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찬 / 이사부 |
"너희들이 만약 항복하지 않으면 이 사나운 사자들을 풀어 모조리 밟혀 죽게 하리라/" 이사부는 내물왕의 4대 손으로 성은 김씨이다. 그는 지증왕 6년(505) 실직주(삼척)의 군주가 되었다가, 지증왕 13년에는 하슬라주(강릉)의 군주가 되어 우산국을 정복하려고 하였다. 우산국 사람들은 사납고 거칠었으므로 힘을 굴복시키기가 어렵자, 이사부는 한 꾀를 생각해 냈다. 그는 나무로 허수아비 사자를 많이 만들어서 배에 싣고 우산국 해안에 이른 후, "너희들이 만약 항복하지 않으면 곧 이 사나운 사자들을 풀어 모조리 밟혀 죽게 하리라." 하고 위협하였다. 그러자, 우산국 사람들은 이사부가 생각했던 대로 순순히 항복하고 매년 조공을 바치겠다고 하였다. 이사부는 그 후, 진흥왕 2년(541)에 이찬(신라의 17등급 중 둘째 위계)이 되었고, 진흥왕 6년에는 국사 편찬의 필요성을 왕에게 건의하여 거칠부로 하여금 국사를 편찬하도록 하였다. |
해양 주권의 선구자 안용복 |
"어찌 너희 감히 우리 땅을 범하느냐" <숙종실록>에 따르면, 안용복은 1696년 봄에 16명의 어부들을 모아 울릉도로 건너갔다. 울릉도에는 일본 어선들이 와서 정박해 있으므로 안용복이 외치기를, "울릉도는 본래 우리의 경지인데 왜인이 어찌 감히 월경하여 침범하는가. 너희들을 모두 묶어 마땅하다." 라고 꾸짖었다. 이에 일본인들은 말하기를 "우리는 본래 송도(독도)에 사는데 우연히 고기잡이를 나왔다가 이렇게 되었으니 마땅히 본소로 돌아갈 것이다."라고 하였다."송도는 곧 우산도(독도)인데 역시 우리 나라 땅이다. 너희들이 감히 송도에 산다고 하느냐." 라고 꾸짖고, 이튿날 새벽 우산도로 들어가 보니 일본 어부들이 가마솥을 걸고 물고기를 조리고 있으므로 막대기로 부수고 큰소리고 꾸짖으니 일본인들이 모두 배를 타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
이 규 원 |
조선시대의 무관. 1882년(고종 19)에 울릉도 검찰사가 되어 울릉도(독도 포함)를 시찰하고 돌아온 이규원은 천혜의 보고인 울릉도와 독도에 왜인들이 침입, 벌목하고 있으며 자신들의 땅인 양 입표까지 한 것에 분개하여 일본공사에 항의함은 물론 일본 외무상에 항의문서를 발송할 것을 제의하였다.이에 감동한 고종은 그간의 공도정책을 버리고 울릉도 개척에 착수하는 한편 일본 정부에 재차 항의하도록 하였다. 조선왕조의 공도정책으로 무인도가 되어 있던 울릉도에 현지 조사를 한 결과 일본 어부들이 출어하여 벌목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이들을 문책하여 돌려 보내냈다. 그후 '이규원 울릉도 검찰일기'를 조정에 제출하여 이를 통해 조정은 일본에 항의 공문을 보내고 울릉도에 주민을 이주시키도록 조치했다. |
홍재현 일가 |
홍재현은 조선시대 호조참판을 지내다 울릉도에 유배된 조부를 따라 울릉도에 정착했다. 그는 독도에 나타난 왜인들을 물리치는데 그치지 않고 직접 일본으로 건너가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확고히 밝히고 돌아왔다.그후 계속된 일본의 독도 침입은 그의 아들 홍종욱이 대를 이어 막아냈으며 손자인 홍순칠은 그 유명한 '독도의용수비대' 대장이었다. 홍재현 일가는 3대에 걸쳐 독도를 지켜온 산증인들이었다. |
홍 순 칠 |
'독도의용수비대'의 3년 동안의 활약상은 전설적인 실화로 전해져 내려온다. 53년 울릉 도 출신 전역 군인들이 상사 출신인 홍순칠(87년 작고)씨를 대장으로 하여 '우리 시대 마지막 의병'의 기치를 내걸게 된 것은 일본이 한국전쟁 중 우리 행정력의 공백기를 틈타 독도에 '일본령'이라는 한자표지를 세웠기 때문이다.울릉도 주민 홍순칠은 울릉도 경찰서장으로부터 지원 받은 박격포, 중기관총, M1소총 등 빈약한 장비를 갖추고 울릉도 전역군 인들을 이끌고 독도의용수비대를 결성하여 독도에 주둔했다. 그 후 일본이 3척의 함대를 이끌고 이들을 위협했으나 이들에 의해 격퇴되었다 |
최 종 덕 |
1965. 3 울릉도 주민으로 도동 어촌계 1종,공동 어장 수산물 채취를 위해 독도에 들어가 거주하면서 어로 활동,1968. 5 시설물 건립 착수,1981.10 독도를 주소지로 주민 등록 등재,1987. 9 사망 ,1980 년 일본이 독도 영유권을 다시 주장하고 나오자 "단 한 명이라도 우리 주민이 독도에 살고 있다는 증거를 남기겠다"며 울릉읍 독도리의 서도 벼랑어귀에 주민등록을 옮긴 최종덕씨의 독도사랑정신은 독도를 가본 사람이면 누구나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그는 수중창고를 마련하고 전복수정법, 특수어망을 개발하여 서도 중간 분지에 물골이라는 샘물을 발굴하는 등 초인적 노력을 쏟으며 살다 1987년 생을 마쳤다 |
조 준 기 |
최종덕씨의 사위로 울릉도 주민이었던 조준기 씨는 장인의 뜻을 이어 지난 86년 7월 독도로 전입해 수산물 채취권을 이어 받았다. |
김 성 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