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초지 한쪽으로 나온 백산은 그 자리에서 가부좌를 했다.
지금껏 단 한번도 운기행공(運氣行功)을 하지 않았었는데 이번에는 정말 운기(運氣)를 해야 할 것 같았다. 몸 상태가 완전하지 못한 것도 있지만 그만큼 갈태독이 강해보였기 때문이다.
백산의 양팔과 발목에서 열두 개의 비도가 튀어나와 땅속 깊숙이 박혔다.
백산의 몸이 점점 삼매경(三昧境) 속으로 빠져들었고 그의 몸에서 새어나온 혈광이 온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주변을 감싸고 있는 짙은 혈광이 조금씩 변하는 것 같더니 계란 모양의 형태로 변함과 동시에 백산의 몸이 서서히 허공으로 떠올랐다.
각천비(脚天匕)와 수천비(手天匕)는 그대로 땅속 깊숙하게 박혀있는 상태로 허공에 정지해있는 백산의 몸은 마치 붉은 우담화(優曇華)가 피어있는 것처럼 아름답기만 했다.
"오! 저것은 우담화(優曇華)의 경지?"
백산 혼자만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산책을 하고 있던 갈태독과 철목승이 붉게 변한 백산의 모습을 발견하곤 갈태독이 부지불식간에 외치는 소리였다.
삼화취정(三花聚頂), 오기조원(五氣造元), 등봉조극(登峰造極)의 극강한 경지를 넘어선 단계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우담화(優曇華)의 경지라 했다.
삼천 년 만에 단 한번 꽃을 피운다는 우담화, 여래나 전륜성왕이 재래할 때 피어난다는 우담화가 백산의 운기에서 피어나고 있는 것이다.
우담화의 경지가 있다는 것조차 모르는 무림인이 대부분이니 그 경지의 극고함은 말로써 표현할 수 없다.
그런데 그 우담화의 경지라는 백산의 몸이 또다시 변화하고 있었다. 우담화라고 불린 붉은색의 빛 덩어리가 마치 꽃잎이 만개(滿開)하는 것처럼 하얀 속살을 드러내며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유형도 무형도 아닌 하얗고 투명한 막 속에 눈을 반개한 백산이 앉아 있는 것이었다.
"아…! 만다라(曼陀羅)! 만다라여!"
감동 어린 목소리로 만다라를 외치던 갈태독이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말았다. 새하얀 빛으로 주변을 포근하게 감싸주고 있는 만다라라고 불리는 흰색 투명한 빛 덩어리.
"저 전설의 경지를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다니…결국 만다라는 혼돈(混沌)의 심연(深淵)속에서만 피어나는 것인가…."
약간은 떨리는 듯한 목소리와 감동에 젖은 표정의 갈태독이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옆에 있던 철목승은 놀랍다는 표정으로 갈태독을 쳐다보았다.
그도 우담화의 경지에 대해서는 들어서 알고 있지만 만다라의 경지라는 말은 처음 듣는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르신?"
백산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경건해진 철목승이 갈태독을 향해서 나지막이 물었다.
"나도 마료성승께 들어서 알았네. 무공은 전혀 익히지 못했던 분이셨지만 무공에 대해서 그 누구보다도 많이 알고 계셨던 분이셨지.
우담화의 경지를 넘어선 극선(極善), 극마(極魔), 극사(極邪)의 경지인 만다라의 경지가 있다고…."
그러나 그는 그것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만다라의 경지가 우담화의 경지보다 높다는 것인지 아니면 그러한 경지가 있다는 것인지 또한 극선은 무엇이고 극마, 극사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그에 대한 마료신승의 설명은 간단했다.
우담화의 경지는 그 사람이 어떤 무공을 익혔느냐에 상관없이 극에 이른 깨달음으로 자연과 하나가 되어버린 경지, 즉 천지합일의 경지를 넘어서면 나타날 수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만다라의 경지에 대해서는 그도 많은 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러한 경지가 존재하고 극선과 극마와 그리고 극사를 모두 포함할 수 있는 경지이고 혼돈의 상태라 하였다.
또한 만다라의 경지는 혼돈의 심연 속에서만 완성되는 경지라고 했다.
"내가 저 녀석을 계속해서 진맥했던 것 기억나나?"
그랬었다.
사실 백산의 몸은 치료를 해야 할 정도로 내상을 입었다거나 그런 상태가 아니었다. 단지 모든 힘을 쏟아내고 정신을 잃은 것뿐이었다. 즉 가만히 두면 저절로 깨어난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갈태독은 백산의 몸 상태를 본다며 계속해서 진맥을 하고 있었다. 백산의 몸 내부에서 일고 있는 알 수 없는 기운을 연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의원으로서 백산의 몸을 진맥했을 때 얼마나 놀랐던가!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만의 독특한 기운이 있기 마련이다.
뜨겁(火)다거나, 냉(冷)하다거나, 순(順)하다거나 그런 기운들이 몸속에 존재하여 그 사람의 성정을 나타내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백산의 몸속에서는 아무런 기운이 감지되지 않았다.
아니 모든 기운이 잠재되어 소용돌이치고 있는 거대한 혼돈의 덩어리였고 우주의 심연이었다.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자신의 내기를 집어넣으려고 했으나 철목승의 경우처럼 단 한 치도 들어갈 수 없었다.
백산에게 부탁을 했던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그것이 바로 마료신승께서 말씀하신 혼돈의 심연이었어…."
자신이 새롭게 창안하고자 했던 무공, 지난 구십여 년 동안 거의 모든 시간을 통해서 구현하고자 했던 상태를 백산의 몸속에서 찾았던 것이다.
절대의 고독을 느낄 수밖에 없는 백산을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무공을 익혔기에…."
두 사람이 공통적으로 궁금한 점이다. 도대체 백산이 무슨 무공을 익혔기에 저 나이에 꿈에나 나올 법한 경지에 달해있단 말인가.
자신들도 절대자의 반열에 올라있는 고수들이기에 잘 알고 있다.
지금 백산이 보여주고 있는 저 경지는 아무리 천재적인 머리를 가지고 있는 기재라 해도 이룰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하물며 지금껏 철목승이 보아온 백산은 그리 뛰어난 기재는 절대 아니었다. 단순히 남들보다 월등한 집착력을 가진 평범한 인물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 철목승과 갈태독을 당혹스럽게 하는 것은 백산의 얼굴에 남아있는 흉터였다.
백산 정도의 경지에 이른 자라면 분명 환골탈태(換骨奪胎)를 해도 몇 번은 했을 것인데 흉터가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다.
그들의 무공 상식으로는 이 또한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결국 환골탈태의 과정도 없이 지금의 경지에 도달해 있다는 것이지 않는가.
그렇다면 결론은 한가지밖에 없다. 무공(武功), 백산이 익히고 있는 무공에 모든 답이 들어있다는 말이 된다.
백산의 무공에 대해서 두 사람이 공통적으로 궁금해하고 있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그분의 말씀 중에 극선, 극마, 극사라는 말이 마음에 걸리네.
저 만다라의 경지에 이른 자가 이 세 가지를 포함한 자를 말한 것인지 아니면 셋 중에 아무 것으로나 화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인지…."
두 사람이 보고 있는 가운데 백산의 운공은 끝이 났고 천천히 본래의 자리로 하강하고 있었다.
땅속 깊숙이 박혀있던 천비들이 회수되어 발목과 손목으로 사라짐과 동시에 백산이 눈을 번쩍 떴다.
"으아! 개운하다."
두 손을 번쩍 쳐들고 기지개를 펴며 양쪽 다리의 무릎 부분을 가볍게 주물러댄다.
"이 친구야, 운기행공을 하고 났으면 몸 상태가 최적일 텐데 웬 기지개를 펴고 그러나?"
"어? 여기 있었소? 움직이지를 않고 가만히 있었더니 뼈마디가 욱신거려서…."
백산이 무릎을 툭툭 치면서 철목승을 쳐다보았다. 말은 그렇게 하고 있으나 그의 몸 상태는 최상이다.
올바른 신체에서 바른 정신이 나온다고 했던가. 몸 상태가 정상으로 돌아오자 갈태독을 대하는 데도 그리 위축되는 것 같지 않았다.
"너만 괜찮다면 우리의 비무를 지금 하는 것이 어떻겠냐?"
갈태독이 바로 비무를 제안해 왔다. 이번에는 그의 투기가 끓어오르는지 얼굴이 상기되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우담화와 만다라의 현세가 갈태독의 무혼을 자극한 모양이었다.
"좋습니다. 조용할 때 빨리 끝내는 것이 좋겠죠."
광견조원들의 팔 다리를 부러뜨렸던 그 황량한 장소에 오 장 거리를 사이에 둔 백산과 갈태독이 초연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서 있고
그들과 이십여 장 정도 떨어진 곳에는 긴장된 표정의 철목승이 두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천하제일인이라는 그가 자신보다 더 강한 무공을 가지고 있는 무인들의 비무를 지켜보아야 한다는 것이 그리 유쾌한 것만은 아니었는지,
약간은 호기심과 질시의 심정으로 비무를 준비하고 있는 두 사람을 주시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무공은 전부 일곱 초식이다. 처음 삼 초식은 천장지옥마공(千丈地獄魔功)의 무공이고
후반부의 네 개 초식은 천장지옥마공과 마불신승의 무상대능력(無上大能力)을 참고해서 창안한 무공이다.
나도 최선을 다할 것이다. 물론 너도 그렇겠지만 노인네라고 봐 줄 생각일랑 하지 마라."
갈태독의 어투에는 자신감이 배어나왔다. 무려 백년 동안을 연구하고 노력해서 이루어낸 무공이다.
중원무림에 이보다 더 강한 무공은 존재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가 원래 익히고 있었던 천장지옥마공은 최고의 강함을 추구하는 패도적인 무공이다.
반면에 마불신승이 익히고 있던 무상대능력은 소림 무공 중에서도 가장 부드러운 축에 속하는 무공이었다.
두 무공을 가지고 강(强)과 유(柔)를 모두 겸비한 새로운 무공을 창안해내었고, 그곳에다 혼돈의 기운을 심으려 했었다.
"제가 봐주고 할 그럴 정신이라도 있겠습니까? 최선을 다할 뿐이죠!"
수천비와 각천비를 가슴 앞쪽으로 세운 백산이 갈태독을 쳐다보며 하는 말이다.
심장이 뛰는 소리가 점점 커지는 것 같았다.
바로 이 기분이다. 과거 장한수와 싸웠을 때 느꼈던 그 기분이 온몸을 잠식해 들었다. 즐거움, 생사비무가 될지도 모르는데 주체할 수 없는 환희가 밀려왔다.
이런 것을 두고 무혼(武魂)이라 하는 것인가.
내공을 운기하고 있는지 주변의 대기들이 서서히 변화하고 있었다. 특히 갈태독 주변의 공기들은 가해지는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터져 나가며 사방으로 휘몰아쳤다.
"일초는 혈파(血波)라는 무공이다!"
따사로운 햇빛 아래서 귀찮은 파리를 쫓듯이 가볍게 손을 휘두르는 것처럼 단순한 동작, 그러나 그 손동작에 의해 일어나는 위력은 간단치가 않았다.
달빛 하나 없는 어두운 밤임에도 불구하고 붉은 파도가 넘실대듯 공간을 가르며 나아가는 선명한 핏빛 강기들,
백산의 전방을 완전히 장악하며 수천 개의 붉은 눈동자가 진득한 살기를 머금고 날아가고 있었다.
자신을 향해서 다가오는 붉은색의 파도를 본 백산의 몸이 그 자리에서 일장 가량을 떠오르며 손과 발이 눈이 따르지 못할 정도의 속도로 춤을 추기 시작했다.
"광풍노산(狂風怒山)!"
짤막한 외침이 흘러나오고 사방으로 비산하던 비도들에 의해 쏟아져 나온 강기들이 마치 물감이 번지듯 좌우로 펴져 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갈태독이 만들어 놓은 강기와는 모양이 달랐다.
갈태독의 핏빛 강기가 밀려오는 파도라면 백산이 만들어 놓은 붉은 강기는 거대한 벽이었다.
풍뢰곡(風雷谷)에서 자신의 자화상을 새긴다며 절벽에다 대고 시전했던 광풍노산, 절벽의 사방 이십여 장을 평평하게 깎아 버렸던 그의 무공이 처음으로 선보이고 있는 것이다.
멀리서 지켜보는 철목승의 눈에도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두 강기의 나아가는 속도는 느리게 진행되고 있었다.
수천수만 개의 강기가 파도처럼 나아가는 것과 이십 장 크기의 붉은 벽이 앞으로 나아가는 광경은 가히 공포와 전율이었다.
그러나 두 강기의 내부에 담고 있는 거력(巨力)과는 달리 혈파(血波)와 혈벽(血壁)의 부딪침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한 치의 밀림도 없이 부딪쳐간 두 강기는 새파란 뇌전(雷電)을 양 옆으로 쏟아내며 두 사람의 중앙에서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어느 순간, '픽' 소리와 함께 마지막 생명을 다한 촛불이 스러지는 것처럼 소멸되어 갔다.
"제 이초, 멸파(滅波)!"
더 이상의 대화가 필요 없음이다.
갈태독의 입에서 조용한 음성이 흘러나오고 그의 양손으로부터 적청색에 가까운 강기가 번쩍거리는 뇌전을 동반한 채 쏟아져 나왔다.
거대한 적청색의 강기는 열십자를 만들며 혈파보다는 조금 빠른 속도로 백산을 향해서 거세게 밀려가고, 백산에게 가까워질수록 크기가 작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백산의 키만큼 작아진 열십자의 강기에 내포된 힘은 일초인 혈파와 비교 자체가 불가능했다.
근처에 오기도 전에 백산의 의복이 갈가리 찢겨져 날리고 있었던 것이다.
백산이 손을 가슴으로 모으며 자신의 모든 감각을 개방했다. 강기를 깨트리기 위해서는 약점을 찾아야 했기 때문이다.
거의 완벽한 강기의 막처럼 보이는 열십자의 중심에서 미세한 공간이 감지되었다.
'한 몸체처럼 보이는 저 강기의 약점은 바로 중심이다.'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열십자의 중심을 향해서 몸을 날림과 동시에 두 손을 앞으로 찔러 넣었다.
붉은 혈광을 머금고 있던 수천비 여섯 개가 십자형 강기의 중심으로 박혀들었고 곧이어 양손을 옆으로 활짝 펼쳤다.
크크킁!
강기와 비도가 부딪치는 미약한 소음이 울리며 열십자로 형성되어 있던 강기가 찢어져 흩어졌다.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역도에 의해서 백산과 갈태독이 견디질 못하고 뒤로 밀려났다.
뒤쪽으로 물러나던 백산이 무릎도 굽히지 않은 채 그대로 갈태독을 향해서 나아가며 자신의 열두 개의 비도를 휘둘렀다.
"혈극참(血極慘)!"
초극 고수인 갈태독에게 사용한 백산의 선공(先攻)은 한천팽무도법의 일초인 혈극참이었다.
그러나 그 위력은 광견조가 시전한 일초와 근본부터가 달랐다.
백산이 가지고 있던 열두 개의 비도 전부에서 펼쳐지는 혈극참, 두 사람의 주변이 완전한 혈광으로 휩싸여 버렸다.
광견조가 시전한 혈극참이 단순한 도강이었다면 백산의 열두 개의 비도가 만들어낸 혈극참은 각각 천비들의 기운이 별도로 담겨있는 그야말로 하늘의 위력이었다.
갈태독이 혼돈의 심연이라 했던 것들,
백산의 몸속에 있는 수(水), 화(火), 목(木), 금(金), 토(土)의 오행기운을 포함하여
생(生), 사(死), 독(毒), 풍(風) 등 천지간의 모든 기운이 혈극참이라는 무공 속에 담겨있는 것이다.
흠칫 놀라던 갈태독이 이내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처음엔 백산이 시전하는 무공이 단순한 도강인지 알았다가 열두 개의 같은 초식 속에 담겨있는 기운들을 읽어낸 것이다.
"대단하구먼, 대단해!"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온 말이다. 비록 비무라고는 하지만 단 한 번의 실수가 자신의 목숨을 앗아가버릴 수 있는 그런 상황인데도 기분은 잔뜩 고조되어 있었다.
자신 정도의 고수는 강호에 없을 것으로 알았는데 상대가 존재하고 있었고,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동원하여 비무를 할 수 있다는 것이 그에게 더할 나위 없는 흥분과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었다.
자신의 존재감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 더 옳은 말이리라.
"지옥파(地獄波)!"
흥분의 여운이 아직 남아있는지 갈태독의 외침소리가 조금 커진 듯했다. 그의 몸에서 흑색의 운무덩어리가 뭉클뭉클 쏟아져 나오며 거대한 마신상을 형성하였다.
지옥마신의 현신(現身)이었다. 이마에 있는 거대한 뿔과 혈광이 번뜩이는 붉은 눈,
거의 전륜마신과 맞먹을 정도의 크기인 검은색의 마신이 사 장(四丈)이나 되어 보이는 거대한 두 팔을 휘두르며 백산의 혈극참(血極慘)을 막아내고 있었다.
픽! 픽! 픽픽픽!
하늘의 힘 두 개가 부딪쳤다고 보기에는 너무나 미약한 소리였다. 그러나 두 기운의 충돌여파는 멀리서 관전하고 있던 철목승의 눈에도 확연하게 보이고 있었다.
동심원을 그리며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엄청난 기운을….
철목승이 있는 곳까지 급격하게 밀려오던 충격파가 갑자기 벽에라도 막힌 듯 그 자리에서 서서히 사그라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철목승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싸우고 있는 공간 이십 장을 자신들의 영역으로 만들어놓고 두 무공의 충격파가 이십 장 이상 벗어나는 것을 서로가 막고 있었던 것이다.
철목승의 손바닥에서 물기가 흥건하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자신도 싸우고 싶었다.
두 사람이 비무하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면서 몇 번이고 뛰어나가 같이 어울리고 싶은 것을 간신히 억누르며 참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자신이 과연 저런 것들을 받아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싸우고 싶다는 열망과 질 수도 있다는 굴욕감, 이 두 가지 감정이 교차하면서 철목승을 땀에 젖게 하고 있었다.
철목승의 온몸이 땀으로 젖어들고 있던 그 순간, 비무자 두 사람은 자신들의 앞에 선명한 족적을 남기며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똑같이 다섯 발자국이었다.
"평범한 도강이 자네 손에서 나오니 천무(天武)로 바뀌는구먼!"
감탄했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갈태독의 어투가 반 경어로 변했다.
운공을 하는 것을 보고 이미 강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비무를 해보니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천장지옥마공이었네. 이제부터는 내가 창안한 무공일세. 아직 이름은 못 지었고 초식 명칭만 있다네."
백산이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짓고 있으나 내심으로는 꽤 긴장하고 있었다.
마도 서열 이위의 무공과 소림최고의 무공 중의 하나라는 무상대능력의 요체만을 가지고 만들어진 무공은 과연 어떤 것인가….
"무상천혈파(無上天血波)!"
갈태독의 입에서 낮지만 단호한 외침과 함께 그의 몸이 순식간에 백산의 면전으로 다가와 조금 전 혈파와 같은 형태의 백색 강기를 쏟아내었다.
"크윽!"
온몸에 강기가 적중된 백산의 몸이 허공을 날아서 십여 장 뒤쪽으로 거칠게 떨어졌다.
백산의 얼굴이 경악스럽게 변했다. 자신이 당했다는 것보다 갈태독의 움직임을 놓쳤다는 것이 더욱 놀라운 일이었다.
눈을 빤히 뜨고 있는 상태에서 자신의 앞으로 다가온 갈태독을 놓치고 거의 무방비 상태로 일장을 허용한 것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장님도 아니고 모든 감각이 살아있는 상태에서 상대의 움직임을 파악할 수 없다니….
무공을 익힌 후 처음으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당한 것이다.
'다쇠불알! 정신을 차려라 분명 무엇인가 있다. 아무 것도 없이 공간을 가르며 나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 공간을 가른다…?'
공간을 가른다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 인간의 몸으로 공간을 무시할 수 있는가.
물론 축지법이라는 도술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론상의 이야기고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질 않던가.
그런데 그 전설 같은 축지법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은 비무중이 아니던가. 상대가 축지법을 쓰던 도술을 쓰던 막아내야 한다. 백산이 표정을 굳히며 이를 악물었다.
'좋다, 빠르기라면 나도 자신 있다고….'
"무상지멸파(無上地滅波)!"
갈태독의 무언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백산의 몸이 뒤쪽으로 십여 장을 그대로 밀려났다. 일단은 무언(武諺)을 가지고 갈태독의 공격에 대항하려 해본 것이다.
"커억!"
가슴에 전해지는 통렬한 고통, 열십자의 붉은색의 강기가 백산의 가슴을 강타한 것이다.
목까지 넘어온 피를 억지로 삼켜 버렸다. 역시 편법은 통하지 않았다. 결국 음파가 전달되는 속도보다 더 빨리 움직이고 있다는 말이다.
상상할 수도 없는 상황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소리보다 더 빨리 움직이는 무공이 있다니.
백산이 최고의 보법이라 했던 혈우신보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상대의 기척을 감지해야 빈 공간을 발견할 수 있고 그곳으로 몸을 움직이게 되는데 도대체 갈태독의 몸은 감지가 되지 않고 있었다.
"무상신법이라 부른다. 내가 있는 주위로 삼십 장의 공간은 나의 것이다. 즉 나의 지배하에 있는 공간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무서운 말이었다. 자신이 있는 주변 삼십 장 내에서는 지금과 같은 가공할 속도로 움직일 수 있다는 말이다.
빠르기에는 자신이 있다고 했던 백산의 움직임으로도 손도 써보지 못할 정도의 속도였다.
'이것이 소림의 무공인가!'
하늘의 높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고금오천무라는 무공도 보았으나 이 정도는 결코 아니었다.
그러한 갈태독의 모습을 철목승도 보고 있었다. 그의 눈은 더할 수 없이 커지며 방금 전의 현실을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어댔다.
그도 분명히 목격했다. 갈태독의 몸이 자신의 눈으로도 쫓지 못할 정도로 움직였음을.
보았다는 것 자체를 의심하게 만들 정도의 빠른 몸놀림, 도저히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럼 저 무상신법이란 것이 소림의 금강부동신법(金剛不動身法)의 진실한 모습인가? 불영전륜쇄옥진이 백팔나한진의 모체였던 것처럼? 그런 것인가…?'
미친 사람처럼 계속해서 중얼거리던 철목승이 결론을 내렸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금강부동신법이란 무공과 비슷하지만 그 위력으로 볼 때 비교 자체가 불가능했다.
'백산, 이제는 어쩔 거냐? 상대는 의식이 없는 전륜나한도 아니고 너와 비슷한 경지의 초극 고수다. 이 난관을 어떻게 극복할 거냐….'
철목승이 깊어진 눈으로 백산을 쳐다보았다. 불영전륜쇄옥진이 아무리 극강하다 할지라도 그것을 구축하고 있는 매개체는 의식이 없는 존재였다.
즉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위험을 감지하지 못한다는 것이 약점이란 소리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자신만큼 강한 사람이 엄청난 신공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갈태독이 펼치고 있는 무상신법, 그것은 몸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공간을 좁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만큼 빠르다는 소리다.
손오공이 아무리 근두운을 타고 날고 또 날아도 부처님 손바닥 안에 있듯이 완전하게 장악된 저곳에서의 움직임이란 것은 허망한 몸짓에 불과할 뿐이었다.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다. 일단 공기의 흐름을 느낀 후에 쾌의 묘리를 적용하는 방법밖에.'
백산이 자신의 모든 감각을 개방하여 갈태독이 만들어두었다는 주변 삼십 장을 완전하게 통제한 후에 용미폭포에서 깨달았던 쾌의 원리를 적용하려 하고 있었다.
백산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눈으로 봐야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 백산은 두 눈을 감고 모든 감각을 개방하기 시작했다.
자신과 십여 장 떨어진 곳에서 갈태독의 존재감이 느껴지고 있었다.
'온다!'
자신의 전방에 있는 공기가 일직선으로 갈라지는 것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맨 처음 대기가 갈라지는 느낌을 받음과 동시에 백산의 몸이 뒤쪽으로 밀리며 오른손을 앞으로 뻗어내며 수천비를 발출했다.
"무상무극파(無上無極波)! 헉!"
외침과 동시에 백산의 앞으로 다가간 갈태독이 헛바람을 들이키며 그대로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무상무극파를 시전하려는 찰나에 자신의 왼쪽 가슴에 섬뜩한 살기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어느새 백산의 비도 세 개가 밀려들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이번에는 갈태독이 놀라고 말았다. 공간을 장악하고 있는 것처럼 빠른 무상신법을 피하는 것도 놀라운데 그 순간에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여 공격을 가하고 있다.
단 이 초만에 무상신법에 대응하는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갈태독뿐만 아니었다. 두 사람의 비무를 관전하고 있던 철목승의 입에서도 놀람의 외침이 흘러나왔다.
두 사람의 움직임을 보면 갈태독이 한 수 위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백산은 그것을 피하면서 공격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영감이 공간을 장악했다면 나는 공간을 파악할 수 있죠."
이제는 어느 정도 자신이 생겼는지 백산의 말투에 한층 여유가 묻어 나오고 있었다.
"무슨 소리냐?"
무인으로서의 궁금증이다. 무상신법을 익히고 얼마나 놀랐던가. 이 세상에 이것을 깨트릴 수 있는 무공은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비록 깨트리지는 못했지만 무상신법을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리는 방법을 찾은 놈이 나타난 것이다.
"영감이 만든 공간의 모든 것을 파악하고 있으면 되는 거죠. 대기의 흐름 말입니다."
백산의 말에 갈태독과 철목승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주변에 흐르는 공기를 이용하면 된다는 것이다. 무상신법이 너무 빨라서 공간을 장악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움직임이다.
움직임의 시작점을 파악하고 공격해 들어오는 위치를 잡을 수만 있다면 막을 수 있다는 말이 된다.
하지만 공간 속에 자신의 감각을 어떻게 퍼뜨려 놓을 것인가.
그것 또한 백산의 능력이었기에 무상신법만큼 가공하다 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마지막 초식밖에 없는 것 같구나. 이 무공은 내 나름대로 혼돈이란 것을 구성해본 것으로 미완의 무공이다."
더 이상은 공격해봐야 의미가 없다고 느꼈는지 바로 다음 단계로 넘어가 버리고 있었다.
어차피 자신은 공격하고 백산은 피하고 이런 대치가 계속될 터인데 시간만 보내는 그런 짓은 할 필요가 없음이다.
마지막 초식을 준비하고 있는 갈태독의 몸에서 붉고 검은 운무가 뭉클뭉클 솟아 나오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기운을 간직하고 있는 것처럼 붉은색도 검은색도 아닌 상태로 변하면서 서로 엉키며 사방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저것이 혼돈…."
철목승이 부지불식간에 외치는 소리였다.
그랬다. 갈태독은 나름대로 마료신승이 이야기했던 혼돈의 심연을 만들어보려고 했던 것이다.
혼돈의 상태를 만들어내는데 가장 큰 역할은 한 것은 의원으로서의 경력이었다.
의원이란 무엇이던가, 환자의 몸속에 흐르는 기(氣)의 상태로 치료여부를 판단하는 사람이다.
요컨대 여타 일반인들보다 천지간의 기운을 감지해내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말이다.
몸속에 흐르는 모든 기운을 유형화시킨다는 것은 지루할 정도로 힘들고 오랜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었지만 결국에는 해내고 말았다.
한번도 접해보지 못한 경지여서 제대로 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백산의 몸을 보면서 어느 정도는 맞았다는 것을 확신했다.
갈태독이 만들어놓은 공간을 바라본 백산의 표정이 흠칫 변했다. 그 운무 속에 포함되어 있는 기운을 느꼈기 때문이다.
약간은 부족한 감이 없지는 않았지만 거의 모든 기운을 다 포함하고 있는 것 같은 엄청난 거력이 내포되어 있었던 것이다.
'선공을 해야 한다. 먼저 공격을 하지 못하면 내가 당한다.'
몸을 회전시키면서 허공으로 솟아오르는 백산의 몸에서 바람이 불어 나오고 있었다.
점점 거세지는 광풍(狂風)이 주위의 대기를 감아올리기 시작했다.
무섭도록 빠른 회전력을 이용하여 갈태독이 만들어 놓은 검은색 혼돈의 공간 속에 있는 모든 것을 허공으로 빨아올리고 있었다.
백산의 손과 발에서 천비들이 일제히 튀어나오며 혈광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백산의 행동에 다급함을 느낀 갈태독이 자신의 마지막 기력을 짜내어 우렁찬 고함을 내질렀다.
"전륜지옥대능력(轉輪地獄大能力)--!"
"광풍… 캬악!"
잊어버렸다. 철목승의 마지막 무공을 보고 작명했던 무공의 이름을 순간적으로 잊어먹고 대신한 무언(武諺)이 캬악이다.
그러나 외침소리는 엄청나게 컸다. 귀혼곡을 뒤흔드는 거대한 외침이 터져 나오고 각천비와 수천비를 편 상태로 이미 회전을 하고 있었다.
과앙!
거대한 폭음과 함께 두 사람이 쏟아낸 파천의 힘이 서로 부딪치며 강력한 진동이 대지를 뒤흔들었다.
"크윽!"
고통스러운 신음소리와 함께 한 인형이 회오리 밖으로 거칠게 내동댕이쳐졌다.
갈태독이었다. 금강불괴지신을 가진 그가 도상을 입었는지 몸의 이곳저곳에 피를 흘리며 나가떨어진 것이다.
"으웩!"
백산도 한 모금의 피를 토해내며 무릎을 꿇고 힘들어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정말 엄청나군!'
갈태독의 마지막 전륜지옥대능력(轉輪地獄大能力)을 두고 한 말이다.
'선공을 했으니 망정이지 이곳에 뼈를 묻을 뻔했네!'
무언(武諺)은 늦게 나왔지만 각천비와 수천비가 튀어나온 순간 백산은 이미 그의 무공을 시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전력을 다해서 선공을 취하고 얻은 결과가 양패구상이었다. 피를 토해내서인지는 아니면 싸우고 싶었던 갈증이 해소되어서인지는 몰라도 속이 후련한 느낌이었다.
"가가!"
"백 공자!"
"형님!"
두 사람의 마지막 외침에 잠에서 깨어난 일행이 초막으로부터 뛰어나오면서 쓰러진 두 사람을 부축하고 있었다.
"허허! 아직도 혼돈이란 놈은 미약한가!"
허탈한 웃음이었다. 백년의 세월 동안 창안한 무공이었다. 무공의 끝을 보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완전히 자신만의 착각이었던 것이다.
'아직도 더 보완할 것이 남아있었군.'
백산과 비무에서 깨달은 것이다.
누가 이겼다고 할 수 없는 비무였다.
백산은 백산 나름대로 쾌라는 것에 대해서 더욱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고, 갈태독의 입장에서는 역시 세상은 넓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