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빛 마법사의 전설 [서막~02(이지만 정확히는 모름)]

1) 카페 닉네임 - 민서우 2) 다음 아이디 - roskfl-moon 3) 신청하시는 글의 제목 - 은빛 마법사의 전설 4) 글의 장르 - 환상 (SF라는 말이 있지만 제가 보이에는 연애도 섞여있으므로.'-') 5) 글에 대한 간단한 소개 - 서로에 대한 감정을 숨기고 억지로 바보스러운 척 하는 두 남녀의 애정 섞인 여행, 그리고 벌어지는 대 전쟁.   6) 신청 글 - <복사 금지 안 걸었습니다. 신청을 잊은 채로 "환상소설" 란에 연재 중이었네요, 10편 넘게. 말줄임표는 한글2007에서는 분명히 … 이건데 여기로 건너오니까 바닥으로 가라앉네요.> 은빛 마법사의 전설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o:p></o:p>   <o:p></o:p> 서막. 어둠이 짙게 깔린 길. 구름에 가려 달도 보이지 않는 밤. 깜깜한 하늘을 비추는 것은 은하수로 보이는 별들의 기나긴 강 뿐. 그 길을 지금, 두 남녀가 나란히 걷고 있다. 여자의 입이 먼저 열렸다. “미안해. 아버지의 뜻을 꺾을 수가 없어.” “예상 못 했던 일은 아냐. 너희, 대대로 뼈대 깊은 집안이니까. 가진 것 하나 없는 날 받아줄 리 만무하지 않겠어?” 같이 걷는 남자의 대답은 여자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 마치 준비했던 말 같아. 막힘이 없잖아.” “이런 일… 예상 못 했던 거 아니잖아.” “예상 못 했어. 예상 못 했다고. 아버지가 반대한다고 해서 날 놓아줄 거 아니잖아.” “…….” 여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남자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가 말이 없자 여자는 급히 남자 앞으로 섰다. 그녀의 움직임은 길게 늘어진 흑색 머리카락이 살짝 흩날리게 했다. 여자는 오른손을 왼쪽 가슴 위에 얹으며 표정을 크게 흐렸다. “그… 그럴 거야? 설마…. 아니지? 내 느낌이 틀릴 거라고 말할 거지? 다시 생각해 봐, 이건 아니잖아!” “…….” “다시 생각해봐! 제발!!” 여자는 거의 울부짖으며 남자의 양 팔을 잡고 흔들었다. 눈물은 흐르지 않았지만 그 직전처럼 보였다. 그 와중에 남자의 말문이 터졌다. “난 너희 아버지 설득할 자신 없어.” “…….” 그 말에 충격 먹었는지 다리의 힘이 풀린 듯, 여자는 이내 스르륵 주저앉았다. 침을 꿀꺽 삼킨 남자는 나지막이 한 마디를 흘리고 그 자리를 떠났다. “미안하다. 이렇게 떠나는 날, 용서하지 마라.” “…….” 뚜벅뚜벅 발소리를 남기며 저 멀리 사라지는 남자의 뒷모습을, 여자는 흐르는 눈물 속에 조금씩 새겼다. “그대에게 난…. 스쳐가는 한 사람일 뿐이었나요? 단지 인형일 뿐이었나요? 그랬나요. 난 아니었는데. 정말 사랑했는데. 그댄 그렇게 쉽나요? 벌써 감정 정리가 끝났나요? 안 들리나요오오오오!” “…….” 그 마지막 절규조차, 남자는 잔인하게도 무시라는 단어로 짓밟았다. 살짝 돌아보기는 했다. 그 뿐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남자는 짐을 싸서 나왔다. 동생에게 보내는 짧은 편지를 남기고서. 사랑한 사람과 함께 만든 기억과 추억, 오간 선물만은 집에 모두 남겨두고서 그날의 마지막 함선에 오른 남자는 다른 행성을 향해 떠났다. 그랬기에 다음 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쉬이 들을 수 없었다.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그 날로부터 14일 후. 연락을 받은 남자는 다시금 그 행성으로 가는 함선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그를 맞이한 사람은 여자의 아버지였기에, 그는 다짜고짜 물었다. “언제라고요?” 남자를 본 아버지는 그의 멱살을 잡으며 거칠게 외쳤다. “13일 전일세!! 그 날 무슨 일이 있었기에 사라가 그 지경이 되어서 돌아왔단 말인가!! 비에 다 맞고 술 취해서 돌아왔단 말일세!!” 13일 전이면 간접적으로 이별을 고했던 바로 그 날 밤이었다. 어두워질 대로 어두워진 표정의 남자가 말했다. “아버님의 반대를 도저히 누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헤어질 결심을 했었지요. 상처 받지 말라고 직접적으로 알리지 않았는데, 오히려 그게 더 상처가 됐나 봅니다. 죄송합니다, 제 책임이군요.” “…….” 표정이 확 굳어진 여자의 아버지는 힘없이 남자의 멱살을 놓았다. “자네 책임이 아닐세. 내 책임일세. 뼈대 있는 가문으로 시집보내겠다는 욕심 하나로 자식을 잃었어. 자식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 한 내 탓이지. 알았네. 이만 가도 되네. 근데 집에는 동생만 있는 모양이던데, 어찌 된 건가?” “그녀와의 기억을 묻기 위해서 옆 행성으로 이사 갔습니다. 아직 적응 중이지요.” “그랬구먼. 알았네. 아, 이거. …유서일세. 가족들 앞으로도 남겼고, 자네 앞으로도 남겼더군. 전해줘야 할 것 같아서.” “그렇군요. 이만 가보겠습니다.” 오래 있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아버지의 말이 모두 끝났다는 것을 알아차린 남자는 목례를 한 뒤 그곳을 벗어났다. 남자는 공항을 향해 걸으면서 편지를 읽었다. 울면서 썼는지 절반 이상이 번져 있고, 종이도 꽤나 푸석푸석했다. 하지만 이미 마음 정리가 되었는지, 신기하게 덤덤하기만 했다. 편지의 중후반까지는 그랬다. 하지만 마지막 부분에서, 남자는 결국 울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 편지를 보는 누구라도 눈물이 차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자그맣게 적어둔 그 한 마디가 남자의 마음을 강하게 흔들었다. 또 한 편으로는 그를 살아가게 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을 생각까지 했었으니까. 자신을 살리기 위해 죽음을 택한 그녀를 위해서라도,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서라도 그는 끝까지 살아남아야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타 항성계에 볼 일이 생겨서 함선을 타고 가던 도중에 추락사고가 발생했다. 희미해지는 기억 속에서 그녀의 마지막 눈물이 떠올랐다.   <o:p></o:p>   <o:p></o:p>   <o:p></o:p> 『이 편지는 제가 그대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 같아요. 그대와 함께 했던 시간, 정말 행복했어요. 사랑이 처음이 아니듯 이별이 마지막이 아니라는, 언젠가 그대가 제게 해줬던 말. 예상은 했지만 막상 이렇게 현실로 다가오니 가슴이 아파오네요. (중략) 그대와의 함께 한 시간을 이제, 땅에 묻으려 합니다. 그대는 사랑이 끝났을지는 몰라도, 전 아니에요. 그 사랑이 끊어짐을 막기 위해 죽음을 택하는 저를 용서하지 마세요. 부탁이 있어요. 남았던 제 시간의 몫까지 최선을 다해 살아가주세요. 그대가 죽음을 택할까 두려워, 대신 죽음을 택합니다. 그러니 그대만은 살아남아주세요. 그럼 이제. 안녕…』   <o:p></o:p> 01 푸른 하늘을 위로 둔 어느 숲길. 커다란 나무들이 양쪽으로 한 가득 채운 가운데 여러 마리의 새들도 보인다. 평화가 크게 흐르는 숲에 거성이 터진 건 직후다. “이 바보야!!” 거성에 놀란 작은 새들은 날개를 크게 저으며 하늘 위로 일제히 날아올랐다. “아윽-. 내가 왜 바보야.” “바보니까 바보라고 부르는 거지!! 바보, 바보, 바보!!” 연신 바보를 외치며, 여자는 가방으로 남자의 등을 세게 내리쳤다. 맞고 있는 남자가 아프다고 해도 소용이 없을 정도이다. 그만큼 여자의 화가 머리끝에 올라있는 상태. 뭐, 그럴 만도 하지만. “아퍼, 아퍼, 아퍼어어어!” “넌 좀 맞아야 해, 이 바보 녀석아!! 돈 내놓으라고 하는데 거기다 대고 보석주머니를 덜컥 내어주는 바보가 어디 있냐고!!” “그럼 어떻게 해, 너무 무서운데~.” “…….” 할 말이 없다. 어이하여 남자가 같은 남자들이 “돈 내놔!” 이랬다고 겁먹고 돈도 아닌 보석 주머니를 덜컥 내준단 말인가. 남자의 웅얼거림에 여자 역시 할 말을 잃은 듯 가방 폭력(?)을 그제야 멈췄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가방을 내린 여자는 양 손을 허리에 대며 입으로 쏘아대기 시작했다. “무서우면 날 깨웠어야 할 거 아냐. 넌 사내놈이 무슨 겁이 그렇게 많아? 그러면서도 몬스터들을 잡아서 족치는 걸 보면 정말 용타, 용해. 암튼 이제 어떻게 할 거야? 1페어도 없잖아!!” “미안해.” “그 한 마디로 끝날 문제가 아니라고, 지금!!” “미안해.” 남자 크리오네스가 손을 싹싹 빌자 여자 쥬리아는 한숨을 길게 쉬며 허리에 올렸던 손을 내렸다. “어쨌든 서두르자. 다음 도시 <디퓨젼>으로 가서 뭐라도 해보자.” “응. 미안해.” “익!” 크리오네스의 또 다시 이어진 사과에 쥬리아는 주먹을 들었다가 간신히 내린 뒤 소리치듯 말했다. 어느 정도 열이 가라앉은 것 같다. “가자!!” “응.” 쥬리아가 앞장서고 뒤를 크리오네스가 이었다. …뭔가 바뀌었는데? 어쨌든 두 남녀는 숲 사이에 난 길을 걸어서 조금씩 가까워지는 도시 디퓨젼을 향했다. 10대 후반의 두 남녀가 디퓨젼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4시간 후다. 도시에 도착해서 식당이 보이자마자 크리오네스가 홀로 중얼거렸다. “배고파.” “네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하지만 배고픈 걸.” 크리오네스는 쥬리아의 반박에 몸을 움츠리면서도 할 말은 다 했다. “맞는다?” “쳇. 정말로 배고프니까 그러지.” “하여간…!” 꼬르륵. 또 다시 쥬리아의 잔소리가 시작되려고 할 때였다. 크고 우렁찬 소리가 그녀의 뱃속에서 흘러나왔다. 시장기를 억지로 누르고 있던 터라 그녀의 얼굴 벌게짐은 더해졌다. 크리오네스는 씩 웃으며 그녀를 놀렸다. “히힛. 쥬리아도 배고프구나?” “…….” 고개를 푹 숙인 쥬리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1인분도 채 못 먹고 마는 그녀였기에 배가 고프다고 곁으로 표시를 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굳이 단계를 따지면 대마도사에 접어든 엄청난 실력자인 그녀, 쥬리아.E.그레이스. 몸에 남아도는 게 마력이기 때문에, 소량의 식사와 깊은 수면만으로도 마력 유지가 가능하다. 크리오네스는 쥬리아의 손목을 잡아끌며 또 다시 웃어보였다. “가자, 밥 먹으러!” “…어휴. 하는 수 없지. 사정을 설명하고 밥값을 치르는 수밖에.” 싱글벙글 웃는 얼굴의 크리오네스와 울먹이는 얼굴의 쥬리아. 두 남녀는 그렇게 대조적인 모습을 유지한 채 식당으로 들어갔다. 문 위에 달린 방울이 소리를 내자 계산대의 주인이 그들을 반겼다. “어서 오세요-. 에? 너희 둘이냐?” “네. 아저씨, 있잖아요.” 식당이 손님들로 붐빈다는 것을 알아차린 쥬리아는 주인의 귀에 대고 작게 소곤거렸다. 사정 설명을 마친 뒤 쥬리아는 주인에게서 떨어지며 물었다. “어떻게 안 될까요?” “그럼 식사를 하고 난 뒤에 넌 설거지를, 남자애는 주문받기를 하도록 해라.” “네, 고맙습니다. 야채볶음밥 4인분 주세요.” “4, 4인분? 너희는 두 명이잖아.” 쥬리아의 이어진 주문에 주인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시선으로는 두 남녀의 몸을 훑으며 물었다. 둘 다 그리 뚱뚱하지 않다. 그렇다고 너무 마른 것도 아니다. 짧은 청색 머리카락을 가진, 20세의 청년 크리오네스는 검사답게 몸 곳곳에 근육이 적당히 붙은 상태이다. 은색 머리카락을 허리까지 길게 내린 19세의 청년 쥬리아 역시 많이 먹는 체격은 아니다. 쥬리아가 옷으로 몸을 가려서 굴곡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식당 주인의 머리에 박힌 이미지를 깎아내리기는 했지만. “녀석이 좀 많이 먹어요.” 뒤에 선 크리오네스를 엄지로 가리키는 쥬리아의 억지웃음을 본 주인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왼쪽 허리에 두 자루의 검을 찬 것을 보니 좀 많이 먹을 법하기는 하다. 손님들이 일어난 빈 탁자가 나타나자 쥬리아와 크리오네스는 자리로 가서 앉았다. 잠시 후 나온 볶음밥으로 배를 채우고 있는데 주인의 말이 쥬리아의 귀에 들어왔다. “…올 때가 됐군.” “네? 누가요?” 반문과 함께 은발 머리의 아가씨가 자신을 보고 있자 주인이 도리어 놀랐다. “들었는가?” “네. 들리니까 묻지요.” “아직 어리다보니 청력이 엄청나구먼. 맞아. 올 때가 됐어.” 얘기하기 싫다는 듯 같은 말을 반복하는 주인의 행동에, 쥬리아는 미간을 확 좁힌 뒤 짜증을 내며 숟가락으로 탁자를 거칠게 쳤다. 행동을 같이 하기 시작한 크리오네스의 느긋함 때문에 성질이 확 나빠진 쥬리아다. “얘기하기 싫으면 됐어요.” 쥬리아의 행동이 거칠어졌다는 것을 본 크리오네스지만 눈치 없는 그가 알아차릴 리 없다. 솔직히 크리오네스는 주인이 뭐라고 말했는지, 쥬리아와 주인 사이에 대화가 오간 것도 모르고 있다. 숟가락으로 탁자를 내려친 이유도. (하지만 그러는 척하고 있을 뿐이다.) 그저 앞에 놓인 볶음밥에 신경이 온통 몰려 있을 따름이다. “…? 왜 화를 내지?” 홀로 중얼거리며 3인분 접시를 순식간에 비운 크리오네스는 쥬리아가 식사를 마치기를 기다리고 있다. 식당의 문이 열릴 때쯤 쥬리아가 숟가락을 탁자에 내려놓은 뒤, 절반 남은 접시를 크리오네스에게 내밀었다. “배부르다. 자.” “응. 오늘도 고마워~.” 접시를 받은 크리오네스는 여유 있게 볶음밥을 먹었다. 쥬리아는 막 들어온 금발머리 청년에게 시선을 꽂았다. “아저씨! 저 사람이에요?” “음? 쥬리아. 뭐가, 뭐가?” 뒤통수 너머로 들리는 크리오네스의 목소리에 쥬리아는 시선을 따로 돌리지 않고 말했다. “막 들어온 저 사람 말이야. 연한 금발머리를 가진.” “음? 아아.” 이내 탄성을 지른 크리오네스의 시선도 방금 들어온 금발머리의 사내에게 꽂혔다. 쥬리아는 곁눈질로 크리오네스의 입가를 확인했다. 아니나 다를까, 오늘도 어김없이 밥풀이 조금 묻어있다. “좀 닦아. 몇 살인데 아직도 묻히고 먹어?” “쳇! 잔소리 질리지도 않냐?” “안 하게 잘 해야 안 할 거 아냐!” 거칠게 대답하면서 휴지를 뽑아 크리오네스를 향해 거의 던지듯이 건넨 뒤, 쥬리아는 접시를 쌓고 위에 수저를 올려서 한 손으로 들고서 계산대로 잠깐 갔다. “아저씨! 저 사람 누구에요?” “매일 1시 30분에 맞춰서 점심을 먹으러 들리더구나. 꼭 점심만 여기서 먹는단다. 아침과 저녁은 어디서 먹는지 모르겠다.” “언제부터요?” “오늘이 사흘째구나. 너랑 저 남자애는 어디 가는 길이냐? 아니, 그것보다. 안 무겁냐?” 앞 뒤 다 자르고 묻는 주인의 시선은 쥬리아가 들고 있는 4층 접시에 가 있다. 질문을 받은 은발의 소녀는 보라는 듯 손을 뗐고 순간 주인의 입이 확 벌어졌다가, 4층 접시가 공중에 떠 있는 것을 본 후 다시 다물어졌다. 주인만 본 게 아니다. 식당 손님들도 다 봤다. 식당 안에 정적을 불러들인 게 자기라는 것 때문에 민망함에 얼굴이 붉어진 쥬리아가 꽥 소리를 질렀다. “뭘 이 정도로! 지금 서커스 구경해요? 디퓨젼에 마법사가 없는 것도 아니고!” 놀란 표정을 지우지 않은 주인이 말했다. “없는 건 아니지만 접시를 공중에 띄울 만한 마법사는 많지 않아. 아직 어린데 대단하구나? 너 누구냐?” “호홋! 처음 뵙겠습니다. 전 쥬리아.E.그레이스라고 합니다.” “쥬리아.E.그레이스? 그레이스, 그레이스… 아! 씬필름에 있는 마법사 가문 그레이스?” 주인이 알아보자, 기분이 좋아진 쥬리아는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하하! 마법을 보는 것만으로도 영광이라는 그레이스가의 꼬맹이가 바로 너였구나! 다섯 살 때 마법도서를 읽고 거기의 마법을 행했다는 바로 그 천재!” “오~!” 주인의 그 큰 목소리가 탄성으로 끝나자, 식당 안에 또 다른 커다란 탄성이 일어났다. 손님들의 탄성이 끝나자 주인은 다시금 대소를 터트렸다. “하하하하하! 이거, 이거. 엄청난 손님을 못 알아볼 뻔했군. 설거지 안 해도 되니 그냥 가게. 천재 아가씨를 만나게 된 기념으로 무료 제공을 하도록 하지.” “그럼 수고하세요~!” 주인의 말 끝나자마자 어디선가 인사 소리가 들리고, 누군가가 바람을 가르며 식당을 확 나갔다. 자신이 먹어치운 4인분에 달하는 볶음밥이 무료가 되었다는 것을 들은 크리오네스였다. 일행이 뿅 하고 사라진 것을 안 쥬리아는 소리를 꽥 질렀다. “리오!! 내가 못 살아, 하여간! 아, 접시.” 쥬리아는 마력으로 접시를 빈 탁자로 옮긴 뒤 가방을 챙겨 와서 인사를 하고 식당을 나갔다. 사람들로 북적대는 길로 나온 쥬리아는 이번에도 가방으로 크리오네스의 등을 두들겨 팼다(!). “바보야! 그렇게 나가는 법이 어디 있어!!” “히히~ 공짜로 먹었다! 쥬리아, 고마워.” “바보, 바보! 바보 리오!” “자꾸 그러지 마. 나 화낸다?” “너 같은 건 욕 먹어도 싸!!” 아무리 소심한 크리오네스라도 그 쯤 되면 열 안 받을 수가 없다. 눈썹을 꿈틀거린 크리오네스도 언성을 높였다. “자꾸 그럴래, 바보 쥬리아?” “어쭈! 누구 덕분에 공짜로 먹었는데!” “누구 덕분에 여기까지 왔는데! 가이아즈에 가고 싶다고 한 건 너란 말이야, 이 바보야!” “누구보고 바보래, 누구보고!” 또 다시 아웅다웅이 시작된 크리오네스와 쥬리아. 둘은 말다툼을 끊지 않고서 계속 걸었다. “음?” 짧은 청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리도록 내버려두며 열심히 걷던 크리오네스가 갑자기 서서 코를 킁킁거렸다. 크리오네스가 저 뒤에 서서 꼼짝도 안 한다는 것을, 혼자 조금 걷고 난 뒤에야 알아차린 쥬리아는 다시 돌아와서 물었다. “무슨 일이야?” “흠흠! 멧돼지의 냄새야. 시장 방향인데?” “정말? 얼른 가자!” 막 움직이려는데 정말 시장 방향에서 비명소리가 들렸다. “꺄악!! 멧돼지다!” “서둘러, 쥬리아!” 한 마디를 남긴 크리오네스는 이미 저 멀리 시장을 향해 사라진 상태이다. 쥬리아는 흘러내린 자신의 은색 머리카락을 끈으로 높이 올려 묶으며 크리오네스 뒤를 이었다. “핫! 타앗!” 멧돼지는 한 마리가 아니었다. 단체로 소풍이라도 나왔는지 큰 놈이 10마리에 작은 놈이 4마리나 되었다. 수적으로 열세지만 크리오네스는 당황하지 않고 오른쪽 허리에, 찬 두 자루의 검을 모두 뽑아 오른손의 검으로는 공격을 가하고 왼손의 검으로는 방어를 했다. 공격과 방어를 하면서 멧돼지들과의 거리를 어느 정도 벌린 크리오네스. 기술 하나를 쓰려는 듯 자세를 잡기 시작했다. 왼팔은 어깨 높이로 들어서 앞으로 접고, 오른팔은 겨드랑이를 붙여서 아래로 접고, 두 자루의 검은 자루 쪽이 짧은 십자 형태로 만들었다. 검 사이에는 한 뼘 정도의 거리가 있는 상태. 그리고 다리는 왼발이 뒤로 살짝 빠져 있다. 쉽게 말해 회전 직전의 자세인 것이다. 한참 달려오던 쥬리아는 주변의 바람이 확 가라앉았음을 느끼고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크리오네스가 무슨 기술을 쓰려는지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Sword dance, Fourteen Sonic blade.” 기술 명을 작게 읊은 크리오네스는 눈을 감고 회전을 시작했다. 쉬지 않고 계속 도는 그의 주변으로 가라앉았던 바람이 바닥에서 하늘을 향해 올라왔고, 검 주변에서 머물며 날카로움을 지니게 되었다. 그의 회전 속도는 끝으로 갈수록 점점 빨라졌고, 그에 따라 날카롭게 변한 바람은 멧돼지들을 공격했다. 큰 멧돼지들부터 작은 멧돼지들까지 모두 쓰러졌지만 생명의 줄이 아주 끊어지지는 않았다. 살생 기술이 아닌 기절 기술 중에 최고에 속하는 검무 기술을 맞았기 때문이다. 14번의 회전을 모두 끝낸 크리오네스는 처음의 그 자세 그대로 멈췄고, 숨을 길게 내뱉으며 눈을 떴다. “왜 죽이지 않은 거야? 새끼들이 있어서?” “어.” 뒤에서 들리는 쥬리아의 물음에 크리오네스는 검을 챙겨 넣으며 짧게 대답한 뒤 다시 말했다. “사람을 공격하지는 않았어. 단순히 소풍 온 것 같아. 그런데 장소를 잘못 골라서 사람이 많은 시장으로 온 거지. 리아, 멧돼지들 일어나면 집으로 돌아가게 해놓을 수 있어?” “응. 귀가를 걸어놓을게.” 쥬리아는 손을 모으고 마음으로 멧돼지들에게 말했다. 정식 주문까지 모두 외운 뒤 쥬리아는 눈을 뜨고 휙 돌아섰다. “가자. 어.” 하지만 그녀는 바로 발을 떼지는 못 했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웬 형제가 미간을 잔뜩 좁힌 채로 있었기 때문이다. “야, 너희 뭐야! 아까부터 보고 있었는데 별 짓을 다 하네? 우리가 불러서 내려온 멧돼지들이야, 왜 다시 돌려보내는데!! 깨워, 깨워!” 멧돼지들을 도시로 부른 게 이 20대 초반의 형제인 모양이다. 하지만 사태는 엉뚱하게 흐른다. 크리오네스는 형제를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어젯밤 자정께 돈, 정확히 보석을 훔친 놈들이 바로 이 놈들이다. “어? 댁들.” 크리오네스의 짧은 말과 뻗어진 그의 손길에 순간 ‘뜨끔’ 하는 20대 초반의 형제 두 사람. 크리오네스의 옆얼굴을 한참 바라보던 쥬리아가 귓속말로 물었다. “혹시 이 사람들이야? 어제 돈 훔쳤던.” “응.” 역시 작게 대답하는 크리오네스, 그와 동시에 쥬리아의 가방이 20대 초반의 남자 중 한 명의 얼굴에 확 날아들었다. 퍽! 가방에 가격 당한 그, 정확히 도둑 1은 뒤로 털썩 쓰러졌고, 크리오네스와 20대 초반의 또 다른 남자, 정확히 도둑 2는 눈을 크게 떴다. 두 사람 모두 쥬리아가 이렇게 난폭하게(?) 반응을 할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멍하니 있던 크리오네스는 자신의 파란 머리를 살짝 긁으며 중얼대듯 물었다. “나만 가방으로 맞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구나?” 하지만 그것은 실수였다. 직후 쥬리아의 도끼눈이 날아온 것이다. “너도 맞을래?” “아니요!” “이게 감히 잘 생긴 내 얼굴을~!!” 가방 맞고 뒤로 쓰러진 도둑 1은 정신 차린 듯 크게 소리치며 벌떡 일어났지만, 성질 안 좋기로 따지면 쥬리아도 만만찮다. “우리 돈 내놓기 전에는 큰 소리 못 쳐, 치지 마!” “어쭈! 이 꼬맹이가……!” 확 들었던 도둑 1의 오른손 주먹은 내려오지 못 했다. 자신의 손이 두뇌의 명령을 안 받고 있다는 것에 의아해진 도둑 1은 오른손을 움직여보지만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게 뭐야?” “당신의 오른손은 1분 동안 움직일 수 없어. 내가 묶어놨거든.” “뭐? 이 꼬맹이가 정말!” “…….” 쥬리아는 입을 꾹 다문 채 마음으로 주술을 외워서 도둑 1의 몸 전체를 묶었다. 몸이 완전히 굳어졌다는 것을 알아차린 도둑 1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도둑 2가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이게?” “전 크리오네스.D.콘프레스트라고 하고요, 이쪽은 쥬리아.E.그레이스에요. 저야 볼 거 없는 검사에 불과하지만 쥬리아는 달라요. 그레이스 가문, 못 들어보셨어요?” 두 남녀 중 정보에 능한 사람은 도둑 2이다. 한참 머리를 굴리던 도둑 2는 오른손 주먹으로 왼손 바닥을 툭 치며 말했다. “생각났다! 5살 때 마법도서의 마법을 할 정도의 엄청난 수제자! 그게 너였구나. 근데 마법사가 왜 지팡이를 안 갖고 다녀?” 도둑 2의 물음에 쥬리아는 양 눈썹을 치켜 올리며 대답했다. “필요 없으니까요. 언제부터인자 지팡이를 안 쓰고도 주문이나 주술을 외우는 게 가능해지더라고요.” 대답을 끝낸 그녀는 씨익 웃었다. 냉소에 가까운 그 미소는 도둑 1과 도둑 2의 오금을 저렸다. 파르르 떨던 도둑 2가 주머니에서 가죽주머니를 하나 꺼내서 앞에 둑 던졌다. “보석…. 여기 있어.” “네. 저도 주술 풀었어요.” 도둑 1은 쥬리아의 주술이 풀리자마자 부리나케 도망갔고, 도둑 2도 뒤따라 줄행랑을 쳤다. 뒤돌아서서 멧돼지들이 일어나서 집이 있는 샤일 산으로 오르는 것을 본 크리오네스와 쥬리아. 둘은 다시 돌아서서 고개를 갸웃댔다. “왜 왔던 거지, 결국?” “나도 몰라.” 크리오네스의 물음에 쥬리아는 가방을 들어 탈탈 털면서 어깨를 으쓱였다.   02   환전 때문에 여관으로 들어온 두 사람. 보석이었기 때문인지 그 도둑들은 하나도 쓰지 못 하고 그대로 갖고 있었다. 아무래도 환전소가 어딘지 못 찾았던 모양이다. 디퓨전은 환전소가 따로 없고 여관이나 식당, 도구점 등에서 환전을 해준다. 보석은 바닷가에서만 볼 수 있다는 투명한 비취, 개수는 총 3개. 한 개당 5만 페어, 다 환전하면 15만 페어지만 둘 다 그렇게 많이 넣고 다닐 정도는 못 되기 때문에, 일단 비취 하나만 페어로 바꿨다. 환전한 5만 페어는 쥬리아가 보관하기로 했다. 물론 비취가 들어있는 주머니도 쥬리아의 재킷 주머니 속으로 들어갔다. 비취를 갖고 싶어서 손을 뻗던 크리오네스는 쥬리아의 도끼눈을 보고, 울먹이면서 손을 거뒀다. 그리고 지금 여관 홀에서 앞으로의 일정을 짜는 중이다. 그들이 앉아 있는 탁자를 뒤덮은 커다란 한 장의 지도 맨 위에는 Ratia 라고 되어 있다. 지도에 표시되어 있는 강을 가리키며 크리오네스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할 거야, 여기 이 티난 강?” “배 타고 건너야지. 정기선이 있을 테니까. 참. 리오는 어떻게 할 거야? 가이아즈에서 성당 갔다가 씬필름으로 돌아갈 거야?” “아니. 난 다른 행성도 한 번 가볼까 해. 행성마다 다 다를 거 아냐. 검술도 마법도.” “…….” 크리오네스의 대답을 들은 쥬리아는 펜을 든 오른손으로 턱을 괴었다. 고민하는 눈초리다. 얼굴에도 고민 중이라고 써 붙인 그녀는 한창 생각 중이다. ‘이 녀석이 웬일이지? 다른 행성에도 간다고 그러고. 혼자서는 아무 것도 못 하는 바보 주제에. 나이는 나보다 한 살 많은 주제에. 이참에 나도 다른 곳의 마법이나 주술 등을 한 번 배워봐?’ 가이아즈 이후에도 여행을 계속 하기로 결심한 쥬리아는 턱을 괸 손을 빼면서 크리오네스에게 물었다. “혼자?” “응.” “뭐? 혼자? 다른 행성에 혼자 갔다가 무슨 봉변당하려고?” “…….” 쥬리아의 잔소리가 또 터졌다는 걸 알아차린 크리오네스는 질린다는 표정을 지으며, 눈 감고 귀 막고 벌떡 일어나 2층으로 올라갔다. “야! 어디 가! 내 말 아직 안 끝났어! 리오!!” 크리오네스는 쥬리아의 거성도 못 들은 척 여기며 묵묵히 미리 잡은 방으로 올라갔다. 방에 들어간 크리오네스는 눈가에 있던 약한 미소를 확 지우고 얼굴 전체에 차가움을 확 깔았다. “정말 시끄러워 죽겠네. 저 없으면 함선도 못 타는 줄 아나.” 창문에 커튼을 쳐서 조금 어둡게 한 뒤, 누우면서 이불 덮고 홀로 중얼거린 크리오네스의 지금 분위기는 1층 홀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베개를 베고 누운 그는 이내 잠에 빠졌다. 작게 코도 골았다. 약 30분 전에 있었던 멧돼지들을 기절시켰던 바로 그 기술 때문이다. 그렇게 보이지는 않지만 Sword Dance, Sonic blade는 상당히 힘든 고난이도에 속한다. 그냥 회전만 하는 게 아니고 바람을 일으켜 검속에서 날카로움을 갖고, 또 진공파가 날아가는 방향까지 회전하면서 정해야 한다. 더군다나 아까 같은 경우는 체격이 작은 새끼도 4마리나 있었기에 진공파의 위력을 떨어트리느라 더 힘들었다. Sword dance, Sonic blade 는 기절용 기술이지만 Power-up 버전의 Sword dance, Sonic blade And Earthquake는 대 파괴 기술, 이른바 살생기술이다. 이는 회전을 하지 않는다. 편히 잠든 크리오네스의 하얀 얼굴은 청색 눈썹과 분홍색 입술과 맞물려, 미녀 수준의 아름다움을 자아냈다. 얼굴과 성격은 여자요 신체는 남자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이다. 그에 비해 쥬리아는 완벽한 여장부다. 크리오네스가 잠들고 10초 후. “리오오오오!!” 복도와 계단을 울리는 거성에 이어 쿵쾅대는 소리까지 들려왔다. 발소리의 주인은 방금 크리오네스가 들어간 방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문을 열자마자 바로 보이는 방 안의 모습은 쥬리아의 좁혀진 미간을 스르륵 풀어버렸다. “뭐야. 아직 해도 안 떨어졌는데 벌써 자? 날 남겨두고? 너무 하네. 안 일어나냐!!” 말끝에 힘을 줘서 확 소리를 지르지만 소용없다. 크리오네스가 한 번 잠들면 강물에 빠져도 모를 녀석이라는 것은 올해 초부터 알고 지낸 그녀도 아주 잘 알고 있다. 한숨을 작게 내쉰 쥬리아는 잠시 돌아서듯… 하다가 방문을 닫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침대에 가까이 선 그녀는 여자 같은 크리오네스의 뽀얀 얼굴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녀는 아까 멧돼지들 잡으러 갈 때 묶었던 머리를 풀지 않은 채로, 허리에 가깝게 내려오는 자신의 은색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새삼 그가 예쁘장하다는 것을 느끼며. “훗. 하는 행동만 소심하고 단순한 게 아니고 자는 얼굴도 아기였어? 완전 천사라니까. 근데 정말 예쁘긴 예쁘다.” 본인은 깨닫지 못 하고 있지만 그녀 역시 엄청난 미인에 속한다. 커다란 마력의 힘에 색소를 잃어버려서 은색이 되어버린 자신의 머리색과 하얀 얼굴은 신비한 분위기를 내뿜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사고만 치고 다니는 파트너 크리오네스 때문에 항상 미간을 좁히고 있어서다. “정말로 여자로 느껴질 정도야. 하지만…. 리오 씨. 당신은 내게 있어서 올해 초부터 남자였어, 그거 모르지? 좀 당당해져 봐. 내가 당신처럼 초혼인 것도 아니고. 아,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암튼 잘 자.” 창문에 쳐진 커튼 때문에 이미 방안은 절반쯤 어두운 상태이다. 들어오던 순간부터 그것을 알아차린 쥬리아는 문을 닫고 자신의 방으로 건너갔다. 그랬기에 몰랐다. 방문이 닫히는 그 순간, 크리오네스의 눈이 스르륵 떠지는 것을.   <o:p></o:p> * * * * * *   <o:p></o:p> 상당히 높은 어느 산. 그 입구에 서 있는 어느 남자. 얼굴이 제대로 안 보이지만 누구인지 알 것 같다. 금색 머리카락. 연한 금색. 길이는 어깨에 닿지 않아서 꽤나 짧네. 어? 근데 저 금발…. 어딘가 눈에 익는다. 알 것 같아. 저 사람은…….   <o:p></o:p> * * * * * *   <o:p></o:p> “쥬리아. 쥬리아? 쥬리아.” 문득 누군가가 그녀를 깨우는 소리에, 쥬리아는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음. 으음~! 왜 깨워. 지금 몇 시야?” “아침이야, 얼른 일어나봐.” “왜~!” 되묻기는 했지만 쥬리아는 자신을 깨우는 사람이 뭘 원하는지를 이미 알고 있다. “배고파! 우리 아침 먹자. …아윽!” 꽁! 거의 칭얼대는 그, 크리오네스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은 쥬리아는 자신의 길게 내린 은색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다려. 나 머리 좀 감고. 뭐야, 준비 다 했네?” 그녀의 물음대로 크리오네스는 옷을 갈아입고, 등에는 가방도 매고 있다. 준비가 끝난 것이다. “응! 배고파서 깼어! 알고 보니 어제 저녁도 안 먹은 거 있지?” “하여간. 일단 난 좀 씻고.” “응! 홀에 가 있을게!” 고개를 강하게 끄덕인 크리오네스는 싱글싱글 웃으면서 계단을 내려갔다. 1층 홀로 내려온 그는 가이아즈에서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을 누군가를 떠올리며 더 싱글싱글 웃었다. ‘할머니는 건강하실까? 아직 정정하시겠지? 10년 전에 지팡이로 머리를 얻어맞던 기억이 아직 생생한데 말이야. 그 때가 엊그제 같네. 설마 올해 스물이나 됐는데 또 때리지는 않겠지? 안 그래도 요즘 바보인 척 하느라 쥬리아한테 늘 맞고 다니지만.’ 눈을 감고서 할머니와의 추억에 젖어있는 크리오네스였기에 쥬리아가 내려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혼자 웃고 있다는 것 때문인지 쥬리아는 또 미간을 살짝 좁혔다. “무슨 생각을 하기에 그렇게 싱글벙글 이셔?” “아! 왔구나? 가이아즈의 할머니 생각!” “며칠 후에 만날 거라서 그렇게 싱글벙글 이야?” “응. 히힛. 거의 10년 만에 가는 거라서 그런지 기분이 되게 묘해.” 연신 싱글거리는 크리오네스를 보며 쥬리아는 미간의 주름을 펼쳤다. “쿡! 아직 완전히 도착한 것도 아닌데 무슨. 자! 밥 먹으러 가자.” “응!” 크리오네스와 쥬리아는 식당에서 아침을 먹고 디퓨젼 북쪽 관문을 향해 걸었다. 관문을 그냥 지나려하는 그들을 본 병사가 갑자기 달려와서 둘을 세웠다. “두 자루의 검을 찬 청색 머리카락의 남자와 은색 머리카락의 여자…. 아, 두 사람이군. 샤일 산으로 가는 건가?” “네? 네. 근데 그건 왜요?” 쥬리아의 물음에 관문을 지키던 병사는 오른손 엄지로 산 입구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산 입구에 너희 둘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 얼른 가봐.” “산 입구에서 우리를요?” 동시에 되물은 크리오네스와 쥬리아는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던 중 쥬리아가 밤새 꾼 꿈을 떠올렸다. “아! 혹시 그 사람? 나, 꿈에서 산 입구에 누가 서 있는 걸 봤어. 금발머리의 남자였는데?” “뭐? 설마….” 관문의 병사는 피식 웃으며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너 같은 어린 애가 예지몽이라도 꾸는 거냐? 허허. …윽!” 퍽! 순간 쥬리아의 강한 킥이 병사의 정강이를 치고 지나갔다. “억.” “시끄러워요, 내년이면 스물이란 말이에요!!” “아…. 미, 미안하다. 그러니까 얼른 들어가 보렴. 제발 들어가라.” 매운 맛(?)을 보게 된 병사는 정강이를 손으로 감싸고서 둘에게 애원하듯 말했고, 쥬리아는 콧방귀를 크게 뀌며 말했다. “흥! 가자, 리오!” “아. 응, 응.” 손목을 붙들려서 끌려가던 크리오네스는 병사에게 눈빛으로 사죄한 뒤 산의 입구로 갔다. 바람이 제법 세졌다. 길게 내린 은색 머리카락이 앞으로 넘어와서 눈이 가려지자, 쥬리아는 짜증을 내며 머리카락을 높이 올려 묶었다. “멧돼지가 꽤 많을 텐데 우리끼리 괜찮을까?” “너 하나라도 충분히 넘을 수 있지 않아?” “…….” 쥬리아의 되물음을 들은 크리오네스는 자신의 청색 눈썹을 강하게 치켜세웠다가 내리며 다시 물었다. “쥬리아, 그거 자랑이야?” “아니.” 간단명료한 대답에 표정 확 굳어진 크리오네스는 오른손으로 허리에 있는 검 하나를 꽉 잡았다. 검이 올라오기 직전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쥬리아는 가방 끈을 잡고 뛰기 시작했고, 크리오네스 역시 검에서 손을 떼고 가방 끈을 잡고 뛰었다. “너 거기 서!! 거기 안 서?” “네가 서면 설게!” “잡히면 죽는다, 쥬리아!!” 뒤에서 들리는 험악한 말에 쥬리아는 장난스럽게 비명을 지르며 속도를 더 올렸다. “꺄악~! 무서워요~” “웃기고 앉았네!!” 장난 섞인 비명을 들은 크리오네스 역시 속도를 올렸다. 달리다 보니 먼저 샤일 산 입구에 도착한 쥬리아. 그녀는 달리던 스스로의 속도를 못 이기고 금발의 사내의 팔을 잡고 한 세 바퀴를 휙휙 돌았다. 몸의 회전에 따라 한데 묶여 길게 내린 은색 머리카락이 그녀의 머리를 빙빙 둘러쌌다가 천천히 풀려 내려왔다. “헥! 헥! 고맙습니다-!” “잡았다!” “헉!” 사내 덕분에 서게 된 쥬리아는 고개를 꾸벅 숙여서 인사를 건넸고, 그녀의 뒤에서 크리오네스가 가방을 양손으로 잡으며 확 덮쳐왔다. 길게 내린 쥬리아의 은색 머리카락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크리오네스는 자신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사내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아, 아저씨가 우리를 기다린다는 그 사람이에요?” “…!” 뜬금없는 아저씨라는 호칭에 사내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내가 그렇게 늙어 보이는가? 아저씨라는 호칭이 서슴없이 나올 정도로?” “에? 아저씨 아니에요? 실례지만 몇 살이신데요?” 쥬리아가 자신을 잡았던 손을 놓으며 묻자, 사내는 눈을 살짝 감았다가 뜨며 말했다. “예의가 없는 건가, 아니면 잊은 건가. 상대에게 통성명을 바랄 때는 자신이 먼저 해야지.” “아. 미안해요. 전 크리오네스.D.콘프레스트에요. 20살이고요, 성인식과 할머니를 뵙기 위해서 가이아즈에 가는 중이에요. 직업은 검사지요.” “쥬리아.E.그레이스라고 합니다. 19살이고요, 크리오네스의 할머니를 뵙고 상의할 게 있어서 가는 길이에요. 직업은 마법사지요.” 크리오네스의 성씨보다는 쥬리아의 성씨가 귀에 더 강하게 들어온 듯, 사내 역시 그레이스가문에 대해서만 얘기했다. “그레이스? 들어본 적이 있다. 그레이스가문은 라티아 뿐만이 아니고, 옆 행성 머큐리에서도 마법사가문으로 유명하지. 네가 그 천재마법사라는 소식을 듣고 한 번 만나보고 싶었다. 반갑다. 난 카스 데이브라고 한다. 25살밖에 안 됐으니까 아저씨라는 호칭 말고 오빠라고 불러주길 바란다.” 사내의 소개를 들은 크리오네스와 쥬리아는 멀뚱히 그를 올려보기만 했다. 한참 후에야 크리오네스가 물었다. “우리랑 나이 차도 얼마 없는데 표정이 왜 그렇게 굳어있어요? 좀 웃어 봐요!” “맞아요, 좀 웃어 봐요! 리오, 네가 보여줘.” “히히히히!” 쥬리아의 말에 크리오네스는 특유의 헤픈 웃음으로 답했다. 하지만 카스는 눈을 껌벅이기만 할뿐이다. 로봇과 마주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기에, 크리오네스의 웃음도 그리 길지는 않았다. 카스는 거의 실눈에 가까운 자신의 갈색 눈동자로 뒤에 있는 산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샤일 산은 꽤나 험하다. 가이아즈까지 동행하도록 하겠다.” “알아요. 뱀 나오는 것도 알아요. 살모사가 더 많지요. 모르는 거 아니에요.” “하지만 우리끼리 가도 되요. 10년 전에는 저 혼자 갔었어요.” 크리오네스의 이어지는 대답에 카스의 눈에 빛이 살짝 도는 듯 했다. “지금부터 10년 전이면 10살인데, 용감하군. 다시 보게 되었다. 하지만 그래도 험하다.” “왜 자꾸 쳐다봐요?” 말하는 중에도 카스의 시선은 쥬리아에게서 떨어지질 않았다. 그의 시선이 달갑지 않은 쥬리아는 뚱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지만 카스는 여전히 무표정이다. “이름이 쥬리아라고? 본명인가?” “당연히 본명이죠!” “그럼 나이도?” “…….” 퍽! 카스가 의심하는 것 같다- 라는 느낌을 받은 쥬리아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의 정강이에 킥을 날린 뒤 크리오네스와 함께 성큼성큼 산을 올랐다. 정강이를 부여잡고 주저앉은 카스는 홀로 진지하게 고민했다. “성격이 장난 아니네.” 홀로 중얼거린 그는 옆에 세워둔 자신의 대검을 등에 맨 뒤 서둘렀다. 한편 의기양양 먼저 올라가던 크리오네스와 쥬리아는 잠시 섰다.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멧돼지와 구렁이들 떼에게 주변을 포위당한 것이다. “일일이 맞받아친다면 더 큰일이겠는데?” 중얼거린 크리오네스는 아직 검도 뽑지 않았다. 지금 상태에서는 죽여도 문제다. 잔뜩 몰려서 한 200마리 가까이 되는데 크리오네스의 현재 검술로는 200마리를 한꺼번에 상대할 수 있는 게 없다. 그 때 쥬리아가 앞으로 나서면서 말했다. “뒤로 물러서.” “음? 아, 너 설마!” “응, 그 설마야.” 쥬리아는 양팔을 하늘로 크게 뻗은 상태에서 눈을 감고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전 우주에 떠도는 수많은 혹성들이여. 검푸른 허공을 헤매는 별의 영혼이여. 이 나의 부름을 받아 반하는 자를 처단해 주세요. Aurora spacial, Meteor shower!!” 쿠구구구구궁- 하늘이 크게 흔들리는 소리가 대지를 찢고 바람을 갈랐다. 이어 활활 불타는 혹성들이 크리오네스와 쥬리아 주변에 수없이 떨어졌다. “아악! Shield, Shield!!” 무자비로 떨어지는 불붙은 혹성을 바라보며 소리를 지르던 크리오네스는 저도 모르게 기력으로 자신과 쥬리아, 그리고 저 뒤에서 급히 나무 뒤에 숨어있던 카스까지 방어했다. 그러기를 1분. 혹성의 수는 급속도로 줄어들어 마침내 떨어지지 않았고, 마법으로 일어난 불바다도 이내 스르륵 꺼졌다. 하지만 멧돼지들과 구렁이들은 아주 맛 좋게 노릇노릇 익은 통구이가 되어버린 상태이다. 가까스로 메테오 샤워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난 카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크리오네스와 쥬리아를 뒤를 따랐다. 카스가 크리오네스, 쥬리아와 다시 만난 곳은 산의 정상이다. 이미 해가 떨어져서 내려가는 건 무리다. 그가 봤을 때의 두 남녀는 멧돼지를 나무에 꽂아 모닥불에 굽고 있었다. 우웅-! 뭔가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카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둘을 향해 계속 걸었고, 이어 쥬리아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야. 카스 씨야.” “운이 좋았어! 꼭대기에서 멧돼지와 뱀을 만나다니. 얼른 익었으면 좋겠다. 쥬리아, 이 녀석 먹어도 돼?” 크리오네스의 물음에 쥬리아는 뱀을 천천히 뜯어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무독사(無毒蛇)니까 먹어도 돼.” “어~!” 맑게 대답한 크리오네스는 옆에 준비해둔 나무 가지에 뱀의 몸통을 꿰뚫은 뒤, 장작을 모아 모닥불을 하나 더 피웠다. 꼬르륵. 어디선가 들리는 소리에 크리오네스와 쥬리아의 시선이 동시에 그곳으로 향했다. 꼬르륵. 카스의 뱃속에서 나는 소리라는 것을 파악한 크리오네스가 킥킥 웃은 뒤 옆을 가리키며 말했다. “역시. 카스 씨, 여기 앉으세요.” “오잉? 네가 웬일이야? 리오, 이 멧돼지 한 마리로는 모자라지 않아?” “한참 모자라지. 장작 모아오느라 못 봤구나? 뒤에 봐.” “…….” 그의 말에 고개를 뒤로 살짝 돌린 쥬리아는 할 말을 잃었다. 그곳에는 이미 생명이 끊어진 멧돼지 4마리가 작은 산이 되어 대기 중이었다. 순순히 앉으라고 하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다시 고개를 돌린 쥬리아가 말했다. “난 가슴살만 먹고 말게. 나머지는 알아서 해.” “어~!” 한참 후 크리오네스가 작은 가지로 멧돼지의 몸통을 쿡쿡 찌르자, 기름이 스르륵 흘러내렸다. 그는 가지를 빼며 씨익 웃었다. “오~ 좋다! 지금이 딱 좋을 때야. 자, 먹자고요-.” 모닥불을 잠시 끈 크리오네스는 뒷다리를 북 찢어서 하나는 카스에게 내밀고 하나는 자신이 먹고, 쥬리아는 가슴 쪽의 살을 뜯었다. 뒷다리 살을 한 입 뜯어먹으며 카스가 쥬리아에게 물었다. “아. 방금 뭔가 우웅- 하는 소리를 들었는데?” “결계에요. 제가 마력을 이용해서 결계를 쳐놨지요. 몬스터나 사람이 결계를 지나치면 그런 소리가 나요.” 멧돼지 뒷다리는 오른손에, 뱀 구이는 왼손에 든 크리오네스가 입안의 고깃살을 삼킨 뒤 덧붙였다. “그래서 제가 아까 물었었거든요. 쥬리아가 고개를 돌려서 카스 씨인 것을 보고 카스 씨라고 말한 거고요.” “그렇군.” 대답한 카스는 식사에 집중했다. 그리고 5분 후 쥬리아가 젓가락을 내렸다. “다 먹었어! 배불러.” 가슴살을 다 먹은 듯 쥬리아는 가방에서 물통을 꺼내서 물을 한 모금 마시면서 입을 헹궜다. 그녀가 뒤로 물러나서 앉는 것을 본 카스가 뼈를 옆에 두며 물었다. “쥬리아? 식사 끝났나?” “네. 전 원래 반인분이에요. 체력을 모아봐야 쓸 일이 없으니까요.” “아. 아까 마법사라고 했지, 참. 앗, 뜨거.” 크리오네스에게 받은 뒷다리 한 조각을 다 먹은 카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보지 않고 멧돼지가 있던 자리에 손을 뻗었다가 하마터면 데일 뻔 했다. “…….” 고개를 앞으로 돌린 카스는 말을 잃었다. 자신이 뒷다리 한 쪽 먹는 동안, 크리오네스는 남은 멧돼지를 모두 먹어치우고 멧돼지 한 마리를 불에 올린 것이다. 크리오네스의 엄청난 식욕에 카스는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엄청난데? 그렇게 먹고도 체중 조절이 되는 모양이지?” “움직이는 게 많으니까요. 특히 이검류 루이트(Ruit) 계열이 더 하지요.” “루이트?” 카스가 다시 묻자, 크리오네스는 멧돼지가 꿰어진 나무를 한 바퀴 돌리며 대답했다. “제가 가진 검술들 중 하나에요. 루이트는 가르는 검술에 붙인 것이지요.” “호-. 대단한데?” 카스는 다시금 입을 모았다. 다시 보니 크리오네스의 머리카락이 파란색이다. 디퓨젼에서 정보를 모으다가 실패한 <파란 마녀> 에 대한 게 다시금 떠올랐다. 두 사람이라면 뭔가를 알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카스의 머리를 스쳤다. “두 사람만 괜찮다면 앞으로 같이 여행했으면 싶은데. 알고 싶은 게 있어서.” 카스의 말에 크리오네스와 쥬리아는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둘만 다니는 것보다는 한 명이라도 많은 게 여러 면에서 나아지기 때문이다. 일행으로 합류하게 된 카스는 크리오네스와 함께 멧돼지를 뜯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