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 소리가 들렸다
폐허 한 구석, 어여쁜 햇빛 한 올이
나무 등걸에 걸터앉아 있었다
<햇빛 소리 - 향가풍으로> / 강은교
너만 성질 있냐?
나도 대가리부터 밀어올린다
콩나물 / 박성우
마당 앞에 풀이나 뽑느라
아무것도 못 했어
거울 앞에 서면
웬 낯선 사내
오십 넘겼지 아마?
<자화상>/ 박형진 []
오직!
절체절명으로 이 자리를 지키겠다
여기서 스러지겠다 그렇게 한 생을 박혀있겠다
천년을 만년을 콕 죽어있겠다
우주의 한 점으로 눈뜨고 있겠다
<옹이> / 신달자
[]
매미 한 마리가
한낮을 온통 점령해버렸다
그 울음 한번 깊다
서늘하다
아파트 한 채가 거기에 잠겨 섬처럼 존다
지금 매미는 할 줄 아는 게 그것밖에 없다
해야 하는 것도 그것밖에 없다
곡비처럼 운다
그것밖에 없다는 것이 매미의 울음을 그리 깊게 하였겠구나
<집중> / 복효근
'오늘'이라는 말은 내가 쓴 말 가운데
가장 새로운 언어다
<'오늘'만큼 신선한 이름은 없다> / 이기철 []
꽃이 피면 죽는게 아니라
죽음까지가 꽃이다
<대꽃> / 손택수
[]
언젠가 어디선가 딱 한번 살았던 생을
재현하고 있는 것만 같을 때
현장검증하는 것만 같을 때가 있다
봉인된 관을 열고
부관참시하는 것 같을 때
<러닝머신> / 김혜수 []
애가 애를 배기 좋은 봄날
햇빛 한줌씩 먹은 계집아이들이
입덧을 하고 있다
<민들레> / 정병근
늘 무엇에 궁핍한 자들이 시인이고
그래서 늘 도둑질하는 자들이 시인이고
도둑질한 게 눈에 잘 띄지 않으면
때로는 느닷없는 슬픔의 원리를
훔치기도 하는 자들이 시인이네
<어떤 도둑> / 오규원
하늘은 그들의 부엌.
지금의 식사는 얇게 저며서 차갑게 식힌 햇살이다.
그리고 봄기운을 한두 방울 떨군
잔잔한 바람을 천천히 오래도록 삼키는 것이다.
<조용한 이웃> 황인숙 []
그곳에 있는 것은
빗줄기를 꼿꼿하게 세우고 있는
허공뿐이다.
<골목과 아이 4> 오규원 [] []
아무래도 딸기는
신 중에서도 가장 예쁜 신이
만들어 주신 것이다.
<딸기를 깎으며> 문정희
내 허리를 휘감아 줄
사내는 없는가
저 야생의 히스크리프처럼 털이 세고
하나밖에 다른 것은 모르는 밤의
<폭풍우> 문정희 []
사랑한다는 것은
마지막 한 방울의 절망조차
비워내는 일이었으므로
내겐 내 순결한 슬픔을 묻어줄 어떠한 언어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눈물마저 슬픔의 언어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나는 너무 늦게서야 깨달아버린 것이었습니다.
<무늬> 류근
너에게로 가지 않으려고 미친 듯 걸었던
그 무수한 길도
실은 네게로 향한 것이었다.
<푸른 밤> 나희덕 []
살아오는 동안 나는
내가 사랑하는 것들로부터 거의 언제나
일방적으로 버림받는 존재였다
<극지> 류근 []
'아름답구나, 창호지 구멍으로 내다 본 밤하늘의 은하수여'
<하이쿠> 바쇼 []
무릇 세상에는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해가 뜨는 동해에
그 바다를 향해 웅크린 산줄기에
사랑한다는 약속 새기지 마라
<사랑의 약속> / 정일근 []
당신을 처음 봤을 때
봉긋한 가슴을 눈 여겨 봐두었지
날 사랑하는만큼
당신을 파먹어야 하니까
<내 사랑> 전윤호 (이 시가 안국역에 게시되어 있다고 하네요.) []
화장실을 사실로 만들기 위해 나는 요의를 느낀다
요의를 사실로 만들기 위해 오줌은 새어 나오고
오줌을 사실로 만들기 위해 사타구니는 벌어진다
<발가락 마술> 황성희 []
그래, 알았어
그래, 그럴게
나도......응
그래
<달> 김용택 []
서 말 석 되의 피를 흘리고
여덟 섬 너 말의 젖을 먹이는,
그래서 세상 모든 어머니의 뼈는 검거니
<어머니의 뼈> / 박기섭
누군가의 살을 만지는 느낌
따뜻한 살갗 안쪽에서
심장이 두근거리고
피가 흐르는 것 같다
곧 잠에서 깨어날 것 같다
<두부> 유병록 []
나비는 날개가 젤루 무겁고
공룡은 다리가 젤루 무겁고
시인은 펜이 젤루 무겁고
건달은 빈 등이 젤루 무겁다
경이롭잖은가
저마다 가장 무거운 걸
젤루 잘 휘두르니
<팔자>전문 / 반칠환 []
떨어진 타일의 귀퉁이를
강력한 순간 접착제로 붙이려다
손이 덜컥 붙어버렸다
그 손을 떼려고
발로 타일이 붙은 벽을 밀다
발도 덜컥 붙어버렸다
손과 발을 떼려고
온몸으로 타일이 붙은 벽을 밀다
온몸이 벽에 덜컥 붙어버렸다
이제 어떡하지
아
입은 안 붙었구나
<결혼>전문 / 신미균 []
대낮에도 머리 위에서
나를 지배하던 그녀가
초저녁부터 흔적 없이 사라지는 그믐밤
혼자 춤을 추고 있다 생각했다. 잘못 생각한 것이다.
늘 화장을 고치는 달의 섹스는
나 모르게 유황가스처럼 감귤밭에 퍼진다.
<달의 탱고> 하재봉 []
죽음은 공짜인데 언제부터 선불이 되었느냐 따지는 나에게
보험설계사는 확신에 찬 웃음으로 대답했다.
생명보험은 가족에 대한 사랑이라고
보장성과 수익성이 풍부할수록 사랑도 진실해진다고
견적이 나오지 않는 사랑을 무엇에 쓸 거냐고.
<생명보험> 김기택
사랑이 위대한 것은
번쩍 빛의 속도보다 더 빠르게
나를 찌르기 때문이다
서정시가 위대한 건
시 한편을 읽는 그 짧은 순간
사람의 영혼, 자연의 색깔로
달궈지기 때문이다
나를 찔러 쓰러뜨리지 못하는 사랑은
나를 달구지 못하는 서정시는
그건 실패한 암살범과 같다
사랑은 목표를 향해 이미 당겨진 방아쇠
서정시는 전부를 쓰러뜨리는 한순간의 감염
테러리스트여 번개처럼 나를 찔러라
당신의 칼끝 나를 치명상 입히는 데
1초도 긴 시간이니
<1초가 길 때>전문 / 정일근 []
작약 싹 올라온다
작약꽃이 피어 세상을 보다가
떨어질 것을 생각한다
작약 겹겹 꽃잎이 바라본 그 속에
이 눈의 주인과 내가
눈 꿈쩍꿈쩍하며 나눈 말들을
숨겨 두리라
<작약> 장석남 []
개구리 한 마리가 가부좌하고
눈을 부라리며 상체를 내 쪽으로 쑥 내밀고
울대를 꿀럭거린다.
뭐라고 성을 내며 따지는 게 틀림 없는데
둔해 알아먹지 못하고
나는 뒷목만 긁는다
눈만 꿈벅거린다
늙은 두꺼비처럼
<미안한 일> 김사인 []
이미 시는 변심한 애인
독자가 잡고 있는 밧줄을 끊어버리고
우뚝, 혼자 정상에 오르는
승승장구한 시는 애인도 시도 아니라고
나는 지극히 자조적인 독자일 뿐
<감상적인 독자> 이화은 []
귀뚜라미는 나에게 가을밤을 읽어주는데
나는 귀뚜라미에게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다
언제 한번 귀뚜라미 초대하여
발 뻗고 눕게 하고
귀뚜라미를 찬미한 시인들의 시를 읽어주고 싶다
<우물> 박형권 []
어쩌면 믿고 믿은 사람이여
내세가 안 나와 한없이 뒤로 가는 사람에게
여권을 펼쳐 도장을 찍어주듯 내세가 온다면
보지 않고 믿었지만, 좋겠네
모두들 같은 내세에 가는 건지는 알 길 없지만
<내세(來世)> 황학주
어머니는 나의 밥
나는 아들의 밥
나는 믿고 또 믿는다
아들도 또 누군가의 만만한 밥이 될 것이다
<밥> 조경숙 []
시치미 뚝 떼고 제 똥 위에 꼿꼿하게 앉아 있는 부처,
저 지독한 부처의 똥냄새를 지우려고 날이면 날마다 피워대는
대웅전의 싸구려 향냄새
<사하촌의 봄> / 유홍준 []
어머니 바느질하시다가
바늘로 허공을 찌른다
피가 난다
어머니 바늘로 허공을 기워
수의를 만드신다
<허공>전문 / 정호승 []
간절한 것은 통증이 있어서
당신에게 사랑한다는 말 하고 나면
이 쟁반 위 사과 한 알에 세 들어 사는 곪은 자국이
당신하고 눈 맞추려는 내 눈동자인 것 같아서
<그 집 뒤뜰의 사과나무> / 안도현 []
날마다 입덧하고
날마다 산고의 비명을 내지르는
자궁이 닳고 닳아
삭은 고무바킹처럼 헐거워지면
곧바로 목에 칼이 들어오는
<암탉들> / 조은길 []
새들의 명함은 울음소리다
경계의 명함은 군인이다
길의 명함은 이정표다
돌의 명함은 침묵이다
꽃의 명함은 향기다
자본주의의 명함은 지폐다
명함의 명함은 존재의 외로움이다
<명함>전문 / 함민복
7천 럭스의 작약꽃밭이 불쑥 켜졌다, 고요의
밀집이었다 붉은 환등이었다 혹자는 빛의
번안이라 수학의 궁구라 했다
<작약> 조정인 []
한바탕 아내들의 뜨거운 빵틀 속에서
남편들은 모두
잘 익은 붕어가 되어 또 한 번
꿈결로 숨결로 돌아눕고
<붕어빵을 굽는 동네> 이화은 []
남의 살에 더 들어가려고 비아그라를 먹는 늙은 정욕처럼
어지러웠지만
지천명이다
<쉰> / 이영광 []
열매보다 꽃이 무거운 生이 있다.
<슬픔> 전문 / 이정록 []
"불행은 언젠가 잘못 보낸 시간의 보복"
나폴레옹의 이 말은 10년 동안
내 머릿속을 돌아다니는 송곳이었다
게으름을 피울 때마다
내 많은 실패를 돌아볼 때마다
송곳은 가차없이 찌르고 찔러왔다
<불행은 언젠가 잘못 보낸 시간의 보복> 신현림 []
이제 저녁 일곱 시
하루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건
벌겋게 타오르던 노을이
쇠잔해져 어둠에 사그라지는 것만 봐도 안다
마지막 네 눈빛이 그러하였다
<저녁 일곱 시> 엄원태 []
슬퍼하지 마세요
세상은 슬퍼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니까
자살한 장국영을 기억하고 싶어
영화 '아비정전'을 돌려 보니
다들 마네킹처럼 쓸쓸해 보이네요
다들 누군가와 함께 있고 싶어 해요
<그래도 살아야 할 이유> 신현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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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무엇을 하였느냐는 물음에 대해
다름아닌 인간을 찾아다니며 물 몇 통 길어다 준 일밖에 없다고
<물통> 김종삼 []
두근거리는 토끼의 심장에서
연한 놀람과 어린 두려움을 떨림이 살아 있는 그대로
발라내 갖은 양념에 무쳤습니다.
<오늘의 특선 요리> 김기택
나비는 날아오르는 순간 집을 버린다.
날개 접고 쉬는 자리가 집이다.
<나비는 길을 묻지 않는다> 박상옥 []
잃을 것도 없는 것을 잃을까 봐
끊임없이 몸부림치는 저녁나절
어둠이 능선을 지우며 내게로 오는 동안,
어둠에 익숙한 하늘은
밥풀 같은 별 몇 알 오물거리고 있다
<저녁나절이다> 박종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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