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끝〉나카무라 하지메(中村元, 1912~1999)
인도학.불교학 지평 넓힌 세계적 학자
2006-12-23
원시불교와 대승불교연구 등에 큰 업적
비교연구서 ‘동양인의 사유방법’ 유명
동방연구회 창립…젊은 학자 양성 매진
인도학, 불교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으로 나카무라 하지메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만큼 나카무라가 현재의 인도학, 불교학에 끼친 영향이 크다. 그는 인도철학 연구로부터 출발해 비교사상, 세계사상사 등 만년에 이르기까지 학문영역을 계속 펼친 학자이며 동시에 진지한 교육자였다. 나카무라는 1912년 시마네(島根)현에서 태어났다. 제1고등학교(현재의 도쿄대학 교양학부)에 진학해 졸업한 후 도쿄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 문학부 인도철학 범문학과에 입학했다. 학부에서는 우이 하쿠주(宇井伯壽)에 사사해 〈중론(中論)〉의 연구를 했다. 그 후 대학원에 진학하고, 우이의 지도로 인도철학 가운데도 베단타학파의 연구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대학원 재학하던 5년간에 박사논문 〈초기 베단타 철학사〉를 완성했다.
1943년(32세) 이례적인 젊은 나이로 도쿄 제국대학 조교수로 취임했으며 1954년(43세)에는 교수가 되었다. 1973년(62세), 도쿄대학을 퇴직하고 동방학원(東方學院)을 설립해 만년까지 연구와 교육에 힘쓰다 1999년에 타계했다.
나카무라의 업적은 일본 안팎에서 높이 평가되었다. 국내에서는 문화훈장(文化勳章)을 받고, 해외에서는 인도 대통령으로부터 명예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또 영국의 왕립 아시아협회의 명예회원과 독일 학술원 객원회원에 임명됐다. 그리고 미국 스탠포드대학, 하버드대학 등을 비롯해 세계의 주요한 대학에서 강의를 했다.
나카무라의 학문 영역은 넓었다. 인도철학, 불교학, 역사학, 비교사상 등에 이르고, 그 관심은 일본, 인도, 중국, 한국, 구미뿐만 아니라 유라시아 대륙 전체에 미치고 있다. 게다가 각 영역에서 참신하고 독창적이며 선구적인 연구를 하고 그 저작의 수도 양이 방대하며, 일본어와 구문의 저서와 논문을 합치면 약 1000이상(이 중 구문은 200여)에 달한다. 여기에서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그 업적의 일단을 소개하기로 한다.
첫 번째는 인도학과 불교학 분야이다. 나카무라의 업적을 대표하는 것이 박사논문을 간행한 〈초기의 베단타 철학사〉 4권이며, 이에 1989년에 제5권으로 〈샨카라의 사상〉을 부가해 〈인도철학사상〉 전5권으로 완결했다. 그런데 나카무라의 연구는 이에 그치지 않고 인도의 역사와 사상에 대해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모든 분야에 이르렀다.
나카무라는 사상의 배후에 있는 역사를 중시했다. 그래서 역사가 명확하지 않은 인도 고대사에 대해서도 비문 해독 등을 기초로 그 전체상을 재구성했다. 그리고 인도사상에 대해서는 인도사상사의 시작인 베다, 우파니샤드를 연구하고 그 다음에 기원 전 6~5세기에 등장하는 사문들의 사상, 그 중에서도 자이나교 사상을 연구했다. 불교연구에서는 원시불교연구가 중심이며 그것은 확실한 방법론에 근거한 참신하고 독창적인 것이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나카무라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언행을 전하는 텍스트를 문헌학적으로 연구해 그 신고(新古)를 구별하고 낡은 부분을 추출해 원시불교의 새로운 모습을 제시했다. 그리고 거기에서는 원시불교와 자이나교의 사상 사이에 공통되는 부분이 많이 있는 것을 지적해 학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러한 원시불교 연구를 기초로 해서 대승불교의 연구에서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게다가 고대 인도철학의 핵심인 육파철학(六派哲學)의 해명도 하고, 또 14세기에 활동했다고 여겨지는 마다바의 인도철학개설 〈전철학강요(全哲學綱要)〉에 대해 세계 최초의 전문(全文) 번역을 했다. 한층 더 근대와 현대의 인도사상에 대해서도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두 번째로 비교사상 분야이다. 나카무라는 일찍부터 여러 사상들 간의 배후에 공통되는 논리를 설정해 그 중에서 각 사상의 특징을 지적하는 방법을 구상했다. 그 최초의 저작이 〈동양인의 사유방법(思惟方法)〉이다. 이것은 1944년에 문부성(文部省) 위탁에 의해 시작된 사업이었지만 패전과 함께 해소됐다. 나카무라는 독학으로 연구를 계속해 1948년에 완성했다. 내용은 동양 각 민족마다의 ‘판단’ 및 ‘추리’의 표현 형식을 검토해 사유방법의 특징을 해명하는 것과 보편적인 교설인 불교가 민족의 특수성 가운데 어떻게 변용했는가를 연구한 것이다. 이것은 종래와는 완전히 다른 방법론이기 때문에 나이 많은 교수들로부터는 강한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젊은 연구자들은 나카무라의 새로운 학문을 지지하고, 외국 특히 미국의 학계는 나카무라의 업적에 주목했다. 이후 이 책은 증보(增補)되어 최종적으로는 인도인, 중국인, 한국인, 티베트인, 일본인의 사유방법을 다루고 있다.
다음은 세계사상을 시야에 넣어 비교사상의 방법을 추구한 〈비교사상론〉이다. 나카무라는 비교 사상론을 “세계평화의 실현을 위한 단서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즉 지구가 좁아지고 세계가 하나가 될 방향으로 나아가는 시대에는 인간사상의 상호 이해가 중요하다. 그 때문에 인류가 낳은 과거의 여러 사상의 대비 검토와 상호 비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한 방법론을 제시한 것이 본서였다. 그 중에서는 일본 지식인의 현상을 비판했다. 즉 일본에서는 ‘서양 이상(以上)으로’ 서양 사상이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섭취(攝取)의 자세는 ‘저쪽’에서 유명한 사상이라면 일본인의 정신적인 상황과 관련 없이 도입하는 태도이며, 거기에 자기의 문제의식은 없고 있는 것은 구미에 대한 열등감과 숭배 의식에 근거한 권위지상주의(權威至上主義)이라고 한다. 그리고 일본인이면서도 서양 철학만을 연구하고 동양이나 그 외의 철학의 조류에 관심을 안 가지는 철학 연구자를 정말로 사상 연구자라고 부를 수 있을까? 원래 비교철학적인 관심을 안 가지는 철학연구는 존재할 리가 없다고 비판했다.
비교사상론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세계사상사〉이다. 이것은 세계 전체를 시야에 넣어 비교의 방법에 의해 인류의 보편 사상사를 구축한 것이다. 나카무라는 동양과 서양의 사상은 어떤 관점에서는 고대, 중세, 근세라는 흐름 속에서 병행적으로 발전해 왔다고 보고, 양자를 비교하면서 그 이동(異同)을 고찰했다. 이 작업은 최만년(最晩年)까지 계속되어 절필(絶筆)인 〈논리의 구조〉에서는 동서고금(東西古今)의 ‘논리적 사고’의 구조를 구명해 인류 전체에 통하는 새로운 논리학의 체계화를 구상했다.
세 번째는 교육의 측면이다. 나카무라는 1970년에 젊은 연구자의 양성과 동양사상의 연구 및 보급을 목표로 해서 사재(私財)를 들여 동방연구회(東方硏究會)를 만들었다. 나아가 도쿄대학을 퇴직한 후에는 자신이 이상으로 하는 ‘개인 지도의 장소 공동체’ 실현을 목표로 동방학원(東方學院)을 만들어 ‘진리 탐구를 제일의(第一義)로 해서 학력, 연령, 직업, 국적, 성별에 상관없이 정말로 공부하고 싶다고 바라는 사람들’에게 넓게 문을 열어 스스로도 강사로 진력했다. 만년에는 휠체어를 타고 강의했다. 다음과 같은 놀랄 만한 이야기가 있다. 나카무라가 서거하는 일주일 정도 전의 늦은 밤이었다. 그는 누워 있다가, 돌연 “지금부터 강의를 시작합니다. 몸이 아파서 누운 채로 실례합니다”라고 말한 뒤 45분간 강의를 했다. 이를 마치면서 “강의를 마칩니다. 질문이 있습니까?”고 말했다고 한다. 이것은 아마 무의식적인 것일 것이다. 인간의 본질은 죽음에 임할 때 나타난다고 하는데 나카무라의 경우는 교육자로서의 삶을 관철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카무라는 일본인 연구자가 인간의 삶을 진지하게 학문의 대상으로 하지 않는 것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인간의 삶이란 행위를 하는 것이지요. 그 문제에 대한 반성이 솔직히 말해 일본의 학계와 사상계에서는 적다고 생각해요. 하고 있는 것은 역사의 연구만이예요. 현실과 격투하는 사고가 없다.” 이것은 앞으로 우리가 생각해 가야 하는 문제이다.나카무라의 주요 저작을 수록한 것으로서 〈나카무라 하지메 선집〔결정판〕〉전40권이 있다.
사토오 아츠시 일본 동양대 동양학연구소 객원연구원
[불교신문 2290호/ 12월2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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