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과 한국 천주교회(24)
☞ 천주공경가(24)
<천주 공경가>는 이벽(1754-1786)의 작품으로 주장된다. 이 사람의 이름은 덕조(德操). 세례명은 세자 요한, 아버지(=이부만)의 뜻은 무관으로 크기를 바랐으나 그 뜻을 거부하였다하여 벽(僻=치우치다. 후미지다.)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하였다. 그가 쓴 하느님에 대한 것이 ‘천주 공경가’이다.
이 노래의 내용은 인간사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미루어, 인간의 세계를 뛰어넘는 것의 바탕에는 하느님을 생각해야 한다는 주장을 담고 있습니다.
☞ 들어가기전 필리피서 2,1-5 일치와 겸손
1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격려를 받고 사랑에 찬 위로를 받으며 성령 안에서 친교를 나누고 애정과 동정을 나눈다면
2 뜻을 같이하고 같은 사랑을 지니고 같은 마음 같은 생각을 이루어, 나의 기쁨을 완전하게 해 주십시오
3 무슨 일이든 이기심이나 허영심으로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
4 저마다 자기 것만 돌보지 말고 남의 것도 돌보아 주십시오
5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작하십시오.
3.1 천주교의 유래(25)
천주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로서,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던 제자들인 사도들로부터 이어오는 법통을 오늘날까지 고이 간직하고 있습니다. 서기 30년경,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초기 그리스도교는 사도들의 열성적인 선교 활동으로 시리아, 그리스, 로마 등지로 신속하게 퍼져 나갔습니다. 천주교는 황제 숭배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당시 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로마의 통치자들에게 300여 년 가까이 혹독한 박해를 받았지만, 굳건하게 신앙을 지켜 마침내 313년 신앙의 자유를 얻었고, 곧이어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었습니다.
천주교는 지난 이천 년 동안 서구 문화와 문명의 정신적, 사상적 토대가 되어 왔으며, 학문과 예술에도 지대한 공헌을 해 왔습니다. 또 온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고 실천하면서 세계 평화와 인류애 증진을 위하여 크게 이바지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전세계에는 약 10억 명(1998년 말 통계)의 천주교 신자들이 같은 믿음 안에서 신앙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3.2 천주교의 한국 전래(26)
천주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때는 지금부터 200여 년 전입니다.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에 따르면 1784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프랑스 사람 그라몽(Grammont)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돌아왔을 때부터 본격적인 신자들의 모임이 시작되었습니다. 물론 그 이전에 서학(西學)을 연구하던 학자들을 중심으로 예수님을 믿는 이들의 공동체가 자생적으로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이승훈은 귀국하자마자 이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었고, 드디어 지금의 명동 성당 부근의 명례방에서 정기적인 신앙 집회가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외국인 선교사가 천주교를 우리나라에 전한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 스스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는 세계 교회사에서 유일한 일입니다.
현실 변혁을 위하여 주자학의 대체수단으로 ‘몰락한 양반’들을 중심으로 등장합니다. 그래서 학문으로 연구하고 시작한 초창기의 믿음과 성직제도를 본 딴 것을 가리켜 ‘가성직제도’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3.3 천주교의 새로운 가르침(27)
천주교가 들어올 당시에 우리 나라는 국가와 사회의 이념적 근본을 유교에 두고 있었습니다. 유교 사상과 그 실천은 사회 생활과 가정 생활의 바탕이었습니다. 따라서 유교에 회의를 품는다는 것은 자신과 자신의 가족이 사회적으로 파멸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그러나 실학파 학자들은 중국을 통하여 전래된 서적과 함께 접하게 된 새로운 종교, 곧 천주교의 가르침에 빠져 들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말씀과 행적으로 인간에게 영원한 행복에 이르는 길을 가르쳐 주셨는데, 사랑과 평등과 자유의 사상을 바탕으로 한 이 가르침은 당시로서는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하느님 앞에 만인은 평등하고 모두 하느님의 자녀로서 한 형제이며 자매라는 가르침은 양반과 천민, 남자와 여자라는 엄격한 신분 차별이 있던 사회에서 참으로 획기적인 것이었습니다.
3.4 온갖 박해를 딛고 성장한 한국 천주교회(27)
한국 천주교회의 성장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유교 사상에 젖어 있던 당시의 지배층은 천주교 신자들을 동양 윤리의 이단자이며, 모든 악의 전형으로 몰아 온갖 박해를 하였습니다. 신앙의 자유를 얻기까지 100여 년 동안 네 번에 걸친 커다란 박해로 수많은 순교자들이 생겨났습니다. 이런 가운데서도 선교사 영입과 성직자 배출을 위하여 힘쓰던 당시 조선 천주교회는, 1845년 김대건(안드레아)이 중국 상하이 금가항(金家港)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에게 사제 서품을 받음으로써 최초의 조선인 사제를 맞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김대건 신부는 귀국하여 일 년도 채 안 된 이듬해에 체포되어 순교하였습니다.
1784년 전래된 이래, 1801년의 신유박해, 1839년의 기해박해, 1845년의 병오박해, 1866년의 병인박해에 이르기까지 1만 3천명 이상의 사람들이 믿음 때문에 유명(遺命)을 달리합니다. 이 가운데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오셔서, 여의도 광장의 미사 때 103위 성인을 선포하였습니다.
우리의 신앙 선조들은 예수님의 기쁜 소식을 우리 민족과 함께 나누기 위하여 혹독한 박해를 견디고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ꡒ배교(背敎)하겠다.ꡓ라는 한 마디만 하면 단란했던 가정, 잃었던 명예와 가산을 되찾을 수 있었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사랑을 드러내고, 그분의 가르침대로 사랑을 실천하기 위하여,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하여 목숨까지 바쳤습니다.
3.5 오늘의 한국 천주교회(28)
오늘날에도 한국 천주교회는 이런 모습을 이어 가고 있습니다. 직접적인 복음 선교 활동은 물론이려니와 여러 가지 사회 복지 활동, 사회 정의 수호와 인권 옹호 활동 등을 꾸준히 전개하고 있습니다. 천주교 신자들은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말과 행동으로 신앙을 드러내고, 그 때문에 당하는 어려움도 기꺼이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의 천주교 신자들은 370만 명(1998년 말 통계)이라는 대가족을 이루고 있습니다. 교회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에게 봉사하고, 남북 통일을 위하여 기도하고, 북한 형제들과 나눔을 실천하고 있으며, 하느님께서 주신 인간의 기본권을 지키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또한 사회 곳곳에서 빛과 소금의 구실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 천주교회는 세계 교회사에서 유일하게 민족 스스로 신앙을 받아들여 이루어졌습니다. 우리 신앙 선조들은 신앙을 고백하고 보존하는 일을 잠시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드러내고 그분의 가르침대로 사랑을 실천하기 위하여,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하여 목숨까지 바쳤습니다. 이처럼 우리 선조들의 자랑스러운 신앙 유산은 오늘날 한국 천주교회에 끊임없이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7. 하느님과 하나님(30)
‘하느님’은‘하늘’이란 말에 '님’이라는 존칭 접미사가 붙어 이루어진 말입니다. 개신교 신자들은‘하늘’은‘하늘’이라는 옛말에서 온 말이고, 하느님께서는 한 분이기기 때문에‘하나님’으로 써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곧‘하나’라는 말에 ‘님’이라는 존칭 접미사를 붙여 쓰는 것입니다. 그러나 국문법에 따르면‘하나’라는 말은 수사로서‘님’을 붙이면‘하늘님’이 될 것이지만 “끝소리가‘ㄹ’인 말과 딴 말이 어울릴 적에 ‘ㄹ’소리가 나지 아니하는 것은 아니 나는 대로 적는다(한글 맞춤법, 제 28항)라는 법칙에 따라‘하느님’이라 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늘님 → 하느님, 바느질→바느질, 아들님→아드님, 불실→부실)
8. 간락한 천주교회사
8.1 몽고를 통한 천주교 접촉
고려와 몽고의 전쟁으로 고려 세자가 몽고 공주와 결혼(공민왕)
이때 원나라에 확산되던 천주교가 간접적으로 전해졌을 가능성이 있다
8.2 일본을 통한 접촉
- 포르투갈 배가 일본 도착 7년만에 에스파나의 예수회원 프린치스코 하비에르(1506-1552)신부가 일본에 입국하여 선교활동을 시작
- 1582년 풍신수길이 정권을 잡자 1587년 선교사 추방령을 내렸다.- 이때 예수회회원은 외교적으로 수완을 발휘 추방되지 않았다.
- 1596년 2차 추방령을 내렸고 - 1597년 나가사키에서 26명이 순교하였다.
- 1598년 풍신수길이 죽고 덕천가강이 집권 1622년 많은 신자 박해하여 치명하였음 - 1850년 까지 잠복기였다.
- 임진왜란시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이 신자로서 군종신부(세스페데스) 요청- 진해시에 도착 1년 6개월 군종신부로 있었다.
- 임진왜란시 일본에 잡혀간 조선인 일부가 일인 천주교집에서 신자가 되었고, 그중 12명의 복자 이외 9명의 순교자와 3명의 증거자가 있다-
1867년 7월 7일 교황 비오9세에 의해
8.3 중국을 통한 접촉
- 1550년 유럽상인들이 중국 정부와 무역교섭을 하고 있을때 가톨릭 교회도 중국 진출 선교하려고 하였다
- 일본의 사도인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게서 시작되었는데 병사하고
- 마태오 리치이 1601년 황제의 윤허를 받고 북경에서 선교활동을 시작
- 마태오 리치의 천주실의 저술
- 서광계(바오로) - 상해인으로 명나라 예부성서를 지내다고 광해군시 후금의 재침에 대한 지원병을 요청하기 위해 조선에 올때 선교하기 위해 프린치스코 삼비아시신부를 대동 책을 준비하여 입국하려다 다른 사람으로 교체되어 입국 하지 못했다.
- 아담 샬 - 병자호란으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효종)이 인질로 청에가서 심양(봉천)에서 지내다가 북경으로 옮겨 북경에서 아담 샬 신부를 만나 서양 과학과 천주교 교리토론하면서 친교를 맺었다. 이때 소현세자가 입국이 천주교 신자인 환관과 궁녀를 대동하여 왔다
8.4 천주교의 학문적 전래
중국선교사들은 조선에 입국하여 직접 복음을 전하하려고 하였으나 실패하였고 한문서학서가 조선에 전래된 것은 1603년 이광정이 명나라에서 마태오 리치가 제작한 지도를 도입한데서 비롯되었다.
- 서학서는 실학을 주장하던 남인계 학자들의 환영을 받았다.- 이는 학문적 호기심과 새로운 지식을 얻으려는 욕구에서 서학서를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8.4.1 서학의 부정적 견해
유몽인, 이익, 신후담, 안정복, 이헌경등이 천지창조설부인하고 영혼불멸성 거부 예수의 신성과 십자가 죽음을 거부
8.4.2 서학의 긍정적 이해
1770년 후반 천주학을 연구하여 종교로서 받아들이고 실천한 학자는 홍유한과 천진암 주어사 강학에 참석한 사람들이다.
홍유한은 이익의 제자로서 1770년 혼자 천주서적을 읽고 신앙을 실천하였다.
조선개국공신 권근의 14대손인 남인 학자 권철신은 겨울 (1777년) 주어사에서 강학을 주재하면서 성리학에 대해 연구하였다. 이때 이벽이 소식을 듣고 눈길을 밤중에 합류하였다. 이 연구회는 10여일간 계속되었다.
8.5 교회사 요약
1. 1534년 예수회 창설(교황비오로3세-1540년 전교 수도회로서 인준
2. 예수회 창설자중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동양선교에 뜻을 둠
3. 1541년 일본의 카고지마에 상륙 - 일본에 선교
- 중국선교을 위해 향하다가 병으로 병사
4. 그 뒤 선교사 중국, 일본입국 - 선교
5. 중국선교사중 마태오 릿치 1583년 중국입국 유교경전등 공부
1601년 명나라 신종 때 북경에 교회설립
6. 마태오 릿치 신부의 천주실의(일종의 교리책)1603출판과 판토하 신부의 칠극 조선에 유입 -
학문적으로 연구
7. 서양학문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시기 광해군때
허균 1575년 북경에서 세계지도와 게12장 가져와 연구
영조때 서학이 하나의 학문으로서 유학자간에 연구
(이때 학자 이수광 이익 안정복 이가한)- 남인계
8. 영조 34년(1758)황해도 강원도 관찰사로 하여금 서학연구 금지 명이 있었음
9. 정조때 북으로부터 서학 서적의 구입 엄금한 일도 있음
10. 남인계 학자중심 연구 - 천진암 주어사 강학회(1777)
- 이벽 권철신 권일신 권상학 정약전 정약용 정약종 이숭훈등
- 천주실의 칠극등 연구 우주의 원리 하는 세계 연구
- 매칠일마다 안식일 지키며 묵상, 조직적 종교활동
11. 이승훈의 아버지 북경사신으로 갈 기회에 이숭훈 보냄
12. 이승훈 베드로 이름으로 세례받음 - 그라몽신부 (1784년 1월말)
13. 이숭훈 중심 종교모임 1785년 을사년 추조에 의해 적발 문초- 1784년 겨울부터시작
- 양반 출신 풀려났으나 중인 출신 역관 김범우(토마) 귀양가서 사망 - 최초 순교
14. 이벽 부친 반대로 집에 유폐- 병으로 사망
15. 이승훈을 중심 - 가성직제도혹은 준성직 제도, 지치적 조선교회을 조직
(이승훈이 권일신, 정약종등과 의논 구성)
16. 이단원, 유항검, 최창현등이 신부가 되어 고해성사를 집넌 미사등 성무집행
- 2년 남짓 (1786년 ~1788년)
17. 현천이라는 사람이 이 제도에 의문 이승훈에게 문의 - 이승훈 북경 불란서 성직자에게 편지-윤유일이 부연사신 일행으로 끼어 북경의 성직자에게 전달 -불법지시 받아 중단
18. 북경에 성직자 요청
19. 북경주교 구베아 - 중국인 레메디오스신부파견 - 1791년 신해박해로 연락두절 실패
20. 중국인 신부 주문모신부파견 - 1794년 입국 (당시 4,000명 교우지도)
21. 1886년 조선 - 프랑스 수호 통상조약이 체결되어 선교의 자유 획득
☆ 박해원인
1. 조선의 전통적인 예절 조상제사거부 2. 정치적인 파벌
3. 서양세력의 진출에 대한 거부감
4. 유교 전통적 양반체제에 - 그리스도교의 평등사상과의 갈등
☆박해사건
1. 을사 추조적발 사건(정조9년 1785년) - 이벽가택감금. 김범우 유배생활중 사망
2. 신해박해(정조15년 1791년) 윤지충, 권상연의 순교 (1795 윤유일,지황,최인길순교)
3. 신유박해(순조 1년 1801년) 주문모신부 정약종등 초대 교회지도자 순교
4. 을해박해(순조15년 1815년) 경상도 교우 100여명 체포 그중 30여명 순교
5. 정해박해(순조27년 1827년) 전라도 교우240명포함 경상도 충청도 서울등지에서 500여명 체포 그중 15명이 옥사혹은 순교
6. 기해박해(헌종 5년 1839년) 전국적 박해 정하상등 불란서 성직자 3명등 100여명 순교
7. 병오박해(헌종2년 1846년) 김대건 신부등 10여명 순교
8. 병인박해(고종3년 1866년) 대원군에 의해 8,000 - 2만여명 순교
9. 제주도 교난(고종 3년 1901년) 일반민중에 의한 천주교도 학살
가. 1801년 주문모신부의 순교후 1836년 불란서 성직자들이 입국하기까지 성직자없이 조선 교회를 지켜왔다.
나. 1811, 1825년 두차례 서한을 교황청에 보내 조선교회실정 설명
다. 1831년 조선교구설정하고 초대 교구장 브뤼기에르 소(파리외방선교)주교임명
- 북경교구소속에서 40념만(1792년이래) 독립 - 주교 입교도중 여행중 과로로 병사
라. 1836년 모방신부입국 이어서 샤스탕신부 제2대교구장 앵베르주교 입국(1837년)
김대건, 최양업,최방제소년 마카오에 1837년 6월7일 도착 사제 수업
마. 김대건 - 1845년 8월17일 김가항에서 페레올 고 주교로부터 사제서품
= 1846년 6월 5일체포 9월20일 순교(현석문등 9명같이)
바. 최양업 - 1849년 4월 15일 강남 교구장 마레스카주교로부터 사제 서품 - 12년 사목
사. 1886년 6월 4일 한불수호통상조약체결 - 선교사 여행과 포교자유 부여
종현(지금 명동)본당 - 1882년 설정 - 10여넌 공사 1898년 5월29일 대성당 완공
1892년 약현(현 중림동 성당)이 종현본당에서 분리
1942년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노기남 신부 - 주교서품 - 서울 교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