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3일 국민소통운동본부 CCCC
소통 !
여러분의 고견과 댓글로
대한 국민<가족> 소통 운동에 적극 동참을 소망합니다 !
박근혜정부에서는 동서남북 소통행정<소통정치>를 하실 줄 압니다.
<<미래창조과학기술부 소관 주관하에>>.
"인연을 소홀히 하면
내생에 악연이 되어 다시 만난다.
오다가다 옷깃만 스쳐도 만남은
삼백생의 인연이요,
같은 좌석에 앉아 대화를 하면
오백생의 인연이요,
같은 솥의 밥을 먹으면 칠백생의 인연이라..
같을 피를 나누면 구백생의 인연이요,
부부로 만나는 것은 천생의 인연이니라.......
금생의 인연이 참으로 중하니
어떠한 인연이라도 소홀히 해서는 안될 것 이니라...
- C C C C -
평택 소통 김 평 탁
8월 13일
오늘의 역사
① 이태조 수도를 한양으로 결정(1392) : 이조를 세운 이성계는 국가의 체모와 민심의 일신을 위해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 지시, 새 도읍지를 물색, 한양 ․계룡산 ․모악남(母岳南) 중 한양으로 결정했다.
⇨7월 17일.
② 재일교포 북송에 관한 협정 조인(1959) : 8월 13일 북한과 일본 정부가 인도의 캘커타(Calcutta)에서 '재일교포북송에 관한 협정'에 정식 조인했다.
간단히 ‘칼커터 협정’이라고도 한다.
3개월 후인 1959.11.12부터 발효, 이를 매년 연장해 오다가(150여차, 8만 7천여명), 1966.8.23 일본 정부의 의결에 따라 1967.11.12로서 폐기되었다.
재일교포북송 문제가 처음으로 대두되기 시작한 것은 1955년 2월이었다.
당시 북한은 6․25전쟁에 따른 노동력 부족을 이유로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계 재일교포들의 귀환을 추진하면서 귀환자들의 생활을 최대한 보장하겠다는 입장을 대내외에 알렸다.
그 무렵 일본도 인구증가와 각종 사회․경제 문제에 대한 해결방안을 모색하던 중이었으므로 양측의 이해관계는 서로 일치했고 협상은 급진전되었다.
이에 대해 한국에서는 재일교포북송 반대시위가 잇달았으며 외교 활동도 다각적으로 전개되었다.
이러한 한국내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본에서는 1958년 11월 17일 재일조선인귀국협력회가 결성되는 등 북송을 실현시키기 위한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마침내 북한과 일본 정부 간에 협정이 조인되었고, 1959년 12월 14일 975명의 북송재일교포 제1진이 니가타 항[新潟港]을 출발한 것을 시작으로 동(同) 협정의 만료시한인 1962년 11월 12일까지 7만 7,288명의 재일교포가 북송되었다.
이후 기한이 연장되어 북송이 계속 진행되었으나, 북송교포의 비참한 생활상이 알려지면서 그 수가 급감해 북송사업은 종결된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③ 토지조사령 공포(1912) : 조선총독부, 토지조사 사업의 절차와 시행 방법 등을 규정한 것.
토지조사사업은 농업사회였던 당시 조선의 사회구조를 식민지형으로 개편하기 위해 일제가 가장 먼저 착수한 작업.
이 사업은 대규모의 총독부 소유 토지를 만들어내고 지세(地稅) 수입을 늘리기 위한 것이었으며, 경작권, 부분소유권 등 토지에 대한 농민들의 권리를 부정하고 지주의 소유권만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토지조사사업이 끝났을 때 총독부 소유지는 전국토의 50.4%에 이르렀고, 지세 수입은 2배 가까이 증가했으며, 일제는 토지에 대해 존재했던 여러 권리중 지주의 권리만을 인정함으로써 조선인 지주들을 식민지 통치의 지지세력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1912년 8월12일, 조선총독부가 토지조사령을 내렸다.
전문 19조, 부칙 2개항으로 이뤄진 토지조사령의 목적은 소유관계 조사. 땅 주인을 파악하자는 것이다.
토지조사를 위해 일제가 동원한 인원만 연 15만2,600여명. 돈도 요즘 가치 3,978억원에 해당되는 2,040만엔을 투입했다.
일제는 왜 조선 땅을 샅샅이 뒤졌을까. 식민지 수탈을 위해서다. 1918년 끝난 토지조사 결과 실측된 경지면적은 434만2,091정보. 1910년 추정치 239만9,812정보보다 80.9%나 늘어난 새 땅의 대부분이 조선총독부와 동양척식회사, 일본 농업자본, 거대 지주의 몫으로 돌아갔다.
반대로 농민들은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
근대적 토지제도에 대한 몰이해와 일제 시책에 대한 반발로 조사에 응하지 않은 농민은 소유권을 빼앗겼다.
더 큰 문제는 대대로 누려온 경작권의 상실. 모든 땅은 본 주인은 임금이라는 왕토(王土)사상 아래 양반이나 지주라도 임금으로부터 수조권(收組權), 즉 사용료 징수권을 위임받은 데 불과할 뿐 경작권은 농민에게 있다는 토지제도의 근간이 무너져 농민은 노예적 신분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전체 농가의 79.6%에 달하는 소작ㆍ자소작 등 영세농민들은 경작권뿐 아니라 개간권마저 잃었다.
황무지를 일궈 자영농이 될 기회마저 원천봉쇄당한 농민들의 선택은 유랑. 30만가구의 농가가 고향을 등지고 만주로 떠났다.
반면 재산권을 보장받게 된 지주층은 더욱 부유해지고 친일집단으로 변해갔다.
토지조사에 따른 반사이익이 친일세력 확산으로 이어진 셈이다. 오늘날에도 일제토지수탈의 흔적은 여전하다. 독도 면적의 350배에 이르는 땅이 총독부나 일본인 명의로 남아 있다.
친일파 후손들은 시장논리를 들먹이며 조상 땅 찾기에 열을 올린다.
(서경.2007.권홍우 편집위원)
④ 한총련 연세대 점거 시위(1996) : 1996년 오늘!
전국의 대학생 5천여명이 서울 연세대학교에서 밤샘농성에 들어갑니다.
한총련 즉 한국 대학총학새회연합이 통일 대축전 행사에 북한대표를 초청하기로 한데 대해 정부가 이적행위로 규정하면서 행사를 원천봉쇄했기 때문입니다.
통일 대축 전야제를 벌인 학생들은 다음날 범청학련 베를린 공동사무소와 함께 정부가 불허한 남북해외청년학생 연석회의를 강행합니다.
경찰 6천여명을 동원해 시위학생검거와 해산작전에 들어갔지만 학생들은 투항을 거부합니다.
연세대 검거 시위 6일째, 경찰은 또다시 병력을 투입하고 음식물 반입을 차단하는 압박작전을 펼칩니다.
사흘 뒤인 8월 20일 경찰이 헬기로 최루탄을 살포하고 2쳔여명의 경찰력을 대학 건물에 투입하자 학생들은 결국 투항의사를 표시하면서 사태는 일단락됩니다.
한총련 사태로 5,848명이 경찰에 연행돼 462명이 구속됐고 3쳔여명이 불구속 입건됐습니다.
이 가운데 222명이 구속기소되면서 단일사건으로는 사상 최대 인원이 사법처리되는 기록을 남기기도 합니다.
⑤ 배용균 감독의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 제42회 로카르노 국제영화제에서 대상 수상(1989) : 신예 배용균 감독이 제작촵연출한 극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 1989년 8월 13일 스위스에서 열린 제42회 로카르노 국제영화제에서 최고상인 금표범상을 수상, 한국 영화 70년 사상 처음으로 세계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차지하는 쾌거를 기록했다.
11개국 18편이 본선에 오른 경쟁부문에서 '달마가...'는 대상을 비롯, 청년비평가상(2위), 기독교평론가상, 최우수작품상, 국제기자협회상(1위), 바크리상(2위) 등 특별상 4개부문도 휩쓰는 기염을 토했다.
세계 8대 영화제의 하나로 꼽히는 로카르노 국제영화제는 1-2편을 연출한 신인영화감독들만을 대상으로 역량을 평가하는 전통깊은 세계무대 등용문이다.
1951년 대구 출생인 배용균 감독은 서울대 미대를 거쳐 프랑스 파리대 대학원에서 조형예술학 박사학위를 취득후 대구 효성여대 서양학과 교수로 재직중이었다.
파리유학시절부터 세계영화제에 진출, 그랑프리를 거머쥐겠다는 집념을 불태워 왔다는 그는 이번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8년의 정열을 쏟아부었다.
⑥ 전투부대 베트남 파병안 국회 통과(1965) : 1965년 오늘 전투부대 베트남 파병안이 국회에서 심의된다.
야당 의원은 한명도 참석하지 않은 채 여당인 공화당 소속 의원들만이 표결에 참여한다.
출석 의원 104명 가운데 101명이 찬성함으로써 전투부대 베트남 파병안이 통과된다.
베트남 파병과 한일협정에 대한 반대운동을 벌여온 야당 의원들은 모두 사퇴서를 내고 이날 표결에 참가하지 않았다.
전투부대 파병안의 국회 통과로 같은 해 10월 9일 청룡부대가, 11월 20일에는 맹호부대가 베트남에 도착한다.
이듬해 4월 16일 혜산진부대가, 8월 15일에는 백마부대가 베트남에 상륙함으로써 우리 나라는 미국 다음 가는 베트남 파병국이 된다.
⑦ 영화 ‘청춘행로(靑春行路 ; A Journey of Youth) ’ 개봉(1949) : 부호의 아들과 결혼한 시골처녀의 이야기를 그린 한국영화.
감독 장황연
제작 정운용
원작 김춘광
각본 장황연
주연 황정순, 강계식, 오향문, 주선태
상영시간 40분
제작사 정운용프로덕션
제작년도 1949년
[본문] 1949년 정운용프로덕션이 제작비 50여만 원을 들여 제작하였다.
장황연(張晃演)이 감독하고 황정순(黃貞順)․강계식(姜桂植)․오향문(吳鄕文)․주선태(朱善泰) 등이 출연하였다.
40분 분량의 16mm 작품으로, 1949년 8월 13일 서울극장에서 개봉하여 10만 여 명의 관객을 동원하였다.
1958년 박영환(朴永煥)이 감독하고 최은희(崔銀姬)가 주연을 맡은 《촌색시》로 재영화화 되었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부잣집 아들 계식은 대학친구 향문의 고향으로 등산을 갔다가 길을 잃는다.
그 때 우연히 향문의 동생 정순이 나타나 길을 안내해 준다.
이 일을 계기로 두 사람은 결혼하게 된다.
결혼 뒤 계식은 미국유학을 떠나고 혼자 남게 된 정순은 익숙지 못한 도시생활과 시댁의 학대를 견디다 못해 정신병에 걸려 친정으로 돌아온다.
귀국한 계식은 향문으로부터 그 동안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정순의 정신병을 치료한 뒤 다시 행복한 가정을 꾸민다
⇨1월 12일.
⑧‘명성황후 생가’성역화사업 준공식(2008) : ⇨ 7월 10일(‘명성황후 생가’ 경기유형문화재 제46호 지정).
****감고당(感古堂) [요약] 경기도 여주군 여주읍 능현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목조건물로 본래 서울 안국동에 있던 것을 이전·복원한 것이다.
소재지 경기도 여주군 여주읍 능현리
건립연도 조선시대
건립자 조선 숙종
건축양식 목조건물
[본문] 조선시대 제19대 숙종이 인현왕후(仁顯王后)의 친정을 위하여 지어준 집이다.
인현왕후의 부친인 민유중(閔維重)이 살았으며, 인현왕후가 폐위된 후 이곳에서 거처하였다.
이후 대대로 민씨가 살았으며, 1866년(고종 3) 이곳에서 명성황후가 왕비로 책봉된다.
왕비로 책봉된 명성황후는 과거 인현왕후의 일을 회상하여 '감고당(感古堂)' 이란 이름을 붙였다.
본래는 서울 안국동 덕성여고 본관 서쪽에 있던 것을 도봉구 쌍문동 덕성여자대학교 학원장 공관으로 옮겼으며, 이후 여주군의 명성황후 유적 성역화 사업에 따라 경기도 여주군 명성황후의 생가 옆으로 이전·복원되었다.
(두산백과사전.2008)
********명성황후기념관(明聖皇后紀念館) : [요약] 경기도 여주군 여주읍 능현리에 있는 역사기념관이다.
[본문]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아 올바른 역사관을 정립하고자 건립하였으며 명성황후(明聖皇后, 1851~1895) 생가 맞은 편에 있다.
전시실은 면적 520㎡로 명성황후와 고종의 어진 등의 유물·같은 시기에 활약하였던 여흥민씨들의 유물과 관련 자료들을 전시한다. 기념관 주변에는 주차장과 공중화장실·연못 등 편의시설이 있고, 앞마당에는 명성황후의 자주정신과 개화사상을 추모하기 위한 조각공원이 있다.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조화를 이루고 있어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다.
설날과 추석 당일을 제외하고 연중 내내 개관한다.
(두산백과사전)
*********************명성왕후(明成皇后 ; 1851.9.25 - 1895(조선 고종 32).10.8(음8.20)) : 민비.
본명은 민자영
⇨ 8월 20일(을미사변)(시해).
⇨ 10월 8일(기일).
⇨ 9월 25일(생일).
⇨ 3월 6일(고종명성후가례(高宗明成后嘉禮))
⑨ 일본 총리, 신사참배(2001) :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가 2003년 오늘 야스쿠니 신사를 전격 참배했다.
고이즈미 총리는 정부 여당 간부들과 최종협의를 거친 뒤 애초에 공언했던 15일보다 이틀 앞서 이날 오후 4시 30분 신사참배를 강행했다.
현직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한 것은 1996년 하시모토 류타로 당시 총리 이후 5년 만이다.
한국과 중국은 총리의 신사참배가 일제의 태평양전쟁이 주변국에 끼친 고통과 피해를 무시하고 전쟁을 정당화하는 것이라고 강력하게 비난했다.
⑩ 영국 수상비행기 시험비행(1931) : 1931년 오늘 영국의 남부해안 한 영국 공구조종사가 수상비행기를 몰고 시험비행에 나섭니다.
1911년에 개발된 수상비행기는 1920년대까지 가장 빠른 비행기였습니다.
물과 육지 어디든지 이착륙이 가능한 수상비행기는 제2차 세계대전당시 영국 공군기의 주력기였던 스피드 화이어(spitfire)기의 모델이 되기도 합니다.
⑪ 베를린 장벽설치(1961) : 동서냉전의 상징 베를린 장벽.
1961년 오늘
동서 베를린의 경계선인 브란덴부르크문에 처음으로 철조망이 설치됩니다.
베를린장벽의 시작입니다. 서독으로 넘어가는 동독의 기술자와 지식인들을 막기위해 설치된 베를린 장벽.
철조망만 설치됐던 장벽은 이후 콘크리트 장벽과 고압선까지 설치됩니다.
1990년 독일의 통일로 베를린 장벽은 설치된 지 29년만에 붕괴됩니다.
****먼동이 트기 전, 동독 군인들이 동서 베를린의 경계선에 철조망을 치기 시작했다.
일요일을 맞은 시민들이 새벽 단잠에 빠져 있을 때였다.
날이 밝자 베를린 시민들은 눈앞에 펼쳐진 철책에 경악했다.
베를린을 동서로 갈라놓은 장벽은 이렇게 예고 없이 설치됐다. 1961년 8월 13일. 독일의 분단 역사가 시작된 날이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독일은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등 연합군의 분할 통치를 받게 됐다.
수도 베를린 역시 4개국이 분할 점거했다.
하지만 미국과 소련의 ‘냉전’으로 독일은 동서로 갈라지게 됐다.
시장경제의 서독과 소비에트식 계획경제의 동독, 두 개의 정권이 들어서게 된 것.
분단이 고착화하면서 동독인들은 서독 사회를 열망했다.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번영을 찾아 서독으로 넘어간 동독인들이 1948년부터 10여 년간 300만 명을 육박했다.
하루 1000여 명꼴로 동독을 빠져나간 셈이다.
위기감을 느낀 소련은 동독 정부에 출입 봉쇄를 요구했다.
결국 베를린을 동서로 가르는 45km의 철책이 만들어졌다.
철조망은 나중에 3.6m 높이에 155km에 이르는 거대한 콘크리트 장벽으로 바뀌었다.
장벽이 들어서면서 동서 베를린 간 이동은 전면 금지됐다.
갈수록 베를린에는 일촉즉발의 위기감이 높아갔다.
1963년 6월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은 냉전의 최전선으로 달려갔다.
그곳에서 그는 ‘나는 베를린 시민이다(Ich bin ein Berliner)’라는 명연설을 남겼다.
“베를린 장벽은 공산주의 체제 실패를 가장 명백하게 보여 주고 있다.
베를린 장벽은 가족을 흩어지게 하고, 함께 살고 싶은 사람들을 떼어 놓았다.
이는 역사와 인륜에 대한 모독이다.”
베를린 장벽은 1989년 11월 장벽이 붕괴될 때까지 28년간 냉전의 상징이자 분단의 상처로 남아 있었다.
소련의 해체와 함께 무너진 베를린 장벽은 우리에게 남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우리에겐 아직도 ‘분단의 장벽’이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통일을 염원하며 휠체어로 유럽 일주에 나섰던 뇌성마비 1급 장애인 최창현(42) 씨의 목적지도 베를린 장벽이다.
이틀 후면 1년 3개월간의 대장정을 마무리한다.
최 씨는 불편한 몸으로 휠체어를 끌며 말했다.
“광복절인 15일 베를린 장벽 앞에서 통일을 기원하고 싶습니다.”
(강혜승 기자 fineday@donga.com .2007)
⑫ 미국 여배우 패트리샤 닐 출산(1965) : 영화 "허드(Hud)"로 1963년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은 미구의 여배우 패트리샤 닐이 1965년 오늘 다섯번째 아이를 출산합니다.
6개월전 뇌일혈로 쓰러져 걷지도 말하지도 못했던 패트리샤 닐.
강한 의지로 병을 극복하고 건강한 아이를 출산해 팬들에게 또 다른 감동을 안겨주었습니다.
⑬ 영국 이색 다이빙 경기(1972) : 1972년 오늘 영국의 한 마을에서 독특한 다이빙 경기가 벌어집니다.
갖가지 날개를 달고 강물로 뛰어든 선수들. 해뜨는 날보다 흐린날 많은 영국에서는햇볕이 좋은 날이면 뭔가 색다른 놀이가 시도됩니다.
베트맨과 그의 친구 로빈도 다이빙에 도전합니다.
선수들의 다이빙 솜씨는 형편없지만 의상만은 사람들이 눈길을 끌기에 충분합니다.
⑭ 니벨룽겐의 반지 : 무대 축전극. 1876.8.13, 14, 16, 17 등 4일간에 걸쳐 개최해서 대 성공을 거둔 것.
바그너는 여러 곳에서 가극장 지휘자로 활약하며 실력을 키우고 도이치 제일의 가극 작곡가가 되었다.
1876년에 자신의 작품만을 공연할 수 있는 전문 공연장인 바이로이트 축전극장을 당시의 국왕인 루드비히 2세의 후원을 얻어서 건축하고 그 낙성식 기념 공연으로 이 대작을 개최한 것이다.
바그너는 처음에는 오페라(가극) 작품을 많이 작곡했는데 나중에는 종래의 가극을 「악극」이라는 새로운 형태로 바꾸어 작품을 썼으며, 악극의 이념을 구체화하기 위하여 아예 대본부터 자신이 쓰고 작곡을 했다고 한다.
음악과 연극의 동작이 일체화되기 위하여 자신이 설계한 축전 극장을 지었기 때문에 현재에도 바그너 작품의 완전한 상연을 보기 위해서는 바이로이트 음악제에 직접 가서 구경을 해야 하는 것이다.
⑮ 개신교 첫 ‘종교적 살인’(1553) : 모든 스페인 사람의 내면에는 돈키호테의 면모가 감춰져 있다고 한다.
끊임없는 모험과 도전정신, 천재적 번뜩임과 기묘한 과대망상, 그러면서 모든 사람에게 맞서 독단적 싸움을 벌이다 어느 순간 경박한 사기꾼으로 전락하고 마는 라만차의 기사….
스페인 출신의 자유주의 신학자 미카엘 세르베투스(1511∼1553)야말로 그런 뜨거운 피와 불안정한 정신의 소유자였다.
천문학 기상학 지리학 법학 수학 해부학 의학 등 그의 관심 분야는 끝이 없었다.
특히 의학과 신학 분야에선 뛰어난 천재성을 드러냈다.
열다섯 살 때부터 종교재판을 피해 유럽 곳곳을 떠돌아다니던 그는 ‘신학의 기사’로서 당대의 모든 성벽과 풍차를 향해 덤벼들었다.
종교적 광신의 시대에 그는 감히 삼위일체와 유아세례를 ‘악마의 교리’라고 부인하며 가톨릭과 개신교 모두 틀렸다고 선언했다.
도망자 신세가 된 그는 자신의 믿음을 누군가에게 편지로 털어놓고 싶었다.
불행히도 그 상대는 장 칼뱅(1509∼1564)이었다.
가톨릭의 교조주의에 맞서 관용의 정신을 외쳤던 칼뱅. 하지만 그는 ‘제네바 신국(神國)’의 통치자가 된 뒤 불관용의 화신이 되어 있었다.
칼뱅은 보관해 오던 세르베투스의 편지를 대리인을 통해 가톨릭 종교재판소에 넘겼다.
자기 손을 더럽히지 않고 가톨릭을 이용해 ‘이단자’를 제거하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세르베투스는 감옥에서 도망쳤다.
1553년 8월 13일, 세르베투스는 칼뱅이 신정독재를 펴던 제네바에 나타났다.
칼뱅은 생피에르 교회 예배에 참석한 그를 알아보고 즉각 체포 명령을 내렸다.
외국인을 체포하려면 사전에 고소가 있어야 했지만 칼뱅은 뒤늦게 비서를 고소인으로 내세웠다.
단순히 국외추방형 정도로 끝날 것 같았던 사건은 칼뱅이 직접 세르베투스의 이단성을 증명하는 증언자로 나서면서 종교재판으로 바뀌었다.
칼뱅은 세르베투스를 자극해 논쟁을 유도했다.
쉽게 격분하는 세르베투스는 통제력을 잃고 칼뱅에게 분노를 쏟아냈다.
결국 세르베투스에겐 모든 형벌 중 가장 고통스러운, 즉 산 채로 불태워지는 형벌이 선고됐다.
칼뱅에게 보낸 원고뭉치와 함께 쇠사슬로 화형대에 묶인 세르베투스는 “예수,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절규하며 녹아내렸다.
개신교에서 일어난 최초의 ‘종교적 살인’이었다.
칼뱅은 나중에 자신이 너무나 고통스러운 화형 대신 참수형 같은 좀 더 완화된 형벌로 바꿔보려 했다고 밝혔지만 의회기록에선 단 한마디의 언급도 찾을 수 없었다(‘폭력에 대항한 양심’·슈테판 츠바이크).
(이철희 기자 klimt@donga.com.2008)
⑯ 스페인, 미국에 마닐라 할양 : 1898년 8월 13일 필리핀 마닐라가 미국에 할양되었다.
1895년 2월 쿠바인들이 스페인의 식민통치에 항거해 일으킨 독립투쟁에 미국이 개입하면서 벌어진 미국-스페인 전쟁은 1898년 4월 스페인과 미국이 서로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면서 시작되었다.
미해군 아시아 함대 사령관으로는 조지 듀이 준장이 임명되었다. 5월 1일 미해군 소함대는 마닐라 만으로 진입해 그곳에 정박중이던 스페인 함대를 공격했다.
이날 아침의 전투는 사소한 포격이 수차례 오간 뒤 미국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전투 결과 미국측의 피해는 수병 7명의 부상에 그쳤지만 스페인군 사상자는 381명에 이르렀다.
마닐라 점령에 이어 미군은 7월 3일 쿠바의 산티아고에 정박해 있던 파스쿠알 세르베라 제독 휘하의 스페인 카리브 함대까지 격파했고, 이로써 전쟁은 사실상 끝을 맺었다.
1898년 12월 10일 파리 조약 체결로 스페인은 쿠바에 대한 모든 권리주장을 포기했으며, 괌․푸에르토리코를 미국측에 양도하고 필리핀 통치권도 2,000만 달러에 미국측에 넘겨주었다.
미국은 이 전쟁의 승리로 광범위한 해외식민지를 보유한 강대국이 되었으며 국제정치 무대의 새로운 중추로 떠올랐다.
⑰ 스페인 침략자 코르테스, 현재의 멕시코시티인 테노치티틀란 탈환(1521) : 코르테스(Hernan Cortes, 1485-1547)은 "멕시코 정복자(conqueror of Mexico)"로 불린다.
스페인 하급 귀족 출신인 코르테스는 콜롬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지 27년이 지난 1519년에 중앙아메리카 신(新)식민지 탐험대장이 되어 쿠바에서 출항, 500여 명의 병사와 함께 그해 멕시코 유카탄 반도에 상륙한 다음 아즈텍 제국(Aztec empire)까지 진군했다.
코르테스는 아즈텍 제국의 목테수마(Moctezuma)왕으로 하여금 스페인 왕에게 충성을 서약케 했다.
그러나 1520년 6월 30일 인디오의 반란으로 코르테스는 많은 사상자를 낸 채 오늘날의 멕시코시티인 테노치티틀란에서 퇴각해야 했다.
코르테스는 이 날을 "슬픔의 밤(unhappy night)"이라고 불렀다. 인디오는 7월 7일 멕시코의 운명을 결정하게 될 오툼바(Otumba) 평원 전투에서 대포와 화승총으로 무장한 코르테스군에게 철저하게 유린당했다.
코르테스는 이 전투의 승리 후에 틀라스칼라(Tlascala)로 진군, 이곳에서 원주민 병사를 모병한 다음 테노치티틀란 재탈환을 위해 진군했다.
77일간의 처절한 저항 끝에 테노치티틀란은 1521년 8월 13일 재 함락되었다.
코르테스는 테노치티틀란 재정복 후에 '누에바 에스파니아' 식민지를 건설했으며, 1523년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인디오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으로 인해 코르테스는 1526년 월권혐의로 파면되어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그러나 이후 다시 멕시코로 건너가 캘리포니아만(灣)을 발견했다.
⑱ 블렌하임 전투 : 1704년 8월13일 새벽4시, 독일 남부 블렌하임.
영국ㆍ네덜란드ㆍ오스트리아 동맹군과 프랑스ㆍ독일 제후군이 맞붙었다.
전투의 배경은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1701~1714).
직계혈통이 끊긴 스페인 왕위를 둘러싸고 오스트리아와 프랑스가 대립한 이 전쟁에 영국은 사력을 다해 끼어들었다.
스페인이 프랑스 수중에 들어가면 해외진출 길이 막힐 것으로 우려했기 때문이다.
당초 전망은 프랑스의 우세. 50년 동안 패한 적이 없는 프랑스 육군이 전쟁의 조기 종결을 위해 빈으로 진격한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런던 금융시장과 시민들은 공황상태에 빠졌다.
빈을 향한 길목인 블렌하임에 투입된 프랑스 측은 병력 6만명에 대포 90문. 동맹군은 5만2,000명에 대포 66문으로 열세였지만 밤8시 종결된 전투 결과는 동맹군의 압승이었다.
프랑스군은 동맹군보다 두 배의 인적 손실을 입고 최고지휘관 탈라르 백작마저 포로로 잡혔다.
단기전으로 끝날 것 같았던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의 판세도 뒤바뀌었다.
승패를 가른 요인은 신속한 의사결정.
영국군은 현장의 판단에 따라 프랑스 영토를 가로질러 5주일간 400㎞를 행군하는 대담한 기동을 펼친 반면 프랑스군은 유리한 지형을 확보하고도 루이 14세의 승인을 기다리다 보름을 허비했다.
승전보를 안고 개선한 영국군 사령관 말보로 공작에게 앤 여왕은 토지를 하사하고 ‘궁전’을 짓도록 허락했다.
유명한 투기꾼이었던 말보로 공작부인은 영국에서 왕실이 소유하지 않은 유일한 궁전을 짓는 데 아낌없이 돈을 퍼부었다.
오늘날 세계문화유산으로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블렌하임 궁전’이 이렇게 만들어졌다.
공작가의 후손으로 블렌하임 궁전에서 태어난 윈스턴 처칠은 2차 대전을 영국의 승리로 이끌었다.
8대조 할아버지처럼.
(인터넷한국일보, 2009/08/12)
⑲ 기타 오늘의 역사
1878 구세군교리.구세군 교리는 11개조로 되어있다.
영국 고등법원에 정식등록됨으로 확정되었다.
1889 윌리엄 그레이, 공중전화기 특허 획득
1898 미국군, 마닐라 점령
1907 청, 자정원 설립
1908 양기탁등 국채보상자금 횡령으로 구속
1909 조선고서간행회 설
1913 독립의군부 사건 선고공판 열림
1930 프랭크 훅스, LA-뉴욕간 12시간25분 최단시간 비행기록
1935 심훈의 소설 `상록수', 동아일보 현상소설에 당선
1943 광복군, 버마전선에 사관1대 파견
1948 한국-대만, 국교수립
1948 하지 중장 미군정 폐지 선언
1951 국민방위군사건 김윤근소장 등 사형 집행
1952 근로기준법 국회 통과
1953 소련 수소폭탄 실험
1955 서울 적십자병원, 국내 최초의 성전환수술 시행
1956 제 2대 지방의회 선거(서울특별시 및 전국 각도 의회 의원 선 출)
1959 일본과 북한, 재일교포 북송협정에 조인
1960 중앙아프리카공화국, 프랑스로부터 독립
1960 윤보선, 제2 공화국 초대 대통령에 취임(4대 대통령)
1961 동독, 자국민의 서독탈출 막기 위해 베를린에 장벽 설치
1965 국회, 야당불참속 월남파병 동의안 가결
1966 가나안농군학교 김용기(金容基)교장 막사이사이상 수상
1969 중국 신강 위구르 자치구에서 중국 국경경비대와 소련군 기갑부대 격렬한 무력충돌
1974 엑스폴로 74대회 개최됨
1977 영국 런던서 전후최대의 인종폭동
1978 이란 반정폭동 격화
1978 베이루트 PLO본부 폭파
1979 중국, 산아제한정책 발표
1980 김영삼 신민당 총재, 정계은퇴 발표
1984 LA올림픽 폐막식 거행
1986 전교협(전국교사협의회) 준비위원회 구성
1988 건설부, 1992년까지 16조3천억원을 투입, 택지 5천7백만평을 마련해 주택 2백만호를 건설한다고 발표
1989 배용균 감독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제 42회 로카르 노 영화제 최우수 작품상 수상
1990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 스탈린 치하 희생자 전원을 복권시 키는 포고령 발표
1994 삼성전자, 세계최초로 차세대 반도체인 256 메가비트D램 개발 발표
1994 북-미 외교대표부교환등 핵타결 4개항 합의
1996 한총련 연세대 점거 시위
1998 러시아, 정치인을 포함해 3명의 승무원을 실은 소유즈우주 왕 복선이 카자흐공화국 바이코누르 우주기지에서 성공적으로 발 사
2001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총리 야스쿠니 신사 참배 강
2003 노무현(盧武鉉) 대통령, 부동산 투기 의혹 제기한 한나라당 김문수(金文洙) 의원과 동아 등 4개 언론사 상대로 총 30억 원의 손해배상금 청구 소송
오늘의 인물
① 허 준 사망(1615) : ‘동의보감’을 씀.
⇨9월 20일.
⇨8월 6일.
⇨3월 5일.
② 정석해(鄭錫海 ; 1899 - 1996.8.13) : 한국서양철학의 개척자. 前연세대 교수.
前숙명여대 이사장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노환으로 97세를 일기로 타계.
서산 정석해 선생은 격동의 우리 현대사를 직시하며 살다 간 20세기의 선비이자 참스승이었다.
평안북도 철산 태생인 선생은 연희전문학교 문과재학 중 3․1운동이 터지자, 기독학생회장으로 학생시위를 주도하면서 이미 행동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후 학교를 중퇴하고 중국으로 망명, 이어 프랑스와 독일에서 서양철학을 공부했다.
이 때에도 그는 언제나 태극기를 지니고 다닌 확고한 애국심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1940년 귀국해서도 일제의 탄압으로 연금-은거생활을 했던 선생은 광복이 되자 교육계에 투신, 연세대 철학과에서 후학을 길러내는 일에 전념했다.
4․19가 터졌을 때 학생들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정권은 더 이상 존속할 이유가 없다며, 교수데모를 주동함으로써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이끌어내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선생은 5․16 이후에도 대일 굴욕외교를 정면으로 반대하다가 정치교수 1호로 꼽혀 줄곧 탄압과 감시에 시달리는 고초를 겪었다.
이 땅에 민주 국가 건설을 염원했던 선생은 그러나 전두환 정권이 등장한 1981년 미국으로 떠났다.
③ 장강재(張康在 ; 1945.8.13서울 ~ 1993.8.2서울) : 언론인.
아버지는 〈한국일보〉를 창간한 장기영이다.
한양대학교에서 신문학을 전공했다.
1963년 아버지가 경영하던 한국일보사에 입사하여, 1973년 한국일보사 사장에 취임했다.
취임 후 한국일보사 경영기반을 다지기 위해 사시(社是)를 제정하고 경영혁신을 기했다.
1977년 한국일보사를 주식회사 체제로 바꾸고 1979년 회장에 취임했다.
1980년대말에 들어서 신문계가 소위 '자율경쟁체제'로 바뀌어 한국일보사의 경영에 타격을 받자 1988년 다시 사장에 취임하여 사업혁신을 꾀해 월요판 발행, 발행지면의 증면, 지방분공장 설치 등을 단행했다.
1982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④ 허버트 조지 웰즈(H(erbert) G(eorge) Wells ; 1866.9.21 - 1946.8.13) : 영국의 소설가이자 사회학자․역사학자 비평가.
교사․신문 기자를 지내다가 과학소설․사회소설․문명비평 등 많은 저작을 발표했다.
주저서로 대작 <세계문화사 대계> <우주전쟁>이 있다.
⇨ 9월 21일.
어린 시절을 어렵게 보냈지만 런던의 과학사범학교에 장학생으로 들어가 훗날 장편소설을 집필할 때 영감의 원천이 된 낭만적인 과학 개념을 배웠다.
처음 시도한 장편소설은 남의 작품을 모방하는 데 그치고 말았지만 그는 곧 모방을 버리고 독창적인 글을 쓰기 위해 노력했다.
이후 생기 있고 해학적인 문체의 소유자라는 찬사와 함께 과학이라는 새로운 주제를 소설로 다룬 대표적 작가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1895년에 발표한 <타임 머신 The Time Machine>이 큰 성공을 거두면서 <우주전쟁 The War of the Worlds>(1898) 등을 비롯한 유명한 공상과학소설을 잇달아 발표했다.
런던의 사회주의 단체인 페이비언 협회에 가입해 조지 버나드 쇼, 시드니와 비어트리스 웨브 부부 같은 지도자들과 논쟁을 벌였다.
제1차 세계대전 후에는 전세계인들에게 인류의 문명이 위험에 처해 있음을 일깨우는 활동을 하면서 대중을 위한 역사서 <세계문화사 대계 The Outline of History>(1920)를 써내기도 했다.
그는 세계평화를 위해 인류 공동의 협력이 필요함을 역설했다.
⑤ 알프레드 히치콕(Sir Alfred Hitchcock ; 1899.8.13 ~ 1980.4.2 9) : ⇨ 4월 29일.
"만약 내가 신데렐라를 찍는다면 관객들은 곧바로 신데렐라의 마차 안에 시체가 있으리라고 예상할 것이다. "
이상은 앨프레드 히치콕의 말이다.
히치콕은 영국 태생의 미국 영화감독으로 '스릴러' 영화를 다수 발표해 큰 인기를 얻었다.
세인트 이그나티우스 칼리지와 런던대학교에서 공학을 전공했다. 1925년 첫 작품인 <쾌락의 정원 The Pleasure Garden>을 감독했고, 1926년 <하숙생 The Lodger>을 감독하면서 서스펜스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1929년에는 영국 최초로 성공을 거둔 발성영화 <공갈 Blackmail>을 만들었다.
이후 서스펜스 영화의 고전이라 할 수 있는 작품들을 연이어 발표해 인기를 얻었다.
1939년 할리우드로 진출하여 만든 첫 작품 <레베카 Rebecca>(1940)로 아카데미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했다.
이후 30년 동안 1년에 1편 정도의 작품을 감독했으며 1948년부터는 제작도 겸했다.
그는 살인사건과 스파이 활동이라는 주제를 다루면서 인간의 심리를 교묘히 이용해 위협․공포 등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데 능했다. 여기에 카메라의 구도와 움직임, 정교한 편집, 효과적인 사운드트랙 등 기술적인 효과를 사용함으로써 서스펜스 영화의 재미를 더했다.
1979년 미국영화협회(American Film Institute)로부터 공로상을 수상했으며, 1980년에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으로부터 기사작위를 받았다.
⑥ 존 로지 베어드(John Logie Baird ; 1888.8.13 ~ 1946.6.14) : 영국의 텔레비전 발명가.
세계 최초로 TV방송 송출에 성공.
전기공학자.
스코틀랜드 헬렌스버그 출생.
⇨ 6월 14일.
⑦ 페르디낭 들라크루아(Delacroix, Ferdinand Victor Eugene ; 1798.4.26 - 1863.8.13) : 프랑스의 낭만주의 대표적 화가, 판화가. 샤랑트현(縣) 생 모리스에서 출생하였다.
명문가 외교관의 아들로 명석하며 정열적인 상상력을 타고났다. 16세에 고전파 화가인 P.N.게랭에게 그림을 배웠고, 1816년 관립미술학교에 입학하였다.
이때부터 루브르미술관에 다니면서 P.P.루벤스, P.베로네세 등의 그림을 모사하였고, T.제리코의 작품에 매료되어 현실묘사에도 노력하였다.
1819년 제리코가 발표한 《메두사호(號)의 뗏목 Raft of the Meduse》은 그에게 낭만주의를 수립하는 결정적인 감격과 영향을 주었다. 그리하여 1822년 최초의 낭만주의 회화인 《단테의 작은 배》를 발표하였다.
여기에서 엿볼 수 있는 극적인 표현은 다비드풍(風)의 고전주의에 대한 도전이라고 할 수 있다.
계속하여 1824년에는 그리스의 독립전쟁에서 취재한 《키오스섬의 학살》을 발표하여 '회화의 학살'이라는 혹평을 받기도 하였지만, 힘찬 율동과 격정적 표현은 그의 낭만주의를 더욱 확립시켰다. 더욱이 이때 살롱의 똑같은 방안에 진열된 영국의 J.컨스터블의 풍경화의 밝은 색조에서 자극을 받고, 자기의 작품을 밝게 새로 칠하여 한층 더 강렬한 효과를 나타냈다.
다음 해 런던에서 R.P.보닝턴, J.P.로런스 등과 사귀는 동안 더욱더 빛깔의 명도와 심도를 증가시켰다.
즉, 자신과 낭만주의 회화의 성숙기를 맞이한 것이다.
그 후 수년간의 작품 중에서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1827),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1830)은 대작이다.
그 후에도 계속 진전하여 1832년 모르네 백작을 수반으로 하는 외교사절단을 수행한 모로코 여행을 통해, 근동 지방의 강한 색채와 풍속에서 깊은 감동을 받고, 그의 예술에 대한 새로운 눈을 뜨는 동시에 그 후의 낭만주의 회화에서의 동방취미 풍속화의 기반을 닦았다.
명작 《알제의 여인들》(1834)은 이 여행에서 얻은 훌륭한 성과였다.
뿐만 아니라 이때를 중심으로, 초기에 볼 수 있었던 외면적인 격렬한 맛이 점차 내면화되었다.
작품으로는 이상에서 말한 대표작 이외에 초상화, 성서에서 제재를 택한 것, 말이나 사자 등의 동물을 그린 것도 많다.
더욱이 문학적·음악적인 정서도 풍부하여 셰익스피어, 바이런, 괴테 등의 작품을 일찍부터 가까이하였고, 음악가 F.리스트와 당시의 여성문학가이던 G.상드와도 친하였다.
이와 같은 풍부한 재능과 환경은, 그에게 회화작품 외에도 오늘날 미술사상(美術史上) 귀중한 문헌으로서 높이 평가되고 있는 뛰어난 예술론이나 일기 등을 집필하게 하였다.
그의 예술형성에 전술(前述)한 화가 이외에도 16세기 베네치아파 화가인 미켈란젤로나 고야도 영향을 주었으며, 한편으로 그 자신의 영향은 그 후의 낭만주의 회화를 물려주었을 뿐만 아니라, E.드가와 A.르누아르에게 직접 연결되는 점도 많다.
후반기에는 교회와 파리의 공공건축물을 위한 대벽화 장식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국회 하원의 《국왕의 방》(1833), 국회 하원도서관(1844), 국회 상원도서관(1845∼1847), 파리시청의 《평화의 방》(1849∼1853, 소실), 루브르궁전의 《아폴로의 방》(1849) 등을 잇달아 그렸고 만년에는 동판화와 석판화 제작에도 뛰어난 솜씨를 보였는데, 흑백의 대조가 강조되고 한층 더 환상적으로 표현하는 기교로써 《파우스트 석판화집》(1827) 《햄릿 석판화집》(1843) 등의 걸작을 남겼다.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 EnCyber.com)
⑧ 프레더릭 생어(Frederick Sanger ; 1918.8.13 ~ ) : 노벨화학상(1958,1980년) 수상한 영국 생화학자
쇄상단백질분자의 말단정법으로 디니트로페닐화법을 생각해 내고, 그것을 사용하여 1955년에 인슐린의 아미노산 배열순서를 규명하였다.
이것은 최초의 단백질 화학구조식을 결정한 것이며 이 공로로 1958년에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1980년에는 다시 유전자의 기본구조와 기능을 연구한 공로로 두 번째 노벨화학상을 수상하였다.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쇄상단백질(鎖狀蛋白質)분자의 말단정법(末端定法)으로 디니트로페닐화법을 생각해 내고, 그것을 사용하여 1955년에 인슐린의 아미노산 배열순서를 규명하였다.
이것은 최초의 단백질 화학구조식을 결정한 것으로, 이 공로로 1958년에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1980년에는 다시 유전자의 기본구조와 기능을 연구한 공로로 W.길버트와 공동으로 두 번째 노벨화학상을 수상하였다.
⑨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 (Ruz) ; 1926?27.8.13 ~ ) : 쿠바의 정치가 ․혁명가.
1945년 아바나대학를 졸업하고 변호사가 되었다.
대학 재학 때부터 정치활동을 하였으며, 1947년 도미니카공화국에 독재자 트루히요를 타도하기 위하여 침공한 일도 있다.
1948년 콜롬비아의 보고타에서 발생한 도시폭동사건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1953년 7월 동지 156명과 함께 쿠바의 산티아고데쿠바에 있는 몬카다군 병영를 습격하였으나 실패하고 체포되어 15년형을 선고받았다.
1955년 특사로 풀려나 아바나로 돌아오자마자 멕시코로 망명, F.바티스타 타도계획을 세웠다.
1956년 86명의 동지들과 함께 원정에 나서 오리엔테주(州) 시에라마에스트라에 숨어들어 게릴라전을 전개, 1959년 2월 바티스타정권을 무너뜨리고 공산독재정권을 세워 총리가 되었다.
총리에 취임한 후 토지개혁을 실시하는 한편, 미국을 비롯한 외국의 자본을 접수하는 등 사회개혁을 진행하였으며, 그 해 9월 제1차 아바나선언을 발표하여 라틴아메리카 해방을 제창하였다.
1961년 4월 미국 정부의 지원하에 히론해안을 침공한 반혁명군을 격퇴하였으며, 5월 쿠바혁명의 사회주의적 성격을 선언하고, 7월 쿠바사회주의혁명통일당을 결성, 제1서기에 취임하였다.
1962년 10월 소련의 중거리미사일 반입을 둘러싸고 핵전쟁위기로까지 발전하였으나 미국이 카스트로정부 전복을 기도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종결되었으며, 이듬해 제2차 토지개혁을 실시하였다.
1965년 쿠바사회주의혁명통일당을 공산당으로 개칭하고, 사회주의 건설에 박차를 가하였다.
1966년 1월 아바나에서 3대륙 인민연대회의를 개최하고, 라틴아메리카 인민연대기구를 설립하였다.
당초에는 중․소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고 자주독립이라는 입장을 취하였으나, 1972년 코메콘(COMECON:동유럽공산권경제상호원조회의)에 가입한 후 점차 친소적(親蘇的) 성향을 띠게 되었다.
1975년 신헌법을 제정하는 등 사회주의국가체제를 정비하고, 76년 국가평의회 의장(원수)에 취임하여 당․정부․군의 최고권력자가 되었다.
1980년대 후반 소련 등 동구권의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공산주의 정책을 추진해 나가고 있다.
⑩ 나이팅게일 사망(1910) :‘등불을 든 여인’(the Lady with the Lamp)이란 별칭으로 병원개혁 및 군대 간호사업의 선구자.
1910년 8월 13일 90세로 작고 !
나이팅게일의 기다란 생애는 병든 사람들에게 의료라는 불빛을 건네는 데 온전히 바쳐졌다.
나이팅게일이 플로렌스라는 이름을 얻은 것은 부모가 이탈리아를 여행하던 중에 피렌체에서 그를 낳았기 때문이다.
플로렌스는 피렌체의 영어 이름이다. 영국과 독일에서 간호사 교육을 받고 런던 숙녀병원의 간호부장이 된 나이팅게일은 1854년 크림 전쟁의 참상을 신문에서 읽고 34명의 간호사들과 함께 이스탄불로 가 야전병원장으로 일하며 부상병들을 돌보았다.
영국으로 돌아와서는 나이팅게일 간호사 양성소(Nightingale Home)를 창설해 후진을 길러내는 한편, 병원과 의료 구호제도의 개선에 노력했다.
나이팅게일은 트라팔가르 해전의 영웅 호레이쇼 넬슨,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 피터 팬의 작가 제임스 매슈 배리 등과 함께 런던의 세인트 폴 대성당 지하 묘지에 묻혀있다.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이라는 이름은 간호사들의 가장 커다란 영예 위에 얹혀 있다.
국제 적십자 위원회가 매년 세계 여러 나라의 헌신적이고 우수한 간호사들에게 수여하는 국제적 표장은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기장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또 간호사들은 직업적 이력을 시작하기 전에 나이팅게일 선서를 통해 마음가짐을 확고히 한다. 선서는 이렇다.
나는 일생을 의롭게 살며 전문 간호직에 최선을 다할 것을 하나님과 여러분 앞에 선서합니다.
나는 간호의 수준을 높이기 위하여 전력을 다하겠으며, 간호하면서 알게 된 개인이나 가족의 사정은 비밀로 하겠습니다.
나는 성심으로 보건 의료인과 협조하겠으며 나의 간호를 받는 사람들의 안녕을 위하여 헌신하겠습니다.(고종석,2002)
⇨5월 12일.
⑪ 이그나츠 부비스(Ignatz Bubis ; 1927 - 1999.8.13) : 독일 유태인 지도자.
정치기관단체인.
⑫ 래넥(Rene Laennec ; 45세향수 - 1826.8.13) : 가격 대비 효용이 가장 높은 의료장비. 내과와 흉부외과 의사들의 필수품. 뭘까. 청진기(聽診器)다.
등장시기는 1816년. 프랑스 의사 래넥)의 발명품이다.
청진기가 나오기 전까지 서양 의학에서는 어떻게 병을 진단했을까. 의사가 환부에 직접 귀를 댔다.
히포크라테스 시절의 진단법이 그대로 내려온 것이다.
1761년에는 오스트리아에서 ‘타진법’이 등장했다.
좋은 수박을 고를 때처럼 환부를 두드려 병의 유무를 판단한 것이다.
환자들은 이를 꺼렸다.
특히 여성들이 직접 신체접촉을 통한 진단을 싫어했다.
효과적인 진단법을 고민하던 30대 중반의 의사 래넥은 어느날 나무대롱을 가지고 소곤거리며 노는 아이들을 보고 영감을 얻었다.
종이를 말아 환자의 몸에 대고 청각을 집중시켰더니 직접 듣는 것보다 훨씬 또렷한 소리가 들린다는 사실을 확인한 그는 길이 25㎝, 지름 2.5㎝의 나무통을 만들고 가슴을 뜻하는 그리스어 stethos와 scope를 합성해 ‘stethoscope(청진기)’라는 이름을 붙였다.
청진기를 이용해 3년 동안 심장과 폐에 대한 진단과 수술 등 임상실험의 결과를 담아 1819년 발간한 논문 ‘간접 청진법에 대한 고찰’은 진단의학의 신기원을 열었다.
정작 자신은 선천적인 폐질환을 극복하지 못하고 1826년 8월13일 45세라는 아까운 나이에 사망했지만 통념에 의존하던 진단을 과학적인 관찰의 영역으로 돌리는 업적을 남겼다.
병을 세분하고 복막염과 폐의 흑색종, 간경변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낸 사람도 래넥이다.
간단한 구조의 래넥 청진기는 짧은 기간 동안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며 1851년에는 요즘과 거의 비슷한 형태의 청진기가 선보였다.
고가의 첨단 의료장비가 속속 등장하는 오늘날에도 청진기는 의료의 최일선을 지키고 있다.
(2008.서경.인터넷한국일보).
⑬ 기타 오늘의 인물 ⑭⑮
0234 중국 촉한 전략가 제갈공명 사망
0232 중국 삼국시대 촉한 시대의 전략가 제갈량(제갈공명) 사망
1396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 사망
1523 다피트 사망.네덜란드 화가로서 브뤼지파의 마지막 대가.
1598 퍼거슨 사망.스코틀랜드 개혁자.1573년 총회의 대회의장이 되 었다.
1686 맹부르 사망.프랑스 예수회 회원이며 교회 역사가.
1796 할레이 출생.영국의 비국교도.1857-72년에 런던의 세인트 존 즈우드에 있는 뉴 대학의 학장과 신학교수로 재직했다. 1818 사회개혁가 루시 스톤 출생
1826 프랑스 의사 라엔네크 사망
1834 필립스 출생.미국 감리교 복음송 가수.남북전쟁중 그는 그의 홈송으로 기금을 모금하고 전국 각지를 순회하며 노래를 부 름으로 기독위 원회를 도왔다.
1836 세냐 출생.추기경.그는 교황청의 기록보관인과 목록의회의 의 장이었고 성공회 성직제의 유효성에 관한 토론에서 중요한 역 할을 함.
1850 페라리 출생.추기경.그는 주교 및 수도자의회,은사회의 그리 고 목록회의 등의 의원이었다.
1883 요컴 출생.침례회 의료선교사.중국에 파송되었다.한국선교사 로 전임하였다.
1896 로이베 출생.교회사가.그의 주저들은 17세기의 독일교회사를 다루고 있으며,후기에는 프랑스 및 영국 교회사를 취급하고 있다.
1908 채기은 출생.언론인.1960년 한국기독신보 발행인겸 편집국장 에 취임
1991 원로 한학자 김종무씨 별세
오늘의 샘터
① 웰즈의 말 : "어떤 말이 사람들의 입에 수없이 오르내리면 어느덧 의미를 갖게 되고 심지어는 진실이 되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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