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기회가 되면 작업실을 가득 메우고 있는 작품을 전시하려고 한다. 더 많이 알리고 한 점 한 점씩 소망을 담아 많은 사람에게 선물하고 싶다."
솟대 - 김진열
긴 장대 위에 새 두 마리가 나를 응시한다. 창공을 훨훨 날고 싶은 희망의 몸짓일까. 내 마음 같다. 가슴이 두방망이질한다.
솟대는 돌기둥에 나무나 돌로 만든 새를 앉힌다. 마을의 수호신으로서 고대로부터 북아시아 전 지역에 퍼져나갔다. 그것은 민속신앙을 목적으로 하거나 경사스러운 일을 기념하기 위해 세웠다. 삼한시대에는 질병과 재앙이 없기를 빌며 제사 지내던 소도에서 유래한 솟대다. 촌락에서는 수호신, 농가에서는 풍년을, 어촌에서는 풍어를 기원하는 목적으로 세우기도 했다.
근대에 와서는 가정에서 경축할 일이 있거나 기도할 때 세운다. 과거에 급제한 자가 자기 집 앞 또는 조상의 산소에 자기과시나 가문의 행운을 빌기 위해서도 세웠다.
솟대와 인연을 맺은 것은 이십오 년 전이다. 당시 ‘예술마당 솔’ 주최, 우리 것을 아는 모임에서 매달 한 번씩 유명 사찰과 문화재를 답사했다. 그때 우연히 장대 위의 얹혀있는 새의 조형물이 솟대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차츰 나는 솟대에 무시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사람들에게서 잊혀가는 솟대의 의미를 알리고 우리 고유의 소중한 전통문화를 계승해보고 싶어졌다. 모든 창작은 모방에서 시작된다고 했다. 전국의 솟대 전시회장으로 발품을 팔았다. 서울 종로 인사동 골목을 비롯해 솟대가 있다는 곳을 숱하게 찾아다녔다. 특히 전통 찻집에는 솟대의 소품들이 장식물로 많이 진열되어 있어서 더욱 관심이 커졌다.
솟대를 만들기 위해서는 새의 머리, 몸통이 있어야 한다. 새를 올려놓을 장대 또는 나뭇가지와 받침대도 필요했다. 주말이면 소재를 찾으러 이산 저산을 헤매느라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가시덤불에 긁혀 온몸은 전쟁터에 다녀온 사람 같다. 산을 헤집고 다니다 보니까 몸은 단단해졌다. 가끔 약초도 발견하니 일거양득으로 또 다른 즐거움이었다. 지천으로 널려있는 이름 모를 야생화도 바쁜 내 발목을 한참을 부여잡곤 놓아주질 않았다. 그때그때 사진을 찍어 이름을 알고자 인터넷을 뒤졌다. 노루귀, 개불알풀꽃, 뻐꾹채, 쥐오줌풀 재미있는 야생화 이름도 많이 알게 되었다. 솟대 소재로 가득 찬 배낭을 메고 집으로 돌아올 때는 배고픔도 잊었다. 집에 들어서자 나무꾼 아내가 되었다고 투정을 부렸다.
나의 유일한 작업실은 우리 집 아파트 베란다다. 시간이 날 때마다 작업실에 앉아 새의 머리와 몸통을 만들었다. 재료에 따라서 오리, 기러기, 까마귀, 학 등의 새가 만들어졌다. 솟대 만들기에 집중하다 보면 모든 번뇌와 걱정이 봄눈 녹듯 사라졌다. 나의 온갖 정성과 염원을 담아 만들어진 새를 나뭇가지에 올릴 때는 가슴마저 떨렸다. 어느 작품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있던가. 작품을 만들다 보면 마음에 들지 않아 몇 번이나 부수고 다시 만들기를 수차례 거듭하였다. 완성되는 작품마다 이름을 붙이고 수가 늘어날 땐 말할 수 없는 희열을 느낀다. 솟대 작품을 만들고 나면 항상 고사성어 ‘화룡점정畵龍點睛’이 떠오른다.
중국 양나라 때 장승요라는 화가가 안락사 절에 용 그림을 그린 후 용의 눈을 그리지 않았다. 용의 눈을 그려 넣자 용이 하늘로 날아갔다는 설로 제일 중요한 일은 마지막에 마무리하라는 뜻이다. 나도 새의 눈은 그려 넣지 않았다. 솟대를 전시하거나, 선물로 줄 때 그려 넣기로 하고 남겨 두었다.
한번은 학교 가을 축제 때 교사 작품 전시회코너가 있었다. 한 공간에 내가 만든 작은 솟대 열다섯 점을 전시했다. 옛날 내가 그랬듯이 솟대를 처음 대하는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많은 학생이 신기한 듯 관심을 가졌다. 남학생보다 여학생에게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서로 한 작품이라도 얻고자 다툼을 벌였다. 그 모습을 보고 ‘솟대상’을 만들어 성적 향상에 활용해 보자는 생각을 하고 부지런히 솟대를 만들었다. 분기별로 수학 성적이 많이 향상되었거나 제일 우수한 학생 두 명을 선발하여 솟대 작품 하나와 덕담을 담은 편지를 문제집과 함께 주었다. 그러다보니 언제부턴가 수학 선생보다 오히려 솟대 선생으로 통했다. 학생들이 작품 하나를 받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다는 말에 흐뭇함을 느끼기도 했다.
내가 남자고등학교 재직 당시 반 학생 중에 말썽부리던 학생이 있었다. 이틀이 멀다하고 사고를 치고 온갖 사건에는 안 끼는 데가 없고, 하루라도 조용히 넘어가는 날이 없었다. 내가 포기하면 이 학생은 끝이라는 생각에 수업이 끝나면 매일같이 불렀다. 어깨를 감싸 안으며 너도 마음만 바꾸면 잘할 수 있다고 격려하면서 희망의 솟대를 선물로 주었다. 그 이후 그 학생은 무사히 졸업을 하였다.
세월이 흘러 중년이 된 그 제자가 어느 날 나를 찾아왔다. 그때 받은 솟대를 보며 희망을 품고 열심히 살았다고 말했을 때 가슴이 뿌듯했다. 그 은혜를 잊지 못한다며 매년 스승의 날 꽃바구니를 보내온다. 별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학생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고 꿈을 가지도록 한 솟대였다. 취미 생활로 시작한 솟대 만들기가 나를 비롯한 주위 사람에게 희망이 되고, 나와는 끊을 수 없는 소중한 작품 연출이 되었다.
육십 중반이 넘은 지금도 시간이 허락되는 대로 작업실에 앉으면 마음이 그럴 수 없이 편안해진다. 솟대를 통해 순수한 우리 전통 문화유산이 전달되고 보존되었으면 한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작업실을 가득 메우고 있는 작품을 전시하려고 한다. 더 많이 알리고 한 점 한 점씩 소망을 담아 많은 사람에게 선물하고 싶다.
김진열 ---------------------------------------------
경남 창녕 출생, 경북대학교 자연과학대학 수학과 졸업, 중등 수석교사로 퇴직, 수필창작대학 수료, 수필사랑문학회 회원, 한국 시(詩) 터치 예술협회 이사.
당선소감
오랜 세월 교직 생활을 하고 퇴직한 나에게 글쓰기란 새로운 도전이었습니다. 더욱이 전공이 전혀 다른 수학에서 수필이란 낯설고 생경해서 힘든 작업이었습니다.
그러나 소중한 사람들과 좋은 인연으로 글쓰기에 몰입하게 되었고, 여린새싹을 돌보듯 세심한 가르침과 다독, 다상량, 다작하라는 충고의 말씀을 주시던 교수님이 계셨기에 오늘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시인 이상화 님의 <빼앗긴 들에도 봄이 오는가>가 생각납니다. 황금 돼지해를 맞아 분명 저에게도 연분홍 치마를 휘날리는 따뜻한 봄바람이 찾아왔습니다. 이 봄날에 매화의 청향 따라 신인상 수상이란 선물을 받게 되어 너무 기쁘며, 이 영광을 교수님과 수필사랑문학회 문우님들과 함께 나누고싶습니다.
아울러 언제나 내 편이 되어 진실한 조언과 용기를 북돋아 준 가족에게도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시작이 늦은 만큼 더 많은 노력으로 좋은 작품으로 보답하겠습니다. 부족한 글을 신인상으로 뽑아주신 심사위원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99B83A4D5C80793F04)
![](https://t1.daumcdn.net/cfile/blog/992D294D5C80794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