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본보에 회고록 연재 당시의 조기준 교수. 사진은 《조기준박사화갑기념논문집》(1977). ② 1953년 미군 주둔 당시 캠퍼스 사진.
[24] 조기준 교수 회고를 통해 본 고려대 교수들의 6·25 체험
조기준(1919~2001) 경제과 교수는 본보 1976년 11월호부터 8회에 걸쳐 모교 관련 회고록을 남겼다. 1947년 모교에 부임한 그는 특히 6·25전쟁 발발 직후 일들을 소상히 기록했다. 피난을 가지 못했던 그는 서울에 잔류하며 북한군 치하 90일을 겪었다. 조기준 교수의 기록은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 기간 이야기를 자세히 전해준다. 사학과 김성식(1908~1986) 교수와 법과 이희봉(1916~2001) 교수의 본보 회고록을 참조해 이 기록을 소개한다.
끝까지 교직원 챙긴 현상윤 총장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남침 소식을 들었지만 38선 부근에서 자주 일어났던 무력충돌로 생각했다. 평상시처럼 집에서 책을 읽으며 하루를 보냈다. 26일 월요일, 학교에 갔다. 교정에까지 포성이 들려와 불안한 분위기였지만 그날도 수업은 평상시와 다름없이 진행했다. 6월 27일. 오전 동국대 강의를 갔지만 안절부절하다 시내로 나왔다. 오후 1시경 고려대 교수 한 분을 만나 임시교수회가 소집됐다는 말을 들었다. 종로에서 전차를 타고 성동역에 내렸는데 피난민이 수없이 많았다. 성동천 둑길을 내려 정문 앞 학교 배추밭(학교 소유로 교원들에게 수확물을 나눠주곤 했다)에 이르렀을 때 교수 4~5명과 함께 오는 현상윤 총장을 만났다. 현 총장은 “왜 이제 오느냐”며 학교는 임시 휴교를 했고 봉급 3개월분을 선불하니 빨리 조흥은행에 가서 찾으라고 재촉했다. 이것이 조기준 교수가 본 현 총장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이후 현상윤 총장은 납북돼 작고했다. 봉급 3개월 선지급은 김성식 교수의 제안이었다. 그날 학교에 늦게 온 조 교수는 결국 돈을 찾지 못했고 피난도 가지 못했다. 뜬 눈으로 맞이한 6월 28일 아침, 탱크 소리가 요란했고 어느새 곳곳에 인공기가 걸렸다.
교책 연설에 박희성 교수 반박 6월 29일 학생 세 명이 ‘고려대학교자치위원회’의 편지를 전하며 교수회가 있으니 꼭 나오라고 했다. 학교에는 잔류 교수 대부분이 나왔다. 총장실로 갔더니 그해 3월까지 프랑스어를 담당했던 한경수 전 교수가 총장석에 앉아 있었다. 다음날 학교에 교수 전원 해임 공고가 붙었다. 그런데 집에 오니 ‘고려대학교 교책(校責) 최영철’ 이름으로 편지가 왔는데 교수로 임명하니 학교로 나오라는 것이었다. 7월 1일 학교에 가니 전날 나왔던 교수의 반 정도였다. 1차 숙청이었다. 총장석에는 교책 최영철(전 서울대 상과대 교수)이 앉고 그 옆에 북에서 파견한 윤두희가 있었다. 최영철은 “여러분은 공화국의 교수로 선발됐으니 영광으로 생각하라”며 “이 자리는 과거에는 독재자가 앉았던 곳이나 이제는 학교가 민주적으로 운영될 것”이라고 했다. 철학과 박희성 교수가 손을 들었다. “최 선생의 다른 말은 이제부터 하겠다는 것이니 두고볼 일이지만 그 총장 자리가 과거에 독재자가 앉았던 곳이란 말은 사실과 다르다. 현 총장은 학교를 운영함에 결코 독재자가 아니었다”라고 했다. 모두가 불안해하는 가운데 한참 묵묵부답이던 교책 최영철이 “현 총장이 그런 분이었다면 그 말은 취소하겠다”라고 했다. 조 교수는 사상적 공산주의자로서 최영철이 북한 정권에서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라는 공론이 있었다고 덧붙였다. 김성식 교수는 당시 교책 등이 고대 교수들을 평가한 서류를 훗날 직원 김도삼씨가 발견해 이상은 교수에게 전했는데 거기에 현상윤 총장을 ‘진보적 보수주의자’라고 적힌 것을 보았다고 했다. 김 교수와 이희봉 교수는 경제과 손응록 교수가 최영철과의 친분으로 그를 보좌했다고 한다.
공산당가 배우고 궐기대회 동원 잔류 교수들은 학교에 나가 반성문(자아비판)을 쓰고 공산당사‧공산당가‧러시아어를 배우고 훈화를 들었다. 평생 창가 한 번 불러본 적 없는 한문학자 김춘동 교수는 노래를 부를 때 박자와 톤이 틀린 기이한 소리로 웃지 못할 상황을 만들곤 했다. 7월 하순 좌파 학생들이 주도한 고대생 궐기대회가 본관 앞에서 열렸다. 의용군 지원 독려 행사였다. 조 교수는 “사랑하는 학생들이 적의 대열에 끌려가려는데 항변 한마디 할 수 없다”라고 안타까워했다. 이희봉 교수는 영문과 임학수 교수와 짝을 이뤄 학생 집을 방문해 의용군 지원을 독려해야 했는데 학생들이 집에 없어 다행이었다고 회고했다. 7월 30일 수송초등학교에 서울 시내 대학교수 7~800명이 모였다. 궐기대회를 하고 종합심사가 있었다. 이희봉 교수는 경기고등학교에서 궐기대회가 있었다고 기록했다. 8월 1일 조기준 교수를 포함해 절반 정도가 2차로 해임되었다. 감시와 동원에서 풀려났지만 동시에 보호도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김성식 교수는 수염을 기르고 밀짚모자를 쓰고 다녔고 이희봉 교수는 시골로 숨었다. 이 교수는 손응록 교수에게도 고향에 갈 것을 권했다고 한다. 조 교수는 이 시기 처신하기가 매우 어려웠고 식량부족에 ‘개떡’으로 연명했다고 한다.
9월 28일 서울 수복의 기쁨도 잠시, 잔류 시민 심사가 진행됐다. 대학에선 도강(渡江) 교수들이 잔류 교수를 심사해 곳곳에서 마찰이 일었다. 단, 고려대는 예외였다. 조기준 교수는 학교 임시관리책임자 유진오 선생을 비롯해 행정 담당자들이 잔류 교수를 심사한다는 인상은 전혀 주지 않았다고 했다. 자진 월북했거나 적극 부역한 교수 10여 명이 해임됐다. 북한군의 강제로 어쩔 수 없이 영어 방송을 했던 영문과 이인수 교수는 인촌 선생의 헌신적인 구명운동에도 불구하고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캠퍼스는 유엔군 주둔 중이었고 애기능 재실(齋室)에서 임시 사무를 봤다. 수업은 불가능했고 교수들은 직원을 도와 학적부와 학교 주변 정리를 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12월에 피난을 갔고 교수들은 이듬해 대구 원대동에서 개교한 고려대로 출강을 했다. 1982년에 정년퇴직한 조기준 교수는 본보 게재 글을 확장해 1998년 회고록 《나의 인생 학문의 역정》을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