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장소 : 석문산, 만덕산, 다산초당. (전남 강진군)
산행일시 : 2023. 12. 09.(토)
산행코스 : 소석문(66m) ~ 석문산(282.5m) ~ 통천문 ~ 사랑+구름다리 ~ 노적봉 전망대 ~ 용문사 삼거리 ~ 291.3봉 ~ 294.1봉 ~ 237.2봉 ~ 281.7봉 ~ 바람재 ~ 다산초당 삼거리 ~ 만덕산 깃대봉/청렴봉(412.1m) ~ 백련사 ~ 해월루 ~ 다산초당 ~ 다산박물관 ~ 석문공원 (총 14km 예정이었으나, 다산박물관에서 중단하여 10km 산행, 6시간 소요)
산행참석 : 19 백두.
<참고사항>
- 소석문~석문산~만덕산 구간은 암릉이 많고 암봉들을 오르내려야 해서 시간이 많이 걸리지만,
- 이정표와 안전시설이 잘 갖춰져 있어서 산행에 별다른 지장은 없다.
- 백련사~다산초당~선문공원 구간은 남파랑길 구간으로 선인들의 유적을 보며 걷는 멋진 트레킹 길이다.
- 산행 구간에 시간이 많이 소요되어 예정된 점심식사 시간에 맞추기 위해 다산박물관 앞에서 산행 종료.
<산행지도>
지난 산행에서 올랐던 진양기맥 한우산에서의 조망이 청명한 날씨 덕분에 기대보다 훨씬 좋았다. 하여 어떻게 하면 아침 7시는 넘어야 있을 아침 해돋이를 자굴산 정상에서 볼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있는데, 김 전무가 아프리카 케냐 출장으로 산행 참석이 어려우니 꼭 참석하고 싶은 진양기맥 자굴산 구간 산행을 후일로 미뤄 달라고 요청해 왔다. 그러지 않아도 아침 6시 이전 출발과 3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 자굴산 정상 도착을 7시 이후로 해야 하는 어려운 난제를 고민하고 있었던 참이라, 마지못하는 척 진양기맥 산행을 내년 3월 이후로 미루기로 하고 예정에 없던 뜻밖의 산행지 찾기에 나섰다. 초겨울 날씨에 따뜻한 남해안 쪽에서 조금은 수월하고 여유로운 산행지를 찾아 이곳저곳을 검토하다가, 옛날 덕룡산·주작산 산행 때 새벽에 오른 덕룡산에서 보았던 운해에 떠 있던 석문산~만덕산 능선이 문득 떠올랐고, 짧은 산행 거리는 백련사와 다산초당을 거쳐 석문공원으로 돌아오는 해파랑길 83코스를 이어서 걸으면 어느 정도 해결 될 듯이 보여 산행지를 강진 석문산과 만덕산 산행에 이은 백련사와 다산초당 트레킹으로 정했다.
날씨가 흐릴 것으로 예보되어 약간의 우려가 되기는 하였지만 겨울임에도 낮기온이 18도까지 오를 것이라 하여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했다. 다소 포근할 것으로 예보가 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겨울인지라 겨울 옷을 챙겨 입고서 산행에 나섰는데, 실제 기온이 20도 후반까지 오르며 가져간 물이 떨어져 갈증을 느낄 정도였고, TV 뉴스에는 반팔 차림으로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도되기도 했다. 겨울에 때아닌 여름철 찜통 산행의 고통을 겪게 될 것을 알 턱이 없는 우리는 두툼한 겨울 복장으로 버스에 올라 산행지인 강진으로 출발한다.
양재를 출발하는 버스에서 그간 쌓인 기사님에 대한 신뢰로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눈을 감고 단잠에 들었는데, 버스가 고속도로를 벗어난 듯한 느낌에 눈을 떠 보니 벌써 강진으로 들어서고 있다. 한두번 실눈을 뜬 것 같기는 하지만 꾀나 달게 잤기에 금방 맑은 정신을 되찾아서 차창 밖을 보니 밤안개가 자욱하다. 초행길인 좁은 도로에 밤안개까지 드리워져 있어서 사뭇 가슴이 쪼그라드는 느낌으로 한참을 지켜보는 사이에 소석문 주차장에 도착한다. 새벽 4시쯤이면 도착할 것으로 예상했는데 도중에 내린 비와 짙은 밤안개로 지체되어 5시를 넘기고 있다. 길고 힘든 야간운전을 무사히 마친 기사님께 수고하셨다는 인사를 건네고는 잠시 더 눈을 감고 있다가 사람들이 인생고를 해결하러 문을 여닫는 소리에 일어나 산행 준비를 시작한다.
밤안개가 흩어지며 주변 분간이 되기 시작하는 자그마한 공터에 공중화장실도 설치되어 있는 소석문 주차장에서, 예전에 걸었던 덕룡산 주작산은 개울을 건너 덕룡산 동봉 방향으로 이어지고, 만덕산과 석문산 방향 들머리는 서북쪽 봉황저수지 방향으로 30여 미터 진행하다가 우측 이정표가 있는 지점이다.
<소석문(小石門)>
전남 강진군 도암면 석문리에 있는 소석문골을 말하는데, 석문산을 기준으로 동쪽의 도암천이 흐르는 골짜기를 대석문 또는 석문이라 하고, 서쪽 봉황저수지에서 이어지는 물길이 흐르는 골짜기를 소석문이라 부른다. 즉 '석문'은 북동쪽 만덕산 줄기의 291봉과 석문산 사이의 골짜기이고, 소석문은 북동쪽 석문산에서 남서쪽 덕룡산 동봉 사이의 골짜기를 말한다. 소석문에서 오른쪽은 석문산으로 이어지고, 왼쪽 징검다리를 건너면 덕룡산 능선이 이어진다.
석문은 북동쪽의 만덕산에서 남서쪽의 덕룡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 중간에 하천으로 인하여 단절된 곳인데, 이 하천 양안에 솟아 있는 암석지형은 험악하고 모양은 마치 돌문처럼 생겼다 하여 그리 불리고 있다.
2006년의 기억과 별반 달라진 게 없는 징검다리를 건너 덕룡산으로 올라가는 등산로 들머리 전경.
석문산 남쪽 사면으로 이어진 등로를 따라 석문산을 우회하여 석문공원으로 가는 즐산팀들을 떠나보내고,
소석문 주차장에서 봉황 마을 방향으로 30여 미터 진행하면 우측에 석문산 등산로 이정표가 자리하고 있는데,
들머리의 이정표에는 정상이 0.73km, 석문공원이 1.73km로 표기되어 있어서 1시간쯤 후인 07:30쯤에 석문산 정상에 올라 일출을 맞이하려는 우리를 난감하게 한다. 700m를 한 시간에 가려면 어찌해야 할까?
들머리를 들어서자 바로 꾀나 가파른 오름길이 이어지더니,
시간이 많아 우측 150m 거리의 합장암터를 다녀오고 싶지만,
동행이 있고 어두운 밤이라 가 봐도 별반 보이는 게 없을 듯하여 바로 370m 남았다는 석문산 정상으로 진행하면,
남서쪽 하늘에 걸린 그믐달과 금성이 멋들어진 장면을 연출하고 있고,
작은 돌탑이 나타나며 돌계단길이 잠시 이어지다가,
바위 모서리가 날카로운 암릉을 매인 밧줄을 잡고 오르면,
날카롭게 솟은 바위 뒤로 바위의 꼭대기와 꼭 닮은 덕룡산의 동봉과 서봉이 돌아다 보이고,
짧은 너덜을 잠시 오르면,
남서쪽 소석문과 덕룡산 방향 조망이 트인 석룡산 정상 전망바위에 도착하는데,
아직 일출이 시작되려면 20여 분을 더 있어야 하기에 배낭을 내리고 해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기로 한다.
<강진만>
강진만은 탐진강의 하구이며 그 밖에도 많은 하천이 흘러들기 때문에 '아홉 고을의 물길이 흘러든다'라는 뜻으로 '구강포(九江浦)'로도 불린다.
석문산 정상 전망바위에서 2006년 힘겹게 걸었던 덕룡산 주작산 능선을 기억하며!
배낭을 열어 떡과 과일을 꺼내어 놓는데, 마침석문공원 방향에서 연세 지긋하신 지역 산꾼 한 분이 올라와 차 한잔 하시라는 권유에 스스럼없이 자리를 잡는다. 참으로 먹을 복이 많고 유쾌하신 분으로 자신의 노익장과 멋진 주변 조망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는다.
동쪽 강진만에 드리워진 구름으로 언제 모습을 드러낼지 알 수 없는 아침해를 마냥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라,
석문산 인증을 남기고 석문공원 방향 내림길로 들어서면,
<석문산(272m)>
전남 강진군 도암면 석문산(해발 272m)은 산세가 빼어나 마치 금강산을 축소해 놓은 것 같다고 해서 ‘남도의 소금강’이라 불린다. 산허리를 뚫고 도암만으로 흘러가는 곳에 깎아 세운 듯한 절벽은 마치 문설주가 서 있는 것 같다. 다산 정약용 선생(1762∼1836)의 외손자인 방산 윤정기(1814∼1879), 조선시대 학자인 옥봉 백광훈(1537∼1582) 등이 석문산의 아름다운 절경을 노래한 시가 전해지고 있다.
가야 할 만덕산이 암봉들 너머에서 살짝 모습을 드러내며 '올 테면 와바!'라며 으름장을 놓는 듯하고,
잎사귀를 떨궈 앙상해진 나뭇가지와 삐죽삐죽 솟은 암릉이 동색으로 보이는 암릉을 내려서는데,
암릉의 배경 역할을 하는 파란 하늘에 선명한 제트구름이 별똥별의 잔해인 듯 보이고,
다소간 완만하게 이어지던 능선길이 급경사 내림길로 바뀌더니,
조릿대 지대로 들어서며 석문산의 이미지에 어울리지 않는 호젓한 등로가 이어지더니,
언젠가는 떠오를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던 태양이 구름을 뚫고 찬란한 존재를 과시하는 사이에,
우측 합장암터 갈림길 이정표를 지나게 된다.
갈림길을 지나자 가야 할 석문계곡 건너편의 암봉이 위압적인 모습으로 다가서며,
291봉 남쪽 사면에 자리한 용문사도 시야에 들어오고,
<강진 용문사(龍門寺)>
용문사는 다산초당과 백련사가 있는 만덕산과 주작산 덕룡산을 잇는 석문산 기슭에 있는 사찰이다. 원래는 만덕산 백련사의 암자로 석문사로 불렸는데, 1947년 박계수향이 개축하여 용문사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가파른 내림길을 내려서는데,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는 통천문 안내판을 지나면,
<통천문>
거대한 바위와 바위가 만나 문이 만들어졌는데, 사람들은 이곳을 하늘로 통하는 문이라고 해서 '통천문'이라 불렀다. 통천문을 통해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해서 옛날 나무꾼들이 땀을 식히는 장소로 유명한 곳이다.
통천문 안내판 바로 앞의 이 바위가 통천문의 잔해인지는 알 수 없으나 바위 사이로 석문계곡 조망이 멋지다.
날카로운 바위들이 솟아있는 능선을 따라 주의하여 내려서면,
구멍이 숭숭 뚫린 묘지가 호기심을 자극하고,
소석문에서 석문산을 우회하여 오는 오솔길에 접속하여 좌측 구름다리 방향으로 진행하면,
좌측 낭떠러지 아래로 구름다리가 살짝 보이는 암릉에 '세종대왕(탕건) 바위'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는데,
<세종대왕(탕건) 바위>
세종대왕이 익선관을 쓰고 인자한 모습으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형상의 바위로, 세종대왕의 가슴으로 뱀 한 마리가 생동감 있게 기어 올라가고 있는 형상은 세종대왕의 자애로운 모습으로 보아 뱀이 아니라 평범한 민중들이 아닐까 생각되는 형태이다. [설명판 내용]
난데없이 세종대왕 바위라니 하는 의문을 가지며 주변의 바위 암릉들을 살펴보아도 잘 보이지 않더니,
좌측 능선의 바위암릉에서 탕건을 쓴 사람 모양의 바위를 찾아내었는데,
좀 더 확실하게 조망하기 위해서는 구름다리 아래에 있는 포토존에서 보면 더욱 뚜렷하게 보인다고 한다.
석문산과 만덕산 능선을 이어주는 ' 사랑+구름다리' 조망.
<석문공원 사랑+구름다리>
사랑플러스 구름다리는 길이 111m, 폭 1.5m의 국내에서 가장 긴 산악 현수형 출렁다리로, 만덕산(해발 412m)과 석문산의 단절된 등산로를 연결해 남도 명품길의 새로운 명소가 되었다. 구름다리 양 끝에는 하트 모양의 게이트 겸 포토존 조형물이 설치되어 등산객들에게는 만남의 장소로, 연인들에게는 사랑이 이뤄지는 장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구름다리에서 보는 석문산과 만덕산의 빼어난 경관은 보는 이에게 절로 감탄사를 자아내게 한다.
능선 좌측 골짜기로 이어지는 등로로 진행하여 바위너덜지대를 내려서면,
아래 석문공원에서 올라오는 데크길에 접속하여 좌측 사랑+구름다리로 진행하고,
'사랑+구름다리' 양끝에 설치한 하트 포토존 조형물을 지나 구름다리를 건넌다.
<석문공원 사랑+구름다리>
2016년에 준공된 '사랑+구름다리'는 길이 111m, 폭 1.5m의 국내에서 가장 긴 산악 현수형 출렁다리로, 만덕산(해발 412m)과 석문산의 단절된 등산로를 연결해 남도 명품길의 새로운 명소가 되었다. 구름다리 양 끝에는 하트 모양의 게이트 겸 포토존 조형물이 설치되어 등산객들에게는 만남의 장소로, 연인들에게는 사랑이 이뤄지는 장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구름다리에서 보는 석문산과 만덕산의 빼어난 경관은 보는 이에게 절로 감탄사가 나오게 한다.
사랑+구름다리와 가야 할 만덕산으로 이어진 291봉 방향.
'사랑+구름다리'를 건너 우측 석문공원으로 내려가는 길을 두고 직진의 노적봉전망대(70m) 방향 계단을 오르면,
'T'자 노적봉전망대 갈림길이 나오는데 우측의 백련사 방향으로 진행하여야 하지만,
좌틀하여 30m 지점의 노적봉 전망대로 오르면,
노적봉 전망대가 나오는데 석문산과 석문공원 조망을 보며 아침식사를 하기로 한다.
노적봉전망대에서 격주로 진행되는 백두산우회 야외 조찬회.
아침식사를 마치고 왔던 길을 되돌아 내려가,
노적봉전망대 갈림길에서 직진의 백련산 방향 오름길로 들어서서,
제법 가파른 오름길을 오르면,
지나온 석문산 방향으로 조망이 시원하게 펼쳐지는 전망데크에 도착하게 된다.
우측 사면 방향 뚜렷한 갈림길을 두고 희미한 직진의 능선 등로를 따르다가,
날카로운 암릉을 우회하는 우측 사면으로 진행하여,
바위 너덜지대를 올라서면,
지나온 석문산이 시원스레 조망되는 전망바위를 지나게 되고,
암릉이 아닌 능선은 가파른 오름길이라 그 또한 힘겹게 올라,
작은 능선 봉우리에 올라서면 앞쪽으로 다시 올라야 할 거대한 암봉이 마중 나와 있고,
암봉을 좌측으로 돌아서 오르는 가이드 로프가 매인 등로를 따라 오르다가,
산양이나 다닐 듯이 보이는 절벽으로 이어진 가이드 로프를 잡고서 절벽 사면을 타고 오르면,
지나온 석문산은 물론 뒤쪽 멀리로 주작산과 두륜산 줄기도 조망되는 전망바위에 올라서게 되는데,
한계단씩 높은 전망대에 오를수록 눈길이 미치는 조망은 훨씬 더 멀리까지 보이고,
잠시 더 완만해진 능선길을 따르니,
앞서 갔던 분들이 우측 용문사 방향 갈림길 삼거리에서 배낭을 내리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기다리던 분들과 함께 거칠지만 다소간 완만해진 능선길을 오르면,
별다른 표식이 없는 291.3봉 정상을 지나게 되고,
바로 까탈스런 암릉을 가드로프의 도움을 받으며 내려서면,
우측 만덕광업(규사, 석재 등) 채광지 갈림길에서 직진의 능선 방향으로 들어서서 암릉길을 이어가게 된다.
291.3봉을 오른 이후로는 작은 암봉과 암릉이 연이어 나타나는 능선길이 이어지는데,
오르내림은 크지 않지만 날카로운 바위 암릉과 탁 트인 조망이 수시로 나타나며 산꾼의 걸음을 더디게 하고,
거인 예술가가 만들어 놓은 듯한 바위 조형물도 수시로 나타나 산꾼의 시간을 소모시킨다.
날카로운 암릉에 낙엽까지 수북이 덮인 능선 등로를 조심스레 따르면,
가야 할 만덕산 방향으로 넘어야 할 봉우리가 몇 개인지 가늠조차 어렵고,
암봉 우회로에 이정표(바람재 3,278m)가 있는 지점에서 우틀하여 내려서면,
이내 호젓한 능선길이 이어지다가,
작은 암봉에 오르면 우측 가우도가 허우적대는 강진만이 내려다 보이고,
묘지가 있는 안부를 지나 잠시 오르면,
이 능선에서는 제일 높은 봉우리인 294봉에 도착하는데, 여러 개의 표지기 외에는 별다른 표식이 없다.
294봉을 내려서면 이내 호젓한 능선 숲길이 잠시 이어지다가,
다시 암릉으로 들어서면 옅은 연무가 아쉽기는 하지만 시야가 트이고,
옛 지도에는 능선 위로 등로가 표시된 암봉을 우회하는 등로를 따르면,
이정표가 있는 빼곡한 동백나무숲을 통과하게 되고,
다시 날카로운 바위들이 위협하는 암릉길로 들어서면 가야 할 만덕산도 시야에 들어오고,
좁은 바위벼랑길을 조심스럽게 지나면,
가야 할 만덕산으로 이어진 능선이 시야에 들어오며 짧다고 얕보았던 코스가 그리 녹록지가 않음을 절감한다.
삐끗하면 여지없어 보이는 바위 날등을 지나면,
가야 할 뾰족한 만덕산으로 이어진 능선의 봉우리도 그리 만만해 보이지가 않고,
연이어 나타나는 작은 암릉조차도 '산객의 시간일랑 놓고 가라'며 아우성인데,
이 암봉만 내려서면 만덕산 직전의 바람재까지는 육산구간이니 한결 조심조심 수직의 암릉을 내려서서,
길흔적이 있는 안부를 지나서는 직진의 능선을 두고 좌틀하여 내려서야 하고,
좌측 아래로 신설 임도가 지나는 안부를 지나 제법 가파른 오름길을 오르면,
237.2봉을 살짝 우회한 지점의 이정표를 지나게 된다.
육산 능선길로 이어지는 바람재를 향해 지체된 산행 시간을 만회하려 걸음을 서둘러,
밋밋한 안부를 지나 완만한 능선길을 따르면,
곧게 자란 참나무가 지키는 봉우리를 지나게 되고,
호젓한 등로를 따라 좌측 덕서리에서 오르는 수레길에 접속하여 우측 오름길로 오르면,
잡초와 잡목이 자라난 넓은 공터에 석축과 벙커가 있는 281봉을 지나게 된다.
앞쪽을 막아선 우람해 보이는 만덕산이 걱정과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데,
좌전방 나뭇가지 사이로 강진읍의 임천저수지가 내려다 보이고,
낙엽이 바스락거리는 호젓한 등로를 따르다가 우측 묘지 갈림길 이정표를 지나면,
이내 북쪽 도암면 덕서리와 남쪽 다산초당이 있는 만덕리를 잇는 안부 사거리인 바람재에 도착하는데,
새벽에 석문산을 우회하여 지난 즐산팀들이 쉼을 하고 있다가 재회의 기쁨을 나눈다.
만덕산을 향한 오름길로 들어서면,
높지 않은 바위 절벽을 오르게 되고,
가파른 능선 오름길을 따라 암릉 위로 올라서면,
석문산 방향의 힘들게 걸어온 능선이 돌아다 보이고,
커다란 암봉이 능선을 막아선 지점에서 능선 우측 사면으로 내려서서,
암봉의 절벽 아래를 따라 우회허여,
다시 능선 위로 올라서면,
조릿대가 덮고 있는 능선길이 이어진다.
힘겹게 오른 산객들이 잠시 쉬어간 흔적이 남아있는 산죽 능선길을 지나면,
우측 아래로 잠시 후에 갈 백련사가 내려다 보이고,
날카로운 암릉 우측을 따라 잠시 진행하면,
우측 다산초당 방향 갈림길을 지나게 된다.
빤히 보이는 만덕산으로 이어진 암릉을 한가닥 로프에 의지하여 지나,
작은 암봉을 넘으면 또다른 암봉이 앞을 가로막어 서고,
날카로운 바위에 부딪히지 않게 조심하여 암릉을 올라서서,
멀리서는 보이지 않던 가파른 오름길을 오르면,
우측 백련사 방향 갈림길 이정표가 마중나와 있는 만덕산 깃대봉(408.6m) 정상에 도착하는데,
<만덕산(萬德山, 408.6m)>
전남 강진군 도암면 봉황리에 위치한 산이다. 남쪽사면에는 기암괴석과 절벽이 많고 동백나무 등의 상록 활엽수가 많다. 특히 이 일대의 동백나무 군락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 귀양살이를 할 때 거주하던 다산 초당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강진)에 "만덕산 앞 봉우리는 돌 창고 같고, 뒷 봉우리는 연꽃 같도다."라는 고려의 승려 혜일(慧一)의 시를 인용하여 소개하고 있다. 이를 통해 지명이 고려 시대 이전부터 불렸음을 엿볼 수 있다. 동일 문헌에 "전라도 강진현 남쪽에 우뚝 솟아 맑고 빼어난 산이 바닷가에 이르러 머물렀으니, 만덕산(萬德山)이라 한다."는 윤회(尹淮)의 기문이 소개되어 있다. 『청구도』에 만덕산에 "석봉은 아름다운 연꽃 같도다(石峯如美蓉)"라고 기록되어 있다. 『대동여지도』에 만덕산에 백련사(白蓮寺)가 표기되어 있다. 이 사찰은 신라 때에 세워지고 고려의 원묘대사가 중수하였는데, 무의대사 때에 이르러서는 법화도량이 되어 동방의 이름난 절로 일컬어졌다. 이러한 명성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널리 알려져 이 산을 백련산(白蓮山)이라고도 부른다. 『1872년지방지도』에는 돌산의 모습과 함께 그 아래에 만덕사(萬德寺)가 묘사되어 있다. 관련 지명으로 만덕리(萬德里)가 있는데, 이것은 만덕사에서 유래하였다.
강진만 바다를 한눈에 굽어보기 좋은 곳이 만덕산이다. 능선에는 상당한 크기의 암석들이 많으며, 남쪽에는 사적 제107호인 다산선생의 초당과 백련사가 언덕 사이로 나란히 있다. 이곳 만덕산은 야생차가 많이 자생하여 다산이라고도 불리며, 다산 정약용 선생의 호가 이곳 만덕산을 배경으로 한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조선말기 당대 실학을 집대성한 대학자이다. 강진에 유배되어 18년 간 귀양생활 중, 8년 간을 강진읍 동문 밖에서 머물다 이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곳에서 후진을 가르치고, 저술에 전념하여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500여 권에 달하는 저서를 완성했다. 정상 남쪽 골짜기의 백련사 주변에는 3ha에 걸쳐서 7,000여 그루의 동백나무가 자라고 있는데, 특히 절 앞에 많다. 천연기념물 제151호로 지정되어 있다.
깃대봉 정상석 옆에는 '청렴봉(淸濂峰)'이라는 또다른 표지석이 자리하고 있는데,
요즘 공무원들은 너무 청렴한 나머지 융통성조차 없어서 문제가 아닌가 한다.
전남공무원교육원이 이곳 산자락에 2020년 이전 확정된 것을 기념하고,
다산의 얼이 숨쉬는 청렴정신을 가다듬다.
- 2016년 새해 아침 강진군
청렴해 볼 건덕지도 없는 백두들!
청명한 날이었으면 일렬로 늘어선 석문봉, 덕룡산, 두륜산이 조망되었을 터인데, 또 언제 와!
만덕산 정상 인증을 남기고는 갈림길 이정표로 되돌아나와 동쪽 백련사 방향 내림길로 들어서서,
혹여 떨어질까 가슴이 쪼그라드는 급경사 암릉길을 내려서면,
가파른 암릉에서 떨어지는 산객들을 위한 배려인지는 알 수 없으나 낙엽이 두텁게 덮인 능선을 지나게 되고,
완만해진 능선길을 따르다가,
직진의 옥련사(1.90km) 방향 등로를 두고 우측 백련사로 내려가게 된다.
우틀하여 백련사 방향 등로로 들어서서,
낙엽이 두텁게 덮인 호젓한 등로를 따라 내려서면,
나뭇가지 사이로 백련사 경내가 살짝 보이더니,
이내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동백나무숲으로 둘러싸인 백련사 경내로 들어서게 된다.
<백련사(白蓮寺)>
강진군 도암면(道岩面) 만덕리(萬德里) 만덕산에 있는 백련사(白蓮寺)의 원래 이름은 만덕사(萬德寺)로, 신라 46대 문성왕 원년(839)에 무염국사(無染國師: 801∼888)가 창건했다고 전해온다. 1211년(고려 희종 7년)에 원묘국사 요세(圓妙國師 了世:1163~1245) 스님이 옛 터에 중창하고 백련결사로 크게 이름을 날려 백련사(白蓮社)라고 고쳤는데, 이때 절 이름 사(寺)가 아닌 단체 사(社)로 한 것은 1208년 최씨 무신정권 이후 요세 스님이 문벌 귀족 체제와 결탁한 기존 불교계에 대항하여 천태종(天台宗)을 주창하면서 사찰 개혁 운동인 백련결사운동을 전개할 때 이곳을 중심지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 뒤 이 절에서는 120년 동안을 이어 고려의 8 국사(國師)를 배출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만덕사로 불렸지만 근래에 다시 이름을 고쳐 백련사라고 부르게 되었다.
백련사는 자랑이 많으나 그중에서 유명한 것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동백나무숲이다. 아름드리 동백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서 있는 3,000여 평에 달하는 숲은 사시사철 푸르고 두터운 잎으로 인해 대낮에도 고즈넉한 분위기를 형성한다. 이 동백나무숲을 지나 다산초당으로 가는 산책길에는 백련사에서 재배하는 차밭과 야생차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백련사가 자리한 산은 고려시대부터 자생해 온 야생 차밭이 있어서 '다산'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때문에 정약용이 이곳에 유배와 지냈다는 의미로 '다산'이라는 호를 지어 사용했다고 전한다.
백련사 경내로 내려서는 백두들.
동백나무숲이 터널을 이룬 백련사 입구 방향.
<백련사(白蓮寺) 동백나무숲(천연기념물 제151호)>
동백나무는 한국, 일본, 중국 등의 따뜻한 지방에 분포하며, 우리나라에서는 남쪽 해안이나 섬에서 자란다. 동백은 꽃이 피는 시기에 따라 춘백(春栢), 추백(秋栢), 동백(冬栢)으로 나뉘는데, 백련사 동백은 대부분이 봄에 꽃을 피우기 때문에 춘백에 해당하며, 동백꽃이 필 무렵이면 매우 아름다워 이 지역의 명소로 알려져 있다.
백련사의 동백림은 강진 백련사 부근 1.3ha에 평균 수고 7m쯤 되는 동백나무 1,500여 그루가 숲을 이루고 있으며, 이 밖에 굴참나무, 비자나무, 후박나무, 푸조나무 등도 군데군데 자라고 있으며, 밑에는 차나무 밭이 조성되어 있다. 백련사 동백나무숲을 지나 다산초당으로 가는 오솔길이 있는데, 이 길은 유배 중이던 다산 정약용(丁若鏞:1762~1836)이 백련사를 왕래할 때 이용하던 길이라고 한다. 동백나무숲은 백련사의 주지였던 아암 혜장선사와 다산이 차를 마시며 서로 주역을 논하며 교류하던 곳으로 알려져 사색의 숲이자 구도의 숲으로도 불린다.
백련사 앞 동백나무숲 전경.
백련사 경내로 들어서서 우측으로 가다가 커다란 배롱나무 한그루가 있는 지점에서 우측 만경루 안으로 들어서서 오르면,
백련사 대웅보전이 나오는데, 대웅보전 현판은 서예가들이 서체를 연구하는 중요한 자료라고 한다.
<백련사 대웅전(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36호)>
백련사 대웅전은 1760년(영조 때) 화재를 입어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된 후 1762년에 현재의 대웅보전을 중건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다포집이며 기둥이 지붕 무게를 감당하기 겨운 듯 네 귀퉁이에 활주(活柱)를 받쳐 놓았다. 이 대웅전에서는 건물보다 현판 글씨 구경이 앞선다. 「대웅(大雄)」, 「보전(寶殿)」으로 두 쪽으로 나뉘어 걸려 있는 현판은 동국진체(東國眞體)를 완성한 조선 3대 명필인 원교(員嶠) 이광사(李匡師, 1705~1777)의 글씨이다. 이광사는 여기서 가까운 완도 옆 신지도에서 1755년부터 16년간 유배생활을 하던 중 대웅전 중건 때인 1762년에 백련사를 찾아와서 써준 것이라 한다.
강진 백련사 대웅전을 배경으로.
대웅전 앞에서 좌틀하여 사적비 앞으로 진행하면,
겨울임에도 노랗고 붉은 잎사귀를 달고 있는 단풍나무가 계절의 변화를 잊게 하고,
백련사 부속선원 가는 길로 들어서다가 시간이 부족하다며 발길을 돌려,
만경루 입구 배롱나무가 있는 곳으로 되돌아가 이정표의 다산박물관 방향으로 좌틀하여 내려서다가,
<백련사 배롱나무>
백련사 배롱나무는 수령 200년 이상인 나무로, '백일 동안 붉은 꽃을 피운다'하여 백일홍이라 부른다. 백일홍이 배롱나무가 된 연유는, '백일홍'이 발음하는 대로 '배길홍'으로 바뀌고, 이것은 다시 '배기롱'을 거쳐 '배롱'으로 변해 배롱나무가 된 것이라고 한다.
꽃말은 '부귀(富貴)'이며, 배롱나무가 어느 정도 성장하면 거친 겉껍질을 벗고 반질반질한 얇은 껍질인 채로 겨울을 나는데, 사찰이나 서원에 배롱나무가 많은 까닭은 스님들과 유생들이 해마다 껍질을 벗는 배롱나무처럼 '세속적 욕망과 번뇌를 벗어버리고 수행에 전념하라'는 의미라고 한다.
아직 가을의 모습이 역력한 백련사 앞 뜰 전경.
다시 우틀하여 높다란 축대 아래를 따라 진행하면,
'다산초당 가는 길' 들머리가 나온다.
<다산초당 가는 길>
백련사에서 다산초당 가는 길은 다산이 지음(知音)이었던 백련사 주지 혜장선사를 만나기 위해 오가던 800여 미터의 산길로, 홀로 사색하며 걷기에 좋은 호젓한 오솔길이다. 다산초당의 뒷산은 야생차나무가 많아서 「다산(茶山)」이라고 불렸으며, 정약용의 호는 바로 이 산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지방관이 백성을 다스리는 자세(목민심서), 백성이 억울함이 없도록 공정한 법 집행에 대한 연구(흠흠신서), 국가의 전반적 체제와 경영 혁신(경세유표)에 고민했던 다산이 걷던 길이라 요즘에도 출마를 앞둔 정치인들이 많이 찾아오는 길로도 유명하다.
아직 가을빛이 역력한 오솔길로 들어서면,
'다산 초당 가는 길'은 이내 차밭과 동백숲 사이 널찍한 산책로로 이어지며,
이제 막 가을이 무르익고 있는 숲길을 거니는 호사를 누리는데,
옛날 다산이 혜장과 나누었을 이야기를 떠올리며 흐뭇한 미소를 머금고 걸었을 모습이 그려지고,
강진만이 바라다보이는 차밭 위를 지나 다산초당으로 이어지는 오솔길을 따르다가,
만덕산 능선으로 오르는 원목 계단길을 오르면,
능선 사거리 쉼터에서 좌측 100m 지점의 해월루를 다녀오기로 하고 좌측 능선길로 들어서면,
이내 멋들어진 정자인 해월루에 도착한다.
<강진 해월루>
2007년 강진군에서 지은 누각으로, 오래전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아마 다산 정약용이 이 길을 거닐면서 강진만이 보이는 이곳에서 쉬어가지 않았을까 하여 이곳에 누각을 지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해월루에 오르면 동쪽으로 강진만이 바라다 보인다.
해월루에 올라 다산의 귀양살이에 대해 격론을 벌이는 백두들.
다시 능선 사거리로 돌아나와 다산초당 방향 오솔길로 들어서면,
<남도 명품길 - 다산과 혜장(惠藏, 1772~1811)>
다산이 혜장을 처음 만나게 된 것은 강진으로 유배 온 지 3년이 지난 44세 되던 해(1805년) 4월 17일이었다. 백련사 주지인 혜장은 다산을 몹시 만나고 싶어 했는데, 다산은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혜장을 만나러 간다. 혜장은 비록 승려였지만 유교 경전에 해박하였고, 특히 《주역》에 대한 공부가 깊었다. 혜장을 만난 다산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뒤 돌아오게 되고, 다산과 헤어진 뒤 뒤늦게 다산임을 알아챈 혜장은 부리나케 다산을 쫓아가 손을 잡게 되는데, 당시 혜장의 나이는 34세였다. 벗이 될 만한 이가 없는 궁벽한 주막에 살던 다산에게 혜장은 목마름을 해갈하는 감로수였다. 《주역》을 두고 나누던 대화는 밤이 깊도록 계속되었고, 혜장은 다산의 학문 깊이에 감복하게 된다. 혜장은 해남 대흥사 출신의 뛰어난 학승이었고, 유학에도 식견이 높아, 다산이 혜장을 만나자마자 경학에 밝은 식견을 찬탄했고, 혜장 스님도 다산의 학문에 깊이 빠져들었다. 두 사람은 수시로 서로를 찾았고 《주역》과 《역경》 등 학문을 토론하고 시를 지으며 차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같은 해 다산의 장남 학연이 부친을 만나러 강진에 왔지만, 주막집 거처가 비좁은 것을 알고 혜장이 보은산 고성사의 작은 선방을 하나 마련해 주었고, 다산은 이곳을 '寶恩山房(보은산방)'이라 하였다. 또한 혜장은 백련사 부근의 질 좋은 찻잎으로 차를 만들어 다산에게 보내기도 하였으며, 차를 좋아했던 다산은 차가 떨어지면 차를 보내달라는 시를 지어 혜장에게 보내기도 하였다.
1809년 대흥사에 있던 초의(草衣, 1786~1866)를 다산에게 소개한 이도 혜장이었는데, 다산에게 혜장은 외로운 귀양살이를 잊게 해 준 귀한 벗이었고, 혜장에게 다산은 오랫동안 갈망해 온 배움의 갈증을 해갈해 준 스승과도 같았다. 혜장의 호인 '아암(兒庵)'도 거침없고 직선적인 혜장의 성격을 '아이처럼 고분고분해지라'라는 뜻으로 다산이 지어 주었다. 1811년 혜장은 40살의 이른 나이로 입적하게 되는데, 다산은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비명과 시를 지어 추모하였다. 혜명 사후 초의는 다산을 스승으로 모시고 유서(儒書)와 시학(詩學)을 배웠으며, 후일 다성(茶聖)으로 추앙받는 초의가 조선의 사대부와 활발하게 교류할 수 있었던 유학적 터전을 물려받게 된다. [남도명품길 - 다산과 혜장]
만년에 걸어도 좋을 호젓한 산책길이 이어지다가,
이정표와 '남도 명품길' 안내판이 있는 쉼터 벤치를 지나면,
18년의 유배생활로 예순에 가까워진 다산도 쉬이 걸을 수 있도록 나무계단이 설치된 오솔길이 이어지고,
낮은 대나무 펜스가 쳐진 산책로를 따르면.
오솔길 좌측에 다산초당에 다 왔음을 알리는 '백련사 가는 길' 안내판과 '천일각' 정자가 나타난다.
천일각 모습.
<천일각(天一閣)>
천일각(天一閣)은 '하늘 끝 벼랑에 세워진 정자'라는 뜻인 ‘천애일각(天涯一閣)’의 줄임말이다. 해남이 ‘땅끝’(土末)이라면, 강진은 ‘하늘 끝’인 셈으로, 임금으로부터 멀고 먼 남쪽 땅에 유배된 이의 심정을 표현한 말이다.
천일각은 다산의 유배 시절에는 없던 건물인데, 돌아가신 정조대왕과 흑산도에서 유배 중인 형님 정약전이 그리울 땐 이 언덕에 서서 강진만을 바라보며 스산한 마음을 달랬으리란 추측으로 강진군이 1975년에 세운 정자다. 다산과 함께 유배길에 올랐던 형 정약전은 16년의 흑산도 유배생활 중 남도의 어류를 분석한 《자산어보》를 저술하여 실사구시의 학문을 삶으로 실현하였지만, 해배되지 못하고 흑산도에서 병사하였다.
동암에서 천일각에 이르기 전 왼편으로 나 있는 길은 '백련사 가는 길'로, 유배생활 동안 벗이자 스승이요 제자였던 혜장선사와 다산을 이어주는 통로였다. [천일각과 백련사 가는 길]
천일각에서 바라다 보이는 강진만은 탐진강의 하구이기도 하고, 그 밖에도 많은 하천이 흘러들기 때문에 '아홉 고을의 물길이 흘러든다'라는 뜻으로 '구강포(九江浦)'로도 불린다.
천일각을 뒤로하고 다산초당으로 접어들면,
'다산동암(茶山東菴)'과 '보정산방(寶丁山房)' 편액이 걸려 있는 동암 앞을 지나서,
<동암(東庵)>
송풍루(松風樓)라고도 불리는 동암은 다산이 저술에 필요한 2천여 권의 책을 갖추고 기거하며 손님을 맞았던 곳이다. 다산은 초당에 있는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이곳에 머물며 집필에 몰두했으며, 목민관이 지녀야 할 정신과 실천 방법을 적은 <목민심서>도 이곳에서 완성했다. 1976년 서암과 함께 다시 세웠는데, 현판 중 '寶丁山房'(보정산방 : 정약용을 보배롭게 모시는 산방) 현판은 추사 김정희가 중년쯤 쓴 글씨로 명필 다운 능숙한 경지를 보인다. 김정희는 다산보다 24년 연하였지만 평소 정약용을 몹시 존경했다. 다산동암(茶山洞庵)은 다산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다.
작은 연못과 다산초당이 자리하고 있다.
다산초당의 건물들은 비록 최근에 지어진 건물이지만 다산의 자취를 흠모하는 사람들과 많은 관광객들에게는 정감이 느끼지는 곳이다. 강진만이 한눈에 굽어 보이는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만덕산 기슭에 자리한 다산초당은 다산 정약용과 관련된 문화재로 1963년에 다산초당을 포함한 관련 유적 일대가 사적 제107호로 지정되었다. 공식 명칭은 '강진 다산 정약용유적' 또는 '강진 정다산유적'이다. 원래는 초가였지만 현재는 기와집 형태로 바뀌었기 때문에 유적지로 불리고 있다.
다산초당은 다산 정약용이 1801년 신유박해로 인해 강진으로 귀양을 와서 18년(1801~1818)의 유배기간 동안 11년가량(1808~1818)을 머물며 생활하던 집이다. 이곳에서 정약용은 유배가 끝날 때까지 생활하며 학문에 몰두한 끝에 목민심서를 비롯한 숱한 저술들을 남겼다. 현판에 판각된 '다산초당'이란 글씨는 추사 김정희 선생의 친필을 집자해서 모각한 것이다.
동암과 다산초당 사이에 연가지석산을 가운데에 둔 직사각형 형태의 연못.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
동암과 다산초당 사이에 있는 연못 가운데에 돌을 쌓아 만든 작은 돌산을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이라 하는데, 다산 4경 중 제4경이다. 다산은 흑산도로 유배를 간 형 정약전을 그리워하여, 원래 이곳에 있던 작은 연못을 크게 넓히고 탐진 강가에서 돌을 주어와 조그마한 봉우리를 쌓아 석가산(石假山)이라고 하였다. 다산은 이 연못에서 잉어를 키웠는데, 그날그날 잉어의 상태를 살펴 날씨를 예측하였다고 한다. 그 관찰력과 지혜가 대단하기만 하다. 후일 유배생활에서 풀려난 후 고향으로 돌아 간 다산은 제자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이 연못에서 기르던 잉어의 안부를 물을 만큼 귀하게 여겼다고 한다.
다산초당과 '茶山 丁若鏞先生 遺像'
다산초당(茶山草堂)은 본래는 초당(草堂)이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작은 초가였으나, 1958년 강진의 해남 윤씨들로 구성된 '다산유적보존회'가 주선하여 다산초당을 비롯하여 다산이 생활한 동암(東庵)과 제자들이 유숙한 서암(西庵)을 기와집으로 복원하였고, 1963년에 다산초당을 포함한 관련 유적 일대가 사적 제107호로 지정되었다. '초당'은 오늘날 초등학교와 같은 뜻이라고 한다.
다산(茶山) 정약용은 여유당(與猶堂), 삼미집(三眉集), 열수(洌水), 사암(俟菴) 등 여러 호 외에 천주교 세례명으로는 요한(Johan)이라 하였다. 정조 임금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으며, 한강 600m를 건너는 아치형 ‘배다리’를 설계·완공하여 화성행궁을 가능하게 하였고, 유형원과 함께 수원성 축성 설계를 하고, 거중기(擧重機: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해 적은 힘으로 무거운 물건을 들어 올리는 기구로, 정약용이 개발한 거중기는 40근의 힘으로 25,000근(625배)이나 되는 돌을 들어 올려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채석장에서 약 7t 이상의 무거운 돌을 들어 올려 유형거에 실을 때 사용하였다) · 녹노(轆轤:긴 장대 끝에 도르래를 달고 끈을 얼레에 연결해 큰 돌을 높이 들어 올려 성벽을 쌓는 기구로, 전체 높이가 11m에 이른다) · 유형거(游衡車:목재나 석재를 운반하는 수레로 비탈길에서도 무거운 짐을 쉽게 운반할 수 있게 제작됐다) 등의 신기재를 개발하여 수원성(화성)을 쌓는 기간을 10년에서 2년 9개월로 크게 단축시켰다.
1800년 6월 다산을 총애했던 정조가 승하하고 11살 순조가 즉위한 뒤, 1801년 신유년에 발생한 천주교[邪學] 박해사건에 연루되어, 셋째 형 정약종과 이가환, 이승환 등은 죽임을 당했고, 둘째 형 정약전은 신지도(薪智島)에, 자신은 경상도 장기(長鬐)로 유배되었다가, 동년 10월 조카사위 황사영 백서(帛書) 사건이 발생하여 다시 서울로 압송 투옥되었다가, 11월에 정약전은 흑산도(黑山島)로, 그 자신은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그의 유배생활은 강진 읍내의 주막인 동문매반가(東門賣飯家:동문에 있는 밥을 파는 곳) 주막 노파의 선의로 객사 한 칸을 얻어 살게 되었는데, 유배생활 초기에는 절필하고 생을 포기하려고 하였으나 동네 아이들을 가르쳐 달라는 주모의 청에 다시 붓을 들고 서당을 열어 황상, 이청 등을 가르쳤다. 그는 4년간 거처한 객사를 사의재(四宜齋)라 하였는데, 이는 맑은 생각, 단정한 용모, 말과 행동을 올바르게 하는 이가 거처하는 곳이란 뜻이다. 야사에는 이 주모의 수양딸이 정약용을 흠모한 끝에 정을 통하고 여식까지 낳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사의재는 강진군이 2007년에 복원해서 문화 관광 해설을 제공하는 장소로 쓰이고 있다.
사의재 이후 1805년 겨울부터 백련사 주지 혜장(惠藏)의 권유에 따라 강진읍 보은산에 있는 고성사의 보은산방(寶恩山房)에 머물며 주역을 연구하였고, 그다음 해부터 강진의 제자 이청(李晴, 자 鶴來)의 집에서 거주하다가, 47세이던 1808년(순조 8) 봄에 만덕사(萬德寺) 서쪽 귤동(橘洞 : 현재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에 있는 처사(處士) 윤단(尹慱)의 산정(山亭)으로 옮겼다. 이 초가가 유배생활 후반부 1808년부터 1818년까지 10년을 머물면서 역사에 빛나는 학문적 업적을 남긴 곳으로 '다산초당' 혹은 다산서옥(茶山書屋)이라고 부른다.
공이 다산으로 거처를 옮긴 이후 11년 동안(1808~1818) 윤규로의 네 아들과 조카 둘을 포함한 18명의 제자를 길러냈고,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표(經世遺表), 흠흠신서(欽欽新書) 등 182책 503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을 집필했다. 그리고 이를 총정리한 『여유당전서』는 철학, 법제, 종교, 악경, 의술, 천문, 측량, 건축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장래에 도움이 될 학문의 방향을 제시하였고, 이는 세계적으로도 학술적 연구 자료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때문에 이곳은 실학이라 일컬어지는 조선 후기 학문 흐름의 성지가 되는 땅이 되었고, 유네스코는 2012년에 「세계기념인물」로 '프랑스혁명에 영향을 준 철학자인 루소'와 '휴머니즘을 지향한 작가 헤세', '근대화에 기여한 실학자 정약용', '탄생 150주년의 드뷔시' 4명을 선정하였다.
훗날 베트남의 혁명가 호찌민은 자신의 관 속에 《목민심서》를 함께 담기를 원했다고 하는 일화가 전하는 등, 시대적 국경을 초월한 다산의 학문의 깊이를 느끼게 한다.
다산초당 앞마당에 있는 '다조(茶竈)'
다조(茶竈)는 다산 4경 중 제3경으로, 다산초당 앞마당에 놓인 큼직한 반석이다. 다산이 이곳에 오기 전부터 있었던 이 돌은, 선생이 약천의 물을 떠다가 다조(茶竈)를 부뚜막 삼아 주변에서 모은 솔방울로 숯불을 피워 찻물을 만들었다고 한다. 평생 차를 좋아했던 다산 선생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특별한 장소이다.
다산초당 서편 아래에 자리한 서암(西庵)과 茶星閣(다성각) 현판.
<다산초당과 서암(西庵)>
초당은 다산이 제자들을 가르치고 책을 썼던 곳이다. 원래는 윤단(尹慱)의 산정(山亭)이었으나 서로 교분을 나누면서 그에게 거처로 제공되었다. 1957년 다산유적보존회가 허물어진 초가를 치우고 다시 지으면서 기와로 복원했다. 서암(西庵)은 윤종기 등 18인의 제자가 기거하던 곳이다. 차와 벗하며 밤늦도록 학문을 탐구한다는 뜻으로 다성각(茶星閣)이라고도 하며, 1808년에 지어져 잡초 속에 흔적만 남아 있던 것을 1975년 강진군에서 다시 세웠다. '茶星閣(다성각)' 현판은 완당 김정희 선생의 글씨로, 다산이 이곳에서 무려 500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이 가능했던 것은 고도로 숙련된 능력을 가진 제자들이 힘을 보탠 덕분이었다고 한다.
서암에서 올려다본 다산초당 모습.
다산초당을 뒤로하고 내려서면,
오솔길 좌측에 다산 정약용의 제자 순암 윤종진의 묘가 자리하고 있고,
<다산의 제자 윤종진(尹鍾軫)의 묘>
다산 선생이 초당에서 양성한 18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순암(淳菴) 윤종진(尹鍾軫, 1803~1879)은 다산을 초당으로 모셔 온 윤규로의 넷째 아들로, 자는 금계, 호는 순암이며, 부친은 강진읍 내에서 다산을 모셔온 윤규로이다. 다산 선생께서는 다산초당에서 제자들을 문답식으로 지도하며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표(經世遺表), 흠흠신서(欽欽新書) 등 182책 503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을 집필했는데, 이 집필에는 18인의 제자들의 역할이 컸다. 다산은 몸이 약하고 체구가 작은 순암을 위해 순암호기(淳菴號記)를 직접 써 주어 호연지기를 키우게 했다. 다산이 1818년 18년 만에 유배에서 해배되어 고향인 남양주로 돌아가자 순암은 18인의 제자들과 함께 다산계(茶山契)를 조직해 평생 동안 차를 만들어 보냈으며, 이 차는 금릉다산향(金陵茶山香)이란 이름으로 전해졌다. 그는 1867년에 진사가 되었고, 1866년 병인양요 때와 1869년에 국가가 위기에 처하자 의병을 모아 참여하였으며, 추사 김정희, 백파 신헌구와 교유하였다. 문집으로는 순암총서를 남겼다. 배위 광주 이씨와 함께 묻혀 있으며, 현재의 비문은 1914년 성균관박사 이금이 썼다.
순암 윤종진 묘소 전경.
잠시 더 오솔길을 따라 내려가면,
다산초당 가는 길 입구로 내려서게 되고,
'다산처럼'이라는 도자기 판매점 앞을 지난다.
'정다산 유적' 설명 패널과 '다산초당에서 백련사 가는 길' 약도 및 '삼남대로를 따라가는 정약용 남도유배길' 안내판.
<정다산유적 안내판(丁茶山 遺跡)>
강진은 조선 후기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이 유배되어 18년간 머문 곳이다. 그중 가장 오랜 기간(11년) 머물며 후진 양성과 실학을 집대성한 성지가 바로 이곳 다산초당이다. 그를 아끼던 정조가 세상을 떠난 후인 1801년(순조 원년) 신유박해에 뒤이은 황사영백서사건에 연루되어 강진으로 유배된 다산은 사의재, 고성사 보은선방을 등을 거쳐 1808년에 외가(해남윤씨)에서 마련해 준 이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유배가 풀리던 1818년까지 다산은 이곳에 머물며 제자를 가르치고 글 읽기와 집필에 몰두하여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600여 권의 저서를 남겼다.
철문이 잠겨 있는 '귤송당(橘頌堂)' 전경.
<귤송당(橘頌堂)>
다산이 47세이던 1808년 봄에 강진 보은산 고성사에서 윤단이 귤동의 윤씨장정(다산초당)으로 다산을 모시고 왔다. 지금은 윤단의 후손들이 살고 있고, 귤송당 편액은 추사 김정희가 썼다.
귤송당(橘頌堂)은 다산초당이 위치한 곳이 강진군 도암면 귤동(橘洞) 마을이었기 때문에 이를 근거로 ‘귤원(橘園)’이란 아호를 썼던 윤규로의 당호이거나 정약용의 외손과 관련이 있는 인물일 것으로 추정된다.
마을안길을 따라 다산박물관 방향으로 내려가면,
우측 전라남도인재개발원 방향 갈림길 이정표를 지나고,
옛 정취가 그대로 느껴지는 돌람길을 따르면,
마을 아낙들의 수다가 흘러넘칠 듯이 보이는 우물을 지나고,
다산초당 주차장에 도착하여 석문산, 만덕산 산행과 백련사 다산초당 둘러보기를 마감한다.
강진읍에 있는 탕에서 땀을 닦고,
바로 앞에 있는 '은행나무'라는 남도 한정식 식당에서,
모처럼 우리에 옛 맛을 음미하며 즐거운 뒤풀이 시간을 가지고는,
집으로 가는 먼 여정에 오른다.
귀경길 군산휴게소에서 본 가창오리의 군무.
이제 9기맥 산행도 팔공 2구간, 진양 3구간을 포함하여 호미기맥만 남은 상태라,
내년 상반기면 예정했던 마루금 산행을 모두 마치게 된다.
그러면 저런 새들의 군무가 펼쳐지는 서해랑길,
수많은 섬들이 흩뿌려진 남파랑길로 접어들어,
두런두런 세상사는 예기를 나누며
인간세상을 두루 거닐 수 있을 터이다.
첫댓글 남도버킷리스트중 으뜸! 작지만 옹골찬 석문산, 만덕산, 문화유적지 다산초당까지, 무엇보다도 강진 한정식을...2탄을 기대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