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어머니에 그 딸
배영순
집 모퉁이에 서서 언니들의 뒷모습이 멀리 논 가운데로 조그마한 점이되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다보고 있었다. 이럴 때면 언제나 왠지 모를 슬픔이 밀려오곤 했었다. 전주에서 학교에 다니는 언니들이 일요일에 집에 다녀가면 어머니 잔심부름을 하며, 어린 동생들을 돌보는 일은 열 살도 되지 않은 나의 몫이었다.
객지에서 고등학교에 다니는 외동딸이 오늘 집에 다녀갔다. 기숙사생활을 하는 학생들의 한 달에 한 번 있는 의무 귀가 날이었다. 광주에서 학생들을 태운 학교 버스가 서너 명의 전주학생들을 태우기 위해서 약속된 장소에서 제 시간에 기다리고 있었다. 가방을 버스 짐칸에 싣자 딸이 탄 버스는 떠났다. 우두커니 서서 버스가 사라질 때까지 바라다보고 있었다.
왜 하필 그때,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농가의 모퉁이에서 멀리 사라져가는 언니들의 뒷모습을 쓸쓸히 바라다보고 선 어린 내가 오버랩 되었는지 모르겠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져야하는 마음은 어렸을 때나 어른이 된 지금이나 다를 바 없이 쓸쓸하다. 곧 바로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한참을 멍하니 소파에 앉아있었다. 내 어머니도 언니들이 집에 다녀간 뒤 허전하여 일이 손에 잡히지 않으셨을까. 어머니께서는 집에 남겨진 더 어린 자식들이 있었고, 어머니의 손을 기다리고 있는 일이 지천에 깔려 있었기 때문에 그럴 겨를이 없으셨을 것 같다.
딸애한테서 문자가 왔다.
“여기 여산인데 교통체증이 장난이 아니야.” 한밤중이나 도착할 텐데 내일 피곤해서 어떻게 수업할까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한숨 푹 자라고 답장을 보냈다. ‘어디쯤일까’ ‘교통체증은 가셨을까’ 궁금했지만, 행여 자는 아이 깨울까 봐 전화도 걸지 않고, 문자도 보내지 않았다. 도착했을 시간에 전화해보니 아직 학교에 도착하지는 않았고 학교가 있는 시내에 들어섰다고 했다.
종일 아이들을 보내기 위해서 집에 있는 쌀이며 반찬이며, 푸성귀를 준비해주신 어머니께서는 아이들을 보낸 뒤 전화도 없던 시절에 궁금증을 어떻게 해소하셨을까. 지금이야 승용차로 1시간도 걸리지 않는 거리지만 당시엔 논 가운데 오두막집을 출발하여 전주 자취집까지 도착하는데 3시간 이상은 걸렸다. 매번 언니들은 꾸러미를 풀어보면서 어머니의 정성에 콧등이 찡해졌다고 했다. 훗날 나 또한 같은 경험을 했었다.
기숙사에 도착한 딸에게 푹 자고, 쌀이며 반찬대신, 세탁된 빨래며 1인 1체육 시간에 하는 골프를 위해 준비한 골프채와 골프 장갑, 또 몇 권의 책을 가방에서 꺼내 정리해 놓고 이번 주 학교생활도 잘하라는 문자를 남겼다.
내 어머니는 열악한 오지에서 자식들에게 좀 더 좋은 교육환경을 제공해주기 위해서 자식들을 떼어놓는 아픔을 견디셨다. 학교생활이며, 공부를 잘하는지는 그 다음 이야기였던 것 같다. 언니들 다음으로 나 또한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어 전주로 유학을 오게 되었지만, 어머니께서는 단 한 번도 내 학교성적에 대해 물으신 적이 없기 때문이다. 잘 하겠거니 믿고 싶으셨거나, 그것까지 챙길 겨를이 없으셨는지도 모르겠다. 그 뒤 지역 명문고에 입학한 뒤 좋지 않은 성적 때문에 잠시 방황할 때도 어머니와 상담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난 요즘 유행처럼 어린 외동딸을 내로라하는 특수목적고등학교에 진학시킨 뒤 같은 반 학부모 모임인 인터넷 카페에서 이런 저런 정보도 교환하고 연락하면서 걱정이 태산이다. 이렇게 똑똑한 엄마들이니 아이들 또한 무척 똑똑할 것이고, 경쟁이 치열한 이 학교에서 자칫 잘못하다가 자신감을 잃지 않을까, 힘들 때 친구나 다름없는 엄마 곁에서 위로 받으면서 생활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생각할 때가 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부모들은 자식들의 교육을 위하여 더 좋은 환경을 찾아 준다. 한국 엄마들의 교육열은 단연코 으뜸이라고 하지 않던가. 물론 이렇게 잘 받은 교육덕택에 나라가 잘 살게 되었지만, 내 어린 자식이 무한경쟁사회에서 힘들어 하는 모습은 마음을 아프게 한다. 나의 교육방식은 말없이 묵묵히 믿으면서 밀어주신 내 어머니의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겨우 한글을 해득한 어머니가 오늘날 나만큼 스스로 가르칠 수 있는 능력은 없었지만, 좋은 환경이 좋은 교육이라는 믿음을 가지셨던 것 같다. 나 또한 선택된 아이들의 집단에서 생활하면 더 좋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특수목적고등학교에 입학을 시켰다. 일찍이 경쟁사회에서 힘들어 하는 아이가 안쓰럽긴 하지만, 그 옛날 내 어머니께서 묵묵히 믿어준 덕에 다들 크게 어긋나지 않고 성장했듯이, 내 딸 또한 내가 믿고 지켜주면 잘 자라주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