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는 오래 전부터 소원이 하나 있었다. 신명난 굿판을 실컷 구경해 보는 것이 그것이었는데, 진정으로 바라면 이루어진다던가? 아님 내 속에 든 영혼의 간절함을 알아준 망자가 그의 생전 안면이 있던 전국 각지에서 온 무속인들이 펼치는 굿판으로 나를 불러들인 것일까? 세상 인연에는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사연이 존재한다고 은근히 믿는 내가 작고한 사진작가 김수남을 기리는 오구굿에 만사를 제쳐두고 달려감은 전혀 뜻밖의 행동이 아니었다.
우리의 굿은 발생 시초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오래 된 한국의 토착신앙이다. 2005년 김수남 선생의 독일 전시에 맞춰 현지 잡지 Korea Forum에 실리 독일 함부르크미술대학 교수인 요헨 힐트먼의 글에도 ‘한국 샤머니즘의 문화사’를 조명하는 김 수남 선생의 굿 사진들이 지닌 중요성은 무속이 천대받기까지의 역사를 통해 부각되어 있다.
“서구의 학자들이 오늘날 한국의 샤머니즘이라 일컫는 것은 한국의 전근대적 시골의 여성 문화이다. 이 문화는 유교와 불교적 특징이 우세한 사회에서 구전서사 전통과 고유한 종교를 지니고 있었다.(중략) 샤머니즘은 한국의 오랜 옛날부터 나타난다. 신라 금관들은 샤머니즘적 우주론을 시사하는 상징성을 보여준다. 왕릉에서 발견된 이 금관들은 기원후 6세기의 것이다. 또한 불교를 기반으로 한 고려 왕조에서도 샤머니즘을 억압하지 않았다. 불교는 4세기경 한국에 도입되었는데, 자연정령과 산신을 믿는 원시종교의 지역마다 다른 관습과 형상들을 교체하거나 말살시키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유교가 자리 잡으면서 샤머니즘은 억압을 받게 되었고, 남녀 샤먼들은 이제 사회의 낮은 계급에 속하게 되었다. 19세기 초, 기독교 선교사들의 한국 샤머니즘에 대한 보고들은 경멸과 편견에 가득 차 있다. 한국 문화를 말살하려는 의도에서 일본 총독부는 식민지 지배 초기에 한국의 무당이 하는 의식들을 폭력적으로 폐지시켰고, 그들을 체포했다. 이후 1970년대, 남한에는 서구 모델에 따라 지역의 산업화 과정이 도입되고, 이른바 ‘새마을 우동’이라고 불리는 근대화의 파도 속에서 샤머니즘은 근대적 농업을 방해하는 미신으로 타파의 대상이 되었다.”(혼, 김수남 사진굿,66~68쪽에서 재인용, 현암사)
이번에 굿과 함께 전시된 고인의 생전의 업적들은 ‘사진 밖으로 나온 예인들’이란 제목 아래 크게는 1981년에서 86년 사이에 작업한 우리나라 각지의 무인들과 예술인들을 담은 사진들과 1988년 이래 김수남 씨가 관심의 폭을 넓혀 우리나라의 무속 제례인 굿과 구조면에서 상당한 유사성을 갖고 있는 아시아 여러 나라의 무속 제례를 찾아다니며 기록한 사진 전시로 구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는 정말 ‘새 발의 피’이다. 작년 6월에 발족된 김수남 추모 위원회가 고인이 정리해 둔 사진들을 꼬박 한 달이 걸려 개수해 본 결과, 무려 16만점에 이른다고 한다. 그 중 절반에 해당하는 8만점은 우리나라의 굿과 관련된 것이고, 나머지는 아시아의 무속을 담은 사진이라고 한다.
1981년 6월 23일 서울 석관동 김금화 만신 집에서 있었던 채희아의 내림굿 현장에서 김수남 씨를 처음 만난 이후 4반세기 동안 함께 굿판을 다니는 동료로서 우리나라의 굿을 연구한 학자 황루시 선생님의 말씀에 따르면, 이번 오구굿의 첫 장은 큰무당 김금화씨가 자비를 들여 맡겠노라 했다고 한다. 김금화씨는 중요무형문화재 서해안 배연신굿 및 대동굿 기능보유자로, 국내외로 우리의 굿을 알린 유명인이다. 그녀는 꿈속에 자주 보이는 김수남씨가 안타까워 고인의 고를 풀어줘야겠다고 마음먹고 있던 차에 이번, 연이은 굿판의 오프닝을 맡게 되었다고 한다. 마치 같은 굿판의 식구처럼 김수남을 아꼈던 김금화씨는 집에 술을 담아놓았으니 들나물에 밥이나 먹으러 오라며 청할 정도로 막역했던 사이인데, 아마도 그녀의 ‘사자얼름’으로 김수남씨도 혹시라도 다 풀지 못한 이승에서의 아쉬움을 다 달래지 않았을까 싶다.
장산도는 전라도에 있는 작은 섬이다. 이 작은 섬에도 문명의 전수는 빠르게 이뤄져 교회가 무려 7개나 있다고 한다. 두 번째 굿판인 장산도 씻김굿을 주례하는 자는 여든 나이의 당골 이귀인씨이다. 8대째 가업을 물려받은 세습무 이귀인씨는 신명있는 상쇠이자 판소리와 그림에도 능한 예술인이기도 하다. 그의 부인이자 역시 세습무인 강부자씨도 그와 함께 서울까지 김수남씨의 넋을 씻기 위해 바다를 건너왔다. 이귀인씨의 말에 따르면, 죽은 자를 세 번 씻겨야 원한 없이 극락세계로 갈 수 있다고 한다. 이 당골네들은 1980년 8월 당시 목포에서 배를 타고 씻김굿을 보러온 김수남씨를 맞이했던 현장에 있던 자들인데, 다행이 아직 건강해서 고인의 유족이 사는 서울까지 올라와 씻김굿을 선보일 수 있었다. 본래 씻김굿은 보통 4시간에서 6시간 동안 펼쳐지는 굿판으로 노래와 춤과 사설(말)이 곁들어진 종합 예술이다. 일반적으로 조왕석, 성주굿, 초가망석, 손굿, 제석, 넋올리기, 고풀이, 씻김, 질닦음, 오방신장, 해원굿 순으로 행해지는 내내 당골들은 깔끔하게 흰 색의 한복을 입고 굿을 진행한다. 그러나 살아 남아있는 유족들의 머리 숫자만큼의 초를 밝히고 발복을 기원하는 제석에서만은 주무가 머리에 하얀 고깔을 쓰는데, 전체적인 복식에 있어서는 우리가 생각한 요란한 굿판의 무당들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전라도 지역의 굿에는 상징적으로 삶의 원한이 맺힌 매듭인 ‘고’를 풀어지는 고풀이의 의식을 치른다. 이 날도 하얀 광목의 매듭을 주무가 망자의 부인과 장남과 함께 푸는 절차는 보는 이로 하여금 후련함이 쏴하게 느껴지게 하는, 그러면서도 신성함이 가슴에 와 닿게 했다.
1981년 4월, 스물한 살, 꽃다운 나이에 동김령 바다 끝 작은 집에서 제주도에서 내노라하는 심방(제주도에서는 무당을 심방이라고 한다)을 모두 모시고 초신질을 바른 서순실 무당의 신굿을 열흘이나 지켜보았던 김수남은 결국 동아일보에 시말서를 썼다고 한다. 제주 한림읍이 고향인 김수남씨에게 제주의 시왕맞이는 그래서 보다 깊은 뜻이 있다하겠다. 김수남을 삼촌처럼 여기며 지냈던 심방 서순실이 이번에는 서울까지 올라와, 요량을 들고 그의 넋을 달랬다. 원래 사흘 이상 걸리는 큰 굿이지만, 서울굿판에서는 ‘질침’을 중심으로 펼쳐졌다. 소미(小巫)들은 대양(혹은 대영이라고도 한다. 징에 해당)과 북과 장구를 두드리며, 밥그릇 모양으로 생긴 설쇠란 특이한 악기로 분위기를 돋우는 가운데, 시왕맏이굿이 시작된다. 반복되는 리듬에 금방이라도 도취되어 버릴 듯한데 거기에다 심방이 흔드는 요량(요령) 소리는 짐짓 섬뜩한 느낌까지 느껴질 정도로 귀기 서리게 들려왔다. 시왕(十王)이란 지옥 10계를 다스리는 신들을 가리킨다. 제일에는 진광대왕에서부터 시작되어, 제십에는 전륜대왕에 이르기 까지 사람이 죽으면 이 문을 거치면서 심판을 받는다고 한다. 이 굿판에서 하이라이트는 ‘질침’이라는 절차로서, 육지의 ‘길닦기’에 해당되는 무례(巫禮)이다. 서울과 경기 지방에서 무당들이 문을 찢는 것과는 달리, 제주 심방은 세워둔 10개의 문을 통과하면서 위무만 했다. “이 세상의 일 년은 저싱(저승) 십년이랩니다. 이 세상을 떠낭징 하낭, 기나깅 고통이래구낭~”라고 육지 사람인 내가 제대로 알아 들을 수 없는 제주 방언으로 이어지는 무가는, 고인이 된 김수남씨의 평소 업적과 고인이 남기곤 간 유족들의 한을 달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운율이 규칙적으로 변주되는 것을 제법 예리한 귀를 가진 나는 깨치게 되었지만, 정확히 어떤 변주 양식을 갖춘 무가인지는 한 번 듣고 알아낼 수 없었다. 다만, 선율의 높낮이는 타도를 타듯 출렁였고, 휘감고 풀기를 거듭하는 장단을 제주 앞 바다의 물살을 여상시켰다. 심방이 질침을 놓아, 시왕문 위에 흰 창호지를 덮어 놓으면, 상주들과 손님들이 망자를 위해 노잣돈을 올려주고, 이윽고 상주들과 함께 심방이 긴 목면을 덮어 깔아 놓은 질침을 말아 거둔다. 망자가 편히 저승길을 갈 수 있도록 낮게 패인 곳은 솟게 하고, 볼록 튀어 나온 것은 발로 다져 평평하게 해준다는 의미를 갖고 있는 질침 놀이에서 들려준 무가는 참으로 애달프게 다가왔다.
“얼마낭 애달곱고 얼마낭 가신 님 무상함이 맺힌맵까?
아들형제 섭섭한 것 다 풀렁
(중략)
저승인낭 3천 7백리 질(길)이어구나!“
의식에서 심방 서순실씨는 저승처사가 되어, 전배지를 등 뒤에 붙이고 시왕길을 떠났다. 죽은 자의 넋과 산 자의 아쉬움을 달래는 의식은 마지막으로, 신명 나는 서오제 소리로 마무리를 맺게 된다. ‘얼랑 얼랑’이란 물결 넘는 모습이 소리로 표현된 4*4조의 음율 속에 며칠 씩 끈 긴 굿판 뒤의 흥취가 느껴진다.
굿은 이처럼 산자와 죽은 자 모두를 위한 우리의 민속 제례이다. 만신을 믿는다는 점에서 일신을 믿는 기독교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미신적 행위로 간주된다. 하지만, 우리의 많은 노래와 춤이 굿에서 비롯된 것임을 굿판을 지켜본 사람들은 깨닫게 된다. 무조건 내가 믿는 종교가 뱉어낸 샤만적 주술행위라고 배척해낼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 깊은 뜻은 헤야려야 한다. 민속학적 관점에서만이 아니라, 우리 문화의 근간을 되살려 현대화시켜야 하는 작업을 위해서도, 굿은 생활 속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자신이 갖고 있는 종교관과 유리해서, 굿 자체의 유희적 속성(종교적 속성이 일차적이지만)을 탐구하며, 우리의 정신문화를 이해하려는 열린 마음이 필요할 때이다. 나 역시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굿이니 무당이니 하는 무속에 대해 거부감이 적다. 물론 내가 굿판을 열거나 점을 치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이제 우리의 무의식 속에 명백한 뿌리를 두고 있을 무속 문화를 관찰해야할 대상으로서 바라보지 않는다. 김수남 씨가 무속의 현장을 사진 속에 담으며 견지했던 태도를 김인회 교수가 전하는 말로 이 글의 서두를 마치고, 다음에는 바리공주를 통해 그림책 속에 나타난 무속 신앙의 보편성을 살펴보도록 할까 한다.
“김수남은 여느 사진작가나 학자 호사가들이 촬영대상을 객관화함으로써 자기 나름의 전문가적 위치를 지키려 노력하는 것과는 다른 행태로 작업에 임하는 작가이다. 그는 자기가 만나는 대상에 대해 전인격적으로 몰입하고 대상이 속해 있는 세계 속으로 빠져 들어가, 주관과 객관의 차이가 무의미한 상황을 체험함으로써 열광하고 감동하는 자기의 예민한 감수성을 감추려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진가이다. (중략) 그러니까 사진작가 김수남의 남다른 마력의 정체는 사람을 끌어들이는 그의 인간적 흡인력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이 흡인력의 정체인즉 남들을 내게 끌어들이기에 앞서 내가 먼저 남들에게 끌려들어가는 능력, 남들의 무의식 속으로 자기가 먼저 뛰어들어가는 그의 피흡인력 내지는 감정이입 능력이라고 정리할 수 있겠다.”(위의 책 49,50쪽)
파이 서비스가 종료되어
더이상 콘텐츠를 노출 할 수 없습니다.
첫댓글 출처가 아래 블로그인가요? 아닌 것 같은데..
블로그에서 옮긴 것이 아니라, 제가 한글 파일에 쓰고 이 곳 먼저 올린 거예요. 블로그에 링크를 달았지요. 참고로 제가 직접 취재하고 글 쓰고, 사진 찍어 만드는 것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