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도 모르게 ‘트릭스터’가 되어 가고 있는 ‘남성’들의 이야기가 담긴 소설집
최성배 소설 [꿈을 지우다] 발간
최성배 소설
135*195|294쪽|14,000원|2022년 8월 1일 발행
도서출판 이든북|ISBN 979-11-6701-166-4 03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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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최성배 약력]
1986년 단편소설「도시의 불빛」을 발표하면서 억압의 시기에 금기시 되었던 역사적 진실이 가진 문면의 작품성향을 보여주었다. 이후 도시민들이 힘겨운 현실과 불화한 그 너머로 웅크리고 있는 치욕스런 욕망을 그리고 있다.
기발한 그의 이야기들은 단단한 문장으로 소설미학을 추구하며 끊임없는 실험정신이 돋보인다는 문단의 세평처럼,
장편소설『침묵의 노래』,『바다 건너서』,『내가 너다』,『별보다 무거운 바람』,『그 이웃들』,『계단아래』와 소설집으로『물살』,『발기에 관한 마지막 질문』,『무인시대에 생긴 일』,『개밥』,『은밀한 대화』,『흔들리는 불빛들』,『나비의 뼈』,『찢어진 밤』외에 산문집『그 시간을 묻는 말』,『흩어진 생각들』과 시집『내 마음의 거처』,『파란가을하늘아래서는 그리움도 꿈이다』,『뜨거운 바다』 등 저서를 출간하였고
제3회 문학저널 창작문학상, 제3회 한국문학백년상, 제40회 한국소설문학상, 제40회 조연현문학상을 수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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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견작가 최성배가 단편 3편, 짧은 소설 7편, 중편 1편이 수록된 열다섯 번째의 소설을 냈다. 편 편마다 소설의 분량과 주제를 다양화한 이야기들로 모았으며 특히, 책 제목인 「꿈을 지우다」는 최근작으로 세 남자의 시점으로 구성된 중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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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매듭 굵은 손가락으로 해동버튼을 눌렀다. 냉동실 안에 쟁여둔 덩어리는 더 짧은 시간을 전자레인지 속에서 녹여냈다. 그는 무엇보다 배가 고팠다. 혓바닥이 움직이는 한 욕망도 살아있다. 오뚝하고 길쯤한 콧날 끝으로 큼큼거리며 그것의 냄새를 맡았다. 마치 《양들의 침묵》에 나오는 안소니 홉킨스의 눈빛으로 물고기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철갑 같은 비늘들을 털어내어 야무지게 생긴 날선 가위를 들었다. 살아서 바다 속의 거친 물살을 거슬러 힘껏 돌아다녔을 생명이 이제는 한낱 물질로 존재했다. 위장된 먹이의 유혹을 못 참아 낚시미늘에 걸려서 잃은 목숨. 아가미 아래 수염과 뱃살에 송곳처럼 돋은 단단한 두 개의 침과 꼬리. 등지느러미에 톱날처럼 삐죽삐죽 돋아난 가시들이 날카롭다. 바늘처럼 단단하고 뾰족한 돌기들은 날이 서있었다. 어쩌면, 바다 속에서 하늘로 솟구쳤다가 내동댕이쳐진 용이 변해서 조그만 물고기가 되었을까? 하긴, 거칠고 딱딱한 척추돌기가 한낱 물고기지느러미로 변할 리 없다. 감성돔에게 지느러미는 생존의 무기이자, 몸의 일부이다. 그렇지만, 도미매운탕을 끓이려는 그에게는 거추장스러워 제거해야 할 걸림돌일 뿐. 사물의 존재는 주체의 입장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생선인가? 사람인가?
암수가 뒤바뀐다는 이 생선은 도대체 몸의 정체성이 무엇인가. 순간, 그 여자의 모습이 떠올라 머릿속을 휘저었다. 사람이 지닌 속내를 모른다지만, 그녀의 깊이 또한 알 수 없었다. 그녀가 연막을 쳤음인지 뿌연 어지러움이 어느 한계점에서 그를 가로막았다. 찾아내지 못할 어딘가에 숨어 그를 노려보는 식칼 같은 증오를. 손아귀가 가위에 힘을 주자, 뚝, 사각사각, 싹둑싹둑. 몸에서 살이 섬뜩하게 잘려 끊어지는 소리가 잔인했다. 묘한 가학의 쾌감과 아픔이 뒤섞인 상태로 그의 몸을 건드렸다. 어차피 이별은 아픔을 함께하기 마련이지. 슬픔을 녹이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해. 손가락으로 딱딱한 생선을 눌러보니 녹으려면 더 돌려야 했다.
도마 위에 올려 시퍼런 칼날로 토막토막 낸 무 조각들과 대가리에서 떨어져나간 살점들. 냄비 속으로 분해된 자잘한 음식 재료가 켜켜이 쌓였다. 다듬어진 대파도 숭숭 썰어 놓았다. 짓이겨진 마늘과 빨강고춧가루가 쏟아졌다. 물로 자박자박 채워진 날 것들의 흔적을 향해 가스불꽃이 솟아올랐다. 뜨거워진 냄비뚜껑이 소리를 냈다. 보글보글 끓어오른 빨간 국물은 흐르는 핏물과 같았다.
그때, 싱크대 위에 얹어둔 휴대폰이 울렸다.
“뭘 없던 일로 하자고?”
- 「꿈을 지우다」158-1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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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사다리’로서의 ‘남성’이라는 어휘
남성은 이제 가장, 혹은 리더로서의 권위와 같은 것을 누릴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예측 불가능한 사회의 변화를 조정하고 ‘전통’을 유지할 의무와 책임만은 거의 그대로 남아 있다. 즉, 리더로서의 지위를 모두에게 요구받거나 혹은 도전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성’은 ‘남성’으로서의 역할을 다해야만 이 사회의 ‘의미의 체계’ 속에 편입될 수 있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존재’라는 어휘가 인간 개별자들의 특수한 삶의 양상들을 모두 소거했듯이, ‘남성’이라는 어휘는 남성 개별자들의 삶의 방식을 특정한 형태의 책임과 의무의 틀을 통해 일방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아이러니한 상황 속에서 한국의 많은 남성들은 자신을 속박하고 있는 이 ‘남성’이라는 ‘큰 사다리’를 치울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것을 통해서만 자신의 사회와 연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사다리를 치우기 위해서는 남성 개별자들이 자신만의 ‘작은 사다리’를 만들어야 하는데, 이것은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한 깊고 오랜 사유를 통해서만 만들어낼 수 있다. 하지만 한국의 남성들은 앞서 언급했듯이,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사회적 역할 속에서 ‘생존’해나가기에도 벅차기 때문에 ‘남성’이라는 어휘를 자신만의 의미로서 새로 제작할 여력이 없다. 최성배의 소설 「꿈을 지우다」는 이런 곤란한 상황에 놓인 남성 개별자들의 고군분투의 기록을 담고, 또 그 어려운 과정에서 그들이 자신에게 씌워진 불가능성의 굴레를 벗고 불완전하게나마 ‘작은 사다리’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을 서사에 담아낸다. 두 명의 주요 등장인물, ‘천상준’ ‘이강열’은 ‘남성은 과거의 의미들을 이어받을 의무가 있는가?’ ‘나는 남성이라는 위치를 어떻게 해석해나가야 할 것인가?’와 같은 질문들을 그 서사 속에서 끊임없이 던지며 자신만의 ‘남성’의 의미를 되찾아 나간다.
―평론가 양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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