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곡은..
피난시절 부산을 오가는 배의 이별가로 1952년 만들어졌습니다.
작곡가는..
함흥에서 태어나 서울서 연희전문학교 정외과를 졸업했고
음악은 개인 지도를 받았답니다.
전쟁이 나자 제주도로 피난..
제주 농업고등학교에서 영어와 음악을 가르키고 있었는데..
매일 한번씩 피난민을 태운 배가 부산에서
제주항구에 닿으면 통곡항구로 변하고
먼저 와 있던 가족 친지를 찾는 눈물의 사연들..
그모습을 보며 한많은 이별의 사연을 곡으로 만들었습니다.
변훈씨는..
1952년 '명태' 초연시 평론가들의 혹평을 받고
충격으로 작곡을 포기 해 버리고.
외무고시를 처서 외교관으로 변신해 15년간 오선지를 멀리했답니다.
외교관 퇴임후 다시 작곡활동..
정열적이고 적극적이고 친절한 성격이며..
대학시절 테너로 활동한만큼 미성이었답니다.
대표곡으로..
명태, 한강, 오랜기도, 쥐, 설악산아, 님의침묵,
낙동강아, 목련 .. 등 50여곡이 있습니다.
그리고, 작사자는..
당시 작곡가와 같은 고교 국어 교사였고..
제주의 향토시인이었습니다.
작사자에게 시인 친구가 있었는데
기혼자로 제주에 피난와 살면서 처녀와 연애를 했답니다.
그것을 알아차린 그녀의 부모가 찾아와
강제로 배에 태워 부산으로 가 버리고 부둣가에서
배가 파도속에 점으로 보일때 까지 이별을 서러워 했다는
친구 시인(박목월)의 이별 장면을 읊은 시입니다
6.25 사변이 끝나가는 무렵에 한 사내가
난리를 피해 제주로 들어왔다.
얼마 후에 사내는 제주여인과 비련의 사랑에 빠졌다.
사내는 유부남이었고 여인네는 처녀였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안 처녀의 아버지는 분노했고
강제로 딸을 배에 태워 부산으로 보내버렸다.
사내는 부두에서 떠나가는 배를 보며 이루지 못할 사랑,
떠나가는 사랑을 보며 통곡을 했다.
이 장면을 옆에서 지켜보던 사내의 친구는
이 가슴 아픈 사랑의 장면을 시로 지어냈다.
사내의 친구는 시인이었고 교사였다.
친구는 다시 동료교사에게 이 시에 곡을 지어 붙이게 하여
바로 이 노래는 탄생되었다.
저 푸른 물결 외치는 거센 바다로 오! 떠나는 배
내 영원히 잊지 못할 님 실은 저 배는 야속하리
날 바닷가에 홀로 남겨두고 기어이 가고야 마느냐
터져 나오라 애슬픔 물결위로 오! 한된 바다
아담한 꿈이 푸른 물에 애끊이 사라져
나 홀로 외로운 등대와 더불어 수심 뜬 바다를 지키련다
제목은 '떠나가는 배',
양중해 시인이 작시하고 변훈 선생이 작곡한 노래로
이별의 정한과 제주의 정서를 가장 잘 담아낸 노래로
이 노래는 지금도 국민 애창곡 중의 하나이다.
2007년 4월에 작고한 양중해 선생은 화북동 출신으로
생전에 ‘파도’ ‘수평선’ 등의 시집을 남긴 시인이기도 했으며
평생을 교육에 몸 바친 교육자이기도 했다.
제주문화원장을 역임하기도 했으며 육지부 문인들과의 교류로
초기 제주문화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기기도 했다.
당시에 작곡자인 양중해 선생은 변훈 선생과 더불어
제주일중에 교직을 잡고 있다가 노랫말과 곡이 만들어져
‘떠나가는 배’는 탄생했지만 위에 서술한 배경으로 인하여
떠나가는 배를 작시하였다고 더러는 알고 있다.
그러나 일부분의 사실은 정확하지 못한 면이 있다.
양중해 선생의 친구로 나오는 사내는 박두진 조지훈과 더불어
청록파 시인으로 잘 알려진 시인 박목월이었고,
박목월과 사랑에 빠지는 제주처녀는 제주처녀가 아니라
박목월 시인을 따르는 여대생이었고,
한편으로는 박목월 시인의 제자라는 이야기도 있다.
박목월은 피난을 왔다가 제주처녀와 사랑에 빠지는게 아니라
사랑의 도피를 위해 제주에 찾아온 것이다.
당시 박목월 시인은 자식 셋과 부인이 있는
30대 후반의 유부남이었고,
처녀는 20대 초반의 묘령이었다.
박목월 시인이 ‘H양’이라고 알려진 처녀와
처음으로 대면하게 된 것은
피난처인 대구에서 그가 기숙하던 집의 딸로서
명문대생이었다고 한다.
시인과 문학소녀의 만남이었지만 환도 후에
다시 우연히 재회하여 만남을 가지게 됨으로서
처녀의 가슴에는 사랑의 싹이 트기 시작했던 모양이다.
이를 눈치 챈 박목월 시인은 후배를 시켜
이를 말리게 했으나 처녀는 듣지 않았다.
그리고 몇 달 후에 둘의 모습은 보이지 않게 되었다.
사라졌던 박목월 시인과 처녀는 제주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둘이 거처를 잡았던 곳은 제주시 칠성통 부근의
동화여관이었다고 한다.
박목월은 대학에서 시간 강사 자리를 잡았고
여관방에서는 동료 지인들이 모여들어
자주 시 낭송회가 열렸다고 한다.
처녀는 박목월 시인을 선생님이라 호칭했고,
호리호리한 몸매에 자주 병을 앓았다고 한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자 멀리서부터
이 여관으로 한 손님이 찾아왔다.
박목월 시인의 아내 유익순 여사였다.
부인은 박목월과 처녀의 겨울옷 두 벌이 든 보따리와
생활비가 든 돈봉투를 놓고는 말없이 가버린다.
부인의 이런 행동에 박목월은 잘못을 뉘우치게 되어 처녀를 돌려보내고
서울로 돌아간 박목월은 바로 집으로 귀가하지 못하고
두어 달 정도 하숙 생활을 하다가 귀가했다고 한다.
그러나 박목월은 부인 때문에 집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다.
아마도 서울에서 하숙 생활을 했다는 두어 달의 기간도
제주에서 지낸 기간으로 보인다.
이런 착오는 누군가가 박목월 시인의 사랑 이야기를 글로 쓰면서
박목월 시인의 체면을 고려한 구성으로 보여진다.
사랑의 도피가 길어지자 다시 멀리서부터 한 손님이 찾아온다.
이번에는 처녀의 아버지였다.
처녀의 아버지도 쉽게 이들을 갈라놓지 못할 정도로 둘의 사랑은 깊었다.
일설에는 처녀의 아버지가 박목월을 나무에 묶어놓고
매질을 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확인할 길은 없다.
다만 박목월이 이별을 완강하게 거부한 것과
처녀의 아버지도 그냥 포기하고 돌아서지는 않으리란 것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처녀의 아버지가 찾아온 3일째 되는 날에야 비로소 이별은 결정된다.
그만큼 이별은 힘든 결정이었을 것이다.
가을에 와서 떠날 때가 유채꽃 피는 봄이었으니 6~7개월 정도 머문 셈이다.
처녀가 떠나가는 부두에는 박목월 외에도
양중해 선생과 여관집 아들도 끼여 있었다.
시인과 처녀 사이에는 아무 말도 없었다고 한다.
양중해 선생은 떠나가는 배를 쳐다보던 박목월 시인의 처연한 표정을 보며
그 아픈 사랑의 ‘떠나가는 배’를 썼다.
이별의 아픔으르 직접 겪었던 시인도 그 아픔을 시로 시로 만들어 내었다.
박목월 시인의 '이별의 노래'는 그 아픈 사랑의 결과물이다.
기러기 울어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도 싸늘불어 가을은 깊었네
아아 아아 나도 가고 너도 가야지
한낮이 끝나면 밤이 오듯이
우리의 사랑도 저물었네
아아 아아 나도 가고 너도 가야지
산촌에 눈이쌓인 어느날 밤에
촛불을 밝혀두고 홀로 울리라
아아 아아 나도 가고 너도 가야지
박목월은 백발이 된 말년에 옛 사랑의 주인공의 집을 방문했다고 한다.
어쩌면 인생의 마지막 숙제를 해야 한다는 의무감이었을지 모른다.
그 자리에서도 간단한 인사 외에 둘은 말이 없었다고 한다.
붉은 홍차 한 잔과 담배 한 대,
그리고 다시 찾아온다는 인사의 말은 영원한 작별의 말이 되었다.
'떠나가는 배’는 전쟁통이라는 유폐의 시간에 불안한 영혼들이
제주도라는 유폐의 땅으로 모여 서로 따듯이 몸 부비며 만들어졌다.
박목월은 78년, 작곡자 변훈은 2000년, 작시자 양중해는 2007년에
세상을 떠 노래의 주인공들은 아무도 남아있지 않지만
노래는 우리 가슴에 남아있다.
이별의 정서에는 기차역보다는 부두가 어울린다.
부두의 이별은 순식간에 오지않고 천천히 오고 천천히 떠난다.
배가 부두를 벗어나 수평선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이별의 아픔은 천천히 그러나 아프게 별리자의 가슴을 후빈다.
사람의 삶 중에 가장 뜨게운게 사랑이고 사랑의 일 중에
가장 뜨거운 것이 이별이다.
이별의 정한에 가장 어울리는 노래가 바로 ‘떠나가는 배’이고,
이별의 장면에 가장 어울리는 곳이 제주부두이다.
‘떠나가는 배’의 노래비는 제주부두와 탑동공원에 서있다.
제주부두의 노래비는 아직도 그 때의 아픔을 잊지 못하는 듯 검은 색이다.
양중해 시인의 노래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