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노동가요중에 잘린 손가락을 묘사하는 노래가 80년대 중반까지 작업장의 애환과 함께 한국의 노동자들 사에게 널리 불리어 졌다. 나 역시 "한개에 5만원씩 30만원에 술퍼먹고 돌아오니 빈털터리" 라는 노래나 "잘린 손가락 묻고 오는 밤 소주한잔 마시던 밤" 등의 노래를 부르던 아스라한 기억들이 있다. 그러나 현재 이러한 노래는 한국의 노동자들 사이에 거의 불리어지지 않는 옛 가요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이러한 가요가 사라지게 된 배경에는 산업의 구조조정 즉, 프레스나 사출기를 다루는 영세한 사업장이 없어지고 대신 현대화되고 전자화된 산업으로 대체된 것이 아니라, 노동력의 대체, 즉 중국이나 동남아 노동자의 값싼 노동력으로 대체되었기 때문에 우리의 주변에서 사라지게 되었다는 것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
이들 손가락이 잘리고 손목이 잘리는 재해를 당한 중국이나 동남아 이주노동자들의 경우 한국의 노동자들과 다른 방법으로 자신들의 한을 표현해왔다.
이들은 그동안 불법체류의 한계와 언어소통의 문제 때문에 보상을 받지 못하고 강제출국을 당한 이후 자신들의 나라에서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네팔에서는 산업재해를 당한 노동자들이 강제 출국을 당해 자신의 나라에서 잘린 손가락을 치켜들고 있는 달력을 만들어 한국의 야만성을 폭로하는가 하면 필리핀, 중국 등지에서는 종종 그 나라 주재 한국 대사관에서 산업재해를 당한 이주노동자들의 시위가 개최되어 국제적인 망신을 당하기도 했다.
또한 동남아 국가를 여행하면서 봉변을 당하지 않으려면 일본이나 중국인 행세를 해야 한다는 것인 이미 상식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아직도 이주노동자들의 산업재해가 비일비재하게 일어나지만 사업주가 기피한다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영세업체이기에 산업재해 보상보험을 가입하지 않은 경우도 상당수 있지만 이주노동자(외국인노동자)들을 산업재해 처리를 할 경우 불법체류 고용에 따른 벌금형과 보험료 인상 등으로 인해 손가락이 잘려나가도 자체적으로 치료를 해주고 그치는 경우가 상담건의 대부분이다.
또한 이러한 인식의 기저에는 잔인한 이야기 이지만 "이주노동자들의 손가락은 보상을 해주지 않아도 된다"는 대부분 사업주들의 의식이 있다.
실제로 손가락이 잘려 상담을 받으러 오는 대부분의 외국인의 상담사례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사업주와 이야기를 하다 보면 "치료해 줬으면 됐지 무슨 산업 재해 보상이냐?" 는 대부분 사업주들의 의식을 쉽게 접할 수 있다.
최춘복씨는 올해 36세인 중국동포로 지난 98년 경기도 시흥의 한 프레스 공장에서 양손가락 6개가 잘리고 1개의 손가락이 쓰지 못하게 된 재해를 입게 되었다. 그는 엄지를 제외한 오른손가락 4개를 모두 잃었으며, 왼손가락 2개의 절단과 1개의 뼈 비틀림으로 정상적인 손가락은 열 손가락에 3개의 손가락 뿐인 상태이다.
그는 지난 95년 6월 15일 중국화폐 7만위안(현재 1천300만원정도)을 주고 선원 연수생으로 입국을 하였다. 당시 그는 대한민국의 높은 경제수준이 동포사회에 알려지면서 대한민국이 모국이라는 것이 자랑스러웠고, 특히 모국의 구성원들이 같은 피를 나눈 동포라는 사실에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가 한국에 올 때 30세로 "몇 년만 열심히 일하면 돈을 벌어 중국에서 결혼도 하고 가정도 이룰 수 있으리라"는 소박한 꿈에 부풀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가 못했다. 선원 연수생으로 입국한 이후 월 27만원씩 받는 돈으로는 도저히 중국에서 빌린 이자조차 갚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결국 그는 6개월동안 선원일을 하고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고 불법체류자가 되었다. 그는 연수생으로 이탈한 이후 한동안 건설현장에서 여러 가지 일을 하게되었지만 일당은 5만원씩 높았지만 날씨에 따라 일을 하지 못하고 또 공사수주를 오야지가 받지 못하면 일을 할 수 없는 관계로 보다 안정된 일을 하고 싶어 선택한 직업이었다.
사고 직후 사업주는 산재보험에 가입하지 않은 관계로 "프레스 기계를 한 대 팔아서 보상을 해줄테니 기다려라" 고 약속을 하여 최춘복씨는 그 말을 믿고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친구들의 집을 전전하며 보상을기다려 왔다고 한다. 그러나 올해 4월경 다시 그가 공장으로 사업주를 찾아 갔을 때 이미 사업주는 공장을 모두 처분하였으며, 살고 있던 집 역시 어디론가 이사를 가고 난 이후였다고 한다.
최춘복씨는 그제서야 속았다는 사실을 알고 본 센터에 도움을 요청해 왔지만 이미 때는 많이 늦어버린 후였다.
최씨의 상담을 받은 이후 어렵게 사업주의 주소를 다시 추적하여 전화통화까지 하였지만 이미 사업주는 "마음대로 하라" "법대로 하자"며 아예 보상자체를 거부한 상태였다.
이후 민사소송을 위해 사업주의 재산을 파악하였지만 이미 부동산을 포함한 모든 재산은 부인의 명의로 되어있기 때문에 민사소송을 하더라도 실익이 없는 상태이며, 또한 현행 법률로는 사업주를 형사처벌 할 수 있는 근거가 없기에 형사고소도 가능하지 않은 상태이다.
"저는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생각만 해도 막막함이 몰려옵니다. 지금까지 많은 중국동포들은 중국 내에서 조차 소수민족의 설움을 겪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국땅인 한국에서 겪는 서러움은 그에 비할 바가 아닌 것 같습니다.사업주가 저를 인격을 가지고 있는 인간으로 대했다면 이렇게까지 비참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저는 일단 모든 것을 떠나서 최소한 사업주가 먼저 사과를 하고 이해를 구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할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사업주의 태도는 전혀 그렇지 않았던 것입니다." - 최춘복씨의 진술서중 일부 -
최춘복씨는 사고를 당하고 난 이후 작은 꿈이 있었다고 한다. 그것은 사업주의 약속대로 보상을 받아 고향에서 조그만 가게라도 내서 살아가는 것이었지만 이제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그는 지금 센터 한 구석에 임시숙소를 만들어 지내고 있다. 매일 아침 그를 마주치며 느끼는 것은 이제 그에 대한 애처로움이나 동정의 감정만은 아니다. 인간에 대한 그리고 사회에 대한 절망과 분노이다.
위에 사례는 한국이주 노동자 인권센터에서 가져온글이다.
우리는 우리들의 산업재해만 인정하고 있지 다른나라 외국인, 특히 저임금 외국 근로자에 대해서는 어떠한 해결책을 내어놓지 못하고 있다. 하루빨리 해결책을 찾아야 할것이다.
첫댓글 참 안타까운 우리나라 현실인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국민들이 외국에 여행을 갔다가 우리나라에 왔었다가 봉변을 당하고 간 외국인들의 입소문으로 인해 피해를 보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저번에 '느낌표'에서도 비자발급이 않되서 고생하는 것을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