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무 공 전 수
죽림정사.
이곳은 백상인이 즐겨 찾는 휴식처이지만 더러는 손범에게 무예를 전수하기 위해서도 많이 이용되었다.
지금.
햇살이 영롱한 이른 아침.
백상인은 유일한 제자인 손범을 앉혀놓고 무예전수에 여념이 없었다. 동해 지옥도에 가기 전에 최소한 자신의 온갖 기예를 그에게 암기시켜야만 안심이 되겠기 때문이었다.
그의 무예는 모두 열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그것은 곧 무예의 원류라고 할 수 있는 내공심법인 금단선공(金丹禪功)을 비롯하여, 금단선공의 불가사의한 내력을 강기공으로 유형화시킨 금단강기, 장법 무아수, 권법 금단권, 지법 일선지, 보법 무아보, 신법 무아행, 검법 쾌검법인 무아섬과 중검인 무아중, 변검인 무아변 그리고 암기수법인 무아혼과 음공인 금단후로 나눌 수가 있었다.
그밖에도 그의 무예는 다방면에 걸쳐서 두루 정통하지 않은 곳이 없으므로 각종 독공이나 의술 학문 진도지학 등에 있어서도 이미 대가의 경지에 올라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백상인의 무예가 이 모든 잡다한 경지에 올라 있는 것은 아니었다.
광검....
그 모든 무예를 정통하고 하나로 꿰뚫었다고 할 수 있는 보다 차원 높은 무예를 그는 이미 연성한 상대였던 것이다. 그것은 과거 신비의 가문이었던 백가신화에서 유래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보다 근본적으로 말하자면 이 무예는 천축의 대설산에서 유래되었다고 그의 조상들은 밝히고 있었다.
그렇다면 과연 천축인들의 무예수준은 어느 정도나 될까? 이 광검을 연성하고 그 뿌리를 캐어보라는 것이 바로 차원 높은 가문의 숙원이었었다. 거기에 비하면 가문의 옛 영광을 다시 되살리는 것은 작다고도 말할 수가 있었다. 실로 그의 가문인 옛 백가신화는 초인들의 집단이었던 것이다.
과거, 삼년 전 화화장에서 그가 그 신비노인과 대면할 당시에는 이 광검을 완전히 연성한 상태는 아니었다. 따라서 백상인은 현재 이 기괴한 무예에 대단한 기대를 두고 있는 것이었다.
"사부님! 오늘은 무슨 까닭으로 그리 서두르십니까?"
손범이 그를 보며 다소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는 사부의 태도가 전과 같지 않음을 눈치 채고 기이하게 여긴 것이다.
백상인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내가 그렇게 보이느냐?"
손범은 눈빛을 영악스럽게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사부님!"
백상인은 가상하다는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가 일순 정색한 뒤 말했다.
"나는 바로 내일이면 먼 곳으로 떠나게 되느리라. 어쩌면 오늘이 나와 너의 마지막 대면일는지도 모르느니라."
"옛, 떠나신다고요?"
손범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렇다."
손범의 두 눈은 점차 휘둥그레졌다.
"설사 그렇더라도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말씀은.. 설마 세상에 사부님 보다 고강한 무예를 연성한 자도 있습니까?"
"물론이다."
백상인은 근엄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세상에 천하제일인은 없느니라. 그리고 강호인은 언제 어느 곳에서 어떤 변을 당할지 모르는 것이나, 항상 앞일에 대한 대비를 해두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사부님보다 강한 자가 있다는 말씀은 정말 믿기가 어렵습니다. 저어... 이번에는 저도 따라가면 안 됩니까?"
"그건 안 된다."
백상인이 고개를 가로 젖자 손범은 그만 풀이 죽었다.
백상인은 그를 향해 다시 정색하며 말했다.
"그래서 오늘 네게 기억할 수 있는 모든 무예를 전수해줄 생각이다."
"하지만 저는 이제 겨우 금단선공만을 전수받았을 뿐인데..."
손범이 이맛살을 찌푸리자, 백상인은 그를 정시하며 물었다.
"범아, 너는 금단선공을 어느 정도나 연성했느냐?"
손범은 안색을 붉히며 대답했다.
"저는 겨우 일성 정도만...."
백상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일이다. 금단선공은 한 단계를 뛰어오르려면 반드시 일 갑자의 내공이 필요한 법이다. 지금 너의 내공은 겨우 일 갑자의 경지이니 그 정도인 것은 당연하다."
"........"
백상인은 다시 물었다.
"범아, 너는 내가 왜 그간 네게 다른 무예는 일절 가르치지 않고 금단선공의 수련만 강조해 왔는지 아느냐?"
손범은 공손히 그 물음에 대답했다.
"그것은 금단선공은 내용이 워낙 방대할 뿐만 아니라 심오하기 짝이 없어 그것을 이해함에 있어 어지럽게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백상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헌데 너는 금단선공의 구결을 이미 다 암기하고 있겠지?"
손범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얼마 전에야 겨우......"
"부끄럽게 생각할 것은 없다. 보통사람이었다면 아마도 너처럼 삼년동안이라도 결코 암기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너도 알다시피 그 분량은 능히 보통 서책의 스무 배가 넘는 것이니까..."
백상인은 그를 위로한 뒤 다시 말을 이었다.
"나는 그간 오늘을 위해 미리 준비해둔 것이 있다. 이른바 기초무예를 닦을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으로....."
백상인은 잠시 말을 멈추고 품속에서 여러 권의 책자를 꺼내들었다.
그것들은 모두 그가 손수 제작한 것인 듯 새 책들이었고 필체가 수려하기 그지 없었다.
"이것들은 내가 과거 잠룡곡에서 불성십이무왕에게 기초무예로 배운 것들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다. 여기에는 강호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보법과, 신법, 장법, 지법, 검법, 권법, 암기술 등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무예들은 누구나 한번은 거쳐야 하는 것이니 너는 필히 이 비급들을 암기한 후 태워버려야 한다."
손범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그것들은 언젠가 얘기하신 불성문의 절학입니까?"
백상인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불성문의 절학은 비록 알고는 있지만 그들과의 약속이 있으니 네게 전수해줄 수가 없다. 그것들은 그들이 추려놓은 강호의 특징 있는 절예들이다.
사실 그것들만 해도 강호에선 최고의 절기로 꼽히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그 비급들을 암기한 후 소각해 버리라고 한 것이다. 필부는 잘못이 없어도 보물을 가진 것이 죄라는 말도 있지 않느냐... 왜, 너는 그 불성문의 무예를 배울 수 없어서 서운 하느냐?"
손범은 내심을 사부에게 들킨 듯 하여 얼굴을 붉힌 후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부님께선 반드시 그보다 훌륭한 무예를 전수해 주실 것이니까요."
백상인은 미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실로 그러하다. 내가 네게 차후에 전수해줄 십대절학은 불성문의 그 절학을 보고 창출한 것이나 기실 그 내용이나 위력이 판이하게 차이가 있고 다른 것이다. 따라서 나의 십대절학을 연성한 사람은 달리 불성문의 절학을 배울 필요가 없다."
"........."
백상인의 그 말에 손범은 절로 흥분하여 두 눈을 끔뻑거렸다.
그는 자신의 사부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무예가 고강하고 위대한 사람이라고 재삼 믿는 것이었다. 그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백상인은 말을 이었다.
"허나, 아쉬운 것은 이제 시간이 많지 않아 네게 그 십대절학을 모두 가르쳐주지 못하고 떠난다는 사실이다."
이에, 손범은 문득 시무룩한 안색이었으나 곧 안색을 펴고 씩씩하게 말했다.
"괜찮아요. 저는 사부님이 반드시 무사히 돌아오시리라 믿어요."
백상인은 미소했다.
"좋다. 그럼 네게 절기를 전수해주겠다. 내가 네게 전수해 주려는 무예는 바로 무아수로, 이것은 천하의 현존하는 장법들 중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굳이 이 절기를 택한 이유는 공격이 곧 최상의 방어이기 때문이다."
"........."
"물론 네가 오늘 안에 이 구결들을 모두 다 암기할 수 있다면 다른 절기도 가르쳐주겠다. 그럼, 구결을 말해줄 테니 잘 듣고 기억하도록 해라."
이어, 백상인은 무아수의 구결을 말하기 시작했다.
..................
구결은 매우 길었다.
백상인은 평소보다 다소 빠른 발음으로 구술했는데도 한번 외는데 무려 한시진이나 걸렸다. 손범은 총명한 눈을 크게 뜨고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자도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천하의 기재라 해도 무려 한시진이나 걸리는 구결의 내용을 단 한 번에 걸쳐 암기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손범의 안색은 우울하게 변해갔고 의기소침한 눈빛이 되어갔다. 그는 자신이 오늘 이 무아수 하나만이라도 완벽하게 암기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상기하고 있었다. 백상인은 그를 위해 구결을 연거푸 세 번이나 들려주었다.
그때는 이미 태양이 중천에 떠서 정오를 가리키고 있었다.
백상인은 이어 몸을 일으켜서 행동시범으로 들어갔다.
"자, 잘 보아라."
백상인은 근엄하게 말한 뒤 앞쪽에 있는 거대한 바위 하나를 가리켰다.
손범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하는 순간, 백상인의 우수가 활짝 펼쳐진 채 그림처럼 움직였다.
스슥!
처음에 백상인의 우수는 매우 느리게 움직이는가 싶었다.
그런데, 다음순간, 손범은 일순 아연하여 눈을 휘둥그레 떴다.
환영.
마치 환영과도 같은 그림자가 손바닥 주위로 일어나며 무수한 금빛 수영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아무런 소리나 기척도 없이... 그 수영의 숫자는 능히 수백, 아니 수천이나 수만 개쯤 되는 듯 했다. 그러한 수많은 금빛 수영들은 저마다 살아있기라도 한 듯 무수한 변화를 일으키고 있었다.
손범은 대경실색했다.
대체 인간의 능력으로 저 많은 변화를 어떻게 일일이 파악해 낼 수 있단 말인가? 그 때, 그의 내심을 읽기라도 한 듯 백상인이 입을 열었다.
"지엽을 보아서는 안 된다. 중심을 보아라. 갖은 변화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이치를 하나로 꿰뚫어야 한다."
"......."
그 순간, 실로 믿기지 않는 변화가 일어났다.
갑자기 그 무수하던 장영들이 하나로 합쳐지더니 거대한 금빛 수영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것은 커지거나 작아지거나 일순 갖은 변화를 보이더니 돌연 기척도 없이 지면의 바위를 향해 뻗어갔다.
고오오오.....!
아무런 파공음도 일지 않았다.
때문에 거대하게 밀려가는 그 수영은 마치 한순간의 환상 같았다. 그리고 그 수영은 한순간 바위를 일제히 휩싸는가 싶더니 갑자기 꺼지듯 사라졌다. 그 이외에는 아무런 변화도 일지 않았다.
손범은 자신이 환각을 본 듯하여 두 눈을 껌뻑거렸다.
대체 그 신비한 일장을 맞은 바위는 어떻게 된 것일까? 이때, 그의 궁금증을 알기라도 한 듯 한줄기 미미한 바람이 바위 위로 불었다.
그러자, 스으으으으.....
"앗....!"
손범은 눈을 부릅떴다.
그 집채만 한 바위가 홀연 연기처럼 꺼지더니 소리 없이 가루로 화해 무너져 내리는 게 아닌가?
손범은 이 믿을 수 없는 현실에 아연하여 입을 다물지 못했다. 백상인은 그의 그러한 표정을 보고 다만 미소할 뿐이었다.
"사부님, 이것은, 이것은 현실입니까?"
"믿기지 않느냐? 너도 이 절기를 대성하면 능히 이런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저는 도무지...."
"자, 다시 펼쳐 보일 테니 잘 보도록 해라."
이어, 백상인은 두세 번 반복하여 시범을 보여주었다.
손범은 크게 놀라면서도 그 변화를 알아내기에 내심 총력을 기울이는 듯 했으나 아직은 아무래도 무리였다. 시전이 끝나자 백상인은 손범에게 다시 물었다.
"구결암기는 다 끝냈느냐?"
"아직은......"
손범이 뒤통수를 긁적거리자 백상인은 다시 구결을 말해주기 시작했다.
그가 다시 구결을 두세 번 반복해서 들려주었을 때에는 이미 해가 저물어 저녁노을이 사위에 물들고 있었다. 하루 종일을 무공전수에 소모한 것이다.
이쯤 되어서야 손범은 구결의 십중팔구는 암기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되었다. 나머지는 네 스스로 생각하고 연구해 보아라. 자 마지막으로 네게 줄 것이 있다."
말과 더불어 백상인은 품속에서 하나의 옥합을 꺼내들었다.
그러자, 사위에 이루 형용하기 어려운 기이한 향기가 맴돌기 시작했다.
백상인은 그 옥합의 뚜껑을 열었다. 옥합 안에 든 것은 다름 아닌 하나의 황금빛 알이었다. 마치 메추리알만 한 그것은 은은한 광채를 발하고 있었는데, 사위를 진동시키는 기이한 향기도 그곳에서 풍겨 나오는 게 분명했다. 결코 그것은 평범한 물건이 아닐 것이다.
손범이 기이하게 생각하며 궁금해 하는데, 백상인이 미소하며 입을 열었다.
"이것은 바로 만년금구의 내단이다."
순간, 손범은 화들짝 놀랐다.
"그, 그럼 소금은 죽었단 말이에요? 사부님!"
백상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며칠 전에 그 만년금구는 이미 수명이 다했었느니라. 네가 그 녀석과 평소에 각별히 친했던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정해진 일이었으니 이젠 잊어야 하느니라."
"......"
"네가 이 내단을 복용하게 된다면 그녀석도 매우 기뻐할 것이다. 이것을 그 녀석의 흔적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손범은 눈물이 핑그르르 돌았다.
그와 만년금구와는 진짜 친구와 같은 사이였던 것이다.
손범은 눈물을 주르르 흘리다가 문득 고개를 저었다.
"저는 그것을 복용할 수 없어요. 제가 어떻게 소금의....."
순간, 백상인은 준엄하게 손범을 꾸짖었다.
"못난 녀석, 어찌 그렇게 밖에 생각하지 못한단 말이냐! 너는 이것을 복용하고 장차 무림 정의를 위해 힘쓰면 되는 것이다. 네 친구의 내단을 다른 사람이 복용해야 속이 편하단 말이냐?"
"......."
"어서 앉아서 금단선공을 운기 하도록 해라!"
손범은 그제야 눈물을 거두고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사부님!"
이어, 손범이 그 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자, 백상인은 그에게 내단을 건네주었다.
손범은 주저 없이 그 내단을 삼켰다.
입안에 들어가자, 내단은 타액과 어울려 부드럽게 녹더니 목구멍으로 무리 없이 넘어갔다. 그 순간, 손범은 일순 불길 같은 열기가 가슴으로 치솟는 것을 느꼈다. 손범은 내심 흠칫했다.
그때,
"마음을 가라앉히고 구결대로 운기하도록 해라!"
백상인의 고요한 음성이 울림과 동시에 천령혈로부터 맑고 지극히 청량한기운이 스며들어왔다. 그것은 분명 백상인이 본신의 진기를 이용하여 그에게 도움을 주려는 것이리라. 손범은 내심 침음하며 정신을 한곳에 모으고 운기행공으로 들어갔다.
내단에서 발해지는 열기는 실로 대단하고 공포스럽기까지 한 것이었다. 그러나 천령혈로부터 들어오는 백상인의 청량한 진기는 능히 그것을 제압하고 본신의 진기에 합류하도록 했다.
그것은 마치 길을 잘 아는 신선이 대중에게 길을 인도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조금의 무리도 없었다. 무리가 없었으므로 손범은 쉽게 무아지경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것은 그가 이제까지 체험하지 못한 지극히 황홀한 무아지경이었다.
투투투툭......
임독양맥이 자연스럽게 타통 되고, 이제 도달하게 될 사갑자의 공력.
그것은 항차 소년기인의 한 탄생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노을은 진홍빛으로 붉었다.
* * * * * * * *
그날 저녁.
이제는 백상인의 부인이 된 천상삼화와 여몽향은 푸짐한 잔칫상을 마련했다.
백상인이 손범에게 무예를 가르치는 동안 그녀들은 손수 소매를 걷어붙이고 한데 어울려 음식은 장만했던 것이다. 여인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음식을 장만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한다. 그렇다면 남자 역시 사랑하는 사람이 만들어준 음식을 먹을 때가 가장 행복할 것이다.
다행한 것은, 손빈아의 얼굴도 그녀들과 함께 보였다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이미 천상삼화와 친해진 듯 서로 쉴 새 없이 재잘거리고 웃곤 했다. 그리하여, 그날의 만찬은 몹시 풍성했다. 그것은 백상인에게도 가장 풍성했던 식사였을 것이다.
그 다음날 새벽.
네 명의 무인들이 깨기 전에 백상인은 소리 없이 성수장을 빠져나갔다.
기실 그녀들이 자고 있던 침대는 그 순간 눈물로 젖어들고 있었다.
* * * * * * * *
무림....
무림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흔들림은 아주 은밀했다.
그것은, 당금무림의 핵이라고 할 수 있는 무맹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가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이었다.
일곡일궁일방사문육가구파(一谷一宮一防四門六家九派).
현 무림의 중추세력인 이들이 어느 사이엔가 은밀하게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방내에서도 대체로 핵심인물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향하고 있는 곳은 바로 항주(坂搾)였다.
이는, 장차 벌어질 무림의 일대변혁을 말해주는 조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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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주.
절강성(絶江城) 북단에 위치하며 동해로 흐르는 전당강을 끼고 있는 유명한 항구도시이다. 특히 서쪽으로 서호를 끼고 있어 풍경이 수려하고 시인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으므로 강소성의 소주와 더불어 천하의 이대향락의 도시로 손꼽힌다. 명승지로는 남쪽으로 전당강 주위에 세워진 육화탑이 유명한데, 이곳에서 바라보면 전당강은 그야말로 한폭의 수목화를 연상시킨다고 한다.
헌데, 그 육화탑에서 십여 리 떨어진 곳.
그러니까 북쪽으로 항주시와 중간쯤 되는 곳에 위치한 하나의 고적한 험산이 자리하고 있었으니, 그 산의 이름은 옥황산이라 했다.
그 이름이 굳이 그러한 이유는 단지 근방에서 가장 높게 우뚝 서 있기 때문이며, 실상 그 이름만큼 별 볼일이 없는 산이었다. 항주에서 육화탑으로 가더라도 이 산만은 돌아가는 것이 상례인 것으로 미루어 그것은 가히 짐작 가는 일이었다.
그런데, 근간 며칠 사이에 유독 이 산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으니, 그것은 이 옥황산에 무슨 특별한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곳을 찾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무림인들이었기 때문이다.
시각은 자시 무렵.
옥황산의 정상에는 지금 무수한 사람들이 모여 진을 치고 있었다.
그들 중에서도 유달리 두드러진 인물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무맹의 맹주인 중원검신 남궁벽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옥황산 일대에는 무림의 모든 정예인물들이 웅거하고 있는 것이다. 남궁벽의 주위에는 지금 불성십이무왕과 일곡일궁일방사문육가구파의 수뇌들이 모여 있었고, 그밖에 봉공원로원의 원로들과 만박전주인 천지통 제갈박이 들러서 있었다.
특히, 광무자 단목무광이 죽은 이후 만무전의 후임으로 임명되었던 소림사의 장로 천뢰선사의 모습도 보였다. 장내의 분위기는 매우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만일 그들이 이번 일에 실패할 경우에는 자칫 강호의 질서가 완전히 파괴될 지도 모른다는 중압감이 그들을 짓누르고 있었다.
이번의 이 일은 정말로 거사였다.
만일 성공하면 그들은 차후 무림을 평화의 반석 위로 올려놓는 주역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표정은 그렇다고 주눅이 들기는커녕 신념과 의기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단지, 다소의 초조한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은 오히려 남궁벽 등이었다. 시간이 흐를 수록 장내의 분위기는 다소의 초조함 속에서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자정이 되려면 아직 일각여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들 수뇌진들은 저마다 이목을 사방으로 집중시키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지금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이번 거사에 있어서 결코 빠져서는 안 될 인물이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