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二十一章 奧地怪事
‘저건……?’
좌홍은 언뜻 이상한 느낌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천천히 고개를 쳐드는 철군악의 얼굴에 기이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죽는 것이 너무 억울해 저렇게 이상한 표정을 짓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언뜻 뇌리를 스쳤지만, 절대로 그런 것이 아니었다.
미소.
시커멓게 죽은 얼굴 때문에 언뜻 구별하지 못해서였지 철군악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것은 분명히 미소였다.
좌홍이 그것을 단번에 알아차리지 못한 것은 그가 멍청해서도 아니요, 시력이 나빠서도 아니었다. 철군악은 얼굴 모양은 그대로인 채 단지 눈만 희미하게 웃고 있었던 것이다.
좌홍은 그 사실을 깨닫자 온몸에 소름이 쭈욱 돋는 것을 느꼈다.
“하, 함정이구나!”
그가 허옇게 질린 얼굴로 있는 힘을 다해 뒤로 물러나려 할 때, 어느새 철군악의 검이 그의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서걱!
“크아악!”
좌홍의 몸뚱어리가 반으로 쫘악 갈라지며 피와 내장들을 바닥에 쏟아 놓았다. 그의 몸에서 쏟아진 피가 어찌나 많던지 그로 인해 주위가 온통 시뻘겋게 변해 버렸다.
남들을 처참하게 죽이는 것만 알았던 그도 자신이 죽인 상대들처럼 비참하기 짝이 없는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다.
철군악은 좌홍을 처치한 여세를 몰아 쉴 틈을 주지 않고 영호초에게 덮쳐 갔다. 고육지계(苦肉之計)를 쓰느라 심한 내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영호초를 향해 검을 휘두르는 그의 얼굴에는 어떤한 표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추아악!
무적인(無敵刃)이 번개처럼 빠른 속도로 영호초의 상체를 베어 왔다. 아직까지도 좌홍의 죽음이 믿기지 않는 듯 멍한 얼굴로 서 있던 그의 얼굴이 공포로 인해 보기 흉하게 일그러졌다.
“이 악마 같은 놈!”
그는 마치 발악하듯 쌍수를 휘둘렀지만, 전신에 서너 군데 검상을 입고 뒤로 주르르 밀려나고 말았다.
따당! 땅!
“크윽……”
물러나는 영호초를 향해 철군악이 끝장을 보려는 듯 계속 달려들자, 신도광은 얼굴 가득 다급한 빛을 떠올렸다.
영호초마저 죽게 된다면 철군악을 없애기는커녕 자신의 목숨마저 위태로울 판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얼른 철군악의 측면으로 뛰어들며 섭선을 기이하게 흔들어댔다.
츠츠츠츳!
휘황찬란한 광채가 허공 가득 퍼지며 막대한 경기(勁氣)가 철군악을 덮쳐 갔다. 철군악은 너무도 예리하고 신속한 상대의 공격에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신도광이 눈을 빛내며 철군악을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뇌음절(雷音絶)!”
그의 손에 들려 있던 부채가 슬쩍 휘둘려지는 순간,
꽈르릉……
어이없게도 벼락치는 소리가 터져 나오며 무시무시한 경력이 철군악의 상하 좌우로 쏘아져 왔다. 그 위세가 어찌나 대단하던지 마치 유성이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하나, 철군악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검을 종횡으로 마구 그어댔다.
우우우웅……
순식간에 그의 전신이 희뿌연 검막에 가려 보이지 않게 되었다. 흡천십이검 최강의 수비초식이라는 검막밀밀(劒幕密密)이었지만, 신도광의 강력한 공세는 여지없이 철군악이 펼친 검기막(劒氣幕)을 난자하듯 사방으로 갈라놓았다.
카카카캉!
‘웃!’
철군악은 손목이 끊어지는 듯한 통증을 느끼고 뒤로 서너 걸음 물러났다.
그러자 이번에는 영호초가 기다렸다는 듯이 시커먼 손으로 그의 뒤통수를 가격해 왔다.
위이잉!
철군악은 잠시 차가운 눈으로 그들이 달려드는 것을 쳐다보고 있다가 어느 순간 검을 슬쩍 내리그었다.
파앗!
순간적으로 섬광(閃光)이 피어오르며 그의 검이 느린 속도로 영호초의 전신으로 떨어져 내렸다.
특별히 빠르거나 위력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지만, 영호초는 이상하게도 피할 곳을 찾을 수가 없었다.
“억!”
그의 입에서 경악에 가득 찬 신음이 터져 나왔을 때, 검은 이미 그의 미간을 가르고 지나갔다.
서걱!
“으아아……”
심금을 떨어 울리는 단말마가 터져 나오며 영호초가 그 자리에 털썩 쓰러졌다. 무엇이 그리 억울한지 그는 죽으면서도 눈을 감지 못한 채였다.
“이놈, 대단하구나!”
신도광이 고함을 지르며 철군악의 등을 향해 섭선을 쭈욱 찔러 왔다. 그는 철군악의 무공이 상상외로 강한 것을 깨닫자 한 수 한 수에 사력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쾌액!
철군악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이형환위(移形換位)의 신법으로 몸을 이동시켰지만, 섭선은 여전히 무서운 기세로 그에게 다가왔다.
이것이 바로 신도광이 천하에 자랑하는 천선팔절(天扇八絶) 중의 천심절(穿心絶)이었다.
피하는 것만으로는 도저히 신도광의 공세를 당해 낼 수 없었던지 철군악은 다시 검을 들었다.
우우우웅……
희뿌연 검기가 허공 가득 일어나며 천심절의 가공할 기세를 저지하기 시작했다. 신도광은 자신의 공세가 간단히 봉쇄당하자 이를 악물며 섭선을 십자로 그어댔다.
“십자절(十字絶)!”
순간, 날카롭기 짝이 없는 경력이 섭선으로부터 피어오르며 철군악을 향해 쇄도해들었다.
피이잉……
섭선에서 뿜어져 나온 경력이 어찌나 대단했던지 철군악이 펼친 검기가 견디지 못하고 반으로 쫘악 갈라져 버렸다.
하나, 철군악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검을 종횡으로 마구 그어대 노도광란(怒濤狂亂)의 검세를 펼쳤다.
순간,
쿠와아아아……
바늘처럼 날카로운 검기가 사방으로 미친 듯이 퍼져 나갔다.
그 기세가 어찌나 대단하던지 신도광은 자신이 꼭 폭풍우에 갇혀 버린 작은 돛단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도광은 창백해진 안색으로 섭선을 마구 그어대며 연거푸 광휘절(光輝絶)과 곤룡절(困龍絶)을 펼쳤다.
“이얍!”
번쩍! 번쩍!
쏴아아아……
눈을 온통 멀게 만드는 강렬한 빛이 폭발하듯 치솟아오르며 철군악의 검세와 허공에서 정면으로 충돌했다.
꽈꽈꽈꽝……
“크윽!”
경력(勁力)과 검기의 파편이 미친 듯이 난무하며 사방으로 피가 튀었다.
“……!”
신도광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분신이자 상징인 섭선은 산산조각난 채 발 밑에 어지럽게 널려 있었고 가슴에서 흘러나온 피가 주위를 온통 시뻘겋게 적시고 있었다.
음울한 눈으로 한참 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던 신도광은 천천히 얼굴을 들고 철군악을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이미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깔려 있었다.
“저, 정말 강하구나. 하나, 싸움은 이제부터…… 네가 아무리 강해도 삼성은 개, 개인이 당할 수 없……”
신도광은 그 말을 끝으로 무너지듯 땅바닥에 고개를 쑤셔 박았다.
털썩!
한 시대를 풍미하던 고수치고는 너무도 허망한 최후였다.
철군악은 묵묵히 그의 시체를 응시하다가 고개를 돌렸다.
한쪽에서 시퍼렇게 질린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하는 안괴홍의 모습이 들어왔다. 철군악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노려보더니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순간, 안괴홍의 얼굴이 시퍼렇다 못해 하얗게 질려 버렸다.
“이, 이놈! 더 이상 가까이 오면 이년을 죽여 버리겠다.”
철군악은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안괴홍이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혼절한 송난령의 목을 겨누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철군악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그럼 네놈은 무사할 것 같으냐?”
“그, 그러니까 가까이 오지 마라!”
하나, 그의 간절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철군악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그에게 다가갔다.
안괴홍이 샛노래진 얼굴로 고래고래 악을 쓰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가까이 오면 진짜로 이년을 죽여 버리겠다!”
그리고는 정말로 내공을 끌어올려 수도(手刀)로 송난령의 목을 찌르는 것이 아닌가!
스윽!
그녀의 백옥처럼 부드러운 목에 가는 혈흔(血痕)이 생기며 조금씩 피가 배어나오기 시작했다. 그 탓인지 여태껏 혼절해 있던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 살며시 눈을 떴다.
“으음!”
멍한 눈길로 주위를 둘러보던 송난령은 여기저기 쓰러져 있는 시체와 진동하는 피비린내를 맡고서야 상황을 짐작한 것 같았다.
그녀는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철군악이 앞에 있음을 깨닫자 그를 향해 몸을 움직이려 했다.
“철 공자, 악……!”
하나, 반가운 얼굴로 몸을 일으키던 그녀는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안괴홍이 거친 손길로 그녀의 목을 잡은 것이다.
그것을 본 철군악이 다시 몸을 움직이려 하자 안괴홍이 살기 띤 얼굴로 입을 열었다.
“철군악! 네놈이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이 계집의 아름다운 얼굴을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다.”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당장이라도 송난령에게 손을 쓸 듯 잽싸게 한 손을 들어올렸다.
철군악은 그 자리에서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연약한 여자를 담보로 목숨을 구걸하려는 것이냐?”
철군악의 힐난에 안괴홍의 표정이 음산하게 변했다.
그는 수중에 송난령이 있는 이상 철군악이 자신을 어쩌지 못할 거라는 확신에 조금은 안도하는 표정이었다.
“마음대로 지껄여라. 나는 이 계집을 데리고 가 살 냄새나 실컷 맡겠다.”
안괴홍의 음탕한 말에 송난령의 표정이 하얗게 질렸다.
‘아……!’
그녀는 속으로 탄식을 했지만, 지금 상황으로썬 어떻게 할 방도가 없었다.
철군악이 안괴홍을 노려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협상을 하자.”
안괴홍이 같잖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무슨 협상을 하잔 말이냐?”
“그녀를 놓아 주면 나도 더 이상 너를 건드리지 않겠다.”
안괴홍의 얼굴이 음산하게 변했다.
“흐흐흐,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 칼자루는 내가 쥐고 있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을 텐데?”
“그럼 어떻게 하자는 것이냐?”
안괴홍이 얄미우리만치 느긋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내가 무사히 이곳을 벗어나면 그때 계집을 놓아 주겠다.”
“그 말을 나더러 믿으란 말이냐?”
“흐흐흐, 믿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다는 거냐? 네게는 선택권이 없다.”
철군악의 표정이 차갑게 변했다.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다.”
안괴홍은 철군악의 표정이 음산하게 변하자 내심 가슴이 털컥 내려앉았다.
인질이 있는 이상 자신을 어쩌지 못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이상하게 불안감이 엄습하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애써 당당한 표정으로 대꾸하는 그의 목소리는 누가 듣더라도 안쓰러울 정도로 심하게 떨려 나왔다.
“뭐, 뭐냐?”
철군악은 잠시 기이한 표정으로 송난령을 응시하더니 이내 고개를 돌려 안괴홍을 무시무시한 눈으로 쏘아보았다.
“네가 저 낭자를 죽이든 말든 네 맘대로 이듯 내가 너를 죽이든 말든 그것도 내 마음이다.”
철군악은 말을 마치자마자 눈을 번뜩이며 서서히 안괴홍에게 다가갔다.
무심하기 짝이 없는 얼굴 한복판에서 빛나는 눈이 마치 악마의 그것 같았다.
안괴홍의 안색이 허옇게 탈색되었다.
“헉!”
그는 철군악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자 안절부절못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비록 송난령이 자신의 손에 잡혀 있지만, 철군악이 그녀의 생사(生死)를 도외시하는 이상 그녀는 이제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그녀를 죽인다면 마지막 생존의 한 가닥 끈마저 놓쳐 버리는 우를 범할 우려가 있었다.
안괴홍으로서는 실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난처한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다.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궁리하던 안괴홍은 철군악이 바로 코앞까지 다가오자 허겁지겁 소리쳤다.
“잠깐!”
“뭐냐?”
“혀, 협상을 하자!”
하나, 철군악은 이제 와서 무슨 소리냐는 듯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다가오며 천천히 검을 뽑아 들기 시작했다.
“필요 없다.”
순간, 안괴홍의 얼굴은 완전히 울상이 되었다. 그는 마치 애원하듯 간절한 표정으로 허겁지겁 입을 놀리기 시작했다.
“네 말대로 하겠다. 당장 이 아가씨를 놓아 줄 테니, 제발!”
그제서야 철군악의 무표정한 얼굴에 반응이 나타났다.
“정말이냐?”
“그, 그렇다. 그 대신 너도 절대 나를 건드리면 안 된다.”
철군악은 잠시 숙고하는 듯한 얼굴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안괴홍은 마치 죽은 부모가 살아 온 듯 얼굴 가득 기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송난령의 목에 감았던 팔을 천천히 풀며 긴장한 얼굴로 한 발 두 발 뒷걸음질 치더니 어느 정도 거리가 떨어졌다 싶자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철군악, 이놈! 언젠가는 네게 오늘의 이 수모를 돌려줄 날이 있을 것이다.”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꽁지가 빠져라 달아나기 시작했다. 철군악의 얼굴에 피식 실소가 스쳤다.
‘저런 자가 정도(正道) 최고의 기재 소리를 들었다니……’
철군악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잠시 안괴홍이 사라진 곳을 응시하더니 이내 송난령에게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심각한 부상 때문에 몸을 일으키지도 못하고 바닥에 힘겹에 앉아 있었는데, 철군악이 쭈그리고 앉아 상처를 살펴보려 하자 차가운 얼굴로 그의 손을 뿌리쳤다.
“손 치워요!”
철군악의 표정이 어리둥절해졌다.
“왜 이러시오?”
송난령이 고개를 홱 쳐들었다. 철군악은 그녀의 아름다운 두 눈에 그렁그렁 맺혀 있는 이슬을 볼 수 있었다.
“몰라서 묻나요? 당신은 누가 죽든 말든, 당신이 하고 싶은 일만 할 수 있으면 전혀 개의치 않는 사람이잖아요. 당신 같은 사람하고는 다신 상종하지 않겠어요!”
그녀는 말을 마치자마자 힘겹게 몸을 일으키고는 걸음을 옮기려 했다. 철군악이 얼른 그녀의 팔을 잡았다.
“송 소저! 지금 빨리 치료를 하지 않으면 평생 불구로 지낼 수도 있소.”
“당신이 상관할 일이 아니잖아요? 언제부터 당신이 내게 이렇게 관심을 가졌죠?”
그녀는 철군악의 팔을 힘껏 뿌리쳤다.
하나, 몸이 정상이 아닌 송난령은 너무 무리하게 힘을 쓰는 바람에 중심을 잡지 못하고 다시 땅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철군악의 얼굴에 당황한 빛이 떠올랐다.
“송 소저!”
송난령은 바닥에 쓰러진 채 몸을 일으키려 안간힘을 썼지만, 일어나지 못했다. 철군악의 억센 팔이 그녀를 지그시 누르고 있었던 탓이다.
“당신이 뭐라 해도 나는 그대를 치료해야겠소.”
철군악은 말을 마치자마자 송난령의 상의를 부욱 찢더니 치료를 시작했다.
“이……”
수치심과 당황스러움에 다시 뭐라 소리를 지르려던 송난령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철군악의 무표정한 얼굴에 떠올라 있는 한 가닥 열의(熱意)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부상당한 사람을 꼭 치료하고 말겠다는 의자(醫者)로서의 열망이나 송난령의 환심을 사기 위해 꾸미는 거짓스런 표정이 아니었다. 뭔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것보다 훨씬 중요한 그 무엇이 있었다.
송난령은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으나, 왠지 더 이상 그에게 심한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가만히 있자 철군악은 본격적으로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거친 손길에 의해 송난령의 상의가 벗겨지고 백옥보다 더 희고 부드러운 살결이 드러났다.
하나, 철군악은 손길을 멈추지 않고 가슴가리개마저 거침없이 벗겨 냈다.
송난령은 부끄러움에 얼굴을 홍시처럼 붉힌 채 고개를 한쪽으로 돌렸다. 철군악은 향기롭기 그지없는 여체를 대하자 알 수 없는 흥분에 손이 떨렸지만, 이내 마음을 가다듬고 차분히 상처를 살폈다.
가슴 한복판인 유근혈(乳根穴) 조금 밑에 푸르스름한 장인(掌印)이 찍혀 있는 것이 보였다.
단천노수의 청마수(靑魔手)에 당한 상처였다.
철군악은 잠시 송난령의 맥문을 짚어 보더니 장인에 손바닥을 대고 공력을 끌어올렸다.
후우웅……
일순, 그의 몸이 희뿌연 서기(瑞氣)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철군악은 절세의 신공(神功)인 옥황기공(玉皇奇功)을 끌어올려 송난령의 몸에 침투한 음기를 뽑아 내려 하는 것이다.
그가 알고 있는 한 옥황기공은 천하제일의 신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것은 주로 상대의 공격을 방어하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구(九) 성(成) 이상의 성취를 이루게 되면 강력한 반탄지기(反彈之氣)를 내뿜어 상대의 공격을 되받아 칠 수도 있었다.
또한 피독(避毒)의 묘용이 있어 절정의 경지에 이르게 되면 백독불침(百毒不侵)의 신체를 만들 수 있으며, 만약 대성(大成)한다면 금강불괴지신(金剛不壞之身)을 이룰 수 있는, 그야말로 천고의 신공이라 할 수 있었다.
철군악이 조금 전에 영호초와 좌홍의 공격을 정통으로 받고도 심각한 내상을 입지 않은 것도 모두 이 옥황기공의 덕분이라 할 수 있었다.
옥황기공을 끌어올린 후 시간이 조금 흐르자 송난령의 가슴에 있던 장인이 점점 희미해지는 대신 철군악의 팔뚝이 시퍼렇게 물들기 시작했다.
철군악이 송난령의 몸에 침투해 있던 음기를 자신의 몸으로 흡수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이 가장 중요한 고비였다.
만약 이때 누군가가 방해한다면 철군악은 물론 송난령마저 참사(慘事)를 면치 못할 것이다.
철군악은 공력을 더욱 끌어올렸다.
우우웅……
그를 감싸고 있던 우윳빛 서기가 더욱 짙어지며 팔뚝에 있던 푸르스름한 기운이 머리끝으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 음독하기 그지없는 기운은 철군악의 얼굴을 시퍼렇게 물들인 후 이내 그의 백회혈(百會穴)을 통해 체외로 발출되었다.
철군악은 운공(運功)을 끝내고 천천히 눈을 떴다.
옥황기공 덕분에 꽤 심해 보였던 내상이 거의 완치된 듯 몸이 그렇게 가뿐할 수 없었다.
철군악은 슬며시 옆을 쳐다보았다.
송난령이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긴장이 풀리자 일시지간 피로가 몰려온 것 같았다.
이미 그녀의 가슴 한복판에 있던 시퍼런 장인은 완전히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체내에 침투해 있던 청마수의 음기가 거의 제거된 것이다.
철군악은 그녀의 상체에 옷을 덮어 준 후, 잠들어 있는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너무도 아름다워 보기만 해도 황홀한 얼굴 한구석에 눈물 자국이 마치 흉터처럼 번져 있었다.
철군악은 가만히 손을 들어 눈물 자국을 닦아 주었다.
“으음……”
그의 손길이 닿자마자 송난령이 몸을 뒤척이며 슬며시 눈을 떴다.
“정신이 드시오?”
송난령은 천천히 눈을 깜빡여 철군악을 응시했다.
그녀는 정신을 차리려는 듯 잠시 멍하니 철군악을 응시하더니 이윽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한데, 자리에서 막 일어나려다 피부가 왠지 선뜩함을 깨닫고 아래를 내려다보던 송난령은 커다란 비명을 토해 냈다.
“악!”
철군악이 덮어 주었던 상의가 그녀가 일어나는 순간 흘러내리며 여태껏 누구에게도 보여 주지 않았던 상체가 드러난 것이다.
송난령은 그제야 치료를 받느라고 상의를 모두 벗게 되었던 일이 떠올랐다.
송난령은 당황한 얼굴로 철군악을 힐끔 쳐다보았다.
아무리 철군악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그녀는 엄연히 청백지신(淸白之身)이었다.
부끄러운 마음이 드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마침 철군악은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송난령은 얼굴을 홍시처럼 붉게 물들인 채 허겁지겁 옷을 입었다.
바스락! 바스락!
옷자락이 부딪치며 미묘한 소리를 토해 냈다.
아무리 냉혹하고 무심한 성격의 소유자라 하더라도 송난령처럼 아름다운 여인이 바로 옆에서 옷을 입고 있다면 이상한 느낌이 들지 않을 리 없겠으나, 철군악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돌린 채 묵묵히 서 있을 뿐이었다.
그러는 사이, 짧고도 긴 시간이 흘렀다.
송난령이 옷을 다 입었는지 옷자락 부딪치는 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철군악은 고개를 돌려 송난령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았는지 평상시와 별로 다를 바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철군악을 쳐다보는 눈빛이 전과는 달리 조금 싸늘해 보인다는 것이었다.
하나, 철군악은 그런 것쯤은 전혀 개의치 않는 표정이었다.
“몸은 괜찮소?”
송난령의 눈빛이 흔들렸다. 비록 멋대가리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무뚝뚝하기 그지없는 말투였지만, 그녀는 철군악이 자신을 매우 염려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 어차피 그는 나를 구하려고 그런 것이 아닌가?’
송난령은 꽁꽁 얼어붙어 있던 마음이 순식간에 눈 녹듯이 풀어짐을 느꼈다. 철군악이 만약 안괴홍에게 약한 면을 보였다면 그녀는 절대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송난령은 바보가 아니었기에 이미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한마디 변명도 않는 그가 너무 얄미워 일부러 투정 아닌 투정을 부렸지만, 그의 진정을 알고 있는 이상 헛된 일로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었다.
송난령은 짐짓 싸늘한 표정으로 대꾸했지만, 이미 그녀의 화가 풀렸음은 누가 보더라도 알 수 있었다.
“덕분에 많이 좋아졌어요. 정말 고마워요.”
“다행이오. 하나 청마수의 음기가 아직 몸 속에 남아 있으니 당분간 조심해야 할 거요.”
“알겠어요.”
송난령은 고개를 끄덕이며 슬쩍 철군악을 살펴보았다.
좀 전까지만 해도 섭섭한 마음에 미처 물어 보지 못했으나, 철군악의 상처가 어떤지 심히 걱정되었던 까닭이다.
다행히 그녀의 눈에 비친 철군악은 특별하게 불편한 곳은 없어 보였다.
송난령의 봉목에 안도의 기색이 스치고 지나갔다.
안괴홍과 실랑이를 벌일 때만 해도 매우 심한 부상을 당했는지 꽤나 위태로워 보였었는데, 지금은 그때보다 오히려 훨씬 말짱한 모습이었다.
철군악이 천천히 송난령에게 다가왔다.
“이제 내려갑시다.”
“그래요.”
송난령이 고개를 끄덕이자 두 사람은 천천히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장내에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갈가리 찢어진 네 구의 시신만이 참혹하게 뒹굴고 있었다.
* * *
사천성(四川省).
중원의 서남쪽에 위치한 거대한 오지(奧地).
땅이 험하고 자연 그대로의 원시림이 많아 중원에서도 척박하기로 손꼽히는 지방이 바로 이곳이었다.
더욱이 날씨가 다습하여 독충(毒蟲)이나 장독(毒)이 심해 이곳의 주민들은 매운 음식을 즐겼다.
장기(臟器)를 보호하는 데는 매운 음식이 최고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오맹삼(吳猛三)은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조심스레 수풀 사이를 헤쳐 나가고 있었다.
사박! 사박!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앞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어두운 산속에 그의 발걸음 소리만이 조용히 울려 퍼지고 있었다.
웬만한 장정 둘을 합친 것보다 커다란 덩치를 갖고 있는 오맹삼의 얼굴은 보기에도 안쓰러울 정도로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지금 걷고 있는 이곳은 맹수(猛獸)와 독충들이 우글거려 예전부터 인적이 뜸한 곳이었는데, ‘그 일’이 있고 난 후부터는 아예 사람의 발길이 끊겨 대낮에도 으스스하기 그지없었기 때문이다.
오맹삼은 당장이라도 혀를 문 귀신이 나타나 그를 잡아먹을까 봐 오금이 저려 제대로 걷기조차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그렇다고 다시 되돌아갈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으…… 내가 미쳤지! 그까짓 돈 오십 냥 때문에 이런 곳에 들어오다니!’
오맹삼은 자신의 멍청함과 경솔함에 치가 떨렸지만, 마음을 굳게 먹고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얼마간 그런대로 평온한 모습으로 길을 걷던 오맹삼의 얼굴이 다시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자신도 모르게 ‘그 일’이 떠오르고야 마는 것이다.
‘그 일’만 생각하면 지금도 자다가 벌떡 일어날 지경이었다. 그것은 결코 오맹삼이 겁쟁이라서가 아니었다.
‘그 일’을 겪은 사람은 누구나 그와 같은 공포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일의 발단은 육 개월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천 땅에서도 유달리 울창한 원시림이 근처에 있는 관계로, 이백여 호(戶)도 안 되는 이곳 흑수구(黑樹口)는 제아무리 극심한 가뭄이라 해도 사람이 굶어 죽는 일은 없는, 제법 살기 좋은 마을이었다.
마을 사람들의 인심도 넉넉한 편이었고, 그리 넓은 곳이 아니어서 조그만 일도 금세 소문이 나도는 전형적인 촌마을이 바로 흑수구였다.
의당 그러하겠지만, 이런 조그만 시골구석에서 일이 있다면 얼마나 큰일이 있겠는가?
그저 하루하루가 먹고 사는 것으로 바쁜 것이 마을 사람 모두의 처지인 것이다.
한데, 평화스럽기만 하던 마을에 날벼락도 유분수지, 실로 끔찍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원시림으로 사냥을 나갔던 여섯 명의 마을 사람들이 날이 저물어도 돌아올 생각을 않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 대부분은 그저 무슨 사정이 있겠거니 하고 처음에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흔한 일은 아니었지만, 간혹 커다란 짐승이 눈에 띄면 하루 이틀 정도는 마을로 돌아오는 시간이 늦어지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었다.
실종된 사람들이 이틀이 지나도록 돌아올 생각을 안 하는 것이었다.
그제야 사람들은 일이 심상치 않음을 깨달았다.
마을 사람들은 촌장의 집에 모여 의논에 의논을 한 결과, 우선은 실종된 사람들을 찾아보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다음날, 힘깨나 쓴다는 장정 예닐곱 명이 드디어 실종된 사람들을 찾아 나섰다.
마을 사람들은 원시림으로 사라지는 장정들을 보며 마음속으로 간절히 기원했다. 제발 실종된 사람들을 찾아 무사히 귀환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말이다.
마을 사람들의 염원이 하늘에 닿았던지 이튿날이 되자 장정들은 모두 무사히 마을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나, 기쁜 얼굴로 그들을 환영하던 주민들은 이내 깊은 비탄(悲嘆)에 빠져야만 했다.
장정들의 손에 들린 거적때기. 그곳에 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시커멓게 부패된 여섯 구의 시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얼굴은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지만, 마을 사람 누구라도 그들이 바로 원시림으로 사냥을 나간 사냥꾼들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슬픔을 감추고 서둘러 장사를 치르기 위해 시체들을 살펴보던 마을 사람들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시체의 형상이 너무도 끔찍했기 때문이다.
하나같이 얼굴이며 피부가 시커멓게 부패된 채 흐물흐물 녹아 있는 모습이, 꿈속에 나타날까 두려울 정도였다.
순박한 마을 주민들은 시체가 끔찍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에 대해 저마다 의구심을 갖고 있었지만, 누구
하나 정확히 영문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사인(死因)은 물론이요, 시체의 모습이 왜 그처럼 끔찍한지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저 원시림에 흔한 장독이나 전염병 때문이려니 하는 막연한 생각을 갖고 있을 뿐이었다.
사람들은 많은 의문점을 가슴에 묻어 둔 채 서둘러 장례를 치렀다.
혹시나 전염병이 번지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장례를 치르고 나자 마을은 다시 예전의 활기찬 모습을 되찾기 시작했다. 사람이야 태어나면 언젠가는 죽는 것이고, 마을 사람들 중 죽은 사람을 생각하며 슬퍼하거나 아쉬워할 만큼 시간이 남아돌아가는 부자는 없었다.
먹고 사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하루는 충분히 바빴던 것이다.
하나, 마을 사람들 중 누구도 끔찍하고 잔인한 악마(惡魔)의 유희(遊戱)가 이미 시작되었음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로부터 이틀 후, 또다시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무려 스무 명이 넘는 마을 주민들이 전신 피부가 썩어 들어가는 괴질(怪疾)에 걸려 하나둘 죽어 나간 것이다.
그들의 시체 또한 앞의 것과 전혀 다를 바 없었다. 온몸이 모조리 시커멓게 썩어들었고 털이란 털은 전부 빠져 있었다.
사람들의 얼굴에 공포의 그림자가 어렸다. 이번에 죽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전에 죽은 사람들을 찾아 나섰던 사람들이거나 아니면 그들과 접촉을 했던 사람들이었다.
분명히 돌림병은 아니었는데, 전염이 되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괴질에 걸리지 않도록 다른 사람과의 접촉을 극도로 조심하는 것뿐이었다.
하나, 아무리 조심을 해도 괴질은 없어질 줄 모르고 사람과 사람을 옮겨 다니며 고귀한 생명을 앗아 갔다.
일이 심각해지자 드디어 관부(官府)에서 개입했다.
사건을 조사한다, 괴질의 확산을 방비하기 위해 의심이 가는 곳이나 시체들을 전부 소각한다, 하며 난리를 피웠지만 나아지는 점은 조금도 없었다.
그렇게 육 개월이 흐르는 사이 천여 명을 넘던 주민 수가 오분지 일에도 못 미치는 이백여 명으로 줄어들었다.
거의 칠팔백에 이르는 사람들이 알 수 없는 괴질에 걸려 죽어 나갔고, 마을을 떠난 사람들도 부지기수였다.
죽은 사람들은 물론이고 그들이 살던 집이나 쓰던 물건들마저 전부 태워 없앤 탓에 근자에 들어와서는 더 이상 괴질에 걸리는 사람이 없었지만, 그 일로 인하여 마을은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 했다.
부지런히 발을 놀리던 오맹삼은 천천히 걸음의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과거의 끔찍한 기억이 지워지지 않았는지 열심히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그의 눈동자에는 아직도 공포에 질린 기색이 뚜렷했다.
‘여기 어디쯤일 텐데……?’
오맹삼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이곳에 올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딱한 처지가 이가 갈릴 만큼 지겨웠지만, 어쨌든 관부에서 바라는 대로 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누구나 가기를 꺼리는 이곳에 그가 다시 발을 들여놓은 것은 순전히 돈 때문이었다.
다소 위험이 따르겠지만, 이번 일만 잘되면 그로서는 평생을 가도 만져 보기 힘든 거금 오십 냥을 손에 쥘 수 있었다.
그 돈만 생기면 사랑스런 어린 딸이 병으로 인해 고통 받는 모습을 더 이상 보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그래! 어차피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야. 까짓 시체 한 구 가져 오는 게 뭐가 어려운 일이라고! 또 혹시 알아? 생각보다 별게 없을지도……?’
속으로 자위하며 한참 동안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오맹삼의 눈에 뭔가 보이는 것이 있었다.
그의 눈길이 머문 곳은 까마득히 솟은 절벽의 바로 아래였는데, 절벽은 여기저기 작은 동굴들과 온갖 잡풀로 인해 매우 을씨년스러워 보였고 그 바로 앞에는 직경이 채 이십 장도 안돼 보이는 작은 물웅덩이가 위치하고 있었다.
잔뜩 긴장한 눈빛으로 천천히 그쪽으로 다가가던 오맹삼의 얼굴에 기괴한 표정이 떠올랐다.
‘이게 무슨 냄새지?’
절벽에 가까이 갈수록 기이한 냄새가 짙게 풍겨 오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어찌 보면 무슨 향기 같기도 했고 또 어찌 보면 무슨 비린내 같기도 했다.
오맹삼은 속으로 매우 이상한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한구석으로 접어 두고 말았다.
당장 할 일만 생각해도 가슴이 벌렁벌렁 뛸 지경인데, 그까짓 냄새 따위에 신경 쓸 틈이 있을 리 없었다.
절벽 가까이에 이르러 조심스런 표정으로 주위를 살펴보던 오맹삼의 얼굴에 놀란 표정이 떠올랐다.
근처에 있는 나무며 풀 등이 모두 시커멓게 죽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물며 웅덩이에 있는 물까지도 시커멓게 물들어 있었다.
더군다나 오맹삼을 더욱 놀라게 하는 것은 수많은 짐승들까지도 여기저기 죽어 나자빠져 있다는 점이었다.
“으……!”
오맹삼은 심장이 벌렁거리고 사지(四肢)가 떨려 도저히 서 있을 힘조차 없었지만, 이를 악문 채 계속해서 주위를 살폈다.
공포에 젖은 얼굴로 한참 동안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그의 눈에 한 가닥 희열의 빛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가 찾고 있던 것, 바로 시체가 그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덩그러니 나자빠져 있음을 본 것이다.
오맹삼은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간신히 억누른 채 시체가 있는 곳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서둘러 시체를 살펴보던 그의 눈동자가 극심한 공포로 인해 전보다 훨씬 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헉!”
시체는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사람의 것인지 동물의 것인지 구별하기 어려울 만큼 심하게 썩어 있었지만, 단지 그런 이유라면 오맹삼이 이처럼 공포에 떨 이유가 없었다.
시체는 세월이 흘러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어떤 알 수 없는 이유로 인해, 초가 녹듯 녹아 있었다. 살과 뼈를 구별할 수 없을 만큼 온몸이 한데 뭉그러져 녹아 있는 것이다.
시체가 자신이 찾고 있는 것임을 오맹삼이 알 수 있는 이유는 시체의 손가락이라고 짐작되는 곳에 박힌, 붉은빛이 도는 가락지 때문이었다.
그가 이곳을 오기 전, 고을의 수령인 하(河) 대인(大人)은 분명히 자신의 아들 손에 붉은빛이 나는 가락지가 있을 것이라고 했었다.
오맹삼의 앞에 놓여 있는 이 끔찍한 시체가 바로 하 대인의 망나니 아들인 하 공자가 분명했다.
이제 시체를 찾았으니 사실을 알리기만 하면 하 대인에게서 거금 오십 냥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아들의 시체를 발견하면 증표로 반지를 갖고 오라고 했지!’
오맹삼은 이럴 때에 대비해 물소가죽으로 만든 장갑을 갖고 오기를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소가죽으로 만든 장갑은 두꺼우면서도 튼튼하기 이를 데 없어 이것을 끼고 작업을 하면 최소한 괴질이 손으로 옮는 것은 막을 수 있을 터였다.
스스로의 용의 주도함에 내심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막 품속에서 장갑을 꺼내던 그의 얼굴이 돌연 허옇게 질리기 시작한 것은 그때였다.
“으……!”
오맹삼은 무엇을 보았는지 허옇게 질린 얼굴로 커다란 몸뚱어리를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손.
장갑을 쥐고 있는 그의 양손이 마치 먹물을 칠해 놓은 것처럼 시커멓게 변해 있는 것이 아닌가!
오맹삼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소매를 걷어 보았다.
마찬가지였다.
손은 물론이고 팔뚝까지 시커멓게 변해 있는 것이다.
“으아아……”
오맹삼은 미친 듯이 온몸을 살펴보았다. 눈에 띄는 피부가 모조리 시커멓게 변한 채 흐물흐물 녹아들고 있었다.
몸이 이런 상태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통증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고 단지 약간 가려운 느낌뿐이었다.
“안 돼…… 으아아!”
오맹삼은 미친 듯이 절규했지만, 도저히 방법이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몸이 녹는 속도는 점점 더 빨라졌고, 마침내 그의 눈에서 생기(生氣)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뙤약볕 아래 얼음이 녹듯 흐물흐물 쓰러지는 오맹삼의 뇌리에 예전에 누군가로부터 들었던 얘기가 문득 떠올랐다.
그것은 무림에 있다는 무서운 가문(家門)에 대한 얘기였다.
자신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세계라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땐 선뜻 믿겨지지 않았었지만, 무서울 것이 없다던 무림인들조차 왜 그리 그들을 두려워했는지, 죽어 가는 지금에서야 알 것 같았다.
‘그래! 이건 바로 독(毒)이었어!’
오맹삼은 허탈한 얼굴로 뇌까리다 마침내는 한줌의 독수(毒水)로 변해 천천히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 * *
사천당가(四川唐家).
이미 수백 년 전부터 사천(四川) 땅의 지배자로 군림해 온 패자(覇者).
가문을 형성하고 있는 사람들 거의 전부가 당씨 성을 갖고 있는 이들은 숫자가 그리 많은 편은 아니었으나, 하나같이 독을 사용하는 데 능하고 비전(秘傳)인 당문오대암기(唐門五大暗器)의 공포스러운 위력으로 인해 누구도 감히 그들의 비위를 거스르려는 자가 없을 정도로 막강한 힘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들은 원래 누구보다도 정의를 숭배하는 정도의 명문이었으나 차츰 뜻한 바가 변질되며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패도(覇道)를 추구하는 집단으로 변해 버렸고, 근자에 들어와서는 공공연히 무림의 패권에 대한 야심을 보이기도 해 사람들을 불안에 떨게 만들고 있었다.
사천당가의 후원에 위치한 내실(內室).
방은 그리 크지 않았으나 고서화(古書畵)며 도자기들이 이곳저곳에 꾸며져 있는 탓에 제법 우아하고 화려해 보였다.
한쪽에는 고급스러워 보이는 탁자가 놓여 있었고 그곳에선 마침 두 사람이 앉아 차를 마시는 중이었다.
그 중 한 사람은 아주 청수한 얼굴의 초로인이었는데, 왠지 모르게 약간 음산한 느낌을 주었다.
그가 바로 당가의 현 가주(家主)인 당초인(唐礎仁)이었다.
그의 맞은편에는 육십 정도 되어 보이는 노인이 무표정한 얼굴로 차를 마시고 있었다.
보통 체구에 약간 마른 듯해 보이는 몸매의 노인은 가느다란 눈썹과 조금 휘어진 듯한 콧날을 제외하면 정말 나무랄 데 없이 잘생긴 얼굴을 지니고 있었다.
조용히 차를 마시던 당초인은 찻잔을 조심스레 내려놓더니 잔뜩 공경스런 시선으로 노인을 쳐다보았다.
“아버님! 신공(神功)의 대성(大成)을 다시 한 번 경하 드립니다. 오지(奧地)에서 그 동안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는지요?”
아버님이라니? 잘해야 당초인의 형뻘밖에 안돼 보이는 이 노인이 당가의 전대 가주인 독성(毒聖) 당문제(唐)란 말인가?
그렇다.
당초인의 말대로, 그가 바로 독공(毒功)에 관해선 고금제일인(古今第一人)이라는 독성 당문제였다.
그는 최근 백 년간 나타난 고수 중 가장 강하다는 삼성(三聖)의 일인이며 무림 정복의 야욕 때문에 당가를 변질시킨 장본인이기도 했다.
또한 당가를 현재와 같이 강대한 세력으로 부흥시킨 인물도 바로 그였다.
당문제가 그저 묵묵히 고개만 끄덕이자 당초인은 그의 반응을 조심스레 살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아버님, 현재 본 가의 계획대로 모든 일이 순조롭게 잘 풀리고 있습니다. 단지 문제가 있다면 성검문, 제마궁에 관한 것과 철가 애송이를 처리하는 일입니다. 어차피 성검문이나 제마궁의 문제는 하루아침에 해결될 일이 아니므로 급할 것이 없지만, 철가 애송이는 다릅니다. 하루라도 빨리 그놈을 처리하는 것이……”
묵묵히 설명을 듣고 있던 당문제가 말을 잘랐다.
“그가 그렇게 강하더냐?”
그는 아들인 당초인으로부터 이미 무림의 정세에 대해 보고를 들었다.
오랜 동안의 폐관(閉關)을 마치고 강호에 나왔지만, 수시로 아들에게 보고를 들었기 때문에 무림 정세에 대해서는 그리 어두운 편이 아니었다.
하나, 그도 아직 철군악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당문제의 질문에 당초인의 표정이 곤혹스럽게 변했다.
“놈이 고금십대검법의 하나인 광해삼검을 익힌 절세검수(絶世劒手)라는 것도 중요한 사실이지만, 문제는 놈이 독에 대해 일가견이 있지 않나 하는 것입니다. 일전에 본 가의 오독(五毒)이 그를 제거하기 위해 나섰다가 전부 황야의 고혼이 돼버린 적이 있습니다. 아버님도 알다시피 오독은 무공이야 별 볼일 없지만 용독술(用毒術) 하나만은 그래도 뛰어난 자들이 아닙니까? 한데, 놈에게 변변히 대항도 못 해보고 그만 몰살당하고 만 것입니다. 이것만 봐도 놈은 독에 대한 안목이 뛰어나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음!”
당문제는 턱을 괸 채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초인은 아버지가 이런 행동을 할 때면 항상 뭔가 궁리를 하고 있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조용히 그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과연 그의 생각대로 시간이 조금 지난 후 당문제가 나직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초경(礎敬)을 보내야겠다.”
순간, 당초인의 얼굴에 언뜻 놀람의 빛이 떠올랐다.
“형님을…… 말씀입니까?”
“그래, 놈이 독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본 가에서 그를 없앨 만한 사람은 초경밖에 없겠구나.”
하나, 당초인은 아무래도 수긍이 가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렇지만 형님은……”
당문제가 무표정한 얼굴로 그의 말을 끊었다.
“걱정 마라. 그 일은 내가 알아서 하마.”
당초인은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부친을 쳐다보았다.
항상 냉혹하고 비정하기만 한 그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고뇌의 빛을 보게 되자, 당초인은 더 이상 입을 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버님은 아직도 그를 사랑하고 계시는군요……’
그는 잠시 당문제의 얼굴을 쳐다보더니 곧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아버님. 그럼 소자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오냐.”
당초인이 깊숙이 허리를 숙인 후 밖으로 나가자 당문제의 입에서 문득 한숨이 새어나왔다.
“흐음!”
뭔가 고뇌에 빠진 듯한 얼굴로 묵묵히 허공을 응시하는 그의 두 눈이 기이하게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