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도인가? 2007년도인가 아마도 그 두 해 중의 한해 답사를 진행했던 기록인데 지금 봐도 새롭네요. 그 때 당시는 그래도 인천에 대해 말 하시는 분들이 적어 신이 났던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모두 재미있는 답사였고 즐거운 시간 들이었습니다. 오히려 지금 제가 그 당시처럼 재미있게 답사를 진행할 수 있을까? 의문이 날 정도입니다. 인천사 연구소 동구 답사기를 만 15년 전으로 나임머신 타고 돌아가 보겠습니다.
인천,
전철을 타고 오다 들은 이야기이다.
“아빠, 여기가 왜? 제물포역이야?”
“응, 이곳이 옛날 큰 포구인 제물포가 있었던 곳이야”
아마. 그 누구라도 그렇게 쉽게 생각하리라, 어렴풋이 옛날에는 바닷물이 이곳까지 들어왔을 것이고 이곳의 역 이름이 제물포이니. 그러나 인천역 앞 바다가 제물포인 것을 알고 나면 이네 허탈해 짐을 느낄 것이다. 혹 자는 지금 인천역을 제물포역이라 하고 지금 제물포역을 인천역이라 부르자고 주장 할 수도 있다. 철도 역명은 그렇게 쉽게 많이 바뀌어졌다. 경성역, 서대문역, 남대문역, 후에 서울역으로 바뀌는 과정에서도 그렇고 최근 요 근래 동두천역과 간이역이었던 어수동역이 각각 동두천역과 동안역으로 바뀐 사례가 있다.
그러나 제물포역이라는 명칭이 미군정 보름 정도의 기간 동안 제물포시로 불리어져 제물포라는 명칭은 인천을 대표했었지만 옛날 제물포진 제물포량의 명칭이 잊히는 게 아쉬워 역 이름에라도 남기자고 얼른 명명되었듯이 순식간에 도로 바꿀 수는 없는 처지이다.
그 제물포역에서 조금 인천역 쪽으로 이동하다 보면 우각리라는 곳이 나온다. 지금의 도원역 자리, 참 도원역은 태어날 때부터 말도 많고 탈도 많다. 지역 이기주의의 탄생물이라던가, 한 지역 국회의원의 이기심 때문이라던가, 주안과 동인전 사이에 운전간이역으로 제물포가 있으면 되었지 도원역은 무슨? 마을버스 정류장도 아니고. 인천지역 전체로 봤을 때 운전간이역이 많이 들어서는 것이 이득인지, 손해인지는 두고 봐야 알 것이다. 어쨌든 우각 역은 우리나라 철도의 시초인 경인선 탄생 때부터 있었던 간이역으로 자못 유래와 전통이 깊은 장소인 것이다. 모오스와 알렌의 별장에 얽힌 우각역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고, 자! 철도의 탄생과 관계되는 우각역 자리 지금의 도원역에서 우리의 동구답사는 진행되었다.
동구답사라, 시작부터가 이상하다. 이곳은 행정구역상 분명히 남구인데, 더 따지지 말자
남달우교수님, 김상태 교수님, 박철우 교수님 기타 인천에 관해서는 쟁쟁한 문화관광해설사 선생님들과 함께 진행되는 동구 답사…….
진행한답시고 무게 잡다가 도저 앞에서 삽질 하는 것은 아닌지 하옇튼 번데기 앞에서 주름 한번 잡아보자.
철도의 시발지, 철도의 기공지.
아마 철도 공사하기 위해 첫 삽질을 한 이곳이 그냥 잊혀지기 아쉬워 철도기공지 기념비를 세웠다. 도원역에서 철길을 따라 제물포 쪽으로 가다보면 기념비가 나오는데 그 기념비 후면에 실제 기공지는 동쪽으로 400m 전방이라고 친절히 쓰여 있다. 1897년 3월 22일 모오스는 기공식을 거행하며 한 장의 사진을 남겼는데 그 사진으로 그 위치를 찾고자 무던히 노력했으리라. 스카이라인을 살리고 옛 지형을 추측해 보며, 그러나 철도의 원래 설계할 때 지금의 박문여고 자리에서 독갑다리(숭의로타리 서쪽 부분)을 거쳐 만조시 바닷물이 들어오던 지금의 사동(현 인천여상자리)에 종착역인 인천역을 건설할 계획이었음에 그 선로와 현재의 선로가 일치되는 가장 안전한 지점을 선택해 철도 기공지 표석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분명한 것은 쇠뿔고개이었다는 것, 지금 이 곳은 도원고개로 도원고개의 길은 후에 일제강점하 시기에 발달되던 거리로 도원고개와 쇠뿔고개와는 차이점이 분명 있다라고 생각하고 그때 당시 철도부설권을 사실 우리나라 행정부가 일인들에게 주기로 현재의 MOU(양해각서) 비슷한 것을 체결해 놓고 명성황후 살해 후 우리나라 행정부는 미국인에게 경인철도부설권을 주었는데 그는 계획대로 일본지주의 땅을 사들이지 못하고 미국인들이 선교부지로 미리 확보해두었던 선교부지의 땅과 세창양해의 칼볼터의 땅(각국묘지 포함)을 사들여 응봉산을 휘감아 돌아가는 철도를 부설한 것으로 보아 선교부지로 사두었던 지금의 창영교회 앞 먹자 골목 근처 지점이 아마 철도기공지가 아니었나 생각해 본다.
옛날로 돌아가 50ton 짜리의 모걸형 스팀기관차에 석탄 한삽 떠 놓고 화상 정리하며 노치를 열고 도원고개를 올라보자,
독갑다리-- 혹 자는 다리가 하나라 독각다리라 불리웠다고(사실 그런 명칭이 우리나라에 많이 있다) 도깨비 다리에서 독깝 독갑이 나왔다는 말도 있고, 후자의 설명을 보완하자면 지금 중앙여상자리가 옛날의 병원 자리이었다 아마 행려 병자라든지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최후를 맞이 하였고 또한 지금의 소방서 자리는 화장터 였으니 그곳에서 하늘 나라로 올라 갔으니 이곳에서 독갑다리라는 명칭이 그 시절 음산하게 불리워 졌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원고개-- 도원고개 쪽으로는 큰 물이 흐렀다는데 숭의동 독갑다리 쪽에서 나온 물과 합쳐져 바다로 나간다.
숭의 구장은 인천의 공설운동장 역사가 웃터골에서 시작되어 숭의 구장에서 이제 문학경기장 쪽으로 이동했는데 2014년 아시안게임을 인천이 유치하며 문학경기장을 아시안게임 main stadium으로 사용하게 되므로 2010년까지 숭의구장을 새로 단장해 프로축구 인천unit 홈구장으로 사용하기로 하였다. 최첨단 축구전용구장을 만들 것이며 축구장 지하에 대규모 쇼핑센터와 영화관 스포츠 클럽을 만들어 도원 역사와 연결시킬 예정이다.
현 중앙여고 자리는 “덕생원” 이라는 병원이 있던 자리이고 현 소방서는 화장터가 있던 자리이다.
숭의구장-- 아마 인천 최초의 공설운동장을 인중제고자리의 웃터골이라 한다면 이곳은 두 번째 인천공설운동장이고 문학경기장으로 자리를 내준 이후로 침체되어 있는데 이곳이 새로 단장되어 인천 프로축구 홈 구장이 되고 주변 시설도 확 바꿔 새로운 스포츠 메카로 자리 잡음 한다하니 기대해 볼만 하다. 전날 여자농구 금호생명팀을 죽어라 응원하고 나오며 왜? 인천 팀이 이렇게 힘이 없어 했는데 이제 축구장에서 다시 인천 팀을 힘차게 응원할 날도 멀지 않은 것 같다
알렌별장--
알렌하면 고종 명성황후 오라버니 민영익, 모오스, 데슐러 기타 등등 인천하고 관계되는 많은 인물이 떠오른다.
지금 알렌 별장은 전도관(고 박태선 장로)의 소유로 되어 있다. 전도관의 내용은 부천 범박동 신앙촌과 관계되어 함께 설명하였으면 한다.
알렌별장의 빨간 벽돌집 지붕의 원통모양이 지금도 도원역사에 남아있어 이야기 거리가 많아진다.
도원역에 서서 광성고등학교 자리를 보며 많은 이야기들이 오고갔다. 일제강점하에 일군은 그곳에 대공포를 설치 방공망을 구성하였는데 많은 일군시설이 없어져도 그 기관포 시설은 오래 남아 있었다는데 광성고등학교전체를 뺑뺑 돌아보아도 지금은 그런 흔적조차 찾아 볼수 없었다. 그 학교에 대해 잘 아시는 분들이 많은 설명을 보태주셨다.
쇠뿔고개 -- 지금 인천세무서 앞 언덕길이 바로 쇠뿔고개이다. 배다리에 도착하던 어물들 즉 옛 인천 제물포에서 서울로 올라가던 유일한 길이었을 것이다. 쇠뿔고개를 지나 샛골로 돌아서서 활터고개(혹 헐떡고개 흔히 활터가 있어 활터고개라 부른다고도 하고 헐떡거리며 오른다하여 헐떡고개 라고도 한다) 로 다니던 옛 사람들의 발자취를 생각해 본다. 그래도 이러한 길을 따라 도시가 발달하고 이러한 길이 우리 민족의 애환과 함께 스며있는 추억의 거리들 송덕순 선생님의 어릴 적 이야기 “샛골고개를 내려가자면 소가 있었어요. 그 소가 불상해서(거기 있던 소들은 아마 모두 그날 죽게 됨을 아는 소녀가 무척 가슴 아팠겠지) 그 거리를 차마 다니지 못했어요. 지금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지 동구청 마당 한편에 소 등 도살된 가축들의 영혼을 달래는 위령탑이 서있다. 물론 지금 공사 중이라 조금은 소란스럽지만
황골 고개― 배다리 책방골목에서쇠뿔고개로 이어지는 고갯길을(배다리-도원역까지 가는 길) 황골 고개라 했는데 아마 크다는 뜻의 “한”자가 행길로 변하고 황골로 변한게 아닌가 짐작되어져 크다, 중심이다 라는 뜻으로 쓰인 것 같은데 이길이 인천에서 서울로 가는 큰 길이었던 것이다. 이 길에는 후에 창영초등학교 가는 길 입구에 철로 건널목 부근무터 도원역사이에 속칭 꿀꿀이 죽 판매하던 곳이 있었는데 미군부대 짬밥 통에서 나온 것을 갖다 팔았다 하여 생긴 골목인데 후에 만 두등 싸고 맛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았다고 한다. 또 송덕순 선생님의 한마디 “그때 먹던 음식에서 이쑤시개, 담배꽁초 등이 나왔어요”
아 진짜 옛날에는 지독히도 가난했다. 그런 음식들이 불결하다거나 더럽다고 별로 느끼지 못했던 적이 있었다. 아마 지금도 파고다 뒷골목 낙원동 쪽으로 가면 꿀꿀이 죽을 팔고 있을까?
여선교사 기숙사(겜블의 집)
창영감리교회(내리교회에서 분열되어 나옴)
영화학당(우리나라 최초의 초등학교)
창영초등학교(우리나라 최초의 공립 초등학교)
이곳에도 꽤나 많은 문화재가 있다.
책방골목을 들어설 즈음 우리 선생님들의 눈동자가 빛나기 시작했다. 아니 아직 시작인데 벌써 술집이 나타나면 어떡하나 본인의 걱정과는 달리 모두 마음이 상쾌해 졌는지 개코막걸리 집으로 들어갔다. 막걸리 동동주 역시 술 한 잔씩 하시니 기분이 상쾌, 통쾌, 유쾌 해 지셨다. 책방골목을 들어서자 옛날 양조장집이 나타나니 저는 그 양조장안의 한옥집을 설명하고 싶었는데 많은 산생님들의 양조장 추억담이 흘러 나왔다. 이쯤 되면 동구답사의 테마를 “인생에서 술은 무엇인가?”로 바꿔야 할지 송림초등학교를 지나 수도국산, 수도국산 박물관 제수변실, 기타등 등 답사를 진행하고
자 배다리에 이르는 수문통은 생략 조금 먼 동선이지만 화도교회까지 전진
역시 화도교회 전문가는 박철호 선생님이시다. 많은 설명을 듣다보니 최초의 관우를 모시던 굿당의 자리가 선뜻 나타나지 않는다. 아! 이럴 때의 답답함 그저 근처라 하고 그때의 부지에서 조금 이동했다 하는데 그 정확한 장소가 왜 이렇게 궁금할까? 며칠 있으면 창립 100주년 기념행사(10월) 할 때 다시 찾아보기로 하고 아쉬운 발길을 돌리며 오전 답사 행사를 마치고 자, 만석동의 쭈꾸미 할머니 집으로...
원조 쭈꾸미 할머니의 맛보다는 덜 매콤하지만 아마 손님들에게 더욱 어필 히는 음식 맛인가 “보다. 이제 원조 맛을 아는 분도 몇 안 계실 계다.식사후 중구와 동구의 갈림길 북성동과 만석동의 갈림길 이곳에서 화수동의 화수부두 만석동의 만석부두 북성동의 북성 부두 까지 설명해 보자. 마음의 지도라는 행사에서 제가 북성포구를 설명한 글을 잠깐 인용해보자
“제가 인천에서 꼭 소개드리고 싶은 곳이 있습니다. 그곳은 괭이부리마을 아이들이라는 김준미님의 소설로 유명한 기찻길옆 공부방입니다. 그런데 그곳은 그곳에 계신 선생님들이 구경거리마냥 오시는 것을 무척 싫어하십니다. 물론 그분의 마음에 어린아이를 배려하는 마음이 듬뿍했습니다. 저는 그래서 이곳 우리의 옛정취가 듬뿍 담긴 북성포구를 소개할까 합니다. 바닷가를 매립하기 전부터 어부들이 사용하던 어촌 포구 바로 제물포 이지요. 해안선이 매립되어 인천역이 생기고 지금은 이렇게 나와 앉아 골목속의 조그만 포구로 새우젓 냄새 물씬 풍기며 어부들의 삶이 그대로 배어 있는 곳 인천 유일의 곳이지 싶습니다. 여기서 배 들어올 때 게도 사고 새우젓도 사가세요. 참 새우젓 사 가실 때 상하지 않도록 꼭 소금에 절여가세요”
중구와 비교하여 동구는 우리민족의 정취가 남아있는 우리 민족의 근대사를 직접 체험해 볼 수 있는 곳으로 동구 답사를 진행하였는데 이 곳 만석동 괭이부리를 걷다보면 아직 숙연해 지는 느낌은 무엇일까요. 이 느낌은 잠시 덮어 두기로 하고 만석고가를 넘어 중구로 넘어 갑니다.
인천사연구소 중구답사기
응봉산 자락으로 올라가 슈류바움저택지와 기상대 쪽 사이또 별장 저택지쪽으로 둘러 볼까했지만 우리 일행은 벌써 인천역 쪽으로
인천역 쪽에서 러시아 영사관 위치, 영국영사관위치, 청나라 영사관 위치, 일본 영사관위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영국영사관 위치 이었던 파라다이스호텔로 오르던 중 연초회사 건물터였다는 기념비를 보며 연초 공장 성냥공장 등 그때 당시의 가내수공업에 관한 이야기를 하니 인천에 있던 공장들의 이야기가 그치질 않았습니다. 파라다이스 호텔 에 올라가 축항 부두를 보니 아니 그 많던 고철더미가 모두 어디로 간 거죠? 북항으로 고철 부두를 옮긴다 했는데 이제 이사 가고 없나 봅니다. 소음 먼지 휴! 그래도 다행이네요
선교100주년 기념탑과 도로원점 축항 준공 기념탑 모두 한눈에 들어와 그곳에서 이야기꽃을 피우는데 아무래도 조미수호조약 체결장소가 어디인가? 라는 논란이 떠오르면 너도 나도 전문가가 되어 한마디 씩......
한중문화관을 지나다 보니 돌로 만든 맨홀이 아직 남아있어 근대시기에 도시계획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었고요
일본우선주식회사 사옥에 대한 설명.
작고 아담하고 예쁜 아마 그 시절 지을 때 무척 공이 많이 들어갔을 테죠. 의양풍이라 서양식을 흉내 내기 위하여 애쓴 흔적이 가득합니다. 외모로만 보면 고대 신전과 다름이 없죠. 페디먼트, 기둥, 기단 . 이 일본우선회사는 우리가 세운 이운사를 흡수합병한 회사로 우리나라에 아카시 나무를 들여온 일화가 있는 회사이지요, 지금은 등록문화재로 등록되었습니다.
일본우선회사 에 대한 말씀을 하고 나니 그때 당시 중구에 있었던 건축물들을 둘러 본 걸 말씀드리자면.
건축물들을 살펴보면서 불현듯 옛날 성수대교의 갑작스런 무너짐으로 수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사건이 기억났습니다. 모든 건축물은 시공과 건축이 문제가 아니라 그 후의 관리가 문제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 사건이었죠. 아무리 잘 지었으면 무얼 하겠습니까? 아무리 좋은 작품도 관리를 못하면 무너지고 없어지고 말겠지요. 우리가 근대화가 시작된 후 어언 100여년이 흘렀습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빨리빨리의 함성과 함께 우리에게는 그저 잊혀져 가는 개발의 장애적 요소로 등장하고야 마는 우리 근대문화유산들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 없습니다. 이제라도 우리들이 관심을 갖고 지켜나가야만 되겠습니다. 서로 서로 우리시대의 사명감이라 생각하고 우리의 문화를 지켜나가야 하겠습니다. 한번 없어지고 나면 그 후론 영원히 다시 생산될 수 없는 우리의 소중한 문화들이기 때문이지요.
제물포구락부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최초의 서구식 공원 - 한국인을 위한 것이 아니고, 인천시민을 위한 것이 아니고, 우리 땅을 빼앗아 가려는 외국인들이 각국 조계를 설치해 놓고 public park를 조성했습니다. 오솔길(사실은 계단) 따라 내려오다 보니 숲속 외딴집 하나 - 외딴집이라기에는 규모가 조금 크지만 그래도 자그마하고 아늑하게 보이는 곳 그곳이 옛날 제물포구락부라고 불리던 곳입니다.
인천우체국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계속 보수하여 온 흔적 있으나 그래도 외형은 잘 보존되어 왔습니다.
홍예문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홍예문은 축조된 지 어언 100년이 되었는데 그동안 강산이 변해도 무려 10번은 변할 법도 한데 홍예문은 거의 변하지 않고 옛날 그 모습 그대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아마 도로로 사용하기 위해 계속 관리를 하였기 때문이겠지만 그리 관리한 흔적도 보이지 않는 걸로 보아 지을 때 워낙 튼튼하게 지은 것 같군요.
대한통운창고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빨간 벽돌로 쌓아올린 거대한 건물입니다. 지붕은 안에 목재로 되어있고 밖은 스레트로 되어 있는데 처음 지을 때부터 창고용도로 지었고 지금 현재도 창고로 쓰이고 있습니다. 간혹 이러한 창고들이 해변주위에 많이 있는데 공장 등으로 사용하고 있거나 헐어내고 아파트 신축부지로 사용되고 있는데 당분간 창고로 사용하고 후에 모두 헐고 전체적으로 새로운 건물을 지을 것으로 예상되어집니다. 인천기관구 길 건너편에 1904년경 건축으로 추측되어지는 인천전기주식회사가 있어 발전기를 가동하고 인천은 물론 서울까지 전기를 공급할 예정이었으나 오히려 서울에서 전기를 받고 지금은 이건물의 튼튼함으로 인해 태경전자, 대광엔지니어링 등 공장이 들어서있는데 대한통운 창고와 거의 흡사하게 생긴 빨간별돌로 쌓아올린 콘크리트 건물입니다.
분명 우리의 것은 우리가 지키지 않으면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고대를 잃어버렸습니다. 그 후로의 역사도 왜곡으로 점철되어 중국에 러시아에 일본에 미국에 세계 각국의 열강의 먹잇감이 되어 왔습니다. 앞으로 힘찬 미래를 위하여 우리를 확실히 알고 우리의 자존심을 찾아야 갰습니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바로 세계적인 것임을 음미하며 우리 인천 근대화문화 보호에 최선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자 건축물 말고도 중구에 대하여서는 말씀드릴 내용이 많죠. 자유공원에 올라가 보니 한미수교100주년기념탑 맥아더 동상 저 멀리 월미도 인천대교가 아스라이 보이며
날은 벌써 희끗희끗 저물어 가는데 아니 신포동 율목동은 또 언제 들리노 오늘 용동 권번까지만 가야지 그 기분을 내기 위해 힐사이드 근처 가마솥 집에서 계속 기분 내자고요 자 우리의 답사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한잔의 술과 대화 속에 또다시 살아나오는 우리의 옛 추억들
내가 사랑하고 짊어지고 가야 할 모든 것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
선생님 감사합니다. 오래된 답사내용이라 다시한번 답사하며 답사자료집을 만들어야할 것 같아요. 앞으로 멋진 답사자료 만들께요. 기대하세요. 관심가져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