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821
4월8일[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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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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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p-U2kjiVZVQ
[서울대교구 박진수 요엘(오류동성당 부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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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늘 새롭게 태어나셔야 합니다!>
원래 3월 25일에 경축하던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이 올해는 훨씬 뒤로 밀렸습니다. 이유는 올해 이 대축일이 성주간과 겹칠 경우 부활 제2주일 다음 월요일로 옮겨 지낸다는 로마 미사 경본 지침에 따른 것입니다.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을 맞아 중세 신비가 마이스터 엑가르트의 말씀이 새삼스럽게 떠오릅니다.
“마리아에게서처럼 우리 각자 안에서도 아기 예수의 잉태와 탄생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예수를 낳지 못한다면 마리아가 그때 거기에서 예수를 낳았다는 사실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늘 새롭게 태어나셔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여기 이 자리에서 매일 아기 예수의 탄생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이를 위해 우리는 버리고 떠나있기 연습에 충실해야 합니다. 그래서 철저하게도 빈 그릇으로 존재할 때 그 빈 그릇에 겸손하신 아기 예수님께서 잉태되실 것이고 탄생하실 것입니다.
자신의 영혼 속에서 ‘하느님의 탄생’을 이루어 낼 때, 비로소 한 인간은 하느님과 하나가 됩니다. 이런 큰 기쁨과 영광을 원한다면 반드시 먼저 우리 마음의 밭갈이 작업이 필요합니다. 아기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탄생하실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마음을 비우고 또 비우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잉태하는 일은 세상의 가치관과 문화에 도전하는 어려운 일이 분명합니다. 그 옛날 나자렛의 마리아가 그랬듯이 큰 용기가 필요합니다. 다양한 목소리를 통해 다가오는 천사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내 안에 잉태한다는 것은 마리아가 그랬듯이 안락한 삶을 포기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를 내 안에 잉태한다는 것은 마리아가 그랬듯이 본능과 이기심, 자기중심적 삶을 철저하게도 배제하겠다는 다짐입니다.
그리스도를 내 안에 잉태한다는 것은 안개 자욱한 낯선 길을 떠나겠다는 결심입니다. 그리스도를 내 안에 잉태한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과 비난과 멸시를 꿋꿋이 견뎌내겠다는 각오입니다.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잉태하고 낳아 기르겠다는 것,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지는 과제이자 세례를 통해 받은 책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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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4zJUGMgFS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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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있는 것도 죄고 혼자 있게 하는 것도 죄다
오늘 가브리엘 천사는 성모님께 나타나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라고 인사합니다. 성모님은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라고 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주님께 함께 있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죄를 짓고 주님과 함께 있기를 원치 않아서
숨었습니다. 이것 자체가 죄입니다. 인간은 혼자 있을 수도 없는데 혼자 있겠다고 합니다. 빛을 떠나 혼자 있고 싶다는 말은 어둠과 있겠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혼자 있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혼자 사는 분들은 반드시 누군가와 함께 머물기 위해 혼자 있는 것입니다. 그 누군가가 누구일까요? 99%는 부모나 배우자, 혹은 형제입니다. 만약 이도 저도 아니라면 ‘자아’나 사탄과 함께 있게 됩니다. 그러면 정신이 이상하게 됩니다.
유튜브에서 ‘섬에서 혼자 사는 바다 자연인’이 많은 조회수를 기록한 것을 보았습니다. 정말 이 주인공은 섬에서 혼자 살까요?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렇지 않습니다. 이분은 사업 실패로 세상이 싫어졌습니다.
그래서 섬으로 와서 혼자 사는데, 동생까지
교통사고를 크게 당한 것입니다. 어느 정도 치료하고 동생을 공기 좋은 자신이 사는 곳으로 데려왔습니다.
그러나 음식 탓인지, 병원이 없는 탓인지 좋아지는 것 같다가 치료도 못 해보고 죽었습니다. 이에 동생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그 섬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사실 혼자 있고 싶은 게 아니라 동생과 함께 있고 싶은 것입니다. 자신을 유일하게 이해해 줄 동생과 함께 있고 싶은 것이 혼자 있고 싶은 것이 된 것입니다. 이런 분들이 그 삶에 만족하게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됩니다. 혼자는 행복하다고 하지만, 실제로 점점 어둠과 가까워집니다.
여성이 혼자 살겠다고 결정했지만, 실제로는 마귀와 함께 사는 경우를 보았습니다. 그 자매는 자신이 마귀와 잠자리도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혼자가 좋다고 합니다. 혼자가 좋은 게 아니라 마귀랑 사는 게 좋은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께서 함께 계심을 알려주는 가브리엘 천사와 같은 존재입니다.
먼저 하느님께서 함께 계심을 믿지 못하면 다른 사람에게 나아갈 수 없습니다. 이는 마치 아기가 어머니와 함께 있으면 장난감 가지고 재밌게 놀지만, 어머니가 안 보이면 불안해서 우는 것과 같습니다.
먼저 어머니와 함께 있는 게 느껴져야 밖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둠, 사탄의 손아귀에 갇히게 됩니다. 그러니 혼자 있고 싶어 하는 자연인들에게 우리가 해야 하는 역할은 가브리엘 천사의 역할입니다.
산속에서 수십 년간 혼자 살아가는 이들이나, 화장실 같은 곳에 스스로 자기를 가두고 살아가는 이들은 자기들을 그냥 내버려 두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방송국의 스텝들은 그 좁은 공간에서, 그리고 그 추운 곳에서 그들과 함께 머뭅니다. 그들이 진정 원하는 것은 혼자 있는 게 아니라 자기를 사랑해주는 누군가의 존재와 함께 머물기를 원하는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면 많은 경우 그 사람들이 스텝들이 사는 세상으로 내려오게 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믿음입니다. 저희 어머니도 자꾸 고향인 부산에 가서 살고 싶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것이 혼자 있고 싶은 게 아니라 어머니와 함께 있고 싶다는 말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브리엘 천사나 성모님께서 엘리사벳을 방문하는 역할을 해주지 못하고 있다는 말인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너무 오래 혼자 있게 해 드리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혼자 있는 것은 결국 자기를 망치는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혼자 있는 것도 죄이고, 혼자 있겠다는 사람을 혼자 내버려 두는 것도 죄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라고 말해줄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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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은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입니다. 원래는 3월 25일입니다. 그런데 왜 부활 제2주간 월요일로 옮겨서 축일을 지내게 되었을까요? 교회가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이 성주간과 겹치면 부활 제2주간 월요일로 옮겨서 지낸다고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성주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로 이루어지는 교회 전례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신학적인 성찰에 따른 교회의 결정입니다. 저는 신학적인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지만 또 다른 의미로 해석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자식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기꺼이 내어 주는 어머니의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구원의 역사에서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도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축일입니다. 마리아의 순명이 있었기에 하느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올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의 구원도 마리아라는 처녀의 자유의지와 결단을 통해서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은 어머니의 마음으로 기꺼이 아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거룩하게 지내는 성주간에 자신의 자리를 내어 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그것이 세상 모든 어머니들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본당 교우들과 함께 메주고리, 파티마, 루르드로 이어지는 성모님 발현 성지순례를 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성모님의 발현 성지순례를 하는 중에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을 지낼 수 있도록 허락하셨다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성모님에게 특별한 공경과 사랑을 드리고 있습니다.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교회는 성모님을 ‘천주의 모친’으로 공경합니다. 성모님은 인간 예수의 어머니이면서 삼위일체이신 그리스도의 어머니라고 신앙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칭호는 성모님에 대한 지극한 공경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어머니에게 요한 사도를 아들로 부탁했습니다. 교회는 사도로부터 이어지기에 성모님은 교회의 어머니가 되십니다. 사도로부터 이어온 교회는 성모님을 교회의 어머니로 공경하고 있습니다.
성모님을 ‘복되신 동정녀’로 공경합니다. 성모님의 잉태는 성령으로 인한 잉태였기에 성모님은 동정녀라고 교회의 전승은 이야기합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이야기한 것처럼 성모님의 몸에서 ‘임마누엘’ 주님이 태어나셨습니다. 하와의 불순종으로 죄가 들어왔고, 죄의 결과는 죽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모님의 순종으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고, 예수님께서는 죄, 죽음, 악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는 구원자가 되셨습니다. 동정녀는 생물학적인 의미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순히 독신으로 사는 것은 동정녀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하느님께 의지하면서 동정을 지키는 사람을 동정녀라고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정결하게 사는 이들이 동정녀입니다.
성모님은 ‘강한 어머니이며 신앙의 여성’입니다. 십자가의 길에서 예수님을 만났고, 성모님은 예수님 십자가를 함께 지셨습니다. 십자가에 내려진 예수님을 무덤에 묻기 전에 성모님은 가슴에 묻었습니다. 초대교회 사도들에게 성모님은 힘들 때는 위로가 되었습니다. 두려울 때는 용기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잉태하고, 성모님은 친척인 엘리사벳을 찾아갔습니다. 인류의 구원을 위한 당찬 여인들의 만남이 있었습니다. 엘리사벳은 구세주의 어머니를 알아보았고, 태중의 아이까지 축복하였습니다. 성모님은 구름 속에 있는 고귀한 여성이 아니었습니다. 천상에서 우리를 위해 전구하는 어머니가 아니었습니다. 동정녀이기 전에, 천주의 모친이기 전에 성모님은 강한 어머니였고, 신앙의 여성이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마리아의 노래’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을 지내면서 ‘마리아의 노래’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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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4월8일 [주님의 탄생 예고 대축일]
오늘은 주님의 탄생 예고 대축일이다. 하느님께서 마리아의 응답을 통해 사람이 되시는 위대한 사실을 오늘 복음은 전해주고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다는 것은 곧 인간의 차원이 하느님의 차원으로 들어 올려졌다는 것이다. 즉 인간이 하느님과 같이 되게 하려고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것이다. 하느님의 뜻에 대한 마리아의 응답은 이제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이룰 수 있게 하였고, 그 마리아의 자세는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의 모범이 된다.
복음: 루카 1,26-38: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탄생 예고가 이어지고 있다. 복음에서는 가브리엘 천사가 등장하는데, 가브리엘은 하느님의 힘이라는 뜻이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28절) 이런 인사는 남자가 들은 것이 아니라 오직 마리아에게만 주어진 인사였다. 주님께서는 그냥 마리아를 보러 오시는 것이 아니라, 태어남의 새로운 신비를 통해 마리아에게로 내려오시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28절) 주님께서는 그냥 마리아를 보러 오시는 것이 아니라, 태어남의 신비를 통해 마리아에게로 내려오시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천사를 바라보던 그 자리에서 하늘의 심판관을 몸에 받아 모시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하느님께서는 한 처녀를 당신의 어머니로 만드셨고, 당신 여종을 어머니로 삼으셨다. 온 세상도 하느님을 품지 못하지만, 하느님은 온전히 그 품에 오시어 사람이 되셨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31절) 천사는 마리아에게 하느님께서 그녀 안에서 행하시는 거룩한 신비를 드러내 줄 아기에 대하여 말한다. 마리아는 처녀로서 어머니가 될 것이다. 그 아기는 하느님의 아들이자 사람의 아들이 되실 분이다. 예수라는 이름은 그분이 하시는 일을 의미한다. 그분은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시고, 세상을 다시 창조하실 분이시다.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34절) 예수님의 탄생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한다. 이 물음은 동정 잉태라는 신비에 대한 깊은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천사는 성령께서 마리아에게 내려오시어 잉태하리라고 한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다.”(35절) 마리아가 열매를 맺게 하신 분은 물 위를 감돌며 창조를 이루시는 성령이시다.(창세 1,2 참조)
마리아가 하느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심으로써 아들이신 말씀을 잉태하시게 되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언제나 하느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며 말씀을 잉태하고 그 말씀을 구체적으로 이웃에게 낳아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말씀을 잉태한다는 것은, 마리아와 같이 자신의 인간적인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버려야 한다. 나 자신을 온전히 버리지 못하면 주님을 올바로 따를 수 없다. 하느님의 말씀을 산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다. 매 순간 주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자신을 끊고 자신을 버리는 고통이라는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나 자신이라는 십자가이다. 이 십자가를 통해서만이 우리는 마리아와 같이 말씀을 잉태하고 그 말씀을 낳아줄 수 있을 것이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38절) 마리아는 하느님께 순종함으로써 하와의 불복종을 되돌려 놓는다. 그리하여 한 천사였던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첫 번째 처녀의 타락이 다른 천사의 말을 받아들인 이 처녀 마리아의 믿음으로 극복되고 있다. 마리아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다. 마리아는 평범한 한 시골 처녀였다. 우리와 같은 한 사람이고 평범한 삶을 사는 인간이었다. 그 마리아가 그렇게 하느님께 자신의 신앙을 고백할 수 있었다면, 우리도 마리아와 같이 고백하고 실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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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미리내 성모성심 수녀회)]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에 봉독되는 성경 본문들이 강조하는 주제는 ‘하느님의 뜻에 대한 순명’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제1독서에서 “임마누엘”, 곧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으로 선언됩니다.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쉽게 감지하지 못하는 우리를 위하여,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모습으로 태어나시어 우리와 함께 계시고자 하십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계획은 성모님의 응답을 통하여 이루어지는데, 우리말로 “보십시오.”라고 표현된 그리스 말 ‘이두’는 단순히 “네.”로도 옮길 수 있는 낱말입니다. 물론 이 “네.”는 앞으로 감수하여야 할 모든 고난과 도전을 받아들이겠다는 의지의 표명이기도 합니다. 이 “네.”를 통하여 성모님의 작은 몸에 창조주가 인류 역사의 거대한 질서와 함께 들어오십니다.
그런데 사실 ‘하느님의 육화’는 성모님의 “네.” 이전에 예수님의 “네.”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하느님으로서 위상을 고집하지 않으시고 나자렛의 마리아에게서 태어남을 허락하셨기에 성모님의 허락도 가능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2독서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라는 예수님의 고백을 두 번 되풀이함으로써, 인간과 함께하시고자 하는 뜻에 이미 예수님께서 동의하셨음을 분명히 합니다.
언젠가 오늘 복음을 묵상하다가, 이 장엄한 사건이 나자렛의 작은 집에서 이루어진 것에 큰 위로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중대한 사건이 대성전이나 교회의 공적 자리가 아닌 소박한 공간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이 감사하게 느껴졌습니다. 하느님의 거대한 계획은 가난하고 누추한 공간에서도 시작됩니다. 성당에 갈 수 없을 때, 기도할 장소가 마땅하지 않을 때, 나의 열악한 환경만을 탓할 것이 아니라, 별 볼 일 없는 내 삶의 자리가 “은총이 가득한 이”가 “기뻐하고”, “주님께서 함께 계시는” 장소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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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순종>
“천사가 다시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마리아가 천사에게,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자, 천사가 마리아에게 대답하였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 아이를 못 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마리아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루카 1,30-38)
1) ‘하느님의 뜻’은 ‘인간 구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8,14)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7) 구약성경에 있는 다음 말씀도 ‘하느님의 뜻’을 잘 나타냅니다. “내 생명을 걸고 말한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나는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는다. 오히려 악인이 자기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을 기뻐한다. 돌아서라. 너희 악한 길에서 돌아서라. 이스라엘 집안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으려 하느냐?"(에제 33,11) 예수님의 첫 복음 선포인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라는 선포는(마태 4,17) ‘하느님의 뜻’은 곧 ‘인간 구원’이라는 선포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계시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방법’입니다.>
2) ‘성모님의 순종’은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의 인류 구원 사업의 도구로 봉헌하신 일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는 말씀은, “저를 통해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는 뜻이고, 자신을 도구로 쓰시라고 하느님께 바친다는 뜻입니다. <우리 경우에는, “자기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우리가 실행해야 할 첫 번째 ‘순종’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의 구원’을 바라시기 때문에, 그 뜻에 순종하는 첫 번째 방법은 곧 ‘나 자신이 구원받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두 번째 순종은 이웃의 구원을 위해서 노력하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구원의 길을 잘 걸어가고 있어야만 다른 사람을 그 길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첫 번째, 두 번째로 표현하긴 하지만, 중요도를 생각하면, 두 가지가 똑같이 중요합니다.>
3) ‘순종’을 ‘허락’이나 ‘수락’으로 표현하는 것은 잘못된 표현이고,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 순종입니다. 그리고 그 응답은, 명령에 복종하는 것과는 다르게 ‘모든 것을 다 바치는 사랑’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결국 ‘순종’은 ‘사랑’입니다.
4) 아무 일에나 다 ‘하느님의 뜻’이라는 말을 갖다 붙이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라는 말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해서 남용하는 잘못된 일입니다. 전쟁, 질병, 자연재해, 독재 정권, 식민지배... 그런 일들이 하느님의 뜻일 수는 없습니다. “내가 병에 걸린 것은 하느님의 뜻이다.”라고 말하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병’이 정말로 하느님의 뜻이라면, 우리가 병의 치료를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가 되어버리는데,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실제로 어떤 고통과 불행을 하느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면서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뜻이라는 말을 완전히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고통과 불행이 아니라, 그것들을 극복하고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장상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과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을 혼동하는 경우도 있는데, 장상의 명령이 하느님의 계명에 어긋나는 일이거나, 선과 사랑을 거스르는 일이라면, 그 잘못된 명령에 복종하면 안 됩니다. 명령하는 입장에서도 자기 개인의 명령을 주님의 뜻인 것처럼 내세우면서 순종하라고 강요하거나 압박하면 안 됩니다.>
5) “성모님을 본받아서 우리도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신앙인이 되자.” 라고 말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그렇지만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구원의 길’이 어떤 길인지), 어떻게 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되는지 모를 때가 많다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맞서 싸우는 것이 하느님의 뜻인가? 인내하면서 기다리는 것이 하느님의 뜻인가? 이 상황을 피해서 멀리 달아나서 숨는 것이 하느님의 뜻인가?”를 묻게 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해야 ‘선’과 ‘사랑’과 ‘구원’이 실현될까?”를 판단 기준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지금 말하는 선(善)은 ‘하느님의 선’을 뜻하는 말이고, “나 한 사람에게만 좋은 일”이 아니라 ‘모두에게 좋은 일’, 즉 ‘공동선’을 뜻하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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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최종훈 토마스 신부님]
세상에는 지금도 삶과 죽음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어딘가에서는 사고로, 전쟁으로, 무관심으로, 미움과 욕심으로 사람들이 죽어 나갑니다. 그런데 또 어딘가에서는 사랑으로, 믿음으로, 위로와 배려로, 희생으로 또 다른 생명을 얻어 새로운 삶을 살아갑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각자의 삶에도 삶과 죽음이 연결되어 있고, 또 우리 곁에 삶과 죽음이 가까이 있음을 알아 갑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시기심과 질투로, 이기심과 욕심으로 누군가를 짓밟고 죽이며 살아가기도 하지만, 누군가를 사랑하고 배려하며 위로하고 안아 주면서 새로운 삶으로 이끌어 주기도 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저마다 행동으로 삶과 죽음을 반복합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면서 보내는 사순 시기, 유다인들의 시기와 욕심으로 예수님을 죽이려는 음모와 술수가 난무하는 이 사순 시기에 생명의 탄생을, 새로운 구원의 삶을 가져다주는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하는 대축일을 지냅니다. 그런데 그 새로운 생명의 탄생 예고에도 우리네 하루처럼 삶과 죽음의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천사의 알림은 젊은 약혼녀의 죽음을 뜻합니다. 천사를 보고 죽음의 두려움을 체험한 마리아는 모든 것을 거부할 수 있었습니다. 더 편하고 더 안정적인 삶을 살고자 마리아는 아무런 응답도 행동도 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만약 마리아가 천사의 말을 거부하였다면 그 마음은 예수님을 시기하여 음모를 꾸미고 군중을 선동하였던 유다인과 별반 다르지 않은 마음일 것입니다. 자신만 살려고 누군가를 죽이려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모든 것을 받아들입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이 한마디로 자신을 희생하고 내어놓음으로써 모든 사람을 살리게 됩니다.
우리의 선택과 결정으로 누군가를 죽이는 길을 갈 수도 있고, 아니면 희생과 죽음으로 다른 사람을 살리는 길을 갈 수도 있습니다. 자신을 죽이는 것, 두렵지만 믿고 내어놓는 것이 영원한 생명을 살아가는 우리의 선택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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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바오로회 故 유광수 야고보 신부님]
“총애를 입은 이여”(루카 복음 1장 26절-38절)
천사는 마리아를 찾아가 "총애를 입은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하고 인사하였다. 이 인사는 마리아에게만 하신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총애를 입은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하고 인사하시는 것이다.
하느님은 늘 우리에게 은총을 베푸시는 분이시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은총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하느님의 은총이 없이는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너희는 나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는가?
다만 우리가 그것을 느끼지 않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한결같이 누구에게나 은총을 내려 주시는 분이시다. 우리가 받아들이거나 안 받아들이거나 알아듣거나 못 알아듣거나 관계없이 선인이나 악인이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시고 햇빛을 내려주시듯이 같은 은총을 내려주신다.
하느님의 은총이 누구에게는 큰 것을 내려주시고 누구에게는 작은 것을 내려 주시는 것이 아니라 각자 자기에게 가장 알맞는 큰 은총을 내려주신다. 문제는 하느님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은총을 받아들이는 이에게 달려 있다.
은총을 받아들이는 그릇이 크면 많은 은총을 받을 것이고 그릇이 작으면 조금밖에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은총은 받아들이는 만큼 받는 것이다.
하느님이 주시는 은총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 가장 큰 은총이 있다. 가장 큰 은총이 무엇인가를 알고 그 은총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생각하고 그 은총을 우선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고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은총을 가장 큰 은총이라고 생각하고 가장 중요한 은총은 소홀히 하면서 다른 은총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것만 받아들이려는 사람이 있다. 우리는 무엇이 가장 큰 은총인가를 잘 알고 가장 큰 은총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럼, 가장 큰 은총이란 무엇일까? 오늘 복음을 보면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총애를 입은 이여, 기뻐하여라. 주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가장 큰 은총은 "주께서 나와 함께 계시는" 은총이다. 사실 이보다 더 큰 은총은 없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라고 말씀하셨듯이 모든 것이 가능하신 하느님과 함께 하는 것보다 더 큰 은총이 어디 있겠는가?
마리아가 총애를 입었다는 것은 바로 "주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돈을 많이 벌게 되었다는 것도 아니고, 로또 복권에 당선되었다는 것도 아니고, 미스 월드에 뽑혀서도 아니다. 단 하나 즉 "주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것, 그것이 가장 큰 은총이요, 총애를 입은 거다.
가장 큰 은총을 받으면 어떻게 되는가? "보라. 이제 네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하느님의 아들 예수를 낳게 된다.
그런 일이 어떻게 이루워지는가? 주님께서 어떻게 함께 계시는가?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마리아도 처음에는 그 방법을 몰라서 천사에게 물었다.
"저는 어떻게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으니까 천사가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 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라고 말씀해 주셨듯이 남자 즉 인간을 통해서가 아니라 성령을 통하여 거룩한 아기를 갖게 되는 것이다.
즉 예수를 잉태하는 일은 하느님이 내 안에서 하시는 일이지 내가 하는 일이 아니다. 그러기 때문에 은총이 필요한 것이고 그 은총을 받아들이는 이에게만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은총 중에 가장 큰 은총은 성령을 통하여 예수를 잉태하는 은총이다.
그럼 오늘 내가 예수를 잉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성령이 내 안에서 활동하시도록 나를 성령께 맡기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그리스도인은 성령을 따라는 사는 삶이다. 그래서 성 바오로는 "여러분은 성령의 지도를 따라 사는 사람"(갈라 6장 1절)이라고 했던 것이다.
성령의 지도를 따라 산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성령은 보이지 않는다. 그럼 어떻게 성령을 따라 살 수 있는가? 요한은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요한 16장 13절-15절)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오늘 가장 큰 은총은 말씀이 사람이 되어 오셨던 분이 다시 말씀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하여 낳으셨듯이 내가 말씀을 받아들여 다시 말씀을 내놓는 삶을 사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은총을 받는 사람은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 복음을 다시 사람들에게 낳아주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하는가?
마리아는 우리에게 그 모범을 보여 주셨다. 즉 마리아는 천사의 말을 듣고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말씀하셨다. 바로 마리아의 이런 자세가 바로 은총을 받아들이는 자세요, 예수를 내 안에 잉태해서 낳아주는 사람이 되는 자세이다.
잉태하여 하나의 생명을 낳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가장 힘든 일이며 가장 위대한 일이다. 가장 위대한 일인만큼 거기에 따른 희생도 그만큼 크다.
그리하여 성 바오로는 "여러분 속에 그리스도가 형성될 때까지 나는 또다시 해산의 고통을 겪어야겠습니다."(갈라 4장 19절)라고 말했다.
그렇다. 내가 그리스도로 형성되기 위해서는 해산의 고통을 겪어야하고 또 다른 이들에게 예수를 전해주는 일은 또 다른 해산의 고통을 통해서만이 가능한 일이다.
이 일은 나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은총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며 내가 은총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그만큼 어려운 일인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은 누구에게나 똑같은 은총을 내려 주시지만 누구나 다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그 은총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한 사람만 받을 것이고 은총을 받아들인만큼 충만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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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1,31.38)
성모 영보領報 대축일에서 ‘예수님의 탄생 예고豫告’ 대축일로 명칭이 변경된 것은 초점이 성모님께서 잉태하셨다는 관점보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구원자로 태어날 것을 예고했다는 사실을 더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축일 무게의 중심이 오늘 축일의 근본 혹 뿌리로 되돌아갔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2007년 세 번째로 방문했던 나자렛의 <탄생예고성당 지하 소성당 제대>에는 는 문장이 새겨져 있으며, 그곳에서는 연중 내내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이 선포되고 미사가 봉헌됩니다. 그 근저에는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을 위하여 사람들 가운데, 성령의 힘에 감싸여 탄생하시리라는 천사의 알림을, 동정 마리아께서는 믿음으로 받아들이시고, 새로운 인류의 맏이이신 외아드님을 성령으로 잉태하시어, 당신의 흠 없는 태중에 모셔 들이셨나이다. 이로써 이스라엘 후손에게 하신 약속이 이루어지고, 모든 민족들이 기다려 온 구세주가 신비롭게 세상에 드러났나이다.』(감사송) 라고 교회는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는 이사야 예언자가 아하즈에게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7,14)는 예언을 통해 예고하였습니다. 마침내, 때가 되어 하느님께서는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가게 하셨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1,27.28) 하고 전하셨습니다. 이 예고엔 무엇보다 먼저 마리아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 자각해야 하는 것은 '주님께서 마리아와 함께 계시고, 은총과 사랑으로 주님께서 함께 머물고 계시다.'는 깨달음입니다. 이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에 대한 마리아의 반응은 “몹시 놀랐다.”(1,29) 이 놀라움은 두려움이 아닌 경외심과 경이로움에 대한 반응이었기에 그냥 지나치지 않고 곰곰이 되새겨야 합니다. 이런 마리아에게 천사는,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고 불리실 것이다.”(1,30~1.32) 는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알립니다. 천사의 발현도 그렇지만, 천사를 통해 알려준 하느님의 뜻은 도저히 마리아의 생각과 의지를 뛰어넘는 참으로 놀라운 예고였습니다. 믿음이 있다고 하더라도 인간, 곧 여성의 조건에 따른 한계를 지닌 마리아이기에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1,34) 라는 질문은 지극히 상식적인 질문이고 이는 곧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실존적 고백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의문은 역설적으로 이후 천사의 대답을 통해 밝혀질 마리아의 동정 잉태에 대한 가능성을 열게 된 질문이라고 저는 느껴집니다. 즉,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1,35) 이 전언이 바로 오늘 교회가 기억하고 기념하는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의 기원이고 근거가 되는 강생-육화 신비의 핵심입니다. 그러기에 이 예고에 대한 지극히 당연한 응답은 바로 성모 영보의 요체인 마리아의,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1,38) 라는 말씀 안에 온전히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 응답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놀라운 구세 경륜이 펼쳐지게 된 것입니다. 하느님의 총애를 받으신 성모님의 ‘말씀하신 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는 이 응답은 구세사의 특이점(=응답 이전과 이후의 차이)의 순간입니다. 마침내 하느님의 뜻이 곧 하느님의 외아드님이 사람이 되기 위해 여인의 몸에 수태된 은총의 순간이었습니다. 이로써 세상의 어떤 존재보다 성모님은 하느님의 탁월한 구원의 연장이자 도구가 되었으며, 하느님의 어머니 그리고 구원의 중재자가 되신 것입니다. 이 엄청난 무게를 짊어지신 성모님의 생애는 그 순간부터 늘 언제나 끊임없이 ‘주님의 뜻을 이루려는 삶’으로 점철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뜻을 살고자 하는 믿음과 순종의 삶은 훗날 당신 아드님이신 예수님 안에서 온전히 꽃을 피우게 되고 완성되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성모님은 하느님의 사랑받는 따님이시며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셨고 성령의 정배가 되신 것은, 모두 다 성모님의 믿음과 순종의 결과였음을 잊지 말고 살아야 합니다. 아울러 우리 또한 우리 어머니 마리아처럼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길 바라며’ 살아야겠습니다. 그렇게 살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런 중재의 기도가 우리 마음 속에서부터 바쳐질 것입니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님,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 아멘.”
*오늘 대축일을 진심으로 축하하고 주님의 축복이 그리고 성모님의 중재가 함께 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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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역사적으로 위대한 업적을 이룬 사람의 공통점이 있다고 합니다. 자기 분야에서의 집중력이 남다르다는 것입니다. 집중하는 그 순간에는 다른 소리도 들리지 않고, 어떤 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에 대해 어떤 전기 작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은 쓸데없는 것 무시하기의 전문가.”
쓸데없는 것을 무시하는 그 전문성(?)이 자기 예술에 헌신하는 능력을 키울 수가 있었고, 눈앞의 과제나 프로젝트에 자신을 묶어두는 능력을 결합하여 전설적인 결과를 내놓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학창 시절, 공부하면서 음악 듣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또 여기에 텔레비전을 봐도 상관없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하나에 집중하는 것이 훨씬 더 효과가 크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실제로 집중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이런 집중에 솔직히 죄송한 마음이 들 때도 있습니다. 책을 읽거나 글을 쓸 때, 휴대전화를 무음으로 바꿔놓습니다. 그러다 보니 SNS 메시지를 보지 못하고, 전화도 못 받습니다. 문제는 자기를 무시해서 SNS 메시지를 보지 않고, 전화도 받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신다는 것입니다. 너무 죄송한 마음입니다. 하지만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서 이것저것 못하는 것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서 더 집중할 필요가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는 어떤가요? 주님께만 집중하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세상의 다양한 것에 관심을 두고 집중하면서, 정작 주님을 외면할 때가 너무 많은 우리입니다.
오늘은 주님의 탄생에 대한 예고를 기념하는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입니다. 이날, 우리는 예수님 탄생 예고를 들으신 성모님을 보게 됩니다. 아직 결혼하지 않은 처녀의 몸인데, 잉태해서 아들을 낳게 된다는 천사의 메시지를 받습니다. 이 메시지는 성모님께 의견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즉, 무조건 메시지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많은 사람이 안 되는 이유만을 이야기합니다. 절대로 그럴 수 없다면서 하느님을 설득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성모님께서는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느님께만 집중하는 삶을 사셨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하느님의 메시지는 무조건 받아들이고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 결과 하느님의 어머니, 우리의 어머니가 되실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과연 어디에 집중하고 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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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함께하는 기쁨>
루카 1,26-38 (예수님의 탄생 예고)
그때에 하느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고을로 보내시어,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가게 하셨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천사가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말하였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천사가 다시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마리아가 천사에게,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하고 말하자, 천사가 마리아에게 대답하였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 아이를 못 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마리아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
<함께하는 기쁨>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 1,28)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어
나를
기쁘게 하시니
내가
주님과 함께
있어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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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순명할 수 있기를 기도 합니다>
일상적으로 합리적인 말을 하면 알아듣습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고집불통도 있습니다만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말을 하면 그에 따르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렇지만 상식에 어긋나고 비합리적일 뿐 아니라 이해하기 어렵지만, 하느님의 뜻으로 믿고 따르는 때도 있습니다. 신앙의 선조인 아브라함은 일가친척을 떠나 낯선 곳으로 향했고 아들을 제물로 바쳐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탈출시키는 역할을 했던 모세도 처음에는 할 수 없다고 했지만, 하느님의 도구로 충실했습니다. 기드온은 하느님을 믿고 불과 삼백 명으로 십오만 병사에 대항하여 싸웠습니다. 요셉은 임신한 약혼자와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마음먹었지만, 성령으로 말미암은 잉태라는 꿈의 현시를 받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루카1,30).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마리아는 이해되지 않는 이 말씀에 결국은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하고 받아들였습니다. 바로 이것을 순명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구원의 역사는 순명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것에 따르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순명이라 하지 않습니다. 비합리적 비상식적, 비논리적이라 생각되어도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하느님께서 계획하시고 인간의 협력과 동의로 구원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세상은 바로 마리아의 믿음과 믿음에 따르는 순명으로 인하여 구세주의 탄생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당시의 풍습을 생각하면 약혼한 처녀가 부모도 모르고 약혼자도 모르게 임신하여 배가 불러온다는 것은 돌에 맞아 죽어야 할 처지가 됩니다. 그렇다면 마리아의 응답은 죽음을 각오한 대답이었습니다. 죽음을 각오한 순명은 인간이 바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바칠 것을 다 바친 것입니다. 우리도 성모님의 마음을 닮아 하느님의 뜻 앞에서는 미루지 않는 결단을 내려 협력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루카 1,37) 하지만 인간의 협력을 요구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결코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른 복종 없이 천명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이현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자유의지를 가진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걸작품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있는 자리가 어디이든 주님의 뜻에 기꺼이 순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그 자리에 하느님께서 분명히 역사하십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당신이 쉼을 원하시면 저는 사랑으로 쉬겠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일하라고 명을 내리시면 저는 일을 하면서 죽고 싶습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일상 안에서 언제든 주님의 말씀에 순명할 수 있는 믿음을 더해주시기를 희망합니다. 순간순간 하느님께서 기뻐하시고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것을 용기 있게 선택하여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는 연장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연장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고자 하십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도구, 연장이 되는 기쁨을 놓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다.”(루카 1,35) 하였습니다. 바로 그 성령께서 오늘 우리에게 내려오시고 높으신 분의 힘이 우리를 덮어 죽기까지 주님의 말씀에 순명 하며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어머니, 그 누가 십자가 없이 천국을 바라리오
어머님
인간으로 볼 때 당신처럼 불행한 사람이
인류 역사상 또 있겠습니까?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여, .......’
천상의 이 말을 듣고나서
당신의 역사는 얼마나 파란이 많았습니까?
남편 요셉에 대한 걱정,
말구유에서 아들의 해산,
이집트로 피난,
마침내 십자가 곁에서
외아들의 처참한 죽음을 목격한 당신에게
그보다 더한 십자가가 있었겠습니까?
성총을 충만히 받는다는 것이란
반드시 지상의 행복이나 평화를 받는 것이 아님을
저는 깨달았습니다.
육신의 안락은 물론
정신적 안락을 의미하는 것도 아님을 알았습니다.
어쩌면 그 반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성총을 구하는 것은 오히려 지상에서 고통을.
십자가를 찾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머니,
원죄없이 잉태한 당신이
여인 중에 총복을 받으신 당신이.
누구보다 가혹한 십자가를 져야 했고
누구보다 처참한 고통을 받았거늘
그 누가 십자가 없이 천국을 바라리오! -배문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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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순종과 비움의 여정과 순교영성>
-마리아 성모님의 삶-
"예수님이 내 운명이자 사랑이듯이 강론 또한 내 운명이자 사랑이다."
새벽 강론을 쓴후 저절로 나온 고백입니다. 예수님은 저뿐만 아니라 성모님은 물론 모든 성인들의 운명이자 사랑이셨을 것입니다. 오늘은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입니다. 예전에는 성모 영보 대축일로 불렸던 축일입니다. 예수님의 성탄 대축일 12월25일 9개월전 3월25일이 대축일인데 올해는 이날이 성주간이라 부활 제2주일 다음 월요일로 옮겨져 오늘 경축하게 되었습니다. 아드님의 부활시기와 겹쳐 더욱 풍요로운 느낌입니다.
우선 돋보이는 점은 하느님의 무한한 인내와 겸손입니다. 교회는 제1독서 이사야 예언자를 통한 아하즈에 대한 신탁을 예수님 탄생의 예언으로 이해했습니다. 이사야를 통한 예언후 때가 될 때까지 기다려온 인내와 겸손의 하느님이십니다. 우리의 믿음 역시 인내와 겸손으로 표현됩니다.
“주님께서 몸소 여러분에게 표징을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임마누엘’이라는 예수님 이름보다 더 좋은 이름은 없을 것입니다. 깊이 들여다보면 예수님뿐 아니라 주님의 사랑받는 우리 하나하나의 이름 역시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의 임마누엘임을 깨닫습니다. 임마누엘 예수님 이름이 감명깊게 드러나는 성구는 마태복음 마지막 구절입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임마누엘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깨닫게 하는 참 은혜로운 구절입니다. 이 말씀과 더불어 제가 고백성사 보속시 말씀처방전으로 많이 써드리는 말씀이 오늘 복음의 마리아 방문시 주님의 천사 가브리엘의 일성입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마리아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은총이 가득한 존재임을 깨닫습니다. 아주 오래전 이 보속 처방전 말씀을 받았을 때 환호하던 어느 수녀의 응답도 잊지 못합니다. 이 예화 또한 제가 참 많이 인용했습니다.
“신부님 감사합니다. 이 말씀은 보속(補贖)이 아니라 보석(寶石)입니다. 살아있는 보석같은 말씀입니다.”
이와 더불어 독일에서 선교사로 파견되어 오랫동안 살고 계신 현익현 바로톨로메오 신부님의 기발한 유머도 잊지 못합니다. 이 예화 또한 재미있어 수 차례 인용했습니다. 제가 신부님을 수도원의 보물이라 하셨을 때 웃으며 즉각적으로 주신 답변입니다.
“나는 보물(寶物)이 아니라 고물(古物)입니다!”
불교의 사찰에서 자산 둘이 절의 역사를 증언하는 노목(老木)과 노승(老僧)이라 하는데 가톨릭 수도원 역시 노목과 노승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노승이 고승(高僧)이 되면 더 바랄나위 없겠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어느 사찰이나 수도원을 찾든 우선 확인해 보는 것이 노목과 노승 둘입니다.
가브리엘 천사를 통한 나자렛 시골의 마리아를 찾아온 하느님의 겸손이 놀랍습니다. 임마누엘 탄생 예언후 때가 될 때까지 얼마나 오랜동안 기다려온 하느님이요, 희망이 있을 때 비로서 가능한 한없는 기다림입니다. 언젠가의 마리아의 출현에 희망을 걸고 기다려온 하느님의 인내입니다.
기다림하니 해마다 파스카의 봄철이면 놀라운 신비로 와닿은 파스카의 봄꽃들입니다. 어김없이 거기 그 자리에서 몇날 동안 피고자 일년 열두달을 꼬박 기다리며 인내해온 봄철의 무수한 봄꽃들입니다. 이 감격을 노래한 “기다림”이란 자작시가 생각납니다.
“꽃같은 만남보다
더 반갑고 고마운 만남있으랴
언제나 거기 그자리
꼬박 일년 기다렸다 피어난
파스카의 봄꽃들이다
꼭 일년만의 만남이구나!
산수유, 개나리, 매화, 매실, 벚꽃, 수선화, 민들레...
모든 봄꽃이 그렇다
꽃같은 반가운 만남 되려면
일년은 꼬박 기다려야 하는구나”-2001.4
참으로 장구한 세월 인내하며 기다렸다 마리아를 발견한 하느님의 기쁨은 얼마나 컸겠는지요! 참으로 눈밝고 귀밝은 하느님께서는 때가 될 때까지 기다려온 것이며 마리아는 하느님의 기대를 충족시켰습니다. 마리아의 깊은 믿음은 침묵과 경청의 관상으로 드러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흡사 제1독서 이사야 예언자를 통한 임마누엘 탄생의 신탁 말씀을 연상케 합니다.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내심을 속속들이 밝히는 하느님에게서 마리아에 대한 한없는 신뢰와 사랑을 깨닫습니다. 마리아의 재차 물음에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자신의 속내를 명쾌하게 자상히 밝히는 하느님입니다. 마지막 천사의 말씀이 깊은 울림을 줍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하느님의 뜻대로 살 때 불가능한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마침내 마리아의 전 존재가 담긴 답변입니다. 인류 역사에 결정적 전환점(터닝포인트;turning point)이 되는 시점(時點)입니다. 하느님의 겸손한 설득이 주효했고 깊은 침묵중에 경청한 마리아의 믿음의 응답입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이루지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납니다. 전능하신 하느님도 일방적으로 혼자서는 일하지 못합니다. 마리아의 자발적 순종의 믿음의 응답을 필요로 했던 하느님이요, 이 응답이 나오기전 온누리가 쥐죽은 듯 침묵에 잠겨있었다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이 부분에 관한 주석도 생각납니다.
마리아의 응답에 온 인류의 구원이 달렸기 때문에 하느님 역시 참 초조했을 것입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하느님도 어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리아의 무조건적 “예스(Yes)”, 순종의 응답에 하느님의 기쁨은 얼마나 컸겠는지 짐작이 갑니다. 마리아의 위대한 점은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택되었다는 점이 아니라 이런 자발적 순종의 응답에 있음을 봅니다. 부전자전이 아니라 모전자전 그 어머니에 그 아들입니다. 마리아의 순종을 그대로 보고 배운 예수님입니다. 오늘 제2독서 히브리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고백이 이를 입증합니다. 무려 두 차례 반복됩니다.
“보십시오, 하느님! 두루마리에 저에 관하여 기록된 대로,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려 왔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바로 이 고백이 예수님 삶의 본질이요 핵심이자 우리 믿는 이들 역시 그러합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 뜻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바쳐짐으로써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다”고 장엄하게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둔 어머니, 성모님을 부러워한 여인에게 주신 말씀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복되도다, 오히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이들!”(루가 11,28)
그대로 성모님과 자신을 두고 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게세마니에서 땀이 핏방울처럼 되어 땅에 떨어질 정도로 간절히 바쳤던 예수님의 기도도 생각납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 22,42)
십자가 상에서의 예수님 말씀이 절정의 완성을 보여줍니다. 남김없이 순종과 비움의 여정중에 100% 자신을 완전히 비운후의 “다 이루어졌다”(요한 19,30;It is finished) 라는 고백이며 바로 이 말씀 안에 우리의 구원이 있습니다. "아, 끝났다!(It is finished!)", 얼마나 고달픈 삶에 최선을 다한 삶이었는지 참 홀가분한, 해방된 느낌이었을 것입니다. 모전자전, 어머니 성모님의 순종과 비움의 여정을 그대로 보고 배운 아드님 예수님입니다.
예수님 잉태후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시신을 품에 안으실 때까지 시종여일 한결같이 순종과 비움의 여정에 충실하셨던 성모님처럼, 예수님 역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과 비움의 여정에 항구하셨습니다. 성모님과 예수님, 모자분에게 다시 새롭게 배우는 순종과 비움의 여정이요 순교영성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남은 인생, 자발적 사랑의 순종과 비움의 순교영성에 항구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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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종이라고 하심으로 어머니가 되신>
성모 마리아와 관련한 대축일들은 하느님의 구원 계획과 뜻이 이루어지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느님 구원 계획과 뜻이 이루어짐에 있어서 제일 앞에 있는 것이 바로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 축일입니다.
이 축일은 하느님께서 당신 계획에 따라 구세주의 어머니가 될 사람을 원죄 없이 잉태되게 하셨다는 축일입니다.
이는 그럴 계획 그러니까 구세주를 이 세상에 보낼 계획이 전혀 없었는데 마리아라는 한 처녀가 너무도 참해 하느님께서 계획을 바꿔 구세주를 보내시고 그녀를 구세주의 어머니로 삼으신 것이 아니라 천지창조 이전에 이미 구세주를 이 세상에 보내시기로 작정하시고 그 어머니 될 사람도 원죄 없이 잉태되게 하셨다는 것이지요.
그런 계획에 의해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가 이제 구세주를 잉태하게 되었다는 것이 오늘 지내는 주님 탄생 예고 축일입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들은 하느님의 계획과 뜻과 관련된 내용들입니다. 먼저 첫째 독서 이사야서는 임마누엘 하느님에 관한 예언입니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이사야서는 메시아 하느님이요 임마누엘 하느님에 관한 예언서입니다. 그래서 메시아가 오셔서 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고, 그래서 그 하느님은 저 하늘 높은 곳에 고고히 계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 하느님이라고 오늘 이사야서는 예언합니다.
그리고 둘째 독서 히브리서는 그 하느님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오셨음을 얘기합니다.
“보십시오,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오신 분이시고, 성모 마리아는 그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순종을 하셨다는 것이 오늘 복음의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독서들과 복음은 하느님의 구원 계획과 뜻이 착착 이루어져 가는 그 과정을 묘사하는 얘기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도 마리아처럼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어머니들이 되는 것을 묵상함이 좋을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복음에서 우리에게 이미 제시하신 것입니다. 당신을 만나러 어머니와 형제들이 와있다고 했을 때 누가 당신의 어머니이고 형제들이냐고 하시면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사람이 곧 당신 어머니라고 하셨지요.
그리고 프란치스코는 이 말씀을 탁월하게 풀이하였지요. 하느님의 뜻 곧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전해졌을 때 신성한 사랑과 순수하고 진실한 양심으로 받아 모심으로 말씀을 잉태하는 것이고 그 말씀을 실천할 때 그분을 낳는 것이라고 프란치스코는 얘기합니다.
“신성한 사랑과 순수하고 진실한 양심을 지니고 우리의 마음과 몸에 그분을 모시고 다닐 때 우리는 어머니들입니다. 표양으로 다른 이들에게 빛을 비추어야 하는 거룩한 행위로써 우리는 그분을 낳습니다.”
그러므로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며 마리아는 하느님 뜻에 순종하시는데 이것을 보며 종이라고 하심으로 어머니가 되신 마리아를 본받아야 할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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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루카1,31)
'마리아의 순종!'
오늘 복음(루카1,26-38)은 '예수님의 탄생 예고'입니다. 그리고 오늘은 하느님의 총애를 받은 나자렛 처녀 마리아에게 전해진 예수님의 탄생 예고를 기념하는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입니다.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은 본래 3월25일인데, 올해는 "이 대축일이 성주간에 오면 부활 제2주일 다음 월요일로 옮겨 지낸다."라는 '로마 미사경본'의 지침에 따라 오늘 지냅니다.
하느님께서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 나자렛 처녀 마리아를 예수님 탄생의 결정적 도구로 쓰십니다. 마리아의 태를 도구로 선택하셔서 당신 아들 예수를 우리에게 보내주십니다.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루카1,34)라는 마리아의 말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예수님의 잉태 예고는 마리아에게 죽음과도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불가능이 없으신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합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
마리아가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였기 때문에, 이제 아홉 달이 지난 후면 마리아의 태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것입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신자들에게 보내신 첫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거룩한 사랑과 순수하고 진실한 양심을 가지고 우리의 몸과 마음에 그분을 모실 때 우리는 그분의 어머니들이 됩니다. 표양을 보여 다른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어야 할 거룩한 행실로써 우리는 그분을 낳게 됩니다."(10절)
마리아가 천사 가브리엘이 전한 하느님 아버지 뜻에 순종함으로써 예수님을 낳게 되고 예수님의 어머니가 됩니다.
우리도 마리아의 순종을 본받아, 하느님 뜻에 순종하는 자녀들, 나의 거룩한 행실로 예수님을 낳아드리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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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LRVta6K98q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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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루카 1, 31)
하느님의
심오하신 계획을
어찌 우리가
다 알겠습니까.
생명이 되시는
탄생을
말씀으로
우리에게
예고하십니다.
갇혀있지 않는
생명의
소식이며
끝까지 희망할
기쁨의 권리를
우리에게
선사하십니다.
하느님의
탄생으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우리가
볼 수 있게
됩니다.
사람이 되어
오시는
이 길밖에는
구원할 길이
없는 우리들이
되었습니다.
멈추신 적이
없는 하느님의
사랑이며
구원입니다.
주님 탄생
예고는
우리를 향한
하느님 사랑의
가장 뜨거운
고백입니다.
이미
우리에게서
시작되신
구원의
계획입니다.
희망해야 할
분이 오직
하느님이심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의 의지는
사랑과 함께
빛으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탄생은
탄생을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들의
몫입니다.
두려운
마음을 다잡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더 이상
기댈 곳이 없는
사람들에게
오시는 하느님
탄생의 자리가
됩니다.
이제 우리는
뜨거운 탄생의
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간직해야 할
말씀이며
믿음입니다.
자신을 낯추고
내려놓아야
탄생이 되시듯
우리의
뜻이 아닌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오늘의 탄생이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루카 1,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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