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춘천전투는 춘천이라는 특정 지역에서 발생한 것이 아닙니다. 주전장은 춘천이였으나 제2의 전장으로 홍천도 있습니다 그러나 편의를 위해서 춘천전투라고 합니다만 정확한 명칭은 춘천-홍천전투가 맞습니다
6월 25일 국군 6사단 예하의 16포병대가 춘천점령을 목표로 진격하던 북한 2군단 2사단을 막아내는 동시에 사단의 재편을 위한 시간을 벌면서 2사단 예하 6연대를 궤멸시키며 2사단에게 엄청난 피해를 주고 있을 때 춘천의 후방에에 위치한 홍천에서 또한 국군장병들이 국토수호를 위해 혈전을 벌이고 있었다.
북한군은 춘천뿐만 아니라 홍천도 공격함으로써 일거에 6사단의 방어전선을 붕괴할 생각이였다.
1부에서 기술했듯이 16포병대대는 모조리 춘천에서 7연대의 화력지원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2연대는 화력지원 없이 적과 맞서 싸워야 하는 상황이였다. 그리고 8연대에게 임무교대를 받은지 얼마 안된 시점이므로 이곳 지리도 아직 숙지못한 상황이였다. 게다가 가장 최악은 춘천을 침공한 2사단에 비해 홍천을 침공한 7사단은 독립전차연대로 증강된 상태였다.
화력지원도 없고 적은 전차연대까지 보유한 상태였다. 이미 상황이 종결되었다고 봐도 무방하며 이들이 후퇴한다 하더라도 비난 할 수 없는 상황이였다. 하지만 이런 최악의 상황에서도 함병선 대령의 2연대는 후퇴하지 않고 오히려 전날에 비가 와서 소양강의 수위가 올라 적이 함부로 도하 할수 없다는 점을 이용해 소양강을 따라 방어선을 구축하고 적을 기다렸다.
6사단 2연대장 함병선 대령 (김일성과 동향출신)
이윽고 적이 나타나자 노진 나루터일대에서 경계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경계부대는 적의 공격을 2차례나 격멸하고 진지를 사수 하였다. 하지만 3차 공격에서 적의 집중적인 포병사격으로 피해가 속출하고 실탄마저 고갈되어 철수하므로서 방어진지가 돌파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연대의 장병들이 작전지역의 지형이 미숙하여 북괴군의 남침직후 진지점령을 지시하였으나 산간소로에서 길을 잃고 헤메이는등 진지점령이 지연되었다. 그러나 연대는 진지를 정비하고 혼란을 수습하였으나 적의 전차를 파괴할 묘안이 없었다.
따라서 연대장은 대전차 특공조를 편성하기에 이르렀고 5중대 1소대장(강승호 소위)가 20명의 특공대를 편성하여 어론리 북쪽 다무리 고개부근 고개에서 적전차에 뛰어올라 수류탄를 집어넣고 2.36인치 대전포로 공격하여 선두 전차 2대를 파괴 하였으며 후속하던 전차 8대는 후방으로 도주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에 고무된 연대장은 역습으로 북괴군을 격퇴하고 38선을 회복하기위하여 포병의 지원이 없는 상황하에서 역습을 실시하였으나 북괴군의 강력한 반격에 의하여 많은 피해를 입고 철정리 일대로 철수하여 말고개일대에 저지진지를 점령하게 되었다. 연대장은 말고개의 지형이 주는 잇점을 활용 적의 전차를 격멸하기로 하고 종심깊은 대전차 격멸지대를 운용하도록 방어준비를 하였다.
2연대의 최후 방어거점 하지만 이곳에서 대승을 거둔다. (아직은 아님ㅋ)
2연대가 최후라 생각하고 말고개 저지거점에서 최후를 맞이하기 위해 비장한 태도로 전투태세에 임하고 있을때 북한군 7사단에 변화가 생겼다. 바로 춘천에서 2사단이 예기치 못하게 고전하면서 첫날에 2사단의 40%가 16포병대대에 의해서 박살 나자 2군단의 지휘부에서 초조함을 못이기고 7사단의 주력을 춘천으로 돌려버린것이다. 26일 야간에 7사단의 주력은 춘천으로 이동했고 덕분에 2연대는 병력을 재편할 시간을 벌 수 있었고 말고개에서 대승을 위한 기반을 닦을 수 있었다.
다시 춘천방어로 돌아가보자
6월 25일 16포병대대의 분전으로 7연대은 재편에 성공했고 방어진지 점령에도 성공했다. 그 후 북한군의 압박으로 16포병대대는 우두동에서 빠르게 철수하여 춘천시내로 진지를 옮기고 연대 전술지휘부는 봉의산으로 지휘소를 옮겼다.
가운데 보이는 산이 봉의산이며 그 좌측으로는 춘천 시내이다.
그후 시간이 흐를수록 전투는 더욱 치열해졌다. 다행히 사단 예비로 있던 제19연대 민병관 연대장(중령)이 1, 2대대를 이끌고 제7연대 임부택 연대장(중령)를 지원하기 위해 6월 26일 05:00에 춘천에 도착했다.
B. 6월 26일
아침 일찍 옥산포 일대를 점령하고 춘천시로의 진격을 목전에 두고 있는 북한군에 대한 측방 기습 파쇄 공격 명령이 7연대 본부로부터 예하 1대대로 하달되어 1대대 중대장들은 대대장 김용배 소령이 있는 164 고지에 불려가서 옥산포에 주둔한 북한군을 공격 명령을 받았다.
6연대 1대대장 김용배 소령 (1921 ~ 1951)
1951년 7월 2일 7사단 5연대장으로 강원도 양구군 군량리 지구에서 중국군 5군단과 교전중 전사하였다.
사후에 준장으로 1계급 특진했으며, 태극무공훈장이 추서되었다.
7연대 전술지휘부에서 제 1대대에게 하달한 작전명령
164고지 북방 능선에 배치 되었던 1대대 주력은 은밀히 능선을 타고 남쪽으로 이동하여 옥산포 최단거리 능선에서 돌격을 준비했다. 오전 10 : 00 작전이 시작되었다. 옥산포 일대의 적을 향해 25일 눈부신 활약을 한 16포병대대의 포문이 불을 뿜었다. 30분간의 집중적인 포격이 행해졌다.
오전 10 : 30
"돌격 앞으로!!!"라는 함성과 함께 공격개시선을 넘은 1대대 1중대는 좌측의 3중대와 함께 제방이 터진 홍수와 같이 옥산포를 향해 고함과 사격을 하면서 질풍같이 질주해 나갔으며 1.5km를 달려 옥산포에 접근할 때쯤 16포병대대의 사격이 멈추며 7연대 예하 1대대에게 무대를 내주었다.
30분간의 정확한 포격을 피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북한군은 다음 상대인 1대대 병사들을 보자 아연실색 했으며 이내 도주하기 시작했다. 옥산포는 1대대에 의해 순식간에 점령되었으며 한계울과 역골로 도주하는 북한군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또한 옥산포내 각 가옥에 숨어있는 북한군을 수색 소탕하는 작업 또한 병행 되었다.
옥산포 점령과 동시에 추가 투입된 2중대는 1중대에게 북한군 잔여병력 소탕작전을 인계 받았으며 1중대는 도주하는 북한군을 추격하여 옥산포 북방 삼거리를 지나 지내리에서 내려오는 개울다리까지 진출하여 북쪽을 향한 방어진지를 편성했다.
북한군은 다급히 퇴각하는 과정에서 SU-76 자주포 5량을 옥산포에 버리고 도주하였다. 이중 1량은 북한군에 의해 파괴되었으며 도주하던 승무원 2명은 사살당했다. 적들이 유기한 자주포는 예인할 방법이 없어 그대로 나두었다가 철수하는 바람에 북한군에게 다시 회수 되었다.
심일 소령이 격파한 북한군 SU-76 자주포 전쟁초기 국군은 자주포를 전차라고 오인했다.
그만큼 전차에 대해 생소핬던 것이다.
그로부터 약 3시간후인 오후 14 : 00 북한군은 자주포 5량을 앞세우고 한계울 방향으로 공격을 개시했다. 국군과 북한군간의 교전은 약 40~50분 정도 전개되었으며 164고지의 1대대장 김용배 소령으로부터 옥산포에 있는 모든 중대는 옥산포를 이탈하여 원진지로 되돌아 오라는 명령을 하달 받았다.
김용배 소령은 옥산포의 적 부대 파쇄 공격이 성공했고 이미 효과를 거두었으므로 병력이 열세한 1대대가 제대로 구축된 진지가 없는 옥산포보다 호가 깊이 구축된 164고지 능선에서의 방어전투가 더 효과적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1중대를 위시한 모든 중대 원 방어진지에 되돌아 와서 중대 방어 재배치가 다시 끝난 시각은 16 : 30 이었다.
18 : 30
1대대장 김용배 소령은 1대대의 모든 중대장을 대대본부로 소집했다. 그곳에는 양구 방면에서 내평을 거쳐 춘천시로 진격해 내려오는 북한군을 내평에서 방어하고 있던 2대대 7중대장 이건옥 중위가 소대원 7~8명과 함께 있었다. 피로에 지친 모습이였던 그는 양구로부터 밀고 내려오는 북한군이 오늘 밤에 샘밭을 거쳐 우두동 여우 고개까지 올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1대대 일부 병력을 활용하여 한계울의 북한군을 야간에 기습 파쇄 공격하려던 김용배 소령의 계획에 차질을 빚게 했다. 그와 동시에 7연대 본부로부터 "양구로 부터 내려오는 북한군에 의해 후방이 차단 당할 위험이 있으므로 6월 26일 일몰과 동시에 우두동 남동에 있는 네다리 여울을 건너서 소양강 남쪽 석사동에 집결하라" 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6월 26일 저녁식사를 일찍 끝내고 1대대는 7연대장 임부택 중령의 명령에 따라 일몰과 동시에 점령확보하고 있던 방어진지를 포기하고 철수 작전을 개시했다.
1중대, 3중대, 2중대 순으로 우두동으로 이동하여 우두동 동쪽 남단에 있는 도섭가능한 네다리 여울을 건넜다. 여울의 수심은 사람의 허리까지 찼으며 도섭이 가능한 우두동 네다리 여울의 나루터 정면 넓이는 150~200m 쯤으로 보였다. 도섭을 끝낸후 춘천시 후평동을 거쳐 석사동의 야산으로 이동한 1대대는 이곳에서 밤을 보냈다.
첫댓글 "계속해서 검색하다보니 새로운 자료가 나와서"
- 이래서 각잡고 글쓰는 게 빡세다는 거임ㅋ
겁나 빡세네욬ㅋㅋ ㅠㅠ 아직 구글쪽은 검색안했는데 하면 또 나올것같아요;;
그냥 구글링하면 재미로 끝나지만 글 쓰려고 구글 검색하면 그냥 헬게이트임...
헬게이트 오픈하세요. 할 때는 빡시지만 나중에는 엄청난 추억이 될겁니다. ㅋㅋㅋㅋㅋ
잘 보았습니다~ 수고하셨어요 ^^
정말 1.5km 돌격은 거의 전설급이네요. 대단합니다. ㄷㄷㄷㄷ
좋은 글 감사합니다
좋은 글이네요. 지도 위에다 색칠까지 해주시니 이해가 더 빠릅니다.
언제나 잘 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1.5km 돌격은...음... 400m트랙을 전속력으로 4바퀴 도는 꼴이란 말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