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819
4월 6일[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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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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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zxY2l6YPVig
[의정부교구 이정우 도미니코(사회복지법인 대건 카리타스 회장)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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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부활을 체험하고 싶습니까?>
죽음을 물리치고 영광스럽게 부활하신 예수님의 등장 앞에 제자들이 보여준 태도는 대체로 소극적인 동시에 회의적입니다.
우선 보이는 반응은 ‘설마’였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절대 그럴 수 없어’ 같은 불신이 바닥에 깔려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 앞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자신들의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한 최초 목격 증인들은 한결같이 자신들 앞에 나타나신 부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자신의 코앞에 발현하신 예수님을 정원지기로 착각했습니다. 엠마오를 향해 길을 걸어가던 두 제자는 자신들의 대화 사이로 끼어든 부활 예수님을 그저 같을 목적지를 향해 여행하던 나그네로 생각했습니다.
이는 십자가 죽음과 부활 이전의 예수님 모습과 그 이후의 모습이 꽤나 차이를 보이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제자들 역시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긴가민가하면서 고개를 갸우뚱했습니다. 할 수 없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내가 맞다.”고 먼저 알려주셔야 했을 정도였습니다.
그만큼 부활이란 것이 인류 역사 상 전무후무했던 대사건이었기에 인간적인 사고나 눈으로는 절대 납득하기 힘들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부활 사건 앞에 거의 모든 사람들, 오랜 세월 동고동락했던 열두 제자들까지도 의심의 눈초리를 거둘 수 없었습니다. 답답했던 예수님께서는 열한 제자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신 다음 죽어도 믿지 못하는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심하게 꾸짖으셨습니다.
사실 제자들은 그런 준엄한 꾸지람을 들어도 마땅했습니다. 왜냐하면 공생활 기간 동안 예수님께서는 세 번씩이나 당신이 몸소 겪으셔야 할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 사건에 대해 제자들에게 미리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예언이 정확하게 성취되었습니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당신의 부활 사건을 향한 불신과 의혹의 시선을 거두지 못하는 제자들이 너무나 한심하고 답답했던 예수님이셨기에 그토록 강하게 제자들의 불신을 질책하시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고 싶습니까?부활하신 예수님을 온 몸으로 체험하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좀 더 역점을 두고 노력을 기울일 부분이 있습니다.
인간적 시각, 감각적 시각, 세속적 시각을 버려야 합니다. 불신과 의혹을 안경을 벗어야 합니다. 순수하게 정화된 신앙의 눈, 맑고 깨끗한 마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픈 간절한 염원, 이를 통한 삶의 변화가 먼저 이루어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빈 무덤을 최초로 목격한 요한 사도와 베드로 사도는 무덤 입구를 막았던 돌의 이동, 빈 무덤 속에 남아있던 아마포와 얼굴 수건을 통해 부활 사건에 대한 믿음을 배양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옆으로 굴려진 돌, 아마포, 얼굴 수건은 예수님 부활을 알리는 표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진정으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스쳐지나가는 작은 몸짓 하나, 별 의미 없어 보이는 말 한마디에도 의미를 부여합니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했던 요한 사도와 베드로 사도였기에, 그분께서 남겨주신 작은 표시 하나만으로도 그분의 메시지를 읽어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진심으로 믿었던 제자들 위로 주님의 성령께서 힘차게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지니고 있었던 의혹과 불신을 강한 신뢰심과 투철한 믿음으로 변화시켜주셨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더 이상 이 세상의 권력가나 죽음조차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세상 끝까지 달려가서 주님의 말씀을 선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일상 안으로 다양한 주님 부활의 표지들이 펼쳐질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께서 우리의 일상 안으로 던져주시는 그 사랑의 표지들을 발견하고, 그 의미를 되새기고, 그래서 부활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미약한 신앙을 좀 더 키워나가는 노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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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c1S9Ch4-j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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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에도 안 믿으면 그냥 악하여서>
세상에는 우리를 속이려는 이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저도 여러 번 속은 적이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속이려고 하는 것을 알아서 주의하는데도 속습니다. 저희를 속이려 하는 이들의 특징을 네 가지로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우선 강한 이들입니다. 그 속임수가 들통나더라도 법망을 요리조리 피해 갈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놓고 속입니다. 한 번에 목숨을 거는 사기꾼은 없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권력이 있고 돈이 많은 이들이 사람을 잘 속입니다. 가난한 이들은 빵 하나 훔쳐도 큰 벌을 받지만, 힘 있는 이들은 그런 것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쉽게 다른 사람을 속일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세속적 이익을 노리는 사람들입니다. 대부분은 돈과 권력을 노리고 속입니다. 혹은 결혼하기 위해서도 속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익이 없이 속이는 예는 없습니다. 수산나를 죽이려던 두 노인은 자기들의 분노를 풀기 위해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넣으려 했습니다.
세 번째는 설득력 있는 말로 속입니다. 설득력은 세상 사람들이 대부분 이해할 수 있는 논리를 쓴다는 것입니다. 보이스 피싱과 같은 경우는 좀 황당하기는 합니다. 그래도 설득력이 없지는 않습니다. 자녀가 갑자기 사고가 날 수도 있고 부모님이 갑자기 돈이 필요하게 될 수도 있긴 합니다.
마지막 네 번째는 세 번째와 비슷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누가 들어도 타당한 말로 사기칩니다. 만약 보이스 피싱을 하는데, 자녀가 지금 달나라에 가서 오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면 누가 믿겠습니까? 황당한 주장으로 속는 사람이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나타나시어 그들을 꾸짖으십니다. “마침내, 열한 제자가 식탁에 앉아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 그리고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셨다. 되살아난 당신을 본 이들의 말을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활 증인들의 말을 믿지 않은 것 자체가 악한 마음 때문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우리가 죽어서 “당신이 나타나지 않아서 안 믿었어요!”라고 주장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부활에 대한 증언은 절대 누군가를 속일 수 있는 것과는 반대되는 내용들입니다.
첫 번째 이 주장을 한 이들은 법망을 피해 갈 수 있는 힘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대부분 당시 숫자에도 들지 않는 여인들이었고 지방으로 내려가는 제자들이었습니다. 사도단도 아니었습니다. 이들이 잘못 주장했다가는 언제 목이 날아가도 이상하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뒷일도 보지 않고 자기주장에 목숨을 거는 이들은 사기꾼일 수 없습니다.
두 번째 부활의 증인들이 그 주장을 해서 세상에서 얻는 이익이 있을까요? 사도들도 안 믿는데 무슨 이익을 볼까요? 이미 세상은 권력자들에 의해 부활에 대한 말을 하면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약한 이들이 그런 주장을 한다면 그건 속임수일 수 없습니다.
세 번째, 이들의 주장은 일관성도 없고 설득력도 없습니다. 그냥 보았다는 것입니다. 왜 그들에게 예수님이나 천사가 나타났는지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냥 주장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들은 그 주장을 이해시키기 위해 이성적 조작을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지막 네 번째가 가장 중요한데, 이들이 주장하는 것은 세상 창조 이래 가장 황당한 이야기입니다. 부처까지도 죽음에 대해 모른다고 하고 죽었는데, 죽었던 사람이 살아서 여기저기서 나타난다는 말은 우리 자녀가 달나라가 있다고 하는 말보다 당시에는 더 황당한 주장이었습니다. 가난한 이들이 이 황당한 주장을 하는 것은 그냥 죽겠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절대 부활에 대해 증언하는 이들이 있다면 그건 속임수일 가능성이 거의 없는데도, 그래도 안 믿는 것은 믿기 싫다고 보아야 합니다. 신이 인간이 될 수 없고 또 인간을 위해 목숨을 내어놓기까지 인간을 사랑할 수 없다는 내 생각이 틀리는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무언가의 확신을 얻으려고 할 때, “네가 하는 말에 네 목숨을 걸 수 있어?”라고 묻기도 합니다. 그런데 세상의 약자들이 세상 이익과 상관없이 비이성적인 가장 황당한 주장을 지속적으로 한다면 그것은 진실일 확률이 그 무엇보다 많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황당한 주장으로 이미 자기 목숨을 걸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믿지 않으면, 그건 그냥 믿기 싫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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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인내(忍耐)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서 인(忍)은 심장을 칼로 도려낸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심장을 칼로 도려낼 정도이니 그 아픔은 상상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내(耐)는 수염을 하나씩 뽑는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수염을 하나씩 뽑아내니 그 수치스러움은 상상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고난 받는 하느님의 종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나는 때리는 자들에게 등을 맡기며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턱을 내민다. 나는 욕설과 침 뱉음을 받지 않으려고 얼굴을 가리우지도 않는다.” 십자가의 길에서 예수님께서는 조롱과 채찍질을 받았습니다. 가시관을 썼고, 창에 찔리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고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겪으신 고통은 말로 다 형용할 수 없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아픔은 피할 수 없지만 고통은 선택할 수 있다." 마라톤을 완주하는 사람은 달리는 중에 심한 통증을 느끼게 됩니다. 그럼에도 그 통증을 참아내는 것은 완주 했을 때의 기쁨과 보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라며 극심한 통증을 호소했지만 그 또한 하느님의 뜻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없는 부활은 허구인 것입니다. 부활이 없는 십자가는 통증일 뿐입니다.
아이는 주사를 무서워합니다. 그 통증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른은 주사의 통증을 알지만 받아들입니다. 그래야 더 큰 통증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지금의 통증을 끝낼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삼국지에서 관우는 독화살을 맞은 팔의 독을 치료할 때 통증이 있었지만 태연하게 받아들이면서 바둑을 두었다고 합니다. 워낙 체력도 강했지만, 그것을 받아들여만 살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통증과 고통과는 차원이 다른 ‘고뇌’라는 것이 있습니다. 통증과 고통이 개인적인 것이라면 고뇌는 사회와 역사를 위한 선택입니다. 마리아는 아이를 가질 것이라는 천사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처음에는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천사의 이야기를 듣고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받아들였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어쩌면 죽을 수도 있는 ‘고뇌’에 찬 결단을 한 것입니다. 요셉은 이미 아이를 잉태한 마리아와 남모르게 파혼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천사의 말을 듣고 마리아를 아내로 맏아들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고뇌’에 찬 결단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의 고통을 피하고 싶었지만 하느님의 뜻이라면 기꺼이 지고 가겠다는 ‘고뇌’에 찬 결단을 하신 것입니다.
서울대교구는 사제 ‘인사적체’가 심각했습니다. 저의 선배 사제들은 보좌신부 4년 하면 본당신부가 되었습니다. 저는 보좌신부 8년을 하고 본당신부가 되었습니다. 그 8년이 그리 녹녹하지는 않았습니다. 우물 안에 있는 개구리는 우물이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하듯이, 직책에 따라 세상을 보는 관점도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후배 신부님들은 보좌신부로 20년 가까이 지내게 되었습니다. 최근에 교구는 ‘협력사제’ 제도를 도입하기로 했습니다. 본당사목을 한 다음에는 특수사목을 하도록 권고하고 있습니다. 이는 ‘인사적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입니다. 교구에서 이런 제도를 보완하기 이전에 몇몇 선배 사제들은 기꺼이 자리를 내어 놓기도 했습니다. 저는 교구청에서 5년 동안 있었습니다. 제가 원하기만 하면 본당신부가 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주교님을 만나서 본당신부는 하지 않겠다고 말하였습니다. 보좌신부님들이 본당신부가 될 수 있도록 저 나름대로 ‘고뇌’에 찬 결단을 하였습니다. 주교님께서는 저의 청을 기꺼이 받아 주셨고, 저는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지사장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나이도 있고,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어려움도 있었지만 제가 선택한 것이기에 기쁘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했던 제자들에게 통증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그들에게도 예수님께서 겪으셨던 고통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박해와 순교가 있었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고통을 받아들였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고뇌에 찬 결단을 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오늘 사도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여러분의 말을 듣는 것이 하느님 앞에 옳은 일인지 여러분 스스로 판단하십시오.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고통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의 역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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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16,9-15: 말을 듣고도 믿으려 하지 않았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처음으로 나타나셨다. 여인은 부활의 첫 번째 목격자가 되며 은총의 전달자가 된다. 그러나 그들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전에 미리 말씀하신 것을 들은 제자들이었지만,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 스승이 힘없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자 크게 실망하여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빵을 떼어 나누면서 예수님을 알아보고 체험한 일을 전하였는데도 그 말도 믿지도 않고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자기들의 눈으로 확인하기 전에는 믿지 않는 그런 완고함을 보인다.
수난 하시기 전, 그들과 함께 계실 때 당신은 고난을 겪으시고 돌아가신 다음 부활하시리라는 것을 다 알려 주셨지만, 그분의 죽음이라는 충격적인 사건은 그들의 기억을 송두리째 없애 버렸다. 십자가에 매달리신 그분을 보고 너무나 혼란스러운 나머지, 그분의 가르침도 잊어버리고 부활을 기대하지도 못했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신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음식을 먹을 때, 당신을 나타내 보이심으로써, 사도들이 스승님의 부활을 받아들이게 해 주셨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신앙이 없음을 책망하신다. 예수님과 그토록 가깝다고 하는 제자들까지도 아마 주님의 부활을 믿기가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예수께서 승천하시는 그 순간까지도 계속되고 있음을 복음사가는 전하고 있다.
이렇게 부활 사건은 하나의 지식이나 이해가 아니라 현실적인 삶이었기 때문에 제자들의 불신과 주님의 책망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제자들의 삶 속에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받아들인 부활의 신비를 이제 전하도록 선포 사명을 주님으로부터 받는다. 제자들의 신앙이 비록 약하였으나 주님께서는 이 제자들에게 당신 부활의 신비를 온 세상에 전하라고 사명을 주신다. 이제 제자들은 자신들의 삶 속에서 고통과 죽음을 불사하면서 이 부활의 신비를 전하기 시작했으며, 이것이 우리의 신앙의 핵심이 되었다.
신앙이 약한 제자들이었음에도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그 제자들을 교회의 초석이 되게 하시고 구원을 전하게 하셨다. 이제 그러면 우리들의 신앙은 어떠한가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어떠한 믿음을 가지고 어떻게 감사하면서 사는가를 살펴보아야 하겠다. 비록 나 자신의 신앙이 강하지는 못하지만, 주님께서는 제자들과 같이 나를 당신의 도구가 되기를 원하신다.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을 우리의 삶 속에서 발견하도록 노력하며 구원을 선포하는, 비록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주님의 말씀을 용감히 전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다. 부활의 신비를 알고 있는 우리는 이제 우리의 삶이 언제나 부활의 신비를 체험하고 그 기쁨을 증언하며 살아가는 기쁘고 복된 신앙인의 삶이 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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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미리내 성모성심 수녀회)]
부활 팔일 축제가 거의 마무리되어 가는 토요일 복음은 지금까지 봉독된 내용, 곧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어떻게 나타나셨는지를 묘사한 내용을 종합하고 있습니다. 세 가지 내용이 소개되는데, 모두 ‘나타나다–믿지 않다’라는 동사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처음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시지만 사람들은 이를 믿지 않습니다. 그 뒤 시골로 가던 두 제자에게 나타나시지만 다른 제자들은 믿지 않습니다. 마침내 열한 제자가 있는 곳에 예수님께서 몸소 나타나시어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십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라는 마지막 과제를 제자들에게 맡기십니다. 제자들의 불신을 넘어서는 예수님의 신뢰가 강조되어 있는 것이고 그분의 이러한 신뢰는 제자들을 담대하게 만들어 이 과제를 수행하게 합니다. 독서는 “베드로와 요한의 담대함을 보고 …… 놀라워하였다.”라고 증언합니다. 자신들을 믿어 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바탕으로 그들은 놀라운 담대함을 드러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믿어 주심을 알게 되었을 때 나오는 두려움 없는 당당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제자들만이 아니라 우리도 날마다 미사를 통하여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러나 신자인 우리가 과연 불신과 완고함에서 온전히 자유로운지 질문하여 봅니다. 부활은 구원이고, 그 구원은 그분의 사랑에 대한 믿음과 감사에서 시작합니다. 사랑을 확인하였을 때 비로소 우리는 완고한 마음에서 풀려날 수 있고, 그 믿음은 우리를 ‘파레시아’(담대함)로 인도합니다. 그 어떤 것도 장애가 되지 않는 견고하고 담대한 자유로 우리를 이끄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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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예수님께서는 주간 첫날 새벽에 부활하신 뒤,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처음으로 나타나셨다. 그는 예수님께서 일곱 마귀를 쫓아 주신 여자였다. 그 여자는 예수님과 함께 지냈던 이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곳으로 가서, 그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살아 계시며 그 여자에게 나타나셨다는 말을 듣고도 믿지 않았다. 그 뒤 그들 가운데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가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다른 모습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셨다. 그래서 그들이 돌아가 다른 제자들에게 알렸지만 제자들은 그들의 말도 믿지 않았다. 마침내 열한 제자가 식탁에 앉아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 그리고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셨다. 되살아난 당신을 본 이들의 말을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9-15)
1) 여기서 ‘믿지 않았다.’라는 말이 반복되고 있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은 사도들 자신들에게도 ‘정말로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는 것을 고백한 것인데, 이 고백은, “지금은 확신하고 있다.”라는 증언이기도 합니다. 11절의 ‘믿지 않았다.’라는 말을 9절의 “그는 예수님께서 일곱 마귀를 쫓아 주신 여자였다.”라는 말에 연결해서 생각하면, “막달레나는 일곱 마귀가 들렸던 여자였기 때문에, 사도들은 그 여자의 말을 믿지 않았다.”가 됩니다.
막달레나의 과거에 대한 편견과 선입관 때문에 그의 증언을 믿지 않은 것입니다. (믿지 않았다는 말을 10절의 ‘슬퍼하며 울고 있는’이라는 말에 연결해서 생각하면, “사도들의 슬픔이 너무 커서,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믿지 못했다.”가 됩니다.) 엠마오의 두 제자의 경우도 비슷한데, “사도들은, 그 두 사람이 열두 사도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들의 증언을 믿지 않았다.”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엠마오의 두 제자는 사도가 아닌 사람들이다.”라는 편견과 선입관이 작용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꾸짖으신 사도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도들의 편견과 선입관을 가리키는 말이 됩니다.
2) 만일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먼저 나타나셨다면, 그런 복잡한 일이 생기지 않았을 텐데, 왜 예수님께서는 열두 사도가 아닌 사람들에게 먼저 나타나셨을까? 분명한 이유는 모르지만, 사도들에게 뭔가 부족한 점이 있어서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 막달레나와 엠마오의 두 제자에게는 뭔가 사도들보다 뛰어난 점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사도들은 이제, ‘보지 않고도 믿어야 하는’(요한 20,29) 세상 사람들에게, 즉 예수님을 직접 볼 기회가 없었던 사람들에게 복음 선포 활동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선 먼저 사도들을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들로 훈련하셨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먼저 ‘보지 않고도 믿는’ 신앙인이 되어 있어야, 다른 사람들을 신앙인으로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어떻든 사도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게 된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한테 혼났기 때문에 억지로 믿은 것은 결코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자신들보다 먼저 만난 사람들의 증언을 믿지 못했던 사도들의 경험은, 나중에 선교활동을 할 때 큰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신앙의 증언’은 무조건 믿으라고 윽박지르는 일이 아닙니다. 증언을 듣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생각할 줄도 알아야 하고, 자신의 ‘증언의 신뢰도’를 높이는 방법도 생각해야 합니다. “나는 믿는다. 그러니 너도 믿어라.” 같은 일방적인 태도로는 사람들을 신앙인으로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증언의 신뢰도’를 높이는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그것은 바로 ‘삶’입니다. 삶 전체가 변화된 사람만이 복음을 선포할 자격이 있습니다.
4)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라는 말씀은, 사도들에게 ‘복음 선포 사명’을 주신, 즉 사도들을 선교사로 임명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그 사명을 주신 것은, 그들이 여러 가지 어려움들을 완전히 극복하고, 분명하고 확실하게 믿음을 갖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을 선교사로 임명하신 것이 아닙니다.>
‘온 세상’은 글자 그대로 ‘온 세상’입니다. 복음 선포 대상에서 제외되는 지역은 없습니다. 여기서 ‘모든 사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이라고 표현되어 있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모든 피조물’이라는 말은, 동물들과 식물들을 포함해서 자연계 전체, 세상 전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인간들만의 구세주가 아니라 ‘모든 피조물’의 구세주이신 분입니다. <만일에 ‘하느님 나라’에, 구원받은 ‘사람들만’ 있고 동식물은 전혀 없다면, 그곳이 과연 ‘하느님 나라’일까? 하느님 나라는 분명히 사람들과 온갖 동물들과 온갖 식물들과 온갖 자연물들이 함께 어우러져 완전하게 아름답고 모두가 행복한 나라일 것으로 생각합니다. (생전에 정말로 사랑하고 아꼈던 ‘반려 동물들’도 그곳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을까?)
바오로 사도는 로마서에서, “피조물도 멸망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를 얻을 것입니다.”(로마 8,21)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연보호와 생태계 보전을 위한 노력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희망하는 신앙인으로서 당연히 실천해야 하는 ‘신앙인의 본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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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서울대교구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님]
부활 팔일 축제의 마지막 날입니다. 물론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광과 믿는 이들의 기쁨은 주님께서 약속하신 성령 강림의 순간까지 계속 이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죽음을 이기고 죄에 물든 우리가 주님 부활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게 된 기쁨을 우리 가운데 아직도 누군가가 느끼지 못하고 있다면, 오늘 복음을 반드시 읽고 묵상해야만 합니다.
다시 말해서 “불신과 완고한 마음”으로, 주님 부활을 증언하는 이들이 기뻐하며 환호하는 ‘알렐루야.’를 받아들이지 못한 자신을 허물어야 합니다.
부활 팔일 축제 동안 우리가 읽고 묵상한 복음 가운데 오늘 처음으로 마르코 복음사가가 전하는 주님 부활 이야기를 접하게 됩니다. 간결하고 단순한 보도 속에 주님 부활 이야기의 핵심만을 전하는 마르코지만, 그가 진심으로 우리에게 강조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예수님을 진심으로 따르고자 하는 이들이, 부활하시어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싶다면 그분의 실천을 계속 이어가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오늘 독서의 베드로와 요한처럼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예고하시면서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 됨을 밝히셨던 예수님의 말씀은, 부활 팔일 축제 이후에도 그 기쁨을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코 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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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용민 사도요한 신부님]
예수님의 부활은 많은 이들에게 혼란을 일으켰습니다. 제자들의 담대한 복음 선포를 믿고 싶지 않았던 유다 지도자들과 원로들과 율법 학자들조차도 당혹감에 빠집니다.
제자들이 사람들에게 말씀을 선포하고 기적을 일으키는 모습을 보면서, 이들이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임을 알아차리고” 더 놀랍니다. 이미 표징을 통해 사람들의 신뢰를 얻은 제자들을 막을 방법이 없으니,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키려고 으름장을 놓을 뿐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더욱 담대하게 말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여러분의 말을 듣는 것이 하느님 앞에 옳은 일인지 여러분 스스로 판단하십시오.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진실을 몸으로 체험한 이들, 올바른 진리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지닌 사람들은, 거짓이나 협박, 왜곡된 정보에 쉽게 뜻을 굽히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성령의 인도를 받고 있는 제자들은, 이미 하느님의 진리 자체이신 예수님을 마음에 담고 있기에, 유다의 지도자들의 협박에 굴하지 않습니다.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잠가 놓고 있던 그들의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 그리고 식탁에 모여 있던 열한 제자들은, 모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저마다 지녔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의 벽을 깨는 예수님의 말씀에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났습니다.
믿음은 보이는 것을 넘어 보이지 않는 것을 향한 새로운 감각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세상 속에 살지만, 세상의 수많은 표징들 속에 숨어 있는 하느님의 뜻과 섭리를 읽어 낼 수 있는 영적 감각이 필요합니다.
부활은 내 눈과 귀를 덮고 있는 세속의 감각을 잠시 멈추고,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향하는 영적 감수성을 되찾을 때 체험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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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16,15)
오늘 복음은 부활 사화의 요약본처럼 느껴집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처음으로(16,9~11참조) 나타나셨으며, 그 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16,12~13참조) 나타나셨습니다. 그런데 반복해서 부활 소식을 전해 들은 제자들의 반응은 한 마디로 “말을 듣고도 믿지 않았다.”(16,11.13) 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 열한 제자가 식탁에 앉아 있을 때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되살아난 당신을 본 이들의 말까지 믿지 않은”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습니다.(16,14) 이는 우리 역시도 성경을 통해서 그리고 강론이나 교리 등을 통해 부활을 가르치는 이들의 말을 믿지 못한 우리에게 향한 질책이기도 합니다. 그들처럼 우리 역시도 자신이 보는 것과 알고 있는 것만이 전부이며 전체라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바로 부활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열린 마음이 없다는 증좌證左입니다. 이는 또한 우리 역시도 불신과 완고한 마음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불신과 완고한 마음이야말로 부활을 체험하지 못하게 가로막는 ‘무덤을 가로막았던 돌’과 같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 무거운 돌을 굴러 낼 수 있는 해답은 바로 ‘성령강림’임을 우리는 곧 깨닫게 될 것입니다. 짧은 내용 중에 무려 믿지 않았다는 표현이 3번이나 반복됩니다. 믿지 않은 제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실망이 잘 드러납니다. 물론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을 내치고 똑똑하고 잘난 사람들로 교체할 수 있었지만, 그들은 더욱 신뢰하고 용기와 활력을 불어넣어 줍니다. 왜냐하면 구원의 기쁜 소식은 사실 세상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시는” (마태11,25)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아버지의 깊은 뜻을 꿰뚫어 보신 예수님께서는 비록 그들의 믿음이 부족하더라도 그들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남아 있다, (마태 17,20참조) 고 확신하셨습니다. 훗날 성령을 받을 제자들에게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16,15) 하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이 주님의 명령에 따라 사도들은 유다 지도자들과 원로들 그리고 율법 학자들의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엄중히 경고”(사4,17)를 받지만, 무식하고 평범한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여러분의 말을 듣는 것이 하느님 앞에 옳은 일인지 여러분 스스로 판단하십시오.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사4,19~20) 하고 고백합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변화이며 부활을 체험한 복음 선포자의 확고한 신앙고백입니까?
본디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사4,13)들이었던 베드로와 요한의 놀라운 변화를 유다 지도자들 역시 알아차릴 만큼 변화된 베드로와 요한 사도들의 담대한 모습을 보고 놀라워합니다. 왜냐하면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들이 진리를 깨닫게 되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용감하고 투철하게 증언하게 됩니다. 그런 그들의 놀라운 변화를 알고 그들의 엄청난 선포는 듣는 사람들을 감동하게 할 뿐만 아니라 놀라운 변화를 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사도들의 진중한 말과 그 삶의 변화로부터 솟구쳐 나오는 능력을 그들 또한 “그것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사4,16) 하고 고백할 만큼 위협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통제할 수가 없다고 판단했기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경고만 합니다.” 그런데 사도들은 오히려 그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 보다 여러분의 말을 듣는 것이 하느님 앞에 옳은 일인지 여러분 스스로 판단하십시오.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사4,19.20) 하고 복음을 선포합니다. 그들은 ‘혹 떼려다 혹을 붙이는 꼴이 되었으니’ 얼마나 쪽팔렸을까 상상하니 고소합니다. “나는 죽지 않으리라, 살아남으리라, 주님이 하신 일을 선포하리라.”(시118,14)
오늘 우리가 접하는 독서와 복음을 묵상하면서 이런 생각이 듭니다. 지난 삶을 되돌아보면서 여러분은 사람은 변할 수 있다, 아니면 변할 수 없다는 것 중 어느 쪽입니까? 그리고 만일 변할 수 있다면 그 요인은 무엇이라 생각합니까? 물론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 경험을 통해서 저는 변할 수 있다고 보며, 그 변화의 원동력은 바로 극심한 육체적 혹은 정신적 고통, 사람이나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되면 변화는 가능합니다. 성경의 인물들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변화되고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들 모두는 한결같이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함으로써 존재 이유를 깨닫게 되었고, 참된 자신을 되찾게 해주신 하느님을 자신들의 존재와 삶을 통해 이를 증명해 주신 분들입니다. 부활 체험한 사도들은 바로 사람은 변한다, 는 사실을 우리에게 입증해 보여 주고 있으며, 이를 통해 우리의 변화 가능성을 열어 둡니다. 변화할 때,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할 수 있을 것입니다.(16,15참조) “부활하신 주님 당신 구원의 기쁜 소식을 담대하게 선포할 수 있도록 저희와 함께하여 주시고, 아직 온전히 부활을 체험하지 못한 저희의 닫힌 마음을 열어 주시고 성령을 저희에게 내려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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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미국 역사상 유일한 4선 대통령이 있습니다. 바로 프랭클린 루스벨트입니다. 그를 오랫동안 지켜본 한 사람이 루스벨트 대통령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이류의 지능과 일류의 기질을 가진 사람이다.”
뛰어난 지능이 네 번이나 대통령을 하도록 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를 대통령으로 만든 것은 그의 ‘기질’이라는 것입니다. 즉,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정신이었습니다. 뛰어난 운동 능력으로 훌륭한 성적을 냈지만 자기 통제를 통해 타락의 길로 떨어지는 운동선수 이야기를 종종 듣게 됩니다. 재능이 뛰어나도 자기를 통제하지 못하는 기질로는 비참한 결과를 맞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 역시 훌륭한 재능이 없음을 인정합니다. 문제는 저 자신을 통제하는 기질도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고 따르면서 기질의 변화를 조금씩 가져올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유혹이나 충동 그리고 본능에 탐닉하는 순간에 주님을 떠올리며 다시 제자리를 찾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 자리가 가장 행복한 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돈과 명예를 얻어야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요? 사실 돈과 명예에 목적을 두면 채우면 채울수록 부족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께 집중하게 되면, 돈과 명예에 목적을 두기보다 더 중요한 가치를 따를 수 있게 됩니다. 주님을 통해 자기 기질의 향상을 가져오고, 기질의 변화를 통해 세상 것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바라봅니다. 그들의 능력은 어떻습니까? 성격이나 환경은 또 어떻습니까? 앞서 이야기했던 기질도 형편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듣고도 믿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들으면, 예수님과 함께했을 때 들었던 수난과 죽음 예고를 떠올릴 수도 있을 것 같은데도 믿지 않습니다.
이렇게 부족함이 많은 제자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포기할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이렇게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제자들을 포기하기보다는, 그들에게도 나타나셔서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부족한 제자이지만, 그들을 통해서도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부족하지만 주님과 함께했을 때 자기 자신을 뛰어넘는 일을 할 수 있음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우리도 너무나 부족하고 나약합니다. 스스로 이를 인정한다면 주님과 함께할 수 있는 길을 끊임없이 따라야 할 것입니다. 그 부족한 제자들이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성공적으로 거둔 것처럼, 우리 역시 부족함 안에서 하느님의 위대한 일을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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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께서 내게 그러하시듯>
마르코 16,9-15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시다, 두 제자에게 나타나시다,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사명을 부여하시다)
예수님께서는 주간 첫날 새벽에 부활하신 뒤,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처음으로 나타나셨다. 그는 예수님께서 일곱 마귀를 쫓아 주신 여자였다. 그 여자는 예수님과 함께 지냈던 이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곳으로 가서, 그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살아 계시며 그 여자에게 나타나셨다는 말을 듣고도 믿지 않았다.
그 뒤 그들 가운데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가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다른 모습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셨다. 그래서 그들이 돌아가 다른 제자들에게 알렸지만 제자들은 그들의 말도 믿지 않았다.
마침내, 열한 제자가 식탁에 앉아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 그리고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셨다. 되살아난 당신을 본 이들의 말을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당신께서 내게 그러하시듯>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셨다.”(요한 21,14)
나를 믿으시는
당신이 계시어
당신을 믿는
내가 있사오니
나의 믿음이
흔들릴 때에
당신의 믿음처럼
굳건하게 하소서
나를 바라시는
당신이 계시어
당신을 바라는
내가 있사오니
나의 바람이
사그라들 때에
당신의 바람처럼
피어나게 하소서
나를 사랑하시는
당신이 계시어
당신을 사랑하는
내가 있사오니
나의 사랑이
식어갈 때에
당신의 사랑처럼
타오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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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믿는 이들의 사명>
우리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소중합니다. 다양한 사람이지만 그들을 인정해 주고 공감해 주며 위로해 준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참으로 행복한 일입니다. 그리고 한 사람을 기억하고 그로부터 주어진 기쁨을 간직할 수 있다는 것은 큰 보람입니다. 그러므로 일상 안에서 행복과 보람을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하는 정성이 꼭 필요합니다. 지금, 이 순간 나와 만남을 이루는 이의 행복과 구원을 위해 희생할 수 있는 은총을 누렸으면 좋겠습니다. 사랑을 받는 것도 행복이지만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면 더 큰 기쁨입니다.
‘금맥보다 중요한 것이 인맥이다.’라는 말도 합니다. 한 개인과의 관계를 얼마나 큰 정성과 사랑을 가지고 맺어야 하는가를 말해줍니다. 관계의 형성이 곧 복음의 선포입니다. 한 사람을 주님 안에 감사할 수 있도록 눈뜨게 한다면 그를 통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될지는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을 전할 수 있는 계기를 얻게 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주님을 전하려면 먼저 내 안이 주님으로 충만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사명에 충실히 수행함으로써 믿음은 더 확고해집니다. 신앙은 반드시 행동을 수반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선포하는 방법은 다양하고 일상 안에서 표현되는 사랑이야말로 주님을 만나는 감동을 줍니다. 어떤 기회를 특별히 만들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매 순간을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최선을 다하면 그것이 큰 사랑이요, 복음의 선포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의 마음이 굳어져 있었던 까닭입니다. 자기 것으로 가득 차 있으면 다른 어떤 것도 들어갈 수 없는 법입니다. “담기는 것은 담는 그릇의 모양에 따라 달라진다.”는 옛말이 있듯이 은총이 풍부해도 담을 그릇의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담을 수 없습니다. 비어있지 않은 그릇에 무엇을 담을 수 있겠습니까? 부활의 사실을 이미 예고해 주었고 또 그대로 이루어졌지만, 제자들은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시고 이르셨습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통해서, 오늘 나를 통해서 육안으로 볼 수 없는 당신, 주 예수님을 증언하도록 선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듣는 사람의 반응에 상관없이 당신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당신은 언제나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전하는 것이 소명이기 때문입니다.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자유의지를 지닌 본인의 몫입니다. 우리도 누구의 말에 구애받지 말고 주님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자상함과 따뜻함으로 사랑을 가지고 온 정성을 다하여 그러나 사람의 눈에 들기보다 하느님의 눈에 들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고 전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사람의 마음을 읽는 지혜도 필요합니다. 그들의 눈높이로 접근해야 효과 있게 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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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무지(無知)에 대한 답(答)은>
“진리(眞理)이신 주님과 ‘만남의 여정’뿐이다”
“주님께 감사하라, 그 좋으신 분을, 영원도 하시어라, 그 사랑이여.”(시편 118,1)
무지한 인간이 물음이라면 답은 주님뿐입니다. 무지에 대한 답은 진리이신 주님과 만남의 여정뿐입니다. 만남중의 만남이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한두번이 아니라 평생 날마다 주님과 만나야 합니다. 그래서 믿는 이들의 삶의 여정은 주님과 만남의 여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요즘 말씀은 거의가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과 그 변화를 보여줍니다. 사실 성서는 거의가 주님과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들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대로 만남, 회개, 자비, 지혜, 겸손, 용기로 이어지는 인간 현실을 깨닫습니다. 오늘 옛 어른의 말씀도 무지한 인간의 실상을 보여줍니다.
“닥치는 대로 벌면 닥치는 대로 쓴다. 사람답게 쓰기 위해서는 사람답게 벌어야 한다.”-다산
‘사람답게’는 막연하고 ‘하느님의 자녀답게’하면 분명해집니다.
“부자가 되고 싶은가? 치욕을 참고, 목숨을 걸고, 친구를 버리고, 의로움을 버리라.”-순자
부자가 되려는 마음은 무지의 절정입니다.
어제 수도형제와의 대화중 깨달음을 잊지 못합니다. 착함과 약함의 차이를 새삼 깨닫습니다. 정신 질환을 앓고 있는 형제에 대한 수도형제의 진단입니다.
“착한 것이 아니라 약한 것입니다. 정신이 약한 것입니다.”
그래서 정신력이 강한 이들을 멘탈 갑이라고 말합니다. 어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전임 베네딕도 16세 교황님에 대한 말씀에 대한 이해도 확연해 집니다.
“그분은 매우 섬세한 분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약하지 않았고, 강했습니다. 그분은 겸손했고 누구에게 부담주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참 고귀한 인품의 두 어른 교황님들입니다. 베네딕도 16세 교황과의 마지막 만남의 고백도 감동적입니다.
“베네딕도는 침대에 누워있었다. 그분의 의식은 여전히 또렸했으나 말씀하실 수는 없었다. 그분은 나를 바라보고 내 손을 꼭 쥐었고 내 말하는 것을 이해하였으나 한마디도 분명히 표현할 수 없었다. 나는 그분의 손을 잡고 보면서 그분과 함께 잠시 머물렀다. 나는 그분의 맑은 눈을 기억한다. 나는 그분께 애정 가득한 몇마디 말씀을 드리고 강복을 드렸고, 서로는 말없는 중에 작별인사(goodbye)를 했다.”
이어지는 회고담도 깊은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참으로 “주님의 현인(賢人)”인 교황들입니다. 이런 고귀하고 아름다운 삶자체가 참 좋은 복음 선포가 됩니다.
“교황들 사이에는 일관성(continuity)이 있다. 각 계승자인 교황은 언제나 일관성으로 특징지어 진다. 일관성중에 각자 고유의 은사가 빛을 발한다. 거기에는 언제나 일관성이 있고, 파탄(rupture)은 없다...몇몇 추기경들이 베네딕도 교황에게 가서 내가 이단이라고 말했다. 그분은 모두를 경청했고 위엄을 지니고 모든 것을 분별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것은 이단이 아니다.’ 그분은 이렇게 나를 방어해 주었다! 그분은 언제나 나를 방어해 주었다.”
얼마나 감사한 마음으로 전임 교황을 회고하는지요! 이런 아름다운 추억이 미래를 열어가는 희망이 되고 힘이 됩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난 위대한 인품과 우정의 교황들입니다. 오늘 복음은 앞서 부활하신 주님과 만났던 분들의 고백을 듣고 불신했던 무지한 제자들의 반응과 더불어 주님의 꾸중으로 특징지어 집니다.
‘열한 제자가 식탁에 앉아 있을 때,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 그리고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셨다. 되살아난 당신을 본 이들의 말을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로 ‘불신과 완고한 마음’ 이것이 주님을 만나기 전 무지한 인간의 실상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순간 회개와 더불어 완전히 새롭게 태어났음이 분명합니다. 이어지는 사명의 부여가 이를 입증합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믿는 이들의 최우선의 책무가 복음 선포입니다. 안으로는 친교의 제자, 밖으로는 선교의 사도가 믿는 이들의 신원입니다. 참으로 부활하신 진리이신 주님을 만날 때, 회개와 더불어 겸손과 온유, 자비와 지혜, 정직과 용기의 제자요 사도가 됨을 깨닫습니다. 보십시오. 예수님의 유언대로 선교사로서 맹활약이 시작된 사도들입니다. 사도들의 특징은 담대한 용기입니다. 참으로 진리이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자유롭고 담대해진 사도들입니다. 다음 묘사가 참 좋은 증거입니다.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의 담대함을 보고 또 이들이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임을 알아차리고 놀라워하였다.’
사도들의 담대한 용기는 다음 고백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여러분의 말을 듣는 것이 하느님 앞에 옳은 일인지 여러분 스스로 판단하십시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말 진리이신 주님을 만나 자유로워지고 담대해진 사도들입니다. 박해자들에 대한 순교자 영국의 토마스 모어(1478-1535)의 감동적인 고백도 생각납니다. 저는 “왕의 좋은 종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우선입니다.”(The King’s good servant, but God’s first), ‘왕의 종’이전에 ‘하느님의 종’으로서의 올바른 처신이 우선이라는 고백이요, 담담히 순교의 죽음을 맞이한 성 토마스 모어입니다.
가톡릭 교회는 2000여년 동안 훌륭한 역사와 전통을 면면히 계승해온 위대한 종교입니다. 우리 교회는 완전히 문맹의 사람들은 물론 고도의 지성인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사랑하고 아는 데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고도의 관상과 신비주의와 성성(聖性)은 모두에게 주어진 동등한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무지에 대한 답은 주님과 사랑의 만남뿐임을 깨닫습니다. 누구에게나 활짝 열린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진리이신 주님을 만날 때 저절로 회개와 겸손, 자비와 지혜, 담대한 용기의 사람으로 변모되니 비로소 무지로부터의 해방입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주님과 만남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여러분에게 맡겨진 이들을 위에서 지배하려고 하지 말고, 양 떼의 모범이 되십시오."(1베드5,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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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큰 믿음은 큰 사랑과 같다.>
오늘 복음을 보면, 당신을 믿지 않는 제자들에게 주님은 어찌 복음 선포의 사명을 맡기실까? 오늘 사도행전을 보면, 주님을 믿지 않던 제자들이 어떻게 그렇게 열렬한 복음 선포자 되었을까?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당신을 믿지 않은 제자들에게 복음 선포의 사명을 주님께서 맡기신 것은 제자들이 복음 선포자가 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그저 주님의 희망 사항이었을 뿐일까요?
제 생각에 제자들은 주님을 믿지 못해도 주님은 제자들을 믿으셨고, 그래서 복음 선포의 사명을 맡기셨을 겁니다.
제 생각에 큰 믿음은 작은 믿음을 키웁니다. 다시 말해서 큰 믿음은 작은 믿음을 자라게 합니다.
그래야 큰 믿음이라고 할 수 있고, 자라게 하지 못하는 믿음은 큰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한 번 배신으로 믿음이 끝나는 믿음은 가장 작은 믿음입니다. 열 번 배신했는데도 여전히 믿는다면 그만큼 큰 믿음입니다. 아무튼 큰 믿음이란 자기 믿음을 배신해도 믿는 믿음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큰 믿음은 자기 믿음을 배신해도 그로 인해 상처 입거나 불행해지지 않습니다.
큰 믿음은 배신할 것을 알고도 믿어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믿어줌으로써 그의 믿음을 자라게 하려고 속아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배신당해도 상처 입거나 불행해지지 않으며
그저 큰 믿음이란 이런 거라는 것을 배우게 합니다.
그래서 큰 믿음은 큰 사랑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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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16,15)
<성령!>
오늘 복음(마르16,9-15)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마리아 막달레나와 두 제자에게 나타나시고,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사명을 부여하시는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사건은 '믿음의 본질이요 핵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본질과 핵심에 대해 세 번에 걸쳐 예고하셨고, 그리고 실제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 사실을 믿지 못합니다. 예수님 부활을 목격한 마리아 막달레나와 몇몇 제자들이 전하는 말을 제자들이 믿지 못합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부활을 믿지 않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십니다. 이어서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복음', 곧 '기쁜소식'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다는 사건'입니다. 이 기쁜 소식을 온 세상에 선포하라고 제자들에게 명하십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 선포와 믿는 이에게 주어진 복음 선포의 사명은 나의 부활 체험이 있을 때 가능합니다. 내가 먼저 예수님처럼 죽음의 상황을 이겨내고 부활할 때, 비로소 나도 복음 선포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믿는 이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바로 '성령'(聖靈)입니다. 미사와 기도 등등 믿는 이들이 행하는 모든 신앙 행위는 내 마음의 창고에 성령을 담기 위한 행위입니다. 이 성령께서 나를 움직이십니다. 나의 생각과 말과 행위를 부활하게 합니다.
무식하고 평범했던 제자들이 성령을 받으니,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하는 사도로 대변신합니다.
우리도 성령을 받고, 성령의 힘으로 대변신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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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UeEx7wnHG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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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셨다."(마르 16, 14)
가장 큰
아름다움은
마음에
있습니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우리들
마음을
예수님께서
꾸짖으십니다.
뭘 보는지도
모르는
어중간한
부활이
아닙니다.
어느 것도
믿지 않는
요지부동한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십니다.
무엇을
의심하는지
모르면서
우리는
의심합니다.
어쩔 수 없는
우리 믿음의
허기와
불신의 냉소를
우리 삶에서
만납니다.
일어난 사실조차
우리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우리자신이
부활의 삶을
모른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체험되는
고유한
신비입니다.
마음이 있어도
마음을 옮길 수
없습니다.
우리의 완고한
마음으로
우리를 위한
부활이
하느님만을 위한
부활이 되었습니다.
믿음이 깊어지면
자연스레
겸손도 깊어집니다.
부활을 얻은
기쁨이
복음의 가장
좋은 기쁨입니다.
그 기쁜소식을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선포하라
말씀하십니다.
우리
마음을 꾸짖는
더 큰 마음을
만나는
마음의 기쁜
부활입니다.
마음에서 벗어나니
마음이 향해야 할
부활의 방향을
만납니다.
우리의 삶에서
부활을
선포해야 할
우리들
마음입니다.
마음을
되살리는
부활의 기쁜
복음입니다.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유일한
부활의 따뜻한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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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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