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5월 4일 (화) 촬영.
시대의 얼굴 셰익스피어에서 에드 시런까지 2부 (권력, 세상을 움직이는 힘)
"권력"을 그린다면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요? 초상화는 오랫동안 힘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아왔습니다.
그림을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림 속 인물의 권위를 느끼도록 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해왔습니다.
권력의 정점에 있던 왕족들의 초상같은 경우
주인공의 위엄을 강조하기 위한 특별한 자세, 소품, 상징물들을 활용했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자신의 공식적인 이미지를 철저하게 관리했던 인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그녀는 결혼하지 않은 여성인 동시에 한 나라의 군주였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에게 초상화는 자신의 권위를 강조하고 성별에 대한 편견에 맞서는 중요한 수단이었습니다.
시대가 변하면서 권력과 권위를 다루는 초상화 역시 달라졌습니다.
현대의 예술가들은 초상화가 권력을 보여주는 방식에 대해서 끊임없이 탐구하고 질문을 던집니다.
그 예로 20세기의 가장 존경받는 정치 지도자인 넬슨 만델라의 사진에서는
그가 가진 권력에 대한 암시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낮은 곳을 향한 그의 시선은 고요한 사색의 순간을 마주하는 느낌마저 줍니다.
션 헨리가 만든 월드와이드웹 발명자 팀 버너스 리의 조각은 또 어떤가요?
출근길에 마주친듯한 일상적이고 평범한 모습입니다.
마치 인터넷이 "평범한 사람들"에게 힘을 가져다준 것처럼 말이지요.
말랄라유사프자이의 도전적인 시선은 권력자 초상화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그녀의 인생 이야기는 젊은이들이 기존 권력에 어떻게 저항하고 어떻게 세상에 목소리를 전해야
세상을 변하게 할 수있는지 보여줍니다.
헨리 8세 (1491~1547)
영국의 절대 군주, 이미지 메이킹의 귀재 / 미상의 작가가 1597~1618경에 그림, 패널에 유채.
헨리 8세는 1509년 18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재위 기간 동안 여섯 번이나 결혼한 것으로도 잘 알려진
그의 치세는 나라 밖에서는 야심적 면모로, 나라 안에서는 무자비함으로 요약된다.
형의 아내였던 아라곤의 캐서린과 결혼했지만 후계를 이을 아들을 얻지 못했던 그는 첫 번째 결혼을 무효로 만들며
앤 블린을 왕비로 맞았다. 이 결혼은 잘 알려진 것처럼 영국이 로마 가토릭의 영향에서 벗어나 국왕을 수장으로
하는 성공회 국가로 가는 결과를 낳았다.
헨리 8세는 영국의 절대 군주로서 자신의 공적 이미지를 통제하고 유통하는 데에 뛰어난 능력을 보인 왕이었다.
화면을 꽉 채우는 위풍당당한 풍채와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그의 모습은 홀바인이 창안한 화풍을 따르고 있다.
헨리 8세의 사후에 그려진 이 그림은 원래 열여섯 명의 영국 군주 초상화 세트의 일부로 제작된 것이다.
정복왕 윌리엄으로부터 메리 1세의 초상화까지 포함된 것으로 보아
엘리자베스 1세 재위 기간에 여왕의 정당한 왕위계승권자로서 지위를 강조하기 위해서 제작된 것을 알 수 있다.
엘리자베스 1세 (1533~1603)
영국과 결혼한 여왕, 초상화로 보여주는 여왕의 권위, 니컬러스 힐리어드가 1575년경에 그린 것으로 추정, 유채.
헨리 8세와 그의 두 번째 왕비 앤 블린 사이에서 태어난 엘리자베스 1세는 25살의 나이로 왕위를 계승했다.
그녀의 치세는 유럽의 변방에 불과했던 영국을
훗날 세계를 호령하는 제국으로 나아가게 한 기반을 마련한 시대로 평가받는다.
당시에는 드물게 미혼의 여성 군주였던 그녀는 후계자를 얻을 수 없다는 정치적인 약점에도 불구하고
남성 배우자의 존재가 국내외적인 간섭의 빌미를 줄 수 있다는 점에서 결혼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자신의 권위를 유지하며 단독으로 통치했다.
엘리자베스 1세는 평생 "처녀 여왕"의 이미지를 고수하며
자신의 공적인 이미지를 철저하게 관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궁정화가였던 니컬러스 힐리어드가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이 그림은 여왕이 공식적으로
인정한 이미지 가운데 하나다. 그림은 여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다양한 장치로 가득하다.
흰색과 검은색이 섞인 옷은 순결함과 불변성을, 가슴에 착용한 불사조 모양의 팬던트는 재생과 처녀성을 상징한다.
손에 쥐고 있는 붉은 장미는 튜더 왕가의 상징물로 그녀가 왕조를 계승하고 지켜나갈 진정한 통치자임을 암시한다.
찰스 1세 (1600~1649)
권위를 내려놓은 왕의 모습. 헤릿 판혼트호르스트가 1628년에 그린 그림, 캔버스에 유채.
원래 찰스 1세는 왕위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병약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청년이 되어서는 뛰어난 역량을 가진
형과 비교 당하는 삶을 살았다. 다행히 프랑스 출신의 해리에타 마리아와의 결혼에서 여섯 명의 자녀를 얻으며
비교적 성공적인 결혼 생활을 누렸다. 그의 인생은 형 핸리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여 왕위에 오르게 되면서 극적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의회 해산과 중세, 종교 단일화가 불러온 사회적, 정치적 혼란으로 내전이 일어났고 의회파에게
패배하면서 1649년에 처형당하고 만다.
실물을 보고 그린 이 초상화는 찰스 1세의 일상적이며 사적인 모습을 담고 있다.
일반적으로 국왕의 초상화가 각종 권위와 왕권을 상징하는 장치로 가득한 것과 비교해 볼 때
이 작품이 풍기는 진지하고 학자적인 분위기는 아주 예외적이다. 찰스 1세의 고급스러운 의상과 이 그림의 화가가
당대 최고의 화가였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최고 권력자의 초상화로서의 면모를 찾아보기 힘든 그림이다.
이 그림은 열렬한 예술 수집가이자 후원자였던
찰스 1세가 대형 단체 초상화 제작을 위해서 헤릿 판호트호르스트를 초청했을 당시에 그린 것이다.
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 왕자 (1720~1788)
가질 수 없는 권력을 꿈꾼 자 / 루이 가브리엘 블랑세가 1738년에 그림. 캔버스에 유채.
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 왕자는 로마 태생으로 찰스 1세의 증손자이자 제임스 2세의 손자다.
그는 추방된 스튜어트 왕가의 후손으로 왕위 복권 운동의 중심에 있던 인물이었다.
그의 초상화는
영국과 유럽 대륙의 스튜어트 왕조 지지자, 일명 "재커바이트"를 결집하는 구심점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화려한 초상화는 프랑스 화가 루이 가브리엘 블랑셰가 로마에서 그린 작품으로,
왕실의복과 갑옷을 입은 17세 찰스왕자의 모습은 지지세력의 정치적 열망과 정체성, 군사적 의도가 투영된 것이다
1745년 왕위 복권을 꿈꾸며 스코틀랜드에 상륙한 찰스는 그곳 지역민으로 구성된 군대를 일으켰지만
정부군에 참패하고 만다. 간신히 프랑스로 탈출한 그는 1788년 망명지에서 생을 마감한다.
월리엄 윌버포스 (1759~1833) / 노예제 폐지에 헌신한 인생, 토머스 로렌스가 1828년에 그림, 캔버스에 유채.
윌리엄 윌버포스는 18세기에 활동한 보수당 출신의 정치가다.
성서에서 밝히는 예수의 가르침을 중요하게 여기는 복음주의 지도자 가운데 한 명이었으며 이상적인 원칙과 개인적
매력으로 명성이 높았다. 노예무역과 노예제 폐지를 위해서 일생을 바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1791년 의회에서 모든 노예 거래를 없앨 때까지 결코 멈추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이후 20년간 쉼없이 노력했다
1807년 마침내 그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노예무역 폐지 법안이 의회를 통과한다.
이후 그는 노예제의 전면 폐지를 위해 힘쓰다 1833년 노예제 폐지법이 의회를 통과하기 직전에 눈을 감았다.
이 그림은 윌버포스가 극심한 통증에 시달리며 건강 악화를 이유로 의원직에서 물러난 뒤에 그려졌다.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단 한차례만 모델을 섰으며 그나마도 채 완성을 못했다.
그림 속 윌버포스의 얼굴은 온화하지만 통증 때문인지 자세는 틀어져 있다.
그림을 그린 작가의 친구였던 존 하퍼드는
이 그림을 "중견 정치가의 지성과 사람의 마음을 얻는 상냥함"을 모두 포착해낸 것으로 평가했다.
프레더릭 버너비 (1842~1885) / 영국군 최강의 사나이, 제임스 자크 티소가 1870년에 그림, 패널에 유채.
프레더릭 버너비는 제3왕실기병대 소속의 장교로 언어 감각이 뛰어나고 여행과 모험을 즐겼던 인물이다.
거의 2미터에 달하는 장신이기도 했던 그는 영국군 최강의 남자로도 명성이 자자했으며
자신이 겪은 군사적인 모험을 책으로 써서 유명해졌다. 특히 오스만제국 편에서 참전한 러시아-튀르크 전쟁 당시의
여정을 담은 <말을 타고 지나간 소아시아 1877>는 그에게 작가로서 큰 성공을 가져다주었다.
이 초상화는 버너비의 절친한 친구였던 토머스 깁슨 볼스의 의뢰로 그린 것이다.
작품 속에서 버너비는 젊고 멋진 장교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기병대 복장을 입고 있지만 무심하게 손에 든 담배나
소파에 편안하게 기댄 모습에서 대영제국의 장교로서 자신감을 보여준다.
흔히 서있는 모습이나 말을 탄 모습으로 그려지던 기존의 군인 초상화는 다르게 격식을 벗어난 모습이지만
버너비의 뒤로 보이는 인도가 표시된 지도를 보면 당시 영국이 제국의 이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저항 세력을 잔인하게 억압하는 등 군이 수행했던 역할을 짐작할 수 있다.
제1대 밸프어 백작, 아서 밸푸어 (848~1930)
철학자의 면모를 지닌 정치가, 로런스 앨머 태디머가 1891년에 그림, 캔버스에 유채.
스코틀랜드 출신의 밸프어는 20세기 초 영국을 대표하는 정치가 중 한 명으로 1874년에 정계에 입문한 이래
1902년 총리직을 맡는 등 비교적 순탄한 정치 인생을 살았던 인물이다.
그는 원래 철학자가 되고자 했었는데 <철학적 회의에 대한 변론,1879>이라는 저서를 남긴 바 있다.
총리가 된지 3년 만에자유무역과 보호주의로 양분된 당을 규합하지 못하고 1905년 사임한다.
이스라엘 건국에 단초를 제공한 "밸푸어 선언"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 작품을 그린 로런스 앨머 태디머는 네덜란드 출생으로 세밀한 묘사가 돋보이는 고전주의 양식으로 엄청난
인기를 누렸던 화가다.
그는 공식적으로 초상화 의뢰를 잘 받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에 밸푸어를 그린 이 작품은 희귀한 가치를
가진다. 밸푸어는 영국을 대표하는 정치가 중의 한 명으로 누구보다 권력의 핵심에 있던 사람이었지만
이 그림에서는 조용히 생각에 잠긴 채 마치 철학자와도 같은 모습으로 등장한다.
마거릿 대처 (1925~2013) / 영국 최초의 여성 총리, 철의 여인, 노먼 파킨슨이 1981년에 촬영, 젤라틴 실버 프린트.
마거릿 대처는 최초의 여성 총리이자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정치가로서 그 업적에 대해서 극과 극의 오가는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1954년 변호사 자격증을 획득한 뒤 1959년 핀처리 지역구에서 하원의원으로 선출되면서 정치에 입문했다.
총리로서 두 번의 임기를 보냈으며 첫 번째 임기 때는 포클랜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두 번째 임기 때는 보건, 교육 등의 공공 분야에서 시장 논리를 도입해 규제를 완화하고
영국의 공공 부분 전반을 민영화하면서 큰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으나 그녀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이 사진은 총리관저에서 사용할 공식 초상화를 제작하기 위해서 촬영된 것으로 20세기를 대표하는 사진작가 중의
한 명인 노먼 파킨스의 작품이다.
대처가 입은 맞춤 정장은 작가가 제안한 것으로 질서와 효율성이라는 그녀의 공적 이미지를 연상시키는 차림이다.
화면 뒤쪽의 빛줄기가 대처의 얼굴을 가로지르며 부드러운 이미지로 매력을 더한다.
이날 촬영한 다른 사진이
공식 초상화로 최종 낙점되었던 것을 보면 그녀가 작업 결과를 마음에 들어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넬슨만델라 (1918~2013) / 화합과 용서의 힘, 질리언 에덜스타인이 1997년에 촬영, 젤라틴 실버 프린트.
넬슨 만델라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로 민주적 선거 방식을 통해 선출된 대통령이자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다.
1944년 이래로 아파르트헤이트, 즉 인종 분리 정책에 반대하는 투쟁을 계속해왔다.
1962년 8월 5일 체포되어 반 아파르트헤이트 운동에 관여했다는 죄목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1990년
석방되었다. 수감 기간 동안 만델라는 자유, 인권, 인종 평등을 상징하는 국제적 인물로 부상한다.
1993년 노벨평화상을 비롯해 수많은 국제적 명성의 상을 수상했다.
이 사진은 아파르트헤이트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범죄를 공개하고 보복 대신 화해를 유도하기 위해 설립된
"진실과 화해 위원회" 프로젝트의 일부로 촬영된 것이다.
사진작가 질리언 에덜스타인은 이 사진을 위해서 대통령 관저를 방문해서 단 10분 동안 촬영을 할 수 있었다.
살짝 고개를 숙인 만델라의 시선은
국가 원수로서 권위를 강조하기 보다는 내일을 향한 강렬한 성찰의 순간을 보여준다.
팀 버너스 리 (1955~ ) / 세상을 바꾼 힘, 월드와이드웹의 창시자, 션 헨리가 2015년에 제작, 청동에 채색.
팀 버너스 리는 월드 와이드 웹의 창시자로 현대 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 가운데 한 명이다.
옥스퍼드대학교 재학 당시 구형 TV와 프로세서를 납땜해 가며 컴퓨터를 제작하기도 했던 그는 이후 통신회사
생활을 거치며 월드 와이드 웹을 발명했다.
세상을 획기적으로 바꾸는
발명을 하고도 그 성과를 모두가 쓸 수 있도록 공유한 것으로도 현대 사회에 기여한 인물이다.
션 헨리는 평범한 모습을 한 인물 조각을 제작하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이 초상 조각 역시 소박한 옷차림을 한 일상의 모습을 선택함으로써
모델의 유명함이나 명성에 상관없이 작품의 대상이 "누구나"일 수 있다는 개념을 보여준다.
헨리는 이틀동안 버너스 리와 함께 생활하면서 집과 직장에서 그의 모습을 관찰한 결과로 이 조각을 만들었다.
노트북이 담긴 가죽 백팩을 맨 평범한 모습을 매우 현대적으로 묘사했지만,
이와는 대조적으로 청동을 사용하여 위대한 유산을 남긴 주인공에 어울리는 영원불변성을 전달하고 있다.
28 루이스 조플링 (1843~ 1933)
남자들의 세상에서 꿋꿋하게 일어선 여성의 힘, 존 에버렛 밀레이가 1879년에그림, 캔버스에 유채.
초상화가, 육자, 여성 참정권론자인 루이스 제인 조플링은 여성 화가는 아마추어에 지나지 않는다고 치부되던
당시 예술계의 관행을 바꾸기 위해서 무던히도 노력했던 인물이다. 1887년 여성도 남성과 동일한 조건에서
교육받을 것을 주장하며 여성 미술 학교를 설립했다.
1901년 영국왕립예술가협회에 입회한 최초의 여성 중 한 명으로 남자 회원과 나란히 협회에서 작품을 전시했다.
그러나 이러한 활약상에도 불구하고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으로 느끼는 한계에 좌절하기도 했다.
조플링 자신에 따르면 도전적이며 상당히 경직된 표정을 하고 있는
이 그림은 작가 멀레이의 화실에서 제작한 것으로 그녀의 남편을 위해서 의뢰한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초상화가 지녀야 할 모든 지식을 갖고" 포즈를 취했기에 단지 다섯 번의 짧은 작업 끝에 빨리
완성될 수 있었다고 말한 바 있다.
이작품은 말레이의 거침없는 화풍과 구도에 대한 뛰어난 감각을 잘 보여준다.
1880년에 대중에게 공개되었을 때 "탁월하다"라는 평가를 받은 작품이다.
29 말랄라 유사프자이 (1997~ )
세상을 바꾸는 부드러운 권력, 쉬린 네샤트가 2018년에 촬영, 젤라틴 실버 프린트에 아카이벌 잉크.
파키스탄 출신의 여성 교육 운동가 말랄라 유사프자이는 2009년 그녀의 고향이 탈레반에 점령됐을 당시 자신의
삶과 여성 교육 탄압에 대한 글을 써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다.
2012년 학교 통학 버스에서 탈레반 대원이 쏜 총에 머리를 맞고 큰 부상을 입었으나 기적적으로 회복해 아동과
여성 교육 운동의 상징적인 인물이 되었다. 2014년에 최연소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고 자신의 이름을 딴 말랄라
기금을 조성해 모든 소녀가 안전한 환경에서 무료로 양질의 초중등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데 힘쓰고 있다.
이 작품은 이란 출신 영화감독 쉬린 네샤트가 작업한 두 점의 초상화 중 하나다. 작가는 일련의 사진을 찍은 후
두 점을 선별해 그 위에 라맛 샤 사옐이 2011년 파슈토어로 쓴 시를 장식 서체로 새겨 넣었다.
사진 속의 말랄라는 도전적인 시선으로 정면을 응시하는데 이런 포즈는 전형적인 권력자 초상화의 특징이지만
말랄라의 인생은 그녀가 가진 내면의 힘이 어떻게 세상을 바꾸도록 이끌었는지 역설한다.
30 애나 윈터 (1949~ )
패션계의 살아 있는 권력,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주인공, 알렉스 카츠가 2009년에 그린 그림, 리넨에 유채
미국판 <보그>의 편집장 애나 윈터는 세계 패션계를 이끄는 살아 있는 권력이다.
1984년부터 3년간 영국판 <보그> 편집자로 일하기도 했으며 2013년에는 보그사의 모회사인 컨데나스트의 예술
감독이 됐다. 그녀의 강렬한 개성에 영감을 받은 로런 와이스버거는 소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2003>를 썼고
이는 다시 2006년 메릴 스트립 주연의 영화로도 만들어져 큰 성공을 거둔다.
2017년에 패션 및 저널리즘에 대한 공로로 남성의 기사 작위에 해당하는 "데임" 작위를 받았다.
알렉스 카츠는 현대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 중 한 명으로 90세를 넘긴 나이에도 매일 그림을 그리고
연습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추상미술이 유행하던 시기에도 자기만의 스타일을 고수하며 꾸준히 작업했던
그는 오늘날 자신만의 독특한 양식을 갖춘 거장으로 꼽힌다,
실물을 보고 그린 습작에 바탕을 둔 이 그림은 윈터가 처음으로 초상화의 모델이 된 작품이다.
카츠는 "애나를 그릴 때는 저절로 붓이 움직였어요. 바로 포착이 됐죠. 명령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예요.
스타일이 탁월하죠." 라고 당시를 회상한 바 있다.
31 비비언 웨스트우드 (1941~ ) / 자신감이 뿜어내는 당당한 힘, 마틴 파가 2012년에 촬영, 피그먼트 프린트.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영국의 유수한 패션 디자이너 중 한 명이다.
1970년대에는 파트너 맬컴 매클래런과 함께 런던 킹스로드에 "렛 잇 락,Let It Rock"이라는 의상실을 연다.
이후 이 매장은 영국 핑크족의 문화를 만드는 데 기여했다. 1990년과 1991년에 연이어 "올해의 디자이너"로 선정된
웨스트우드는 2004년 런던 빅토리아 앤 앨버트박물관에서 회고전을 개최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사진작가 마틴 파는 지난 40년간 영국 사회를 다룬 다큐멘터리 사진의 흐름을 바꾼 영향력 있는 인물이다.
그는 통찰력과 애정 어린 시선으로 현대 사회의 비정상성을 드러내는 작품을 주로 찍는다.
유명인사의 초상 사진을 찍을 때는 주인공을 부조화스러운 다양한 배경에 위치시키기도 한다.
화장실에서 포즈를 취한 웨스트우드의 이 초상 사진이 잘 보여주듯 종종 장난기와 유머를 작품에 불어 넣는다.
세련되지 않은 배경에도 불구하고 웨스트우드는 자신감을 뿜어내고 있으며
티셔츠에는 그녀가 환경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는 문구가 당당히 새겨져 있다.
첫댓글 시대의 얼굴 셰익스피어에서 에드 시런까지 2부 (권력, 세상을 움직이는 힘)
상세한 설명과 사진들 감사히 즐감합니다
현장에서 관람하더라도 이렇게 스터디하고가면
이해와 도움이 되겠지요
29 말랄라 유사프자이 (1997~ )
시선이 머뭅니다.
우린 말하곤하지요
칠복이님께선 불교방 보배이시라구요.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덕분입니다.
시대의 얼굴
셰익스피어에서 에드 시런까지 2부
(권력, 세상을 움직이는 힘)
거사님 덕분에
편안하게 즐감함다
고맙고 감사해요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성불하소서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