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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부 두 개의 분단정부(7) – 좌익의 약화와 대응(2)
[연재] 임영태의 ‘다시 보는 해방 전후사 이야기’(67)
좌우익 대립의 격화와 테러의 급증
모스크바 삼상회담 이후 남로당은 미소공위의 성공과 그를 통한 임시정부 수립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1947년 미소 냉전이 본격화되면서 미소공위는 실패로 끝났다. 미소공위의 실패는 중도파에게도 큰 타격이 되었지만 가장 심각한 타격을 입은 것은 좌익의 대표주자인 남로당이었다. 남로당 때문에 미소공위가 실패한 것은 아니었지만 남로당은 미소공위의 성공을 가장 중요한 활동 목표로 정했음에도 시종일관 미소공위가 성공하기 어려운 주장을 폈다는 점에서 활동이 모순적이었다. 1947년 7,8월 미소공위가 사실상 실패로 끝날 때의 정세는 어느 한 정치세력의 힘만으로 이를 막을 수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운동주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남로당은 좀더 유연하고 탄력적인 노선으로 문제를 풀어가는 것이 필요했지만 전혀 그런 대응전략을 펴지 못했다. 미소공위가 결렬되고 미국이 한반도 문제를 유엔으로 넘기면서 단독선거 노선이 기정사실화하고 미군정과 이승만·한민당 등 단정세력의 공세가 거세졌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단선에 반대하는 세력이 어떻게 연대를 강화해 공동대응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이 시점에서라도 남로당은 중도파에 대한 기존의 입장을 재검토하고 이들과의 연대, 공동대응 방안을 모색해야 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여운형의 장례식 장면(사진=국사편찬위원회). 미군정의 좌익 탄압과 함께 우익의 테러가 좌익의 활동력을 억제하는 주요한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1947년 7,8월 우익의 테러로 여운형이 암살당하고, 김규식 등 중도세력에게까지 테러 위협이 노골적으로 자행되었다.
1947년 7,8월 남로당과 좌익은 미군정의 탄압으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이 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되었던 것은 우익의 테러였다. 이미 1946년 9월 총파업에서 우익의 테러로 큰 타격을 입었지만 2차 미소공위가 끝날 무렵의 우익 테러는 그 정도가 달랐다. 이러한 극우세력의 테러 와중에 해방 후 가장 대중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며 한때 초대 대통령으로까지 거론되었던 여운형이 끝내 목숨을 잃고 말았다. 여운형은 해방 3일 뒤인 1945년 8월 18일부터 테러를 당하기 시작해 가장 많은 테러를 당한 끝에 1947년 7월 19일 극우세력에 의해 암살되고 말았다. 1947년 7월과 8월 우익의 테러는 여운형으로 끝나지 않았다. 8월에는 중도파에 대한 테러도 빈번하게 일어났다. 입법의원 신기언이 8월 중순 테러를 당한 것을 비롯해 천도교청우당과 사민당 관련자들도 테러를 당했다. 이른바 ‘애국결사대’가 김규식, 안재홍, 원세훈, 김호 등 중도파 정치지도자들을 암살할 것이라는 소문이 시중에 공공연하게 떠돌았다.(주1)
정치인과 더불어 우익세력의 중요한 표적 중 하나는 언론기관과 언론인이었다. 1946년 6월에서 1947년 8월까지 11개 언론기관이 테러공격을 받았고, 언론인 55명이 테러 습격을 받았으며, 105명의 언론인이 미군정 경찰에 검거되었다. 전평 소속 노동조합에 대한 테러는 비일비재하게 일어났고, 좌익단체에 대한 공격도 계속되었다. 테러는 개인의 인명을 살상한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무고한 일반인들과 개인 집에 대한 무차별적 파괴로까지 이어졌다. 좌익도 이에 대응하여 경찰서와 지서를 습격하였고, 우익테러에 맞불을 놓기도 했다.(주2) AP통신의 로이 로버츠(Roy Roberts) 기자는 1947년 8월 미군 정보대가 “마을 내의 격돌, 마을들 간의 싸움, 우익분자에 대한 구타, 좌익분자에 대한 구타, 식량창고 방화, 마을 관리들에 대한 공격, 경찰에 대한 공격, 정치집회에 대한 투석”에 대한 경찰보고를 매일 평균 5건씩 접수했다고 기록했을 정도였다.(주3)
미군 정보보고에 의하면, 1947년 7월 127건의 테러가 발생해 36명이 사망하고, 385명이 다쳤는데 우익 테러가 중심이었다. 8월에는 68건의 테러가 보고되어 17명이 사망하고 158명이 다쳤다. 68건 중 37건은 우익에서, 16건은 좌익에서 테러한 것이었고, 15건은 불명이었는데, 우익테러 37건 중 36건이 좌익에 대한 정치 테러였다. 우익테러 중 1건은 경찰에 대한 것이었고, 좌익테러 중 10건은 정치테러, 4건은 경찰에 대한 것이었다. 9월에 발생한 50건 중 우익테러는 28건, 좌익테러는 12건, 불명이 10건이었다. 7월부터 9월 전반기까지 극심하던 테러는 한국문제가 유엔에 이관된 9월 하순 이후 조금씩 줄어들었다. 11월에는 40건으로 감소했지만 12월에는 63건으로 다시 증가했다.(주4) 단선반대투쟁과 이에 대한 우익의 폭력 공격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던 것이다.
테러를 좌익공격의 주요 수단으로 사용한 극우세력
테러는 분단이 현실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좌익의 합법적 공간을 계속 축소시키는 역할을 했다. 독립촉성국민회 지부가 1946년 지방에서 좌익을 제압하는 수단으로 테러를 자주 사용한 것은 그 단적인 예라 할 것이다. 테러 활동은 좌익의 정치적 통제를 위한 우익의 가장 유력하고 강력한 수단이자 도구였다. 이승만이 1947년 8월 미군정 관계자에게 테러리스트들의 좌익 공격을 금지할 수도 없고, 금지하는 것을 원하지도 않는다면서 테러단체를 옹호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1947년 3,4월 우익청년단체의 지부와 회원이 급증했는데, 미군정은 좌익과의 다가오는 최후 대결을 예감케 했다고 평했다. 실제로 우익청년단체들은 연합 작전을 펴서 좌익을 공격하였는데, 9월 13일 서울의 여러 청년단체들이 합동으로 기차를 타고 좌익세가 강한 부산에 원정을 가서 좌익신문사를 공격하고, 전평 건물을 점령하는 등 대대적인 테러 활동을 벌였다. 지방 원정을 다니던 청년단체 중 가장 무서운 존재가 월남자들로 구성된 서북청년회였다. 서북청년회는 테러, 습격뿐만 아니라 좌익인사들을 납치, 고문하는 등 온갖 악랄한 행위를 자행하였다. 이들은 미군정 경찰과 이승만의 철저한 비호 속에 과감하게 테러 활동을 자행하였다.(주5)
서북청년회(서청) 등 우익청년단들은 1946년 10월 항쟁에서도 경찰과 함께 동원돼 테러활동을 벌였으며, 제주도에서는 1947년부터 서청을 비롯해 대한청년단 등이 대거 투입되어 갖은 악행을 저질러 제주도민의 원성을 샀으며, 이는 나아가 4.3제주항쟁의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결국 제4.3항쟁은 대한민국정부 수립 후 제주도민에 대한 대량의 민간인 학살로 이어졌다.
소련군 철수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는 서북청년회원들. 월남민으로 구성된 극우청년단체들은 남한에서 좌익 공격의 선봉에서 온갖 악행을 자행하였다.
1947년 7월 전북 정주군 삼례면에서는 좌우대립이 결국 극단적인 물리적 충돌로 비화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 발생했다. 독촉국민회 청년 50여명이 삼례문 와리마을을 습격해 다수의 인명피해와 가옥 파괴가 일어났는데, ‘사상전환서’라는 걸 들고 가서 주민들에게 사상전환을 강요하면서 발생한 일이었다. 이 사건 발생 3일 후에야 독촉국민회 10명이 경찰에 구검되었으나 곧 풀려났다. 반면, 총호수 204호에 1.301명의 와리 주민들 중 100여명이 경찰에 검속되어 고초를 겪었다. 이밖에도 완주군 이서면, 부안, 김제, 나주, 함평 등 이른바 ‘적색마을’로 찍힌 곳에서 이와 유사한 일들이 발생했다. 8월 28일부터 31일까지 4일간에 걸쳐 충북 진천군 이월면 송림리를 중심으로 이월면 좌익계 주민들과 진천 독촉국민회원 수백 명이 집단 충돌해 여러 명의 사망하는 등 60여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192명이 검거되었다. 이같은 사건들은 동족상잔, 내전의 전조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주6)
1947년 테러 급증하고 좌우충돌이 빈번해진 것은 극우세력이 친일경찰의 비호 아래 테러를 주요 수단으로 활용해 좌익을 공격, 억제하고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려한 데서 발생했다. 해방 초기 좌익이 정국을 주도하던 상황에서 힘의 역전 현상이 발생하면서 그동안 숨죽이고 있던 친일세력과 지주, 우익세력들이 원래의 기득권을 되찾으려 하고, 이에 해방 후 좌익과 남로당 등의 활동을 통해 새로운 해방 세상을 맛본 농민과 민중들이 강력히 저항하면서 충돌이 벌어진 일이었다. 모스크바 협정을 둘러싸고 우익들이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하였고, 그 과정에서 좌익을 소련의 앞잡이, 매판세력으로 매도하면서 애국과 매국의 대립전선이 뒤엉켰는데, 자본을 가진 친일세력들이 자금을 제공하고 월남한 우익세력들이 선봉대로 나서면서 이러한 일들이 벌어졌다.
재건서북청년단의 깃발. 이들은 아직도 피로 얼룩진 이념 대결의 구시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옥과도 같았던 과거를 버젓이 재현하겠다고 나서는 이들은 어느 시대를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미군정과 극우세력의 책임이 가장 컸지만 남로당(조선공산당)에도 전혀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남로당은 모스크바 결정을 지지하면서 국제노선과 계급노선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민족주의세력과의 연대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한 측면이 있었고, 미국에 대한 정책과 노선에서도 우편향과 좌편향을 오고가면서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였다. 또한 여운형 등 중도좌파의 관계에서 우익의 앞잡이로 매도하거나 프락치를 동원한 공작으로 제압하는 독단적인 행태를 보였다. 친일파의 부활을 저지하고 반일민족통일전선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유연하고 탄력적인 방침과 노선이 요구되었으나 남로당은 경직성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남로당의 힘이 약화되고 좌우익의 힘 관계에서 역전현상이 일어나면서 우익의 테러가 더욱 기승을 부렸고, 이는 좌우익의 물리적 대결로 발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미군이 장악하고 있는 남한에서 물리적 대결이 벌어질 경우 좌익이 불리한 조건인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때문에 비합법투쟁과 폭력 투쟁을 벌이더라도 최대한 합법적 영역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이 요구되었고, 이는 중도파와 등 광범위한 세력과의 연대였으나 남로당은 아예 이런 노력을 포기하다시피 했다.
남로당의 정치적 고립과 ‘2.7 구국투쟁’
1947년 10월 중순 미소공위가 결렬되고 소련군 대표단이 서울을 떠난 직후 민전은 “우리는 3상 결정과 공위 사업은 포기될 수 없으며, 포기되어서도 안된다”라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미소 협력의 열차는 떠났고, 이제는 단정 노선을 막기 위해 어떻게 활동할 것인지만 남게 되었다. 미소공위가 끝난 상황에서 이제 국제적인 협력을 통한 한반도 통일정부는 불가능하게 되었으므로 남은 한 가지는 민족내부의 역량을 모아 통일정부 수립을 시도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한 가장 유력한 방안으로는 남북정치지도자 협상이 있었다. 그러나 남로당은 좌경노선으로 남한에서 고립된 상태였고, 독단적인 행태로 중도파와의 관계도 원만하지 않았다. 더욱이 남로당은 자신과 자신의 외곽단체를 제외하고는 모든 정당과 사회단체들을 부정적으로 보았고, 경쟁관계에 있는 북로당과의 관계도 썩 좋은 것이 아니어서 이런 주장을 펴기도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서 김규식·홍명희 등 중도파에서 남북대표자회의를 제안하였다. 1947년 말경 민족자주연맹에서 남북지도자회의를 제안했을 때 남로당은 그 필요성을 인정한다면서도 그다지 달갑게 여기지는 않았다.(주7)
1947년 9월 27일 소련측에서 미국의 유엔이관에 대응하여 미소 양군 동시 철퇴안을 제기한 후, 남로당은 그때까지의 미소공위를 통한 좌익정권 수립에서 자체의 실력투쟁을 통한 정권 장악으로 활동 방침을 전환했다. 38선 이북 북조선은 혁명의 민주기지가 되고 있었고 이남에서는 남로당이 지도하는 좌익세력이 있어서 한반도 전체로 볼 때 좌익이 우익보다 훨씬 강하다고 보았던 것이다.(주8) 하지만 미국이 양군 철퇴안을 받아들일 리 만무했다. 결국 이남에서 미군과 싸워야 승리해야 한다는 것인데 그렇게 되기는 어려웠다. 그렇다면 물리적 충돌이 아니라 정치적인 방법을 찾아야 했는데, 남로당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남로당은 1947년 말까지 소련이 제의한 외국군 철병 주장만 되풀이 했고, 1948년에도 크게 바뀌지 않았다. 1948년 1,2월에도 남로당은 이승만·김구뿐만 아니라 김규식과 그의 추종자들과 싸울 것을 하부조직에 지시할 정도로 경직되어 있었다.(주9)
나아가 남로당은 김구·김규식의 남북요인회담 제안에 대해서도 미국제국주의의 괴뢰단정 조작극의 일환이라고 비난하였다. 남로당의 외곽단체인 여맹에서는 김구·김규식 등이 ‘통일’이니 ‘철병’이니 ‘정치범 석방’이니 하면서 기만적 언사로 유엔조선임시위원회에 대한 환상을 퍼뜨리고 있다며 이러한 행위는 중도파로 하여금 민주진영을 견제, 고립화시키고, 분열과 단정의 책임을 소련과 남북민주진영에 전가하여, 미제국주의 영도 하에 괴뢰단정을 조작하려는 연극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다.(주10)
유엔한국위원회 활동을 반대하는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를 벌이는 사람들
남로당의 이 같은 입장과 태도 때문에 남한의 중도파 민족주의 세력과의 관계는 극도로 악화되었다. 반면, 북로당은 단정 노선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남로당과 달리 중도파 민족주의 세력과의 통일전선이 절실하다는 입장이었다. 1947년 12월 초와 1948년 1월 말 두 차례 열린 남북노동당 연석회의에서도 북로당과 남로당은 견해를 달리하며 충돌했다. 남로당의 박헌영·이승엽은 여전히 중도파와의 합작은 불필요하며 남로당 자체의 힘만으로 단선저지 투쟁을 성공할 수 있다고 장담하였다. 이렇게 되면서 남로당은 독자적으로 분단 저지 투쟁을 전개하고, 남한 내 민족주의 중도파와의 합작은 주로 북로당에서 담당하게 되었다. 북로당은 ‘권위있는 선’ 성시백을 비롯, 남한지역에 정치공작원을 파견하여, 1947년 후반부터 남한의 정당협의회, 민족자주연맹, 그리고 임시정부 요인들에 대한 정치공작을 적극적으로 진행하였고, 이러한 노력을 바탕으로 남북연석회의로 발전시키는 데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주11)
독자적으로 단선·단정반대투쟁을 전개하기로 한 남로당은 단정노선에 대응하여 정치적 행위를 전면거부하고 실력행사를 통한 ‘2.7 구국투쟁’을 전개하였다. 2.7 구국투쟁은 남로당의 외곽조직인 전평을 앞세워 총파업을 전개하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전평은 그동안 미군정의 탄압과 대중과 유리된 정치투쟁 위주의 투쟁으로 조직역량이 많이 약화되었으나 그래도 남한 최대의 노동자조직이었다. 전평은 2월 7일과 2월 25일 두 차례에 걸쳐 전면 파업을 감행하였고, 이에 발맞추어 농민과 학생, 청년 등이 단선반대 시위와 선전 활동을 펼쳤다. 2.7 구국투쟁 과정에서 전평 등 좌익세력은 경찰·우익청년단과 격렬하게 충돌하였고 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했다.(주12) 미군정에 따르면, 2월 7일부터 10일까지의 2.7투쟁 과정에서 경찰서와 지서 공격이 32건, 기관차 사보타지가 52건, 교량 파괴가 1건 있었으며, 1,741명이 체포되고, 경찰이 12명, 민간인이 37명 사망했다고 집계되었다.(주13)
2.7구국투쟁의 파업선언에서는 유엔조선위원회 절대 반대, 남한 분리정부 수립 반대, 테러하의 반동적 총선 절대 반대, 양군의 동시 철군으로 통일정부 건설, 제국주의의 앞잡이인 이승만, 김구, 김규식 등 친일반동 타도, 노동법 제정, 사회보장제 실현, 임금 300% 인상, 노동자에게 하루 5홉 그 가족과 일반시민에게는 3홉 이상의 쌀의 분배 등을 요구했다. 이 무렵 김구는 이승만과 결별하고 김규식과 손잡고 외군 동시 철수와 단정반대, 남북지도자회의 소집 등을 요구하며 남북회담에 나서고 있었는데 남로당과 좌익은 김규식과 김구를 이승만과 함께 제국주의의 앞잡이, 친일반동배로 몰아 타도하자고 주장했다. 3.1운동 29주년 기념으로 낸 남로당 중앙위원회 명의의 ‘조선인민에게 호소함’이란 성명에서도 “이승만, 김구, 김규식, 김성수 등 반역도당의 정체를 폭로하고 인민으로부터 고립, 매장시키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주장하였다.(주14)
2.7단선반대투쟁 보도(동아일보 1948.2.8.일자)
한편, 2.7 구국투쟁 이후에도 남로당 등의 단선반대투쟁은 계속되었다. 남로당 조직들은 모두 지하로 들어간 상태에서 ‘남조선 단선반대투쟁 전국위원회’를 조직하고 각 도·시·군에 지방조직들을 만들어 단선반대투쟁을 집중적으로 전개했다. 거의 모든 민족주의 정당과 단체들이 단선·단정을 반대했지만 실제로 대중조직을 움직이며 조직적인 투쟁을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은 남로당밖에 없었다. 지방에서 변혁운동에 참여하고 있던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또는 경찰과 극우세력에 몰리는 상황에서 다수가 남로당에 가담하였다. 결국 단정에 적극적으로 반대했던 많은 이들이 ‘자의반타의반’ 남로당의 주장을 지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단정 반대는 민족적 대의였기 때문에 남로당의 입지는 상당히 강화될 수 있었고, 각지에서 단정 반대 및 단정세력·친일파에 대한 반대투쟁이 강력히 전개되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남로당은 무력투쟁 중심으로 단정반대투쟁을 전개함으로써 광범위한 대중을 포섭, 참여시키기 위한 보다 대중적인 활동을 전혀 진행하지 못하였다. 결과적으로 남로당의 모험주의적 투쟁으로 대중과의 연결이 약화되고 조직이 드러나면서 파괴, 약화되었다.(주15)
5월 10일 남한 단독선거일이 다가올수록 좌익 등 단선반대투쟁이 거세졌고, 경찰과 우익과의 충돌 또한 격렬해졌다. 한반도의 최남단에 있는 가장 큰 섬인 제주도에서는 4월 3일 남로당이 주도하는 민중 봉기가 일어나면서 5.10선거가 정상적으로 치러지지 못했다. 4.3제주항쟁은 대한민국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정권의 무차별적인 초토화 작전 전개로 3만여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하는 비극적 상황이 연출된 뒤 1949년 4월에 끝났다. 남한 단독선거를 목전에 둔 5월 8일부터 남조선 단선 반대 총파업위원회 주도로 다시 전국 총파업이 진행되었고, 전국에서 혼란이 가중되었다. 많은 투표소가 공격받았고, 경찰서·지서가 습격을 받았으며, 많은 사람들이 죽고 부상당했다. 단선반대투쟁이 격렬하게 벌어졌던 2월부터 5월 초까지의 4개월 동안 모두 720명의 사망자(경찰 100명, 좌익 372명, 우익 248명)가 발생했다. 이는 이 시기가 평상시 상황이 아니라 ‘사실상의 내전’ 상황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주16)
단선 반대투쟁과 제주4.3항쟁
미국과 이승만·한민당의 남한 단선에 반대하는 투쟁은 남한 전역에서 진행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제주도가 특히 격렬했다. 1948년 4월 3일 새벽1시 한라산과 제주도 89개 오름에 일제히 봉화가 올랐고, 이를 신호로 1,500여명이 인민자위대가 도내 24개 경찰서와 지서 가운데 12개를 공격하였다. 제주4.3항쟁이 시작된 것이다. 남로당은 단선반대 2.7구국투쟁을 계기로 ‘야산대’로 불리는 무장부대를 조직했는데, 제주도에서는 자위대로 이름을 붙였다. 제주의 인민자위대 500여명은 일본의 99식 소총(27정), 권총(3정), 수류탄(다이너마이트)(25발), 연막탄(7발), 칼, 죽창 등으로 무장했고, 무장대를 뒤따른 1,000여명의 대중들은 무장도 없는 빈손이었다. 인민자위대는 경찰지서뿐만 아니라 서북청년회와 독립촉성국민회, 대동청년단 등 우익인사들의 집도 습격했다. 무장자위대(무장대)의 공격으로 경찰관 4명이 사망하고 6명이 부상당했으며, 2명이 행방불명되었다. 우익인사 6명이 사망하고 19명이 부상당했다. 무장대는 2명이 사망하고 1명이 생포되었다.(주17) 제주도라는 작은 섬 지역에서 발생한 희생치고는 적은 수가 아니었지만 전면적인 무장봉기의 결과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는 희생자 숫자였다. 이날의 무장공격은 전면적인 무장봉기라기보다 대중투쟁과 결합한 제한된 대상을 향한 기습공격의 성격이 강했다.(주18) 당시 남한 전국에서 이미 유혈이 낭자한 상황을 벌어지고 있던 것을 감안하면, 제주도가 좀 더 격렬했던 수준이라고 하는 편이 옳았다.
그러나 미군정과 단선세력들은 이 사건을 전혀 다르게 인식하였다. 미군정은 이 사건이 제주도민들의 군정의 잘못된 정책과 단선에 반대하는 저항으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외부의 불순세력이 개입해 선거를 파탄내기 위한 것이라고 보았다. 적과 동지라는 이분법적 사고, 냉전적 사고가 작동한 것이다. 당시 군정장관 딘 소장이 “제주 외에서 들어온 공산주의자들의 선동과 모략에 의해 제주 청년들이 살인·방화를 하고 있다”고 주장한 것이나 당시 동아일보가 “5.10선거의 방해를 위하여 스탈린이 제주도에서 게릴라전을 선택하였다”(주19)고 보도한 것은 전형적인 냉전적 사고에서 나온 것이었다. 미국과 단정세력은 이 사건에 대한 객관적인 분석에는 관심이 없었고, 정치적 목적에 따라 4.3봉기를 공산주의자의 ‘무장투쟁’ ‘게릴라전’으로 규정하고, 제주도를 ‘제2의 모스크바’로 몰아가면서 군대를 동원해 조기에 가혹하게 진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주20)
제주4.3항쟁의 뿌리가 된 1947년 3.1절 사건 후 제주지역 총파업 사건을 다룬 신문 보도.
그러나 제주4.3봉기는 해방 후 제주에서 있던 일련의 사건들, 이를테면 1947년 3.1절 시위 발포사건, 서청 등 우익청년단의 도래와 경찰 증원, 그리고 그에 따른 경찰·우익세력의 주민에 대한 만행, 좌익과 민전 등에 대한 경찰의 탄압, 경찰·우익청년단의 좌익청년들에 대한 고문치사 사건, 제주도민들의 외지인(육지인)에 대한 피해의식 등이 결합되어 일어난 사건이었다. 특히 서청 등 육지에서 도래한 우익청년단과 육지에서 증파된 친일경찰의 주민에 대한 행패는 제주도민의 분노를 거의 꼭지점까지 끌어올렸다. 이 같은 제주도민들의 분노를 바탕으로 젊은 세력으로 교체된 남로당 제주도당 신진지도부가 무장투쟁노선을 채택함으로서 4.3민중항쟁의 봉화가 오른 것이었다.(주21)
제주4.3항쟁이 발생하자 군정은 4월 5일 아침 전남 경찰 약 100명을 급히 파견하였고, 제주경찰감찰청 내에 제주비상경비사령부를 설하고 경무부 공안국장 김정호를 사령관으로 파견하였다. 서북청년회·대동청년단 등 우익단체도 증파되었다. 사건 발생 직후 비상경비사령관 김정호는 “폭동사건은 육지부에서 침입한 악질불량 도배들이 도민을 선동시켜 야기된 것”이라고 말했다. 4월 14일 경무부장 조병옥은 “여러분은 민족을 소련에 팔아 노예로 만들려고 하는 공산분자의 흉악한 음모와 계략에 속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제주도민과 제주경찰들의 생각은 달랐다. 그동안 쌓여온 제주도민의 불만이 폭발한 것이므로 민심을 수습하기 위한 대책이 필요하며, 서청 등 외부인력의 증파가 사태를 더 악화시킨다고 보았다.(주22)
제주4.3사건 (그림 강요배)
제주도 모슬포에 주둔하고 있던 국방경비대 제9연대장 김익렬은 군이 개입할 사건이 아니라고 보았다. 그러나 군정장관 딘 소장은 군이 진압작전에 나서야 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제주주둔 제59군정중대장 맨스필드 중령에게 무장대를 공격하기 전 소요집단의 지도자와 접촉해 항복 기회를 부여하기 위해 노력하라고 지시하였다. 맨스필드의 지시에 따라 4월 28일 김익렬 연대장은 무장대 대장 김달삼을 만나 귀순협상을 벌였다. 4.28 협상을 통해 양측은 72시간 내에 전투를 중지하고, 군은 무장을 해제한 자위대 주모자의 신변을 보장하며, 귀순자들은 수용소를 설치해 관리한다는 데 합의하였다.(주23)
그러나 4.28 평화협상은 미군의 지원 아래 경찰과 우익청년단(서청·대청)이 조작한 5월 1일의 ‘오라리 방화사건’으로 깨지고 말았다. 서청 등 우익청년단원들이 오라리 마을에 들어가 좌익 활동을 한 사람들의 집에 불을 질러 마을을 불태웠는데 이 광경은 미군이 촬영한 필름에 고스란히 담겨졌다. 경찰은 이를 좌익의 소행으로 조작했지만 경비대의 조사결과는 달랐다. 이 사건을 빌미로 미군정은 강경진압을 공식화하였다. 5월 3일 군정장관 딘은 경비대총사령부에 무장대를 공격해 제주사건을 단시일 내에 해결하라고 명령했다. 5월 5일에는 군정장관 딘이 민정장관 안재홍, 경무부장 조병옥, 경비사령관 송호성 준장 등을 이끌고 제주도를 방문, 비밀회를 개최했다. 이 회의에서 9연대장 김익렬과 경무부장 조병옥이 거친 몸싸움까지 벌이며 격렬하게 대립했고, 회의는 결론도 내리지 못한 채 난장판이 되어 끝났다. 이후 미군정은 강경진압을 공식 지시하였다. 김익렬 또한 9연대장에서 해임되었고 그 자리에 박진경이 임명되었다. 박진경은 “제주도 폭동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키더라도 무방하다”며 강경진압을 밀어붙이다가 문상길 중위 등에 의해 암살되고 말았다.(주24)
제주4.3사건 후 강경진압을 결정한 미군정의 주요 간부들
5.10단선 이후 제주도에 대한 강경진압작전이 진행되면서 무장대뿐만 아니라 무고한 민간인들에 대한 희생이 늘어났다. 미군과 경비대·경찰의 토벌작전에 무장대는 한라산 깊숙이 은거해 게릴라전을 폈고, 경비대와 경찰은 무장대는 잡지 못한 채 중산간 마을을 중심으로 무고한 민간인만 폭도로 몰아 살해했다. 그래도 제주4.3사건에 대한 토벌작전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10월 19일 여순사건이 발생하기 전까지는 일정한 선을 넘지 않았다. 그러나 여수 주둔 14연대 군인들이 제주 토벌을 위해 증파되는 것에 반대하며 봉기를 일으키며 항쟁에 나서자 이승만 정권은 여순사건을 강경하게 진압하였다. 이와 함께 이승만 정권은 10월 17일부터 제주도 전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해안선에서 5km을 넘는 중산간 지역에 대한 통행금지령과 함께 무차별적인 토벌작전을 펴 민간인을 대규모로 학살하였다. 그 결과 제주도민 30만 명 중 3만명 이상이 학살되는 참극이 벌어졌다. 제주에서 희생된 대부분의 민간인들이 1948년 11월부터 1949년 3월 사이에 학살되었다.(주25)
미군 정찰기가 공중에서 항공 촬영한 오라리 방화사건 현장 모습. 미군은 이 방화사건의 범인이 우익청년단인 것을 알고 있었다.
제주4.3항쟁은 단선을 반대하는 민중투쟁으로 시작되었고, 제주에서는 실제로 선거를 무산시켰다. 미국과 단선세력은 이 사건을 단순한 민중의 저항, 단선반대투쟁이 아니라 소련과 공산주의자의 사주를 받은 폭동으로 인식하였고, 잔인하게 진압하려 했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과 미국이 말한 그 ‘공산폭도들’은 아무리 많이 잡아도 500명이 안 되었다. 그런데 3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학살되었다. 그들이 모두 ‘공산폭도들’인가? 미국과 이승만 정권은 단독선거를 감행하고 분단정부를 세웠으나 제주도에서 그에 강력히 저항하는 민중들의 항쟁이 발생하자 냉전적 사고로 강경 토벌작전을 전개해 무고한 민간인을 살상한 것이었다. 단선에 저항하는 민중항쟁을 그냥 두어서는 자신들의 단선노선이 명분을 잃을 것이고, 더욱이 대한민국정부의 정통성이 심각하게 훼손될 것이기 때문에 단호히 응징해서 그 싹이 자라지 못하도록 하려했던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무고한 민간인이 3만 명 이상 희생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단선노선의 실패를 말해줌과 동시에 한국전쟁에서 있을 대량의 민간인 학살의 직접적인 전주곡이었다.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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