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yond reason
한국불교
1. 불교의 유입과 삼국의 발전
64) 한반도로 전래된 불교
불교전래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임.
고구려 372년(소수림왕 2년) : 북조 전진이 왕부견이 사신과 함께 승려 '순도'를 고구려에 파견 불상과 견문을 전함
백제 384년(침류와 4년) : 남조 동진의 승려 '마라난타'가 백제로 들어와 불교를 전함
신라 19대 눌지왕(417-458) : 고구려에서 승려 묵호자가 '홍륜사'를 지어 불교를 전파함.
모두 중국을 거친 한국불교였음
65) 불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고구려와 백제
불교가 전래된 372년 고구려에 국립교육기관인 태학이 설립. 불교를 가르침
백제는 385년 한산에 사찰을 창건하고 10인이 출가함. 백제불교는 고구려보다 빠른 속도로 전개됨.
66) 가장 늦게 불교를 수용한 신라
신라의 불교공인은 527년 이차돈의 순교를 기점으로 함. 고구려, 백제보다 150년 늦은때임.
법흥왕 - 불교를 흥하게 하는 왕이라는 뜻
67) 불교를 통해 고대국가의 초석을 확립
신사 법흥왕 - 흥륜사
진흥왕 - 황룡사(17년 공사 569년 완공) .. 몽골침입으로 소실
- 전륜성왕이 되기를 꿈꾼 진흥왕
68) 정반왕과 마야부인이 다스리는 나라
선덕여왕은 진흥왕이 추구한 전륜성왕 이상을 완성한 인물.
신라 23대 법흥왕에서 27대 선덕여왕까지 신라는 사실상 불교로 살고 불교로 죽어서 재탄생하는 불교에 대한 간절한 열망의 시대였음
69) 미륵신앙을 바탕으로 백제부흥을 열망
백제의 무왕은 '미륵사'를 창건
참고) 미륵사(彌勒寺)는 백제 무왕 때 왕비인 사택왕후의 발원으로 지어진 사찰이다. 2009년 전라북도 익산의 미륵사지 석탑해체 중 내부에서 발견된 금제사리봉안기에 따르면 639년에 미륵사를 창건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미륵사는 익산 용화산의 남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좌우 능선 사이에 평지에 남향을 향하여 건립되었다.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에는 현재 절터만 남아 있으며, 사적 제150호 익산미륵사지(益山彌勒寺址)로 지정되어 있다. 그곳에는 현재 국보 제11호인 미륵사지 석탑(서탑)과 복원된 동탑이 있고, 목탑이 있었던 터가 있으며, 미륵사지 당간지주(보물 236호) 외에 무왕과 왕비의 설화가 깃든 유물과 유적 등이 1966년에 발굴되었다. 2015년 7월 4일 독일 본에서 열린 제39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WHC)에서 백제역사유적지구(공주지역에 2곳(공산성, 송산리 고분군), 부여 4곳(관북리 유적 및 부소산성, 능산리 고분군, 정림사지, 부여 나성), 익산 2곳(익산 왕궁리 유적, 익산 미륵사지))등 3개 지역 8곳이 세계 유산 등재 심사를 최종 통과하여 세계 유산으로 등재 되었다.[1] 1998년 서탑이 붕괴 위험 등으로 인하여 해체 복원이 시작되었고 21년만인 2019년 완료되어 일반에 공개되었다.
70) 화랑도에 결합된 미륵신앙과 원광의 세속오계
신라 진지왕 이후 약 1세대 사이에 미륵신앙은 화랑도의 정신적인 배경으로 확고하게 자리잡음. 김유신 역시 미륵신앙을 통해 세상을 바꾸려 했던 인물
세속오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71) 신라불교의 토대를 완성한 자장
원광에 의해 토대를 확립한 신라불교는 선덕여왕때 활약한 자장(594-655)이 계율을 중심으로 교단을 정비함. 자장은 재상으로 지목되어 출사를 종용. 자장이 거부. 왕은 죽이겠다고 협박.
'하루라도 계율을 지키다가 죽을지언정 100년 동안 파계하고 살기를 원치 않습니다'
자장은 신라에서 도리천의 신에게 수계를 받아 율사가 되었음. 638년 사신과 함께 당나라 유학. 장안에서 당태종의 예우를 받은 후 중국 남상율종의 개조인 '도선(596-667)'과 교류하며 계율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힘. 불교경전을 들고 643년 신라로 귀국함.
지장은 80미터 높이 황룡사 9층 목탑 건립을 제안.
황룡사 9층 목탑(皇龍寺九層木塔)은 신라를 중심으로 삼국을 통일하고자 하는 그 시대의 간절한 소원이 표현으로 된 것이다.신라 선덕여왕 때인 643년, 자장 율사가 당에서 귀국하여 황룡사에 탑을 세울 뜻을 선덕여왕에게 아뢰니 선덕여왕이 군신에게 의논하였는데, 신하들이 “백제에서 공장(工匠)을 청한 연후에야 바야흐로 가능할 것입니다”라고 하여 이에 보물과 비단을 가지고서 백제에게 청하였다. 공장 아비지가 명을 받고 와서 목재와 석재를 경영하였고 이간(伊干) 김용춘이 주관하여 소장(小匠) 200명을 이끌었다. 공장은 이에 마음을 고쳐먹고 그 탑을 완성하였다.[6] 그런 만큼 이러한 소원과 포부가 이 탑에 반영되었다.[6] 규모가 장대무비하였는데 9층까지 높이는 탑지(塔誌) 기록 당시의 당척(唐尺)으로 따진다 하더라도 약 53.45m, 상륜부(上輪部)까지 합하면 약 66.70m나 되는 거대한 것이고, 조영(造營) 당시의 척수인 동위척(東魏尺)으로 따진다면 80m 이상으로 그보다 더 높은 초대형 건축물이었다.[6] 또한 황룡사 9층탑을 만들어낸 의지와 역량을, 삼국 가운데 가장 약소국이었던 신라가 한반도를 통일한 원동력 가운데 하나로 보는 시각도 있다.[6] 그 후, 황룡사 9층 목탑은 고려 때 몽골의 침입으로 불타버렸고 현재는 탑의 초석(礎石)만이 남아 있다.[6] 중앙의 심초석(心礎石)에서 1964년 12월에 도난당하였던 금동사리함(金銅舍利函)이 1972년 10월 28일 국립박물관에서 처음으로 공개된 적이 있다.[6] 이 사리함의 3면에 걸쳐 탑의 조성 기록이 새겨져 있는데 신라 경문왕(景文王) 11년(871)에 탑을 중수하면서 탑의 조성과 중수 사연을 적은 것이다.[6] 그 내용은 대체로 삼국유사의 기록과 유사하지만 당시의 확실한 명문(銘文)에 의하여 황룡사의 위관(偉觀)을 재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통도사
이러한 과정에서 647년에 만들어진 사찰이 바로 '통도사'
참고) 통도사(梁山 通度寺)는 대한민국 경상남도 양산시에 있는 사찰이며 영축산 남쪽 기슭에 있다. 부산 범어사(불보사찰), 합천 해인사(법보사찰), 순천 송광사(승보사찰)와 더불어 한국 삼보사찰로 불리고 있다. 자장이 당나라에서 가져온 석가모니의 사리와 가사를 봉안하여 불보 사찰이라 불린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이다. 신라 선덕여왕 재위 중인 646년에 자장 율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창건 당시에 대웅전·적멸궁(寂滅宮)·법당 등의 건물이 있었고, 금강계단에 진짜 부처인 진신사리가 안치되어 있으므로 대웅전에는 부처의 모형인 불상을 만들지 않았다. 절 이름은 영취산의 기운이 서역국 오인도(西域國五印度)의 땅과 통한다고 하여 통도사라 불렀다고 한다. 자장은 이 절에서 금강계단을 쌓고 보름마다 불법을 설하여 계율종의 근본 도량이 되었다. 그 후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03년 선조 36년에 송운대사(松雲大師)가 재건하고 다시 1641년 인조 19년 우운(友雲)이 중건하였다.
72) 김춘추의 등장과 출렁이는 불교
유교를 통해 왕권 강화를 꾀하는 김춘추
2. 화려하게 꽃피는 불교(통일신라 시대의 불교)
73) 신라불교의 아웃사이더들
668년 신라 문무왕은 3국을 통일함.
신라불교 10대성인
자장으로 대변되는 제도권 불교가 김춘추에 의해 무너지면서 비제도권에 있던 '혜공, 혜숙, 사복, 대안'과 같은 이들이 전면으로 등장함. .. 이들 비제도권 승려들은 모두 민중 친화적인 면모를 띠는데 역시 삼국의 진정한 통합이라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완성을 지향함.
신라불교 10대 성인은 흥륜사 주불전인 금당에 진흙 소상으로 모셔져 있었음. '아도, 염촉(이차돈), 혜숙, 안함, 의상, 표훈, 원효, 혜공, 자장, 사파(사복)'임.
아도와 염촉은 신라불교의 시원적 인물
안함은 진흥왕때 중국에 유학후 '동도성립기'를 저술한 승려
표훈은 의상의 10대 제자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
74) 화쟁사상으로 분열과 갈등을 해결하려 한 원효
원효(617-686)가 없었다면 혜공, 혜숙, 사복, 대안같은 이들이 제대로 평가받기 힘들었을 것임. 삼국유사 권 4 '원효불기'에 따르면 원효는 육두품 출신으로 불지촌에서 태어남. 불지촌은 붓다의 마을이라는 의미. 자신의 집을 '초개사'라는 사찰로 바꾸고 스스로를 '원효'라 칭함.
참고) 원효(元曉, 617년 ~ 686년 4월 28일(음력 3월 30일), 경상북도 경산시)는 삼국시대와 신라의 고승이자 철학자, 작가, 시인, 정치가이다. 원효는 법명이고, 속성(俗姓)은 설(薛), 속명은 사(思), 서당(誓幢) 또는 신당(新幢)이며, 별명은 모(毛), 호는 화정(和諍)이다. 아버지는 내말(奈末, 육두품 출신이 맡는 제11등급 관직) 설담날(葬談掠)이며, 태종무열왕의 둘째 사위이고 설총이 그의 아들이다.
별명은 소성거사(小姓居士)이며 이외에도 서곡사미(西谷沙彌), 백부논주(百部論主), 해동법사(海東法師), 해동종주(海東宗主), 서당화상(誓幢和尙), 고선대사(高仙大師)라 불렸다. 고려시대에는 원효보살, 원효성사(元曉聖師)라 존칭되고, 화쟁국사(和諍國師)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본명은 설사(薛思)이나, 보통 한국에서는 법명을 따라 원효대사(元曉大師)로 불린다.경주 설씨와 순창 설씨의 중시조인 설총의 생부이며, 한국 불교 최초의 깨달은 스님, 한국 최초의 대처승으로도 유명하였다.
원효는 당시 전하던 거의 모든 경론(經論)에 대해 주석(註釋)을 하여 100여 종의 저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현존하는 것은 20부 22권뿐이다. 이 중 《대승기신론소》 2권, 《금강삼매경론》 3권, 《십문화쟁론》 2권 등은 원효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데, 원효 사상의 핵심인 일미(一味) 화쟁(和諍) 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 원효는 한국은 물론이고 중국과 일본의 승려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유식학(唯識學)이나 불교논리학 등에 있어서 그의 영향력은 매우 크다. 그는 한국의 무속신의 하나로도 숭배되는데, 그 자세한 기원은 알 수 없으나 해골의 물을 마신 것을 죽음을 극복한 것으로 보는 것으로 추정한다. 수많은 저서를 남기고 70세 되던 해 음력 3월 30일 혈사(穴寺/경주시 양북면 소재 골굴사)에서 입적에 들었다. 뒤에 고려 숙종이 대성화정국사(大聖和諍國師)라는 시호를 주었다.
해골물로 재탄생한 마음의 불교
원효가 활동할때 동아시아 불교 최대사건은 현장이 645년 당나라로 귀국한 일이었음. 이 소식을 듣고 원효와 의상은 현장문하에서 수학하기 위해 당나라 유학길에 오름.
'심생고종종법생 심멸고감분불이'
마음이 생하면 일체가 생하게 되고 마음이 멸하면 토굴과 무덤은 둘이 아니다'
마음이 일어날 때는 갖가지 법이 생겨나더니
마음이 사라지니 무덤과 움집이 둘이 아니네
삼계가 오직 마음이요, 만법은 오직 의식뿐,
마음 밖에 법이 없거늘 어찌 따로이 구하리오.
心生故種種法生 (심생고종종법생)
心滅故龕墳不二 (심멸고감분불이)
三界唯心萬法唯識 (삼계유심만법유식)
心外無法胡用別求 (심외무법호용별구)
해골에 담긴 물은 어젯밤과 오늘 모두 똑같은데
어째서 어제는 단물 맛이 나고 오늘은 구역질을 나게 하는 것인가?
어제와 오늘 사이 달라진 것이 물이 아니라 나의 마음인 것이다
진리는 밖이 아닌 내 안에 있는 것이다
신라불교의 위상을 세계에 떨친 원효
원효가 활동하던 시기는 삼국통일이라는 통합의 시대적 요청과 함께 불교적으로는 다양한 경전번역 후 이를 토대로 '천태종, 법상종, 화엄종' 등 중국불교에 대한 이해가 확산되는 시기. 이로 인하여 불교 내적으로도 여러 경전과 사상들을 한데 조화시켜야 할 필요성이 있었음. 이러한 해법으로 제시된 것이 바로 '원효의 일심과 화쟁사상'임.
원효의 저술은 100여종 240여권 '화엄경, 법화경, 반야경, 대승기신론'을 비롯해 유식, 중관사상 및 정토사상까지 당시 유행하던 대부분의 불교사상에 대한 작업을 함. 대표적인 주석으로 '대승기신론소 2권, 금강삼매경론 3권'이 있으며 저술로는 '십문화 쟁론' 있음.
십문화쟁론은 인도에서 인정받으며 원효는 불교 논리학을 정립한 진나가 다시 태어난 것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함.
75) 계몽을 통해 개혁을 실천한 의상
당나라 유학과 화엄사상의 완성
원효와 혜공 등 파격적인 아웃사이더들은 매우 인상적이었지만 주류는 될 수 없었음. 그래서 신라불교는 자장의 공백을 매우는 새로운 인물이 필요했는데 그 사람이 바로 '의상(625-702)'임. 의상은 문화적으로 강대국이었던 인도에 무시당하는 중국불교의 현실을 알게됨. 의상은 화엄종의 '지엄' 문하로 들어가 수학함. 의상은 지엄 문하에서 60권 화엄경을 수학하는데 이때 아직 출가하기 전이었던 현수 법장과 함께 공부를 함. 이후 법장은 중국 화엄종을 완성하고 중국불교의 1인자로 성장함. 법장은 책을 저술한 뒤 의상에게 편지를 써서 글을 감수해줄 것을 요청함. 이 때문에 신라에서 의상의 위치는 비약적으로 상승함.
의상의 문자 '만다라'
의상은 '화엄일승법계도'로 스승인 지엄에게 인정을 받았고 신라에서 화엄사상의 시작이자 완성을 봄.
의상은 671년 신라로 귀국함. 이후 화엄종은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교종으로 확고히 자리매김을 함.
76) 나라를 수호하고 흩어진 민심을 통합
문무왕은 불교식 장례법인 화장으로 장례를 치른 최초의 왕.
삼국통일 과정에서 발생한 수많은 희생자를 위로할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유행하게 되는 것이 '아미타불의 극락정토'신앙임.
이후 5교 '율종, 열반종, 법성종, 화엄종, 법상종'으로 대표되는 교종의 발전이 일어남.
지장 : 율종 - 계율을 중심으로 한 계율종
보덕 : 열반종 - 열반경을 중심으로 한 불교
원효 : 법성종 - 원효의 일심사상에 입각한 불교
의상 : 화엄종 - 의상의 교화에 의한 불교
현장(인도승) : 법상종 - 유식학에 의한 불교
77) 중국불교의 꼬치 된 신라의 왕자들
죽음을 무릎쓰고 당으로 가는 왕자들
통일신라시대에 왕족으로 출가하여 중국에서 일가를 이룬 인물 '원측, 무상, 무루, 지장'
현장문하에서 양대산맥을 만든 원측
원측(613-696년)은 신라 왕손 출신으로 일찍이 출가하여 15세에 당나라 유학. 당에서 법상과 승변에게 섭대승론에 입각한 무착계열의 유식학을 배움. 665년 현장이 당나라로 귀국하자 현장이 문하로 들어가서 배움.
중국선종의 한 획을 그은 무상
무상(680-756)은 성덕왕의 셋째 아들로 일찍 출가하여 728년 당나라로 건너가서 처적의 제자가 되어 혹독한 수행을 하며 선의 일가를 이룸. .. 무상은 중국불교에서 모시는 500나한 중 455번째 무상공존자라는 이름으로 편입됨.
당나라와 서하불교의 최고가 된 무루
무루(?-762)는 신라 국왕의 아들로 왕위계승이 유력했으나 그것을 피해서 당나라로 건너가 서하불교의 중요 인물이 됨.
78) 중국에서 지장보살로 칭송받은 김지장
김지장(696-794)은 신라의 왕자로 중국으로 건너감.
중국에서 지장보살을 특별히 존칭하여 '지장보살왕'이라고 함. 중국의 지장보살상과 지장보살도는 김지장을 모델로 함.
선청의 개. 이 개는 신라에서 데려간 삽살개로 불화에 그려짐
79) 동아시아를 넘어서는 신라인
한국불교 최초의 인도 구법승 '겸익'
신라와 통일신라의 인도 구법승들 '아리야 발마, 혜업, 구본, 현태, 현각, 혜륜, 현유'
혜초, 20세기에 세계인으로 깨어나다
혜초(704-787)는 한국불교에서 인도로 구법여정에 오른 승려중 유일하게 기행문을 남긴 인물. 왕오천축국전
80) 불국토를 통해 대통합을 실천
불국토을 통한 통합과 화엄 불국사
불국사는 붓다의 세계인 불국토를 이상으로 제시함으로써 불교의 통합, 민족의 통합 그리고 정신의 통합을 이루고 삼국의 완성을 지향한 절.
불국사(佛國寺)는 대한민국 경상북도 경주시 동쪽 토함산에 있는 대한불교 조계종 소속 사찰이다. 신라시대인 경덕왕에서 혜공왕 시대에 걸쳐 대규모로 중창되었다. 신라 이후 고려와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번 수축되었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불타버렸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이고,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3. 신라불교의 새로운 흐름
81) 산중사찰과 선수행, 선종이 발달하다
선종 구산(禪宗九山 · Nine Mountain Monasteries[1])은 남북국 시대의 신라 때부터 시작되어 고려 태조 때 완성된 불교 선종(禪宗)의 구산문(九山門)을 가리킨다.[2] 중국에서 성행한 달마(達摩)의 선법(禪法)을 이어받아 한국 선종의 종풍(宗風)을 일으킨 아홉 산문을 가리키는 것으로,[2] 가지산문 · 동리산문 · 봉림산문 · 사굴산문 · 사자산문 · 성주산문 · 수미산문 · 실상산문 · 희양산문이다.[2][3]
이후 이들 9산문은 선적종(禪寂宗)에 속하게 되며 의천(義天)이 만든 선종 천태종(天台宗)에 대립하였다가 조계종(曹溪宗)으로 개칭되어 선종 2종파 중의 하나가 되었다
선종의 인가문화와 당나라 유학
선종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깨달음에 대해서 스승에게 승인, 즉 인가를 받는다는 점. 교종은 공부가 주된 것이기 때문에 그 사람이 아는 것을 객관화할 수 있는 측면이 존재함. 선종의 핵심은 마음의 수양이며 이것은 별도로 객관화시킬 방법이 없어 먼저 깨달은 스승에게 인가를 받아야 함. 구산선문의 개창자들은 모두 당나라에서 유학을 한 승려임. 스승에게 인가받는 방식은 조직의 결속력을 강화한다는 점에서 선종 발달의 구심점이 됨.
82) 구산선문의 발달과 신라에서 고려로의 전환
구산선문 중 '가지산문, 사굴산문, 성주산문, 수미산문' 중요한 역할을 함. 그 중 '가지산문과 사굴산문'은 한국불교의 주류인 조계종의 근원이 됨.
83) 후삼국, 미륵을 깨어나게 하다
미륵불을 자칭한 궁예
견훤의 미륵신앙과 불교적인 다양성
부처님의 보호로 유지되는 나라 고려
왕건의 훈요십조 중 2조, 6조가 불교에 대한 내용
'우리국가의 대업은 모든 부처님들께서 보호해주시는 힘을 근본으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선종과 교종의 사원을 창건하고 주지를 임명하여 수행과 기도를 하게 함으로써 국가와 불교가 잘 발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