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장 고독(孤獨)한 영웅(英雄)들
소녀의 볼은 발갛게 상기된다.
백무영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있었다.
비록 몸을 온천수 속에 푹 담가 두고 있기는 하지만, 그가 벌거벗고 있다
는 것은 달라지지 않는다.
소녀는 애써 백무영 쪽을 보지 않고자 했다.
"서둘러요. 자칫 늦다가는 순찰부 쪽 무사들에게 발각될 수 있어요."
소녀는 초조해 하고 있었다.
백무영은 소녀가 꽤나 귀엽다 느끼며 입술을 떼었다.
"넌 누구지?"
"난… 계화(桂花)예요."
"계화? 누구의 심부름으로 날 찾은 거냐?"
"냉혈살흔 나으리를 필요로 하는 분이 계십니다. 전 그분의 몸종입니다."
"날 필요로 한다면……?"
백무영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온천수 속에서 우수(右手)를 쑥 꺼내 들었다.
"누군가를 죽여 달라는 거냐?"
소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눈을 약간 내렸다.
여자의 침묵(沈默)은 긍정이라던가?
냉혈살흔은 혜성처럼 부각된 희대의 암살자다. 그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라면 분명 누군가를 죽이고 싶어하는 사람일 것이다.
"난 대가를 많이 받아야 일을 착수한다."
"그건 알고 있어요. 그리고 대가를 받지 못할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돼
요. 주인님은 부자니까요."
"좋아. 구미가 당기는구나."
백무영은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소녀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렸다.
솔직히 그녀로서는 사내의 벗은 몸을 처음으로 보는 것이다.
백무영은 흥얼흥얼 콧노래를 불러 가며 옷을 걸쳤다.
'수줍어하는 걸 보니, 닳고 닳은 아이는 아니야!'
백무영은 천천히 몸의 물기를 닦은 다음에 흰 유삼으로 몸을 휘어 감았
다.
밤공기가 차갑다. 완연한 초겨울 날씨.
연환마교의 호의무사들에게는 누비 솜옷이 한 벌씩 지급되었다.
신분이 낮은 무사들에게 겨울이란 견디기 힘든 계절이다.
밤을 새며 보초를 서다가 손발이 꽁꽁 얼어붙는 동상(凍傷)을 입기 쉽다.
강호무사들은 동상에 걸리는 걸 무서워한다. 특히 손가락에 동상이 걸리
게 되면, 정교한 초식을 구사하는 데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뼛속으로 저미는 북풍(北風).
살 조각이 잘 갈린 면도에 의해 한 조각씩 저미어지는 듯하다.
백무영은 인적이 없는 길을 골라 치달려가는 녹의소녀를 뒤따라 마교 깊
은 곳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소녀의 경공은 연청삼초수라는 것으로, 제법 빼어난 수준이었다.
백무영은 삼 성의 내공만으로도 소녀가 혼신 공력을 다해 시전하는 속도
를 유유히 뒤따라갈 수 있었다.
달빛은 검은 구름에 휘어 감겼다.
백무영이 접어든 곳은 다른 건물에 비할 수 없이 화려한 건물의 후문(後
門) 쪽이었다.
'화려하기가 황궁보다 더한데!'
백무영은 무수한 장소를 거쳐 보았으되, 지금 접어드는 장소처럼 화려한
곳은 처음이었다.
아름드리 기둥이 모조리 대리석(大理石)이다.
바닥도 대리석이며, 벽 또한 대리석이다.
멀리서 건물을 보면 거대한 흰 코끼리가 웅크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계화가 안내한 장소는 십장생(十長生) 병풍(屛風)이 펼쳐져 있는 단아한
정실(靜室)이었다.
"기다리십시오!"
계화는 절을 한 다음에 문 밖으로 사라져 갔다.
백무영은 팔짱을 낀 채 방 가운데로 다가갔다.
팔선탁이 놓여 있는 바, 팔선탁의 재질은 자단목(紫檀木)이다.
탁자 위에는 금섬향로(金蟾香爐)가 놓여 있으며, 보라색 향연이 허공으로
피어 올랐다.
향연은 달콤하고 신비했다. 한참 향기를 들이마시다 보면, 정신이 몽롱해
질 정도.
'이 정도 건물에 머물 사람이라면, 연환마교에서 높은 지위에 있을 텐데
…….'
백무영은 용천요(龍天窯)에서 만들어진 청화연화문취병(靑華蓮花紋翠甁)
하나를 쳐들어 봤다.
방 안의 즙기는 하나같이 고가의 골동품으로서, 일반인들은 구경하기조차
힘든 물건들이다.
백무영의 눈길은 문의 좌측 벽에 걸리어 있는 한 자루 고검(古劍)에 돌리
어졌다. 검은 안족(雁足)에 의해 벽에 걸리어 있는 바, 길이가 이 척 팔
촌 정도였다. 검집에는 구룡(九龍)의 문양이 양각(陽刻)되어 있으며, 아홉
마리 용의 눈 부위에는 손톱만한 홍보석(紅寶石)이 박혀 찬란한 빛을 뿜
어 냈다.
'절세기병(絶世奇兵)이다!'
백무영은 만병신기보(萬兵神器譜) 안의 한 구절을 기억할 수 있었다.
검은 무수한 등급으로 나뉘어지는 바, 최고의 검은 신기(神氣)를 지니고
있다.
신기를 지닌 검은 극소수에 불과하며, 대부분 춘추전국(春秋戰國)시대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벽에 걸린 검은 구야자가 만든 성검(聖劍) 가운데 하나였다.
"구야자의 검이 여기에 있다니……."
백무영은 검에 대해 집착하는 바가 많은지라, 검집을 손가락으로 쓰다듬
었다.
바로 그 때, 뒤쪽으로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것은 환광(幻光)! 용천(龍天)이나 거궐(巨厥), 담로(曇露)에 뒤지지 않
는 명검이에요."
어느 틈엔가 한 여인이 방 안에 접어들었다.
그녀는 연보라색 궁장(宮裝) 차림인 바 구름처럼 틀어 올린 운발(雲髮)이
며 양 팔목, 옷자락에 보석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기에 걸을 때마다 짤랑
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신발은 구슬을 꿰어 만든 보혜(寶鞋)였으며, 왼손에는 산호(珊瑚)가 장식
된 공작선(孔雀扇)을 쥐고 있다.
나이는 이십대 후반, 눈빛이 벽안(碧眼)이고 머리카락이 황갈색이라는 게
이채로웠다.
절세적인 미모라고는 하지 못할 것이되, 천에 하나 있을까 말까 할 정도
로 아름다운 여인이다.
한 가지 묘한 점은, 여인이 지금 현재 술에 취해 있다는 것이었다.
"바란다면 줄 수 있어요, 냉혈살흔!"
여인은 뜨거운 호흡을 흘리며 다가섰다.
키가 꽤 큰 편이었는지라, 백무영에 비해 한 치 정도 작을 뿐이다. 물이
오를 대로 오른 복숭아에서 이러한 향기가 흘러 나올지?여인의 육체에서
는 감미롭고 뇌쇄적인 육향(肉香)이 흘러 나왔다.
'이 여인이 계화의 주인인가?'
백무영은 궁장미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궁장미녀는 퇴폐적인 웃음을 흘리면서 탁자 쪽으로 다가섰다.
그는 다짜고짜 탁자 위에서 금병(金甁)을 집어 들었다.
금병을 금잔(金盞)에 대고 기울이자, 붉은 빛깔이 도는 액체가 흘러 나와
잔을 채웠다.
금병 안에 든 것은 독하디독한 모태주(茅苔酒)였다.
여인은 주저 없이 술 한 잔을 비운 다음에, 빈 잔을 백무영에게 넘겨 주
었다.
"한 잔 마셔요. 기분이 좋아질 테니까."
여인의 눈에는 색기(色氣)가 그득했다.
전체적으로 방탕하고 퇴폐적으로 보이는 여인, 그녀는 술 내음을 풀풀 흘
리면서 백무영 쪽으로 조금씩 다가섰다.
백무영은 궁장미녀가 내미는 술잔을 사양하며 메마른 어조로 대꾸했다.
"사업 중에는 술을 삼가하오."
"호호… 건조한 성격이군요. 술을 마시면 세상이 달라 보이거늘, 술을 마
다하다니… 호호호……!"
여인은 천장 쪽을 바라보며 퇴폐적으로 웃었다.
그녀는 발작적으로 웃어제끼다가는 갑자기 차디찬 표정을 지었다.
"날 음탕한 여자로 보아선 안 돼요. 내가 원할 경우, 냉혈살흔 따위의 애
송이는 쥐도 새도 모르게 처치할 수 있는 실권을 갖고 있으니까."
"그럼 왜 나를 청하셨소이까?"
"죽어야 할 자가 있어요. 난 오래 전부터 그를 죽이려 했어요. 그래서 쭈
욱 사람을 찾아다녔는데… 호호! 그를 죽일 만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지
요. 그래서 좌절하고 있었는데, 귀하에 대한 소문을 듣고 귀하를 부른 겁
니다."
궁장미녀는 미친 사람처럼 표독스럽게 말하다가 다시 한 잔 술을 따랐다.
술은 딸기 빛깔의 입술에 대어졌다.
백무영은 입술이 벌어지는 걸 물끄러미 바라봤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여인의 좌수가 쳐들리면서 백무영의 가슴에 열여덟 개의 손그림자가 떠
올랐다.
일컬어 비파환영수(琵琶幻影手)!
여인의 좌수가 백무영의 가슴을 연쇄타혈(連鎖打穴)로 점하는 찰나, 백무
영은 우회금룡수(迂廻禽龍手)라는 금나수를 시전했다.
그의 손은 늦게 쳐들렸음에도 불구하고, 훨씬 빠르게 떠올랐다.
찰나의 순간, 궁장미녀의 손은 백무영의 손아귀에 쥐어졌다.
"용서하십시오, 부인! 목숨은 하나뿐인지라 소중히 아낄 수밖에 없소이
다."
"호호호… 비파환영수의 암격을 막다니!"
궁장미녀는 노여워하기는커녕 도리어 즐겁게 웃었다.
그녀는 백무영이 손을 풀어 주기 무섭게, 손바닥으로 머리카락을 빗어 넘
겼다.
문득, 그녀의 눈빛이 슬픈 파란색으로 반짝거렸다.
'벽안(碧眼)이다!'
백무영은 그녀가 중원인이 아니라 이국여인(異國女人)이라는 걸 알 수 있
었다.
그는 궁장미녀에 대해 신비감과 호기심을 느꼈으되, 전혀 그러한 내색을
하지 않고 무뚝뚝히 말했다.
"난 할 일이 많은 사람이외다. 부인과 더불어 시비를 일으키고 싶지 않으
니, 용건을 말해 주시오."
"호호… 소문대로 차디차군요. 호호! 귀하가 어쩌다가 이 지겨운 악마의
소굴에 걸려들었는지……."
"……!"
"연환마교는 무서운 곳이에요. 사람들은 태상교주를 포용력이 큰 인물로
여기나, 그건 사실과 달라요. 그는 편집적이며 냉혹한 인물. 그는 겉으로
만 자신의 적을 용서해 주고 있는 것이지, 실제적으로 그가 바란다면…
그의 친위무사에 의해 단 닷새 만에 모든 반대자는 제거되어 버립니다.
태상교주는 악마예요."
궁장미녀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백무영은 힐끗 그녀의 눈을 들여다봤다. 그녀의 눈에는 엷은 습막이 번지
고 있었다.
'울고 있군!'
궁장미녀는 어깨를 들썩이며 가늘게 울었다. 그러나 그녀의 어조는 표독
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는 권모술수를 써서 마도천하를 굴복시켰으며, 나아가 천하무림에 군
림(君臨)하고자 하지요. 그는 자신의 야망으로 인해 다른 사람이 희생되
더라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폭군이에요."
설마… 궁장미녀는 함백을 죽여 달라고 하는 것인가?
"하지만… 하지만……."
궁장미녀의 눈빛이 흩트러졌다.
그녀는 금잔을 꽈악 쥔 채 희고 보드라운 살을 가늘게 떨었다.
"그는 신과 같은 인물! 누구도 그에게 대항할 수 없어요. 천하 모든 사람
이 힘을 합해도 그를 죽이진 못해요."
그녀는 그렇게 말한 다음, 백무영을 올려다봤다.
요염하고 음탕하기만 하던 눈빛이 꽤나 슬퍼 보였다.
백무영은 저도 모르게 궁장미녀에게 연민의 정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사람을 죽여 본 적이 있지요?"
"꽤… 많이……."
"죽일 때의 기분이 어떤가요?"
"그런 건 생각하지 않소이다. 삶이니, 죽음이니, 심오한 이치를 생각하다
간 살인을 쉽게 할 수 없기에."
"편리한 감정을 지니고 있군요."
"후후… 강호의 밑바닥 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믿는 건 손과 발뿐이오.
더 믿는 게 있다면, 황금(黃金)이랄까?"
"생각하는 게 태상교주와 비슷하군요. 그래요, 그는 누구도 믿지 못하는
사람이에요. 그가 믿는 건 자신의 무공뿐이지요. 그러하기에, 매일같이 마
공을 연마하고 있는 겁니다."
궁장미녀의 옷에서는 보광이 어른거렸다.
그녀가 몸에 매달고 있는 보석의 값만 하더라도, 십만 냥을 호가할 것이
다.
어쩌면 그녀는 강호에서 가장 부유한 여인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냉혈살흔, 귀하는 누구든 죽일 수 있나요?"
"죽지 않는 사람은 없소. 기회만 정확히 포착한다면, 누구든 죽일 수 있
소."
"호호… 태상교주가 어이해 귀하처럼 위험한 인물을 입교시켰는지 이해
할 수 없어요. 아마도 귀하를 입교시켜서 자신의 반대자들을 겁먹게 하는
지도……."
"반대자들?"
"겉으로만 태상교주에게 아첨을 하고, 속으로는 태상교주를 죽이고자 하
는 자들이 무수해요. 대부분의 무사들이 태상교주가 쓰러지기를 바라지
요."
궁장미녀의 눈빛이 암울해졌다.
그녀는 함백에 대해 미묘한 감정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는 함백을 증오하고 있으며, 또한 존경하고 있었다.
"태상교주는 심마(心魔)에 휘어 감겨 있어요."
"심마?"
"이십 년 전의 번뇌(煩惱)지요. 난 알아요. 그러한 심마로 인해 태상교주
가 고립된다는 것을."
"……."
"심마를 없애야 해요. 그래서 귀하를 청한 거예요."
궁장미녀는 그렇게 말하다가 손뼉을 쳤다.
잠시 후, 계화가 금쟁반을 들고 접어들었다.
계화는 탁자 위에 금쟁반을 올려놓고 뒷걸음질쳐서 사라져 갔다.
금쟁반 위에는 세 개의 옥갑이 놓여 있었다.
용갑(龍匣),
호갑(虎匣),
봉황갑(鳳凰匣).
옥갑의 가치만 하더라도 일현(一縣)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이건 착수금이에요. 나머지는 성사한 후에 주겠어요."
궁장미녀는 손을 써서 옥갑 가운데 용갑을 열었다.
칠채보광(七彩寶光)이 눈을 자극한다.
엄지손톱 크기의 보석알이 수십 개 들어 있었다.
"칠채보주(七彩寶珠)!"
백무영의 입이 가볍게 벌어졌다.
"호호… 서천축(西天竺) 향지국(香至國)의 물건이지요. 하나만 있어도 십
대(十代)가 먹고 살 수 있지요."
궁장미녀는 한 줌의 칠채보주를 어린애들 장난감 정도로 취급했다.
이윽고 그녀는 두 번째 옥갑을 열었다.
그 안에는 섬칫한 물체가 들어 있었다.
눈처럼 흰 피부를 지닌 뱀(蛇) 한 마리.
뱀의 머리에는 붉은 벼슬이 돋아 있는 바, 멀리서 보면 마치 붉은 관을
쓴 듯하다.
뱀은 똬리를 튼 채 머물러 있다가 뚜껑이 열리자, 눈알을 무섭게 번들거
렸다.
뱀의 눈빛은 벽록색(碧綠色).
마치 두 개의 야광주가 반짝거리는 것 같다.
"이 뱀을 압니까?"
"아오. 이 뱀은 북천산(北天山)에서 설련(雪蓮)만 먹고 산다는 설상홍선백
사(雪上紅線白蛇). 머리에 관이 달린 것으로 보아, 삼천 년 묵은 영사(靈
蛇)구료. 이 정도라면 가히 사왕(蛇王)이오."
"호호호… 식견이 풍부하군요. 그래요, 이 뱀은 설상홍선백사예요. 이 뱀
의 내담(內膽)을 복용한다면, 내공이 일 갑자 정도 찰나적으로 증강이 되
지요."
궁장미녀는 오만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백무영을 얕잡아 보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돌아가신 아버님이 내 열다섯 살 생일날, 선물한 거지요. 이것도 주겠어
요."
"으음……."
"호호… 그리고 이것도!"
궁장미녀는 또다시 옥갑 뚜껑을 열었다.
마지막 옥갑에는 누리끼리한 표지를 지닌 소책자(小冊子) 한 권이 들어
있었다.
소책자 표지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환영비마록(幻影飛魔錄)>
궁장미녀는 소책자를 꺼내며 어깨를 가볍게 으쓱거렸다.
"아버지가 남칠성(南七省)을 제패할 때 시전하시던 무공이 여기 다 기록
되어 있어요. 불행히도 이건 여자가 익히지 못하는지라, 내겐 무용지물이
에요. 환영비마록을 익히면, 태상교주와 싸워도 일천 초를 버틸 수 있어
요."
세 개의 옥갑 안에 든 물건 가운데 가장 큰 가치를 지닌 것은 환영비마
록이었다.
환영비마록의 가치는 백무영이 암기한 은밀십구편에 버금간다.
백무영의 미간에 진땀이 맺히고 있었다.
"환영비마록은 대리왕부(大理王府)의 지존이며 남칠성의 맹주였던 환영대
제(幻影大帝) 고검풍(古劍風)의 비급인데……?"
환영대제 고검풍은 일배분 이전의 거마이다.
그가 이룩했던 세력은 연환마교에 버금간다.
그는 소림사마저 겁내지 않았던 인물로, 전성기 때에는 동해칠십이군도
(東海七十二群島)마저 장악하고 패권을 휘두른 바 있다.
그는 십 년 전에 죽었으며, 그의 휘하세력은 연환마교에 병탄된 바 있다.
"그분은 내 아버님! 환영비마록이 내 손에 있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닙니
까?"
"으음……."
백무영은 입 속이 탐을 느꼈다.
환영대제의 딸이라면, 엄청난 신분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환영대제의 세력이 붕괴되었다고는 하나, 그 뿌리는 여전하다. 이 여인
이 환영대제의 딸이라면, 죽이고자 하는 인물을 쉽게 죽일 수 있을 텐데
… 어이해 비급을 주면서까지 살인을 청부하는 것일까?'
죽어야 할 인물이 대체 누구란 말인지?
궁장미녀는 고영롱(古玲瓏)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
그녀는 소녀 시절, 남해제일미(南海第一美)로 불린 바 있다.
"사흘 안에 한 사람을 죽여 준다면, 세 개의 옥갑을 주겠어요. 그리고 더
많은 기진이보를 주겠으며, 은밀히 연환마교를 탈출해 평화롭게 살 길을
보장하겠어요. 악전고투하며 신분 지위를 높여 가는 것보다 편한 길일 겁
니다. 어차피… 귀한 명예 따윈 생각하지 않는 살인청부자이니까."
"구미가 당기는 이야기요. 한데, 내가 죽여야 할 인물이 누구인지?"
"호호… 그가 누군지 알고 싶다면, 먼저 이걸 먹어야 해요."
궁장미녀는 품에서 약병 하나를 꺼냈다.
약병 마개를 따고 기울이자, 용안(龍眼)만한 황갈색 단약이 굴러 나왔다.
"이것은?"
"고독(蠱毒)이에요."
"고독!"
백무영은 벌레 씹은 표정을 지었다.
고독은 보통의 독과는 달리, 살아 있는 독이다.
고독은 평상시 아무런 피해를 주지 않다가, 시술자가 영(靈)으로 신호를
보내면 내장을 물어뜯어 버린다.
그러하기에, 강호인들은 모든 종류의 독 중에서도 고독을 가장 무서워하
는 것이다.
"해독약은 성사한 후에 주겠어요."
"……."
백무영은 선뜻 손을 쳐들지 못했다.
궁장미녀는 그에게 비웃는 듯한 눈빛을 던졌다.
"날 믿지 못하는군요? 내가 약속을 어기고 고독을 발작시켜 살인멸구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군요?"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소."
"호호호… 솔직해서 좋아요. 그렇다면 하루 정도 생각할 기회를 드리지
요. 내일 밤까지 시간을 주겠어요."
"좋소."
"한 가지 명심할 것은… 일이 이 정도까지 진척된 이상, 청부를 받지 않
는다면 제거당한다는 겁니다. 난 귀하를 제거할 실력을 갖고 있어요. 태
상교주는 내가 바라는 모든 부탁을 들어 줍니다."
"……?"
백무영이 의혹에 가득 찬 눈빛을 던졌다.
"호호호… 마교에 대해 아는 게 없군요. 그러하기에, 아직도 내가 누군지
모르는군요?"
"그렇소. 난 부인을 알지 못하오."
"난… 교주부인(敎主夫人)이에요."
"……!"
백무영은 도끼로 등판을 맞은 표정을 지었다.
함백의 부인.
그렇다면 그녀가 바로 산호부인(珊瑚婦人)이란 말인가?
산호부인은 공적인 자리에 얼굴을 드러내지 않기에, 외부에 얼굴이 알려
져 있지 않다.
산호부인 고영롱.
그녀는 십오 년 전, 나이 열두 살이던 시절에 이 곳에 왔다.
그녀는 함백과 정략결혼한 불우한 여인이었다.
"난 바라는 모든 걸 할 수 있어요. 귀하가 내일 밤, 살인청부를 맡겠다고
말하기를 바래요."
산호부인은 싸늘히 말한 다음에 뒤돌아섰다.
그녀는 오만한 걸음걸이로 문을 벗어났다.
'함백의 부인치고는 너무 젊군. 함백의 부인이 대체 누굴 죽이고자 하는
것일까?'
백무영은 오랫동안 방을 떠나지 못했다.
어쩌면 모든 일은 함백이 자신을 시험하기 위해 꾸민 함정일지도 모른다.
함백의 정실부인으로 엄청난 실권을 지니고 있는 산호부인이 외부인의
힘을 빌어 제거하고자 하는 인물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백무영은 축시(丑時) 말(末)에 거처로 복귀했다.
방 안은 어두웠으며, 냉기가 방 안 가득 퍼지고 있었다.
백무영은 침상 쪽으로 다가서다가 문득 입 안이 바짝 타는 걸 느꼈다.
방 안 가득히 엄청난 마세(魔勢)가 저미어 있는 것이다.
그는 신형을 멈칫 세우며 대반야현공(大般若玄功)을 끌어올렸다.
대반야현공은 도가(道家) 일원강기(一元强氣)와 불가(佛家) 반야신공(般若
神功)의 정화를 합쳐서 창안된 호신공부(護身功夫)로서, 대반야현공을 시
전하고 있는 동안에는 사지가 잘리기 전에는 숨이 끊어지지 않는다.
그의 모공에서 흰 기류가 뿜어지기 시작할 때였다.
"녠녠… 영민한 놈이로군."
어둠 속에서 음침한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그와 더불어 사방에서 흑영이 나타났다.
십여 명의 검사들이 포검한 채 방 안으로 접어들었으며, 찰나의 순간에
백무영은 일자필살진(一字必殺陣)에 휘어 감겼다.
'폭풍귀혼조!'
백무영은 복면인들을 쓸어 보며 눈에서 살염(殺焰)을 토해 냈다.
어둠 속에서 한 사람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피풍의(避風衣)를 걸치고 있었으며, 눈부신 은포로 몸을 휘어 감고
있었다.
오만하고 냉막하게 생긴 미공자.
그는 백무영이 익히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백도에서는 금검진천(金劍振天) 연검천(燕劍天)이라고 알려진 인물이며,
마도에서는 사륵(邪勒)이라고 불리우고 있는 이중인격자.
그가 꽤 오랜만에 연환마교로 돌아온 것이다.
"탁무군, 오랜만이야. 후후, 이게 네 진짜 얼굴이겠지? 탁무군, 아니 냉혈
살흔!"
사륵은 백무영을 쏘아보며 탁자 쪽으로 다가섰다.
백무영은 오연한 표정을 유지하며 메마른 웃음을 풀풀 날렸다.
"오랜만이외다, 연공자. 아니, 사륵공자."
"후후… 그 사이, 동문(同門)이 되었다며?"
사륵은 물주전자에 손을 대었다.
그의 손이 푸르스름하게 물드는 찰나, 물주전자는 한 줌 돌모래로 부서져
버렸다.
"교주가 어이해 네놈을 능지처참시키지 않는 것인지 의아하군. 노망이 난
것인가? 너같이 천한 놈을 연환마교로 입교시키다니?"
사륵은 백무영을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백도에 잠입해 십 년 간 공작을 해 왔다.
그 모든 게 부서지는 데에는 단 일각이 걸렸을 뿐이다.
사실 그는 자신이 잠풍에게 속았다는 걸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
다.
"네놈을 찢어 죽이기 위해 먼 길을 달려왔다. 녠녠, 네놈은 내 손에 죽어
야 한다."
사륵이 마광을 뿜어 내며 말할 때.
"이 방은 내 방이오. 용건만 빨리 말하고 나가 주시오."
백무영은 사륵의 위협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잡놈! 나가라고?"
사륵의 손이 번쩍 쳐들렸다.
사공(邪功)을 끌어모아 손의 빛깔이 퍼렇게 물들었다.
그는 일 장을 후려칠 듯한 자세를 취하며 백무영을 노려봤다.
백무영은 그의 눈빛을 받아 내면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사륵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한 것인지 손에서 내공을 흩트렸다.
"좋아, 용건만 말하지."
그는 팔짱을 낀 다음에 살광을 더욱 강하게 폭사시켰다.
그는 백무영 따위에게 기죽기 싫은 듯 혼신공력을 다해 마안공을 뿜어
내는 것이다.
"네놈은 대단한 놈이야. 그것을 인정한다. 내 휘하에 너같이 능력 있는
놈이 있었더라면, 나는 벌써 후계자 지위를 차지했을 것이다."
"후훗… 듣기 좋은 칭찬이군."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네게는 두 개의 길이 있다. 나와 적이 되어 버티
다가 암살되는 길이 첫째 길이고, 나와 힘을 합해 야망을 이룩하는 게 둘
째 길이다."
"힘을 합하자고?"
"너를 나의 오른팔로 둘 수도 있다. 물론 나는 너같이 천한 놈을 믿지는
않지만, 네놈이 나를 위해 한 가지 일을 해 준다면… 네놈을 천하제이인
(天下第二人)으로 만들어 주겠다."
"구미가 당기는군. 천하제이인이 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고월을 죽여라!"
"고월?"
"그 잔 새북인(塞北人)이다. 그 자는 사대천왕(四大天王)에 끼여들었다.
그 자는 막강한 자다. 사적인 세력이 없기는 하지만, 이대로 둘 경우 엄
청난 방해가 된다. 단시일 안에 그 자를 죽여야 한다. 후후, 네놈이 살 길
은 고월을 죽이는 길뿐이다. 네놈이 고월을 죽였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
지체없이 네놈을 나의 휘하로 받아 주겠다."
사륵은 사악한 웃음을 흘리며 팔짱을 풀었다.
그는 천천히 걸음을 내디디며 말을 이었다.
"시한(時限)은 칠 일이다. 그 사이, 고월을 죽여라. 고월을 죽이지 못한다
면, 내가 널 죽이겠다."
사륵은 그렇게 말하며 방을 빠져 나갔다.
그 후, 사륵의 수하들도 일제히 몸을 날려 사라져 갔다.
방 안에는 야풍(夜風)이 가득하다.
열린 창문을 통해 싸늘한 바람이 흘러들었다.
'하룻밤 사이, 두 건의 살인청부를 맡게 되었군!'
백무영은 이제야 연환마교의 내부가 복잡하게 뒤틀려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외부에서 본다면, 연환마교는 함백을 주축으로 하여 철옹성처럼 결합되어
있는 듯하다.
하지만 속사정은 판이하게 다르다.
제자들끼리 죽고 죽이려 하며, 암중에 패권 다툼이 치열하여 세력이 분산
되고 있는 것이다.
함백은 모든 갈등을 극복한 채 연환마교를 꾸려 나가고 있으니, 가히 엄
청난 경영기술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고월, 그 자는 강호의 이단자이지. 그는 어이해 연환마교에 투신했을까?'
백무영은 고월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갖고 있었다.
다른 것은 모르나 그는 협기(俠氣)가 대단한 인물이다.
그는 마도인들을 무참히 살륙하며 대살성(大煞星)으로 불리웠던 인물.
그가 어이해 마도인으로 변절하게 되었는지 알지 못할 일이었다.
'고월은 어떤 꿍꿍이일까?'
다음 날 새벽.
백무영은 아주 우연히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우연인지, 상부의 안배인지, 그의 거처는 뜻밖에도 자신의 거처에서 이백
장밖에 떨어지지 않은 죽림(竹林)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새벽, 죽림에 서리가 그득하다.
이미 완연한 겨울이다.
하늘은 곧 눈을 토해 낼 듯 시커멓게 물든 채 살아 있는 맹수의 뱃가죽
마냥 꿈틀거리고 있었다.
백무영은 며칠 전부터 그를 괴롭히기 시작한 번뇌를 씻어 내기 위해 거
처를 정하지 않고 이 곳 저 곳 거닐다가 죽림으로 다가서게 되었다.
그는 오늘 밤 안으로 산호부인을 찾아갈 것인가, 가지 않을 것인가를 결
정해야 하는 것이다.
그는 뒷짐을 진 채 화단가를 지나쳤다.
화단의 국화는 모조리 얼어 죽었기에, 수천 송이 국화의 잔해가 마치 들
판을 메운 병사들의 처참한 시체처럼 보였다.
"다시 봄이 돌아와야 화원이 꽃으로 뒤덮이겠지."
그가 나직이 중얼거릴 때, 어디에선가 무뚝뚝한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마교 안에 그런 감상적인 말을 하는 자가 있다니… 녠녠, 이 곳에도 시
심(詩心)을 지닌 인물이 있었던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죽림 안에서 들려 왔다.
죽림 안에는 초라한 죽옥이 한 채 서 있었다.
죽옥 앞에는 대나무로 짠 평상이 있는 바, 그 위 깡마른 회포청년이 머물
러 있었다. 그는 바둑판을 앞에 두고 있었으며, 백무영 쪽으로 시선을 돌
리고 있었다.
죽은 듯 빛이 없는 눈빛, 그러나 눈빛 깊은 곳에서는 태양마저 불살라 버
릴 듯한 웅화(雄火)가 타오르고 있었다.
'고월이다!'
백무영은 순간적으로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고월의 눈빛은 무척 특이하다. 일반인들은 그의 눈빛을 메마르다 느낄 것
이되, 백무영은 그의 눈빛에 엄청난 야망이 숨어 있음을 쉽게 느낄 수 있
었다.
"훗훗… 한가해 보이는군. 이리 와서 바둑이나 한 판 두지 않겠는가, 냉
혈살흔?"
"나를 아시오?"
"자넨 꽤 유명해졌지. 후후, 자네가 내 뒤를 이어 사대천왕의 말석(末席)
에 끼여들게 되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지. 그렇게 따지자면, 사형사
제지간이랄까?"
고월은 술병을 쳐들어 술 한 모금을 마셨다.
백무영이 다가설 때, 그는 술병을 건네 주었다.
"마셔. 뱃속이 훈훈해질 테니까."
"고맙소!"
백무영은 술병을 받아 들고 주둥이에 입을 대었다.
술병 안에는 독한 화주(火酒)가 들어 있는 바, 그는 쉬지 않고 세 모금을
마셨다.
고월은 백무영이 술 마시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히죽 웃었다.
"자넨 마도인이 아니야."
"아……?"
"눈빛이 맑아. 언젠가 한 번 본 눈빛이야. 어쩌면 전에 본 인물일지도. 그
리고 자네의 얼굴은 위장된 얼굴이기가 쉬워."
고월은 지극히 예리한 안목을 갖고 있었다.
그는 백무영이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제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토해 냈다.
"함백은 무서운 자야. 그는 썩어 버린 마도제자들을 훈계하기 위해 두 명
의 이단자를 휘하에 끌어들인 거야. 후후, 자네나 나나 함백의 노리개에
불과하지. 함백은 야망의 화신이 되어 무공 수련을 게을리하는 제자들을
경계시키기 위해 자네와 날 이용하는 거야."
"으음……."
"함백은 이십 년 간 중원천하(中原天下)를 장악할 만한 자이지. 중원에
그러한 인물이 있는 한, 내 고향 새북무림계(塞北武林界)는 영원히 중원
무림을 꺾지 못할지도 모르지."
"새북!"
"중원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평화롭고 아름다운 곳이지."
고월은 다시 술을 마셨다.
그는 너덜너덜한 회포를 걸치고 있었다.
옷자락이 펄럭일 때마다 깡마른 손목이 나타났다. 그리고 바람이 강하게
불자, 옷섶이 펄럭이며 앞가슴이 나타났다.
그의 앞가슴에는 자흔(刺痕)이 그득했다.
'엄청난 상처다!'
백무영이 상처 자국을 보고 호흡을 죽일 때, 고월은 술병을 텅 비게 한
다음 평상 바닥에 팽개쳤다.
그는 소매로 입가를 닦아 내며 히죽거렸다.
"난 죽을 고비를 무수히 겪었지. 나의 숙부(叔父)는 날 죽이기 위해 오천
명의 암살자를 보냈지. 난 칠 년 내내 쫓기며 천여 번의 사경에 빠지며
대사막(大沙漠)을 횡단한 바 있지. 이 상처는 그 때 생긴 거야."
"아아, 칠 년이나……."
"지겨운 낭인(浪人) 생활이었지. 녠녠, 매일 자결의 충동이 날 사로잡았
지. 난 그 때마다 허벅지를 비수로 찌르며, 살아야 한다고 맹세했지."
고월은 너무나도 어려운 이야기를 너무나도 쉽게 해 대고 있었다.
그는 또 한 병의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는 매일 스무 병 넘는 술을 마신다.
마교에 들어오고 나서부터는 내내 술 없이는 하루도 버티지 못하는 것이
다.
"운이 좋았지. 난 사막에서 기연을 만나 초절정고수(超絶頂高手)로 화신
했으니까. 후후, 아버지의 유산을 모두 잃고 혈혈단신으로 남았으되… 난
꽤 강해졌지. 물론, 숙부를 찢어 죽일 정도는 되지 못해."
"숙부를 죽일 작정이오?"
"그 잔… 난도질당해 죽는다. 난 일 년 안에 그 자를 처단하고 실지(失
地)를 회복한다."
고월의 눈빛이 파랗게 반짝거렸다.
'살기가 안으로 갈무리된 눈빛이다. 아아, 나보다 험악한 소년 시절을 보
낸 사람이 없다 여겼는데… 고월은 나보다도 더 처절한 삶을 살아 왔다!'
백무영은 처음으로 상대에게서 공포를 느꼈다.
고월은 함백보다 약하다. 하지만 백무영에 비한다면 훨씬 강한 인물이다.
그는 이제까지 자신의 본 실력을 한 번도 발휘한 바 없다.
그가 백무영에 대해 인간적인 친근감이 생기는 것은 이해하지 못할 일이
다.
어쩌면 서로 비슷한 성격이기에 전혀 모르는 상태인데도 빠르게 친해지
는 것일지도!
"난 중원을 정복한 다음, 중원무사를 수족처럼 부려 새북을 칠 작정이었
지. 그래서 여기 왔던 거야. 난 함백을 죽인 다음, 연환마교를 정복할 계
획이었지."
"흐음……."
"훗훗… 결과는 참패였다. 난 함백의 삼 초(招)도 받아 내지 못하고 패배
당하고 말았지."
놀라운 일이다. 고월 또한 함백을 죽이려 했었단 말인가?
그렇다면 그가 연환마교에 머물게 된 이유는 백무영이 머물러 있는 이유
와 비슷할지도 모른다.
"함백은 나의 검을 맨손으로 움켜쥐었지. 그건 내 평생의 참패였다."
고월은 그렇게 말하며 백무영을 빤히 봤다.
백무영이 머쓱한 표정을 지을 때.
"마치, 네가 실패했듯……."
"내가 실패한 걸 아시오?"
"그 날 밤, 숨어 봤다. 후후……!"
"으음, 그랬었군."
"훗훗… 함백은 거만하게도 널 살려 주더군. 마치 나를 살려 주었듯이…
…."
"귀하도 함백을 죽이려다 실패하고 여기 머무는 것이오?"
"그래."
고월은 다시 술을 권했다.
백무영은 마다하지 않고 술을 받아 마셨다.
"함백은 거만하고 웅장한 자야. 그리고 막강하지. 당세에서 그를 꺾을 사
람은 없어. 함백은 나로 하여금 나 자신의 실체를 보게 하여, 변황무림이
중원을 치지 못하게 하려는 거지."
"변황?"
"훗훗… 함백은 새북무림을 겁내고 있지. 새북에는 영웅이 무수하다. 그
들이 단결할 경우 엄청난 세력이 형성되며, 연환마교와 관산검맹을 일시
에 칠 수 있게 된다. 함백은 그것을 알기에, 내게 자신의 실력을 보여 새
북이 중원을 넘보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게 진실이야."
정녕 엄청난 일이다.
함백이 고월이나 백무영을 제거하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살아 돌아가 자
신의 힘을 알려야만 새북과 백도가 감히 거검(據劍)하지 못한다 여겼기
때문이었다.
함백이 가장 겁내는 것은, 백도와 새북이 연수(連手)하여 자신을 치는 것
이다.
고월은 또다시 키득키득 웃었다.
"함백은 무서운 계략가야. 그는 방심하고 있는 듯하면서도 친히 대세를
좌지우지하지. 그러나 그는 영세군림(永世君臨)할 재목은 아니야."
"어이해 그렇게 판단하시오, 노형(老兄)?"
"그는 모질지 못하지. 그는 선혈(鮮血)과 죽음을 겁내지. 내가 함백이라면
모든 반대자를 죽여 버릴 거야. 십만 명을 죽이게 되더라도 난 겁내지 않
는다."
고월은 광기(狂氣)를 갖고 있었다. 그는 처절한 소년 시절을 보냈기에 세
상에 대해 한(恨)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의 기문은 숙부에 의해 파멸되었으며, 그는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는 신
세가 되어 십 년을 낭인(浪人)으로 떠돌았다.
날개가 부러진 새의 모습이 이러할까?
고월이 늘 술을 마시는 이유는 그 때문일 것이다.
"함백의 가장 큰 결점은, 마땅한 후계자가 없다는 거야."
"후계자?"
"음월방과 사륵은 후계자감이 못 돼. 내가 보기에, 함백은 네게 눈독을
들이고 있는 것 같다."
"나에게?"
"프핫핫… 넌 천룡지골(天龍之骨)이야. 넌 신공마공을 빠르게 성취할 체
질이야. 내가 보기엔 넌 가장 무서운 적이 될 잠룡(潛龍)이다. 내가 함백
이었다면, 널 즉시 참살해 버렸을 것이다."
고월은 유들유들 웃었다.
백무영도 따라 웃으며 입술을 떼었다.
"노형은 어이해 떠나지 않는 것이오?"
"첫째는 약속 때문이지. 적어도 백 일 머물러야 한다고 약속을 했으니
까."
"또 다른 이유는?"
"묻지 마."
고월은 그렇게 말하며 바둑알 통을 전했다.
두 사람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바둑을 두기 시작했다.
괴짜와 괴물.
두 사람의 만남은 훗일 강호 정세에 엄청난 변화를 줄 사건이라 할 수
있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