은택 줌을 알았노니, 만물이 힘입어 사는 공을 우러러 바라노라.” 하였다. 영천의 서액[靈泉瑞液] 이숙함의 시에, “화룡(火龍)이 길이 땅밑에 굴을 파서, 샘 길을 열어 놓아 맑은 물 솟아나니, 따뜻한 물 신령한 진액이 사람의 질병을 쾌히 다스려, 해묵은 난치(難治)의 병이 저절로 떠난단다. 세 전하[三殿] 욕탕에 하림하사 옥체의 피로 풀어 흩으실 제, 윤활하고 부드러운 약물 마음껏 끼얹으시니 떠오르는 저 물김은 연기가 아니다. 한 번 씻고 나시면 성수(聖壽) 계산하는 수가지[籌] 더 첨가했노라고, 서왕모(西王母)가 보낸 글을 푸른 새[靑鳥]가 전해 온다네.” 하였다. ○ 임원준(任元濬)의 시에, “따뜻하기 끓인 물 같고 맑기도 한없으니, 불덩이 땅속에 묻혀 때로 물이 솟는다네. 고질(痼疾) 낫게 하여 만백성을 구제할 뿐 아니라, 번뇌(煩惱)도 씻어버려 성체(聖體)도 조호(調護)하나니, 구름같이 피어오르고 옥 같은 것 퍼부어서 풀고 흩어버리시니, 화기도 애애(靄靄)하여 상서 연기인 듯하였어라. 남기신 윤택 나누어서 전답에 물을 대면, 여러 해 풍년든 칭송을 서로 전해 들으리라.” 하였다. 천주의 어선 반사[天廚分膳] 이숙함의 시에, “행궁(行宮) 안에 우리 님 주포(廚?)에는, 바다 진미 가득하고 들나물도 가지가지, 날마다 호종한 신료(臣僚)들에게 반포해 내리시니, 팔진(八珍) 낙역부절(絡繹不絶) 중사(中使)의 발걸음도 수고롭다. 또다시 궁중 항아리의 우로향(雨露香)을 내리시며, 십분(十分) 취하라는 권교까지 있어 취광(醉狂)이 되어서는, 다 같이 이르기를 이 홍은(鴻恩) 갚을 길 없으니, 다만 축원하건대 저 능강(陵岡)같이 오래오래 장수하소서.” 하였다. ○ 임원준의 시에, “타봉(駝峯 낙타 등에 산봉우리같이 솟은 살덩이. 진미로 일컫는다.) 웅장(熊掌)이 천주(天廚)에 가득하니, 심상한 고기와 소채 어찌 이에 비하랴. 은총 입어 나날이 팔진 진미 내리시니, 감격도 하지만은 도리어 분촌(分寸)의 공 없음이 부끄럽다. 하물며 궁에서 빚은 술 님의 향기 띠었는데, 금술잔에 가득 부으니 이 기쁨 미칠 것만 같구나. 어가 호위하고 돌아갈 기일이 멀지 않건만, 쌍궐(雙闕)을 바라보고자 높은 봉에 올라 본다.” 하였다. 신정에 새긴 빗돌[神井勒石] 이숙함의 시에, “세조 당년에 이곳에 임행하니, 행전(行殿) 뜰 한가운데 신정(神井)이 솟아났다. 호종했던 신하의 그 재예 진정 당대 제일이라, 성덕 칭송한 웅건(雄健)한 그 문사(文詞)를 한 붓으로 휘둘렀다네. 돌에 새긴 그 글자가 이제 벌써 깎이고 떨어져 나갔으니, 20년의 광음이 한 순간임에 놀랐노라. 자성(慈聖)께서 이를 측은히 생각하시고 중건하라 명하시니, 뒷날에 흘러 전하는 건 다시 태사(太史)의 붓대에 빙의(憑依)하리로다.” 하였다. ○ 임원준의 시에, “살아서 성조(聖祖)를 뵈온 것은 진실로 만행한 일, 호종했던 그 당시에 이 온정(溫井)에 왔었노라. 찬 샘물 홀연히 두 온탕 사이에 솟아올라, 신에게 기록하라 명하시어 거친 문구 붓을 달렸었네. 20년이 채 안 되어 글자 이미 상하였고, 때 옮기고 세사도 변개되니 일순(一瞬) 인생에 함께 놀랐노라. 반짝반짝 한 치의 작은 마음, 다시 챙겨 눈물 뿌리면서 돌 다듬어 거듭 필적 실었노라.” 하였다. 광덕산의 아침 아지랑이[廣德朝嵐] 이숙함의 시에, “남녘을 바라보니 광덕산이 드높이 비꼈는데, 저멀리 새들만이 중천으로 지나는구나. 아침마다 저 아지랑이 뜻이 있어 뜨는 건가. 가늘고 가는 흰 깁[紈] 같기도 하고 다시 비단[綺羅] 같기도 하다. 저 아름다운 산속에 삼라(森羅)한 만상(萬象)을, 짚신 신고 가서 유상(遊賞)하지 못하는 것이 부끄럽구나. 어찌하면 화공(?工)의 손을 빌려 한 폭의 산수도를 그려서, 그대의 고당(高堂) 흰 벽위에 걸어 줄까.” 하였다. ○ 임원준의 시에, 첩첩이 반공(半空)에 가로질린 산봉우리 천길이나 높아서, 원숭이도 오르기 어렵고 기러기도 넘기 어려운데, 다만 가벼운 아지랑이 절정(絶頂)을 살짝 덮어, 아침이 오면 분연(紛然)한 풍경 만상이 삼라하다. 그 누가 무상(無像)한 것을 유상(有像)하게 하는고. 볼수록 그의 변태(變態) 그윽히 감상하기에 족하다. 어찌하면 저 연하(煙霞) 속에 사는 승려를 불러서, 함께 지팡이 이끌고 깊숙히 푸른 절벽 위를 탐색해 볼까.” 하였다. 공곶의 봄 조수[貢串春潮] 이숙함의 시에, “호서(湖西)의 큰 바다 물결 어찌 그리 도도(滔滔)한가, 해추(海?)가 봄 조수 보내오니 찬 물결이 일어난다. 남쪽 나라 조운(漕運) 배는 많기도 하다. 구름 돛대 만길이 하늘과 함께 높았어라. 해류(海流) 평온하게 하라고 풍백(風伯)을 단속하고, 밤낮을 계교 않고서 용산강(龍山江) 머리로 향해 간다. 만억(萬億) 자(?)를 수송하여 국고를 높이니 우리의 세상 형편도 이미 서주(西周)와 같음을 깨달았노라.” 하였다. ○ 임원준의 시에, “긴 강물 밤낮으로 도도하게 흘러, 천리 길, 만리 길을 넓은 파도 속 달려간다. 뇌성을 울리며 눈더미를 몰아치는 듯 기세 어이 그리 장하냐. 평상시에도 놀란 파랑(波浪)이 하늘과 연하여 출렁댄다네. 호서의 이곳은 물결이 평온타고 불리는 곳, 남방의 부세를 이곳에서 서울로 조운해 간다. 그대는 듣지 못하였나, 하늘엔 바람 없고 바다에 물결이 일지 않는다는 것, 성덕(聖德)의 감화가 어찌 홀로 서주(西周)만이 장하리.” 하였다. 송령의 찬 물결[松嶺寒濤] 이숙함의 시에, “온정(溫井) 서쪽 머리에 자그마한 한 고개, 엉성하게 늘어선 소나무들이 구름 위를 쓸고 있다. 큰 바람 세차게 불면 푸른 물결이 놀란 듯 일어나고, 그늘진 골짜기에서 음향이 생겨나면 나뭇가지들이 맑은 소리 내어 운다. 선계(仙界)의 학(鶴)이 여기 와서 깃들고 있어, 냉랭한 그 울음소리 밤마다 낮은 가지서 난다네. 내 한번 그 소리 타고 가서 진인(眞人)을 찾으련다. 상계(上界 천계(天界))의 관부(官府) 길이 설지 않으리라.” 하였다. ○ 임원준의 시에, “사방에 산이 싸고 둘러 동문(洞門)은 작은데, 고개 위에 멀리 서 있는 소나무의 모습 정정(亭亭)도 하다. 서늘한 밤 자연의 음향이란 싫지 않은 법, 10리 밖의 파도소리가 나뭇가지에 울린다. 가늘게 흔들리는 섬세한 잎새는 검푸른 구름이 깃들어 있는 듯, 가볍게 흔드는 버성긴 가지에는 차가운 달이 나지막이 걸려 있고, 이내 바람 자고 풍운(風韻)이 처음으로 고요해 질 양이면, 흉금도 쌀랑해져 시몽(詩夢)이 희미하다.” 하였다. 보리 밭 두둑의 이삭 물결[麥?秀波] 이숙함의 시에, “꽃은 자고 버들도 졸아 봄이 한창인데, 일도 없는 저 포곡새[布穀 뻐꾹새]는 농사에 힘쓰라고 뻐꾹뻐꾹 울어댄다. 가을 보리 구름같이 연하여 이삭 물결 이니, 단비 내려 하룻밤에 푸른 꺼럭이 늘어졌다. 절기 흘러 자리 자리 가을이 또 왔는데, 농부들 먹을 일 생각하고 기쁨이 먼저 가슴에 뛸 것이리. 천만 개의 마을마다 조석 연기 일어나니, 태평스런 민간 풍경 춘대(春臺)에 올라 보는 듯하다.” 하였다. ○ 임원준의 시에, “밭보리 푸르고 푸르러 생의에 차 있는데, 평지와 산간에 부지런히 지은 것을 농부들은 함께 기뻐한다. 무성한 이삭들 한 대에 두 이삭씩 달렸으니, 높고 낮은 푸른 물결이 몇 겹이나 되던가. 일진(一陣) 화풍이 남쪽에서 불어오니, 만경(萬頃)의 누른 구름이 가을을 재촉하네. 우리에게 풍년 줌이 이로부터 시작하리니, 햇무리만으로 어찌 노대(魯臺)를 점치랴.” 하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
【방면】 읍내(邑內) 끝이 5리. 동면(東面) 처음은 5리, 끝이 20리. 서면(西面) 끝이 10리. 남군내(南郡內) 처음은 5리, 끝은 10리. 남상(南上) 처음은 15리, 끝은 20리. 남하(南下) 처음은 5리, 끝은 15리. 일북(一北) 동북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20리. 이북(二北) 처음은 5리, 끝은 10리.
【성지】 배방산성(排方山城) 배방산에 있으며 3천 5백 13척이며, 우물이 둘이 있다.
【궁실】 온천행궁 온천에 있으며 여러 임금이 머물고 갔던 곳이다.


 

[주D-001]서왕모(西王母)……온다네 : 서왕모는 옥황상제의 첩이라 한다. 그 서왕모가 인간에 있는 한무제(漢武帝)를 사랑하여 밀회하려고 할 때에 파란새[靑鳥]를 보내서 선통하였다 한다.
[주D-002]자(?) : 자란 말은 우리 고어(古語)로 천억(千億)이란 말이다

 

 

 

5. 아산현(牙山縣)


동쪽으로는 천안군(天安郡) 경계까지 40리이고, 남쪽으로는 신창현(新昌縣) 경계까지 16리, 온양군(溫陽郡) 경계까지 18리이고, 서쪽으로는 면천군(沔川郡) 경계까지 32리이고, 북쪽으로는 평택현(平澤縣) 경계까지 42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2백 24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아술현(牙述縣)이었는데, 신라 때에는 음봉(陰峯) 음잠(陰岑)이라고도 했다. 이라 고쳐 탕정군(湯井郡)의 속현으로 만들었고, 고려 초기에는 인주(仁州)로 고쳤으며, 성종(成宗) 14년에 자사(刺史)를 두었더니, 목종(穆宗) 8년에 다시 이를 폐하였고, 현종(顯宗) 9년에 천안부(天安府)에 붙였다가 뒤에 아주(牙州)로 고쳐 감무(監務)를 두었던 것을 본조 태종 13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예에 따라 현감으로 하였는데, 세조 5년에 현을 줄여서 온양ㆍ평택ㆍ신창 등 세 고을에 나누어 붙였다가 11년에 복구하였다.
【관원】 현감ㆍ훈도 각 1인. 『신증』 연산군(燕山君) 을축년에 경기로 이속시켰던 것을 금상 초년에 환원되었다.
【군명】 아술(牙述)ㆍ음봉(陰峯)ㆍ음잠(陰岑)ㆍ인주(仁州)ㆍ영인(寧仁)ㆍ아주(牙州).
【성씨】 본현 이(李)ㆍ강(康)ㆍ백(白)ㆍ전(全)ㆍ유(兪)ㆍ신(申)ㆍ현(玄) 씨가 있고, 장(蔣)ㆍ신(申)ㆍ이(李)ㆍ강(康)ㆍ현(玄)ㆍ유(兪)ㆍ윤(尹) 모두 촌성(村姓)이다. 임(林) 개경(開京). 덕천(德泉) 유(兪)ㆍ이(李)ㆍ안(安)ㆍ강(康).
【형승】 수많은 산봉우리가 교착(交錯)하여 대치해 섰고, 두 시냇물이 돌아 흐른다 정이오(鄭以吾)의 여민루(慮民樓) 기문에 있다.
【산천】 신성산(薪城山) 현 서쪽 5리에 있다. 동림산(桐林山) 현 남쪽 7리에 있다. 고용산(高勇山) 현 북쪽 12리에 있다. 동심산(東深山) 현 동쪽 5리에 있다. 연암산(?巖山) 현 동쪽 29리에 있다. 입암산(笠巖山) 현 서쪽 12리에 있다. 바다 현 서북쪽 15리에 있다. 창정지(倉正池) 현 북쪽 11리에 있다. 장자지(長者池) 현 남쪽 18리에 있다. 대내산진(大?山津) 현 서쪽 10리에 있다. 경기 안성군(安城郡)에서 발원하여 뭇 지류를 받아들여 이 나루가 되었다. 개포진(介浦津) 현 서쪽 13리에 있다. 시진(市津) 현 북쪽 26리에 있다. 당포(堂浦) 현 북쪽 16리에 있다. 봉화천(烽火川) 현 남쪽 15리에 있다. 전의현(全義縣)에서 발원하여 견포(犬浦)로 흘러 들어간다.
【토산】 백옥(白玉) 소암리(所巖里)에서 난다. 옥돌[玉石] 고현(羔峴)에서 난다. 수정(水晶) 불장원리(佛藏院里)에서 난다. 황소어(黃小魚)ㆍ세미어(細尾魚)ㆍ조기[石首魚]ㆍ웅어[葦魚]ㆍ뱅어[白魚]ㆍ새우[鰕]ㆍ산우애뱀[白花蛇]ㆍ숭어[秀魚].
【봉수】 연암산 봉수(?巖山烽燧) 남쪽으로는 천안군(天安郡) 대학산(大鶴山)과 호응하고, 북쪽으로는 직산현(稷山縣) 망해산(望海山)과 호응한다.
【학교】 향교 현 동쪽 2리에 있다.
【역원】 장시역(長時驛) 현 북쪽 2리에 있다. 불장원(佛藏院) 현 남쪽 6리에 있다. 요로원(要路院) 현 동쪽 22리에 있다. 흥인원(興仁院) 현 북쪽 5리에 있다.
【창고】 공세곶창(貢稅串倉) 현 서쪽 10리에 있다. 본현 및 서산(瑞山)ㆍ한산(韓山)ㆍ연산(連山)ㆍ임천(林川)ㆍ정산(定山)ㆍ공주(公州)ㆍ홍주(洪州)ㆍ신창(新昌)ㆍ결성(結城)ㆍ보령(保寧)ㆍ전의(全義)ㆍ청양(靑陽)ㆍ이산(尼山)ㆍ대흥(大興)ㆍ석성(石城)ㆍ해미(海美)ㆍ태안(泰安)ㆍ천안(天安)ㆍ비인(庇仁)ㆍ은진(恩津)ㆍ목천(木川)ㆍ면천(沔川)ㆍ연기(燕岐)ㆍ덕산(德山)ㆍ서천(舒川)ㆍ직산(稷山)ㆍ홍산(鴻山)ㆍ부여(扶餘)ㆍ남포(藍浦)ㆍ예산(禮山)ㆍ당진(唐津)ㆍ평택(平澤)ㆍ온양(溫陽)ㆍ청주(淸州)ㆍ문의(文義)ㆍ회덕(懷德)ㆍ진잠(鎭岑)ㆍ옥천(沃川)ㆍ회인(懷仁) 등 여러 고을의 세곡을 이곳에 수납하였다가 조운(漕運)하여 서울로 가니, 수로의 거리가 무릇 5백리이다. 『신증』 옛날에는 창고가 없었는데, 가정(嘉靖) 계미년에 비로소 집을 지으니 무릇 80칸이었다.
【불우】 동림사(桐林寺)ㆍ신심사(神心寺)ㆍ축봉사(縮鳳寺)ㆍ보림사(寶林寺)ㆍ현암사(懸巖寺) 모두 동림산에 있다. 동심사(桐深寺)ㆍ연암사(燕巖寺)ㆍ개현사(開現寺)ㆍ용화사(龍華寺) 모두 연암산에 있다. 관서사(觀西寺)ㆍ고정사(高井寺) 모두 고용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현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현 동남쪽 5리에 있다. 여단 현 북쪽에 있다.
【고적】 황촌부곡(黃村部曲) 현 북쪽 15리에 있다. 덕천향(德泉鄕) 현 동쪽 20리에 있다. 불암(佛巖) 동림산 동북쪽 기슭에 있으니, 본현과의 거리는 5리이다. 그 바위가 산봉우리 위에 널려 있는 것이 거의 수리(數里)나 되는데, 가장 큰 것의 형상이 부처와 유사하기 때문에, 이와 같이 이름한 것이다. 속설에 이르기를, “이 바위로 인하여 수령은 어리석은 미치광이가 되고, 향리(鄕吏)들은 모두 흉악하고 간사하다.”는 것이다. 세조(世祖) 때에, 관찰사 황효원(黃孝源)이 대신(大臣)의 뜻을 받아 조정에 아뢰어 현(縣)을 감생(減省) 시키고 그 땅을 세 개로 구분하여 온양ㆍ평택ㆍ신창에 붙이고는 그 관사(館舍)와 관전(官田)을 황수신(黃守身)에게 내려주었다. 본읍 사람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김구(金鉤), 전 청산 현감(淸山縣監) 조규(趙圭) 등의 상언(上言)을 여러 해를 두고 윤허하지 않았는데, 성화(成化) 을유년에 세조가 온양에 거둥하매, 조규 등이 다시 거듭 호소하므로 거가를 따라갔던 종친과 재상 등에게 명하여 현지에 가서 상황을 살피고, 드디어 다시 현을 두었다. 어떤 사람이 일찍이 그 바위에 글을 쓰기를, “괴석(怪石)이 신기한 부처를 이루어, 3년 동안에 다섯 원을 갈려 보냈다네. 강 바람이 부끄럼이 있다면, 눈을 몰아쳐 산의 얼굴을 가리우리라.” 하였다. 여민루(慮民樓) 객관 북쪽에 있다. ○ 정이오(鄭以吾)의 기문(記文)에 “영락(永樂) 을미년 여름에 지승문원사(知承文院事) 유현(兪顯) 군이 아산지도(牙山地圖)를 받들고 와서 호정공(浩亭公 하륜(河崙))을 뵙고 말하기를, ‘아산은 현(顯)의 외가 고장입니다. 지금의 현감 최후(崔侯) 안정(安正)이 계사년에 비로소 본관에 이르러 백성들에게 농사와 누에치기를 권장하여 위엄과 은혜가 아울러 나타났으며, 그 다음해에는 인심이 화열하고 농사 또한 풍등(?登)하였는지라, 노는 사람들을 모집하여 재목을 취해 오고 기와를 구어, 객사(客舍)의 최절(催折) 부패한 부분은 이를 바꾸어서 견고 정치(精緻)하게 하고, 무너지고 떨어저 변별할 수 없는 부분은 이를 도식(塗飾)하여 선명하게 하였으며, 또 학당(學堂)을 증설하여 고을 자제들의 과독(課讀)을 권장하였다.’ 하였다. 또 그 다음해에 드디어 부로(父老)들에게 말하기를, ‘객사가 지대가 낮고 제도가 협소하여 여름철을 당하면 찌고 더운 것이 더욱 심하여 빈객(賓客)이나 사신(使臣)이 이르면 그 숨막히고 답답한 정을 발설(發洩)케 할 도리가 없으니, 마땅히 서늘한 누정을 지어 그 마음을 받들어 즐겁게 하고, 그 화기를 인도 발양(發揚)하게 할 것이다. 사신의 화기가 흘러 퍼지는 것이 어찌 우리 현민(縣民)의 복이 되지 않겠는가.’ 하니, 모두 말하기를, ‘실로 원하는 바입니다.’ 하였습니다. 이에 객사 동쪽으로 나아가서 약간 영(若干楹)의 누정을 기공하니, 아전과 백성들이 즐겨 이에 취역하여 달을 넘지 않아서 낙성을 고하게 되었는데, 바라보기만 하여도 날아가는 듯합니다. 청하건대, ‘이를 이름해 주시고 또 기(記)를 지어 주시어 이 누정을 빛나게 해 주십시오.’ 하는 것이다. 공이 말하기를, ‘백성을 위하여 뜻을 취하여 여민(慮民)이라 이름하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하니, 유군이 말하기를, ‘이는 진실로 최후(崔侯)의 본지(本志)입니다.’ 하였다. 당시 나는 그 객석에 끼어 있었더니, 공이 나에게 그 명명한 의의(意義)를 부연하라고 부탁하였다. 이에 그 도면을 상고하여 보건대, 아산의 고을 된 것이 수많은 산봉우리가 교착(交錯) 대치하여 곁으로 둘러싸고, 두 시냇물이 좌우로 둘러 흐르는데, 그 중간에 평야가 길게 뻗쳐 있고, 수목이 울창하게 들어섰으니, 정말 이러한 곳에 누정이 없을 수 있겠는가. 대개 수령의 직책이란 백성과 친근히 하는 것이다. 인(仁)으로써 위로하고 사랑하며, 의(義)로써 베풀고 다스려서 그 업에 안정하여 근심하고 한탄하는 소리가 없게 한다면 잘하는 것이다. 그러나 백성을 편하게 하는 길은 윗사람의 명령을 공경히 받드는 데 있고, 윗사람의 명령을 공경히 받드는 자는 마땅히 나라의 법을 준수하고 왕인(王人 왕명을 받들어 행하는 사람)을 섬기는 데 삼갈 따름이다. 최후는 그 급히 할 바를 알고 있는가. 절(節)을 빌려 백성들의 풍속을 관찰하며, 부절(符節)을 나누어 가지고 임금의 덕화(德化)를 널리 펴는 자가 이 고을에 가서 이 누정에 올라 그 번다한 노고를 잊고 화락하고 광활한 즐거움을 얻음으로써 강퍅한 정이 사라지고 화평한 기상에 도달하게 된다면, 이는 곧 그 지역을 지키는 자만의 기쁘고 다행한 일이 아니라, 아전과 백성들이 그 혜택을 받는 것이 또한 어떠하겠는가. 그렇다면 이 누정의 창건이 어찌 백성을 위하는 생각이 아니리요. 나는 생각건대 한 여름에 무섭게 뜨거운 해가 한없이 길 때, 산 빛과 물 기운이 아래위로 잠겨 있고, 맑게 갠 경치와 온화한 바람이 궤석(?席) 사이를 서늘하게 해 주면, 눈에 희열을 느끼고, 마음에 쾌감을 얻을 것이니, 이를 사방에 고루 베풀어서 우리 백성으로 하여금 번열(煩熱)을 씻고 서로 정신이 통하게 하여 성주(聖主)의 덕화 속에서 고무(鼓舞)하도록 한다면 거의 이 누정을 이름한 뜻을 저버리지 않는 것이 될 것이다. 슬프다. 이 정자에 오르고 내리는 자 그 또한 백성을 생각지 않겠는가. 인하여 유군이 고한 말을 쓰고, 또 최후의 백성을 위하는 심려를 부연하여 그 기를 삼고자 한다.” 하였다. 어라정산성(於羅頂山城) 현 동쪽 21리에 있다. 돌로 쌓았으며, 주위가 3백 64척에 높이는 10척인데, 지금은 못쓰게 되었다. 수한산성(水漢山城) 현 동쪽 10리에 있다. 돌로 쌓았으며, 주위가 1천 4백 20척에, 높이는 10척인데, 지금은 못쓰게 되었다. 앵리산성(鶯里山城) 현 동쪽 20리에 있다. 돌로 쌓았으며, 주위가 6백 55척에 높이는 7척인데, 지금은 못쓰게 되었다. 신성산성(薪城山城) 그 산마루에 옛성 두 개를 연해서 쌓은 것이 있는데, 그 북쪽 성은 돌로 쌓은 것으로 주위가 4백 80척에 높이는 10척이며, 안에 우물 하나가 있는데 날이 가물면 이곳에 비를 빈다. 그 남쪽 성은 흙으로 쌓은 것이 주위가 4백 80척에 높이가 4척인데, 옛날에 평택 사람이 난리를 피하여 우거한 사실이 있어 평택성(平澤城)이라 이름했다.
【명환】 고려 김행도(金行濤) 태조(太祖) 때에 지아주제군사(知牙州諸軍事)가 되었다. 본조 김시주(金時?).
【우거】 본조 김구(金鉤)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에 이르렀는데, 사람됨이 순후(醇厚)ㆍ근각(謹慤)하여 마음이 한결같았고, 경학(經學)에 정밀하고 널리 통하여 성균관에 있으면서 교훈을 게을리 하지 않은 자는 윤상(尹祥) 이후에는 이 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 시호는 문장(文長)이다.
【제영】 읍거흥체갱수우(邑居興替更誰尤) 이승소(李承召)의 시에, “아산(牙山)은 역시 예로부터 이름 있는 지역으로, 땅이 기름지고 백성 많아 한쪽 지방에서 으뜸 갔던 곳. 풍속의 후박(厚薄)을 어찌 깊이 걱정하며, 시읍의 흥폐를 다시 누구를 원망하랴. 한스럽다 공수(?遂)ㆍ탁무(卓茂 모두 한 나라 시대의 유명한 지방관)와 같은 태수(太守) 없고 노(魯 공자의 출생국) 나라 추(鄒 맹자의 출생국) 나라에 견줄 만한 문풍(文風)을 보지 못하겠네. 저 객관 수십 영(楹)만이 부질없이 날아들어, 뜬구름같이 지나간 일들이 나의 시름 자아낸다.” 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대동지지(大東地志)》
【방면】 현내(縣內) 끝이 10리. 일동(一東) 처음은 15리, 끝은 35리. 이동(二東) 처음은 15리, 끝은 30리. 근남(近南) 처음은 15리, 끝은 25리. 원남(遠南) 동남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30리. 일서(一西) 처음은 20리, 끝은 30리. 이서(二西) 처음은 10리, 끝은 15리. 삼서(三西) 서남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20리. 일북(一北) 처음은 10리, 끝은 20리. 이북(二北) 동북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20리. 삼북(三北) 동북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35리.
【사원】 현충사(顯忠祠) 숙종 병술년에 세워졌고, 정해년에 사액되었다. 이순신(李舜臣) 자는 여해(汝諧), 본관은 덕수(德水). 선조 무술년에 남해(南海) 노량(露梁)에서 전사하였다. 벼슬은 통제사(統制使) 좌의정(左議政) 덕풍부원군(德?府院君)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이완(李莞) 자는 열보(悅甫). 이순신의 조카인데 인조 정묘년에 의주 부윤(義州府尹)으로 순절하였다. 병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강민(剛愍)이다. 이봉상(李鳳祥) 이순신(李舜臣)의 5대손으로 청주(淸州)에 보임.


6. 신창현 新昌縣


동쪽으로는 온양군(溫陽郡) 경계까지 10리이고, 북쪽으로는 아산현(牙山縣) 경계까지 14리이고, 서쪽으로는 면천군(沔川郡) 경계까지 26리이고, 남쪽으로는 예산현(禮山縣) 경계까지 21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2백 53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굴직현(屈直縣) 이었는데, 신라 때에 기량(祁梁)으로 고쳐 탕정군(湯井郡)의 속현으로 삼았고, 고려 초기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으며, 현종(顯宗) 9년에 다시 천안부(天安府)로 이속시켰다. 공양왕(恭讓王) 3년에 본현 서쪽 장포(獐浦)에 성을 쌓고서 당성(?城)이라 이름하고, 부근 주현(州縣)의 조세(租稅)를 여기에 수납해 두고는 이를 해상으로 조운(漕運)하여 서울로 수송하였으므로 비로소 만호 겸 감무(萬戶兼監務)를 두었던 것을, 본조 태조 원년에 만호는 감생(減省)하고, 태종 14년에 온수(溫水)와 병합하고 읍호를 온창(溫昌)이라 하였다가 16년에 다시 나누어 다른 예와 같이 현감으로 하였다.
【관원】 현감ㆍ훈도 각 1인.
【군명】 굴직(屈直)ㆍ기량(祁梁)ㆍ온창(溫昌).
【성씨】 본현 표(表)ㆍ맹(孟)ㆍ방(方)ㆍ조(趙)가 있으며, 노(盧) 촌성(村姓)이다. 이(李) 역성(驛姓)이다.
【산천】 성산(城山) 현 서쪽 1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금성당산(禁城堂山) 현 동남쪽 11리에 있다. 마산(馬山) 현 동쪽 3리에 있다. 도고산(道高山) 현 남쪽 16리에 있다. 또 예산현(禮山縣) 산천에도 나와 있다. 정포도(井浦渡) 현 서쪽 20리에 있으니 즉 장포(獐浦)의 하류이다. 또 예산현 무한천(無限川)이 여기서 합류하여 면천군(沔川郡) 범근내포(犯斤乃浦)로 들어간다. 장포(獐浦) 현 서쪽 15리에 있다. 도고산에서 발원하여 정포도로 들어간다. 차륜탄(車輪灘) 현 동쪽 12리에 있는데, 온양군 가리천(加里川)과 천안군 포천(浦川)이 이곳에서 합류하여 견포(犬浦)로 들어간다. 견포(犬浦) 현 북쪽 15리에 있으니 즉 차륜탄의 하류이다. 범근내포로 들어간다.
【토산】 숭어[秀魚]ㆍ웅어[葦魚]ㆍ뱅어[白魚]ㆍ조기[石首魚]ㆍ복령(茯?).
【누정】 공북정(拱北亭) 객관의 북쪽에 있다. ○ 서거정(徐居正)의 기문[記]에, “무송(茂松) 윤 상국(尹相國 윤자운(尹子雲))이 거정(居正)에게 말하기를, ‘신창 태수(新昌太守)의 조침(趙琛) 후가 새 정자를 짓고 공북(拱北)이라 편액(扁額)하고는 그 기문을 요구해 왔으니 그대의 말이 있기를 바란다.’ 하였다. 내 추억하건대 병자년 여름에 서원(西原)의 공성(公城)으로부터 이른바 신창이란 땅으로 길을 들어 지나는데, 나의 동년(同年)인 태수 김율(金慄)이 길로 나와서 나를 맞아 주었다. 때는 바야흐로 혹열(酷熱)이었는지라 잠깐 나무 그늘에 앉아 술잔을 나누면서 이내 그 고을의 대략 형편을 물었더니, 김이 말하기를, ‘이 고을이 지역이 좁고 백성도 적으며 토질이 박하고 산물이 적은데다가 아전들은 교활ㆍ완만하고, 백성 역시 시끄럽고 또 송사를 좋아하는데 반하여 나는 서리고 얼킨 것을 다스리어 부석(剖析) 변별할 만한 재간이 없어, 다만 요동하지 않도록 할 따름이요, 너그럽게 대할 따름이다.’ 한다. 나는 말하기를, ‘옛 사람이 이르기를, 「작은 고을을 다스리려면 생선을 삶을 때와 같이 하라.」 하였으니, 군의 고을 다스리는 방법이 거의 그 대체(大體)를 얻은 것이다. 군의 뒤를 이어 오는 자로 하여금 군의 마음을 마음으로 하고, 군의 정사를 그대로 실행하게 한다면, 어찌 다스려지지 않을 이치가 있겠는가.’ 하고, 나의 노정(路程)의 급박으로 말미암아 드디어 거기서 고별하고 가버렸던 것이다. 그 후 몇 해 만에 다시 호남 지방으로 가는데 또 이 길을 지났더니, 태수 윤호(尹壕) 공이 길에 나와서 나를 맞아주고 술잔을 들었는데, 내가 그 고을 다스리는 법을 물었더니, 그의 대답이 나의 동년 김군과 같았다. 또 나의 갈 길이 바쁘고 역방(歷訪)할 겨를을 얻지 못하여, 마음속으로 그윽이 괴이하게 여기기를, 거정이 이 읍과는 본래의 인연이 없어 그런 것인가 했다. 그런데 지난번에 들으니, 조후(趙侯)가 고을을 다스리는 데 부지런하고도 민첩하며, 간소하게 하면서 요령이 있어 그 명령을 번다하게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도 백성들이 업(業)에 충실하고, 백성들에게 빨리 하지 말라 하여도 그들은 즐겨 그 일에 달려와서 관청과 정자가 환연(煥然)하게 일신되었다는 것이다. 내가 그 사람을 생각하고 그 정사를 사모하나, 친히 그 읍의 상황을 보지 못한 즉, 김 동년(金同年)ㆍ윤 사문(尹斯文 윤호)과 더불어 일찍이 서로 토론한 말들이 나의 흉중을 왕래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제 조후가 정자를 짓고 무송 윤공의 기문의 부탁이 홀로 나에게 지워지니, 이는 전일 나에게 두 차례 걸친 기망(期望)이 오늘을 기다린 것이다. 그러니 감히 즐겨 말하지 않으리요. 나는 생각하기를, 누대나 정자를 세우는 것이란 완상(玩賞)하며 놀기를 일삼으려는 것이 아니요, 곧 왕명을 받들고 온 이를 존경하고 빈객을 잘 접대하며, 울적한 것을 이끌어 풀어버리기 위한 것인데, ‘공북(拱北)’이라 이름한다면 다만 이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여기에서 조망(眺望)해 내다보고, 여기서 술 마시며 글 읊는 사람들로 하여금 멀리 궁궐문을 바라보고, 하늘 아래의 장안(長安 서울)을 가리키며, 일찍이 한 그릇의 밥이라 할지라도 임금의 은혜임을 잊지 않게 한다면, 춘추(春秋)의 왕실(王室)을 존중한 큰 의리를 깊이 얻은 것이 될 것이다. 대개 춘추는 선(善)을 높이 선양해 권장하고 악(惡)을 깎아내려 징계한 책으로, 왕실을 존중한자 있으면 이를 썼고, 백성의 일을 소중히 한 자 있으면 이를 썼던 것이다. 조후의 이번 일은 공역에 있어 백성을 번거롭게 하지 않았으며, 시세(時勢)로 보아서도 과잉한 거조가 아니었고, 왕실을 존중함이 이와 같으니, 춘추의 전례에 있어서도 오히려 대서특서(大書特書)하여 이를 찬미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요, 나 같은 사람은 사국(史局)의 문한(文翰)의 직임을 맡고 있는 터이니, 비록 쓰려고 하지 않은들 어찌 면하겠는가. 그 산천과 읍터의 형승(形勝)에 있어서는 내 일찍이 한 번도 목격한 일이 없으니, 어찌 장황하게 늘어놓으랴. 나의 박전(薄田) 1경(頃 백마지기)이 평택(平澤)에 있는데, 다른 날 혹 은퇴를 원하여 그곳에 돌아가서 휴양한다면, 마땅히 한 번 그 정자 위에 가서 보고 그 말을 다하겠노라.” 하였다.
【학교】 향교 현 북쪽 2리에 있다.
【역원】 창덕역(昌德驛) 현 동쪽 3리에 있다. 명암원(鳴巖院) 현 동쪽 11리에 있다. 마장원(馬場院) 현 동쪽 15리에 있다. 용정원(龍頂院) 현 남쪽 15리에 있다. 신례원(新禮院) 현 서쪽 20리에 있다.
【교량】 미륵탄교(彌勒灘橋) 마장원 동쪽에 있다.
【불우】 한량사(閑良寺)ㆍ천일암(千日庵)ㆍ도명사(道明寺)ㆍ원암(元庵)ㆍ석천사(石泉寺)ㆍ불암(佛庵)ㆍ안심사(安心寺) 모두 도고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현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현 서쪽 2리에 있다. 여단 현 북쪽에 있다.
【고적】 성산성(城山城)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1천 2백 13척에 높이는 15척이다. 안에 두 개의 우물이 있는데 지금은 못쓰게 되었다.
【인물】 본조 맹희도(孟希道)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에 과거에 급제하였는데, 본조에 들어와서 벼슬이 검교한성윤(檢校漢城尹)에 이르렀고, 우의정(右議政)에 증직되었다. 맹사성(孟思誠) 맹희도(孟希道)의 아들인데, 고려 신우(辛禑) 때에 과거에 장원하고, 우리 세종 13년에 우의정에 임명되었는데, 평생에 재물과 전택(田宅)을 일삼지 않고, 청백으로 한결같이 절조를 지켰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조영규(趙英珪) 태조의 개국공신(開國功臣)이며, 벼슬이 전서(典書)에 이르렀다. 『신증』 표연말(表沿沫) 과거에 올라 벼슬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이르렀는데, 무오사화(戊午士禍)에 걸려 멀리 귀양가던 도중에 죽었다. 아들 빙(憑)도 우수한 성적으로 과거에 올라, 벼슬이 홍문관 직제학(弘文館 直提學)에 이르렀다. 부자가 모두 문명(文名)이 있었다.

《대동지지(大東地志)》
【방면】 현내(縣內) 끝이 5리이다. 대동(大東) 처음이 5리, 끝이 10리이다. 소동(小東) 처음이 5리, 끝이 8리이다. 대서(大西) 처음이 5리, 끝이 15리이다. 소서(小西) 처음이 10리, 끝이 15리이다. 북면(北面) 처음이 5리, 끝이 13리이다. 남면(南面) 처음이 5리, 끝이 15리이다.
【성지】 당성(?城) 장포(獐浦)에 있는데, 이웃 현의 조세(租稅)를 받아 배로 서울로 실어온다.
【교량】 곡교(曲橋) 미륵천(彌勒川)에 있는데 가물면 다리를 놓고, 물이 불면 배로 건너는데 내포 10여 읍에서 서울로 통하는 대로이다.
【토산】 감[枾]ㆍ붕어[?魚]ㆍ게[蟹]ㆍ황석어(黃石魚)ㆍ세미어(細尾魚).


7. 안성군(安城郡)


동쪽은 죽산현(竹山縣) 경계까지 16리이고, 남쪽은 충청도 직산현(稷山縣) 경계까지 25리이며, 서쪽으로는 양성현(陽城縣) 경계까지 17리이고, 북쪽으로는 양지현(陽智縣) 경계까지 89리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1백 52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 내혜홀(奈兮忽)이었는데,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백성군(白城郡)이라 고쳤다. 고려 초기에 지금의 명칭으로 고쳐서 현으로 만들었고, 현종(顯宗) 9년에 수주(水州)에 예속시켰다. 뒤에 천안부(天安府)에 이속하였고, 명종(明宗) 2년에 비로소 감무(監務)를 두었다. 공민왕(恭愍王) 10년에 홍건적이 송도(松都)에 침입하였으므로 임금이 남쪽으로 가는데, 적이 선봉(先鋒)을 보내어 항복하라고 부르니, 양주(楊州)ㆍ광주(廣州) 일대 주군(州郡)에 이르는 곳마다 그 칼날을 꺾는 자가 없었다. 오직 안성 고을 사람이 항복하는 체하고, 연회를 베풀어서 적군을 호궤하다가, 취한 틈을 타서 괴수 6명을 베어 죽였다. 이 때문에 적이 감히 남쪽으로 내려오지 못하였다. 11년에 그 공으로 군으로 승격되었고, 본조에서도 그대로 따랐다가 태종 13년에 충청도에서 본도에 예속시켰다 공민왕이 군으로 승격시키면서 수주(水州)의 양량(陽良)ㆍ감미탄(甘彌呑)ㆍ마전(馬田)ㆍ신곡(薪谷) 등의 네 부곡(部曲)을 떼어 주었는데, 뒤에 김용(金鏞)이 뇌물을 받고 마전ㆍ신곡을 수주로 돌려 주게 하였다. 본조 공정왕(恭靖王) 원년에 또 양량을 쪼개어서 양지현(陽智縣)을 설치하였다.
【관원】 군수ㆍ훈도(訓導) 각 1인.
【군명】 내혜홀(奈兮忽)ㆍ백성(白城).
【성씨】 본군 이ㆍ김ㆍ조(趙)ㆍ설(薛)ㆍ장(張)ㆍ경(敬). 감미탄(甘彌呑) 유(柳).
【형승】 천흥산(天興山)과 청룡산(靑龍山)이 병풍처럼 옹위하고 고리처럼 둘러 있다 권근(權近)이 지은 극적루(克敵樓) 기문(記文)에 있다.
【산천】 서운산(瑞雲山) 군 남쪽 20리 지점에 있다. 서쪽 봉우리에 단(壇)이 있고, 단 밑에 우물 셋이 있다. 가뭄을 만나서 우물을 수리하고 비를 빌면 문득 영험이 있다. 백운산(白雲山) 군 동쪽 14리 지점에 있다. 보산(寶山) 군 북쪽 20리 지점에 있다. 구포산(九苞山) 군 북쪽 5리 지점에 있다. 비봉산(飛鳳山) 군 북쪽 2리 지점에 있으며, 진산(鎭山)인데 옛 성터가 있다. 남천(南川) 군 남쪽 2리 지점에 있다. 물의 근원이 둘인데, 한 가닥은 백운산 북쪽에서 나오고, 한 가닥은 남쪽에서 나온다. 이것이 합류하여 양성현 홍경천(弘慶川)으로 들어간다. 목동지(木洞池) 군 남쪽 15리 지점에 있다.
【토산】 사(絲)ㆍ삼[麻]ㆍ사기그릇[磁器]ㆍ안식향(安息香)ㆍ지황(地黃).
【누정】 극적루(克敵樓) 객관(客館) 동쪽에 있다. ○ 권근이 지은 기문(記文)에, “나의 벗 정군(鄭君) 수홍(守弘)이 성(省)의 낭관으로서 안성 수령이 되어 나왔다. 정사를 잘하니 백성이 의지하여 편하여졌다. 이에 그 공관을 수리하고 고을 학장(學長) 정한(鄭翰)을 서울에 가게 하여 양촌(陽村)의 집에 편지를 보냈는데, ‘누(樓)는 본래, 거창(居昌) 신군(愼君) 인도(仁道)가 이 고을 원이었을 때 설치한 것이다. 지정(至正 원 나라 순제의 연호) 신축년에 홍건적에게 송도가 함락되고 승여(乘輿)가 파천(播遷)하였을 때 이 고을에서 북쪽으로 30여 주(州)는 풍문(風聞)만 듣고도 항복하였다. 심지어는 공복(公服)을 갖추고 나가서 맞이하기도 하였다. 하늘까지 뒤덮을 듯한 기세가 남으로 넘치니, 장차 온 나라가 같이 망해도 막을 수 없었는데 오직 이 고을이 남보다 의기를 분발하여 항복하는 체하며 잔치를 벌여 적군을 호궤하였다. 적이 취한 다음 섬멸하니, 적은 이 때문에 다시 남으로 내려오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국가는 흥복(興復)하는 공을 성취할 수 있었다. 이 고을의 의기와 공렬을 표창하여 지관(知官)으로 승격시켰다. 다음해 계묘년에 신군(愼君)이 원으로 와서 이 누를 지었다. 그렇다면 이 누는 적을 대항한 공과 지관으로 승격된 영관을 표한 것이니, 중요한 뜻을 가졌다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신군이 이 누를 짓기는 하였으나 누 이름은 짓지 못하였고, 또 그 사실을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지도 못하였다. 지금 벌써 3기(紀)라는 오랜 세월을 지나서 늙은 사람은 죽었고, 장성했던 사람은 늙었다. 또 오랜 시일을 지나게 되면, 이 고을이 국가에 공이 있었고 이 누가 고을에 중한 뜻이 있다는 것을 후세 사람은 장차 알 수 없게 될 것이다. 이에 옛 규모대로 수리하여서 썩은 부분은 바꾸어서 견고하게 하고, ‘극적루(克敵樓)’라 명명하였으니, 자네 글을 받아서 후일 증거로 삼고, 고을 사람에게 전인(前人)의 공렬을 대대로 잊지 않게 하기를 원한다. 이 누의 경치를 말하자면, 가깝게는 산이 동북쪽에 진좌(鎭座)하여 푸른 솔과 높은 나무가 울창하고 그윽하며, 남쪽에는 큰 냇물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른다. 그 안쪽에 10여 채 소민(小民)의 집이 띄엄띄엄 있고, 바깥쪽에는 편평한 밭 수십 이랑이 펼쳐져 있다. 뽕나무ㆍ삼이밭 경계에 잇닿았고, 벼농사가 논 배미에 가득하다. 봄에 갈아서 여름에 김매고, 아침에 갔다가 저녁에 돌아온다. 무릇 고을 사람으로서 이 지역에 일이 있는 자는, 모두 고개만 숙이면 볼 수 있다. 멀리로는 천흥ㆍ청룡의 여러 봉우리가 머리를 넌지시 내밀면서, 조회하는 듯 읍하는 듯, 병풍처럼 옹위하고 고리처럼 벌여서, 시계(視界)가 끝이 없다. 옛날에 한문공(韓文公)이 등왕각(?王閣)에 올라보지 못했으나, 기문하였으니, 자네도 이 누를 직접 보지 못하였다는 것으로써 사퇴(辭退)하지 말았으면 다행이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생각하기를 왕씨(王氏)가 고려를 건국한지 5백 년 동안에 도둑의 침해를 매우 받은 것이 충렬왕(忠烈王) 경인년에 있은 합단(哈丹)의 침입과, 공민왕 신축년에 있은 홍건적의 변이었다. 철령(鐵嶺)을 지켜내지 못하니, 합단이 마구 들어와서 빈 고을에 나아가듯 하였다. 원주(原州)에 들어오자, 충갑(?甲 원충갑)이 필부(匹夫)로서 팔을 뽐내며 호통쳐서 도둑을 죽이니 지금까지 아름답게 여긴다. 송도가 함락되니 홍건적이 더욱 성해져서, 군사를 갈라 남쪽으로 향할 적에 가는 곳마다 바람에 쏠리듯 하였고, 강물을 터 놓은 듯한 도도한 기세를 막지 못하였다. 그런데 이 고을 사람이 충의를 다해 적군을 섬멸하였다. 우뚝한 제방이 되어, 옆으로 뻗치는 적군의 기세를 막았으니, 그들의 거룩한 공은 충갑과 견주어서 손색이 없다. 그 사실을 특별히 적어서 만세에 충의를 권장하는 표본으로 하는 것이 마땅하다. 아, 충의는 인도(人道)의 큰 대목이며, 왕교(王敎)의 근본이다. 정군(鄭君)은 일찍부터 충효한 자질로써 인의(仁義)를 강명(講明)하였다. 고상한 뜻 가짐과 확고한 절조는 진실로 우뚝하여 짝할 사람이 없다. 이제 이 고을 정사에 임하게 되어서는, 첫째로, 이 사실을 높이 들어 이 누에 이름하여서 후인에게 무궁하도록 장려하였으니, 이 점도 또한 적을 만하다. 후일, 이 누에 오르는 자가 전인의 공열을 거슬러 생각하고 정군의 뜻을 생각하여, 타고난 덕을 좋아하는 양심에 감발하는 바 있으면, 충의와 절개 있는 선비가 성하게 나올 것이다. 그 왕화(王化)에 도움됨이 어떠하겠나. 어떤 사람은, ‘적을 이기는 공은 반드시 위란(危亂)을 겪은 다음이라야 나타나는 것이니, 이것은 오랜 세대에 드물게 있는 것이다. 절의 있는 사람이 비록 감발한 바가 있다 하더라도, 장차 어느 곳에 그 뜻을 나타내겠는가.’ 하여, 나는 말하기를, ‘일에 크고 작음은 있으나 그 이치는 같다. 무릇 물욕이 내 마음의 의리를 해롭게 하는 것은 다 적이다. 탐하는 마음은 염치를 해하고, 모진 것은 인(仁)을 해하며, 아부는 공(公)을 해하고, 편곡(偏曲)은 정의를 해하는데, 모두 사람이 적으로 돌려서 극복해야 할 것이다. 이런 극복하는 마음을 유(類)에 따라서 커지게 하고 사물에까지 미룬다면, 일상생활에 무릇 스스로 그 사심(私心)을 이겨서 천리(天理)를 회복하는 것이, 어디를 가나 적을 극복하는 공이 아님이 없으며, 의(義)를 두루 다 쓸 수 없을 것이다.’ 하였다. 공자(孔子)가 안연(顔淵)에게 말하기를, ‘자신의 사심을 극복하여 천리에 돌아가게 하는 것이 인(仁)이다.’ 하였다. 이 누에 오르는 자가 이것으로써 일삼는다면, 정군의 뜻은 거의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였다.
【학교】 향교 군(郡) 동쪽 2리 지점에 있다.
【역원】 강부역(康富驛) 군 동쪽 5리 지점에 있다. 광실원(光實院) 군 동쪽 10리 지점에 있다. 대비원(大悲院) 군 서쪽 5리 지점에 있다.
【불우】 청룡사ㆍ석남사(石南寺) 모두 서운산에 있다. 금강사(金剛寺) 백운산에 있다. 봉안사(鳳安寺) 구포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군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군 북쪽 3리 지점에 있다. 여단(?壇) 군 북쪽에 있다.
【고적】 감미탄부곡ㆍ마전부곡 모두가 군 동쪽 10리 지점에 있다.
【명환】 본조 정수홍(鄭守弘)ㆍ김겸(金謙).
【인물】 고려 이영(李永) 자는 대년(大年)이다. 서리(胥吏)가 되어서 서류를 정조 주사(政曹主事)에게 올리면서 읍하지 않았다. 주사가 노하여 꾸짖으니, 영은 곧 그 서류를 찢으면서, “나도 과거 보아서 조정에 벼슬할 것인데, 너희들에게 무슨 읍을 하리요.” 하였다. 숙종조(肅宗朝)에 을과(乙科)에 뽑혔고, 인종(仁宗) 초년에 지어사 대사(知御史臺事)가 되었다. 이자겸(李資謙)이 한안인(韓安仁)을 죽였는데, 이영은 한의 매부(妹夫)로서, 연좌되어 진도(珍島)에 유배(流配)되었다. 그의 어미와 자식도 적몰(籍沒)당해, 장차 노비로 된다는 말을 듣고, “내가 평소 일을 반성하여도 부끄러운 일이 없었으므로 죽음을 견디고 기다린 것인데, 만약 늙은 어머니가 자식 때문에 천한 노예가 된다면, 내 구차하게 살아서 무엇하랴.” 하고, 이내 말술을 마시고 분하게 여기다가 죽었다. 자겸이 술사(術士)를 보내어 길섶에 묻었더니, 마소가 그 무덤을 밟지 않았다. 자겸이 패망하자, 첨서 추밀원사(僉書樞密院事)로 추증되었다. 김유성(金有成) 15세 때 과거에 올라, 덕원부 서기(德源府書記)로 조용(調用)되었고, 태복윤(太僕尹)까지 하였다.
본조 이숙번(李叔蕃) 우리 태종조(太宗朝) 정사 공신(定社功臣)이다, 벼슬은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고, 안성군(安城君)으로 봉함을 받았다.
『신증』 【효자】 본조 이윤종(李閏宗) 서리(書吏)이다. 아비가 오랜 병중이었는데, 손가락을 끊어 약에 타서 먹여서 병이 나았다. 지금 임금 10년에 정려하였다.
【제영】 이락우청홍행화(籬落雨晴紅杏花) 허식(許湜)의 시에, “방탕한 객(客)은 본래 조롱(鳥籠) 밖 새와 같은 것, 세상 사람 어느 누구, 우물안 개구리를 부러워하리. 산 고을에 오가면서 봄 경치 찾으니, 울타리에 비 개였는데 살구꽃이 붉다.” 하였다. 지탁서남옥야평(地坼西南沃野平) 최부(崔府)의 시에, “산은 동북쪽을 막아서 저절로 성이 되었고, 지역은 서남으로 트이었는데, 기름진 들판이 질펀하다.” 하였다. 십실풍연 사무성(十室風煙似武城) 함부림(咸傅霖)의 시에, “열 집 풍경은 무성과 같은데, 남쪽 들은 기름지고, 사방 산 편평하다. 사군(使君)이 현가(弦歌)로써 다스리는데, 고을에는 멸명(滅明) 같은 사람 몇이나 있을까.” 하였다.

《문헌비고(文獻備考)》
【연혁】 태종 13년 충청도로부터 경기도에 예속시켰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성지】 서운고성(瑞雲古城) 둘레가 3리이다. 금강고성(金剛古城) 동남쪽으로 15리인데 둘레가 5리이다. 비봉고성(飛鳳古城) 둘레가 2리이다. 토성(土城) 남쪽으로 15리이며, 의병 홍계남(洪季男)이 성을 쌓아 싸운 곳인데, 지금은 진터[陣基]라 부른다.
【누정】 경설정(鏡雪亭) 읍내에 있다. 비각(碑閣) 남쪽으로 3리에 있는데, 영종(英宗) 무신년 오명항(吳命恒)의 승첩비(勝捷碑)이다.
【방면】 군내(郡內) 끝이 10리이다. 가사(加士) 동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10리이다. 가지곡(加之谷) 동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북좌촌(北佐村) 북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덕곡(德谷) 남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목촌(木村) 서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송죽촌(松竹村) 서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5리이다. 진두(辰頭)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우지곡(于只谷) 서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대문리(大門里) 처음이 10리, 끝이 30리이다. 죽촌(竹村) 서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15리이다. 거호곡(居乎谷) 동북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15리이다. 잉상곡(芿山谷) 남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10리이다.
【사원】 도기서원(道基書院) 현종 계묘년에 세웠고 기유년에 사액하였다. 김장생(金長生) 경도(京都) 문묘 편에 있다.


 

[주D-001]옛날에……기문(記文)하였으니 : 한문공(韓文公)은 한퇴지이다. 그가 원주 자사(袁州刺史)로 있을 때에 등왕각(?王閣)의 기문을 지었는데, 보지 못하여 기문을 짓노라고 말하였다.
[주D-002]열 집 풍경 : 공자가 열 집 못 되는 동네라도 충성되고 신용이 있는 사람이 반드시 있다고 한 말이 있으므로, 이 안성은 조그만 고을이지만, 옛날 공자의 제자인 자유(子有)라는 사람이 원 노릇하던 무성(武城) 지방에서와 같이 충성되고 신용 있는 사람이 있다는 뜻이다. 그 무성에서 자유가 현가(絃歌), 곧 음악을 이용하여 백성을 교화시켰다 한다.
[주D-003]멸명(滅明) : 담대멸명(澹臺滅明)이라는 사람인데, 그는 무성 사람으로 자유에게 많은 존경을 받았다.

 

 

8. 양성현(陽城縣)


동쪽으로 안성군 경계까지 3리이고, 남쪽으로 충청도 직산(稷山)현 경계까지 27리이며, 서쪽으로 진위현 경계까지 19리이고, 북쪽으로 용인현 경계까지 15리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1백 12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 사복홀(沙伏忽)인데, 신라 경덕왕이 적성(赤城)이라 고쳐서 백성군(白城郡) 속현으로 만들었다. 고려 초기에 지금 명칭으로 고쳤고, 현종 9년에는 수주(水州)에 예속시켰다. 명종이 감무를 두었는데, 본조 태종 13년에 예대로 현감으로 만들고, 충청도에서 본도로 이속시켰다.
【관원】 현감ㆍ훈도 각 1인.
【군명】 사복홀ㆍ적성ㆍ사파을(沙巴乙)
【성씨】 본현 하ㆍ유(柳)ㆍ이ㆍ임(任)ㆍ갈(葛)ㆍ강(康)ㆍ송(宋) 모두 내성(來姓)이다.
【산천】 천덕산(天德山) 현 서쪽 2리 지점에 있는데, 진산이다. 진위현 조에도 적었다. 백운산(白雲山) 현 남쪽 12리 지점에 있다. 바다 괴태길곶 서쪽 1백리 지점에 있다. 괴태길곶(槐台吉串) 현 서쪽 1백 리 지점에 있다. 줄같은 한 가닥 길이 진위현의 송장, 수원 양간(楊干)을 지나서 바다에 불쑥 들어 갔는데, 무릇 75리이다. 목장(牧場)이 있다. 홍경천(弘慶川) 현 남쪽 35리 지점에 있다. 선원천(禪院川)과 안성군 남천 물이 합쳐지고, 서쪽으로 흘러 직산현 홍경원 북쪽에 와서 이 냇물이 된다. 또 수원부 오을미곶(吾乙未串)에 들어간다. 선원천 고을 동쪽 1리 지점에 있다. 물 근원이 죽산현 좌찬역(佐贊驛) 서쪽 골에서 나와, 고양지(古陽智)를 지나고, 현의 선원(禪院) 앞에 와서 냇물이 된다.
【토산】 웅어ㆍ지황.
【봉수】 괴대길곶 봉수(槐台吉串烽燧) 남쪽으로 충청도 면천군 창택산(沔川郡倉宅山)에 응하고, 또 직산현 망해산(望海山)에 응하며, 북쪽으로 수원부 흥천산(興天山)에 응한다.
【학교】 향교 현 북쪽 2리 지점에 있다.
【역원】 가천역(加川驛) 현 서쪽 15리 지점에 있다. 선원(禪院) 현 동쪽 5리 지점에 있다. 소초원(所草院) 현 남쪽 30리 지점에 있다.
【불우】 청원사(靑原寺) 천덕산에 있다. 수정사(修淨寺)ㆍ덕적사(德積寺) 아울러 백운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현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현 북쪽 2리 지점에 있다. 여단 현 북쪽에 있다.
【고적】 무한성(無限城) 현 남쪽 12리 지점에 있는데, 석축이다. 둘레는 1천 3백 5척이며, 성의 안에 못 하나가 있다.
【인물】 고려 이천(李?) 벼슬이 첨의 평리 개성윤(僉議評理開城尹)에 이르렀다. 본조 이옥(李沃) 천의 증손이다. 무과에 뽑혀서 벼슬이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에 이르렀다. 이추(李推) 벼슬이 황해도 도관찰 출척사(黃海道都觀察黜陟使)에 이르렀다. 이순지(李純之) 과거에 올라 벼슬이 판중추(判中樞)에 이르렀다. 이예(李芮) 과거에 두 번이나 올라서, 벼슬이 형조 판서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질(文質)이다. 글 잘한다는 명망이 있었다. 이승소(李承召) 세종조 정묘년 과거에 장원하였고, 또 중시(重試)에 뽑혔다. 성종조(成宗朝)에 좌리 공신(佐理功臣)에 참여하여 양성군(陽城君)으로 봉함을 받았고, 벼슬이 예조 판서에 이르렀다. 문장으로써 세상에 이름 났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신증』 이세영(李世英) 과거에 올라, 벼슬이 참찬에 이르렀고, 청간(淸簡)하다는 것으로써 일컬었다.
【제영】 읍호요동간의명(邑號聊同諫議名) 고려 강호문(康好文)의 시에, “용성(龍城) 깊은 지역에 외로운 성 있는데, 고을 이름은 간의의 이름과 같다. 옛 시를 뒤좇아 화답하며 오래 앉았으니, 숲을 격한 주막에 낮닭이 운다.” 하였다. 노수참천요적성(老樹參天繞赤城) 유정현(柳廷顯)의 시에, “노목이 하늘을 찌를 듯 적성(赤城 적현과 같은 것)을 둘렀는데, 문앞 작은 길이 우정(郵亭)에 잇달았다. 송사 다루는 뜰에 해 길고, 일은 없어 한가로이 꾀꼬리 우는 소리 듣네.” 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고종 32년 군(郡)으로 고쳤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성지】 백운산고성(白雲山古城) 무한성(無限城)을 칭하며, 둘레가 1천 3백 5척이고 못이 하나다. 고루(古壘) 소사천(素沙川)의 남북쪽에 네 군데 있다.
【봉수】 괴대곶(槐台串) 서쪽 1백 리에 있음.
【방면】 지질동(紙叱洞) 북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18리. 송오리(松五里) 동북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60리. 구천(九千) 남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30리. 공제(孔悌) 남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30리. 반곡(盤谷) 서쪽으로 처음은 25리, 끝은 30리. 원당(元堂) 서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30리. 승량(升良) 북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20리. 영통(令通) 서남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40리. 금질동(金叱洞) 동북쪽으로 처음은 30리, 끝은 40리. 덕산(德山) 남쪽으로 처음과 끝이 10리. 구룡동(九龍洞) 남쪽으로 처음은 30리, 끝은 40리. 소고니(所古尼) 서쪽으로 처음은 30리, 끝은 40리. 도일(道一) 남쪽으로 끝이 35리. 율북(栗北) 서쪽으로 처음은 40리, 끝은 45리. 서신리(西新里) 서쪽으로 처음은 50리, 끝은 55리. 감미동(甘味洞) 서쪽으로 처음은 65리, 끝은 65리. 이상 세 면은 수원(水原) 남쪽 경계를 넘어 옹포(瓮浦)의 옆에 있다. 외양동(外良洞) 서쪽으로 처음은 90리, 끝은 1백 15리인데, 서쪽은 바다에 닿았다.
【사원】 덕봉서원(德峯書院) 숙종 을해년에 세웠고, 경진년에 사액하였다. 오두인(吳斗寅) 파주(坡州)에 보임.

 

9. 평택현(平澤縣)

 

 


동쪽으로는 직산현(稷山縣) 경계까지 10리이고, 남쪽으로는 아산현(牙山縣) 경계까지 8리, 천안군(天安郡) 경계까지 12리이고, 서쪽으로는 경기 수원부(水原府) 경계까지 20리이고, 북쪽으로는 같은 부 경계까지 10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1백 24리이다.
【건치연혁】 옛날에는 하팔현(河八縣)이라 불렀던 것을 고려 때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서 천안부(天安府)에 붙였으며, 뒤에 감목(監牧)을 두었는데, 본조 태종 13년에 예에 의하여 현감으로 고쳤다.
【관원】 현감ㆍ훈도 각 1인.
『신증』 연산(燕山) 을축년에 경기로 이속(移屬)시킨 것을 금상(今上) 초년에 다시 예전대로 환원하였다.
【군명】 하팔(河八).
【성씨】 본현 이(李)ㆍ임(林)ㆍ박(朴)ㆍ전(田)ㆍ손(孫)ㆍ전(全)이 있으며, 박(朴) 촌성(村姓)이다.
【산천】 성산(城山) 현(縣) 북쪽 1리에 있다. 오을미곶포(吾乙未串浦) 현 북쪽 10리에 있다. 시포(市浦) 현 남쪽 11리인 아산현(牙山縣)과의 경계에 있다. 신덕포(新德浦) 현 서쪽 5리에 있다.
【토산】 붕어[?魚]ㆍ숭어[秀魚]ㆍ지황(地黃).
【누정】 관가정(觀稼亭) 객관 북쪽 언덕 위에 있다. 본현에는 사방에 산이 없고, 오직 이 언덕이 약간 높아서 조망할 만하다.
【학교】 향교 현 서쪽 1리에 있다.
【역원】 화천역(花川驛) 현 동쪽 5리에 있다. 상원(上院) 현 서쪽 5리에 있다.
【사묘】 사직단 현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성산(城山)에 있다. 여단 현 북쪽에 있다.
【고적】 백랑부곡(白浪部曲).
『신증』 【효자】 본조 박녕(朴寧) 본현의 아전이다. 아버지를 섬기기를 매우 효성스럽게 하여 아침 문안과 저녁 잠자리를 잘 보살피며 봉양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아서 금상 6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제영】 수완산저옥야평(水緩山低沃野平) 박서생(朴瑞生)의 시에, “물 천천히 흐르고 산 낮으며 옥야는 평평한데, 주민들은 곳곳마다 밭갈이를 일삼는다.” 하였다. 춘풍원습화여해(春風原?花如海) 노숙동(盧叔仝)의 시에, “기름진 들 멀리 손바닥 모양 편편한데, 농부들 도롱이 삿갓 쓴 채 구름 헤치며 밭을 간다. 봄바람 질펀한 들엔 꽃바다 이루었고, 밭머리선 꾀꼬리가 아래 위로 날며 운다.” 하였다. 지증근해요어해(地曾近海饒魚蟹)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한 언덕 약간 높게 사면이 편편한데, 날 저물면 돌아와서 외로운 정자에 올라본다. 이 지역 본래 바다와 가까워서 물고기ㆍ게가 풍부하고, 들엔 이미 가을 깊어 벼농사로 가득 찼다. 구름 한 점 없는 긴 창공(蒼空)엔 기러기 그림자 머금었고, 조수 돌아온 옛 나루터선 용(龍) 비린내 풍긴다. 내 집에 수경(數頃) 황무(荒蕪)한 밭이 있으니, 어느 날 찾아와서 백조(白鳥)와 맹약할꼬.” 하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연혁】 선조(宣祖) 29년에 개혁하여 직산(稷山)에 예속시켰으니, 왜구(倭寇)의 탕잔(蕩殘) 때문이었다. 광해군 2년에 다시 복귀시켰다.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방면】 현내(縣內) 처음은 1리, 동남쪽으로 끝은 25리. 동면(東面) 끝이 8리. 서면(西面) 끝이 7리. 남면(南面) 끝이 2리. 북면(北面) 끝이 8리. 소북(小北) 처음은 10리, 끝은 20리. ○ 백랑부곡(白浪部曲)이다.
【성지】 고성(古城) 당산(堂山)에 있는데, 성산(城山)이라고도 하며 옛터가 있다.
【진도】 군물진(軍勿津) 통양성(通陽城)과 진위(振威)와의 사잇길이다. 지진(池津) 소북면(小北面)과 수원지(水原地)로 통한다.
【토산】 게.
【사원】 포의사(褒義祠) 현종 신축년에 세워졌고 숙종 갑신년에 사액되었다. 홍익한(洪翼漢)ㆍ윤집(尹集) 모두 강화(江華)에 보임. 오달제(吳達濟) 광주(廣州)에 보임.

 

 

 

10. 진위현(振威縣)


동쪽으로 양성현 경계까지 13리이고, 남쪽은 충청도 직산현 경계까지 37리이며, 서편으로는 수원부(水原府) 경계까지 12리이고, 북쪽으로 용인(龍仁)현 경계까지 33리인데, 서울과는 1백 18리의 거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 부산현(釜山縣)인데 옛 연달부곡(淵達部曲)인데, 혹 금산(金山)이라 하기도 하고, 송촌활달(松村活達)이라 하기도 한다. 신라 경덕왕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서 수성군(水城郡) 속현으로 만들었고, 고려 때에도 그대로 두었다. 명종(明宗)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그 뒤에 영(令)으로 승격시켰다. 본조에서도 그대로 하다가, 태조(太祖) 7년에 충청도에서 떼어서 본도에 이속시켰다.
【관원】 현령 1인. 관직 품계는 종5품이며, 다른 현령과 같다. 훈도 1인.
【군명】 부산ㆍ연달(淵達)ㆍ송촌활달.
【성씨】 본현 김ㆍ이ㆍ유(柳)ㆍ최ㆍ송. 영신(永新) 김ㆍ최ㆍ오ㆍ황ㆍ이. 송장(松莊) 이ㆍ유(柳).
【형승】 길이 남과 북으로 통한다 하륜(河崙)이 기문을 지었다. 3도 요충(要衝)이 되는 지역에 위치했다 서거정(徐居正)이 지은 기문이 있다.
【산천】 부산(釜山) 현 동쪽 2리 지점에 있는데 진산이다. 무봉산(舞鳳山) 현 동쪽 5리 지점에 있다. 수원부 편에도 적혀 있다. 천덕산(天德山) 현 동쪽 5리 지점에 있다. 양성현 편에도 적혀 있다. 장호천(長好川) 현 남쪽 1리 지점에 있다. 물 근원이 둘인데, 하나는 용인 속현으로 되어 있는 처인(處仁) 동쪽에서 나오고, 하나는 옛 양지현 서편에서 나와서 합류한다. 객관 남쪽을 지나 다시 서편으로 흘러 수원부 다라고비진(多羅高飛津)으로 들어간다.
【토산】 붕어[?魚]ㆍ게ㆍ지황(地黃).

 

 11. 삼국사기 백제본기(온조왕 원년)

 

百濟本紀第一.

始祖<溫祚王>·<多婁王>

#23卷-百濟本紀1-溫祚王-元年

○<百濟>始祖<溫祚王>, 其父, <鄒牟>, 或云<朱蒙>. 自<北扶餘>逃難, 至<卒本扶餘>. <扶餘>王無子, 只有三女子, 見<朱蒙>, 知非常人, 以第二女妻之. 未幾, <扶餘>王薨, <朱蒙>嗣位. 生二子, 長曰<沸流>, 次曰<溫祚>.[或云: "<朱蒙>, 到<卒本>, 娶越郡女, 生二子."] 及<朱蒙>在<北扶餘>所生子, 來爲太子. <沸流>·<溫祚>, 恐爲太子所不容, 遂與<烏干>·<馬黎>等十臣南行, 百姓從之者, 多. 遂至<漢山>, 登<負兒嶽>, 望可居之地, <沸流>欲居於海濱. 十臣諫曰: "惟此<河南>之地, 北帶<漢水>, 東據高岳, 南望沃澤, 西阻大海. 其天險地利, 難得之勢, 作都於斯, 不亦宜乎?" <沸流>不聽, 分其民, 歸< 鄒忽>以居之. <溫祚>都<河南><慰禮城>, 以十臣爲輔翼, 國號<十濟>, 是<前漢><成帝><鴻嘉>三年也. <沸流>以< 鄒>, 土濕水鹹, 不得安居, 歸見<慰禮>, 都邑鼎定, 人民安泰, 遂慙悔而死, 其臣民皆歸於<慰禮>. 後以來時百姓樂從, 改號<百濟>. 其世系與<高句麗>, 同出<扶餘>, 故以<扶餘>爲氏.[一云: 始祖<沸流王>, 其父<優台>, <北扶餘>王<解扶婁>庶孫. 母<召西奴>, <卒本>人<延 勃>之女, 始歸于<優台>, 生子二人, 長曰<沸流>, 次曰<溫祚>. <優台>死, 寡居于<卒本>. 

後<朱蒙>不容於<扶餘>, 以<前漢><建昭>二年, 春二月, 南奔至<卒本>, 立都號<高句麗>, 娶<召西奴>爲妃.

其於問{開}基創業,  {頗}有內助, 故<朱蒙>寵接之特厚, 待<沸流>等如己子. 及<朱蒙>在<扶餘>所生<禮>氏子<孺留>來, 立之爲大子{太子}, 以至嗣位焉. 於是, <沸流>謂弟<溫祚>曰: "始, 大王避<扶餘>之難, 逃歸至此, 我母氏傾家財, 助成邦業, 其勤勞多矣. 及大王厭世, 國家屬於<孺留>, 吾等徒在此, 鬱鬱如 贅, 不如奉母氏, 南遊卜地, 別立國都." 遂與第{弟}率黨類, 渡<浿>·<帶>二水, 至< 鄒忽{彌鄒忽}>以居之. 『北史』及『隋書』皆云: "<東明>之後有<仇台>, 篤於仁信. 初立國于<帶方>故地, <漢><遼東>太守<公孫度>以女妻之, 遂爲東夷强國." 未知孰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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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직산 하남위례성 13년간의 溫祚王城 유력지

        *백제의 도읍 변천사

         1. 한성백제(풍납성)

         2. 한성백제(남평양성)

         3. 웅진백제(공산성)

         4. 사비백제(사비성)

         5. 고구려--졸본부여(오녀산성)

     <직산백제 위례성시대--BC18~BC6, 13년>

       1. 부소산과 위례성(입장면 양대리, 호당리)

        2. 원통골과 오리골(직산읍 판정리, 입장면 흑암리) 

        3. 사산성(직산읍 군동리)

        3. 궁리와 안양리(성환읍 안궁리)

3. 結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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