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813
3월31일[주님 부활 대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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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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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부활을
성모님과
모든 천사들과 함께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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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는 오늘 무엇에 죽고 어떻게 부활할 것입니까?>
참으로 감사하고 은혜로운 부활 성야입니다. 영광스러운 주님 부활, 그러나 한 마리 나비처럼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예수님 부활 사건입니다.
저는 이번 부활 시기, 구체적인 제 삶 속에서, 공동체 생활 안에서 주님 부활의 흔적을 찾고, 느껴보기 위해 나름 노력을 해봤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넉넉한 고장 태안에 내려와 산지 벌써 만 4년이 지나갑니다. 막 도착했을 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도착하자마자 팬데믹이 시작되었습니다. 예약되어 있던 피정 센터 모든 스케줄이 백 퍼센트 취소되었습니다.
코로나 19 바이러스가 창궐하고 집합 금지 명령까지 내려져 피정객들은 단 한 명도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건물 싸이즈가 큰 관계로 한 달 전기세가 나왔는데, 입이 딱 벌어져 다물어지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심각한 상황이 계속되니, 한때 관구에서는 폐업뿐만 아니라 매각까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저희는 그게 무슨 소리냐? 수많은 청소년들이 다녀간 오라토리오요, 많은 살레시안들의 땀과 눈물이 흩뿌려진 성지 같은 내리를 어떻게 포기하냐? 절대 그럴 수는 없다며,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는데, 드디어 길을 찾았습니다.
집합 금지 명령이 내려졌지만, 용기를 내서 피정객들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딱 한 분이 피정을 오셨습니다. 그러다가 두분, 세분, 그리고 어느 순간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네 명 미만은 가능하니, 여기 네 명 저기 네 명, 저 건너편에 네 명, 또 다른 쪽에 네 명...
그런 노력의 결과 팬데믹이 한창이던 시절에도 아무런 경제적 타격을 입지 않고, 피정 센터는 잘 돌아갔습니다. 오히려 흑자를 내서 선교 기금이나 양성 기금으로 기여를 했습니다.
오늘 같은 경우도 정말이지 하느님께, 또 멀리서 찾아오신 교우들께 깊이 고개 숙여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는 태안읍에서도 50분이나 더 들어와야 하는, 오지입니다만, 이 외딴 곳의 시골 성당을 꽉 채워서 부활 성야 미사를 봉헌할 수 있다는 것, 너무나 큰 감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바로 이런 우리 공동체의 모습에서 주님 부활의 확실한 표지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한때 메말라가고 죽어가던 저희 공동체였지만, 형제들의 헌신과 희생, 많은 교우들의 기도와 협조 덕분에 다시 맥박이 뛰기 시작했고, 생기를 되찾게 되었습니다.
주님 부활의 흔적은 바로 우리가 매일 몸담고 살아가는 공동체, 특별히 내 안에서 발견하고자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제 지난 수도 여정을 되돌아볼 때마다 저는 언제나 깊은 감사의 정을 느낍니다. 한때 저는 살아있었지만 죽은 목숨이나 다를 바가 없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몸과 마음에 에너지가 모두 다 빠져나가서,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습니다.
공동체에 그 어떤 기여도 할수 없었고, 제 존재 자체가 형제들에게 짐이 된다고 생각하니, 너무나 속상하고, 그야말로 매일 매일이 숨만 쉬고 있지 죽은 목숨이나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세상 나 혼자뿐이로구나, 이제 내 인생 끝이로구나, 하고 좌절하고 살아가던 그때 한 존재가 제게 다가왔습니다. 따뜻한 손을 내밀어주셨고, 무한한 인내심과 배려로 저를 일으켜주셨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그분은 저를 죽음에서 부활시키기 위해 주님께서 보내주신 천사였습니다.
존경하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전기를 읽으면서, 그분께서도 한때 저와 비슷한 체험을 한 적이 있다는 것을 보고 큰 위안이 되기도 했습니다. 한 대담 프로그램 중에 누군가가 질문을 던졌습니다.
“교황님 생애 중에 가장 힘들고 어두웠던 순간, 하느님이 대체 계시긴 한건가 하는 생각이 든 때는 언제였습니까?
교황님께서는 즉시 이런 대답을 하셨습니다.
“예수회 부에노스 아이레스 관구장 직무를 끝내고 나서였습니다. 1983년부터 1992년까지 만 9년 동안 황폐한 시기가 계속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어두워지는 것 같았습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독일로, 독일에서 코르도바로 유배되었던 그 순간, 정말 힘들었습니다. 아주 어두운 시기였습니다. 저는 그때 깊은 패배감에 젖어 이미 제가 죽었다고 믿었습니다. 마음이 너무 힘들다보니 기도도 잘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계속 기도했습니다. 부단히 하느님께 나를 맡겼고, 용서를 구했고, 도움을 청했습니다. 특별히 감실 앞에 드리던 기도가 제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주님 부활을 경축하고 계시는 교우분들, 주님의 죽음과 부활은 다른 먼 곳이 아니라 우리 삶 안에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정말 중요한 노력 한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죽음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든 죽음을 딛고 일어서는 것입니다. 나를 막고 있는 죽음의 큰 돌을 굴려내는 일입니다.
매일 우리가 접하는 인간 관계 안에서 누군가와의 관계가 단절되어 있다면, 그것은 또 다른 측면의 죽음입니다. 내가 아직도 누군가를 진심으로 용서하지 못하고, 그로 인해서 수시로 분노하고 마음의 평정심을 잃는다면, 그것은 아직도 내가 죽음에 머물러 있다는 표시입니다.
오늘 영광스럽게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우리 각자를 향해서도 부단히 죽고 부활하고, 죽고 부활할 것을 간절히 원하고 계십니다. 나는 오늘 무엇에 죽고, 어떻게 부활할 것인지 성찰해보는 부활성야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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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yN7eSGL5as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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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한 예수님 만나는 유일한 법: 갈릴래아로 가라>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면 부활을 믿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먼저 부활이 내 안에 없으면 부활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개가 꽃이 예쁘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을까요? 개에게는 아름다움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세상에서 아름다운 것을 찾을 리도 없고 꽃을 보아도 아름답다는 것을 알아볼 수도 없습니다. 제가 대학생 때 어머니를 알아보지 못했던 일은 저에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머리숱이 적은 어머니가 처음 가발을 쓰신 것을 본 날이었습니다. 저는 어머니를 진짜 아줌마로 불렀습니다. 예상하지 못하면 알아볼 수 없습니다.
한 국제 육상 경기에서 선두에 한참 뒤진 채 꼴찌로 달리던 선수가 갑자기 쏟아진 폭우를 뚫고 끝까지 완주해 감동을 선사했습니다. 국제올림픽위원회에 따르면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열린 2023 동남아시안게임 여자 5천m 경기에 출전한 캄보디아 대표 보우 삼낭(20) 선수는 꼴찌로 결승선을 통과했습니다. 기록은 1위에 6분 가까이 뒤진 22분 54초였습니다. 대부분 선수가 이미 결승선을 통과한 상태에서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달렸습니다.
가난 때문인지,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스트레스 때문인지, 평소 빈혈에 시달려 온 이 선수는 경기 당일에도 코치가 출전을 만류할 정도로 컨디션이 좋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는 결승선을 통과한 뒤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습니다. 악천후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역주하는 모습이 담긴 영상이 알려지면서 하루아침에 유명 스타가 됐습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물론 경기를 포기할 권리가 있었지만, 국가를 대표하는 의무가 더 중요했고, 포기하지 않으면 목표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려고 끝까지 달렸습니다.”
삼낭 선수는 자기를 위해 달렸다기보다는 나라와 희망이 필요한 이를 위해 달렸습니다. 그런데 그 달리기는 목숨을 내어 놓아야 할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달렸습니다. 분명 피의 열매가 있을 것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부활을 믿는 이에게 부활한 분이 보입니다. 그녀에게 감동한 많은 이들이 그녀를 돕겠다고 나섰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미 부활한 이들입니다.
중학교 때 개신교 전도사 한 분이 우리에게 종교 교육을 해주었습니다. 그분은 한국에서 전교 하는 것도 좋지만 아무도 가지 않는 오지 나라로 가서 선교사로 죽는 것이 꿈이라고 했습니다. 가족이 함께 가야 해서 그 목적을 위해 몇 년 간 계속 돈을 모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젠 돈이 얼추 모여서 떠날 모든 준비를 마치고 은행으로 돈을 찾으러 갔습니다. 그런데 돈을 찾고 나올 때 소매치기들에게 몇 년 동안 모은 돈을 모두 털리고 만 것입니다. 사실 그들이 위협할 때 그동안의 모든 꿈을 접어야 함에도 돈을 순순히 내주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 자신이 속한 교단에서 오지로 선교를 떠나겠다면 돈을 전액 지원하겠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이웃을 위해 목숨을 내어 놓을 때만 부활한 누군가를 만날 수 있습니다.
차인표 씨도 부활한 예수님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목소리라도 한번 들어보고 싶었습니다. 성경 공부하고 예수님 역할의 연극도 4년을 했지만,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난 순간은 갈릴래아로 가서였습니다. 신애라 씨 대신 인도 콜카타에 가난한 이를 위해 봉사해야 했을 때입니다. 그는 가기 싫었지만, 어쩔 수 없이 가게 되었고 비행기도 혼자 1등석을 타고 갔습니다. 도착 후 가난한 한 아이가 손을 내밀 때 그는 목사님이 부탁한대로 “하느님께서 너를 사랑하신다. 너는 소중한 존재다.”라는 말을 해주려고 했습니다. 그 순간 예수님께서 그 아이를 통해 차인표 씨에게 그 말을 들려 주셨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 죽을 줄 아는 이는 이미 부활을 믿는 사람입니다. 아름다움을 믿는 사람이 꽃을 발견하듯, 이미 부활의 삶을 사는 사람만이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안나의 집 김하종 신부도 우리나라에 와서 가장 가난하고 냄새나는 사람에게 봉사하고 안아주려고 할 때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하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은 것과 같습니다.
만약 저도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를 읽지 않았다면 아직 사해쪽에서 헤매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책을 통해 내가 추구하던 것을 버리고 이웃을 행복하게 하고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신학교로 들어갔습니다. 그곳이 갈릴래아였고 그곳에서 예수님께서는 “너 내게 많이 주었니? 근데 나는 네게 다 주었다.”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웃 사랑의 실천 안에 계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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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20,1-9: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
“주간 첫날”(1절), 오늘 주일이라고 부르는 날, 주님께서 부활하셨다. 당신의 탄생으로 인간의 탄생을 거룩하게 하신 분이 당신의 부활로 죽은 이들에게 생명을 주셨다. 이날, 부활하신 분과 함께 낙원이 열린다. 그 낙원으로 죽을 수밖에 없던 인간들이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아직 어두울 때 무덤에 갔다. 그곳에 분명히 주님께서 묻히셨는데, 돌은 치워져 있었고, 그 안에 시신은 없었다. 마리아는 깜짝 놀랐다. 마리아는 시신이 없자 누가 훔쳐 갔다고 생각한다. 마리아는 무덤에 왔을 때, 아직 어둠 속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2절) 예수님을 죽인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꺼내 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가서 이 사실을 알린다.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가 그 말을 듣고 무덤으로 달려가 무덤을 살핀다.
마리아의 말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은 부리나케 무덤으로 갔다. 그들은 아마포가 놓여있는 것을 본다. 예수님의 얼굴을 싸매었던 수건이 아마포와 따로 잘 개켜져 놓여있었다는 것을 보았다. 여기에 중요한 것이 있다. 처음에 막달라 마리아가 빈 무덤을 보았고, 베드로와 요한이 와서 보았는데 베드로는 수의가 흩어져 있고, 예수님의 머리를 싸맸던 수건은 따로 한 곳에 잘 개어져 있었음을 보았으나 그는 신앙의 눈으로 보지 않았다. 그러므로 ‘본다는 것’은 믿음을 일으키게도 하지만 그렇지 못할 때도 있다. 예수님의 부활이 빈 무덤이나, 예수님을 싸맸던 물건들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다는 것으로 추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2절)의 믿음은 막달라 마리아의 경우나, 베드로의 경우처럼 시각적인 면에서 보는 것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차원, 보이는 현상을 넘어 내적인 의미를 파악함으로써 이해하는 그런 차원에서 보는 것으로 얻는 것이다. 이렇게 보기 위해서는 자신이 파악하려고 하는 것에 빠지고 매료되어 자신을 그 현실에 잠겨야 한다. 따라서 사랑, 연민, 다른 사람의 요구에 대한 개방성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보고 믿었던 다른 제자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2절)라는 독특한 표현으로 소개되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요한이 아직 예수를 보지 않고서도 그분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더욱 깊이 보고 믿게 해준 것은 바로 사랑이다. 이 사랑의 힘으로 요한만이 빈 무덤과 개켜져 있던 수건에 감추어진 의미를 이해했다. 참된 믿음은 하느님의 말씀, 구체적으로 성서의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이지, 빈 무덤이나 잘 개켜진 수건과 같은 어떤 구실이나 단서를 찾는 것이 아니다.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9절)
부활의 은총으로 새로이 창조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서 계신 천상을 갈망하면서 부활을 숨 쉬며 살아야 한다. 부활을 숨 쉰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 자신의 삶이 매 순간 부활을 체험하며, 부활 체험 안에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권고한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콜로 3,1-2)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저 위에 있는 것들은 바로 우리 이웃이 필요로 하는 것을 보고 관심을 기울이는 사랑의 마음과 봉사의 정신으로 사는 것이며, 이로써 부활하신 주님의 뜻에 맞게 사는 것이다. 그분이 바로 형제를 위하여 당신의 목숨을 바치시고 구원을 주실 수 있었던 한없는 사랑을 사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마음은 이 사랑에 대해 하느님을 향한 감사의 삶으로 드러나야 한다.
이러한 삶은 바로 우리가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천국의 삶을 이미 이 땅에 끌어내려 사는 삶이 될 것이다. 이 삶은 바로 예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이며, 부활한 후의 삶은 바로 이런 모습이라고 그분이 우리에게 확실히 알려주셨기 때문이다. 남은 것은 이제 우리가 부활을 확실히 체험하는 것이다. 천상의 것을 추구하면서 이 세상에 살고 있으나 이 세상에 대해서 죽는 연습, 아니 죽어야 한다. 죽는 삶을 통해 우리는 부활을 체험할 수 있으며, 우리는 사도들이 한 말과 같이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사도 4,20)라고 한 것처럼 우리도 외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복음 선포이며, 그리스도, 즉 구원을 전하는 것이다. 우리도 항상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라고 전할 수 있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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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미리내 성모성심 수녀회)]
(1)
십자가 아래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지킨 여자들은 “주간 첫날 매우 이른 아침” 무덤을 찾습니다. 오늘 복음에는 시간을 나타내는 표현이 많이 나오는데(안식일이 지나자, 주간 첫날, 매우 이른 아침, 해가 떠오를 무렵 등), 부활이 실제 사건임을 강조하는 기능을 합니다. 곧 ‘부활’은 구체적 시공간에서 발생한 현실의 사건이고, 시간 부사구들을 통하여 이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사실 그리스도인들에게 ‘주간 첫날’은 새로운 창조가 시작된 ‘주님의 날’(주일)입니다. 구약 시대 창조가 이루어진 첫째 날 “빛이 생겨라.” 하신 말씀으로 빛이 생겼듯이(창세 1,3 참조) 이제 새로운 창조의 첫째 날 ‘그리스도의 빛’은 어둠을 이기고 새로운 시대를 시작합니다.
한편 무덤 입구에 도착한 여자들은 돌이 굴려져 있음을 보고 당황하는데, 이때 사용된 그리스 말 동사의 형태는 수동형(‘아포케퀼리스타이’)으로, 이 일이 ‘하느님에 의하여 이루어진 사건’임을 명시합니다. 부활은 하느님께서 몸소 주도하신 사건임을 분명히 선언한 것입니다. 그리고 무덤에서 그들은 흰옷을 입은 젊은이를 만나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그래서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셨으니, 더 이상 무덤에 계시지 않은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하느님의 구원 역사는 ‘건너감’(파스카)의 역사입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종살이에서 자유인으로 건너감이며, 이는 어떤 변화에 대한 ‘관념’이나 ‘추상적 암시’가 아니라, 예수님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이루어진 ‘사실’이며 ‘현실’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이 실제적 변화와 구원의 현실을 “용약하여라!”라는 노래로 축하하고 기념합니다. 그 건너감이 나의 현실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믿고 ‘두려워하지 말고’ 갈릴래아로 가는 것, 이제 부활의 빛으로 새롭게 태어난 우리가 하여야 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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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주님 부활 대축일 낮 미사에 봉독된 복음은 세 사람의 믿음의 여정을 우리에게 전합니다. 이 여정은 ‘보다’라는 동사를 통하여 진행되는데, 우리말 성경에 동일하게 ‘보다’로 옮긴 낱말은 사실 그리스 말 성경 본문에는 서로 다른 세 개의 동사로 되어 있습니다.
처음에 등장하는 동사는 ‘블레포’입니다. 단순히 어떤 사물이나 상황을 시각적으로 보는 행위를 말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무덤의 돌이 치워져 있는 것을 ‘보고’ 요한은 무덤 안에 아마포가 있는 것을 ‘봅니다’. 그저 단순하게 어떤 장면을 본 것입니다.
두 번째 동사는 ‘쎄오레오’인데, 무엇인가를 유심히 ‘바라보는 것’, ‘살펴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조금 늦게 도착한 베드로는 무덤 안에 들어가 아마포와 수건이 놓여 있는 상태를 유심히 ‘살펴봅니다.’ 앞뒤 상황을 고려하며 지금 이 상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눈여겨보는 것입니다.
세 번째 동사는 ‘호라오’입니다. 베드로와, 뒤이어 무덤에 들어간 요한은 ‘보고’ 믿습니다. 이때의 ‘봄’은 단순히 시각적인 기능을 넘어서서 보이지 않는 것까지 믿고 이해하는 인식의 행위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세 개의 동사를 통하여 오늘 복음은 등장인물들이 처음에는 단순히 ‘보는 것’에서 시작하여 상황을 유심히 ‘살펴보는’ 단계로 발전하고, 마지막으로는 본 것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것’까지 믿게 되는 은총에 다다름을 알려 줍니다. 보여 주시는 것을 그대로 믿을 수 있는 것은 은총입니다. 보여 주어도 믿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도 많기 때문입니다.
빈 무덤과 부활의 연관성은 단순히 지적인 인식을 넘어서는 사랑과 신뢰의 ‘봄’으로만 제대로 체험되는 사건입니다. 빈 무덤이라는 예수님의 ‘부재’는 사실 어디에나 두루 계시는 ‘편재’의 시작임을 믿는 것, 빈 무덤이야말로 부활의 가장 분명하고도 명백한 증거가 되는 현장임을 고백하는 것, 이것이 바로 부활을 통하여 우리가 가지게 된 새로운 ‘봄’(시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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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김종강 시몬 주교님]
“마음 속에서 날이 밝아오고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2베드 1,19)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은 주님 부활 대축일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축하드리며 예수님께서 주시는 부활의 기쁨과 평화가 여러분 모두에게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1. 부활, 악에 맞선 선의 승리
우리는 세상에 존재하는 악을 봅니다. 폭력과 억압은 세상의 다양한 영역에서 일상적인 것이 되었고, 많은 불평등이 인간이 활동하고 존재하는 곳곳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악의 힘에 눌려 그의 노예처럼 살아가는 사람의 처지를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사람은 자기 길의 주인이 아닙니다. 인간은 그 길을 걸으면서도 자신의 발걸음을 가눌 수 없습니다.”(예레 10,23) “악마와 그 부하들”(마태 25,41)이 활개치는 세상에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사나운 늑대가 되고 섬뜩한 맹수가 됩니다.(호모 호미니 루푸스, Homo homini lupus)
이렇듯 암울한 세상의 현실 앞에서, 오늘 우리는 복음서가 전해주는 ‘빈 무덤’의 소식을 듣습니다. 거기에는 여인들과 제자들이 목격한 빈 무덤이 있습니다.(루카 24,3 참조) 빈 무덤은 분명한 사실이고 완전히 새로운 현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악에 맞서 아버지의 선을 행하신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부활시키심으로써 예수님을 세상의 모든 악에 대한 승리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빈 무덤을 보고 그 안에서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전해 들은 여인들은 처음에는 너무도 깜짝 놀랐지만(마르 16,5 참조), 불가능한 것을 받아들이고 믿을 수 없는 것을 믿으며 예수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정말 부활하셨기에 우리는 오늘도 악에 대한 선의 승리를 희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부활시키신 하느님 아버지를 믿으며 어두운 세상에서 선한 일에 헌신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폭력과 갈취, 증오와 복수 같은 악의 모든 행위는 강한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를 죽음으로 이끌고 그 길의 끝에서 사람은 결국 무참히 실패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은 참 생명의 힘을 믿고 선으로 악에 맞서 싸웁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모든 이는, 사람이 사람에게 친구가 되고 형제가 되는(호모 호미니 아미쿠스, 프라테르, Homo homini amicus, frater) 세상을 꿈꾸고 열망하며 이뤄갑니다.
2. 부활, 두려움에 맞선 사랑의 승리
복음서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그분께서 무덤에 묻히셨을 때 그분께 희망을 두고 그분을 따랐던 제자들의 절망과 상실감을 전해줍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지만(루카 24,21 참조) 그분의 죽음으로 그들은 더 이상 아무런 희망도 가질 수 없었고 무엇보다 너무도 두려웠습니다. 복음서의 저자들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죽음 이후에 사람들이 두려워 방문을 걸어 잠그고 숨어 있었다고 했습니다.(요한 20,19 참조)
우리도 두려워합니다. 창세기 저자는 아담이 처음으로 입을 열어 고백한 감정이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이었다고 말합니다. “동산에서 당신의 소리를 듣고 두려워 숨었습니다.”(창세 3,10) 인간의 죄는 그의 창조주인 하느님을 두려워하게 만들었고, 하느님께 죄를 지은 이후 사람은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두려움을 갖고 살게 되었습니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사람이 죽음의 공포 때문에 한평생 노예처럼 예속된 삶을 살아가며 스스로 악과 죄에 빠져 산다고 말합니다.(히브 2,15 참조)
이 모든 절망과 두려움 속에서도 “아직 어두울 때에”(요한 20,1), 예수님의 시신에 바를 향료와 향유를 준비하여 무덤을 찾아간 여인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이야기에 나오는 이 여인들은 마음속에 큰 슬픔과 두려움을 안고 있음에도 예수님을 찾고 그분을 뵙고자 하는 깊은 열망을 지닌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잃은 아픔을 마음에 담고 있었지만, 그분이 살아계실 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쏟으셨던 사랑을 기억하며 끝까지 스승에 대한 연민과 사랑을 멈추지 않은 이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신실한 사랑, 예수님과 맺은 깊은 우정이 없었다면 여인들은 두려움을 이겨내고 무덤에까지 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던 이들만이 그분의 무덤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사랑은 두려움을 이겨내는 힘입니다. 주님께 대한 애틋한 사랑을 간직한 사람은 “마음 속에서 날이 밝아오고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2베드 1,19) 생명의 주님께 나아가는 자신의 걸음을 멈추지 않습니다.
3. 부활, 주님을 따를 용기와 믿음의 승리
맨 먼저 ‘빈 무덤’을 본 여인들은 제자들에게 달려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고 그분께서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갈 것이니 거기서 그분을 뵙게 될 것이라는 놀라운 소식을 전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시 뵙는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계신 “갈릴래아”(마르 16,7)를 향해 다시 걸어가야 했습니다. 예수님을 다시 뵙기 위해 제자들은 다시 한번 일어서서 주님이 계신 곳을 향해 걸어갈 용기와 믿음이 필요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 위해 우리가 찾아나설 갈릴래아는 어디입니까? 갈릴래아는 예수님의 복음이 선포되는 이 세상의 모든 곳이고, 믿는 이들의 공동체가 부활의 빛으로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모든 곳이며, 재화와 물질을 나누고 성찬의 식탁에서 빵을 쪼개는 자리에 모여 서로 형제적 사랑과 화해를 이루는 모든 곳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복음서의 제자들처럼 우리에게도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우리의 인생길을 다시 걸어갈 용기와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 앞에는 여전히 세상의 많은 유혹과 갖가지 시련이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보다 먼저 걸어가시며 우리가 걸어갈 길을 열어주십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께서 먼저 가시고 열어주신 그 길을 따라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하느님 아버지의 오른쪽에 이르기까지(콜로 3,1 참조), 한 걸음 한 걸음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영원한 아버지의 집을 향해 올라갑시다.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생명이 죽음을 이겼습니다. 사랑이 두려움을 이겼습니다. 마냥 승리할 것 같았던 죽음은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으로 완전히 패배했습니다. 예수님처럼 사랑 안에 살고 사랑으로 이뤄낸 인생은 결코 실패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현재가 이미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존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의 미래가 이미 하느님의 섭리와 은총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우리 자신의 파스카를 살아냅시다. 예수님께서 먼저 가신 그 길을 따라 걸으며 우리도 예수님처럼 우리 인생길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 부활의 영광에 이르는 은총을 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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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김선태 사도 요한 주교님]
“기억해 보아라”(루카 24,6).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되살아나셨습니다. 온갖 어둠을 물리치시고 승리하셨습니다. 부활의 기쁨과 은총이 여러분 모두에게 가득 내리기를 빕니다.
기쁨이 가득한 오늘, 주님의 부활을 가장 먼저 체험한 여자들을 묵상해봅시다. 그들이 어떤 계기로 부활을 깨달았는지를 성찰해 봅시다.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많은 사랑을 받고 있음을 항상 느끼고 있었고, 기쁜 마음으로 그분을 추종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상황이 돌변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처형되시고 무덤에 묻히시고 말았습니다.
이에 그들은 깊은 슬픔과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얼굴을 보려는 일념으로 무덤으로 갔습니다. 때는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요한 20,1)여서 사람들은 대부분 태연히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자들은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이 그들의 발걸음을 무덤으로 재촉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으로 발걸음을 내디뎠지만, 무덤 입구를 막은 “매우 큰 돌”(마르 16,4)을 굴려내는 일이 문제였습니다. 그 해결 방법을 찾지 못했어도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무덤으로 향했습니다. 그 문제도 주님을 향한 그들의 사랑을 꺾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오직 예수님의 몸에 향료를 발라 드릴 것만을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무덤에 도착한 그들은 전혀 예기치 않았던 새로운 사건을 접했습니다. 곧 걱정했던 큰 돌은 이미 굴려져 있었고, 예수님의 시신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그들이 주님의 부활을 깨달은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몹시 당황했습니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요한 20,2 참조) 그래서 두려움에 더욱더 깊이 빠져들었습니다.
성경은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으로 숙였다.”(루카 24,5)고 말합니다. 선한 마음으로 힘차게 내디뎠던 그들의 발걸음이 완전히 멈추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재로 인해 그들은 완전히 용기를 잃고 마음과 몸이 마비되어 버렸습니다.
이처럼 당황, 두려움, 멈춤 등의 상태에 있는 그들에게 천사는 주님의 부활을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되살아나셨다.”(루카 24,5-6). 이러한 선포에도 그들은 아직 부활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주님의 부활을 결정적으로 깨달았을 때는, 천사의 분부대로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했을”(루카 24,8) 때입니다. 천사는 ‘그분께서 너희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지 기억해 보아라.’라고 분부했고, 그들은 ‘사람의 아들이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 냈던 것입니다.(루카 24,6-8 참조)
그 기억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비로소 마음이 열려 주님의 부활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온갖두려움을 이겨내고, 멈추었던 발걸음을 다시 힘차게 내디디어 사도들과 다른 이들에게 부활을 선포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기억은 주님의 부활을 깨닫게 하는 힘이고, 아울러 두려움에 사로잡혀 마비된 삶을 다시 일깨우는 힘입니다. “기억해 보아라”(루카 24,6). 이는 주님을 만났을 때를 기억하라는 뜻이고, 그분의 말씀과 행동, 그분의 삶을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위해, 우리를 위해 이미 행동하셨고, 지금도 행동하고 계시는 모든 것을 기억하라는 초대입니다. 이러한 기억은 미래의 희망에 마음을 활짝 열게 합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동하셨던 것을 기억하도록 합시다.
만약 이러한 기억이 없다면, 당황은 길을 잃게하고, 두려움은 우리의 정신을 마비시키고 기괴한 환상마저 불러일으킵니다. 당황과 두려움은 하늘을 향한 우리의 시선을 차단하고, 우리의 지평을 어둡게 하고 희망을 꺾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당황과 두려움에 사로잡혀서는 안 되고, 그것에 지배를 받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슬픔과 절망에 잠겨 앞으로 나아갈 수 없고 주저앉게 될 것입니다. 마침내 참된 자유와 희망과 기쁨을 누리는 부활의 삶에서 아예 멀어집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역사에는 그런 때가 간혹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인들이 이집트에서 탈출하자마자 추격을 당했을 때, 그들은 몹시 두려워하여 마비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모세에게 이렇게 항의했습니다. “이집트에는 묏자리가 없어 광야에서 죽으라고 우리를 데려왔소?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어 이렇게 만드는 것이오?”(탈출 14,11)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들은 차라리 이집트인들을 섬기는 것이 더 낫다는 궤변까지 늘어놓습니다.
이러한 힘겨운 시련이 반복될 때마다, 주님은 그들이 다시 일어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기억’을 거듭 강조하십니다.
“너희는 오로지 조심하고 단단히 정신을 차려, 너희가 두 눈으로 본 것들을 잊지 않도록 하여라. 그것들이 평생 너희 마음에서 떠나지 않게 하여라”(신명 4,9). “너희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내신 주님을 잊지 않도록 조심하여라”(신명 6,12). “너희는 이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인도하신 모든 길을 기억하여라.”(신명 8,2)
“예전에 여러분이 빛을 받은 뒤에 많은 고난의 싸움을 견디어낸 때를 기억해 보십시오.”(히브 10,32)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오. 그분께서는 …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2티모 2,8). 한마디로 말하자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일으키셨던 사랑의 기적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기억은 온갖 두려움을 몰아내어 우리를 다시 엄연한 현실로 돌아오게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선택된 백성이며 사랑받는 자녀임을 깨닫게 합니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 ‘훌륭히 싸우며 달릴 길을 다 달리게’(2티모 4,7 참조)합니다. 말하자면 부활의 삶을 살게 합니다.
우리 삶에는 참으로 힘겨울 때가 더러 있습니다. 선한 마음으로 시작한 발걸음도 어찌해야 할바를 몰라 중단하고 주저앉을 때가 있습니다. 여러 이유로 두려움에 사로잡혀 현실이 더욱더 막막하게 보이고 실낱같은 희망마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때 우리는 특히 주님의 역사하심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곧 주님께서 내 삶에 개입하시고 행동하셨던 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다시 일어나 가야 할 길을 계속 걸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기억의 힘으로 자신의 길을 꿋꿋하게 걸으면, 이웃에게 주님의 부활을 선포할 수 있습니다. 특히 여러 가지 이유로 고통과 시련을 겪는 이웃에게 가까이 다가가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을 증언함으로써 그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고, 그들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습니다. 나아가 우리는 어두운 사회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물질만능주의와 극심한 개인주의가 만연하고 있는 우리 사회에 무엇보다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함으로써 연대와 형제애를 증진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과 이웃 그리고 우리 사회가 부활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우리를 구원하시는 사랑을 기억합시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하느님 사랑에 대한 기억을 불러일으켜 주시고, 성모님께서 우리의 기억에 함께해 주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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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조규만 바실리오 주교님]
"놀라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찾고 있지만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마르 16,6)
+ 찬미예수님
주님의 부활은 우리 교회의 출발점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자 뿔뿔이 흩어진 제자들이, 떠났던 고향을 찾아갔던 제자들과 버렸던 배를 타고 그물을 다시 잡고 고기잡이를 하던 제자들 모두가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부활로 제자들은 다시 예루살렘에 모였고, 주님의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주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오늘날 교회는, 우리들의 공동체는 없었을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우리 인류의 행복한 삶의 실현입니다. 인류는 아주 오래전부터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고’ 싶어 했습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시간 속에 살면서도 영원을 이야기하며 죽음을 넘어 희망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죽음을 넘어선 영원하고 행복한 삶의 시작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죽음을 이겨낸 승리입니다. 죽음의 사슬을 끊고 부활하시어 저승에서 승리하여 오르셨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죽음으로 저희 죽음을 없애시고 당신의 부활로 저희 생명을 되찾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부활로 열린 새 하늘 새 땅에서는 다시는 죽음이 없고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모든 불의와 억울함에 대한 보상입니다. 주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주님의 모든 삶을 불의하고 억울한 십자가의 죽음으로 끝났을 것입니다. 이 세상은 시지프스의 신화보다 더 부조리하고 인류에게는 아무런 희망이 없었을 것입니다. 판도라 상자에 남아 있던 그 희망마저 사라져 버렸을 것입니다.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마태 27,46)의 외침만 남았을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미움과 폭력과 죄에 대한 사랑의 승리입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주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용서는 없고 죄만 남았을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모든 기쁨의 원천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마리아는 놀라움에 부활주일의 새벽길을 달렸습니다. 기쁜 소식을 제자들에게,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달렸습니다. 다락방의 벽을 뚫고 나타나신 주님으로 제자들은 그 기쁨으로 두려움을 이겨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평화’를 인사하였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샬롬’은 오늘의 우리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하느님에게는 불가능한 것이 없다는 하느님의 전능하심을 선포합니다. 하느님의 전능은 동정녀의 잉태도,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일도, 죽은 자의 부활도 가능케합니다. 주님의 부활은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세상을 보시기에 창조하시고, 마침내 세상을 보시기에 좋게 완성하신다는 것을 미리 알려줍니다. 주님의 부활은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모든 것의 시작이며 모든 것의 완성이심을 선언합니다.
“나는 알파요, 오메가이고 처음이며 마지막이고 시작이며 마침이다.”(계시 22,13)
주님의 부활은 우리 믿음의 시작이요, 마침입니다. 주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25-26) 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기뻐합시다. 주님의 부활을. 알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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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최광희 마태오 신부님]
<아직 깨닫지 못한 이의 달리기>
이 글을 읽고 계실 우리 교우분들 중에는, 서로 ‘부활을 축하한다.’며 나누고 있을 인사가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평소와 그다지 다르지 않은 평범한 감정들을 스스로 지켜보며, ‘사순 시기를 제대로 보내야 부활을 기쁘게 맞이한다고들 하던데, 그러지 못한 내 탓인가.’ 하며 씁쓸해하실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부활은 신앙의 완성을 선포하는 순간이 아닙니다. 그 대신, 달려갈 목표를 분명히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는 희망을 선사합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의 모습을 통해 그것을 다시금 되새깁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와 요한은 무덤이 비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빈 무덤을 보고 믿게 되었다는 말이 무색하게도, 성경은 그들이 여전히 깨닫지 못한 상태라고 단언합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관련한 말씀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요한 20,9 참조)
심지어 같은 장면을 전하는 루카복음에 따르면, 사도들은 단순히 이해력이 떨어지는 수준조차도 아니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와 다른 여성들이 ‘주님의 부활’ 소식을 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도들은 그 이야기가 ‘헛소리’처럼 느껴졌다고 하니까요.(루카 24,10-11 참조)
하지만 신앙이 바닥을 드러낸 것 같은 오늘 이 순간이 찬란한 변화의 첫 시작이 됩니다. 제자들은 이제 곧 동료인 토마스에게 ‘주님을 뵈었소.’ 하고 고백하게 될 것이며(부활 제2주), 예수님과 화해하여 용서를 받고(부활 제3주), 급기야는 공포에서 벗어나 집 밖으로 뛰쳐나가 박해와 상관없이 예수님을 증거하며 부활을 선포하게 될 것입니다.(성령 강림 대축일)
이 드라마 같은 변화의 시작에는 ‘달리기’가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부활을 전하는 여인들의 말을 전혀 믿을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지만, 예수님이라는 소리에 재빨리 달려갑니다. 무덤까지 달리는 것은 굳이 사도라야 할 수 있는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평범하고 작은 일이 씨앗이 되어, 새로운 변화의 시작을 만들었습니다.
만약 두 사도가 유다인들에게 잡힐 것이 두려워, 끝까지 집 안에서 움직이기조차 거부했다면 어떠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당시 제자들의 믿음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무덤까지 달려가는 것밖에 없었지만, 제자들은 일단 최선을 다해 달리며 예수님의 소식에 호응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부활의 소식을 전달받고 출발선 상에 서 있는 사도와 같습니다. 벅찬 행복감이 마음에 차오르지 않는 것을 의아해하며 그냥 집에 머물 것인가, 아니면 최선을 다해 일단 부활의 소식이 들려온 곳을 향해 달려갈 것인가, 이제 남은 선택은 우리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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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지금, 여기>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그래서 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갔다.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그는 몸을 굽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시몬 베드로가 뒤따라와서 무덤으로 들어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 그제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요한 20,1-9)
1) ‘빈 무덤’은 부활의 증거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다는 것은, 시신이 그곳에 없다는 표시일 뿐이고,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합니다. 사도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수 있었던 것은, 그리고 그 믿음을 사람들에게 증언할 수 있었던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났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할 때 ‘빈 무덤’은 언급하지도 않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자신들이 직접 만났다는 것을 강조하기만 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나도 전해 받았고 여러분에게 무엇보다 먼저 전해 준 복음은 이렇습니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 케파에게, 또 이어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다음에는 한 번에 오백 명이 넘는 형제들에게 나타나셨는데, 그 가운데 더러는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대부분은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그다음에는 야고보에게, 또 이어서 다른 모든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맨 마지막으로는 칠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1코린 15,3-8)라고 증언합니다. <따라서 “부활의 증거는 ‘빈 무덤’이 아니라 ‘만남’이다.”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2) 그렇다면 8절의 “보고 믿었다.” 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빈 무덤’을 보고 요한 사도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다는 단순한 뜻이라면 좋겠는데, 정말 그런 뜻일까?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다면, 왜 옆에 있는 베드로 사도에게 아무 말도 안 했을까? 그리고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졌다는 충격과 슬픔 때문에 울고 있는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막달레나를 내버려둔 채 그냥 가버렸을까? 네 복음서 어디에도 “무덤이 비어 있으니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셨다.”라고 증언하는 요한 사도의 말은 없습니다. 어쩌면 요한 사도는 빈 무덤을 보고 사흘 째 되는 날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는 예수님 말씀을 기억해내고, 혼자 속으로 예수님 부활을 믿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증언하지 않는(또는 증언하지 못하는) 믿음은 믿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그냥 혼자만의 ‘생각’일 뿐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증언으로 이어지는 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8절의 “보고 믿었다.”라는 말은,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보고,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졌다는 막달레나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믿었다.”가 더 타당한 해석일 것입니다. 그래야 9절의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에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9절의 ‘그들’이라는 말을, 베드로 사도와 마리아 막달레나만을 가리키는 말로 생각하면서 요한 사도를 제외할 이유나 근거가 없습니다.>
3)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의 부활과 모든 사람의 부활에 대해서 말할 때 이런 말도 했습니다.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1코린 15,19) 여기서 ‘불쌍한’이라는 말은 ‘어리석은’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안 믿고, 그 일에 대해서나 자기 자신의 부활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사람들, 그저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복을 받기만을 바라면서, 그것만을 얻으려고 예수님께 청원기도를 바치는 사람들은,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영원하신 주님께 허무한 것만 청하기 때문에 어리석은 것이고,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데도 받을 생각도 안 하면서, 주님께서 안 주실 것만 청하기 때문에 어리석은 것입니다. <원하고 노력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데도, 그것을 외면하고, 허무하게 사라질 것만 찾는 것은 어리석고 불쌍하고 답답한 일입니다. 그것은 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려고 하지는 않고 ‘빈 무덤’만 찾고 있는 것과 같다고, 또는 ‘빈 무덤’에만 집착하는 것과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살아계시는 예수님을 만나려면 우리 자신도 ‘영적으로’ 살아 있어야 합니다.>
4)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면서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라고 약속하셨는데, 그러면 언제부터? ‘부활 순간부터’일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가 사라지시는 일을 계속 반복하시는 것처럼 기록되어 있긴 한데, 오셨다가 떠나셨다가 다시 오셨다가 또 떠나시는 것이 아니라, 보이든지 안 보이든지 간에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믿어야 합니다. 지금, 여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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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정신철 요한세례자 주교님]
“그분께서 너희에게 무엇을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여라.”(루카 24,6 참조)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그리스도의 부활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부활의 은총이 여러분 모두에게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복음이 전하는 부활의 사건을 떠올려 봅니다. 주간 첫날, 예수님을 지극히도 사랑했던 여인들은 예수님이 묻히신 무덤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그들은 무덤이 비어있음을 발견합니다. 당황해 마지않던 그때, 천사는 그들에게 다가와 주님께서부활하셨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되살아나셨다.”(루카 24,6)
죽음은 오로지 두려움이었기에 부활의 생명은 상상키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여인들은 부활을 예고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 냈습니다. 그리고는 부활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고백하며 제자들에게 그 소식을 전하러 나섭니다. “살아나신 주님무덤 부활하신 주님영광, 목격자 천사들과 수의염포 난 보았네, 그리스도 나의희망 죽음에서 부활했네”라고 부활 대축일 부속가에서 노래하듯 그들은 주님 부활의 기쁨을 외치기 시작합니다.
주님의 부활은 더없는 기쁨과 희망의 사건입니다. 부활은 죄와 죽음의 한계에서 인간을 구원한 사건이자, 주님께서 당신 죽음을 통해 영원한 생명, 곧 새 생명의 길을 열어 보인 사건이기에 희망의 사건입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654항 참조) 또한 그분께서는 죄의 권세를 누르시고 다시 살아나셨기에, 그리고 죄에서 죽은 우리를 새로운 삶으로 초대하셨기에, 우리를 영원한 생명과 구원으로 이끌어 주는 그리스도의 부활은 더없는 기쁨의 사건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1코린 15,14)라는 사도 바오로의 고백처럼,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우리는 믿음과 삶의 의미를 찾고 궁극적인 선을 향해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주님 부활은 우리 모두에게 큰 기쁨이며, 우리로 하여금 다시금 세상을 살아갈 용기와 희망을 안겨줍니다.
하지만 성경은 모든 이들이 즉시 부활을 깨달은 것은 아니라고 전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빈 무덤 앞에서 놀랐던 여인들의 모습(마르 16,4-5)에서 또, 모든 것을 포기한 듯 자신들의 고향인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의 모습(루카 24,13-35)에서, 그리고 직접 눈으로 확인해야 한다는 토마스 사도의 모습(요한 20,24-29)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직접, 그리고 천사들을 통해서 성경의 말씀을 설명해 주시면서 그들이 부활을 믿고 깨닫게 해주십니다.
주님 부활의 소식을 알리는 천사는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루카 24,5)며,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지를 떠올려보라고 촉구합니다.
곧, “사람의 아들은 죄인들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루카 24,7)는 예수님의 말씀을 상기시켜 줍니다. 이는 곧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약속의 실현이자 구약의 약속의 실현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줍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652항 참조)
그러자 여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 내어 부활을 깨닫고 기쁨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말씀을 우리의 삶 안에서 기억해 내는 것이 필요합니다. 부활을 직접 확인한 이들도 이렇게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부활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기억’은 우리의 신앙생활을 성숙시켜 줍니다. 또한 신앙생활에서 잊지 않고 실천해야 하는, 자신의 삶안에서 작용하는 하느님의 뜻을 살피고자 나의 삶을 돌아보는 양심 성찰도 기억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자신의 생활을 돌이켜 봄으로써 하느님의 뜻을 찾아 새롭고도 다른 하루를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현재 전 세계 가톨릭교회가 함께 진행하고 있는 시노드의 과정도 바로 우리 삶 안에서 함께 해주시는 하느님을 기억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각자의 삶 안에서 자신을 이끌어 주신 하느님 체험을 기억하고 서로 나눔으로써, 그 모습은 다르지만, 같은 신앙 안에서의 친교를 체험하게 됩니다.
나아가 ‘기억’의 의미는 신앙생활에만 국한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의 삶에서도 ‘기억’의 의미를 되새길 때 우리는 변화된 현재로 미래를 희망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는 이 시기에 10년 전 발생했던 가슴 아픈 사건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10년 전 4월 16일, 우리 모두의 희생양처럼 세상을 떠난 세월호의 어린 영혼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기억의 결핍에서 우리는 2022년 10월 29일, 또 다른 희생자들을 떠나보내야 했습니다. 또한, 우리 스스로가 공동의 집인 지구를 무분별하게 대했던 지난날의 과오를 기억해야 합니다.
이상 기후를 발생시키는 병든 공동의 집 지구를 바라보면서도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들을 기억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기억하지 못하기에 과오를 반복하며 공멸의 길로 향해 가고 있다는 것조차 자각하지 못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공동선을 실행해야 하는 정치공동체를 위해 각자가 권리와 의무를 지니고 있다는 것도 이 시기에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사목헌장』 75항 참조)
주님의 말씀을 기억함으로써 주님께서 약속하신 바가 이루어진 부활을 깨달은 이들처럼, 우리도 늘 기억하는 삶 안에서 부활의 생명을 맞이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다시금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기쁨이 여러분에게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영원으로부터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를 말씀과 성사로 기르시는 주님을 기억함으로 주님 부활의 신비를 더욱 깊이 깨닫는 신앙인으로 거듭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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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구 최창덕 프란치스코 신부님]
<“빈 마음”은 신앙생활의 출발점>
“알렐루야, 알렐루야, 알렐루야” 모든 분에게 부활 대축일의 인사를 기쁘게 전합니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부활을 떠올리면 ‘부활 달걀’ 을 나누는 정다운 모습이 그려집니다.
본당 사목을 할 때마다 교우들끼리만 부활 달걀을 나누는 게 아쉬워 관할 구역의 이웃 종교, 주민센터, 경찰서, 소방서 그리고 복지시설에도 ‘부활 달걀 선물 꾸러미’를 전달해서 기쁨을 나누도록 해왔습니다. 반응은 늘 좋아서 나눔 활동을 다녀온 분은 하나같이 고맙게 받는 모습에서 커다란 보람과 기쁨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부활 달걀을 전하는 작은 나눔으로도 신앙의 핵심인 부활의 진리를 선포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달걀이 스스로 깨지면 새 생명인 병아리가 태어나지만 누군가에 의해서 강제로 깨지면 그저 계란 프라이가 될 뿐이다.” 라는 말을 기억합니다. 오늘 기념하는 부활 대축일은 이 말처럼 우리 자신의 잘못된 이기심을 스스로 깨뜨리기 위하여 무엇부터 해야 하는지를 성찰하게 합니다.
복음에서 베드로와 주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는 마리아 막달레나의 얘기를 전해 듣고 예수님의 무덤으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무덤이 비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물론 그들은 “빈 무덤” 을 보고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즉시 깨닫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빈 무덤” 은 먼 여행길을 출발할 때 도움이 되는 이정표처럼 부활의 신비를 받아들여 하느님 나라를 향한 신앙의 여정을 떠나야 하는 제자들에게 귀한 표지판의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빈 무덤” 은 신앙생활이 언제나 “빈 마음” 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중요성을 새기게 합니다. 우리 안에 가득 들어차 있는 이기심과 집착, 시기심과 미움, 편견과 차별을 비워야 그 안에 부활하신 예수님의 말씀과 영광의 빛이 들어설 자리가 생깁니다.
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라고 했는데, 이 역시 우리 생각을 세상의 온갖 잡념들로 채우지 말고 영원한 생명을 바라는 숭고한 희망으로 가득 채워 하느님의 뜻 안에서 훨씬 더 자유롭게 사랑하며 살라는 권고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가장 소중한 생명을 내어주심으로써 영광스럽게 부활하신 신앙의 신비를 기뻐하는 오늘, 우리 모두 각자가 비워야 할 게 무엇이며, 채워야 할 게 무엇인지 성찰해 봅시다. 그리고 채운 것을 아낌없이 나눌 때 느끼는 기쁨과 보람 안에서 부활의 은총을 충만히 누리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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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권선민 요셉 신부님]
<가난한 이들에게 부활의 기쁜 소식을 알리신 주님!>
오늘은 모든 주일의 기원이 되는 날로서, 전례적으로 가장 큰 축일인 주님 부활 대축일입니다. 주님 부활 대축일을 맞아, 교우 여러분들의 가정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내리시는 은총과 평화가 가득하시길 빕니다.
오늘 복음(요한 20,1-10)은 마리아 막달레나가 빈 무덤을 발견하고,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 그 소식을 전해주는 이야기입니다.
주일 이른 아침, 예수님의 무덤을 방문한 마리아 막달레나는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던 것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곧바로 제자들에게 달려가 이 사실을 알립니다. 다락방에 숨어있던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달려갔고, 빈 무덤 안으로 들어가 예수님의 시신을 쌌던 아마포가 놓여있는 것과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이 한 곳에 개켜져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빈 무덤과 아마포, 얼굴 수건을 확인한 제자들은 다시 집으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마리아 막달레나는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느껴지던 골고타 십자가 형장에서 그랬던 것처럼, 빈 무덤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절망적인 순간에도 한결같이 주님 곁을 지켰고,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져버린 허망한 그 순간에도, 그녀는 주님을 향한 애절한 사랑으로 눈물을 흘리며,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이어지는 장면(요한 20,11-18)에는 마리아 막달레나가 최초로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을 목격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마리아야!”, “라뿌니!(스승님!)” 하느님께서는 끝까지 믿음과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예수님을 열렬히 사랑하던 여인(공관복음에서는 여인들로 나옴)에게, 당신의 아들 예수님의 부활을 최초로 목격할 수 있는 은총을 허락하십니다. 그리고 이 기쁜 소식을 제자들에게 알리는 최초의 복음선포자로 선택하십니다.
2000년 전 남존여비의 엄격한 율법주의 사회 속에서 살아가던 가난하고 소외된 여인 마리아 막달레나와 사회적 약자였던 여인들에게 예수님은, 부활의 기쁜 소식을 가장 먼저 전해주셨습니다. 강생 때 베들레헴 목동들에게 그러하셨듯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복음을 전해야 할 교회의 사명을 일깨워주셨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을 통해 교회와 사회가 복음화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셨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 말씀처럼, 평등을 열망하며 하루하루를 힘들게 살아가는 불평등의 세상 속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애절한 모습을 봅니다. 절망과 죽음의 세력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어두움과 불의를 몰아내는 복음의 빛으로, 불평등이 만연한 이 세상 곳곳을 밝게 비추어주시길 빌며, 교우 여러분들 모두에게 주님의 사랑과 평화가 가득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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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예수님의 부활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주님의 날인 주일이 한 주간의 절정을 이룬다고 한다면, 주님께서 부활하신 오늘은 전례 주년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죽음과 악의 세력을 이겨내신 주님의 부활을 통해 우리 역시 부활하리라는 큰 희망을 간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큰 기쁨으로 오늘을 보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강론을 시작하면서 이런 질문을 던져 보고 싶습니다.
“진정한 친구는 불행을 함께하는 사람일까요? 아니면 성공을 진정으로 축하해 주는 사람일까요?”
불행을 경험하고 있는 사람과 함께해 주는 것은 큰 위로와 힘이 됨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불행을 함께하는 것보다 더 힘든 것은 성공을 진정으로 축하해 주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오랫동안 일이 풀리지 않아 고생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주변의 친구들은 힘들어하는 친구와 함께하면서 힘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대박이 난 것입니다. 사업이 잘 풀리면서 경제적 여유와 안정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주변에 함께해 준 친구들보다 훨씬 더 잘살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친구들이 그의 곁에서 떨어져 나가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그 친구가 돈 벌더니 변했어.”
친구들에게 고마워서 어떻게든 보답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친구는 “너 돈 자랑하는 거니?” 하면서 인상을 쓰더라는 것입니다.
불행을 함께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공을 진정으로 축하해 주기란 정말 힘듭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우월성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더 우월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 때, 시기와 질투가 작동하면서 함께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불행보다 성공을 진정으로 축하해 주는 사람이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함께 기뻐합니다. 그렇다면 이 기쁨에 함께해야 할까요? 아니면 그냥 무시해야 할까요? 주님의 진정한 친구가 되려면 이날에 더 함께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 부활의 기쁨을 나의 이웃들에게도 알려야 하고, 진정으로 기뻐하는 삶을 스스로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따로, 나 따로 삶을 살면 어떨까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이지, 내가 부활한 것인가?’라면서 자기와 상관없다고 생각하면 주님의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없습니다.
오늘은 함께 기뻐해야 하는 날입니다. 그 기쁨을 더 많은 사람이 누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는 날입니다. 주님의 진정한 친구라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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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파스카 성야)
<돌이 이미 굴려져 있으니>
마르코 16,1-7 (부활하시다)
안식일이 지나자, 마리아 막달레나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는 무덤에 가서 예수님께 발라 드리려고 향료를 샀다. 그리고 주간 첫날 매우 이른 아침, 해가 떠오를 무렵에 무덤으로 갔다. 그들은 “누가 그 돌을 무덤 입구에서 굴려 내 줄까요?”하고 서로 말하였다. 그러고는 눈을 들어 바라보니 그 돌이 이미 굴려져 있었다. 그것은 매우 큰 돌이었다. 그들이 무덤에 들어가 보니, 웬 젊은이가 하얗고 긴 겉옷을 입고 오른쪽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깜짝 놀랐다. 젊은이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놀라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찾고 있지만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그래서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보아라, 여기가 그분을 모셨던 곳이다. 그러니 가서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렇게 일러라. ‘예수님께서는 전에 여러분에게 말씀하신 대로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여러분은 그분을 거기에서 뵙게 될 것입니다.’”
<돌이 이미 굴려져 있으니>
“눈을 들어 바라보니
그 돌이 이미 굴려져 있었다.”(마르 16,4)
그대,
사랑하는 나의 벗이여!
빛을 가리던
어둠의 돌이
이미 굴려져 있으니
처음처럼 밝게 빛나시게나.
그대,
사랑하는 나의 벗이여!
선을 막아서던
악의 돌이
이미 굴려져 있으니
처음처럼 티 없이 선하시게나.
그대,
사랑하는 나의 벗이여!
믿음을 뒤흔들던
유혹의 돌이
이미 굴려져 있으니
처음처럼 오롯이 믿으시게나.
그대,
사랑하는 나의 벗이여!
희망을 꺾던
포기의 돌이
이미 굴려져 있으니
처음처럼 하얗게 희망하시게나.
그대,
사랑하는 나의 벗이여!
사랑을 짓밟던
탐욕의 돌이
이미 굴려져 있으니
처음처럼 뜨겁게 사랑하시게나.
그대,
사랑하는 나의 벗이여!
기쁨을 억누르던
불안의 돌이
이미 굴려져 있으니
처음처럼 마냥 기뻐하시게나.
그대,
사랑하는 나의 벗이여!
함께를 거스르던
홀로의 돌이
이미 굴려져 있으니
처음처럼 기꺼이 함께하시게나.
그대,
사랑하는 나의 벗이여!
온유를 집어삼키던
냉혹의 돌이
이미 굴려져 있으니
처음처럼 곱게 온유하시게나.
그대,
사랑하는 나의 벗이여!
자비를 밀어내던
무관심의 돌이
이미 굴려져 있으니
처음처럼 한없이 자비로우시게나.
그대,
사랑하는 나의 벗이여!
살림을 비웃던
죽임의 돌이
이미 굴려져 있으니
처음처럼 정성껏 살리시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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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진리 안에 자유로운 삶>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의 부활을 축하드리며 우리도 거듭나는 부활의 삶을 충직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부활은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을 가로막는 장애에서 매 순간 다시 살아나길 희망하며 부활의 삶을 자유라는 측면에서 묵상하는 가운데 깨우침을 주시길 바랍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사람은 이 자유의지를 사용함으로써 사람의 사람됨을 확인 받게 됩니다. 창세기말씀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었다’는 것은 ‘피조물’로써의 존재 조건을 깨뜨렸다는 데 핵심이 있습니다. 곧 물고기가 뭍으로 뛰어나온 격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자유를 왜곡, 남용하여 피조물의 존재성을 거부하고 마침내 하느님으로부터 이탈한 인간은 죄의 노예 상태로 살게 되었고 오히려 부자유 속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사실 거짓이나 악을 선택하면 일시적으로 자유로울 것 같으나 그렇지 않습니다. 죄의 노예가 되고 후회의 노예가 되고 맙니다. 인간적인 욕심을 선택하면 자유가 아닌 속박에 처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살면 당장은 어렵고 힘들지 모르지만 영원히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1-32)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의 삶은 바로 하느님의 말씀대로 살아서 진리 안에 머물고 그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매번 강론을 길게 하시는 신부님이 계셨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강론을 시작하면 아예 눈을 감고 쉬는 분도 계셨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신부님께서 “하느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믿습니까?” 하고 큰 소리로 물었습니다. 깜박 졸고 있던 신자분이 깜짝 놀라 말했습니다. “맞습니다. 신부님 말씀은 정말 질립니다. 질리고말고요!” 진리의 말씀은 질릴 수가 없는 말씀인데......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썩어 없어질 것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약한 것으로 묻히지만 강한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물질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되살아납니다. 물질적인 몸이 있으면 영적인 몸도 있습니다.”(15,42-44) 하고 말하였습니다. 부활한 몸과 육적인 몸의 차이는 바로 자유에 있는 것입니다. 육체적인 몸은 제한에 묶여있지만, 영적인 몸은 경계, 한계, 속박에 더 이상 매이지 않는 자유의 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그야말로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나는 내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합니다.”(로마 7,15) “나에게 원의가 있기는 하지만 그 좋은 것을 하지는 못합니다.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 그래서 내가 바라지 않는 것을 하면, 그 일을 하는 것은 더 이상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자리 잡은 죄입니다. 여기에서 나는 법칙을 발견합니다. 내가 좋은 것을 하기를 바라는데도 악이 바로 내 곁에 있다는 것입니다.”(로마 7,19-23) 하고 말합니다. 이만큼 자유를 누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자유를 선택해야 하고 또 누려야 합니다. 진리 안에서의 자유야말로 부활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속은 알 수가 없습니다. 겉으로는 좋아 보여도 속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고, 겉으로 보기에는 별로인 것 같은데 속은 누구보다도 깊고 넓은 마음을 가진 분도 있습니다. 사실 사람은 어려움을 당해봐야 그 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이나 처지에서도 변함없는 사랑의 관계를 형성하여야 합니다. 삶의 부활은 바로 사랑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성인들의 기쁨은 사랑으로 사는 것입니다. 인간의 충만성은 사랑으로 죽는 것입니다. 애덕과 사랑을 거느리는 곳, 그런 곳에 하느님께서 계십니다.”(까롤로 까레또) 그러므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 안에서 주님과 하나가 되어야 그분과 함께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증오가 그대를 얽어매는가? 용서하라. 자유로워질 것이다. 이기심이 그대를 속박하는가? 사랑하라. 자유로워질 것이다. 죄가 그대를 괴롭히는가?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자유로워질 것이다. 재물이 그대를 집착하게 하는가? 나눠라. 자유로워질 것이다. 죽음이 그대를 두려움에 가두는가? 부활을 믿어라. 자유로워질 것이다.(故차동엽 신부)
예수님의 부활로 우리가 부활의 희망을 간직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부활은 이 세상에 살던 개똥이의 고유성과 인격 전체의 부활을 말합니다. 말하자면 그의 인간성에 대한 부활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서 부활을 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영원한 부활을 희망하는 만큼 지금 여기서부터 삶의 부활을 이루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자유의지를 하느님의 뜻대로 쓸 수 있는 기쁨을 차지하시길 바랍니다. 다시 한번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왜 여자에게 먼저 나타나셨는지 아십니까? ‘예수님께서도 여자의 입이 가볍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랍니다.’ 사실 입이 싼 남자도 있습니다. 싸도 너~무 싼 남자 말입니다. 그러니 여자분들 섭섭해 생각하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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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축하합니다!>
-예수님 부활 만세, 우리들 부활 만세-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
축하합니다!
예수님 부활, 우리들 부활을 축하합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알렐루야!
우리 예수님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 덕분에 예수님과 함께 부활하였습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좋은 기쁜 소식은, 좋은 소식은 없습니다. 이제부터 우리 모두 파스카의 주님과 하나되어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내일 4월1일은 부활 팔일 축제 월요일, 만개한 파스카의 봄꽃들과 더불어 이제 참 멋지고 황홀한 부활시기 4월을 지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날이 주께서 마련하신 날
이 날을 기뻐하자 춤들을 추자.
주님께 감사하라.
그 좋으신 분을 영원도 하시어라, 그 사랑이여!”(시편118;24.1)
오늘 부활 대축일 낮기도 시편 화답송 후렴도 참 적절합니다. 어제 부활 성야 미사도 참 감격스러웠습니다. “1.빛의전례, 2.말씀전례, 3.세례전례, 4.성찬전례” 네부분으로 이뤄진 전례로 새삼 세례전례가 부활성야미사의 중심임을 깨달았습니다. 수도원 개원후 최초로 장차 입회가 예정되는 이종원 베네딕도 형제가 공동체의 특별한 배려로 세례를 받았고, 이어 모두가 세례 서약 갱신에 참여함으로 모두가 예수님과 함께 부활을 체험했습니다.
말씀전례 7개의 독서에 이어, 복음전 로마서 독서는 아랫집 저와 띠 동갑인 우리 나이로 88세 노령의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 “서 마리레몽 수녀”가 또박또박 낭낭한 목소리로 읽었습니다. 이 또한 신선한 감동에 충격이었습니다. 수녀님 역시 예수님과 함께 새롭게 부활하였음을 입증합니다.
“존경하는 신부님, 부활 축하드리며 주님의 크신 평화가 가득하시길 빕니다!! 기쁜 축제의 날, 어린양의 파스카, 승리의 날, 감사와 기쁨의 날 되시길 기도합니다.”
디지털 스마트폰 카톡의 시대, 유일하게 초코렛 선물과 더불어 받은 수녀님의 친필서한입니다. 영혼이 육신을 끌고 가는, 늘 파스카의 신비를 사는 열정과 순수의 수녀님입니다. 또 뜻밖에 총선을 앞두고 재판이 끝나자 마자 곧장 유세에 오른 어느 정치가의 간절하고 절박한 호소가 깊은 감동의 충격으로 마음을 울렸고 그대로 하느님께 기도로 올렸습니다. 이어 열심한 도반으로부터 부활축하편지와 더불어 만개한 개나리꽃 사진 선물을 받고 발송한 답신도 나눕니다.
“신부님 부활 축하드려요. 부활하면 개나리와 매일 부활의 삶을 사시는 신부님이 생각납니다.” 이어 즉시 옛 “개나리” 시를 선물했습니다.
-“겨울 지낸
개나리
햇빛 환한 대낮도
너무 어두워
샛노란 꽃초롱들 가득 켜들고
대낮의 어둠
환히 밝히고 있네”-2001.4.11.
23년전 시이지만 여전히 아끼고 있는 시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부활하여 어둠을 환히 밝히며 영적승리의 삶을 살아가는, 깨어있는 영혼을 상징하는 청초한 사랑, 샛노란 개나리꽃입니다. 어떻게 하면 파스카의 승리를, 영적승리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겠는지요?
첫째, 예수님을 한결같이 사랑하십시오.
오늘 복음의 빈무덤을 배경한 세 제자들이 예수님 사랑의 모범입니다. 누구나 자명한 주님 부활체험이 아닌 참으로 예수님을 열렬히 한결같이 사랑한 이들만이 부활한 주님을 체험했습니다. 맨처음 빈무덤을 확인한 마리아 막달레나 만큼 예수님을 사랑한 분도 없을 것입니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의 전갈에 쏜살같이 무덤을 향해 달려가는 애제자와 수제자의 대결, 그러나 앞선 것은 애제자의 사랑이었고, 겸손한 애제자는 잠시 멈추었다가 수제자 베드로 다음에 무덤에 들어섭니다. 세분의 예수님 사랑은 막상막하입니다. 그러나 빈무덤을 봤을 때 전광석화 주님 부활을 감지하고 확신한 것은 에제자였습니다. 다음 짧은 묘사가 이를 입증합니다.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사랑의 눈이, 영의 눈이 활짝 열린 애제자만이 빈무덤을 보는 순간 주님 부활을 믿었습니다. 참으로 사랑할 때 체험하는 부활하신 주님임을 깨닫습니다.
둘째, 천상의 꿈, 희망이신 그리스도를 추구하십시오.
바오로 사도의 간곡한 권고입니다. 주님 부활 체험만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부단히 천상의 그리스도를 추구할 때 샘솟는 영적 열정에 영적 승리의 삶입니다. 초월과 내재의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을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 속에 나타날 것입니다.”
참 귀한 말씀이요 부활시기 내내 마음에 담고 살아야 할 말씀입니다.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입니다. 살아있다하여 다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떠난 삶은 살아 있는 삶이 아닌 유령같은 좀비같은 헛된 삶, 죽은 삶이겠습니다. 이미 살아서 그리스도와 깊어지는 일치와 더불어 생명력 넘치는 참나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마침내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우리는 그분과 함께 영광속에 환히 나타날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이자 영원한 꿈이요 희망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모두 백절불굴 파스카의 삶을, 영적승리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셋째, 주님 부활 선포의 증인이 되십시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베드로는 예전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던 제자가 아닙니다. 불굴의 주님의 용사가, 주님 부활의 전사가 된 베드로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후의 베드로의 활약상을 보여줍니다. 이제 주님의 부활을 증언하는 일에 전념하는 베드로입니다.
“그분은 모든 백성에게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미리 증인으로 선택하신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우리는 그분과 함께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였습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산 이들과 죽은 이들의 심판관으로 임명하셨다는 것을 백성에게 선포하고 증언하라고 우리에게 분부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두고 모든 예언자가 증언합니다. 그분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받는다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우리도 부활하였습니다. 오늘 지금 여기 내 삶의 자리, 갈릴래아에서 만나는 부활하신 주님입니다. 다음 파스카의 부속가 그대로입니다.
“그리스도 나의 희망 죽음에서 부활했네.
너희보다 먼저앞서 갈릴래아 가시리라.
그리스도 부활하심 저희 굳게 믿사오니
승리하신 임금님 자비를 베푸소서.”
하루하루 파스카의 삶을, 주님 부활 승리의 삶을 살 때 비로소 영원한 생명의 참삶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부활하신 주님과 날로 깊어지는 사랑과 신뢰의 삶으로 변모시켜 줍니다. 이 거룩한 미사를 봉헌하는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간곡한 당부 말씀입니다.
1.늘 그리스도 예수님을 사랑하십시오. 날로 예수님을 사랑하여 알아 닮아갈 때 참나의 실현입니다.
2.늘 천상의 꿈, 희망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추구하십시오. 초월과 내재의 그리스도,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3.늘 부활하신 주님을 증언하십시오. 바로 내 삶의 자리 갈릴래아에서 내 삶자체로 부활하신 주님을 환히 드러내는 삶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가득하길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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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요한20,9)
<주 참으로 부활하셨네. 알렐루야, 알렐루야!>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시편 저자는 부활의 기쁨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집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이날은 주님께서 만드신 날 우리 기뻐하며 즐거워하세."(시편118,22-24)
주님부활사건은 '신앙의 핵심이며 근본'입니다. 주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이 사건은 '하느님의 은총의 은총'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가장 커다란 은총'입니다.
'신앙의 근본이요 핵심인 주님부활사건'에 대해서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 교회 신자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고 여러분 자신은 아직도 여러분이 지은 죄 안에 있을 것입니다."(1코린15,14.17)
주님부활사건은 우리에게 사는 길, 부활하는 길,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길을 제시합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살 수 있고, 부활할 수 있고, 영원히 부활할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을 제시합니다.
그 길과 답은 바로 우리도 예수님처럼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죽어야 살 수 있고, 내가 죽어야 부활할 수 있고, 내가 죽어야 영원히 부활할 수 있다는 신비입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 깊은 감사를 드리면서, 우리도 죽어 봅시다!
나의 교만을 죽이고,
나의 탐욕을 죽이고,
나의 인색을 죽이고,
나의 음욕을 죽이고,
나의 분노를 죽이고,
나의 시기를 죽이고,
나의 게으름을 죽입시다!
주님 부활을 축하드리면서 이 기쁨을 함께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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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UjYm2uSFmL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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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마르 16, 6)
얼었던 개울물이
풀리고 봄꽃들이
꽃망울을 마구
터뜨립니다.
우리가
한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하신 생명의
일들입니다.
다른 어떤
곳에서
이루어지는
부활이 아니라
죽음이 빚어내는
무덤의 현장
여기에서
생명의 부활은
놀랍도록
이렇게
이루어집니다.
이미
무덤을
막았던
큰 바윗돌은
굴러져 있습니다.
그래서 부활은
억누름의
억압이 아닌
풀어줌으로
새로운 길이
열리는 생명의
참된 자유이며
죄의 해방입니다.
스스로를
묶어
속박했던
우리들이
살아있는
관계속으로
이제는
들어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되살아나심으로
죽음의 한계를
벗어버립니다.
생명의 숨결로
드러나는
하느님의 뜻인
사랑의 참된
부활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느님과 세상의
단절이 아닌
파괴되고 손상된
관계성의 힘찬
회복입니다.
하느님께
자신을 내어주는
행위가 부활의
본질입니다.
무한히
열려져 있는
끝없는 사랑을
우리는
부활을 통하여
뜨겁게
체험합니다.
무덤을 막았던
바윗돌만
붙들고 있을 것이
아니라
하나됨의 일치로
살아가게 하시는
하느님을 이제는
맛보아야 합니다.
하느님 생명의
힘을 믿기에
우리는
우리의 뜻을
버리고
비울 수 있습니다.
버리고
비우는 것이
믿는 것입니다.
부활을
체험하니
예전의
갈릴래아가 아니라
예수님을
새롭게 만나게되는
부활의 현장
살아있는 관계의
갈릴래아입니다.
되살아나신
예수님과 함께
삶의 참된
행복을 누리는
부활의 새날입니다.
참으로
되살아나셨습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알렐루야.
우리모두를 향한
부활의 기쁜소식을
온 마음으로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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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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