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말이나 20세기 초 조선의 역사가들이 역사를 연구하고 서술하게 한 동력은 조선 사람의 각성과 단결을 촉진하고 항일 투쟁을 북돋우려는 의지와 목적의식이었다. 이런 감정과 소망에 끌려 민족을 중심으로 과거를 재구성하고 현실을 기록한 작업을 ‘민족주의 역사학’이라고 한다. 인간은 역사에 도덕적 감정을 투사한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조선 사람들에게 민족의 역사에 대한 열등감을 주입함으로써 식민 지배를 받아들이게 하려 했다. 조선의 민족주의 역사학자들은 정반대인 목적의식을 품고 조선 민중이 용기와 자부심을 느낄 수 있도록 역사를 재구성했다.
19세기는 제국주의 시대였지만 제국주의가 새로운 현상이었던 것은 아니다. 넓게 보면 제국주의는 다른 지역을 정복해 큰 나라를 만드는 경향 또는 현상이며, 이런 의미에서 인류 역사에 언제나 존재했다.
유럽인은 로마제국이 무너진 후 1,000년 넘는 세월 동안 제국을 세우지 못했다. 어느 나라도 인접 국가를 정복할 수 있을 정도로 압도적인 군사력을 구축하지 못한 그들은 이웃 나라를 침략하기보다는 밖으로 나가는 길을 선택했다. 16세기 이후 포르투갈, 스페인,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같은 나라들은 발전한 산업 기술과 압도적인 군사력을 앞세워 아메리카 대륙과 아시아, 호주, 아프리카를 점령해 저마다 본국과 식민지로 이루어진 제국을 구축했다. 유럽의 제국주의 국가들은 산업혁명을 거치며 완전하게 자리 잡은 자본주의 경제 체제를 식민지에 이식해 자원을 수탈하면서 기독교 문명으로 야만인을 교화한다는 논리를 폈다. 그런데 정복할 수 있는 땅이 얼마 남지 않았던 19세기 중반부터 한때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국을 포함해 러시아, 이탈리아, 독일, 일본 등이 식민지 쟁탈전에 가세했다. 제국주의 열망을 버리지 못한 강대국들이 마침내 자기네끼리 전쟁을 벌이기 시작했으니, 그것이 바로 20세기 세계를 피로 물들인 두 차례 세계대전이었다.
후발 제국주의 국가였던 일본의 식민지가 된 조선의 역사가들은 크게 세 갈래로 민족적 열정을 표현했다. 첫째, 민족해방 투쟁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일제의 불법적・폭력적인 조선 강점 과정과 조선 사람들이 벌인 해방 투쟁을 세세히 기록했다. 둘째, 조선 사람들이 민족적 자부심과 자주성을 북돋우는 데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과거 역사를 재구성하고 재해석했다. 셋째, 우리 민족이 다른 민족에 비해 어딘가 못난 점이 있거나 우리 사회와 역사가 스스로 발전할 수 없는 결함을 지니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려 했다. 식민지 조선의 수많은 지식인들이 이런 작업에 참여했는데, 박은식, 신채호, 백남운이 민족주의 역사학의 세 갈래를 대표하는 역사가라고 생각한다.
박은식은 망국의 역사가 아니라 광복의 역사를 쓰고 싶었기에 3・1운동 이후 독립 투쟁에 초점을 맞추어 당대사를 새로 썼다. 국제연맹에 우리 민족의 독립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상해 임시정부가 만든 사료편찬회에 참여한 그는 『한일관계사료집』을 만들면서 모은 자료를 토대로 1884년 갑신정변부터 1920년까지의 독립 투쟁을 담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썼다. 상편은 사실상 『한국통사』의 요약본이고, 하편이 본론에 해당한다. 박은식은 하편에서 3・1운동 직전 국내외의 독립운동 상황과 3・1운동의 전개 과정을 정리했으며 집회 시위 건수, 검거 투옥된 조선인의 수, 부상자와 사망자 수를 비롯한 각종 통계를 수록했다. 임시정부의 수립과 재외 한국인의 활동, 청산리전투를 비롯한 무장 투쟁, 청년운동과 여성운동, 서간도와 북간도 지역에서 일제 군경이 저지른 만행 등 3・1운동 직후의 국내외 독립 투쟁 상황도 입체적으로 그려 냈다.
당대의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박은식과 달리, 신채호(1880~1936)는 집요하게 고대사를 파고들었다. 망한 지 오래인 조선의 정신을 살려 내기 위해 조선의 고대사를 새로 쓴 것이다. 그는 조선의 정신을 자기 손으로 지워 버렸던 조선 역사가들의 행위를 격렬하게 비판했다. 다음은 조선 사람의 뇌수에서 조선 역사를 비틀고 지워 버린 조선 역사가들의 행위를 규탄한 대목인데, 날카로운 논리가 잘 벼린 칼날처럼 서늘한 기운을 내뿜는다.
『조선상고사』 17~19쪽
안정복이 『동사강목』을 짓다가 잦은 내란과 외적 출몰로 우리나라 옛 역사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을 슬퍼했다. 그러나 조선사는 내란이나 외침보다는 조선사를 저술한 바로 그 사람들 손에 없어졌다. 여태까지 조선 역사가들은 자기 목적에 따라 역사를 바꾸려고 도깨비도 떠옮기지 못한다는 땅을 떠옮기는 재주를 부렸다. 고구려 첫 도읍인 졸본을 떠다가 평양 바로 북쪽 성천(成川) 또는 영변에 갖다 놓았고, 요동의 고구려 안시성을 떠다가 평안남도 용강 또는 안주에 갖다 놓았다. 『삼국유사』에는 불교 교리가 한 글자도 들어오지 않은 왕검 시대부터 인도 범어로 만든 지명, 인명이 가득하다. 유학자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에는 공자·맹자의 도덕을 무시했던 삼국 무사들이 경전 문구를 관용어처럼 입에 올린다. 수백 년 동안 조선의 인심을 지배했던 영랑, 술랑, 안상, 남석행의 논설은 볼 수 없고, 중국 유학생 최치원만 세세히 서술했다. 『삼국유사』는 신라 왕을 인도 왕족이라 하며, 『삼국사기』는 고구려 추모왕을 중국 오제의 하나인 고신씨 후손이라 한다. 『동국통감』은 조선 민족을 진(秦)과 한(漢)의 유민이라고 한다. 임금을 높이고 백성을 천대하는 『춘추』의 도끼질 아래 자라난 후세 사람들은 그런 마음과 습속으로 삼국 풍속을 이야기하고, 문약한 조선 사람들이 좁은 땅에 만족하며 상고 시대의 지리를 그리니, 이는 단군조선, 부여, 삼국, 발해, 고려, 조선에 이르는 5,000년을 한 도가니로 부어 낸 것과 같다. 이는 단군조선, 부여, 삼국, 발해, 고려, 조선에 이르는 5,000년을 한 도가니로 부어 낸 것과 같다. 조선사를 지은 과거의 역사가들은 조선의 눈과 귀와 코와 머리를 혹이라 하여 베어 버리고 어디서 수많은 진짜 혹을 가져다 붙여 놓았다. 조선인이 읽는 조선사나 외국인이 아는 조선사는 모두 옳은 조선사가 아니었다.
신채호는 고대 우리 민족의 생활 터전이 압록강이나 대동강 이남이 아니라 만리장성 바로 너머 요동 지역이었다는 사실을 밝혔다. 우리가 원래 한반도 작은 땅에 만족하며 살아온 것이 아니라 중국의 왕조에 맞서 굴하지 않고 힘을 겨루었던 민족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신채호는 서간도 환인현 홍도천에 위치한 학교에서 국사를 가르쳤던 1914년 무렵, 그 지역의 고구려 유적을 답사하면서 민족의 고대사를 새로 써야 한다는 확신을 얻었다. 독립운동가 이회영의 권고에 따라 1915년부터 1919년까지 북경에 체류할 때 북경 대학(현 베이징 대학교) 도서관의 조선 관련 역사 문헌을 샅샅이 뒤지면서 준비한 끝에 1931년 『조선일보』에 『조선상고사』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이것을 11편으로 나누어 엮은 책이 나온 것은 1948년이었다. 『조선상고사』는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대한, 우리 민족의 역사를 압록강 남쪽에 가두어 버렸던 고려와 조선의 역사가들에 대한 전면적이고 치열한 투쟁이었다. 나라가 패망해 절망과 도탄에 빠진 민중이 진취적 민족의식과 자부심을 가지도록 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의 삶에서 확고한 중심을 차지한 것은 언제나 민족의 각성과 해방에 대한 소망이었다.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을 떠나 나라 밖으로 간 신채호는 비타협적인 태도로 독립 투쟁을 벌였다. 유명한 사건은 국제연맹에 신탁통치를 청원했다는 이유로 상해 임시정부의 이승만을 비판한 일이다.
<역사의 역사> 유시민
대한 독립군가
https://youtu.be/PL2bbVac09Y?si=6O89_gPbh2yW1FgO
첫댓글 작년 가을 국치의 길 문학기행 중 우당 이회영 기념관에서의 감동을 다시 떠올립니다. 우당과 6형제의 독립 정신도 처음 알았죠. 부끄럽습니다.
독립군가는 처음 듣습니다.
나가나가 싸우러 나가...
우리 역사가 이렇게 지켜졌는데 말이예요.
유관순,홍범도,이회영...그분들에게 뭘 드려야 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