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장 반역(叛逆)의 칼
(1)
아이들이 연을 날리고 있다.
마치 흰 갈기를 날리며 들판을 뛰노는 말처럼 많은 연들이 푸른 하늘을 휘 닫는다.
위로 솟구쳤다가 급격히 아래로 떨어지고, 빙그르르 돌며 재주를 넘는다.
"연을 날려본 적이 있어?"
석비룡이 벽소운에게 물은 말이다.
벽소운은 흥, 코웃음을 치며 즉각 말을 받았다.
"그걸 말이라고……."
하다가 손으로 입을 틀어막는다.
'아차! 이런 실수를…….'
자신은 고귀한 황족의 후예라고 떠벌리고 다니지 않았던가.
황족이 무슨 연 따위를 가지고 놀겠는가 말이다.
벽소운은 말을 고쳤다.
"연 같은 것은 만져 보지도 못 했어. 물론 날려 보고야 싶었지. 하지만 명색이 황족의 후예라…… 아무리 하고 싶은 일도 함부로 할 수가 없었어."
석비룡은 표정 없이 그녀의 말을 듣고 있는데 벽소운은 괜히 찔려 다음 말을 덧붙였다.
"사실 무척 피곤한 일이지. 남들처럼 뛰어다닐 수 있나. 마음 놓고 먹을 수 있나. 언제나 황족의 고귀한 기품과 품위를 유지해야 하니 한가하게 연이나 날리고 있으면 그것처럼 우스운 일이 어디 있겠어, 안 그래?"
벽소운의 물음에 석비룡은 그저 씨익 웃었다.
"어쨌든 고향에 돌아온 기분이겠군 그래."
벽소운은 어리둥절해서 되물었다.
"밑도 끝도 없이 웬 고향……?"
"황족이면 자금성에 살았을 거 아냐? 거기다 여긴 자금성 근처니까 고향이나 다름없지 뭐."
벽소운은 우물쭈물 말을 얼버무리기에 급급했다.
"무, 물론 그 말도 일리는 있지만……."
허나 어느 누구라도 지금까지 그녀가 한 행동을 본다면 금방 벽소운이 자금성이 초행길임을 알 것이다. 촌닭같이 입을 쩍 벌리고 이곳저곳을 구경하지 않았던가.
벽소운은 갑자기 인상을 쓰며 다그치듯 말했다.
"웃기고 있네! 황족이라고 꼭 자금성에만 살라는 법 있어? 황족이 주씨만 있는 줄 알아?"
석비룡은 전혀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는 듯 호오, 하면서 호기심어린 시선으로 벽소운을 쳐다봤다.
"그럼 어느 황족이란 말이야……?"
벽소운은 얼굴이 살짝 붉어졌지만 그럴수록 더 딱 잡아뗐다.
"지금은 비록 대명천하(大明天下)이지만 그 이전에도 황족은 얼마든지 있었다는 얘기야, 내 말은!"
석비룡은 손가락으로 귀를 만지며 중얼거렸다.
"대명 이전이라면……?"
곰곰이 생각하다가 눈을 번쩍 떴다.
"그럼 대원제국(大元帝國)의 황족출신……?"
벽소운은 어이없다 듯 픽, 콧방귀를 뀌었다. 그리고 답답하다는 듯 자기 가슴을 탁탁 쳤다.
"내가 몽고인(蒙古人)처럼 보여? 난 어디까지나 순수한 한족(漢族)이야, 한족!"
석비룡의 얼굴은 수수께끼라도 푸는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대원제국도 아니면…… 송(宋)황조……?"
"갈수록 점점……."
석비룡은 크게 놀란 듯 한 걸음 주춤 뒤로 물러섰다.
"그럼 당(唐)황조라는 거야?"
벽소운의 눈빛이 매섭게 찌릿 째려봤다. 정말 화가 난 듯 허리에 양 손을 척 올리고 소나기처럼 퍼부어댔다.
"보자보자 하니까 아예 멋대로 갖다 붙이고 있어! 삼황오제(三皇五帝) 이후 이 땅에 명멸해 간 왕조(王朝)가 한둘인 줄 알어?"
석비룡은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그럼 어디 출신이라는 거야? 약간 귀띔이라도 해주면 금방 맞출 자신이 있는데……."
벽소운은 어색한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핫하……! 아무리 황족출신이기로 어찌 스스로의 얼굴에 금칠을 할 수 있으리!"
이해한다는 듯 석비룡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궁금해도 꾹꾹 참고 한 가지만 기억해 두라구. 난 당신 같은 사람과는 아예 차원이 다른 신분이라는 사실을……."
그러다가 하늘을 올려다보고 땅을 내려다보며 세상이 무너지기라도 한 듯 휴우! 한숨을 내쉬었다.
"황족으로 태어나 그 고귀한 신분을 감추고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야만 하는 그 고뇌와 고통을 뉘라서 이해할는지……."
석비룡의 얼굴을 쳐다보며 말을 잇다가 벽소운의 눈이 반짝 빛나며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무슨 실수를 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저……저것은……."
벽소운의 시선이 향하는 곳으로 석비룡의 눈이 따라갔다.
두두두……!
그녀의 눈이 머문 곳에는 흔히 볼 수 없는 번쩍거리는 관복(官服)을 입은 무사 십여 명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말을 몰아오고 있었다.
'혹시 내가 황족이라 떠들고 다니니까 잡으러 온 것은…….'
벽소운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지만 이를 내색하지 않고 오히려 큰 소리를 쳤다.
"저것들은 뭔데 백주대로(白晝大路)에 함부로 말똥냄새를 풍기고 다니는 거야?"
석비룡은 자신이 자꾸 황족이라고 말하는 그녀에게 따끔한 일침을 가하고 싶은 유혹을 거부할 수 없었다.
"저 친구들은 금의위 위사들 같은데……."
"그, 그런가……?"
벽소운은 뜨끔했다.
관가의 조무래기보다 좀 더 높은 놈들이라 추측은 했지만 금의위 위사들이라니……!
석비룡은 벽소운을 곁눈질하면서 능청스럽게 너스레를 떨었다.
"거참 이상하군. 저런 복장은 세 살 난 코흘리개가 봐도 단박에 금의위 위사라는 걸 알아차리는데 어째서 황족출신이 그 정도도 못 알아보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벽소운은 똥이라도 씹은 표정으로 얼버무렸다.
"그, 그거야…… 세월이 흐르면 복장이란 바……바뀌기 마련이고……."
어느새 금의위 위사들이 석비룡과 벽소운 앞에 이르러 워워, 소리를 지르며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히히힝!
말들은 급제동을 거느라 두 발을 높이 쳐들어 허공을 휘저었다.
십여 명의 위사들은 경쾌한 동작으로 말 등에서 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
그들은 석비룡을 향해 정중히 포권지례를 취했다.
"본인은 금의위 제육반령(第六班令) 소속의 혁소웅(赫蘇雄)이란 사람이오. 공무상 몇 가지 물어볼 말이 있으니 협조해주면 고맙겠소."
석비룡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럽시다."
"온조라는 노인에게 일백 개의 연을 공짜로 넘겨준 사람이 당신이오?"
"그렇소만……."
석비룡은 선선히 자신임을 인정했다.
혁소웅은 손가락으로 하늘의 연들을 가리켰다.
"바로 저 연들이오?"
"맞소."
"그렇다면……."
줄곧 공손했던 혁소웅의 자세가 갑자기 위압적인 자세로 바뀌었다.
"잠시 우리를 따라 가줘야겠소."
"어디를 가자는 거요?"
석비룡은 의아한 시선으로 혁소웅의 얼굴을 쳐다봤다.
혁소웅은 무뚝뚝했다.
"가보면 알게 될 거요."
이때였다.
"웃기고 있네, 미친 자식들!"
벽소운이 뾰족하게 소리를 지르며 석비룡 앞을 가로막았다.
그녀는 혁소웅의 콧구멍을 손가락으로 찌를 듯 삿대질을 하며 외쳤다.
"너희들이 금의위 위사면 다야?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그따위 개수작이야?"
주위에 지나가던 행인들이 무슨 일인가 하고 하나 둘 몰려들었다.
석비룡은 주위의 눈을 의식하고 벽소운의 팔을 잡아끌었다.
"이봐, 조용히 말로 해도 될 걸 왜 큰소리를 치고 난리야?"
"내가 지금 조용히 하게 생겼어?"
벽소운은 석비룡의 손을 탁 뿌리쳤다.
"너희들 내 말 잘 들어! 보아하니 금의위 위사라는 간판을 내세우면 모든 게 만사형통인 줄 아는데 요즘 같은 세상에 그런 구닥다리 발상이 통할 줄 알어? 어따 대고 함부로 이래라 저래라야?"
벽소운 뒤에 서 있던 위사들 가운데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걸어가기 싫다면 끌고 가는 수밖에!"
챙!
허리에 찬 검을 뽑아들었다.
그러나 그의 검은 검집에서 채 반도 빠져 나오지 못했다.
촤라락!
벽소운의 허리에 감겼던 채대 하나가 어느새 풀려 위사의 목을 대신 휘감은 것이다.
"컥!"
그 자의 눈은 부릅떠졌고 얼굴은 붉게 충혈됐다.
벽소운이 약간의 힘만 더 가하면 그는 목이 졸려 더 이상 숨을 쉴 수 없을 것이다.
"뭐……뭐야?"
"전혀 움직이는 걸 못 봤는데 어디서 저런 것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혁소웅과 다른 위사들은 아연실색, 그저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었다.
"쯧쯧……! 겨우 손장난 한 번 친걸 가지고 썩은 돼지 간처럼 변하는 저 낯짝들이라니……."
벽소운이 비아냥거리는 소리였다.
그 사이, 주위는 구경꾼들로 완전히 포위되었다.
닭 한 마리도 못 잡을 것 같은 아리따운 미녀가 천하에 무서울 것이 없다는 금의위 위사들을 곤란한 지경에 빠뜨렸으니……
신나는 구경거리를 만난 사람들이 눈을 말똥말똥 뜨고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어쩐다? 공연히 일이 커질지도 모르는데…….'
석비룡은 벽소운에게 난처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모르고 한 짓인데 한 번 봐주지 그래?"
다행히 벽소운은 눈치가 빨랐다.
'이 작자가 무슨 꿍꿍이를…….'
이렇게 생각하고는 채대 끝을 잡았던 손을 아래위로 움직였다.
"좋아, 인생이 불쌍해서 봐줬다."
촤라라락!
마치 생명이라도 가진 듯 위사의 목에 감겨있던 채대가 풀려 그녀의 팔목에 둘둘 감겼다.
구경꾼들이 웅성거렸다.
"겨우 헝겊 쪼가리 하나로 날고기는 금의위 위사들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노는 구먼."
"곱상하게 생긴 아가씨가 보통이 아니야!"
혁소웅 등 위사들은 이런 소리를 듣고는 당혹감과 부끄러움에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성격이 급한 위사 세 명이 분을 참지 못하고 즉시 검을 뽑아들었다.
"발칙한 계집! 감히 금의위 위사를 건드리고 무사하길 바라는 건 아니렷다!"
"계집?"
벽소운의 눈썹 끝이 위로 치켜 올라갔다.
"아무리 금의위이라지만 일개 위사 따위가 감히 황족에게 욕을 해?"
그녀도 성질이 온순한 편이 아니라 상대가 욕을 하자 강호에서 하던 버릇대로 자기도 모르게 이런 말이 튀어나온 것이다.
"화, 황족!"
혁소웅 등은 대경실색(大驚失色)하여 뒷걸음질을 쳤다.
반면 벽소운은 소맷자락을 척척 걷으며 그들 앞으로 다가갔다.
"좋아! 가뜩이나 기분도 안 좋은데 오늘 잘 걸렸다!"
"자, 잠시만 기다리시오!"
혁소웅은 손바닥을 쫙 펴고 소리쳤다.
그는 허리를 굽히며 공손하게 물었다.
"지금 황족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실례지만 어느 왕부(王府)의 천금이신지."
그제야 벽소운은 자신이 실언(失言)했음을 깨닫고 아차 싶었으나 후회하기에는 너무 때가 늦었다.
그녀는 냉랭하게 콧방귀를 뀌었다.
"흥! 내가 황족이라면 그냥 그런 줄 알 것이지 왕부는 무슨 얼어 죽을 왕부야?"
혁소웅과 위사들은 멍한 표정으로 서로 얼굴을 쳐다봤다.
왕부의 사람이면 절대 왕부를 지칭해 얼어 죽느니 뭐니 하지 않는다. 더구나 이 여자의 말을 들어보면 시정잡배의 말투나 다를 바가 없었다.
그들은 곧 어떤 상황이라는 것을 눈치 챘다.
"어쩐지 수상하더니만 역시 가짜였구나!"
"간덩이가 부은 계집이군! 다른 곳도 아닌 북경성에서 감히 황족을 사칭하다니!"
혁소웅과 위사들은 분기탱천해서 일제히 검을 치켜세우고 공격 자세를 취했다.
"자자! 보는 눈도 많은데 이제 그만들 합시다."
석비룡이 중간에 끼어들었다.
그는 위사들의 대장격인 혁소웅을 의미심장한 눈길로 쳐다보며 빙긋 웃었다.
"안 그렇소? 날 보자고 한 사람이 이런 식으로 소란스럽게 날 데려오라고 지시하진 않았을 게 아니오?"
혁소웅은 움찔하며 말을 더듬었다.
"그, 그건……."
그때였다.
"지당하신 말씀!"
공중에서 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한 명의 인영이 혁소웅 앞에 표표히 내려섰다. 오른손에 섭선을 말아쥔 관복 차림의 중년사내였다.
혁소웅과 위사들의 눈은 휘둥그레 떠졌다.
"오……오 대인!"
그들은 무릎을 꺾고 바닥에 엎드렸다.
오 대인이라 불리운 사내는 못마땅한 시선으로 혁소웅을 내려다봤다.
"멍청한 놈! 아무리 눈이 어둡기로 옥석조차 구별을 못하다니……!"
"소, 소인들이……."
"시끄럽다! 황실로 돌아가는 즉시 혀를 잘라 버리도록!"
"조, 존명!"
그들은 한 마디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오 대인, 그건 좀 심한 것 같소."
석비룡의 목소리였다.
중년 사내는 몸을 돌려 척, 한쪽 무릎을 꿇고 인사를 올렸다.
"이렇게 다시 뵙게 되어 실로 감개가 무량하옵니다, 소군!"
"소군?"
혁소웅은 화끈한 번갯불이 자신의 머리를 치고 가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소군이라면 설마……?"
석비룡은 멋쩍은 듯 어깨를 으쓱했다.
"갈수록 입장을 곤란하게 만드는 군."
벽소운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얼굴로 오 대인이라는 자와 석비룡을 번갈아 쳐다봤다.
'소군……? 이게 도대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2)
쾅!
방문이 활짝 열렸다.
"소군!"
조공공이 버선발로 뛰어나왔다.
주위에서 서 있던 시녀와 무사들은 황망히 허리를 숙였다.
그들 가운데는 십 년 넘게 조공공을 모셔 온 사람도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나이 예순에 가까운 조공공이, 태산이 무너져도 손가락 하나 꿈쩍 않을 만큼 근엄하고 행동거지가 침착하기로 유명한 조공공이 이런 행동을 보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조공공은 바람처럼 달려 나와 사내의 손을 움켜잡았다.
"오랜만이오, 조공공."
석비룡은 그저 빙긋이 웃었을 따름이다.
"소군께서 다시 돌아오시다니…… 부디 이것이 꿈이 아니기를 빕니다."
조공공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석비룡은 그를 끌어당겨 자신의 가슴에 안았다.
"보고 싶은 사람을 만났으니 꿈인들 어떻겠소?"
서로 깊이 포옹하는 두 사람.
"소군!"
"조공공!“
* * *
거평객잔(巨平客棧)……
벽소운은 초조한 표정으로 방문 앞의 후원을 배회하고 있었다.
뒷짐을 진 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왼쪽에서 또 오른쪽으로 왔다 갔다 하는 것이다.
"소군…… 소군이라……"
그녀는 줄곧 소가 되새김질을 하듯 낮에 있었던 일을 반추해내고 있었다.
"오 대인이라고 했던가? 풍기는 냄새로 보아 그들 금의위 위사보다 한참 높은 자리에 있는 위인 같았는데 왜 석비룡을 소군이라고 불렀을까?"
"금의위 위사라면 황제의 직속기관으로 어지간한 고관들도 그 이름 앞에선 숨을 죽인다는 무소불위(無所不爲)의 조직이거늘 그런 고위층이 백주대로상에서 무릎을 꿇어? 그럼 그 석가의 정체는 대체 뭐라는 거야?"
"일단 성이 틀리니 황제의 친족은 아니라는 얘기고…… 소군이란 호칭으로 보아 최소한 황실 쪽과 깊은 연관이 있는 건 틀림없는 것 같은데……."
혼자 묻고 대답하기를 거듭하다가 이 대목에 이르자 갑자기 발을 우뚝 멈춰 섰다.
가벼운 소름이 살갗을 스쳤다.
'몸을 숨긴 수법으로 보아 분명 보통 놈들은 아니다. 전문적인 살수…….'
그녀의 생각은 그쯤에서 멈췄다.
콰쾅쾅!
멀쩡한 방문이 풍지박산 났고, 흩어지는 파편 속에서 몇 줄기 검은 기류가 그녀를 향해 쏘아져왔던 것이다.
쉐에엑!
습격도 빨랐지만 벽소운의 발은 그보다 더 빨랐다.
그녀는 마치 폭포를 타고 오르는 연어처럼 휘몰아치는 도광(刀光) 사이를 유연하게 빠져나갔다.
처척!
첫 번째 공격은 실패했지만 검은 복면을 쓴 십여 명의 인영이 벽소운을 에워쌌다.
"뭐하는 작자들이지?"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 대신 휘익! 사나운 기세로 덮쳐왔다.
그들의 양 손에서 칼이 번뜩였다.
"쌍칼이라면……."
보통 사람이었다면 톱니바퀴가 맞물리듯 돌아가는 칼 사이 사이의 틈을 비집고 몸을 보호하는데만도 숨이 찰 텐데,
벽소운은 쉴 틈 없이 몸을 놀리면서도 숨이 차지않는 듯 계속 조잘거렸다. "육문(六門) 중 쌍도문(雙刀門)의 식충이들이 쌍칼을 사용하긴 하지만 도법의 성격이나 초식으로 보아 그쪽은 아닌 것 같고……."
오른쪽에서 들어오는 칼을 몸을 젖혀 피하며 왼쪽에서 들어오는 칼은 보폭을 갑자기 넓게 하여 피했다.
"설쳐대는 품세나 실력을 놓고 볼 땐 제법 한가락 하한 자들이 틀림없는데 얼굴을 가린 것으로 봐선 뭔가 구린 구석이 있다는 얘긴데……."
"말이 많구나, 계집!"
복면 인영들은 전력을 기울였으나 벽소운의 머리카락 하나 벨 수가 없었다.
벽소운은 양손을 허리께로 내려 채대 두 개를 슥 잡아당겼다. 그것을 마치 채찍으로 때리듯 후려갈겼다.
촤라라락!
복면 인영들은 그녀가 어떻게 손을 썼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수천 가닥의 예리한 곡선들이 자신의 몸을 갈가리 찢는 것 같았다.
순식간에 두 명이 혼전의 와중에서 밖으로 튕겨 나갔다.
즉사해 버린 것이다.
그들의 얼굴과 몸은 마치 마른 논바닥처럼 쩍쩍 갈라져 있었고, 그 사이로 붉은 피가 솟았다.
"가, 강하다!"
그들이 알게 되었을 때는 늦은 후였다.
"아직 멀었어!"
벽소운의 일곱 채대가 모두 허리에서 뽑혀 허공을 수놓고 있었다.
일촉즉발의 그 순간, 공중에서 외침이 들려왔다.
"여기도 있다, 계집!"
벽소운은 가소롭다는 듯 흥, 코웃음을 치며 위를 올려다봤다.
그녀의 얼굴이 흠칫 굳어졌다.
쐐애애액!
허공에서 황금빛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만자(卍字) 형태의 쇠막대 하나가 무서운 속도로 쏘아져 내려왔다.
벽소운은 공연히 긴장했다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나중엔 별 해괴망측한 장난감까지 다 동원……."
그녀는 말을 하다 말고 눈을 크게 떴다.
내려오던 황금빛 쇠막대가 공중에서 잠깐 정지하는가 싶더니 위잉! 회전하며 사방으로 빛을 뿌리기 시작했다.
"설마……?"
벽소운의 머릿속에서 어떤 단어가 떠오른 순간이었다.
촤악!
만(卍)자가 갑자기 터져 버리더니 그물이 펼쳐지며 아래를 덮었다.
어쩌고저쩌고 할 새도 없이 벽소운은 고스란히 그물에 갇힌 물고기 신세가 되고 말았다.
"황금만라(黃金卍羅)?"
그녀의 입에서 터져 나온 이름, 황금만라!
인정한다는 듯 누군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한 식견이군. 수백 년 전부터 불가(佛家)에서 전설로만 전해오는 기보(奇寶)를 한눈에 알아보다니……"
이렇게 말한 사람은 낮에 석비룡을 데리고 갔던 오 대인이라는 작자였다.
그는 미소를 머금고 천천히 다가왔다.
"지옥의 악귀들을 제압하기 위해 소림의 육조 혜능이 만들었다던가?"
벽소운은 입술 끝을 당겨 지그시 깨물었다. 그녀의 눈에서 파아란 독기가 쏟아져 나왔다.
오 대인은 싱긋 웃었다.
"쓸데없는 짓은 삼가 하는 게 좋아. 알고 있겠지만 한 번 걸리면 대라신선도 벗어나지 못하고 천하의 어떤 신병이기로도 손상을 입히지 못하는 게 황금만라의 특징이거든."
벽소운이 그제야 궁금증을 풀었다는 듯 말했다.
"어쩐지 꿀먹은 벙어리 행세를 하더라니만 알고 보니 금의위 위사 나부랭이들이었군 그래. 그나저나 어떻게 된 거야?
금의위 위사들이 어째서 내 목숨을 노리는 거지?"
"그런 건 알거 없고…… 그냥 운이 없었다고만 생각하도록……!"
오 대인은 길게 상대하고 싶지 않다는 듯 짧게 대답하더니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어서 끝내고 가자꾸나."
복면 인영들은 사방에서 벽소운을 향해 저벅 저벅 다가왔다.
벽소운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이봐! 뭔가 오해하고 있는 모양인데 난 당신들이 소군이라고 부르는 사람과 아주 막역한 사이라고!"
그러나 아무래도 그 말만으로는 설득력이 부족한 듯하여 허둥지둥 없는 말까지 지어내 덧붙였다.
"핫하……! 이런 말을 하긴 좀 쑥쓰럽지만 거의 부부가 될 사이나 다름없다고나 할까?"
상대의 반응은 그녀의 기대를 저버렸다.
오 대인의 싸늘한 목소리가 그녀의 말을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죽어야 하는 거다."
벽소운은 몸을 부르르 떨며 그를 쳐다봤다.
"다시 말해봐. 뭐가 어떻게 됐다고?"
석비룡을 잘 알기 때문에 죽어야 한다니,
그게 대체 무슨 말인가?
허나 오 대인은 대답해주지 않았다. 음산하게 웃었을 뿐이다.
"잘 가게, 칠채월화!"
콰아아아……!
복면 인영들이 쌍칼을 높이 들고 무자비하게 짓쳐들어왔다.
벽소운의 안색이 차갑게 변했다.
"조용히 살아볼까 했는데 맘대로 되지 않는군. 좋아! 이왕 이렇게 된 것…… 모조리 날려 보내주지!"
그녀는 얼굴을 높이 쳐들더니 천천히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아아아아아아!"
처음에는 낮게 퍼져 나가던 사자후는 점점 높아졌다.
천하 삼대신음 중 하나인 파천붕음이었다.
복면 인영들은 사자후에 정신이 휘말려 들었다.
쳐들었던 칼을 내리치지 못한 채 사시나무 떨 듯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텅! 텅!
그들의 손에 들렸던 칼이 땅바닥에 떨어지는 소리였다.
"이, 이게 도대체……."
그들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넋 나간 사람처럼 벽소운을 쳐다보다가 급기야 휘청하며 썩은 고목처럼 땅바닥에 퍽퍽, 쓰러졌다.
그나마 내가진기를 끌어올려 끝까지 저항하던 오 대인이라는 작자도 길게 버티지는 못했다.
입으로 한 움큼의 검은 피를 울컥 토하더니, 앞으로 푹 고꾸라져 버렸다.
사자후가 뚝 그쳤다.
벽소운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며 싸늘하게 중얼거렸다.
"이건 내 잘못이 아니야……"
(3)
달빛은 대낮처럼 자금성의 높고 낮은 지붕들을 환히 비추고 있었다. 삼라만상(森羅萬象)이 고요히 잠들어 있는 것 같았다.
바람이 불자 정원에 핀 꽃, 밤꽃향기가 방안으로 스며들어왔다.
석비룡과 조공공은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마주 앉아 있었다.
조공공은 찻잔을 입에서 떼며 만면에 미소를 머금었다.
"하여간 정말 잘 오셨습니다. 그동안 백방으로 수소문했지만 도무지 종적이 묘연한지라 어찌나 걱정이 되던지……."
"괜한 걱정을 하셨소."
석비룡은 잇몸이 드러나도록 환하게 웃었다.
"보다시피 난 이렇게 끄떡없이 건재하잖소?"
"그 엄청난 환란을 겪고도 그토록 밝고 건강한 모습을 유지하고 계신 걸 보니 한결 위안이 되는군요."
이 말을 한 다음 갑자기 조공공의 눈가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하지만 이 늙은이는 아직까지 등룡왕부 사건에 대한 실마리조차 잡지 못하고 있으니……."
"쉽게 꼬리를 잡으리라곤 처음부터 기대하지도 않았소."
오히려 석비룡이 그를 위로하는 듯 담담하게 말했다.
"물론 이제부턴 상황이 조금씩 틀려지겠지만!"
찻잔을 들던 조공공의 손이 멈칫했다.
"상황이 틀려진다면……?"
석비룡은 바로 대답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창을 통해 멀리 거인처럼 서 있는 웅장한 건물 하나가 보였다. 황제의 거처였다.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와 등룡왕부를 멸망시킨 흉수를 알아낼 수 있는 최소한의 끈을 확보하고 있는 상태를 어찌 같다고 말할 수 있겠소?"
범인의 단서를 잡았다는 뜻이다.
조공공은 놀란 얼굴을 석비룡의 얼굴에 바싹 갖다대며 급히 물었다.
"그, 그게 정말입니까?"
석비룡은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았다.
"허나 이번 일에는 반드시 조공공의 도움이 있어야 하오."
조공공은 흥분된 표정으로 벌떡 일어섰다.
"말씀만 하십시오! 어떤 일을 어떻게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서두만 꺼내놓고 나서 석비룡은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조공공은 그의 얼굴을 쳐다봤지만 도대체 석비룡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이윽고 석비룡은 조공공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봤다.
"혹시 용봉배라고 아시오?"
"용……봉배……?"
"삼 년 전 채무량이란 사람이 갖고 있던 물건인데 어느 환관의 손을 통해 황실로 흘러들어 온 물건이오. 그 경로를 알아내는 게 이번 일의 최대 관건이오."
"그 경로를 알면 흉수를 찾게 되는 겁니까?"
"금의위(錦衣衛) 대영반인 조공공의 직위를 십분 활용하는 전제하에 구할의 승산을 자신할 수 있소."
석비룡은 차갑게 식은 찻잔을 들어올렸다.
그를 쳐다보는 조공공의 표정에 의미를 알 수 없는 묘한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다.
* * *
석비룡이 거평객잔을 찾아왔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폐허로 변한 다음이었다. 마치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듯 처참한 흔적만 남겨져 있었다.
주위에는 구경꾼들이 나와 웅성거리고 있었으며 폐허가 된 객잔의 앞마당에는 주인장으로 보이는 배불뚝이 사내 하나가 땅을 치며 통곡을 하고 있었다.
"아이고! 이제 난 망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도 유분수지 어째서 하필이면 내 가게가 이 꼴이 되었단 말이냐?"
석비룡은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도 들었다.
"자는데 갑자기 벼락 치는 소리가 들려서 나와 봤더니 이 지경이 된 거 있지?"
"직접 본 사람도 있는데 그 정도면 다행인 줄 알아!"
"이 근처를 지나는데 난데없이 뇌성벽력 같은 소리가 들리더니 저 객점이 그냥 흔적도 없이 날아가지 뭔가? 워낙 동작이 빨랐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나까지 황천길로 곧장 직행할 뻔했다고!"
석비룡이 주인을 지나 안으로 깊이 들어갔다.
정원은 살풍경(殺風景), 역겨운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맨 처음 본 것은 온몸이 마른 논바닥처럼 갈라져 죽은 세 구의 시체였다.
석비룡은 단박에 그것이 벽소운의 채대에 의해 베어진 상흔(傷痕)임을 알아봤다.
그의 눈은 허물어진 건물들과 내장이 파열되어 죽은 시신들을 예리하게 훑어봤다.
'보아하니 다수를 상대로 싸움을 하다가 위기를 느낀 나머지 파천붕음을 사용한 것 같은데…….'
어떤 흔적인가를 쉽게 간파해내면서도 한편으로는 양미간 사이를 좁혔다.
'누군가? 천하의 칠채월화 벽소운을 이토록 곤경에 몰아넣는 자들은 대체 누구이며 그녀는 또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석비룡은 걸음을 멈추었다.
찢어진 옷자락 하나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것이다.
화려한 문양이 수놓아져진 옷 조각은 흔히 볼 수 없는, 벽소운이 입고 다니던 옷이 틀림없었다.
석비룡은 옷 조각을 집어 들었다.
붉은 피로 쓰여진 선명한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칠채월화를 찾으려면 태암산(泰岩山)으로 오라!>
'이게 무슨 소리야? 그럼 그녀는 스스로 사라진 게 아니라 누군가에게 납치를 당했다는 건가?'
석비룡은 옷 조각을 꽉 움켜잡았다.
* * *
팔베개를 하고 침상에 누운 조공공은 잠이 오지 않는 듯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고 있었다.
사위는 쥐 죽은 듯 고요했다.
문 밖에서 발자국 소리가 났다.
조공공은 눈을 뜨지 않고 말했다.
"무슨 일이냐?"
밖에서 소리가 들렸다.
"소군께서는 조금 전 자금성을 벗어나 태암산으로 향했습니다."
조공공은 눈을 번쩍 떴다.
"그것뿐이더냐?"
"황제 폐하의 부르심이 계셨습니다."
조공공의 얼굴근육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방곡!"
"하명 받드오이다!"
"첫 번째 계획을 즉시 실행에 옮기도록!"
"존명!"
조공공은 침상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의 입가에 음울한 미소가 떠올랐다.
'소군, 우리는 결국……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가고야 말았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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