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모:든시 시인선 1권. 원로시인 정진규의 열여덟 번째 시집으로, 작품 59편이 실려 있다. 정진규 시인은 전통과 역사의 흐름 속에서 시의 근원을 탐구하여 본질과 근원에 시선을 집중하고 거기서 정신의 요체를 얻어내려 한다. 저자는 인간의 슬픔과 아픔을 드러내는 것이 시라고 생각해 왔다. 시를 연꽃의 꽃핌이나 범종의 유곽에 견주어 번외의 꽃이라고 한 것도 그런 맥락이다.
음주와 담소를 정력적으로 즐기던 인사동 시절 서럽게 무너지는 게 있어야 시가 된다고 그는 늘 강조하였다. 서글픔, 아픔, 환멸의 습지가 시의 동력이 되고 자양이 된다. 남다른 서글픔을 인지하여 그 서글픔을 스스로 드러내 고백할 때, 그리고 그 고백을 통해 자신의 슬픔을 달랠 수 있을 때 시가 탄생한다. 시는 환멸의 습지에서 탄생하는 번외의 꽃이고 슬픔의 수렁에서 피어나는 유곽의 연꽃이다.
“아득한 배고픔이 나를 먹여 살렸다”라는 구절은 스스로 젖을 물려 제 배고픔을 달래주는 유곽의 이미지와 통한다. 아득한 배고픔이 포만의 충족으로 전환되는 역설의 신화가 탄생하는 것이다. 서글픔 속에 시가 탄생한다는 점에서 “황홀과 서글픔은 한 몸”이라고 했다. 황홀과 서글픔을 한 몸으로 밀고 나가는 우리 시의 희유한 자리에 정진규의 시가 놓여 있다.
출판사 서평
시집 『모르는 귀』는 원로시인 정진규의 열여덟 번째 시집으로, 작품 59편이 실려 있다. 정진규 시인은 전통과 역사의 흐름 속에서 시의 근원을 탐구하여 본질과 근원에 시선을 집중하고 거기서 정신의 요체를 얻어내려 한다. 저자는 인간의 슬픔과 아픔을 드러내는 것이 시라고 생각해 왔다. 시를 연꽃의 꽃핌이나 범종의 유곽에 견주어 번외의 꽃이라고 한 것도 그런 맥락이다. 음주와 담소를 정력적으로 즐기던 인사동 시절 서럽게 무너지는 게 있어야 시가 된다고 그는 늘 강조하였다. 서글픔, 아픔, 환멸의 습지가 시의 동력이 되고 자양이 된다. 남다른 서글픔을 인지하여 그 서글픔을 스스로 드러내 고백할 때, 그리고 그 고백을 통해 자신의 슬픔을 달랠 수 있을 때 시가 탄생한다. 시는 환멸의 습지에서 탄생하는 번외의 꽃이고 슬픔의 수렁에서 피어나는 유곽의 연꽃이다. “아득한 배고픔이 나를 먹여 살렸다”라는 구절은 스스로 젖을 물려 제 배고픔을 달래주는 유곽의 이미지와 통한다. 아득한 배고픔이 포만의 충족으로 전환되는 역설의 신화가 탄생하는 것이다. 서글픔 속에 시가 탄생한다는 점에서 “황홀과 서글픔은 한 몸”이라고 했다. 황홀과 서글픔을 한 몸으로 밀고 나가는 우리 시의 희유한 자리에 정진규의 시가 놓여 있다.
문학평론가 이숭원 교수는 이번 시집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석가헌 은거의 공간에서 이룩한 창조의 상상력이요 신생의 공력이다. 이제 팔질八?의 전집全集을 앞둔 시인의 성중천性中天이 불이不二의 선란禪蘭으로 피어날 만하다. 그 스스로 “내 지팡이는 복고가 아니다”라고 했으니, 신생의 현관을 열고, “개결의 백비白碑”를 물리치고, “비린내 나는 개칠”(?양철지붕과 빗소리?)을 찾아 지팡이 짚고 나서는 시인의 당당한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그의 뒤를 좇을 자격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 마음의 끝을 따르고 싶은 마음의 간절함을 귀 열린 세상에 전하고 싶다.”
●수록 작품
돌담에 소색이는 햇발같이* 외 2편
말년이다 돌담을 쌓는다 서로 다른 돌들이 서로 만나 서로 든든하다 비인 틈을 용케 닮은 것들이 서로를 채운다 더군다나 소색인다 햇발이 소색이는 게 아니라 서로 다른 돌들이 소색인다 속삭인다가 아니라 소색인다 더 은근하고 부드럽다 소리로 서로 만진다 여러 곳에서 발품 팔아 주워 온 강돌들이다 쌓는 정성도 정성이었지만 여러 강물로 씻긴 것들이어서 소색이는 물소리가 다르다 흐르는 굽이가 서로 다르다 빛깔도 다르다 이 소리들로 이 굽이들로 이 빛깔들로 나는 한 소식 할 작정이다 연주회를 열 작정이다 서로 다른 것들이 한 소리를 내고 있으니 실체의 발견發見이다 아직 덜 받아 적었다 열심히 받아 적고 있다 햇살 속에서 내는 한 소리만 영랑께서는 결로 보이며 햇발같이 적어 주셨지만 한밤의 소리를 받아 적노라면 밤을 꼬박 새워도 몸이 가볍다 새벽 먼동으로 몸이 트인다 촉촉하게 담을 넘는다 젖어 있는 햇발을 새벽에 보았다 촉끼**라는 말씀을 비로소 만졌다 보은 송찬호네 대추 마을 앞 강물 것도 있고 이성선이 밟으며 떠난 설악 계곡의 것들도 있고 담양 소쇄원 앞 강물에서 댓잎 바람 소리로 씻기던 것들도 있으며 내 생가生家 마을 보체리 앞 개울, 한겨울에도 맨발 벗고 건너던 막돌들도 있다 당신의 꿈결을 흐르던 강물에서 건져진 것들도 있다 태胎 끊고 맨몸으로 태어난 것들도 있다 다만 나의 돌담 안에 모옥茅屋 세 칸 반 들이고 내 신발 한 켤레 댓돌 위에 벗어 두었다
*영랑永郞. 『시문학』2호 (1930.5)에 「내마음고요히고흔봄길우에」로 발표.
** : 슬픔의 가락 속에서 피어나는 싱그러운 음색의 환한 기운(미당未堂)
願往生歌
즐비櫛比하였다 목 달아난 석불들이 줄로 서서 국립 경주 박물관 본채가 뒤로 넘어갈 것 같은 경사를 버티고 있었다 봄날 늦은 오후, 나도 목이 달아난 내 몸뚱이 한 채를 그 끝자리에 세웠다 어디 보존할 데를 찾지 못해 그간 헤매이다가 여기 와 한 자리를 겨우 세 들었다 뒤로 넘어갈 듯 갈듯 비알지고 있는 내 몸이 가담되었다 나의 낡은 경주 박물관이 구원되었다 목 달아난 내 몸뚱이가 어디 한두 채뿐이었겠는가 아직 싱싱한 그 눈웃음과 입술 미소가 살아있는 그림자로 내 이승과 저승 사이를 원왕생원왕생願往生願往生 드나들고 있는 모가지여, 모가지여 직전直前의 것만을 허락받았다 이 산천 저 산천 여기서 저기로 저기서 여기로 이끌고 온 갸륵한 소모消耗여, 직전의 것만을 비인 자리를 허락받았다 슬픈 행복이여, 봄날 해질 무렵 원왕생원왕생 범종梵鐘이 울었다
*국립 경주 박물관 뒷 뜨락에 목 달아난 부처들이 수십 채 줄로 서 있다
모르는 귀
인왕산으로 가는 북촌 골목 한 흰 벽에 모르는 귀,* 귀가 하나 잔뜩 걸리셨어요 귀만 남으셨어요 바쳐진 소모의 얼굴들 귀로만 남으셨어요 ** 진종일 걸리셨어요 젖꼭지도 없이 당신의 젖꼭지를 진종일 빨았으나 무엇 한 모금 넘긴 바 없어요 넘겨주신 것 하나 없이 머언 모래밭 모래알들만 그들의 그늘만 낙타도 한 마리 없이 버석거리게 하셨어요 당신이 듣고 있는 말씀 한 마디도 듣지 못했어요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창제 중이신지 잔뜩 하얗게 걸려 있긴 마찬가지셨어요 로 잔뜩 밤샌 날 새벽 그간의 내 시편 몇 행行 겨우 읽어 오음五音을 떨게 해 놓고 내 귀청이 트이는 걸 건드려 놓고 나 오늘은 열심히 네게 가지 않았어요 , 너만 우거지기 때문이었어요 나만 지워지기 때문이었어요 오, 무서워요 , 잔뜩 지워진 내가 들려요
* : 정서영의 조각. 2016.8.26 선재 미술관 오픈
** : (정진규 시집, 2015.3.30 중앙북스)
목차
· 시인의 말 | 5
제1부
돌담에 소색이는 햇발같이 13
원왕생가願往生歌 15
모르는 귀 16
그릇과 가지치기 17
은어사銀魚寺 18
썩는 사과 향내 19
서글펐다 21
외기러기 한 마리 22
나무여 나무여 23
큰 나무 방석 24
점자훈민정음點字訓民正音 25
벼락이여 들치기여 27
내 지팡이는 복고復古가 아니다 29
하늘시비詩碑 31
창제중이시다 32
프로방스 세잔느네 뒷간 34
제2부
심각함에 대하여 39
예리한 향기 41
초록 밑줄 42
지지직거리다 43
젖은 날개 44
옹아리들 45
초록 도둑떼들 46
초록초草 47
연애시절초草 48
못물 49
생강꽃 핀다 50
연꽃 51
꽃소식 52
월정사月精寺 53
합장合葬 54
전집 자서 全集 自敍 55
파초 56
연못 57
가을비 58
허당虛堂 59
봄비 60
겸허의 내막 61
가물다 62
비가 63
홍매화 64
까치집 65
제3부
과자 만들기 69
사과와 모과 71
손을 잡는 게 내 일인데 73
내가 자주 잊는 말들에 대한 소견 74
양철 지붕과 빗소리 76
생짜로 드립니다 77
뚜껑별꽃 80
세 건의 샛서방 사건 82
죽 쒀서 개 주다 84
게으른 달 85
밥시詩 86
제주 한란 ‘축왕’에 대하여 87
홍옥 한 알 89
김종해의 아랫목 90
엄재국의 사과 92
까치 이발소 93
가짜 시인 94
· 해설 : 환멸의 습지에 핀 번외의 꽃-이숭원 | 95
· 정진규 문학 연보 | 110
작가 소개
정진규
글작가
저자 정진규는 1939년 경기도 안성 출생. 안성농업고등학교 졸업 후(1958) 고려대학교 문리과 대학 국문학과 입학 졸업(1964) · 196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시 「나팔 抒情」)1963년부터 현재까지 『현대시(現代詩)』 동인으로 활동. 1988년부터 2013년 12월까지 시전문 월간지 『현대시학(現代詩學)』 주간. 1998년부터 2000년까지 한국시인협회 회장 역임 한국시인협회상, 현대시학작품상, 월탄문학상, 공초문학상, 대한민국 문화훈장 수훈, 불교문학상, 이상시문학상, 만해대상, 김삿갓문학상, 혜산 박두진 문학상 등 수상.-시집-시선집 : 『마른 수수깡의 平和』(모음사, 1965) 『有限의 빗장』(예술세계사, 1971) 『들판의 비인 집이로다』(교학사, 1977) 『매달려있음의 세상』(문학예술사, 1979) 『비어있음의 충만을 위하여』(민족문학사, 1983) 『연필로 쓰기』(영언문화사, 1984) 『뼈에 대하여』(정음사, 1986) 『따뜻한 상징』(나남, 1987)(문학선) 『옹이에 대하여』(문학사상사, 1989)(자선시집) 『별들의 바탕은 어둠이 마땅하다』(문학세계사, 1990) 『말씀의 춤을 위하여』(미래사, 1991)(선집) 『몸詩』(세계사, 1994) 『알詩』(세계사, 1997) 『도둑이 다녀가셨다』(세계사, 2000) 絅山詩書 『한국현대시 100인의 시』(현대시학, 2002. 10. 14) 『本色』(천년의 시작, 2004) 『껍질』(세계사, 2007) 『정진규 시선집』(책만드는집, 2007. 2. 1) 출간 『우리나라엔 풀밭이 많다』(시월, 2008) 『공기는 내 사랑』(책만드는집, 2009) 『律呂集ㆍ사물들의 큰언니』(책만드는집, 2011) 육필시집 『淸洌集』(지식을만드는지식, 2012) 한국대표명시선100 『밥을 멕이다』(시인생각, 2012) 『무작정』(詩로 여는 세상 2014) 『우주 한 분이 하얗게 걸리셨어요』(문예중앙 2015)-독일어 번역 시집 : 『말씀의 춤(Tanz der Worte)』(독일 프랑크푸르트 아벨라 사에서 출간, 100편 수록, 2005. 12.)-시론집 : 『한국현대시산고』(민족문화사, 1983), 이상화 평전 『마돈나 언젠들 안 갈 수 있으랴』(1981), 『질문과 과녁』(동학사, 2003), 『本色』(동학사, 2013), 향깃한 차가움(고려대학교 출판부,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