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깜해지고 싶은 저녁
여태천
하루종일 안되는 글을 붙잡고 있었다.
뒤가 켕겨서 우울한 감정을 어쩌지 못하고
그냥 두고 가지도 못하고
마침표를 찍었다가 다시 지웠다가를 반복하며
은하를 헤아리듯 문장을 헤아리고만 있었다.
이러다 죽겠다 싶어 글을 죽였다.
순간 한 세계가 깜깜해지고 말았다.
죽을죄를 지었다.
죽여서는 안되는 글을 죽이고
죽여야 할 감정은 죽이지 못하고
해야 할 말도 하지 못한 채
쥐 죽은 듯이 자꾸만 자꾸만 쪼그라든다.
유령 같은 글이나 쓰고 있었다는 게
쪽팔려서 집으로 가다가 웃고 말았다.
유령도 못된 문장에게 예의를 갖추려는데
달라지기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
가로등이 깜빡거린다.
생각도 깜빡거린다.
때로 가로등도 바닥에 눕고 싶을 것이다.
저 아래 뭔가가 자꾸 눈에 아른거려서가 아니라
줄곧 서 있어서가 아니라
서 있는 게 지루해서가 아니라
그냥 불 끄고 깜깜해지고 싶어서.
때로 가로등은 쪽팔릴 것이다.
뭐 대단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닌데
남몰래 흘리는 눈물이나 훔쳐보고 있는 게
무안하기도 하고 부끄러워
얼굴을 붉히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늘 밤은 깜빡거리며 오래 참을 수 있을 것 같다.
마주치고 싶지 않은
오늘은 어제가 아니에요.
어제는 여러 날 중에 어느 요일
신호등을 보고 건너는 어제의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몸을 통과해가는 불빛
어제와 오늘이 만나 운명처럼 일그러진다.
손톱을 깎다가 손거스러미를 그냥 두는 것처럼
어제는 남겨야 할 시간
내일이면
한번 지나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 같은
어제가 돌아온다.
집을 부수고 나갔던 아버지가 돌아오고
시집갔던 누이가 그믐 같은 낯빛으로 돌아오고
포수의 미트에서 투수의 글러브로 흰 공이
포물선을 그리며 돌아올 것이다.
트레이드된 선수를 다시 불러들이는 일
모든 집에는 떠난 이를 위한 자리가 있다.
돌아오지 않는 것들은
남겨진 이들에게 어둠이다.
―계간 『시에』 2013년 겨울호
여태천
경남 하동 출생. 2000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 『저렇게 오렌지는 익어 가고』, 『스윙』, 『국외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