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화
<<1>>
― 폭풍전야 ―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몸을 일으켜야지 남을 의지하여 일어서서는 안된다.
― 마루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中
-하나
무언가에 홀린 듯이 감겼던 눈이 떠졌다. 그리고 흐릿하던
시야가 점차 선명해지자 나는 정신을 차려 앞을 볼 수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옆 쪽 침대에 미라가 누워있는 것이 보였다. 아직 어둑어둑한 것이 새벽인 듯 했다.
" 윽- "
몸을 일으키자 엄청난 두통이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어제
텔레포트한 뒤 그냥 쓰러져 잠들어버렸던 것 같은데...
어느 정도 두통이 가라앉자 나는 미라가 깨지 않게 조심스럽게 일어나 화장실에서 세수를 한 뒤 방을 빠져 나왔다. 그리고 바깥 공기를 마시기 위해 여관 밖으로 향했다.
' 아- 상쾌한 새벽공기-! '
나는 숨을 한껏 들이마시며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는 주변에 있는 의자를 하나 끌어다가 앉아 멍하니 주위를 바라보았다.
" 네타- "
한 10분쯤 지났을까? 뒤에서 은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 민트! 일찍 일어났네? "
" 나야 항상 이 때 일어나지. 새벽기도 해야 하니까- "
" 아- 그렇구나. "
나는 건성으로 대답해 버리고는 손으로 턱을 괸 채 눈을 감았다.
" 졸려? 그럼 들어가서 더 자- "
" 아냐- 오랜만에 푹 자서 괜찮아. 다른 얘들은? "
" 다들 자고 있는 것 같애. 엘은 방안에서 무언가 열심히 쓰고 있더라- "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한번 숨을 들이켰다.
" 어이- 다들 여기서 뭐해? "
" 크레인? "
" 잘들 잤어? "
은지와 나는 대답해신 빙긋이 웃어주었다. 크레인도 싱글벙글 웃으며 다가와 의자 하나를 끌어다 앉았다.
" 이카는? "
" 이카미스? 그 녀석 피곤했던지 골아 떨어져서 일어날 생각을 안 하던데? "
크레인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대답하고는 우리에게 물었다.
" 너희들... 그러니까- 너희 둘하고 라티에르, 이카미스, 아르나드, 카르딘, 브리티나 모두 그 『신의 사자』인가 하는
임무를 맡은 동료이기 전에 서로 친구인 거야? "
" 응- "
" 그래? 어쩐지... 친해 보인다 했지- 특히, 라티에르가 그렇게 편하게 대하는 사람들은 처음 봤거든. 좋겠다... "
웃으며 말하고 있었지만 왠지 말투가 서글프게 들렸다.
" 왜? 이젠 크레인도 친구잖아-? "
" 그렇게 생각했는데 아닌 모양이야- "
내 물음에 크레인은 쑥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 왜 그렇게 생각해? "
" 왠지... 너희들 속에는 내가 낄 수 없는 무엇이 있거든. 그리고 이카미스도 날 싫어하는 것 같고. "
" 그건 네가 싫어서 그런 게 아닐 꺼야- "
" 엘! "
언제 나왔는지 울이가 우리 쪽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 언제 나왔어? "
" 방금- "
" 라티에르- 그 말이 무슨 뜻이야? "
울이도 곧 의자하나를 끌고 우리 쪽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 네가 싫어서는 아닐 꺼 라는 거지- 아마도 우리 일에 얽히지 않았으면 해서 인 것 같아- 우리는 어느 날 어디론가 사라져버릴지도 모르는 존재거든. 그러면 우리와 친했던 사람들만 상처받게 되고. 그래서 사람을 사귀어도 깊게 사귀지
않고 되도록 이면 아예 사귀려들지 않아. "
" 너희들 일? 사라진다니? "
크레인의 질문에 울이는 검지 손가락을 펴서 입술에 대며
말했다.
" 더 이상은 비밀- 어쨌든 그냥 그럴 거라는 거야. "
" 그걸 어떻게 믿어- "
" 흠- 증거로서 이카미스가 여기서 산 동안 마음놓고 대한
사람은 우리 7명을 제외하고 그의 스승 밖에 없어. 어차피
그의 스승은 우리 일을 알고 있는 거 같으니까- "
크레인은 우리들의 일에 관해 얘기를 해주지 않아서 인지
뚱한 얼굴로 울이를 노려보았다. 그렇지만 울이는 미소지을
뿐이었다.
" 라티에르, 너도 모르겠어. "
" 뭘? "
" 난 널 처음 본 순간부터 지금까지 미소짓는 거 밖에 본 표정이 없어- "
" 그래? "
" 응. "
울이는 여전히 미소짓고 있었다.
" 그리고 너에 대해 아는 것도 없어- "
" 그래? "
" 응. "
" 넌 의문 토성이야- "
" 그래? "
" 응. "
둘의 이 황당한 대화에 나와 은지는 할말을 잃을 뿐이었다.
어느덧 둘은 말하는 위치가 바뀌어있었다. 울이는 얼굴 표정은 미소 그대로 유지한 채 크레인은 향해 물었다.
" 너 사실 날 좋아한다는 말 거짓말이지? 다 알고 있어. "
" 그래? "
" 응. "
" 그리고 너 사실은 엘프가 아니란 것도 알아- "
" 그래? "
" 응. "
요즘 저런 대화가 유행인가? 그런데 마지막 질문은... 무...무슨 소리야?
" 엘프가 아니라니? "
" 맞아- 나 사실은 엘프가 아냐. "
" 그럼 뭐란 소리야?? "
내 눈앞에 있는 귀 뾰족한 희고 아름다운 종족 엘프인데...
" 나? 난 나야- "
어느 광고가 떠오르네. 크레인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내 물음에 황당한 대답을 주었다.
" 크레인. 네가 무엇을 목적으로 우릴 따라 다니는 건지 모르지만... 부디 우리에게 해가 되지 않는 것이길 바래. "
" 글쎄- 해가 된다면 되는 거고 해가 되지 않는 다면 안 되는
거지. 라티에르 보기보다 눈치 좋네. 난 운동 겸 산책 좀 하다 올 터이니 이따 봐-!! "
크레인은 그렇게 말하고는 어디론 가로 가 버렸다. 우리는
의문이 가득한 시선으로 울이를 바라봤지만 울이 역시 빙긋
웃으며 어깨를 으쓱하고는 여관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뭐야-! 좀 알려주면 덧나나!!
" 하여간... 엘도, 이카도 모르겠어- "
" 이카? "
" 그래- 이카도 그 때 린의 정체를 알고 있는 듯 했는데 결국
안 알려줬잖아- 오늘 울이도 그렇고... "
아- 그렇고 보니 그 때 그 꼬마 여자아이!!
" 하지만 난 왠지 그 애가 누군지 알 것 같애. "
은지는 크레인이 뛰어간 쪽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나도 그 뒤로 많이 생각해봤었는데 좀 알 것 같다. 아무래도 그 애... 린은...
" 어이-! 다들 뭐하고 있어.? "
" 딘? "
" 아아- 졸려∼ 자도 자도 졸리네- "
" 쿠쿡- 곰탱이∼ "
인화의 말에 은지가 웃으며 인화를 놀려댔다. 결국 은지는 아침부터 인화와 술래잡기를 했다. 은지는 도망가고 인화를 은지 잡으러 뛰어다니고.
-세레나
이불을 꼭 뒤집어 쓴 채로 나는 조용히 흐느꼈다.
" 카르딘님. 카르딘님! "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었고 아무 것도 생각하기 싫었다. 단지 떠오르는 것은 한가지... 눈감으면 떠오르는... 처음으로 본 환한 미소...
" 세레나, 인사 드리거라. 이 분은 내 친구인 마내퍼제 공작이고 이쪽은 아들 카르딘이다. "
나는 아버지의 말에 따라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예를 취했다. 그리고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서 있자, 아버지는 그런
내가 싫었던 건지 아니면 내 자체가 싫은 건지 밖으로 나가라고 하셨다. 나 역시도 그쪽이 편했으므로 얼른 방에서 나왔다.
난 2층 테라스로 올라가 난간에 기대어 조용히 눈을 감고
바람을 느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었다. 언제나 시간이 나면 난 항상 이곳으로 올라와 바람을 쐬었다. 모든 것들이 날 증오하듯 했지만 바람만큼은 언제나.. 언제나 날 포근히 감싸안아 준다. 엄마 품이라는 게 이런 느낌일까..? 오늘따라 흐드러지게 핀 벚꽃은 나를 더욱더 기분 좋게 해준다.
[ 달칵- ]
누...누구지? 혹시... 아버지?
" 아... 미안... 방해가 됐다면 정말 미안해요... "
내게로 다가오던 그 남자는 정말 미안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 누구 신가요? "
" 아- 아까 봤잖아요. 요 아래서... "
그렇다면, 그 카르딘인가 하는 사람인가? 아까는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얼굴을 못 봤는데...
" 방해가 안 된다면 같이 있어도 될까요? 저 아래는 너무 따분해서 말이죠. "
" 좋으실 대로... "
나는 순순히 응했다. 아니, 어쩌면 난 거절하는 법조차 모르는지도..
" 와- 여기 정말 경치가 예술이네요!! 정말 기분 좋은 곳 이예요. "
그 사람은 내 옆 난간으로 와서 기대더니 시원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 웃음소리에 나도 웃음 지었다. 뭔가... 옆에
있는 사람조차 즐거워지게 만드는 그런 사람 같다.
" 왜 그렇게 말이 없어요? 내성적인 성격인가? "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수그렸다. 내가 계속 고개를 들지 못하자 카르딘님은 잠시 뭔가 생각하는 듯 싶더니
미안하다는 듯이 말했다.
" 아- 미안해요. 내가 너무 제멋 대로죠? 대답하기 싫다면
안 해도 되요. "
" 아...아니에요... "
나는 당황해하며 급히 말했다. 그러자 카르딘님은 밝게 웃으며 내게 말했다.
" 그렇다면 정말 다행이네요. 그런데 왜 그렇게 소극적이에요? "
" ...... "
" 뭐.. 이런 말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지만... 소극적인 건 별로 좋지 못하다고 생각해요. 소극적인 사람과 적극적인 사람은 평소에 짓는 표정부터 다르거든요. 그리고 전 표정에 따라 그 사람의 미래도 달라진다고 생각해요. 항상 웃고 매사에 자신감 있는 적극적인 사람은 항상 밝은 만큼 미래도 밝지만 항상 구석에서 누군가가 말 걸어 주기만을 기다리는 소극적인 사람은 항상 어둑어둑한 표정만큼 미래도 그다지 밝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진 않거든요. 그래서 전 살아가는 표정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세레나님은 자신이 지금
어떤 표정을 지으며 살아가고 있는지 아세요? "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난 어두운 표정을 지니고 있지 않을까...
"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알면 고칠 수 있지만 모르면 더 고치기 힘든 법이잖아요? 아까도 고개도 들지 않고 있던데... 그러지 말고 당당하게 앞을 보고,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이 따뜻해지는 그런 미소 지으세요. "
그 사람은 날 보고 미소지었다. 아마 그 미소란 저 미소를
말하는 걸까? 나까지도 편안해지게 하는 미소. 하지만 난...
나조차도 마음이 따뜻해질 수 없는데... 어떻게 그런 미소를
지을 수 있을까?
" 이런 집에만 갇혀있지 말고 집밖의 세상으로 나가봐요. 훨씬 더 도움이 될 거예요. "
하지만 모든 것이 두려운 걸. 한번도 세상이란 걸 제대로 본
적이 없는 것 같지만, 그 세상 역시 지금 우리 집과 무엇이
다를까? 가정이 모이고 나라가 모여서 만드는 게 결국 세상이란 거잖아- 난 그저 지금 내 테라스에 있는 이 바람과 저
꽃만을 바라보고 싶어. 세상을 바라보고 싶지는 않아. 난 강하지 않아서, 바보 같아서 저 사람처럼 당당할 수 없는 걸.
그런 내게 세상이란 또 다른 지옥일 뿐야-
" 카르딘-!! "
" 어-? 아버지께서 부르시네요. 그럼 전 이만 가 볼게요!! "
내가 손을 흔들며 카르딘님은 문 쪽으로 향해 급히 뛰어갔다. 그러다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멈춘 뒤 내 쪽을 돌아보며 크게 말했다.
" 괜찮다면 저희 집에 언제라도 놀러오세요- 문은 활짝 열려
있을 테니! "
내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카르딘님은 다시 한번 손을
흔들고는 밖으로 나가셨다.
그 날 밤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 것이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 본 따뜻한 미소. 언제나 날 감싸주던 바람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부드러운 미소가...
나는 이불을 걷어내고 방 한쪽에 있는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웃어보았다. 그 때 카르딘님이 다녀가신 후로
내 습관은 테라스에서 홀로 바람을 쐬는 것에서 이렇게 거울
앞에 앉아 웃는 것을 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항상 언제 보아도 나는 그렇게 웃을 수 없었다.
나는 한번도 그런 미소를 본 적이 없었고 지어본 적도 물론
없었다. 어릴 적 어머니는 날 낳다가 돌아가셨고, 어머니를
너무나도 사랑하셨던 내 아버지는 어미를 죽이고 태어난 녀석이라며 항상 날 미워하셨다. 아버지가 날 그렇게 대하자
집안의 모든 사람들. 심지어는 하인들까지 날 멸시했고 난
엄마 품이란 것도 모른 채, 웃음이라는 것도 모른 채 그렇게
혼자서 살았다.
어느 날 나는 그 미소가 다시 보고싶어 카르딘님의 댁을 찾아갔다. 날 보자 카르딘님은 물론 카르딘님의 식구들 모두
반갑게 맞아주셨다. 그 이후로 나는 카르딘님을 자주 뵙게
되었고 난 카르딘님의 말처럼 변하려고 애썼다. 적극적으로,
적극적으로... 그리고 어느새 난 적극적인... 누구보다 활달한 세레나가 되어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난 그 미소를 지을 수 없었다.
「그래- 난 네가 너무 싫으니 그만 좀 귀찮게 굴어. 짜증나-」
" 카르딘님. 왜 그런 말을... "
신의 사자 일행 모두 항상 내게 웃어주었고 잘해주었다. 수도에서도, 티르가에서도, 여기에서도. 그들은 날 진심으로
대해줬고 난 그런 그들이 너무나 좋았다. 하지만...
아니- 난 알고 있었다. 내가 그들에게 짐에 불과하다는 것을... 모른 척 했었던 것뿐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난
그들과 어울리면서 나도 그들의 집단에 속한 것 같은 느낌을
받았고, 그래서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거다. 하지만, 사실은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인정될 수밖에 없는 것...
나는 거울 속의 나를 바라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난 결정했다.
카르딘님을 따라가야겠어. 그래서 말 할거야- 나 카르딘님을 너무너무 좋아한다고- 너무나도 존경한다고. 이제 더 이상 매달리지 않고 카르딘님처럼 살겠다고.
이제서야 알 것 같다. 내가 미소짓지 못한 이유... 난 카르딘님을 좋아했지만... 그건 동경심에서였다. 세상에서 처음으로 본 따뜻한 웃음- 그렇게 웃을 수 있는 카르딘님을 동경하고 그렇게 되고 싶단 생각에 나는 막무가내로 카르딘님을
따라다니며 카르딘님처럼 밝게 활달하게 쫓아하게 된 거였다. 그리고 매달리며 어린아이처럼 철없이 굴었던 것이다.
그것은 정말 적극적이 된 것이 아닌 가식... 웃음도 가식...
내가 나 자신을 믿고 사랑해주지 않는 다면, 자부심이 없다면, 절대 적극적인 사람이 될 수 없다. 그 동안 나에게는 그
누구도 날 믿고 사랑해준 사람이 없었고 나 또한 그 누구도
믿고 사랑해 본 적이 없었기에 나 자신을 믿는 다는 걸... 사랑하는 방법이란 걸... 몰랐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카르딘님이, 신의 사자 분들이 날 사랑해 주었고 나 또한 그들을 사랑하며 믿는다. 난 그걸 깨달았고 이젠 날 사랑하고 믿는 방법을 안다.
카르딘님에게 그 동안 억지썼던 것들을 사과하고 이제는 정말 나를 바꿔야지― 나의 새로운 시작을 위해 난 카르딘님에게 가야만 해.
[ 덜컥- ]
" 이...이런... "
벌써 출발해 버렸는지 방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 안돼- 난 꼭, 꼭 이 말을 전해야 하는데... "
그렇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지도 모르는데... 어쩌면 카르딘님을 다시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르는데...
" 귀여운 아가씨- 무엇이 안 된다는 거죠? 꼭 전해야 하는
말이라니... "
누군가의 목소리에 나는 잔뜩 놀라며 뒤를 바라보았다.
" 누...누구세요? "
" 소원을 들어주는 마도사- "
소원을 들어주는 마도사건 누구건 상관없었다. 싸움이 일어나기 전에 먼저 가서 말해야만 한다.
" 만약 그렇다면 절... 저를... 네르오빌로 데려다주세요!! "
-하나
" 잘 먹었습니다∼! "
크레인의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아침 식사가 끝이 났고 다들 뿔뿔이 흩어져 자기 방으로 올라간 후 나는 영이와 함께
여관 뒤쪽 공터로 가서 검술 대련을 하기로 하고는 방에 가서 검을 갖고 내려왔다. 공터에 가보니 어느 새 다른 얘들모두 내려와 있었다. 아무래도 놀지만 말고 연습 좀 하라는 진영의 잔소리를 들은 듯 했다.
" 우리 그럼 토너먼트 식으로 대련해볼까? "
" 음- 좋은 생각이야! "
" 그럼. 내가 종이에 숫자를 적어줄 테니 뽑아- "
사제인 탓에 검은 금지여서 쓰지 못하는 은지가 어느새 여관에서 종이하나를 가져와 숫자를 적어 접었다. 검술은 약하다며 은근슬쩍 빠진 울이를 제외한 우리들은 각각 종이를 하나씩 뽑았다.
" 1번은 2번이랑 3번은 4번이랑... 그런 식이야- "
은지의 말에 우리는 각자 자신의 종이에 적힌 번호를 불렀다. 상대는 인화랑 영이, 나랑 미라, 크레인과 진영이었다.
" 좋아- 그럼 딘과 아르 먼저! 자, 시작! "
은지의 외침과 동시에 챙강- 소리를 내며 두 개의 검이 맞부딪쳤다, 인화가 힘이 세서 저렇게 맞부딪치면 영이가 불리할 텐데...
" 으읏- "
역시나- 내 예상대로 영이가 밀리고 있었다. 순간 영이는
몸을 오른편으로 향하며 검을 살짝 꺾어 인화의 검이 미끄러지게 했다.
[ 끼기긱- ]
듣기 괴로운 소리를 내며 인화의 검이 영이의 검을 타고 미끄러져갔다. 검에 힘을 잔뜩 주고 있던 인화는 그대로 중심을 잃었고 영이는 재빨리 검을 거둬 그리고 인화의 목 쪽으로 갔다대었다.
" 아르 승! "
" 치...치사해!! "
" 치사한 게 아냐- 기술이지. 얼마 전에 구상한 건데 이렇게
유용할 지는 몰랐어∼ "
영이는 싱글벙글 웃으며 인화를 맘껏 놀렸다.
" 역시- 기술면에선 당할 자가 없다니까- 자아, 그럼 네타와
브릿! "
" 시∼작! "
은지가 한쪽 팔을 내렸다가 들어올리며 시작을 알렸다. 나는 가만히 미라를 살펴보다가 공격에 들어갔다. 검술은 나보다 낮다지만 아무래도 스피드가 뛰어난 만큼 얕잡아 볼 수
없지.
미라는 내 검을 피해 내 옆쪽으로 몸을 돌렸고 나는 재빨리
검의 방향을 돌렸다.
[ 챙강- ]
두 개의 검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맞부딪쳤다. 미라가 빠르게 물러남에 따라 나도 몸에 중심을 잡은 후 다시 공격하기
위해 검을 꼭 붙잡았다. 그런데 왠지 주위 분위기가 썰렁한
것을 느꼈다. 미라도 느꼈는지 날 힐끔 쳐다보더니 공격자세를 풀고 얘들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나 역시 자세를 풀고
고개를 돌렸다. 그 곳에는 세...세레나?
" 어떻게 온 거야? 아무리 빨라도 오려면 최소 3∼4일은 걸릴텐데. "
" 마법으로 왔어요. 마침 그 마을에서 마도사를 한 명 만났거든요. "
텔레포트를 쓸 정도의 마도사가 그렇게 막 만날 만큼 흔하던가?
" 오지 말라고 했잖아. 귀찮다고- "
" 이봐- 아가씨한테 태도가 너무 하지 않습니까? "
이...이 목소리는...
" 디제!! "
" 어이쿠- 그러다간 귀 먹겠습니다. 제 귀는 멀쩡하니 보통
크기의 목소리로 말해주시겠습니까? 그보다 아가씨. 꼭 봐야
하는 사람이 있다더니 카르딘님이셨습니까? "
세레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 디제- 왜 온 거냐? "
" 그야 여러분이 보고 싶어서...라고 하면 거짓말인 거 다 들통날 테지요? 저번에 한 말을 이행하러 왔습니다. "
저번에 한 말이라면... 우리 중 한 명을 죽이겠다던 말 말이야??
" 어쨌든 다들 건강해 보이시니 싸움을 벌이기에는 더할 나위 없어 보이는군요. 하지만. 이 귀여운 아가씨께서 꼭 봐야한다며 조르던 분이 카르딘님이었다니... 이 아가씨와 얘기
나눌 시간을 좀 드리죠. 정확히 2시간 뒤 이 마을 뒤편에서
봅시다- "
디제는 우리들의 분노 어린 시선을 웃음으로 흘리고는 사라져버렸다. 언제 봐도 기분 나쁜 놈이야- 생긴 건 꼭 기생오라비처럼 생겨서는... 그나저나- 이젠 어쩐다?
" 저기... 카르딘님... "
세레나는 힘겹게 말을 꺼냈다. 왠지 활기차던 예전과 많이
달라진 모습이었다. 우리들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은 뒤 카르딘과 세레나만을 남겨두고 여관으로 들어갔다.
" 무슨 일인 걸까? "
" 글쎄.. 모를 일이지- "
내 물음에 은지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 뭐- 뻔한 거 아니겠어? 카르딘님∼ 싸랑해요∼ "
" 얼간이- 쇼를 해요. 쇼를∼ "
오버하는 크레인을 향해 진영이 비웃으며 말했다. 결국 또다시 둘의 말싸움이 시작되어 버리고 말았다.
" 저 둘은 도대체 왜 저렇게 싸워대는 거야∼ 그나저나 좀 걱정이네... "
" 뭐가? "
" 사실 오늘 꿈이 너무 안 좋았거든. 아마... 모두 굉장히 가슴 아픈 일을 겪게 될 것 같아. 잘은 생각이 안 나지만 깨고
나서도 숨쉬기가 힘들 정도로 가슴이 아팠거든. 정말 슬펐어... "
영이는 굉장히 괴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분위기가 침울해지자 은지가 밝게 웃으며 말했다.
" 걱정마- 설마 별일이야 있겠어? 그렇게 걱정하다가는 될
일도 안되겠다. "
은지의 말에 다들 가볍게 미소지었다. 그리고 나서 대략 한
시간 정도가 지났을 무렵, 부드럽게 웃으며 들어오는 인화와
세레나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 어...어떻게 된 거지?? "
" 어떻게 된 거긴∼ 내 말대로 자∼알 된 거지! "
크레인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정말?? 내가 알기론
절대- Never- 그럴 리 없는데...
" 그나저나 어쩔 거야? 이제... 한시간 남았어- "
" 글쎄...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지- "
울이는 턱을 괴며 태평히 말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모두들
싸움이 있다는 건 잊은 것처럼 너부러져서 놀고 있었다.
" 도대체 생각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모르겠다니까- "
내 불평 가득한 말에 울이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 그나저나, 딘-! 어떻게 된 거야? 갑자기 희희낙락해져서는... "
" 아- 그럴 일이 있었어. "
인화는 내 물음에 가볍게 웃으며 멋쩍은 듯이 말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나중에 캐물어야지∼!!
그 뒤로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인화랑 세레나랑 둘이 짝짝꿍이 맞아서 자알 놀고... 나머지 애들도 싸움을 해야 한다는
자각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수다를 떨며 재밌게(?) 놀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한쪽 구석에 얌전히 앉아 있던 진영이 벌떡 일어섰다. 모두들 깜짝 놀라 시끄러웠던 주변은 삽시간에 고요해졌다. 그 가운데 진영의 간단명료한 말소리가
들렸다.
" 가자. "
뜻을 이해한 얘들은 다들 일어서서 자신의 무기를 챙겼다.
그리고 방문을 나서려는 찰나...
" 따라오지마. "
" 왜-?? "
진영와 크레인의 실랑이가 또 벌어지고 말았다.
" 이건 우리 7명에게 달린 문제지- 네 문제가 아냐. "
" 이봐- 저번에도 말했듯이... "
" 낄 때 안 낄 때 정도는 좀 가려줬으면 좋겠군. "
진영은 크레인의 말을 끊고는 차갑게 말했다.
" 이거 미안할 걸? 난 낄 때 안 낄 때를 못 가리거든- "
" ......그러니까 얼간이지- "
진영은 휙 돌아서서 먼저 방을 나가버렸다. 그 뒤에는 손가락으로 승리의 브이를 만든 크레인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2>>
― 전투 ―
*인간에게 있어서 최대의 적은 인간이다.
― R. 버어튼 (영국의 목사)
우리는 여관을 나온 뒤 곧장 마을 뒤편의 작은 산을 향해 올랐다. 우리가 나오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마치 예고장처럼
마을 뒤편의 산꼭대기에 엄청난 불길이 치솟았던 것이다.
" 칫- 하필이면 산 위일 건 뭐야. 힘들어죽겠잖아- "
" 오히려 잘됐지. 괜히 다칠 사람도 없고... "
은지의 불평에 인화가 은지를 한 대 툭 치며 말했다. 어느
새 우리는 정상에 다다를 수 있었다- 정상에는 언제 꺼졌는지 그 어마어마하던 불길이 다 잡혀 있었다. 그 모습은... 처참하기 이를 때가 없었다. 불길로 인해 식물들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작은 동물들이 타 죽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 자- 어서 오십시오. "
" 디...제... "
진영은 분노를 억누르는 듯 낮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 이런 이런- 너무 하신 거 아니에요? 이런 일개 하찮은 마법검사 하나 상대하는데 8명씩이나- 상관도 없는 저분은 왜
오신 거예요? "
" 신경 쓰지마- 그리고 하찮은 마법검사라니? 지금 우릴 농락하는 건가? "
" 아니오- 사실인 걸요. 그렇게 받아들이셨다면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
디제는 여유롭게 웃으며 우리들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왠지 저런 모습에 더 짜증이 났다.
" 자- 그럼 시작할까요? 저는 여러분 중 딱 한 분만을 죽일
겁니다- 물론 저기 저 엘프는 빼고요. 만약 여러분 중 한 명이라도 더 죽으면 곤란하거든요. 왜냐하면 신의 사자는 일곱
명이니까... "
" 무슨 소리지? "
" 어리석은 반문이군요-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자- 여러분 중 제 손에 죽고 싶은 사람은 누구입니까?
"
디제는 공중에 뜬 채로 두 팔은 한껏 벌리며 얼굴 가득 미소를 띤 채 말했다. 디제에게서 느껴지는 따가운 이 살기만 아니라면 마치 장난을 치는 모습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 너 설마... "
" 안나온다면 제가 고르지요. "
놀라워하는 진영을 무시한 채로 디제는 얼굴에 미소를 싹
지우고 우리들을 노려보며 손에 들고 있던 지팡이를 휘둘렀다.
" Shield!!! "
" Shield! "
진영과 내가 방어 마법을 외침과 동시에 거대한 불이 우리를 향해 날아왔다. 불덩이는 아슬아슬하게 방어막과 부딪쳤고 방어막과 함께 소멸되었다. 그러나 간신히 막았다는 생각이 들기도 전에 칼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 챙- ]
' 말도 안돼... 어떻게 벌써... 게다가 지팡이가 칼로?? '
" 이것보세요- 카르딘님. 검은... 힘으로만 휘두르는 것이 아닙니다- "
디제는 살짝 웃으며 칼을 살짝 꺾어 손잡이 부분으로 인화의 등에 내리쳤다.
" 딘-! "
" 괜찮아?? "
" 이보세요- 남 걱정할 때가 아닌 것 같은데요. "
놀라서는 쓰러진 인화 곁으로 뛰어가던 은지에게 다가선 디제가 말했다.
' 이런. 은지는 검을 쓸 줄 모르는데... '
검을 내리치려는 디제를 보고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아버렸다. 그리고 잠시 후... 아무런 소리도 없기에 살그머니 눈을
떠보았다.
" 브릿-!! "
은지는 주저앉아 있었고 은지를 내리치려고 했던 칼은 공중에 멈추어 있었다. 그리고 그 칼을 잡은 손에는 미라의 단검이...
" 대단한 사격력이군요. 짧은 시간 안에 당황하지 않고 정확히... "
" Fire ball!! "
디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화이어 볼 여러 개가 디제를 향해 날아갔다. 디제는 지팡이를 들어 가볍게 마법을 상쇄시킨
후 말했다.
" 이 정도 하위 마법으로 제가 당하리라 생각하신 겁니까? "
진영은 분한지 입술을 깨물 뿐이었다.
" 뭐... 이미 표적은 정했습니다- 감히 제 손을 꿰뚫은 이 단검의 주인... "
디제의 눈이 날카롭게 빛나는가 싶더니 단숨에 미라에게로
달려갔다.
" 안돼-! "
' 미라는 단검은 잘 쓰지만 장검에서는 다르다고! '
나는 급히 미라 쪽으로 달려가기 위해 검을 들었다. 그 때
누군가가 내 옆을 빠르게 지나 미라 쪽으로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
[ 챙강-! ]
" 아르!! "
아르와 디제의 검이 맑은 소리를 내며 부딪혔다.
" 이봐- 브릿은 단검 날리는 것만 뛰어나지 장검에선 많이
약해서 말이야. 나랑 겨뤄보는 것은 어떤가? "
영이는 목표를 자기 쪽으로 돌리려는지 칼을 맞부딪친 디제를 보고 미소를 띤 채 말했다.
" 뭐- 저야 누구든 상관없으니... "
디제 역시 가볍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 하지만, 그 전에... 우리 둘의 결투를 방해할 수도 있으니
방해물부터 처리하고요. "
디제는 뭔가 중얼거리더니 영이를 향해 지팡이를 휘둘렀다.
그리고는 우리들 쪽으로 돌아섰다. 영이. 겉으론 별 문제 없어 보이는데... 뭘 어쩐 거지??
" 우선. 여기 있는 사람들과 아무런 상관없는 당신부터. "
디제는 크레인을 지적하고는 무서운 속력으로 달려들었다.
크레인은 칼을 꼭 쥔 채 달려오는 디제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디제는 크레인의 바로 앞에서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 크레인-! 어서 피해!! "
진영의 외침과 함께 불이 번쩍했다. 잠시 후 빛이 사그라진
뒤 간신히 비틀거리며 서있는 크레인의 모습이 보였다.
" 치...치사하게. "
" 용케 잘 버티셨네요- 이건 치사한 게 아니라 기술입니다. "
디제는 이번에는 진짜 검을 들고 달려들었다. 하지만 갑작스런 습격으로 온 몸에 힘이 빠져버린 크레인으로서는 막을
도리가 없었다. 우리들은 어쩔 줄 몰라 발만 동동 굴리고 있었다. 그리고...
" 미안하지만- 나도 있다는 걸 알아주었음 좋겠군. 크레인!
이로써 빛은 갚은 거다. "
진영은 검으로 디제를 막은 채 노려보며 뒤쪽의 크레인에게
소리쳤다.
" 하지만...있기만 하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
디제는 가볍게 비웃으며 주문을 외웠다.
" Paralysis!! "
" Shield! Freeze! "
둘의 마법 싸움이 일어났다. 아무래도 웬만해서는 승부가
날 것 같지 않았다.
" 모든 생명의 근원이여- 만물의... "
뭔가 큰 마법을 쓰려고 했는지 주문을 외던 진영을 향해 디제가 검을 내리쳤고 검을 막느라 진영의 주문은 끊기고 말았다.
" 제기랄... "
" 이제 이쯤에서 끝내기로 하죠. "
진영과 서로 마주보고 있던 디제는 그렇게 말하고는 한쪽
손을 진영을 향해 뻗었다. 그러자 그 손에서는 기분 나쁜 검은색 마법이 급속도로 형성되었다.
" 젠장-! 잊고 있었어. 네 놈이 흑마도사라는 걸. "
디제는 득의양양한 얼굴로 형성된 마법을 진영을 향해 날렸다.
" 이카!! "
미처 대비하지 못한 진영은 방어막을 발동시켰지만 급히 형성된 방어막은 거대한 흑마법을 막지 못했다. 결국 진영은
마법을 맞고는 땅에 쓰러졌다. 일어나려는 듯 했지만 온 몸에 힘이 빠졌는지 일어나질 못했다.
" 이것으로 한 명은 끝났고.. "
" 너라고. 무사할 듯... 싶으냐? "
디제의 말에 진영이 힘들게 한 마디 내뱉었다. 아무래도 많이 다친 듯 싶었다. 그리고 말이 끝남과 동시에 디제의 한 팔에 긴 상처가 생기며 엄청난 피가 솟구쳤다. 쓴웃음을 지으며 디제가 말했다.
" 어차피- 이 정도는 각오해야지요. 자, 다음은 정말 당신...
"
디제는 아픈 듯 약간 얼굴을 찡그리며 크레인을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순식간에,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디제의 검이
크레인을 베었다. 아까의 상처가 다 회복되지 않은 탓인지
크레인은 재빨리 검을 피하지 못했고 그나마 간신히 죽을 만큼은 모면한 듯 싶었다. 하지만 꽤나 심하게 다친 듯 보였다.
" 신의 사자가 관련 없는 자. 죽이려했으나, 그 정도면 어차피 움직이지도 못할 테지요. 잘하면 과다 출혈로 죽을 수도
있겠군요. "
디제는 기분 나쁘게 웃어 재꼈다. 그리고는 새파랗게 질려있는 우리들을 향해 말했다.
" 자, 다음은 내 손에 상처를 입힌 당신... "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마법이 발동되었다.
나는 급하게 미라 쪽으로 달려갔다. 안돼.. 더 이상 모두를
다치게 할 수는...
" Shield!! "
[ 콰광-! ]
맹렬히 날아오던 얼음 조각들은 내가 만든 방어막에 부딪치
면서 소멸되었다.
" 이런, 마도사 분이 또 계셨나? "
웃음 짓는 디제의 모습이 소름끼쳐 보였다. 게다가 크레인을 베면서 피까지 뒤집어쓰는 바람에 완전 싸이코처럼 보였다.
" 그럼 귀찮은 사람 먼저 처리해야지요. "
나는 검을 단단히 잡으며 방어막도 재빨리 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해두었다. 광기 어려 보이는 디제를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손이 덜덜 떨려왔다.
" 자, 그럼 갑니다. "
디제는 내게 파이어 볼을 퍼부었다. 나는 신속하게 준비해
두었던 방어막을 발동시켰다. 그리고 잠시 긴장이 풀렸을 무렵 어느새 옆으로 다가와 있는 디제가 보였다.
" 끝입니다. "
디제의 말에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아버렸다.
[ 채챙- ]
" 네타! 뭐 하는 거야-! 눈 떠! "
커다란 외침에 순간 나는 놀라서 눈을 번쩍 떴다. 내 앞에는
인화가 디제의 검을 막고 서 있었다.
" 싸움 중에 뭐 하는 거야? 어서 가서 이카미스랑 크레인 좀
봐-! "
인화의 외침에 정신이 번쩍 든 나는 진영과 크레인 쪽으로
달려갔다.
" 이런- 벌써 회복하신 겁니까? "
" 그래- 미안한걸? 그리고 아까 힘으로만 검을 쓴다던 말.
똑똑히 고쳐주지- "
인화는 말이 끝남과 동시에 디제에게 검을 내려쳤다. 나는
거기까지 보고는 진영과 크레인을 치료하고 있는 은지에게
다가갔다.
" 민트야... "
" 네타!! 뭐 붕대대신 쓸 거 없어? "
나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다가 내 치마를 북 뜯었다. 그리고는 은지에게 건네며 물었다.
" 어때? 괜찮아? "
" 아니- 전혀. 크레인은 너무 많이 다쳐서... 지금 출혈이 너무 심해. 이걸로 여기 좀 꽉 묻어주겠어? 아- 그리고 이카는... 너도 알다시피 우리 7명에겐 내 치유력은 별 도움이 안돼- 일단 치료마법은 걸겠는데 회복하려면 오래 걸릴 꺼 같애. "
나는 천으로 크레인의 상처를 묶으면서 말했다.
" 어떻게 해. 이러다간 정말 누군가 죽겠어... "
" 아까. 표적이 누구라고 했었지? "
" 아...아르... 그러고 보니 아르는... "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곧 영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아까
그 자리 똑같은 자세로 서 있는...
" 저 바보- 도대체 뭐하고 있는 거야!! "
은지는 열 받는 듯 소리질렀다.
" 가만... 잘 봐봐... 좀. 이상하지 않아? 전혀, 전혀 움직이지 않았어... "
" 속박...마법이야... 그래서 지금... 움직이지... 못... 하는
거야... "
어느 새 정신을 차렸는지 진영이 힘들게 말했다.
" 조금만 기다려- 치료해줄게. "
은지는 다급하게 말하더니 회복주문을 발동시켰다. 나는 크레인의 상처를 지혈하며 한숨 밖에 쉴 수 없었다.
" 민트야- 난 죽을... 정도는 아니니까... 내 치료보다는...
빨리 방어막을 쳐... 물리적인 것도 포함해서... "
" 으응... "
은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기도에 들어갔다. 그러자 주위에
서서히 방어막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 수 있게... "
" 으윽- "
기절해 있던 크레인은 고통스러운지 신음소리를 내며 깨어났다.
" 얼간이- 꼴 좋군. 괜히... 따라오더니 짐만 되고... "
진영은 아픈 와중에서 크레인에게 농담 아닌 농담을 했다.
방어막을 다 완성시킨 은지는 진영을 치료하기 위해 다시 회복주문을 발동시키려했다. 그러자 진영이 급히 막으며 말했다.
" 날 치료할 힘이 있으면... 방어막이나 더 쳐. 난 너처럼...
자기회복 능력이... 조금이나마 있어서... 괜찮아... "
진영은 힘들게 띄엄띄엄 말하더니 눈을 감았다. 나는 크레인을 지혈하며 어쩔 줄 몰라할 뿐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회복마법도 좀 배워두는 건데...
[ 콰쾅- ]
" 아앗- 무...무슨 소리야? "
나는 급히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방어막 바깥쪽에는 디제가 서서 우릴 노려보고 있었다. 아마도 방어막을
깨기 위해 쓴 마법이 방어막에 부딪치면서 나는 소리였던 것
같았다. 나는 걱정스런 맘을 진정시키며 살짝 디제의 뒤쪽을
보았다. 그리고 그 곳에는... 다리에 피를 흘리며 검을 쥔 채
쓰러져 있는 인화와 반쯤 꺾긴 나무에 기대어 있는, 기절한
듯이 보이는 미라가 있었다. 아무래도 마법을 맞고 날아가
그대로 나무에 부딪친 듯이 보였다. 그리고 인화와 미라의
반대편에 쓰러져 있는 울이도 보였다. 울이는 특별히 큰 상처가 있는 것 같아 보이진 않았지만 작은 상처들로 피가 많이 흘러 출혈이 심해 보였다.
[ 콰쾅-!! ]
다시 한번 마법이 충돌했다. 디제는 여전히 웃음을 지은 채
마법을 발동시키고 있었다. 물론 인화와 미라가 저렇게 다친
만큼 디제도 무사하지 않았다. 왼쪽 어깨에 깊은 상처가 나
있었고 군데군데 작은 상처들이 많이 생겨 피를 줄줄 흘리고
있었다.
" 민트. 이 방어막 얼마나 견딜 수 있겠어? "
" 모...몰라... 잘해야 한 5분? "
은지는 겁에 질린 말투도 더듬더듬 간신히 말했다. 이제 남은 건 은지와 나... 그리고 싸울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다...
' 과연 이길 수 있을까? 진영, 크레인, 인화, 미라, 울이. 모두 다 당했는데? '
문득 공포가 온 몸을 휘감았다. 손발이 차가워지면서 떨려옴을 느꼈다. 저 사람을.. 저 사람을 이겨야만 돼!
[ 콰쾅-!! ]
다시 한번 방어막이 진동했다. 은지가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 한번, 한번 더 맞으면 끝이야- "
[ 콰쾅-!!!!! ]
은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시 한번 충격이 가해지고
방어막이 깨져버렸다.
" 휴우- 드디더 깼군요. 의외로 단단한 방어막 이었습니다. "
디제는 여전히 예의 바른 말투로 미소지으며 검을 들었다.
이제 싸울 수 있는 건 나 밖에 없어... 막아야만... 막아야만
해!!
" 자, 그럼 준비 되셨죠? "
빙긋이 웃던 디제는 재빨리 주문을 외웠다.
" Lightning bolt!! "
" Shield!! "
나 또한 재빨리 방어막을 펼쳤다.
" Storm!! "
' 말도 안돼- 이렇게 빨리?? '
두 번째 주문은 예상치 못했던 것이고 급히 몸을 날렸다. 하지만 범위 내에서 미처 피할 수 없었고 은지와 나는 근처 나무에 부딪치고 말았다.
" 으윽- "
등이 부서지는 듯한 아픔이 느껴짐에 따라 얼굴이 일그러졌다. 살짝 고개를 돌려보니 은지는 기절한 것 같았다.
" 뭐, 그 정도면 움직이기 힘들겠죠? "
디제는 여유 만만하게 웃더니 영이에게로 다가갔다. 어지러움이 느껴지기에 손으로 머리를 짚으며 일어서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몸은 마치 내 몸이 아닌 것처럼 꿈적도 하지 않았고 머리에서 피가 흐름이 느껴졌다. 하는 수 없이 나는 나무에 기댄 자세로 꼼짝없이 있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 자, 이제 한번 겨뤄볼까요? "
디제는 영이를 향해 지팡이를 휘둘렀다. 그러자 영이는 기우뚱하더니 이내 다시 중심을 잡고 서서 외쳤다.
" 이게, 이게 뭐 하는 짓이야!! "
" 뭐, 하는 짓이라니요? "
" 싸울 거면 나하고만 싸우면 되잖아! 도대체 왜, 왜!! "
영이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흐느꼈다.
" 그야, 제가 당신과 싸우면 이들이 우리 둘을 방해할 테니까요. 뭐, 그냥 잠들게 한다던가 속박시켜 놓는 것보다 더 확실한 방법이고 더 유쾌한 방법이죠. 잠들게 하거나 속박시켰다가 만약 저들이 마법을 풀게 되면 저만 손해 아닙니까? 게다가 저 시간의 마도사 이카미스님은 위험인물이거든요. 제 마법쯤... 힘만 차리면 풀 수 있을 테니... 후훗- 뭐, 죽이는 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지만 사정이 사정이니 만큼 죽일 수도 없고... "
디제는 재수 없게 웃으며 말했다. 그 말에 영이는 화가 많이
났는지 숨쉬기 거북할 정도의 엄청난 살기를 내뿜었다.
" 똑같이 해주겠어- 내 친구들에게 한 것처럼. 아니 그보다
더한 대접을 해주지. "
분노 어린 말에 디제는 다시 한번 재주 없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 물론, 이렇게 해서 상대방의 실력을 더 끌어낼 수 있다는
장점도 있죠. 자, 이제 싸워보죠. 각자의 목숨을 걸고 자신의
최고의 실력으로- 잘못된 운명을 바로 잡기 위해 제가 선택한 싸움 상대 아르나드님. "
" 잔말 말고 덤벼. 아작을 내주지. "
아마도 여기 와서... 아니 영이를 만났던 때부터 영이가 저렇게 화내는 모습을 보긴 처음인 것 같다. 영이는 분노가 가득한 시선으로 디제를 노려보았다. 디제는 그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미소짓더니 이내 표정을 차갑게 바꾸어
한마디 말을 내뱉으며 영이를 향해 검을 치켜세워 달려갔다.
" 자, 갑니다- 아르나드님. "
디제는 우리들의 공격으로 얻은 상처에도 불구하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잽싸게 영이에게로 달려갔다. 영은 디제의 공격을 간단히 피하고는 가볍게 일격을 가했다. 그러나 디제도
만만치 않아 쉽게 검을 피했다. 이윽고 둘의 화려한 검술 대결이 펼쳐졌다.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고 주저앉아 움직이지 조차 못하는 내가 원망스러웠다. 그렇게 둘은 계속 아슬아슬한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 아르나드님... "
어디선가 어린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선가 많이
듣던 목소리... 설마...
" 세레나님? "
" 네...네페...르타리님... "
세레나는 금방이라도 울 듯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머리의 통증을 간신히 참아내며 세레나를 향해 물었다.
"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 "
" 너무, 너무 걱정이 돼서... 괜찮으세요. 네페르타리님? "
내게로 살그머니 다가선 세레나는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다.
휴- 지금 이 모습이 괜찮아 보일 리 있나?
" 어서 내려가세요. 위험해요. 저자가 우릴 죽이진 않을 테니... 걱정 마시고 어서!! "
" 하...하지만... 저자는... 아르나드님을 죽일 거잖아요... "
세레나는 참던 눈물을 토해냈다. 겁에 질린 듯 떨면서도 어쩔 줄 몰라하며 영이 쪽을 바라보았다. 둘은 아직도 접전 중이었다.
" 그러지 말고 어서 내려가요... 어서!! 제발... "
나는 쥐어짜듯이 간절히 말했다. 하지만 세레나의 도리질
하나로 그 말은 아무런 쓸모가 없어졌다. 세레나는 옷을 찢어 내 상처를 지혈해주었다. 그리고는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 앗... 카...카르...카르딘님이... "
쓰러져 있는 인화를 발견했는지 세레나는 급히 어디론가 뛰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이제 될 대로 되라는 식이었다. 살짝
고개를 돌려보니 급히 인화의 상처를 지혈하고 있는 세레나가 보였다. 그렇게 인화가 좋을까, 도대체 뭐가 좋은 걸까라는 이런 상황에 알맞지 못한 멍청한 생각을 하고 있던 나는
옆에서 작은 목소리가 울려 퍼짐을 느끼고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 모든 것의 근본이 되는 힘... 모든 것을 유...지시켜 주는
힘... 아무 것도 느낄 수 없는 허무와 모든... 것을 느낄 수
있는 혼돈으로... 구성된 절대적...인 힘- 그 힘을 소유하신
당신께 원하오니... 끊임없이 힘을... 갈망하여 쫓는 나에게
당신의... 힘을 부여하소서... 절대명령- "
어느 샌가 돌에 기대어 앉은 진영은 띄엄띄엄 힘들게 주문을 외웠다. 그리고는 손가락을 들어 디제 쪽을 향한 다음 간단하게 말했다.
" 정지. "
순간 거짓말처럼 디제의 움직임이 멈췄다. 날아오는 디제의
검을 피하려던 영이는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디제를 쳐다봤다. 디제 역시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진영은 힘겹게 한 발 한 발 옮기며 디제에게 다가갔다.
" 절대명령주문이다... 그리 놀랄 것 없어- 내 질문에 대답이나 똑바로 해. 너 사실 이 세계 사람이 아니지? "
" ...... "
디제는 아무 말도 없었다. 단지 굳어진 표정으로 진영을 응시할 뿐...
" 우리와 같은 세계에서 왔나? 언제 온 거지? "
" ...... "
진영은 디제가 계속 아무런 말이 없자, 짜증이 난 듯이 말했다. "
" 내가 한마디만 하면 널 죽일 수 있어. 죽으려고 하는 게 아니라면 대답해. "
" 하지만 제가 말하고 난 뒤에 죽인다면 저만 손해 아닙니까? "
속박 당한 상태에서도 디제는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 웃음이 결코 그전처럼 비웃음으로 보이지 만은 않았다.
" 내가 이 다친 몸으로 그 때까지 주문을 유지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나? 그것도 절대명령 주문을? "
" ......좋습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말못할 것도 없죠. "
디제는 이내 체념한 듯이 말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옛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 물론. 이 세계 사람이 아닌 저는 10년 전 이곳으로 왔습니다. 그땐 친구들과 함께였죠. 우리는 모두 7명... 아무 것도
모르던 우리들은 그럭저럭 이 생활에 잘 적응해나갔습니다.
그리고 3년 후, 우리들 중 저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죽었습니다. 인간들의 손에 의해... "
" 어...째서...? "
언제 정신을 차렸는지 은지가 의외라는 듯 힘겹게 말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하나, 둘 다들 깨어나 있었다.
" 알 수 없지요. 그 후 전 신의 사자라는 걸 듣게 되었고 다른 세계에서 온 인간... 우리 7명이 그 신의 사자였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리고 난 짐작했지요. 그 인간들은 우리가 자신의 세계를 망칠까봐 겁이 나서 그랬던 것일 거라고. 그리고 결심했습니다. 신의 사자가 되어 그들을 멸망시키리라...
그렇게 마음먹고 기다린 것이 6년... "
어느새 디제의 눈에는 분노가 가득했다. 우리들은 묵묵히
디제의 말에 귀 기울였다.
" 신의 사자라 불리는 당신들이 나타났죠. 저는 제 죽은 친구들을 대신할 자가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이 곳에 온 사람은 7명이었죠. 사실상 6명이어야
정상인데요. 그래서 전 생각했습니다. 당신들 중 한 명을 죽이고 제가 신의 사자가 될 거라고. 잘못된 것을 바로 잡겠다고!! "
말을 마친 디제는 잠시 눈을 감더니 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진영을 향해 다시 말했다.
" 이제 됐습니까? 어쨌든 지금은 당신들 중 한 명이 죽을 차례입니다. 이카미스... 날 살려둔 것을 후회할 겁니다. "
그 말에 우리들은 다들 긴장했다. 설마, 마법이 해제된 걸까?
" 커헉- "
무리한 마법에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진영의 앞에서 비웃듯 웃고있는 디제의 얼굴이 보였다. 곧 디제는 옆에 서있는 자신의 결투 상대. 영이를 내려치기 위해 검을 들었다. 그리고, 그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