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 [산문의 시] 2024. 신년호 평설
이미성의 「도시철도 1호선에서」
서태수
수필 미학의 필요충분 다섯 조건은 ‘구성, 제제, 표현, 주제, 서정’이다. 이 중 작가마다 강조점은 다르겠으나 문학은 시간예술이므로 낯선 독자를 위한 친절한 배열이 급선무이다. 수필 양식은 산문이기에 다양한 화소(話素)의 효과적 연결고리를 위한 ‘구성’이 기본이다.
이미성의 수필 구성은 매우 정교하다. 특히 「도시철도 1호선에서」(2023. 『내 안에 공룡이 산다』)는 동일 공간에서 개성적으로 포착한 차별적인 화소들의 다원적 구성이 현란하다. 형식상으로는 옴니버스(Omnibus)식 구성이면서도 내용상으로는 피카레스크(Picaresque)식 구성법을 혼용하고 있다. 특히 ‘인생의 목적지’라는 주제를 수미상관(首尾相關)으로 연결시킨 집중성이 견고하다. 이는 수필 미학의 구성법에 대한 다채로운 방법론을 작가가 인지하고 있음의 방증이다. 전체 구조는 <기승전결>의 4단 구성법으로 분석할 수 있겠다.
“알쏭합니다.”로 시작한 <기> 부분에서 ‘출발지이면서 목적지’를 왕복하는 양상을 ‘뫼비우스의 띠’로 비유하면서 인생론적 주제를 견인하고 있다. “현자는 목적지를 가지라고 조언”하지만 그것이 “알쏭합니다.”라고, 이미 주제를 직설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도입이다. 다만 독자는 끝까지 읽어야 작가의 깊은 의도를 이해하게 될 것이므로 첫 문장은 의미망으로 보아 소설 기법의 복선(伏線) 같은 문장이다.
<승> 부분에서는 화소 연결고리가 동적이다. 사람 1-5까지의 화소에서는 가까이 또는 멀리 연결되는 인간관계의 확장으로 주제 의식을 심화시킨다. 사람 6-9 화소에서는 인간사의 사소한 부대낌의 애환을 드러내고 있다.
사람 10-13은 <전>에 해당된다. 목적지 ‘종착역’을 이끌어내는 전환의 성격을 지녔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개 기법은 매우 세련된 구성 감각이다.
<결>에서는 목적지 장전동역에서 내려 정형외과를 찾아 ‘고해 인생’에서 겪어야 하는 당연한 ‘통증 치료’를 한다. 그리고 다시 도시철도 1호선을 타지만 목적지도 경유지도 하단이 아니다. 이 부분은 매우 암시적이라 흡사 잠언 같기도 하지만 “어쩜 나는 목적지를 잃었을지도 몰라요.”라는 직설로 독자를 친절하게 주제 속으로 스며들게 한다.
구성 이외에 눈여겨보아야 할 점은 표현의 미세한 미감(美感)이다. 도입에서는 “지금, 내 목적지는 장전동역입니다.”에서 인생의 경유지와 목적지의 가변성을 담아 쉼표까지 찍은 ‘지금,’이라는 시점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시간이 가슴을 잠재웠을까요.”도 재미있는 표현이다.
마무리에서 ‘하단’이 환기하는 의미도 중요하다. 하단(下端)은 낙동강의 끝자락이다. 그러나 지금은 매립되어 사람의 물결로 넘치는 곳이 되었다. 일천삼백 리 도도한 낙동강의 역사 상실의 현장이다. 낙동강은 흔히 영남의 젖줄이라고 한다. 재첩도 사라진 낙동강의 젖줄이 뭉개졌음을 상기시킨다. 경유자와 목적지 혼돈의 현대인이 엮어내는 인생 역정도 낙동강 역사처럼 매몰 혹은 망각되는 가치 혼돈의 의식을 드러내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도시철도 1호선에서」는 포착한 제재의 재해석을 통한 의미의 심화 확장, 비유적 암시를 통한 의미의 다원성까지 문장 속에서 조곤조곤한 경어체로 자연스럽게 용해시킨 단단한 필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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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본> 도시철도 1호선에서
이미성
알쏭합니다. 도시철도 1호선 출발지는 다대포해수욕장역인가요, 노포동역인가요. 출발지이면서 목적지이기도 하군요. 뫼비우스의 띠처럼 하나이면서 또 다른 경계를 갖는 인생 같습니다. 현자는 목적지를 가지라고 조언합니다. 누구나 목적지도 있고 경유지도 있다고 해요. 나도 목적지가 있는 듯해요. 지금, 내 목적지는 장전동역입니다.
오전 10시 하단역에서 도시철도 1호선을 탑니다.
사람 1, 사람 2가 조금 떨어져 앉아있어요. 사람관계란 늘 가까울 수 없어요. 적당히 거리를 두는 것이 훨씬 좋은 관계일 수도 있거든요.
사람 3과 사람 4는 아는 사입니다. 다정하게 귀엣말을 나눕니다. 서로 바라보는 시선에 애틋함이 묻어납니다. 나도 그럴 때가 있었던 것 같아요. 한때 그는 존재만으로 가슴이 뛰는 사람이었지요. 귀찮기도 하고 짐스럽기도 하고 한편 안쓰럽기도 해요. 식사와 화장실 습관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지요. 아귀같이 입을 벌려 하품을 하고 고무줄 늘어진 바지를 입어도, 주름진 민낯마저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었네요. 시간이 가슴을 잠재웠을까요.
사람 5가 서대신동역에 타서 사람 1과 사람 2 사이에 앉습니다. 결혼은 나와 그의 결합뿐 아니라 그 사이에 있는 사람들과도 유대관계를 맺는 것인데요. 나와 그 사이에 다른 사람들이 끼어들어 인생을 돌아온 기분이 듭니다. 사이에 낀 관계가 불편하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생각을 바꿨으면 좋았을 텐데. 그땐 나도 젊었고 뭐든 처음이어서 서툴기만 했어요. 관계에 틈이 생기고 느슨해지면서 회한도 깊어지네요. 역시 해결은 시간일까요.
사람 1과 사람 5는 스마트폰을 들여다봅니다. 작은 기계 속의 세계는 마약처럼 외롭고 슬프고 때로 잔인해요. 나도 없고 그도 없는 철저히 타인의 세계지요. 그가 내 시간을 이리저리 끌고 갑니다. 사회가 만든 커리큘럼에 따라 노예처럼 살고 있는 건 아닐까요.
사람 2가 졸고 있네요. 문득 나도 하품이 납니다. 더러 지루한 삶이기도 해요. 다람쥐 쳇바퀴 같은 삶 속에서 앞을 모르고 뛰면서도 권태로운 순간이 있다는 건 놀라워요. 『이방인』의 뫼르소가 이런 순간 권총을 쏘지 않았을까요.
언제 어디에서 내렸는지 사람 3과 사람 4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네요. 내 할머니도, 아버지도 기약도 없이 가셨지요. 누군가의 시선에서 나도 그렇게 사라지겠지요. 지금도 시선 밖으로 걸어가는 중인걸요.
사람 7이 좌석에 앉으려다가 사람 6을 쳤습니다. 사람 6이 아프다고 고함을 지릅니다. 사람 7이 살짝 쳤는데 뭐 그리 아프냐고 샐쭉거립니다. 사람 9가 조용히 하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사람 8이 눈을 흘기며 부랴부랴 내립니다.
세상은 늘 시끄러워요. 오늘도 불이 나고 홍수가 나고 지진이 났는데요. 뉴스는 매일 새로운 듯 같은 싸움을 보도하지요. 예를 들면 어제는 아이와 아빠가 싸웠고 오늘은 위층 사람과 아래층 사람이 치고받다가 119를 불렀다는 식이에요. 남쪽에는 때아닌 눈이 오고 북쪽에는 꽃이 핀다고도 해요. 국회는 자기들끼리 전쟁을 하다가 결국 국민을 위한 시간은 낼 수 없을 거라는 소식도 있지요. 그동안 물가는 계속 올라갈 거래요. 또 누군가는 죽겠지요.
사람 10, 사람 12, 사람 13이 몰려 들어옵니다. 서 있던 사람 11이 사람 8이 앉았던 좌석에 앉습니다. 바로 이어폰을 꽂고 눈을 감습니다. 아주 멀리 갈 것처럼. 아마 종착역까지 갈지도 모르지요. 그때까지는 그 좌석에 안주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러나 종착역이 목적지일까요. 세상에 내 것은 없을지도 몰라요. 잠시 빈 의자에 내 것처럼 앉았다 가는 인생 아닐까요.
나는 장전동역에서 내립니다. 유명한 정형외과에서 예약 없이 기다립니다. 기다림은 항상 환자 몫이니까요. 아픈 어깨가 정말 괜찮아지고 있는 건지 고개를 갸우뚱거립니다. 비수술적 진료로 용하다는 소문을 믿고 새벽부터 줄 서서 기다리는 사람 1,2,3,4...... 몸이 아파 마음까지 아픈 사람들은 누구의 눈에는 희극입니다. 의사는 노화를 받아들이고 웬만한 통증은 친구하며 살라고 말합니다. 인생은 고해라고 했으니 통증쯤이야 당연할지도 몰라요.
다시 도시철도 1호선을 탑니다. 목적지는 하단이 아닙니다. 경유지도 하단이 아닙니다. 이미 강은 매립되어 버린 걸요. 아파트가 숲을 이룹니다. 이름만 남은 강의 역사는 아파트 밑에서 깊이 잠을 잡니다. 언젠가는 기억에서도 멀어지겠지요. 더 이상 재첩도 길어 올릴 수 없는 빈 젖꼭지가 된 모성입니다.
이번에는 부산역에서 내립니다. 다른 길로 돌아가야 할까요. 어쩜 나는 목적지를 잃었을지도 몰라요.
누군가 입맛 다시는 김밥 같은 길 위에 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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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크---
황공합니다.
역시~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