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갑순 갑돌뎐
우리 마을에는 학교가 없었다. 우리마을의 인구가 이제 갖 태어난 칠구네 딸까지 모두 해서 17명 밖에 않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마을로 나가는 재를 넘어 아이들 걸음으로 두시간을 걸어서 덕천면에 있는 초등학교를 다녀야 했다. 먹고 살기가 힘들던때...그때 당시만 해도 시골에서 양철지붕에서 사는 집이 부자였다. 그런데 우리가 그 양철지붕에서 사는 지금 말하면 중산층이었다.
그러나 제일 걱정스러운것이 학교를 가고 올때마다 산을 넘어 가야 하는데 중턱넘어 소나무가 많은 숲에서는 으슥하고 어둡다. 그래서 무서워 숨이 턱에 찰때까지 뛰는것이다. 그 무서움증이란 참 이상했다. 천천이 걸을때보다 뛸때가 더 무서워진다. 뛰는 속도가 빠르면 빠를수록 뒤에 좇아 오는 귀신이 더 빨리 따라 오는것 같았다.
우리 마을에 희애라는 같은반 여자애가 있었다. 나는 그렇게 달음질쳐서라도 그곳을 통과 하지만 희애는 그렇지 못했다. 희애는 엄마가 대려다주었던 3학년때까지는 걱정 없이 학교를 다닐수 있었으나 4학년 이후에는 혼자 가야 했기 때문에 희애는 늘 우리집 앞에서 나를 기달여야만 했다.
둘이 손을 꼭 잡고 가건만 왜 그렇게 무서웠는지 그 고개를 넘어 학교에 도착하면 늘 등에 진땀이 축축 해진다. 우리는 무서움을 잊기 위하여 많은 이야기를 했다. 나는 그때 이야기를 만들어 내느라 소설가가 될지경이었다. 말도 않되는 이야기로 희애의 그 무서움증을 달래 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내가 이야기를 만들어 해주면“피~거짖말~”그러면서도 또 이야기 해달라고 졸랐다.
나는 어머니에게 무서워서 학교 못다니겠다고 때를 썼더니 언제부터인가 하루에 1전(錢)씩을 주셨다. 당시 1전에 커다란 왕사탕 두 개를 살수 있었는데 둘이 하나씩 입에 넣고 빨면서 학교에 가면 한결 수월했다.
그러나 올때가 문제다. 하교길에는 맨입으로 오는것이 몹시 힘이 들었다. 그래서 우리는 좋은 아이디어가 떠 올랐다.
우리는 왕사탕 하나는 반짝종이에 싸둔체 가방에 보관 했고 하나만 뜯어 내가 먼저 입에 넣고 열발을 걷고 열 한발자국때 희애의 입에 넘겨준다.
다시 열발후에는 내입으로 그렇게 집에 올때쯤 되면 거의 녹아 아주 작은 사탕이 누군가의 목으로 넘어간다. 우리는 이렇게 초등학교 남은 3년동안 사탕을 나눠먹었다 .
사실은 우리는 3년동안 타액을 나누는 찐한 “Hard Kiss"를 해 왔던 것이다. 우리는 3년동안 항상 어딜 가든지 손을 잡고 다녔고 동네 어른들은 “고녀석들 늬 둘은 시집,장가 가야겠네?” 하면서 놀리곤 했다. 하긴 그렇다 3년동안이나 찐한 Kiss를 해왔던 우리 사이가 둘이 결혼 한다는게 얼마나 당연한 일이겠는가?
언젠가는 집 부근에서 마지막 남은 사탕을 서로 입에서 넘겨주지 않으려고 입을 맞대고 서로 한참을 싸우던(?) 때가 있었다. 이런일은 자주 있었다. 사탕이 녹아 끈적 끈적한 입술을 마주 대고 서로 단맛을 빨았다. 누가 보면 마치 격렬한 애로신을 연출 하는것 같았을것이다.
마을에서도 우리는 늘 손을 잡고 다녔으며 마을 그 누구도 우리가 이렇게 손을 잡고 다니거나 개울을 업고 건널 때에도 이상하게 보는이가 없었다 모두 당연한것으로 여겼다.
우리는 아주 어렸을때부터 이렇게 지냈기 때문이었다. 어쩌다 혼자 다닐때면 어른들은 "희애는 어쩌구 너 혼자 다니니? "하고 묻곤 했다. 그래서 나는 크면 희애와 당연히 결혼하게 될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중학교에 들어갔다. 희애는 우리 남학교 근처 여학교로 갔고 언덕을 넘어서는 다른길로 가야 했다. 사탕도 사라졌다.
갈때는 고개 넘어 까지 같이 갈수가 있었으나 올때는 시간이 맞질않아 혼자 각각 와야 할때가 많았다. 그리고 학교나 마을 아이들이 둘이서 연애 한다고 놀려서 같이 있기가 점점 어려워졌는데 더 큰 문제는 희애와 나의 감정이 예전 같지 않아졌다는것이다. 이유는 무서웠던 그 고갯길이 더 이상 무섭질 않았다. 그래서 나의 지어낸 그 이야기가 더 이상 필요 없었고 사탕도 필요치 않았다
그리고 희애가 중학생이 되더니 예뻐지면서 부끄러움을 많이 타게 된 것이다. 언제가 내가 그 고갯을 넘어가면서 희애의 손을 잡을려고 했더니 뿌리치며 얼굴이 홍당무처럼 된 일이나. 내가 가지고 있던 사탕을 주면서 “니가 먼저 빨아~!”하면서 크게 양보 했는데 희애는 “몰라몰라!”하면서 뾰루뚱 해지더니 나를 밀치고 다라났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만나는 횟수가 줄었고 중3년쯤에서는 일주일에 한번쯤 교회에나 가서 만나는것이 고작이었다. 중3년 말쯤 되었을때 어느날 저녁 마을 개울 가에서 나는 희애를 만났다. “희애야~나 중학교 졸업하면 서울로 올라가야 해~”
희애는 흠짖 놀라는것 같았다. 그러나 희애는 짐짖 표정을 바꾸며“그래 잘가라” 하며 대수롭지 않은듯 말했다. 희애는 읍내 정읍여고에 가기로 했단다. 나는 희애를 떠난다는게 많이 우울했다.
어느날 희애를 불러냈다. 다시 그 개울가에 서서 희애에게 말했다. “난 너하고 해어지는것이 싫어~너도 부모님께 서울로 보내 달라고 해~그러면 우리는 늘 만날수 있잖아” 그러자 희애는 얼굴 표정이 굳어지면서 “근대 우리가 왜 서로 늘 만나야 하는데?” “.......”
나는 어이가 없어 그냥 개울물만 바라보았다. 무심한 개울은 자그마한 소리로 졸졸거리면서 자유로우면서도 일정한 소리로 어색한 분위기를 겨우 진정 시키고 있었다. 달이 떠 오른다.
나의 뇌리에는 지난 수년동안 희애와 함께 지내 왔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우리는 학교갈때가 아닌 동산에서 놀거나 건너마을 교회에 갈때에도 늘 손을 잡고 다녔으며 입에서 입으로 부끄러움없이 사탕과 타액을 나누었다.
희애가 다리 아프다고 응석을 부리면 나는 희애를 업고 고개를 넘기도 했다. 그런 희애가 변하고 있는 것이다. 희애의 하얀 세일러교복의 가슴부분이 도톰해지면서 희애는 확실히 달라졌다. 나는 마음이 조금 상했으나 “가시나들은 원래 그래”하며 돌아 설려는데“뒤에서 나지막한 소리가 들렸다. “바보자식” “????...” 뒤를 돌아다 보니 달을 바라보던 희애의 뺨에 두줄기 번쩍이는 빛이 보였다.
아~희애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나는 돌아서 희애의 손을 잡았다. 희애는 내 가슴에 기대어 흐느끼고 말았다. “잘가~ 우리는 가난해서 고등학교에 갈수 없을것 같아 그리고 나 집안 도와야 해~잘 다녀와 그리고 너 고등학교 졸업하고 군대 같다 오면 우리 꼭 결혼 하자~”
난 그날 희애를 붙들고 많이 울었다. 그 뒤 마을을 떠나기 한달전 이후로 우리는 거의 매일 어두어지기를 기달려개울가에 왔다. 이별의 시간을 해아리며 어린 연인들은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을 꼭 붙들려는듯 나의 옷섭을 붙들고 놓지 않았다. "어머~ 벌써 5일밖에 남지 않았네.."희애는 놓치면 영영이별을 할것처럼 내 옷섭을 단단히 붙잡고 희애는 내게 기대었다.
어린 아이들이 무슨 연애의 감정이 있으리오마는 나는 희애와 해어진다는것이 너무 슬펏다. "너 나 돌아 오면 꼭 결혼 해야 한다?" "응.." 우리는 손가락을 걸고 또 걸었다. 그리고 우리는 해여져야 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날 이후 만날수가 없었다. 내가 고등학교 2학년때 겨울 시골에서 소식을 들려 왔다. 희애가 결혼을 한다고.... 18세어린 소녀인 희애는 부모들이 정해준 옆동네 석우리 이장의 반편이 아들과 결혼을 한다는것이다. 이장의 아들은 27살이지만 바지에 대소변을 배설 하고 먹여주어야 먹는 지진아였다.
희애의 아버지는 시집 안간다고 울며불며 애걸하는 딸을 강제로 시집을 보낸 댓가로 동네천수답 서마지기를 얻었다고 한다. 나는 마지막 만나서 보았던 희애의 두줄기 그 눈물이 생각이 나 마음이 아팟다. “너 군대 갔다 오면 우리 결혼 하자“ 지금쯤 희애도 나처럼 얼굴에 주름이 생겼겠지 지금도 잘 살고 있을까?
너른들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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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소나기가 생각납니다 멋진 추억.. 감사
먹고 살기 바빠서, 도시에서 살아서 그런 추억거리 하나 없는 내가 가련해 보입니다.
가슴에 묻어둔 추억의 한장면 이네요 ㅎㅎ 나와 비슷 헌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