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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역사 마을 원문보기 글쓴이: 잉걸
(내[글쓴이 잉걸]가 대학교 4학년이던 시절[서기 2004년] 대학교에서 들은 강의 내용 가운데 일부를 간추려서 소개한다. 내가 열여덟 해 전의 강의를 소개할 수 있는 까닭은, 그것들을 공책에 적어서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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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록색 글자 : 내가 덧붙인 주석 겸 보충설명
- 한국 학계가 ‘근대’가 시작되었다고 판단하는 해는 서기 1876년이고, 그 ‘근대’가 끝난 해는 서기 1945년이다.
-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줄여서 ‘조선 공화국’. 수도 평양)의 학자들은 서기 1860년대부터 ‘근대’가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서기 1876년은 운요호 사건 때문에, 근세조선이 근대 왜국[倭國]과 강화도 조약을 맺은 해고, 나아가 근세조선이 통신사 대신 수신사를 처음으로 근대 왜국에 보낸 해다. 즉, 그 해는 근세조선이 강제로 쇄국정책을 포기하고 나라 문을 열기 시작한 해다. 한국 학자들은 그 때문에 그 해를 ‘근대의 시작’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그리고 서기 1945년은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남으로써, [적어도 겉으로는] 제국주의와 군국주의가 종말을 고한 해다. 그래서 학자들은 편의상 그 해를 ‘근대’가 끝난 해로 판단한다.
그렇다면 조선 공화국의 학자들, 그러니까 조선노동당 당원이기도 한 그들은 왜 서기 1876년이 아니라 그보다 열여섯 해 더 앞선 서기 1860년[또는 서기 1860년대]를 ‘근대의 시작’으로 여기는 것일까?
근세조선의 갈마[‘역사’를 일컫는, 순수한 배달말 낱말]를 보면 그 의문을 풀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서기 1860년대는 – 서기 1862년에 근세조선 곳곳에서 일어난 농민 봉기인 임술 농민항쟁[다른 이름은 ‘진주 농민 봉기’. 서기 1862년이 동아시아의 달력으로는 ‘임술년’이므로, ‘임술 농민항쟁’으로도 불린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 삼정의 문란으로 근세조선 여름지기[‘농민(農民)’/‘농부(農夫)’를 일컫는 순수한 배달말 낱말]나 가난한 백성들의 불만/분노가 극에 달했던 때였다.
그들은 병기[兵器]를 들고 일어나면서 탐관오리들에게 맞서 싸우거나 문서를 보내 조정에 조세 제도의 개혁을 요구했고, 관청을 공격하거나 성[城]을 점령하기까지 했다.
비록 근세조선의 조정이 이 봉기에 앞장선 사람들을 붙잡아 처형하기는 했지만, 진주 여름지기들의 들고 일어남[봉기(蜂起)]을 보고 들은 충청도/전라도[호남]/경상도의 다른 지역 백성들도 봉기했고, 함경도와 제주도[오늘날의 제주특별자치도]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나려고 할 정도로 임술 농민 봉기는 큰 영향을 끼쳤다.
근세조선의 민중은 이런 봉기들을 통해 그들의 의식이 크게 자라났음을 입증했으며, 이 봉기들은 그로부터 서른두 해 뒤인 서기 1894년에 일어난 동학 혁명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렇다면, 그러니까 ‘피지배자이자 민중이 자신들의 힘으로 나라나 사회를 새롭게 바꾸려고 한 일’을 ‘근대화의 기본 조건들 가운데 하나’로 받아들인다면, 여름지기를 비롯한 백성들이 이전의 민란이나 폭동이나 반란이나 도적질과는 달리 뚜렷한 목적을 지닌 채 전[前]근대사회 – 이른바 ‘봉건사회’ - 의 정부나 지배층에게 대들고 그들을 더 이상 ‘거룩한 존재’로 여기지 않으며 그들에게 사회 구조의 개혁을 요구하며 창칼을 들고 싸우기 시작한 일을 ‘근대화의 시작’으로 설명한다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프랑스 혁명도, 명예혁명도, 메히코 혁명도, 신해혁명도 시작은 무장봉기였다!].
두 사관을 들고나온 학자들의 국적이나 이념을 빼고, 순수하게 사관만 놓고 따지자면, 나는 다른 나라의 침략자들이 총칼을 들고 나라의 문을 열라고 강요한 해이자, 그 침략자들의 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해가 아니라, 나라 안의 평범한 구성원들이 예전과는 다른 의식을 지니고 나라와 사회의 변화를 요구하며 들고 일어나기 시작한 해가 참된 ‘근대화가 시작된 해’라는 견해에 동의하는데,
그 까닭은 만약 전자[서기 1876년을 ‘근대의 시작’으로 여기는 사관]를 ‘근대화가 시작된 해’로 받아들인다면, 일부러 그런 게 아닐지라도 “우리는 더럽고 미개하며 뒤떨어진 나라를 문명화하려고 [총칼을 들고] <진출>했다.” 라는 제국주의자/군국주의자/인종주의자들의 사관을 긍정하는 결과를 낳으며, 나아가 “한국인과 조선 공화국의 공민[公民]과 코리아[Corea]계 민족들은 자신을 개선할 힘이 없고, 남의 문물을 받아들여야 발전하는 ‘척’이라도 할 수 있는 멍청하고 못난 족속이다.”라는 식민사학자/서양 백인 학자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결과도 낳기 때문이다. 이는 침략과 점령과 식민지배와 인종주의를 합리화하는 일이며, 한국인을 비롯한 배달민족[그러니까, 코리안(Corean)]에게 열등감과 패배주의를 심어주고 ‘피해자 탓하기’를 하게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후자[서기 1862년을 ‘근대의 시작’으로 여기는 사관]는 – 무릇 한 사회나 공동체나 나라가 바뀌거나 발전하려면, 무엇보다도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뜻과 행동이 가장 중요하다는 점을 생각하면 – 합당하고 합리적인 사관이며[근세조선이 근대국가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그 누구보다도 근세조선 민중의 의식과 행동이 바뀌어야 한다. 그건 로[Ro]시야 제국이나, 프랑스나, 영국이나, 미국이나, 근대 왜국이 대신해 줄 수 없다], 동학 혁명이 동학뿐 아니라 근세조선의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의 이론에도 영향을 받아 일어난 일이라는 사실[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다루거나 아니면 다큐멘터리를 소개하려고 한다]을 생각하면, 실제 사례로도 입증되는 것이기 때문에, 나는 이를 지지하는 것에 아무런 거부감이 들지 않는다.
설사 강요된 ‘개항’과 이른바 ‘개화기’에 밀려 들어온 서양/로시야/근대 왜국의 문물이 근대사에 영향을 끼쳤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근세조선 민중의 각성과 투쟁’이 일어난 뒤에 들어와 근세조선/대한제국에 ‘접붙여진 것’이지, ‘근대의 모든 것’은 아니며, 그것들을 얻기 위해서 나라[근세조선/대한제국]가 망해야 했다든지 – 식민사관을 따르는 뉴라이트나, 우익 지지자인 왜국 역사학자들이 이와 비슷한 주장을 한다. 그리고 왜국에서 배우거나 왜국이 준 자료들만 가지고 연구하는 서양 백인 학자들 가운데도 그렇게 주장하는 바보가 있다 - , 그것들이 아니면 발전이나 변화 자체가 없었을 거라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이다.
[‘근대 서양의 문명을 누리기 위해’ 꼭 서양 국가에 침략/정복/점령당해 식민지가 되고 지배받아야 하는가? “서양”을 로시야나 근대 왜국으로 바꿔도, 그게 말이 안 된다는 것은 누구라도 알 수 있다! 문명이나 선진 문물은 그것들을 만든 나라의 침략이나 지배를 받지 않고도 얼마든지 참고하거나, 받아들이거나, 배울 수 있다. 타이(Thai)는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지가 되지 않고 살아남았지만,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자신을 바꿀 수 있었고, 이란과 튀르키예 공화국도 같은 길을 걸었다. 그렇다면 그 때문에라도 ‘식민지 근대화론’이나 “근대화/문명화하기 위해 제국주의를 내세우던 나라에 점령당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는 주장은 설 자리가 없다]
그래서 나는 서기 1876년에 ‘근대’가 시작되었다는 한국 학자들[사실은 식민사학자이자 식민지 근대화론을 외치는 작자들이고 제국주의 지지자]의 주장이 아니라, 서기 1862년에 ‘근대’가 시작되었다는 조선 공화국 학자들의 주장을 따르기로 했다.
나는 근세조선의 근대사뿐 아니라, 청나라나 다이남[한자로는 ‘대남(大南)’. 비엣남(Vietnam)의 옛 이름]이나 필리핀이나 메히코나 페루의 근대사에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예를 들면, 필리핀의 근대사를 설명할 때 그 나라가 서기 1900년대 초부터 미국의 식민지로 지배를 받으면서 미국 문물을 강제로 받아들여야 했던 사실을 강조하는 대신, 서기 19세기 말 필리핀 사람들이 에스파냐의 식민지배에 반발해 독립전쟁을 일으키면서 공화정과 민주주의와 성[性] 평등과 인권을 강조하는 공화국을 스스로 만들었던 사실/그런데 그 공화국이 다름 아닌 미군의 침략으로 무너져 버린 사실을 강조하는 것도 이 제안을 실천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필리핀 사람들이 독립전쟁을 치르는 동시에 근대국가를 자신들의 힘으로 만들려 했다는 사실이, 필리핀의 근대는 미국이 가져다 준 것이 아니라 필리핀 사람들 자신이 스스로 만들기 시작한 것임을 입증하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비[非]서구세계가 서구에 침략당한 사실을 ‘근대화의 기준’으로 삼는 사관[유럽 중심주의/백인 우월주의/서양 숭배/서양 백인에 대한 사대주의를 바탕으로 한 사관이기도 하다]에서 벗어나, 침략 이전에 그 사회/나라 안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를 근대화의 기준으로 삼는 사관으로 옮겨가야 한다.
그것은 사대주의와 중화사상을 바탕으로 삼은 사관[史觀]에서 벗어나는 일이나, 왜국이 강요하는 식민사관을 버리는 일처럼 중요한 일이며, 우리가 균형 잡힌 정신을 지니고 올바른 문화에서 살아가기 위해 내딛어야 하는 첫걸음이기도 하다.
[단, 이렇게 주장하는 나도, ‘근대’가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해인 서기 1945년에 끝났다는 한국 학자들의 설명은 반박하거나 의심하지 않는다. 이것을 밝힌다면, 내가 이른바 ‘우리식 사회주의’에 물들어서 한국 학자들의 사관을 모조리 부정한다는 혐의를 뒤집어쓰고 수갑을 차지는 않으리라] )
- 식민지 시대의 아나키즘은 그 자체가 민족운동이다(이 점은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도 마찬가지다).
(우선, “식민지 시대” 대신 ‘대일[對日] 항전기’라는 말을, 그리고 영어 낱말인 ‘아나키즘’ 대신 그것을 대신할 훌륭한 낱말인 ‘자유연합주의[自由聯合主義]’가 있다는 사실을 짚고 넘어가고 싶다. - 실제로 해방정국 당시 ‘아나키즘’을 따르는 사람들이 발행한 신문의 이름이 『 자유연합[自由聯合] 』 이었고, ‘자유연합주의’라는 번역어는 스무 해 전 ‘아나키즘’과 그와 관련된 한국의 독립투쟁/독립전쟁을 연구하던 한국인 교수가 만들어낸 낱말이다 –
그리고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따른 한국의 독립투사들 가운데, 소련에 지나치게 기댄 나머지 자유시 참변이나 민생단 색출 사건이나 김산 선생이 [제하(諸夏) 공산당 안의 권력투쟁 때문에] 누명을 쓰고 처형당한 일이나 스탈린의 고려인 강제이주 같은 비극을 막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점, 그리고 그들이 소련 정부의 중앙아시아인/우크라이나인 탄압 같은, 사실상의 ‘붉은 제국주의 정책’을 반대하지 못했거나 반대하지 않았던 점도 비판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이 살아 있었을 때 – 그리고 그들이 한참 투쟁하고 있을 때 – 한국인[나는 서기 1897년부터 서기 1945년까지는, 남/북과 모든 코리아계 민족들을 아우르는 말로 이 이름을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의 적은 소련이나 제하 공산당이 아니라 근대 왜국이었고,
그들의 투쟁이었던 파업이나 소작쟁의는 온 한국을 옭아매었던 근대 왜국의 자본가나 지주나 동양척식회사나 조선총독부의 착취와 맞서 싸우는 독립투쟁의 일부분이었으며,
[적어도 현대가 아니라 대일 항전기 때에는] 사회주의나 공산주의가 근대 왜국의 군주제나 신국[神國] 사상이나 이른바 ‘황국사관[皇國史觀]’이나 식민사관이나 한국인 멸시에 맞서 싸우는 데 도움이 되었고,
한때 한국인들의 기대를 모았던 예수교 교회[개신교/동방정교/천주교 모두]나 개화론자들이나 서양 여러 나라의 정부가 “<일본>을 미워하지 말고 용서하라. 교회는 나랏일을 보는 곳이 아니다[당시 실제로 서양 선교사들이 했던 설교의 내용].”는 설교나, “우리가 당하는 건 우리가 못나서이니, 쳐들어오는 남을 탓할 게 못 된다(당시 언론을 통해 드러났던 개화론자들의 주장 가운데 일부).”는 논설이나, “우리는 대한제국의 멸망에 이의를 제기할 생각이 없다. 한국의 멸망을 축하한다[당시 영어권 나라들의 정부나 언론사가 대한제국의 멸망을 접한 뒤 보인 실제 반응].”고 반응한 데서 알 수 있듯 한국과 한국인들의 편이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나자, 한국의 독립투사들이 실망/분노한 나머지 그들에게 등을 돌리고 ‘대안’으로 소련을 찾아가거나 자유연합주의/사회주의/공산주의를 받아들인 것이라는 사실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한 예로, 본명이 ‘장지락’인 ‘김산’ 선생도 원래 고향인 평안도에서 살 때는 개신교 신자였으나, 3.1 혁명 때 ‘비폭력적으로 군답시고’ 왜군과 왜국 순사들에게 대들지 않고 ‘얌전히’ 죽임을 당한 한국인 개신교 신자들과, 그들을 모욕/조롱하려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면서 낄낄거렸던 왜군 병사들을 보고 난 뒤 실망/분노하여 개신교를 버리고 공산주의자가 되어 중화민국으로 달아난 뒤 독립투쟁을 시작했다],
나는 서기 1945년 이전에 독립투쟁/독립전쟁에 참가했던 좌파 독립투사들, 그러니까 자유연합주의/사회주의/공산주의를 받아들여 근대 왜국의 제국주의/군국주의/침략에 맞서 싸운 한국인들을 ‘한국의 독립투사’로 인정하고 교과서에서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공산국가를 목표로 삼지 않았던, 민주주의와 민족주의와 공화주의를 바탕으로 삼은 조직이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좌우합작정부였고, 좌파 독립투사들도 그 안에 들어가 민족주의자/보수파들과 함께 왜국에 맞서 싸웠다는 사실도 내가 이렇게 주장하는 까닭들 가운데 하나다]
이들을 복권한다고 해서 이들을 무작정 미화하자는 건 아니고, 아까도 말했듯이 소련에 지나치게 기대느라 비극을 불러들인 사실이나, 이들 가운데도 근대 왜국 정부나 조선총독부의 폭력/회유공작에 무릎 꿇고 친일파로 전향한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나, 이들 가운데 해방 이후에 폭군으로 돌변한 사람들[예 : 김일성]이 있다는 사실도 교과서에 함께 실으면, ‘균형’은 맞출 수 있을 것 아닌가?
그러니까 ‘왜’ 그들이 나타났는지를 제대로 설명하고, 그들의 공은 공대로, 과는 과대로 가르치자는 이야기다)
- 아나키즘은 반(反) 자본주의적인 사상이다.
(자유연합주의가 자본주의 – 그리고 그와 짝을 이룬 제국주의 - 에 반대한 것은 맞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 사상은 소련/지나[支那]식 공산주의[‘현실 사회주의’라고도 한다]와도 치열하게 맞서 싸운 사상이다.
자유연합주의는 공산주의와는 달리 ‘인간을 억누르고 자유를 빼앗을 수 있는 조직’인 정부 자체가 필요 없다고 주장하기 때문이고, ‘당과 당 간부들은 명령하고 인민은 그에 따르는 사회’는 왕조와 다를 바 없는, ‘타도되어야 마땅할 사회’라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또한 자유연합주의는 ‘자유로운 개인들끼리 서로 돕고 사는 공동체’나 ‘아래로부터 위로 의견이 전달되는 사회’가 바람직하다고 가르치는데, 이것도 ‘당이라는 조직이 인민을 이끄는 나라’를 만드는 밑바탕이 되었던 공산주의와는 다르다.
그리고 “자유”를 강조하다 보니, 언론 검열이나 여론 통제가 뒤따르는 공산국가의 현실에 가장 많이 반발하는 사람들 가운데 자유연합주의자들이 들어 있을 수밖에 없다. 바로 이 때문에 자유연합주의는 서기 19세기 중반부터 맑스를 비롯한 공산주의자들과 치열하게 싸우고 대립했고, 소련이 볼셰비키 국가가 되자 로시야 혁명에 뛰어들었던 자유연합주의자들이 크게 반발/분노하며 소련을 떠났으며,
대일 항전기 때의 한국이나 근대 왜국에서도 두 사상을 따르는 사람들이 크게 싸우며 서로를 비난했고,
냉전시대 내내 공산국가에서는 자유연합주의가 – 자본주의와 마찬가지로 – 금기어였다.
그러므로, 자유연합주의는 김일성이나 조선노동당이나 인민군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걸 분명히 밝힌다)
- 비록 요즘은 ‘민족문제’가 ‘한물 간 문제’로 여겨지지만, ‘실체로서의 민족’은 엄연히 존재하고, 분단이라는 상황도 민족주의로 풀어야 하기 때문에, 민족문제와 민족주의는 여전히 중요하다고 봐야 한다.
(내가 이 말을 들은 해가 서기 2004년이었다. 그로부터 열여덟 해가 흐른 지금[서기 2022년]은 상황이 더 나빠졌다.
이제 한국의 젊은 세대는 민족 문제를 “한물 간 문제” 정도가 아니라 “너무나도 듣기 싫고, 관심을 기울이기도 싫은 문제”로 여기고 - 모두는 아니더라도, 많은 수가 그렇다 - , 근세조선과 대한제국이라는 같은 뿌리에서 갈라져 나온 사람들 – 예를 들면, 조선 공화국 출신 망명자[나는 ‘탈북자’나 ‘새터민’보다는 이 이름이 문제의 본질을 더 정확하게 꿰뚫는다고 생각한다]나 코리아계 제하[諸夏]인 - “조선족”보다는 정확한 이름이고, 남북을 아우를 수 있는 이름이기도 하지 않는가? -을 깎아내리고, 헐뜯고, 미워하며, 믿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는 재일[在日] 코리안의 인권이나, 고려인의 삶이나, 코리아계 메히코 시민들의 삶에도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정도로 냉담해졌기 때문이다.
나아가 – 정말로 믿고 싶지 않은 소식이지만 – 젊은 ‘순혈’ 한국인들이 “일본을 용서했다.” 운운하며 친일을[더 정확히는 왜국 정부와 우익과 대다수 왜국 국민들을 무조건 따르는 일을] 합리화하며, “우리는 미국이나 영국의 주[州]가 되어 영어를 쓰고 그 나라의 국민으로 살아야 한다!”는 주장도 서슴지 않을 정도로 배달민족이기를 포기하려는 속마음을 강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자신이 ‘우익’이며 ‘보수파’고 ‘우파’고 ‘극우’라고 주장하는 한국의 반공주의자들은, 희한하게도 이런 일에는 입을 딱 다물고 아주 조용하다! 진짜로 한국의 보수파라면 “왜 주권을 포기해? 왜 한국인이 멀쩡한 한국어를 버리고 영어만 써? 왜 원수인 왜놈을 용서한 거야?”하고 따져야 하지 않는가?]
그러나 남북의 대립이라는 오늘날의 한국인 – 그리고 조선 공화국의 공민들이나 코리아계 제하인이나 고려인이나 재일 코리안들 –을 괴롭히는 일도 그 뿌리는 ‘근대에 나라와 겨레의 독립을 지키지 못한 일’이기 때문에, 그 문제를 풀고 코리아[Corea] 반도 – 나는 남북과 코리아계 민족들이 ‘한반도를 써야 한다, 조선반도라는 이름을 써야 한다.’고 말하며 서로 싸우느니, 차라리 이 이름을 쓰는 편이 낫겠다고 여겨 이 이름을 쓰기로 했다 – 에 평화와 화해를 불러오기 위해서라도[나아가 두 체제와 온 누리[‘전세계’]의 코리아계 민족들과 한국 국적을 얻어 한국인이 된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이어지기 위해서라도] 우리 한국인들은 민족문제와 민족주의를 완전히 포기하면 안 된다. 적어도 아직은 그 둘을 버릴 때가 아닌 것이다.
나아가 [6.25 전쟁이 일어나는 까닭이 된] 남북분단 자체가 하나의 ‘민족’이었던 근대의 한국인들이 바란 것이 아니었고, 서로 자본주의와 ‘우리식 사회주의’를 내세우며 일흔일곱 해 동안 적으로 지낸 두 나라[두 체제]의 구성원들이, 유일하게 합의하고 공통점을 찾아낼 수 있는 요소는 현대사 이전의 배달민족 갈마, 그러니까 서기 1919년 이전의 갈마와 그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민족주의 뿐이라는 현실도 생각해야 한다.
[예를 들어보자. 한국 학계가 북쪽에 있던 나라인 아사달(‘고조선’)이나 부여나 고구리(高句麗)나 중기 고리(‘진/발해’)의 갈마를 연구하듯이, 조선 공화국의 학계는 남쪽에 있던 나라인 가야 연방(가야 제국[諸國])의 갈마를 연구하고, 조선 공화국의 학계는 남쪽 지방에서 일어난 동학 혁명을 추켜세우며, 둘 다 서기 1919년에 일어난 3.1 혁명을 적극 긍정한다. 나는 이것이 험악한 두 나라/체제 사이의 대립을 완화하고, 만나서 이야기를 나눌 가능성을 제공하며, 화해와 협력으로 가는 길을 닦고, 새로운 앞날을 보장할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방법들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파국이나 극한 상황을 피하고, 대립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쓸 수 있는 방법은 다 써 봐야 한다. 그렇다면 이 방법도 써 봐야 하지 않겠는가?]
[다른 까닭도 있다.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자본주의 국가인 한국에서 산 나는 신자유주의를 비롯한 자본주의가 ‘국민 통합’이나 ‘단결’을 이끌어 내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기본 이념으로 삼은 나라의 시민/국민들을 분열시키고 나라를 ‘싸움터’로 만든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정책 때문에, 공기업의 사영화(私營化) 때문에 해고되거나 월급이 깎이거나 너무나도 비싼 전기요금을 내야 하는 보통 사람들이 과연 그 정책을 밀고 나가는 정부를 ‘우리 정부’로 여길까? 정부를 믿고 따르려고 할까?
경쟁과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당연하다고 배운 사람들 – 이 둘은 자본주의 사회가 강조/강요하는 이념이기도 하다 – 이 과연 똘똘 뭉쳐서 서로 도우려고 할까?
오히려 서로를 경계하며 ‘내가 남의 것을 뺏어 먹지 않으면, 난 굶어 죽는다.’라고 생각하고 헐뜯거나 싸우거나 상대방을 속이려고 할 것 아닌가?
나는 그 때문에라도 – 민족주의 대신 – 이른바 ‘자유민주주의(사실은 신자유주의/자본주의/친일/친미 사대주의)’를 내세우며 그것을 바탕으로 한 통일만이 ‘하나뿐인 해결책’이라고 우기는 사람들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만약 신자유주의나 자본주의 대신, 민족주의를 다른 보편사상들과 접붙여서 만든 이념을 통일국가의 새 이념으로 삼는다면, 못해도 ‘같은 나라의 같은 시민/민족’은 서로 도와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므로, 그것이 나라 안에서는 신자유주의나 자본주의의 야만성에 제동을 걸 수 있는 ‘견제 장치’가 될 수 있을 것 아닌가?
만약 그것이 국수주의나 인종주의나 순혈주의가 아니라, “민족은 다른 민족이나 인종을 받아들이면서 새롭게 만들어지고, 탈바꿈하고, 달라질 수도 있는 것”임을 인정하는 민족주의라면, 좌파 지식인들이나 혼혈인들이 걱정하는 문제 - ‘민족주의가 다른 민족이나 인종이나 집단을 배척하는 이념이 되지 않겠느냐?’는 의문 –를 풀 수 있다는 말도 덧붙이고 싶다]
중년 한국인인 나는 그 때문에라도 “민족문제와 민족주의는 여전히 중요하다.”는 열여덟 해 전의 강의 내용에 동의하며, 비록 언젠가는 민족문제와 민족주의가 ‘더 이상 심각해질 필요가 없는 일’이 될 날이 오겠지만, 적어도 지금[서기 2022년 현재]은 그런 날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린다)
― 단기 4355년 음력 11월 19일(그리고 전두환/노태우가 신군부를 이끌고 군사반란을 일으킨 날)에, 지금은 “어둠이 권세를 떨칠 때”요, 우리 한국인들을 비롯한 많은 민족들이 ‘바람 앞의 촛불’ 신세라고 생각하며 우울해하는(그러나 이를 악물고 악착같이 버티며, 유격대[遊擊隊] 대원 - ‘게릴라’ - 처럼 ‘치고 달아나는 방식’으로라도 싸워야 한다고 다짐하는) 잉걸이 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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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역사 마을 원문보기 글쓴이: 잉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