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을 정리하다
1. 전쟁은 인간의 경험할 수 있는 것 중 가장 끔찍하고 잔혹하며 모든 것을 혼돈으로 몰아넣는 극단적인 영역이다. 대량학살이 용인되고 인간의 존엄이 너무도 손쉽게 무시되며 승리를 위해 인간의 윤리적 판단을 파괴하는 최악의 세계이다. 인간의 욕망이 폭발하고 집단적인 광기가 분출하며 감정에 의해 휩쓸린 행동이 지배한다. 오직 승리만이 ‘전쟁’의 가치를 증명할 뿐이다. 그런 이유로 전쟁에 참여하는 인간들은 모든 것을 동원하여 승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 과정에서 과학이 발전하고 새로운 기술이 개발되며 인류의 물리적 발전이라는 아이러니한 결과를 낳기도 한다. 전쟁은 인간의 운명을 집단적으로 결정짓는 역사적 사건인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의 정치사회 현실 또한 70년 전 한국전쟁의 결과이자 파장 안에서의 진행이다. 여전히 ‘정전’ 상태에 있는 두 세력의 비극적인 갈등의 지속인 것이다.
2. ‘한국전쟁’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우연히 종전 70주년을 기념하여 EBS 지식채널에서 방영한 <한국전쟁>에 관한 다양한 에피소드를 보고나서 이다. 전쟁의 시작과 과정 그리고 정전협정까지 한국전쟁의 핵심적 사건들을 알게 되자 전쟁에 대한 좀 더 체계적인 이해와 정리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것은 전쟁이 여전히 우리의 삶을 가장 압도적으로 지배하는 현재적 사건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편견과 신념이 난무하는 ‘전쟁’과 관련된 담론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도 역사적 사실과 사건에 대해 좀 더 명확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가면극’과 ‘80년대’에 관한 책만을 집중적으로 읽다보니 발생한 피로감도 해소할 겸, 오래 전에 녹화해 두었던 ‘한국전쟁’ 관련 다큐를 보았다. 그 내용을 정리해본다.
3. 한국전쟁의 원인에 대해서는 한동안 다양한 견해가 주장되었지만 소련의 비밀문서가 발견됨으로써 북한과 소련 그리고 중국에 의한 계획적인 침략임이 밝혀졌다. 북한의 김일성은 무력으로 한반도를 통일하길 원했고 미국의 군사개입이 없을 것이라고 확신한 소련은 중국을 설득하여 김일성의 침공을 허락한 것이다. 소련의 무기와 물자 지원을 받은 북한의 전격적인 공격으로 1950년 6.25 한국전쟁이 시작되었다. 당시 남한의 군대는 제대로 된 훈련이나 무기를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미국 또한 북한의 위험성을 과소평가했다. 하지만 전쟁은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남한과 북한의 배후에 있던 두 개의 강대국은 치명적인 판단 미스를 했다. 소련은 미국의 개입이 없을 것이라고 믿었고, 미국은 북한의 공격이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러한 잘못된 판단 속에서 전쟁은 발생한 것이다.
4. 북한은 기습공격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며 압도적인 군사적 우세를 확인하였다. 갑작스런 공격의 남한의 군대는 후방으로 물러나야 했다. 이때 전쟁의 미스터리라 할 수 있는 사건이 발생한다. 북한이 특별한 이유없이 서울에서 3일간 머물렀던 것이다. 이에 대하여 충분한 물자를 공급받기 위해서였다는 주장도 있지만 오히려 더 큰 이유는 한국군의 저항이 중요한 요인이었다. 서부전선의 손쉬운 진출에 비하여 동부전선에서는 한국군의 강한 저항(춘천전투)을 받게 되었고 두 부대의 합류를 통한 진출에 일시적인 제동이 걸린 것이다. 전쟁의 흐름은 미국과 유엔의 군대 파견으로 급속하게 변동한다. 미국의 개입이 없을 것이라고 믿고 빠른 시간 내에 한반도를 점령하려던 북한의 계획에 차질이 생긴 것이다. 하지만 초반 전세는 북한의 일방적인 우세였다. 금강에 구축된 전선도 무너졌으며 결국 미군과 한국군은 낙동강을 경계로 최후의 전선을 구축했다.(1950-7~8월)
5. 북한의 대대적인 공격에 유엔군과 한국군은 끈질긴 저항을 통해 더 이상의 진출을 허락하지 않았다.(낙동강 전선에서 활약한 부대 중에는 미국과 한국 그리고 터키군이 주목된다) 북한군도 지쳐가던 때,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와 8군 사령관 워커는 특별한 작전을 계획했다. 인천을 통한 상륙작전을 시도한 것이다. 조수의 차이가 심한 이 곳의 공격은 위험부담을 안고 추진되었다. 유엔군은 먼저 월미도를 점령하고 다음 밀물 때 인천으로 상륙했다. 인천 상륙작전과 연이은 서울수복은 전세를 유엔군으로 이동시켰다. 유엔군은 북한군을 압박하며 북진하면서 평양을 점령하고 압록강까지 이동했다. 이때 미국의 정가는 국경선을 넘는 문제에 대해 맥아더와 충돌했다. 하지만 중국의 대량적 군사개입은 전쟁의 판도를 다시 변동시켰다. 압도적인 인력과 오랜 전쟁의 경험으로 다져진 중국의 전력은 유엔군을 당혹시켰다. 결국 후퇴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때가 겨울이었으며 유명한 ‘장진호 전투’와 ‘흥남철수’가 발생한 것이다. 서울은 다시 북한군에게 점령당한다. 이 과정에서 끊임없이 상대 세력에 대한 민간인 학살이 자행되었다.
6. 서울을 빼앗기고 후퇴하던 유엔군은 다시 반격을 준비하고 공격을 강화한다. 이 과정에서 유엔군의 수뇌부가 바뀌게 된다. 중국에 대한 강력한 공격을 주장한 맥아더가 해임되고 워커 또한 불의의 사고로 사망한다.(워커를 기념하여 후일 워커힐이 만들어진다.) 새롭게 유엔군 사령관에는 리지웨이가 임명되고 미8군 사령관에는 밴플리트가 부임한다(벤플리트는 한국군의 아버지라 불릴 정도로 한국군의 체계적 훈련에 도움을 준다). 서울을 다시 회복하기 위한 전투를 시작했으며 이러한 전투 승리의 주요한 분기점이 양평의 ‘지평전투’였다. 여기서는 프랑스군의 활약이 눈부셨다. 다시 서울을 회복했다. 이때 중국은 북한과 협력하여 대규모의 공세를 준비했다. 1951년 전반기 두 번에 걸친 대공세는 실패로 돌아섰다. 이때 중국군의 파상 공격을 막은 파주 적성의 설마리 전투에서의 영국군의 용맹이 기록되게 된 것이다. 대공세의 실패 이후 두 진영은 38선을 중심으로 장기전 형태로 돌입하게 된다. 1951년 후반기부터 진지전이자 참호전 그리고 고지전이 반복되게 된 것이다.
7. 전투와 더불어 정전을 위한 협상도 진행된다. 소련과 미국의 비밀협상을 통해 시작된 정전협상에서 적극적이었던 것은 북한이었다. 북한은 손쉽게 남한을 장악하려는 기대가 사라지고 점차 심각한 피해가 커지게 되자 협상을 통해 전쟁을 종결하길 원했다. 이때 정전의 장애는 중국이었다. 개성에서 시작되고 이어 판문점으로 이동하며 약 2년간 지속된 협상의 가장 큰 장애물은 포로송환의 문제였다. 중국과 북한은 포로일괄송환을 주장했지만, 유엔은 포로의 자유의사에 따른 인도적인 방법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중국이 포로일괄송환을 주장한 것은 많은 중국군과 북한군 중에서 공산주의 사회로 돌아가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이것은 체제와 이념에 대한 심각한 훼손이었으며 정치적 패배라는 인식이 지배하였다.
8. 지지부진한 협상 속에서 전투는 끊임없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서로의 땅을 많이 차지하여 정전협상에 유리하게 하려는 시도는 수많은 희생에도 불구하고 결국 중단되지 않았다. 이때 유명한 철원의 ‘백마고지 전투’와 파주의 ‘베티고지 전투’가 발생하였다. 1953년이 되자 급격한 정치적 변화가 나타난다. 미국의 대통령이 트루만에서 아이젠하워로 바뀌었고, 소련 또한 스탈린이 사망한 것이다. 아이젠하워는 전쟁 종결을 공약으로 내세우며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는 정전을 위해 정치적 결정을 강하게 추진했다. 이때 정전을 반대하는 남한의 이승만 대통령과 충돌하기도 하였다.
9. 결국 미국은 정전협상을 이끌어내기 위해 한국과의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고 한국의 방위를 약속한다.(보수에서는 이것을 이승만의 가장 중요한 업적으로 생각한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서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상이 체결된다. 이때의 장면을 보도한 언론은 ‘기이한 종결’이라고 표현했다. 북한과 유엔의 협상 책임자가 어떤 인사나 악수도 없이 각자 사인을 하고 냉랭하게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것이 현재까지 이어지는 ‘정전시대’의 시작이었다. 이때 만들어진 정치적 질서가 현재 한반도를 지배하고 있다. 우선 ‘정전협상’을 통해 군사분계선이 그어지고 그것을 중심으로 각자 2km의 DMZ이 형성되었다. 하지만 이때 해상에서의 경계선에 대한 결정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다만 연평도와 백령도은 남한의 영역으로 인정하였다. 그 결과 충돌을 막기 위해 남한에서 임의적으로 섬들과 북한땅 사이에 NLL(북방한계선)을 설정하였다. 이 경계선은 협상을 통한 결과가 아니었기에 끊임없이 논쟁과 충돌의 현장이 되었다.
10. 한국전쟁은 몇 개의 조약을 통해 한국사회의 성격을 규정지었다. 우선 <정전협정>은 남과 북의 대치적 상황을 유지시켰고 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무력이 집결되어 있는 위험한 땅으로 만들었다. 또한 <한미방위상호조약>을 통해 미군의 남한 주둔에 대한 합법적인 절차를 완성시켰다. 미국은 당시 이승만과 한국인의 ‘북진통일’에 대한 위험성을 통제하기 위해 <한미방위의사록>을 통해 한국의 전시작전권(전작권)을 미국이 소유하기로 결정했다. 이러한 협상의 결과가 바로 현재의 한국의 안보상황인 것이다.
11. 남북의 대치적 상황을 완화하기 위한 정치적 시도가 중단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근본적인 서로에 대한 불신은 결국 최악의 남북 대치상태로 귀결되었다. 북한은 더 이상남한을 동족으로 인식하는 것을 포기하고 적대적 세력으로 규정하였다. 남한 또한 포용과 평화에 대한 이상을 버리고 적대적 관계를 확산시키고 있는 것이다. 한국전쟁 이후 70년이 지났지만 적대적 관계는 축소되지 않고 점점 더 위협적으로 되고 있다. 더구나 북한의 핵무기 개발과 미사일 확대는 한반도를 끔찍한 파괴의 현장으로 만들 가능성을 높이고 있는 것이다. 최근 한국전쟁 관련 프로가 한국전쟁에서의 승리에 대한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 ‘대결’을 전제로 한 남북관계를 조장하는 것같다는 느낌을 준다. 지금 한반도에서 중요한 것은 대결에서의 승리가 아니라 ‘평화’와 ‘안정’에 대한 공존이다. 힘을 기르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은 평화에 대한 노력과 병행했을 때만이 실질적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다. 현재의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 ‘한국전쟁’의 시작과 끝을 정리해보았다. 오랫동안 막연하게만 알고 있던 전쟁의 과정을 대략적으로나마 알게 되었다. 앞으로 역사적 사건이나 사회적 위기가 어떻게 사회와 인간의 변화를 이끌어내는가에 대하여 좀 더 관심을 가져야겠다.
첫댓글 - 우리 민족의 역사적 비극! 사상이 세계를 흔들었던 시대, 기구한 운명의 시작은 계속되고 있다. 전쟁만은 막아야 한다는 절실한 외침 앞에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