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법인(四法印)
- 법상스님 -
차례
1. 제행무상(諸行無常)
(1) 제행무상의 의미
(2) 세상 모든 것은 변한다
(3) 무상은 허무주의가 아니다
(4) 업도 운명도 변한다
(5) 현대과학과 무상
(6) 제행무상의 생활실천 - 변화를 받아들이라
2. 일체개고(一切皆苦)
(1) 괴로움의 종류 - 사고팔고
1) 생고(生苦)
2) 노고(老苦)
3) 병고(病苦)
4) 사고(死苦)
5) 애별리고(愛別離苦)
6) 원증회고(怨憎會苦)
7) 구부득고(求不得苦)
8) 오음성고(五陰盛苦)
(2) 일체개고의 생활실천 - 무집착
3. 제법무아(諸法無我)
(1) 제법무아의 의미
(2) 고정된 실체는 없다
(3) 나다 하는 아상의 타파
(4) 불성은 없다
4. 열반적정(涅槃寂靜)
(1) 사법인의 관계 - 일체개고와 열반적정의 관계
(2) 삼독의 소멸이 열반이다
(3) 열반적정의 의미
(4) ‘비움’으로 내 안의 열반을 일깨우라
(5) 열반에 모든 것을 맡기라
이상에서 언급한 연기법에 따르면 이 세상 우주는 아무렇게나 아무 법칙도 없이 그냥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연기라는 진리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법계(法界)임이 드러난다. 단순한 세계가 아니라 진리의 세계 즉 법계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연기의 진리에 의해 운행되는 우주법계는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을까.
일체 모든 존재의 속성이기도 하며, 이 우주에 존재하는 일체 모든 것들의 일반적인 특성이기도 한 것, 그것이 바로 삼법인(三法印)이다. 삼법인은 연기법의 또 다른 이름이요, 또 다른 표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연기된 존재이기 때문에, 그로인해 삼법인의 특성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즉 연기된 모든 것은 세 가지 공통된 일반적인 특성을 가진다.
그러면 먼저 삼법인이란 말의 의미를 살펴보면, ‘세 가지 법의 도장’ ‘세 가지 진리의 표지(標識)’ 란 뜻을 가진다. 법인(法印)이란 말 그대로 ‘법의 도장’ ‘진리의 도장’ 이란 의미다. 우리가 도장을 찍어 줄 때는 내가 확실하고 틀림없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기 위한 것이고, 인간사의 모든 일들은 아무리 입으로 이렇다 저렇다 해 봐야 결국에는 도장을 찍어 주고 나야 그것이 제 힘을 발휘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즉 도장을 찍어준다는 것은 분명하고 확실한 것에 대한 종지부를 찍는 일이다.
이처럼 삼법인이라는 것은 이 세 가지 진리야말로 분명하고 확실하며 틀림없는 진리라는 종지부를 찍는 진리의 마침표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로부터 삼법인은 ‘불교의 징표’ ‘진리의 기준’ ‘진리의 근거’ 가 되어왔다.
즉 이 가르침이 불교(佛敎)인가 아닌가, 정법(正法)인가 사법(邪法)인가가 궁금하다면 삼법인(三法印)이라는 기준에 맞는지 틀리는지를 살펴보면 된다. 삼법인에 근거한 가르침이라면 불교이며 정법이지만, 삼법인의 기준에 어긋난다면 그것은 불교라고도 정법이라고도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불교 이외의 어떤 사상이나 종교나 가르침이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불교적인 근거가 되는 것 또한 삼법인이다.
사실 요즘 불교를 보면 삼법인에 근거하지 않은 비불교적인 요소들도 불교라는 이름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온갖 사상과 종교와 가르침들이 난무하는 사상이 혼탁한 시대이다보니 이것이 정법인지 사법인지를 구분하기 어려운 요소들이 많다.
온갖 명상 단체들이 난립하고 있고, 어떤 곳에서는 수십, 수백, 수천만원을 요구하며 깨달음을 사고 파는 행위들도 버젓이 일어나고 있다. 의외로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쉽고 빠른’ 그런 단체의 수련법에 유혹당하고 매료당한다. 그러나 필자에게 상담을 요청한 수많은 사람들 중에는 온갖 명상수련단체에서 수많은 돈을 들이고 시간을 들여 수련한 결과 부처가 되었다고 혹은 깨달음을 얻었다고 인가(?)까지 받았지만, 결국 정신장애를 겪거나 정신분열을 일으키는 분들도 많았고, 사기를 당하거나, ‘이게 아니다’ 싶어 다시 불교를 찾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이런 복잡다단한 사상의 혼탁을 경험하는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그것이 정법인지 아닌지, 불교인지 아닌지,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근거와 기준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간절히 요청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시대에 더욱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는 가르침이 바로 삼법인의 가르침이 아닌가 한다.
삼법인은 세 가지로 나타나는데, 그 내용에 있어 남방 상좌부 전통의 불교와 북방의 대승불교 전통에서 말하는 내용에 한 가지 차이가 있다.
남방 상좌부 불교에서는 삼법인을 제행무상(諸行無常), 일체개고(一切皆苦), 제법무아(諸法無我)라고 하지만, 북방의 대승불교에서는 제행무상, 제법무아, 열반적정(涅槃寂靜)을 삼법인의 정형으로 보고 있다. 혹은 사법인(四法人)이라고 하여 제행무상, 일체개고, 제법무아, 열반적정을 모두 포함시키기도 하고, 때로는 오법인이라고 하여 여기에 제법개공(諸法皆空)을 포함시키기도 한다.
제행무상과 제법무아는 같은데 일체개고와 열반적정이 다른 이유는, 일체개고와 열반적정은 동일한 사실에 대한 시각차이에 의한 것이라고 보여진다. 즉 깨달음의 얻지 못한 중생의 눈에서 보면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괴로움으로 보이지만, 깨달음을 얻은 부처의 눈에서 본다면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다는 이 모든 사실까지도 공(空)한 것으로써 그 이면에는 적정한 열반이 자리 잡고 있음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는 깨닫고 보니 중생이 없으며 모두가 이미 깨달은 부처였다고 한 말씀과 같은 맥락이다.
그러면 사법인을 하나 하나 살펴보도록 하자.
1. 제행무상(諸行無常)
(1) 제행무상의 의미
제행의 제(諸, sarva)는 ‘일체’ ‘모든’ 의 뜻이고, 행(行, samskara)은 sam이라는 ‘함께’, ‘~모여서’라는 말과 kara라는 ‘만든다’ ‘행한다’는 의미가 합쳐져 만들어진 말로, ‘함께 모여 만들어진 것’ ‘지어진 것’ 이라는 의미로 여러 가지 원인과 조건들이 모여 어떤 존재를 만들고 어떤 일을 행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아무 원인과 조건 없이, 아무런 이유 없이 하는 행이나, 존재가 아니라 어떤 원인과 조건에 따라 만들어진 존재나 어떤 이유나 목적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하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유위(有爲)’ 라고 하는 것을 말한다. 즉 유위행(有爲行)과 유위법(有爲法)을 아울러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유위법이라고 할 때 ‘법’은 ‘존재’를 나타낸다. 좀 더 쉽게 유위라는 것은 ‘인연따라 만들어지는 모든 것’ 이다.
우리가 하고 있는 모든 행위도, 모든 일도, 모든 생각도, 또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도 앞서 언급한 연기법에 의하면 어느 하나 인연 따라 만들어지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 그렇기에 우리가 세상 속에서 행하는 모든 행은 유위행이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는 다 유위법인 것이다.
그래서 제행이란 ‘인과 연이 화합하여 만들어 낸 모든 것’, ‘일체의 만들어진 모든 것’, ‘인연화합에 의해 만들어진 모든 존재와 행위’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아주 쉽게 말하면 ‘모든 것’ ‘모든 존재’ ‘모든 행’ 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무상(無常)이란 말 그대로 ‘항상 함이 없다’ ‘항상 하는 것은 없다’ 는 뜻이다. 즉 제행무상은 이 세상 모든 것은 항상 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모든 존재(有爲法)도 항상 하지 않고, 존재가 만들어내는 행위(有爲行) 또한 항상 하지 않는다. 나라는 존재도 항상 하지 않고, 내가 사랑하거나 미워한다는 행위 또한 항상 하지 않는다.
제행이라는 일체 모든 존재는 모두가 유위로써 인과 연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인연이 소멸하면 함께 따라 소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연 따라 만들어진 것은 인연 따라 소멸된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하면 저것이 생하며,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이것이 소멸하면 저것도 소멸한다’ 는 연기의 이치에 따라 만들어진 모든 것은 항상 하지 않고 언젠가는 변해 사라지는 무상한 것이다.
즉, 이와 같이 제행무상이라는 이치는 연기법의 기초위에 세워진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연기하기 때문에 무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제행무상은 연기법에 대한 시간적인 해석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연기법을 시간적인 측면에서 보았을 때 제행무상이라는 존재의 특성을 보인다는 것이다. 지금 내 눈에는 변하지 않고 항상 할 것 같은 모든 것들이 언젠가 시간이 흘러 세월이 흐르고 나면 어김없이 변화된 모습을 보여줄 수밖에 없다. ‘이것이 생하면 저것이 생하며, 이것이 소멸하면 저것도 소멸한다’는 연기법의 시간적인 관점을 제행무상은 보다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2) 세상 모든 것은 변한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있을까? 변하지 않고 항상 하는 것이 있을까? 변치 않고 항상 하는 것이 있다면 찾아보라. 이 세상 어디에도 항상 하는 것은 없다. 아무리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 없다. 항상 하지 않는다는 이 사실만이 항상할 뿐이다.
불교에서 항상하는 유일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불교의 기준이요, 근거요, 법인은 무상의 이치인데, 절대 독존의 변치 않는 유일신은 바로 이 무상의 이치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신은 변하는 신이다. 천상세계의 모든 신들은 끊임없이 변하는 신이다.
물론 이렇게 말하면 불교의 법신, 부처, 불성은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냐고 할지 모른다. 만약 불교를 공부한 누군가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그는 정법이 아닌 사법(邪法)을 공부하고 있는 것임을 바로 알아야 한다. 변하지 않는 고정된 실체로써의 법신이나 불성이나 부처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방편일 뿐이며, 이름일 뿐이다. 편의상 그렇게 이름붙인 것일 뿐이지 거기에 어떤 실체를 부여할 수는 없다. 이것은 뒤에 제법무아에서 자세히 살펴볼 것이므로 우선 넘어가도록 하자.
이 세상 모든 것은 항상 하지 않고 끊임없이 변한다. 여기에는 그 어떤 예외도 있을 수 없다. 모든 존재는 생주이멸(生住異滅)한다. 만들어진 모든 것은 잠시 머물렀다가 변화하여 결국 소멸되고 만다. 우주도 성주괴공(成住壞空)한다. 별이 생기면 일정 기간 동안 머물렀다가 무너져 공으로 돌아가고, 우주도 마찬가지다. 인간 존재 또한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생노병사(生老病死)를 막을 수 없다.
나라는 존재를 놓고 보더라도 어느 하나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 외모도 변하고, 성격도 변하며, 능력도 변하고, 체질도 변하고, 생각도 끊임없이 변해간다. 그러나 우리는 나라는 존재에 대해 특정한 모습을 정해 놓고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가난한 자는 가난한 운명을 탓하고, 공부 못 하는 자는 공부 못하게 태어난 자신의 능력을 탓하고, 외모가 못난 사람은 자신의 외모를 한탄하고, 성격이 나쁜 사람은 나쁜 제 성격을 탓할 지언정 획기적인 변화를 꿈꾸지 않는다. 음치는 언제까지나 음치일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다. 운동신경이 나쁜 사람이 언제까지고 운동을 못하도록 정해진 것도 아니다. 어떤 자는 가난한 운명을, 또 어떤 자는 부자의 운명을 타고난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은 변해간다. 부자일지라도 낭비와 인색과 무절제함이 계속되면 가난해질 수 있고, 가난한 자일지라도 절약하고 보시하며 이웃을 향해 따뜻한 나눔의 마음을 꾸준히 일으킨다면 언제라도 부자가 될 수 있다. 이처럼 끊임없이 변해갈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우리 삶의 본질이다.
그렇기에 우리 삶에 도저히 내 능력으로는 해 낼 수 없기 때문에 포기하고 좌절하는 일 따위는 본질적으로 없어야 한다. 다른 그 누군가가 그것을 했다면 나도 그것을 해 낼 수 있는 가능성은 열려있다. 내 능력은 태어날 때부터 이정도 밖에 안 되기 때문에 내 능력으로는 역부족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내 능력을 변치 않는 것으로써 스스로 어떤 한계에 가두어 놓는 것일 뿐이다. 내 스스로의 능력을 내 스스로 이 정도라고 생각하여 가두어 놓는 순간 우리는 그 한계를 뛰어넘을 수 없다. 그것은 내 능력이 본래부터 그것 밖에 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내 스스로 그 틀을 만들어 놓고 그 틀 안에 갇혀 있기로 작정을 했기 때문이다.
나라는 존재를 가두고 있는 일체 모든 울타리를 걷어치우라. 이 세상에 정해진 것은 하나도 없다. 나라는 존재는 이 정도밖에 안 된다는 생각은 제행무상의 이치를 모르는 어리석은 생각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정해져 있지 않으며 끊임없이 변화한다. 그리고 그 변화는 무궁무진하다. 심지어 그 변화의 끝에 우리는 이 우주의 모든 이치를 깨닫게 될 수도 있다. 그러할진데 나라는 존재를 울타리에 가둘 것인가. 내 스스로 울타리에 가두지만 않으면 나는 어디에도 걸리지 않고,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은 대자유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어디에도 갇히지 말고 끊임없이 변화하라. 어디에도 머물러 있거나, 정체되지 말고 끊임없이 새로운 변화를 새롭게 받아들이라.
(3) 무상은 허무주의가 아니다
이처럼 제행무상의 이치는 우리가 흔히들 말하는 ‘인생무상’ 이라는 표현에서 보는 허무주의적이고 공허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무상하기 때문에 허무한 것이 아니라, 무상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다. 무상은 이 세상에 대한, 우리의 삶에 대한 지극히 공평무사한 통찰일 뿐이다.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다는 이 무상의 이치를 거스를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무상은 허무주의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본질적인 진리를 나타내는 말일 뿐이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우리의 삶은 무상하기 때문에 그 어떤 가능성도 활짝 열려 있는 변화무쌍한 삶의 희망을 품어볼 수 있다.
아무리 위대한 사람일지라도 나를 열등감에 사로잡히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 열등감은 내 스스로 만든 것일 뿐이지, 본래는 무상의 이치로써 모두는 평등하다. 나 또한 그와 같이, 위대한 위인들과 같이, 부처님과 같은 성인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활짝 열려 있는 것이다.
무상이라는 변화의 이치는 사람마다 어떤 방면으로의 변화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모든 방면으로 완전히 열려 있는 무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무상하기 때문에 공허한 것이 아니라, 무상하기 때문에 더 나아질 수 있고, 진보할 수 있으며, 발전해 갈 수 있는 것이다. 무상하지 않다면 가난한 자는 언제까지고 가난해야 할 것이며, 능력 없는 사람은 언제까지고 능력이 없을 수밖에 없을 것이지만, 무상하기 때문에 나의 모든 가능성은 활짝 열려 있는 것이다.
무상하기 때문에 우리는 부자도 될 수 있고, 좋지 않던 성격도 바꿀 수 있으며, 없던 능력도 계발해 낼 수 있고, 심지어 중생이 부처가 될 수 있는 가능성도 열려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감사의 토대가 바로 무상에 있다. 무상하기 때문에 이 세상은 아름답고도 희망차다.
(4) 업도 운명도 변한다
이러한 제행무상의 이치를 설하지만 혹자는 그래도 이미 지어 놓은 업은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한다. 이미 내게 주어진 업장은 어쩔 수 없으니 그 업을 다 받기 전에는 꼼짝 못하는 것이 아니냐고 좌절할 수도 있다. 또 어떤 사람은 내 업이 원래 나쁘기 때문에 나는 어쩔 수 없이 내 악업을 받아들여야만 한다고 하면서 나쁜 업을 한탄하며 비관하기도 한다.
참된 수용, 참된 섭수, 참된 받아들임이란 정해진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제행무상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변화를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고정된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정해진 것에 얽매이고 집착하는 것밖에 되지 못한다. 내 삶이 어떻게 변화하더라도 그 모든 것을 마땅히 다 받아들이겠다는 자세야말로 참된 받아들임인 것이다.
내 업이 원래 가난하기 때문에 나는 한평생 가난 속에서 살 수밖에 없다거나, 내 업이 원래 병에 시달릴 수밖에 없기 때문에 평생 병을 달고 살 수밖에 없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이 말이 전적으로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전적으로 옳지 않다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모든 사람들은 전생의 업인(業因)에 따라 자기만의 삶의 모습을 갖고 태어난다. 어느 정도의 부를 축적하고 살 것인지, 어느 정도의 학벌과 능력과 외모를 가지고 살아갈 것인지, 어디에서 어떤 일을 하며 얼마 정도의 행복을 누리다가 언제쯤 죽게 될 것인지에 대해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어느 정도 정해진 업력(業力)을 받고 태어난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어떤 배우자를 만날 것인지, 어느 정도의 대학이나 학벌을 가지게 될 것인지, 어떤 회사에 취직하여 어느 정도까지 진급을 하게 될 것인지, 어떤 인연을 만나서 그들에게 어떤 도움을 받게 될 것인지, 언제 어떤 병이나 사고로 얼마만큼 고통을 겪게 될 것인지, 돈과 재산은 어느 정도를 벌어 쓸 수 있을 것인지, 그렇게 살다가 언제쯤 몇 살 쯤 죽어갈 것인지, 그런 것들에 대한 삶의 윤곽이 전생의 업식(業識)에 의해 어느 정도 결정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내 전생의 업을 그대로 받을 것이니 이번 생은 내가 아무리 발버둥치더라도 절대 그 업을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그것도 인생 일대의 가장 큰 실수를 저지르게 되는 것이다.
업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가 말로 행동으로 생각으로 행하는 행위이다. 전생, 또 오랜 전생을 이어오며 지어왔던 온갖 행위들이 지금 내 안에서 기본적으로 이번 생을 어떻게 펼쳐나가게 될지에 대해 결정짓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결정의 원인은 내 과거의 행위에 있다. 내 과거의 온갖 행위들에 의해 내 현실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결론은 무엇인가. 결론은 내 현재의 행위에 따라 또 다시 내 미래가 바뀔 수밖에 없다는 지극히 당연한 결론이다. 자신의 행위에 따라, 자신의 마음에 따라, 자신의 욕심과 집착의 크기에 따라, 자신의 마음공부와 수행과 기도의 정도에 따라, 내 삶은 언제든지 180도 확연히 달라질 수 있다. 달라질 수 있는 정도가 아니라 끊임없이 우리 삶은 그 괘도를 수정해 나가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내일 있을, 내년에 있을 내 삶의 괘도가 내 행위에 따라 끊임없이 수정되어지고 있다.
그것을 운명이나 숙명이라고 이름 짓지 않고 업(業)이라고 이름한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운명이나 숙명은 바꿀 수 없는 것인데 반해 업이라는 것은 언제고 바꿀 수 있으며, 바꿀 수 있는 정도가 아니라 순간순간 변화하는 특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오늘 힘겹게 살아가는 소년 소녀 가장을 만나 따뜻한 마음을 나누어 주고, 필요한 것들을 나누어 주었다면 바로 그 한 번의 행위가 1년 뒤 파산할 지 모르는 업연을 2년 뒤로 늦춰줄 수도 있다. 오래도록 마음속에 응어리져 있던 미워하는 원수에 대한 불같은 화를 다스리고, 마음 깊은 곳에서 용서를 해 주었다면 몇 달 뒤에 닥칠지 모를 홧병이 소멸될 수도 있다. 필요하다고 그 때 그 때 사 들이고, 여유가 있다고 아끼지 않고, 절약하지 않았던 삶의 습관이 10년 뒤에 올 퇴직을 1년 뒤로 앞당길 수도 있고, 나보다 못난 사람, 가난한 사람을 업신여기는 한 마디의 말이 지금의 내 높은 지위를 1년 빨리 끌어내릴 수도 있다. 어디 그 뿐인가.
파리나 모기, 풀벌레와 작은 곤충들의 생명을 별 생각 없이 죽이거나 괴롭혔다면 그것은 내 명(命)을 몇 년씩 앞당기는 일이 될 수도 있고, 산을 함부로 깎고, 나무를 함부로 베는 행위로 인해 자연재해가 일어났을 때, 폭풍우가 내가 사는 지역을 강타했을 때 바로 내가 사는 집이 무너지고, 내 터전이 깎여나갈 수도 있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어떤 행위를 하고 있는가. 지금 이 순간 내가 하는 행위에 따라 운명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업은 엄청난 변화를 겪는다. 제행무상이라는 이치에 따르면 그 어떤 것도 정해진 것은 없다. 업이라는 것 또한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다. 우리의 행위가 매일 매일 달라지고 지속된다는 것은 받아야 할 업의 과보 또한 끊임없이 달라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불교교리에 대한 전체적인 해설이다보니 그전에 경전강의나 생활수행 이야기에 써 두었던 부분들 가운데 필요한 부분은 옮겨왔다보니 기존의 글들을 이미 읽으신 분이시라면 중복되는 게 있을 것이니 미리 양지 바랍니다.)
(5) 현대과학과 무상
앞서 살폈듯이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무상하다는 것이 첫 번째 진리의 법인이다. 그런데 현대 과학에서는 과연 이 무상의 이치를 어떻게 볼까. 미시와 거시의 현대 물리학을 살펴보면 놀랍게도 불교의 제행무상의 이치를 고스란히 증명해 주고 있다.
이 세상이 무상하다는 이치를 증명해 보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이 세상을 쪼개고 쪼개서 가장 작게 쪼개어질 수 있는 물질의 최소 단위에 대해 무상을 입증해 보이는 것과 이 세상을 넓히고 넓혀서 가장 넓게 확장했을 때의 전 우주가 무상하다는 이치를 입증해 보이는 방법이 있다. 이 세상을 만드는 물질의 최소 단위가 모두 무상하고, 나아가 이 세상을 확장하여 온 우주 전체가 무상하게 되면 그 안에서 살고 있는 모든 존재 또한 무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현대 물리학에서 말하는 미시와 거시세계가 고정된 실체가 아닌 끊임없이 변화하는 무상의 존재라는 것을 밝히면 된다.
그러면 먼저 현대 물리학의 미시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일반적으로 불교의 극미(極微)라는 단어와 견줄 수 있는 물질의 최소단위를 과학에서는 일찍부터 원자(原子)라고 했다. 그런데 후대에 물리학이 더욱 발전되면서 원자는 양성자와 중성자, 그리고 전자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았고, 또한 이 양성자와 중성자도 궁극적인 물질이 아니라 다시 수없이 많은 미립자로 이루어 져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이 무수한 미립자들은 순간순간 생성과 소멸을 반복한다는 것이 현대물리학에서 밝혀진 사실이다. 이 미립자들의 전형적인 생명은 10(-23승)초이다. 이렇게 이야기 하니 잘 이해가 안 될 것인데, 쉽게 말해 미립자의 생명과 1초와의 비는 1초와 약 300조년의 비와 같다고 한다. 300조 년은 지구 역사의 60만 배이며 우주 역사의 20만 배나 되는 긴 시간이다.
그야말로 찰나 동안 무수한 미립자들은 생성되고 소멸되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아니 이 정도면 생성과 동시에 소멸한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이처럼 삼천대천세계와 그 안의 구성요소인 모든 것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그 모습 그대로를 항상 유지하는 듯 보이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찰나로 생멸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현대 과학에서조차 물질의 최소 단위로 알려진 미립자들이 끊임없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제행무상의 이치대로 운행된다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다.
그러면 거시세계에 대해서 살펴보자.
우선 태양 주위에는 지구를 포함한 9개 혹은 8개의 행성(명왕성을 빼면)이 있고, 각각의 행성 주위에 위성이 있으며 이들 전체를 태양계라고 부른다. 수소를 헬륨으로 바꾸는 핵융합 반응을 하면서 스스로 빛을 내는 천체를 항성 혹은 별이라고 부르는데, 태양계에서 별은 태양 하나뿐이다.
이 태양에서 태양계의 제일 바깥에 있는 행성인 명왕성까지의 거리는 약 60억 km 정도이며, 빛으로 약 5시간이 걸린다. 이 태양계의 바깥에는 ‘우리은하’라는 별의 집단이 있는데, 여기에는 태양을 비롯하여 약 3천억 개의 별이 원판 모양의 형태로 배열되어 있다. 빛이 1년 걸려 가는 거리를 1광년이라고 하는데, 우리은하 안에서 별과 별 사이의 평균 거리는 대략 5광년이고, 우리은하의 반지름은 약 5만 광년 정도 되며, 태양은 그 가장자리에 위치한다.
내가 지리산에 갔을 때 장터목 산장에서 처음으로 선명한 은하수를 보고, 한동안 잠을 이룰 수 없었던 기억이 있는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은하수라는 것이 바로 우리은하 안에 있는 별들의 모임이다. 태양계가 은하의 가장자리에 있고, 은하수가 납작한 원판 모양의 형태이기 때문에 지구에서 볼 때 우리은하에 속하는 대부분의 별들은 한쪽 방향으로 길게 늘어서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좀 더 나아가 우리은하에서 가장 가까운 은하는 안드로메다 은하로 약 200만 광년의 거리에 있다. 이 안드로메다 은하와 우리은하를 포함하여 20여 개의 주변 은하가 하나의 지역군을 형성하고 있는데, 이를 ‘우리지역군’이라고 부른다. 이 우리지역군에서 6,000만 광년 정도 떨어진 곳에 버고 은하단이 있으며, 이 안에는 약 2,500개 정도의 은하가 포함되어 있다. 버고 은하단은 다시 버고초 은하단의 일부가 되며, 버고초 은하단의 근처에는 이보다 더 큰 코마초 은하단이 존재한다. 여기까지가 현대 과학이 파악하고 있는 우주의 대략적인 모습이다. 물론 이것으로 우주를 다 파악했다고 할 수는 없다. 아직도 과학의 영역과 우리의 상상력까지도 초월할만한 무량광 무량수의 우주가 있을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면 이런 우주는 과연 변하지 않고 항상 하는 것일까? 별이며, 은하, 은하단, 그리고 알 수 없는 우주는 과연 끝없는 생명을 가지고 영원히 존재하는 것인가? 현재 과학에서 밝혀진 사실에 입각해 본다면 그렇지 않다. 우주는 끊임없이 변화해 가며 성주괴공(成住壞空)의 단계를 거친다.
우주의 성주괴공을 간단히 살펴보면, 위에서 설명했던 별이나 혹성 이외에도 별과 별 사이에는 대단히 넓은 공간에 수많은 물질이 존재하는데, 연기나 안개보다 희미하게 밀도가 적고 주성분이 수소로 이루어진 이 물질을 성간물질이라고 한다. 이 성간물질은 우주 공간에 균일하지 않게 분포하여 있으며, 각 부분의 밀도는 끊임없이 변화해 간다. 그렇기에 이 성간물질은 언뜻 보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없는 무의 상태는 아닌 것이다. 이 성간물질에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되고 생성되기 때문이다. 이 성간물질이 어느 정도 이상의 밀도로 모이고, 별에서 오는 빛에 의해 광압이 가해지면 성간물질의 덩어리는 밀집되는 경향을 갖게 된다. 이러한 밀집과 수축이 가속화되면 내부의 압력과 온도가 계속 올라가고 어느 정도 이상이 되면 희미한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결국 1,000만 도 이상 온도가 상승하면 핵융합 반응을 시작하고, 이 때 에너지가 빛의 형태로 우주 공간으로 방출이 된다.
즉 이것은 스스로 빛을 발하는 항성, 별이 탄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성간물질이라는 공(空)의 단계에서 별이라는 성(成)의 단계가 진행되는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별은 한동안 크기와 빛의 밝기가 대략 일정하게 유지된다. 이것이 성주괴공의 주(住)의 단계다. 그러나 주의 단계라도 변함 없이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별의 내부에서는 끊임없이 수소원자가 헬륨원자로 바뀌는 핵융합 반응은 계속 일어난다. 그러면서 결국 핵융합 반응의 원료가 되는 수소를 다 쓰게 되면 결국 빛은 소멸되고 별의 일생은 끝나게 된다. 이것이 성주괴공의 괴(壞)의 단계인 것이다. 그러고 나면 다시 공이 되고, 다시 성·주·괴·공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태양계의 태양도 이미 생성되고 나서 50억년 정도 핵융합 반응을 하며 성주의 단계를 거치고 있으며, 다시 50억 년 후가 되면 수소가 다 소멸되어 괴공의 단계로 접어들 것이라고 하니, 미시 세계와 같이 거시세계인 우주 또한 항상 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으로써 제행무상인 것임이 밝혀졌다.
(6) 제행무상의 생활실천 - 변화를 받아들이라
이처럼 연기법의 핵심,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은 일체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한다는 진리, 즉 무상(無常)의 진리이다. 제행무상의 진리야말로 진리의 도장, 즉 법인인 것이다.
이 세상 모든 존재는 항상 하지 않고 끊임없이 변한다. 또한 모든 존재가 만들어내는 그 모든 행위나 사건 또한 끊임없이 변한다. 사람도 변하고, 사람의 마음도 변하며, 사람의 행위 또한 끊임없이 변한다. 잠시도 머물러 있지 않고 찰나 찰나로 흐른다. 어느 한 순간도 멈출 수 있는 것은 없다. 변화를 멈출 수 있는 존재는 없다. 어떻게 멈출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노력하고 애를 써도 변한다는 진리를 멈출 수는 없다. 진리가 법인으로써 그러하기 때문이다. 진리가 그렇듯 끊임없이 변화해 가기 때문이다. 고정된 진리는 하나도 없다. 끊임없이 변화할 뿐. 변화한다는 그 사실만이 변치 않고 항상할 뿐이다.
진리와 하나 되어 흐를 수 있다면 우리 자신이 그대로 진리가 된다. 우리 자체가 곧 진리의 몸이 되어 버린다.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가. 그렇다면 진리와 하나 되어 흐르라. 그러면 어떻게 진리와 하나 되어 흐를 수 있는가. 변화한다는 진리, 무상이라는 진리와 하나 되어 흐르면 된다. 변화를 받아들이며 온몸으로 온 마음으로 변화의 흐름에 몸을 맡기라. 그 흐름을 벗어나려 하지 말라.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라. 변화는 진리이다. 변화한다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고 진리다운 현상이다. 그러니 변화를 붙잡으려 하지 말라.
우리의 모든 괴로움은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는데서 온다. 변화하는 것은 두렵다. 변하면 안 될 것 같다. 지금 이 모습이 그대로 지속되길 바란다. 이 몸이 지속되길 바라고, 이 행복의 느낌이 지속되길 바라며, 내 돈과 명예, 권력, 지위, 가족, 친구, 사랑...... 이 모든 것이 지속되길 바란다. 그것들이 변하는 것을 참을 수 없다. 변화는 곧 괴로움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전도된 망상이 우리를 두렵게 만든다.
‘변화’한다는, 무상이라는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면서 ‘지속’과 ‘안주’를 바란다. 지속됨과 안주 속에 행복이 있을 것이라 착각한다. 그러나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언제까지고 지속되는 것은 없다.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영원히 안주할 수 있는 곳은 없다. 머무를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 오직 변화만이 있을 뿐. 변화한다는 사실이야말로 온전한 진리이다. 그러므로 변화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어디에도 머물러 있지 말라. 몸도 변하고, 마음도 변하며, 감정도 변하고, 사랑도 미움도 변한다. 사상이나 견해도 끊임없이 변하고, 욕구나 욕심도 변한다. 명예나 권력, 지위도 언젠가는 변하고 만다. 변화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아름다운 법계의 본연의 모습이다. 바로 그것을 받아들이라.
함께 변화하라. 우리가 할 수 있는 수행이란 바로 이것 밖에 없다. 모든 것은 변화하는데 나만 변치 않고자 하기 때문에 괴로움이 생겨난다. 모두가 변화하는데 나는 변하기 싫고, 다 변하는데 내 것은 영원하길 바라며 내 생명, 내 소유, 내 사랑, 내 사상은 영원하길 바란다.
모든 것을 변하는 대로 그대로 두라. 어떻게 해 보려고 애쓰지 말라. 붙잡아 두려고 노력하지 말라. 어떻게 바꿔보려고 다투지 말라. 그냥 변한다는 진리를 변하도록 그냥 놓아두라. 그 흐름에 들라. 그 흐름에 드는 것이야말로 수행의 시작이며, 온전히 그 흐름에 들었을 때 우리는 수행 사과(四果) 가운데 첫 번째 과위인 ‘흐름에 든 자’ 즉 수다원(須陀洹)이 된다. 수다원은 예류(預流), 혹은 입류(入流)라고 하여 ‘흐름에 든 자’를 말한다. 수행 사과에서 말하듯 수행을 통해 이제 막 깨달음의 흐름에 들고자 한다면 마땅히 변화를 타고 흐를 수 있어야 한다. 제행무상이라는 진리의 흐름을 타고 함께 따라 흐를 수 있어야 한다.
변하지 않는 것은 어디에도 없는 이 세상에서 우리 삶의 목적이 ‘변치않음’을 추구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이 세상을 그냥 놓아두라. 어떤 것도 붙잡지 말라. 집착하지 말라. 다만 흐르도록 놓아두라. 변화하도록 그대로 두라.
‘나’라는 것도 붙잡지 말라. ‘나’도 끊임없이 변화할 뿐, 거기에 고정된 실체로서의 ‘나’는 없다. 안주할 내가 없다. 이 세상은 그냥 놓아두면 스스로 알아서 흐른다. 그리고 그 흐름은 정확하다. 정확히 있어야 할 일이 있어야 할 그 때에 있어야 할 곳에 흐르고 있다. 그래서 이 세상을 법계라고 한다고 했다. 명확한 진리, 법에 의해 움직이는 세계라는 뜻이다. 법계는 변화에 의해 온전하게 흐르고 있다. 그 흐름을 거부하지 말라. 그대로 놓아두라. 어떤 것도 잡지 말라.
깨달음 또한 잡지 말라. 잡을 것이 없는 것, 고정된 것이 없는 것, 안주할 것이 없는 것, 항상 하지 않는 것을 이름 하여 깨달음이라 한다. 그런데 왜 도리어 그것을 잡지 못해 안달하는가. 깨달음은 잡았을 때 오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놓았을 때 온다. 깨닫고자 애쓸 때 오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조차 완전하게 쉴 때 온다. 깨달음 속에 안주하려 들지 말라. 안주하는 순간 깨달음은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말 것이다.
부처님의 말씀은 오직 이것이다. 그냥 놓아두라. 어느 것도 붙잡지 말라. 변하는 대로 그대로 놔두라. 변화는 진리이니 그것을 따를 일이지 그것을 내 고집으로 붙잡고자 하지 말라. 이렇게 단순한 것이 불법이다. 단순한 진리를 공연히 머리 굴려 어렵게 만들지 말라. 단순한 것은 단순하게 놓아두라. 그저 푹 쉬기만 하라. 푹 쉬면서 변화의 흐름에 몸을 맡기라. 함께 따라 흐르라. 무엇을 어떻게 하려고 애쓰지 말고 그저 놓아두라. 그저 놔두고 푹 쉬기만 하라.
2. 일체개고(一切皆苦)
(1) 괴로움의 종류 - 사고팔고
이처럼 무상하고 무아인 것은 언제나 고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느끼는 괴로움이란 어떤 것들이 있을까. 대표적인 괴로움을 불교에서는 사고(四苦), 팔고(八苦)로 분류하고 있다. 즉, 사고(四苦)란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생노병사(生老病死)라는 인간의 근원적인 괴로움을 말하고, 여기에 다시 애별리고(愛別離苦), 원증회고(怨憎會苦), 구부득고(求不得苦), 오음성고(五陰盛苦)를 포함시키면 여덟 가지의 괴로움인 팔고가 되는 것이다. 사고팔고를 하나 하나 살펴보자.
1) 생고(生苦)
첫째는 생고(生苦)로, 언뜻 생각해 보면 태어나는 것이 어떻게 괴로움일까 싶지만 가만히 사유해 보면 생(生)이야말로 노병사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태어나기 때문에 존재의 모든 괴로움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업(業)에 의해 태어나는 여섯 가지의 세계, 즉 육도(六道)를 언급하면서 정각(正覺)을 얻는다는 것은 곧 육도윤회의 끊임없이 돌고 도는 수레바퀴에서 벗어나는 것임을 설하고 있다. 이것은 다시 말해 끊임없이 업에 따라 육도에서 태어나고 죽는 반복적인 윤회의 수레바퀴 속에서 이제는 더 이상 태어남을 받지 않는 육도를 완전히 초월한 경지를 바른 깨달음, 정각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반대로 생고라는 말에서 유추해 보건대 태어남을 더 이상 받지 않았을 때 완전한 열반에 이른다는 의미로 볼 수도 있다. 그러니 태어남이야말로 육도윤회라는 중생세간의 원인이요, 노병사의 직접적인 원인이 아닐 수 없다.
이렇듯 노병사를 비롯해 팔고 중 나머지 일곱 가지 괴로움의 직접적인 원인이라는 데에도 생의 괴로움이 있지만 태어남 그 자체 또한 고통임을 경전에서는 말하고 있다.
『중아함경』「분별성제품」에서는 “태어남의 고통이란, 이른바 중생이 태어날 때 온몸과 마음으로 고통을 받고 두루 느낀다는 것으로, 태어날 때는 몸과 마음이 뜨겁고 번뇌하며 근심하면서 두루 고통을 받고 느낀다. 이것이 태어남의 고통을 말하는 이유이다.”라고 설하고 있다. 이처럼 태어나는 순간 몸과 마음은 열과 번뇌와 근심으로 큰 고통을 두루 받고 느낀다.
요즘처럼 과학이 발전하고 의술이 발전된 시대에도 생고는 없어지지 않고 있다. 아니 오히려 태어남의 고통은 옛날보다 한층 더하다. 우선 낙태율을 보더라도, 갤럽조사기준 자료에 의해 보았을 때 우리나라에서 한 아기가 태어날 때 약 2.5명의 태아가 죽어간다고 한다. 한 해에 약 60만 명의 아기가 태어나고 150만 명의 태아가 낙태당하는 것이다.
이런 조사만을 보더라도 탄생이라는 성스러운 일이 현대 의학과 인간의 어리석음과 삿된 정신에 의해 죽음의 괴로움으로 바뀐 현실을 볼 수 있다. 이 시대에는 태어남이 단순한 괴로움이 아니라 죽음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그 뿐 아니라, 『농부와 산과의사』라는 책에서는 요즘 산부인과가 분만을 할 때 과도한 촉진제 및 진정제 투여, 옥시토신 투여, 마취제 투여, 회음수술, 제왕절개와 같은 의료적 개입으로 인해 오히려 자연스러운 분만을 어렵게 만들며, 태아에게 있어서도 그러한 산업적 출산의 문제점들은 너무나도 큰 탄생의 괴로움을 안겨준다고 말하고 있다. 이처럼 현대의학이 발전하고 산업적인 출산의 계속되면서 오히려 탄생은 더욱 큰 괴로움으로 변해버렸다.
이뿐 아니라 현대의 사회에 있어 태어남의 문제는 한 사람 한 사람의 괴로움에 한정된 것만이 아니라 전 지구적인 환경문제로 비약되는 중요한 시발점이 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전 세계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인구증가의 문제는 모든 환경 문제의 근원이라고 할 만하다. 사실 수렵과 채집에 의해 살아갔던 원시 시대에는 인구가 많지 않아 지구가 충분히 먹여 살리고도 남을 만큼 자원이며 먹거리가 풍부했고 거의 환경문제가 일어나지 않았지만, 농업이 발달함과 동시에 인구가 증가하기 시작했고, 산업혁명 이후로 도시와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인구증가는 눈에 띄게 증가하였다.
세계의 3대 핵심 지역에서 농업이 시작될 무렵의 세계 인구는 약 400만 명이었지만, 농경의 확산으로 더 많은 사람을 부양할 수 있게 되자 인구가 꾸준히 늘어 1,600년 경에는 5억 5,000만 명이 되었으며, 산업혁명이 시작되고 과학기술과 의학기술의 발달로 인해 더욱 빠른 속도로 늘기 시작해 1825년에 10억을 넘어섰고, 1930년경에는 20억명, 1960년 경에는 30억명, 1989년에는 45억명을 넘어 현재 약 60억을 넘어서는 등 인구 증가 추세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인간이 환경문제를 일으킨 원인제공자란 측면에서 이렇게 증가하는 인구는 또 다른 수많은 환경문제를 야기하고, 그럼으로써 더 많은 인구의 환경적 괴로움을 발생시키고 있다.
이처럼 인간의 생의 문제는 개개인의 괴로움의 문제와도 직접적인 관련이 있지만 요즘 같이 세계적으로 환경문제가 인간고에 큰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시점에서 인구증가라는 문제는 또 다른 인간고의 악순환을 가져다주고 있다.
요즘 사회에서는 인구가 줄어든다고 인구를 늘리는 정책에 혈안이 되어 있지만, 조금 더 친환경적이고 자연과 인간의 조화로운 관계를 생각했을 때, 또 인류의 미래를 생각했을 때 오히려 인구는 세계적으로 더 줄어들어야 하지 않을까. 인구가 늘어나면 그만큼 그 인구를 먹여 살리고 그 인구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추가적인 환경파괴와 개발, 발전이 늘어나지 않을 수 없고, 그것은 곧 인류의 고통과 멸망을 앞당기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억지로 인구를 줄일 수는 없겠지만, 지구가 소화해 낼 수 있는 인구가 한정되어 있는 마당에, 더욱이 인간의 욕망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치솟고 있는 마당에, 자연스럽게 줄어드는 인구를 경제를 살린다는 이유로, 또 나라를 먹여 살릴 사람이 없어진다는 이유로 인구를 늘리려고 애쓰는 일은 아무래도 억지스러워 보인다.
어찌 태어남을 고(苦)라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개별적으로 인간이 태어난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괴로움이며, 그것 자체가 이미 노병사의 괴로움을 품고 왔다는데서 고통이라 아니 할 수 없으며, 나아가 세계적으로 보더라도 인간의 태어남은 곧 지구 전체의 괴로움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2) 노고(老苦)
둘째는 노고(老苦)로, 늙는 것은 괴로움이란 뜻이다. 늙어가는 것, 죽어가는 것이야말로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 있는 존재에게 있어 얼마나 큰 괴로움인가. 역사 이래로 수많은 사람들이 늙지 않으려고 애를 써 왔고, 불노장생의 꿈을 꾸어 왔지만 인류 역사상 단 한 사람도 늙음에서 벗어난 사람은 없다. 그런 사람들의 늙지 않기 위한 염원을 반영하듯, 세상에서는 온갖 의학과 과학적 지식을 총 동원하여 늙지 않는 방법을 연구하고 온갖 노화방지 약품과 물질들을 선보이고 있으며, 나아가 젊어지기 위한 온갖 종류의 성형수술까지 마다하지 않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이 늙지 않으려는, 늙는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는 피나는 노력이겠지만 그 모든 노력은 삼법인이라는 진리 앞에서 허망한 짓이 되고 만다. 누구나 늙을 수밖에 없고, 나이 들어 갈 수밖에 없으며, 우리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이 세상 모든 것은 무상하여 변화할 수밖에 없으며, 그 어떤 사람에게도 젊음은 고정되어 있지 못하다는 것이 무아의 이치이다. 늙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장 큰 노고(老苦)다. 늙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장 큰 노망이다. 삼법인의 진실을 받아들이는 자는 늙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그에게 늙어간다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고도 진리다운 여법한 삶의 모습이다.
사실 늙어가는 것, 썩어가는 것은 아름다운 것이다. 늙고 썩지 않는다면 얼마나 끔찍하겠는가. 사람은 늙어가고, 물질은 썩어가고 부식되고 부패되어 감으로써 이 세상은 조화로운 아름다움을 유지하며, 우리들 또한 새로운 삶의 준비를 위해 다음 발을 내디딜 수 있는 것이다.
하기야 요즘의 시대는 늙은 사람이 이 사회에 온전히 설 수 없는 처량한 시대다. 옛날에는 마을마다 나이 든 어른이 있어 마을에 어려운 일이 있거나, 지혜가 부족할 때에는 항상 어르신의 삶의 지혜를 배우며 살아갔다. 나이가 들더라도 죽기 전날까지 온 몸으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갔고, 내 스스로 먹고 입고 자는 의식주 문제를 해결해 갔다. 계절의 운행에 맞춰 농사짓고, 지혜를 키워가며, 자연과 하나 되는 삶을 산 어르신들은 수행자의 그것처럼이나 지혜가 밝고 총기어린 그 마을의 정신적인 지도자였다. 인생의 이치를 받아들이며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삶의 모습 속에 늙지 않으려고,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노망스런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러나 요즘은 시골을 버리고 죄다 도시로 떠나면서 도시 노인들은 갈 곳도 잃고 일터도 잃었다. 경제발전과 의학의 발전으로 평균수명이 연장되면서 노인층은 두터워졌고, 각종의 노인문제, 노령화 문제를 안게 되었다. 도시의 어른들은 경제적 고충과 고독감, 무력감, 병고 등으로 인해 더욱 괴로워지고, 개인주의적이고 서구적인 문화가 도입되면서 노인 공경과 봉양의 윤리적 가치는 사라졌으며, 핵가족화로 인한 가족의 분화는 독거노인을 끊임없이 양산해 내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가 더욱 더 늙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어리석은 삶의 방식을 만들어내고, 늙는 괴로움을 더욱 더 아프고 괴로운 것으로 만들어 내고 있다.
어차피 우린 누구나 늙어가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늙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며, 아름다운 것이다. 이 세상의 진리는 무상과 무아라는 이치를 벗어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지혜로운 삶의 방식은 늙어가는 것을, 변해가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며 완전히 수용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불교적인 섭수(攝受)의 수행이다. 변화를 받아들이라. 존재의 소멸을 인정하라. 늙어감을 수용하고 나이듦의 지긋한 향기를 즐기라.
앞에서 어리석은 중생의 눈에는 일체개고가 지혜로운 부처의 눈에는 열반적정으로 바뀐다고 했다. 어리석은 중생의 눈으로 보면 늙어가는 것은 분명 괴로움이지만, 지혜로움에 눈 뜬 수행자의 눈에 늙어가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며, 애써 거부해야 할 것이 아니다. 내 삶에 가장 중요한 때는 바로 지금이지 다른 때가 아니다. 이미 지나간 과거의 젊음도 아니요,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부유한 노후도 아닌 다만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내 삶의 가장 빛나는 순간이다. 수행자에게 늙음은 없다. 다만 매 순간 순간 새롭고 빛나는 삶이 있을 뿐이고, 우리는 날마다 그 새로운 순간을 새롭게 살아내면 될 뿐이다.
3) 병고(病苦)
병고(病苦)란 말 그대로 병으로 인한 괴로움이다. 몸이 아프다는 것은 늙는 것보다도 더욱 직접적인 괴로움과 고통을 가져다준다.
『중아함경』「분별성제품」에서는 병에 대해 “병이란 이른바 두통, 눈귀코의 통증, 얼굴의 통증, 입술의 통증, 치통, 혀의 통증, 잇몸의 통증, 목구멍의 통증, 숨찬 병, 기침, 구토, 목경색, 간질, 종기, 경일, 객혈, 고열, 마르는 병, 치질, 설사 등의 각종 병이 접촉에서 생겨 마음을 떠나지 않고 몸 속에 있는 것을 말한다.”고 언급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온갖 병이 접촉[更樂觸]에서 생긴다고 함으로써 우리 몸과 몸의 각종 기관들이 각각 그 기관에 상응하는 대상, 환경을 접촉함으로써 병이 생겨남을 설하고 있다. 우리 몸의 눈, 귀, 코, 혀, 몸과 몸의 각종 기관들이 그에 상응하는 대상을 비정상적으로 접촉하는데서 병이 생겨나며, 나아가 우리의 마음이 생각의 모든 대상을 접촉할 때 스트레스와 번뇌 등의 방법으로 접촉하게 될 때 마찬가지로 병이 생겨나는 것이다.
물론 병고는 과거와 요즘이 차이 없이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고통이지만 특히 요즘 처럼 우리 몸이 접촉하는 대상인 환경이 급속하게 오염되어 있을 때는 더욱 오염된 환경과의 접촉을 통해 수많은 병고가 생겨날 수밖에 없다.
일본의 암 및 알레르기 전문의인 슈토 히로시 박사는 이를 ‘생활환경병’이라고 규정했는데, 이는 곧 생활환경의 악화가 결국 사람들의 건강을 해치고 각종 질병을 유발하는 원인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요즘 유행처럼 어린이들 사이에서 번지고 있는 아토피성 피부염이나, 새집증후근, 화학물질과민증, 만성피로증후군 같은 것들이 현대인을 병고에 시달리게 하고 있으며, 비료·농약·제초제로 키워진 야채나, 성장촉진제·호르몬제·항생제 등으로 키워진 가축의 고기 또한 우리 몸에 축적되면 각종의 생활환경병에 영향을 준다. 특히 생활 환경 속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플라스틱이나 합성세제, 식품첨가물, 화장품 등에서 나오는 환경호르몬이 체내에 축적되고 특히 그 가운데 비스페놀A, 노닐페놀, 프탈레이트 등으로 인한 호르몬 이상으로 자궁내막종, 성 조숙증, 요도하열 등의 심각성은 TV를 통해 방영됨으로써 충격을 주기도 했다.
이처럼 병고는 태어난 모든 이들이라면 공통적으로 겪어야 하는 대표적인 괴로움이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 몸과 마음의 건강을 위한 노력 여하에 따라 조금씩 그 강도가 달라질 수는 있지만 병고 없이 생을 마감하는 사람은 드물 수밖에 없다. 특히나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요즘 현대인들은 인간에 의해 고안된 개발과 발전의 풍요 속에서 오히려 더욱 큰 병고를 겪고 있다.
의료기술은 나날이 발전하고 있지만 그보다 더 빠른 속도로 온갖 질병이 생겨나고 있으며, 질병으로 인해 죽어가는 인구도 늘어가고 있다. 예를 들어 매년 600만명의 유아사망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고 있는 영양실조 비율을 보면, 1950년에는 세계인구 25억 명 중 20%가 영양실조였던데 반해 현재는 세계인구 65억 명 중 57%가 영양실조라고 한다.
이처럼 예나 지금이나 병의 괴로움은 언뜻 보기에는 의료기술의 발전으로 더 나아진 듯 하지만 사실은 더욱 악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니 어찌 병드는 것을 괴로움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누구나 태어나면 늙고 병들고 결국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니, 이러한 현실을 어찌 ‘일체개고’라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4) 사고(死苦)
죽는다는 것이야말로 인간 최대의 괴로움이다. 내 몸이 소멸되는 것 뿐 아니라, 살아있는 동안 만들어 놓은 재산 등의 온갖 소유물이나 사랑하는 사람, 가족 등과의 영원한 이별을 의미하는 죽음을 괴로움이라고 생각지 않는 이는 없을 것이다. 아마도 다른 모든 고통은 참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죽음을 앞두고 괴롭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특히 옛날에는 자기 명대로 살다가 죽은 사람들이 많았다면, 요즘에는 온갖 사고와 재난 즉, 교통사고와 질병과 환경적 재앙으로 인해 죽어가는 이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코넬대학 David Pimentel 교수와 연구팀이 휴먼 에콜로지 저널에 발표한 바에 따르면, 수질오염 증가로 학질모기가 증가하여 매년 120만에서 170만의 인구가 사망하며, 스모그 및 다양한 화학물질로 인한 공기오염으로 300만 명이, 비위생적 거주환경으로 매년 500만 명이 사망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또한 2004년 12월에는 해안선, 사주, 망그로브숲이 사라지면서 발생한 거대한 쓰나미가 인도양을 휩쓸어 240만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혔으며, 2005년 8월 미국의 허리케인 카트리나는 뉴올리언스의 80%를 물에 잠기게 하고, 1,250달러로 추정되는 경제적 손실을 야기했을 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앗아갔다. 뿐만 아니라 전쟁으로 인한 죽음도 계속되어 미군의 이라크 공습, 이스라엘의 헤즈볼라 공습 등 전 세계적으로 아직도 수많은 전쟁이 계속되고 있으며, 2004년 세계 군비지출은 1조 400억 달러를 넘어서 냉전시대의 최고치에 근접했다고 『지구환경보고서2006』는 보고하고 있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에 따르면 세계 인구 중 만성적인 영양실조에 걸려 있는 인구가 약 8억이며 이 중 2억은 어린이들이다. 개발도상국의 경우에는 지금도 매일 3만명 이상의 어린이들이 설사, 폐렴, 말라리아, 영양실조 등 충분히 예방할 수 있는 병으로 죽어가고 있다.
일각에서는 과학과 의학 기술의 발달로 사람들의 수명이 연장되고, 출산시 사망률도 많이 낮춰졌다고 하지만, 반대로 의학의 발달로 인해 낙태가 시작되면서 이 세상에 고개조차 내밀어 보지 못하고 죽어간 태아의 수는 태어난 아이의 수를 넘어서고 있다. 국제가족계획연맹의 보고에 의하면 한해 전 세계 신생아 수는 9천만이고 그 중 낙태로 죽는 태아는 5천 5백만~7천만 명 정도로 추정되고 있으며, 낙태수술을 받다가 사망한 여성만도 20만 명에 이른다. 이처럼 현대는 역사 이래로 유래 없는 대규모의 사망이 진행되고 있다.
이상에서 처럼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생노병사, 이 네 가지야말로 인간고의 전형이다. 연기에 대한 자각, 무아에 대한 자각, 제행무상과 제법무아에 대한 자각이 선행되지 않는다면 이 네 가지는 언제까지고 우리에게 괴로움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연기법과 무아를 깨닫게 된다면 이러한 괴로움의 현실인 ‘일체개고’가 ‘열반적정’이라는 대자유의 소식으로 전환될 수 있다.
5) 애별리고(愛別離苦)
앞의 네 가지 생노병사의 괴로움이 몸의 괴로움이라면 애별리고와 원증회고, 구부득고는 정신의 괴로움이라고 할 수 있다.
애별리고(愛別離苦)는 좋아하는 것과 떨어져야 하는 괴로움이다. 사랑하는 사람이나 좋아하는 사물 등 자신을 즐겁고 안락하게 해 주며 삶을 풍요롭게 해 주는 여러 가지 조건이나 상황, 사물이나 사람들과의 헤어짐 혹은 이별에서 오는 고통을 말한다.
좋아하는 것을 가지고 싶고, 좋은 사람과는 늘 함께 하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그러나 좋아하는 것이 생기면 곧 애욕과 집착이 생기고, 애욕과 집착은 우리를 얽어맨다. 물론 언제까지고 애착하는 것을 가질 수 있다면 상관없겠지만, 제행무상의 모든 것은 변화한다는 이치에 따르면 그 어떤 것도 언제까지고 내 것으로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물질도, 사람도 언젠가는 떠나가게 마련이다.
한 번 만난 것과는 반드시 이별을 고하는 날이 찾아오게 마련이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에서는 그것이 괴롭다. 집착이 있으니 괴로움이 생기는 것이다. 좋아하고 사랑하며 애착하는 것과 헤어져야 하는데서 오는 괴로움, 이 괴로움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으랴. 애착이 있는 곳에 반드시 애별리고가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로 인해 자살까지 하는 사람이 있는 것을 보면 어떤 이에게 애별리고는 죽음보다 더한 고통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성 뿐 아니라, 부모, 자식, 형제, 친구들과의 이별 또한 우리를 괴로움으로 몰고 간다. 자식을 잃은 부모님의 고통을 생각해 보라. 이것은 늙고 병들고 죽는 것 이상의 고통이다.
그 뿐 아니라, 정치인들의 명예와 권력에 대한 집착과 손에 움켜쥔 권력에서 멀어질 때의 괴로움, 자신의 직장이나 직업 혹은 일터에서 어쩔 수 없이 퇴직하거나 물러나야 하는데서 오는 괴로움, 좋아하던 사랑하던 애착하던 모든 것들과의 이별에서 오는 괴로움은 결코 노병사의 괴로움보다 하찮은 것이 아니다.
물론 이 또한 애착을 버리고 무집착을 실천한다면 애별리고는 더 이상 고가 아니다. 사람을 만나고 사귀고 사랑하되 거기에 머물지 않고 마음을 낼 수 있다면, 응무소주 이생기심, 마땅히 마음을 내되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낼 수 있다면 애별리고는 없을 것이지만, 아직 깨닫지 못한 중생의 입장에서 애별리고는 죽을 때까지 우리를 따라다니며 우리를 괴롭힌다.
현대적인 의미의 애별리고를 조금 다른 관점에서 살펴보자. 현대의 개발과 발전의 이기, 문명의 이기가 가져다주는 것은 편리함이다. 산업이 발달하고 과학이 발전하면서 우리는 예전과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편리해졌다. 우리를 편리하게 해 주는 기계나 기기들이 넘쳐나고 있다. 그러면서 인간의 몸은 더욱 할 일이 줄어들게 되었다.
우리 두 발로 걸어야 할 것을 자동차나 기차, 비행기 등의 수송기관들이 대신 해 주고, 우리가 직접 해야 할 청소나 세탁 등 또한 청소기나 세탁기 등이 알아서 다 해 준다. 그러다 보니 인간의 욕구는 더욱 편리한 것을 추구하고, 인간의 편리함을 도와주는 온갖 기기들이 넘쳐나고 있다. 그러면서 인간은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구와 애착이 넘쳐난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해야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더 편리한 삶을 영유할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의 욕구는 산업이 발전하고 더 많은 편리한 기계들이 개발됨과 동시에 더욱 커져만 간다. 그러나 한없는 욕구에 비해 지구의 자원은 한정되어 있고, 모든 인구가 모든 편리한 것들을 다 쓰고 살지는 못하기 때문에 소유욕을 충족하지 못하는데서 오는 괴로움은 더욱 늘어난다.
또한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현대 산업사회의 이기들은 언제까지도 지속가능하게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지구의 자원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언젠가는 그런 편리한 것들과의 이별을 고해야 한다. 당장 지구의 석유와 석탄의 매장량만 소멸된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누리고 있는 문명의 이기의 상당수와는 이별해야 할 것이다. 앞으로 우리가 맞닥뜨려야 할 미래의 시대에는 더욱 더 편리한 문명의 이기들과 멀어져야 할 것이고, 그동안 어렵지 않게 누려오던 수많은 것들과도 헤어질 날이 빨라질 것이다. 맑은 공기와도 이별해야 하고, 맑은 물, 자연과도 이별을 고해야 할 날이 오게 될 것이다.
그동안의 산업과 도시의 발달은 자연을 급속도로 파괴시켰고 그로인해 인간이 접촉할 수 있는 야생의 자연은 점차 사라져가고 있다. 예로부터 사람들은 자연 속에서 자연의 변화와 민감하게 교감하며 내면의 고요함과 영적인 성숙을 고양시켜왔다. 인간은 땅에서 멀어질수록 병원과 가까워진다는 말이 있듯이 자연 그대로의 환경은 그대로 인간의 몸과 마음의 고향과도 같은 숭고한 귀의(歸依)의 대상이었다.
애써 헨리 데이빗 소로우나 스코트 니어링의 글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야생의 자연은 그대로 인간의 평화와 행복의 밑거름이다. 그런데 이제 우리 주위에서는 흙을 밟기도 어려워졌고, 야생의 자연을 만나기도 힘들어 졌다. 자연을 만나려면 주말이나 휴가를 기다렸다가 번잡한 도심을 피해 몇 시간이나 되는 차량정체를 인내심으로 기다리고 나서야 겨우 만날 수 있게 되어 버렸다. 이처럼 오늘날 환경 오염은 자연으로부터 우리를 격리시켜 놓고 있다. 맑은 공기를 마시고 싶지만 그럴 수 없고, 흙을 밟고 싶지만 그럴 수 없으며, 맑은 계곡 · 맑은 하천 · 맑은 강물에 발을 담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이와같이 우리가 원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우리와 가까운, 우리가 원하는, 우리가 좋아하는, 우리를 편리하게 해 주고 행복하게 해 주던 많은 것들과 이별을 고해야 한다. 인간의 욕망이 줄어들지 않는 이상, 자연환경을 아끼고 사랑하지 않는 이상, 애별리고는 점점 더 우리를 고통 속으로 몰고 갈 것이다.
6) 원증회고(怨憎會苦)
원증회고(怨憎會苦)는 애별리고와 반대되는 괴로움으로 싫어하는 것이나 싫어하는 사람과 어쩔 수 없이 만나야 하는 괴로움을 말한다. 싫어하는 것을 해야 하는 것, 싫어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이란 얼마나 큰 괴로움인가. 싫은 것, 나쁜 것, 보고 싶지 않은 것, 더럽고 추한 것, 하기 싫은 것, 춥고 더운 것 등의 온갖 싫어하는 것과 함께하는 것이야말로 인간 정신이 느끼는 가장 큰 괴로움일 것이다.
군생활이나 직장생활을 예로 들어 보자. 군대에서 정말 싫고 미운 선임병과의 생활이 얼마나 많은 이들을 괴로움으로 몰아넣고 있는가. 직장생활에서도 마찬가지다. 밉고 증오스러운 직장상사일지라도 어쩔 수 없이 먹고 살기 위해서는 함께 생활해야 하고, 잘 보이려 애써야 하고, 심지어 집에 있는 처자식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이 고개 숙이고 때로는 아부도 떨어야 하는 자신의 모습을 볼 때 고통을 넘어 자괴감까지 생겨난다. 때로는 결혼생활이 지옥이 될 수도 있다. 폭력과 욕설이 난무하는 남편에게 고통당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자식 때문에, 혹은 용기가 없어서, 혹은 그런 삶에 이미 익숙해짐으로써 그 죽을 것 같은 고통의 결혼생활을 끝끝내 죽을 때까지 이어가는 가족들도 있다. 심지어 남편을 악마처럼 느끼며, 아내를 소름끼치는 존재로 생각하면서도 그런 삶을 기어이 살아내야 하는 괴로움도 있다.
싫어하는 사람 뿐 아니라, 싫어하는 직장생활, 싫어하는 직업, 싫어하는 공부, 싫어하는 상황과 인연으로 인해 고통 받는 이들도 있다. 에티오피아, 소말리아, 인도, 아프리카, 북한 등의 제3세계 국가에서는 전쟁과 기아와 굶주림으로 인해 하루에도 3만 5천명 가량의 5살 미만 어린아이들이 죽어간다고 한다. 끝없이 전쟁의 고통과 함께 해야 하고, 하루하루 먹고 살 끼니 걱정에 시달려야 하며, 전염병과 각종 질병의 고통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고, 자연환경적으로도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저주받은 땅에서 아무리 싫어도 버텨내야 하고, 아무리 괴로워도 살아내야 하는 그런 이들의 원증회고는 그야말로 죽음과 다름없는 고통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오늘날의 환경생태적인 위기 속에서 원증회고는 한층 가속화하고 있다. 각종의 오염된 환경과 함께 하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함께해야 하는 괴로움, 그리고 그러한 환경적 괴로움은 급기야 환경적 재앙으로까지 오늘날 전 세계를 공포에 빠뜨리고 있다. 오염된 물, 오염된 공기, 오염된 땅, 오염된 음식, 오염된 문화, 오염된 몸 등 온갖 오염된 것들이 늘 우리와 함께 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산업사회의 현실이다. 오염된 환경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 오염된 환경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도 없다. 오늘날의 환경오염은 도시나, 선진국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광범위하게 펼쳐져 있기 때문에 이 지구의 어느 곳으로 피해 이사를 간다고 하더라도 환경오염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환경오염은 전세계적인 기상이변을 속출하게 함으로써 세계인들에게 언제라도 죽을 수 있음을 하루가 다르게 증명해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현대의 환경오염을 넘어 환경 재앙의 시대를 살면서 오염이라는 문제, 기상이변이라는 문제는 아무리 싫어서 멀리 떨어지고 싶다고 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괴로움에 봉착하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현대 환경위기 시대의 대표적인 괴로움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이상에서처럼 원증회고란 우리 삶에서 다양한 방향으로 나타나 우리 삶을 고통스럽게 만든다. 어쩌면 일상적인 삶에서 가장 표면으로 드러나는 대표적인 괴로움의 형태가 바로 원증회고일 것이다.
7) 구부득고(求不得苦)
구부득고(求不得苦)는 구하고자 하지만 얻지 못하는 괴로움이다. 인간의 욕구는 끝이 없다. 한 가지 바라는 것이 이루어졌으면 그것에 만족하기 보다는 또 다른 바라는 바를 만듦으로써 만족보다는 욕구를 선택한다. 좋아하는 사람, 물건, 재산, 명예, 권력, 지위, 출세, 행복, 건강 등 나의 아상을 확인시켜주고 달콤하며 편안한 모든 것들을 얻고자 하고 바라지만 마음대로 구할 수 없는데서 괴로움은 시작된다. 그야말로 끊임없는 인간 욕구를 다 채울 수 없다는 것은 괴로움이다.
사람들의 욕망은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구하며 얻고자 한다. 한 가지 욕망이 충족되면 거기에 대한 만족은 잠시 뿐이고 또 다른 새로운 욕망이 새로운 것을 구하고자 한다. 이러한 욕망은 죽을 때까지 계속되다가, 결국 단 한 번도 얻고자 하지 않았던 죽음의 순간이 찾아온다. 죽기 직전까지 욕망 추구의 삶은 계속된다.
이 세상은 사람이 얻고 싶다고 다 얻을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저마다의 수많은 사람들의 욕망은 끝도 없는데, 이 세상은 한정되어 있으니 어찌 구하고자 하는 것을 다 이룰 수 있겠는가.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끝까지 구하는 것을 포기하지 못한다. 어찌 되었든 죽음을 무릅쓰고서라도 더 많이 얻고, 더 많이 가지려고 애쓴다. 그 모든 구하고자 하는 욕망은 아상(我相)에서 온다. 아상과 아집이 있는 이상, 인간의 욕망 추구의 삶은 끝나지 않는다. ‘나’라는 존재가 있고, ‘내 것’이라는 아집이 있는 이상 ‘내 것’을 늘려 나가려는 욕망은 멈출 수 없다. 그러나 ‘내 것’을 늘려나가려는 끝없는 욕망이 있는 이상 구부득의 괴로움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진리의 모습이다.
우리의 얻고자 하는 욕망이 얼마나 모순된 것인지를 보라. 인간은 건강한 삶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건강하지 못한 생활습관과 식습관에 길들여져 있다. 건강한 몸을 이루고자 하면서 입맛에만 길들여진 잘못된 식욕을 절제하지 못하고 있다. 튼튼한 몸을 꿈꾸면서 몸을 움직이기 싫어 운동도 노동도 포기하고 만다. 깨달음을 얻고자 하면서도 정작 자기집착과 욕심을 버리지 못한다. 맑고 청량한 공기와 자연환경을 얻고자 하면서 동시에 물질적인 풍요와 개발과 발전에서 오는 문명의 이기를 포기하지 못한다. 숲을 보호해야 한다고 하면서 동시에 산을 깎아 아파트를 짓는 것에 쉽게 동의한다. 지역경제를 살리고, 농촌을 살려야 한다고 하면서 동시에 대형할인매장이 들어오는 것을 한단계 높아진 문화생활이라고 열광한다. 서로 상반된 두 가지를 동시에 얻고자 하는 어리석은 욕망의 실체를 보라. 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들인가. 인간은 두 가지 모두를 얻고자 하지만 현실은 그 두 가지를 모두 가질 수 없게 되어 있다. 이런 모순을 알면서도 결코 그 두 가지를 포기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이 구부득고를 더욱 부채질하고 있다.
시대가 발전하면서 인간의 구부득고는 이처럼 더욱 커지고 있다. 옛날 같으면 그저 기본적인 의식주만 해결되어도 행복이라 느꼈지만, 이제는 기본적인 입고, 먹고, 자는 것만 해결되는 것을 가지고 행복이라 느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오늘날에는 기본적으로 차도 있어야 하고, 노후자금도 모아 놓아야 하고, 대학도 나와야 하고, 컴퓨터, TV, 오디오 등 없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생활필수품이 수도 없이 늘어나고 있다. 그만큼 산업의 발전은 수많은 욕망의 대상이 되는 것들을 양산해 내었고, 그로인해 인간의 욕망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구치고 있다. 옛 사람들의 소박하고 조화로운 삶의 관점에서는 얻고자 하지만 얻지 못하는데서 오는 구부득고가 적었으나, 오늘날과 같은 개발과 발전의 시대에는 얻고자 하는 것의 물량이 너무 많다보니 그것을 얻지 못하는데서 오는 구부득고의 괴로움도 더욱 많아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산업의 발전과 개발이 가속도를 낼수록 인간의 구부득고라는 괴로움의 크기도 정비례 하며 커져갈 것이다.
구하고자 하는 것은 모두 괴로움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 현재 나에게 주어진 것에 만족과 자족을 가지지 않는 이상 구부득고는 계속될 수밖에 없다. 구한다는 것, 얻고자 한다는 것은 곧 지금은 부족하다는 결핍을 의미한다. 그것은 곧 고통일 수밖에 없다. 물질을 얻고자 하면 물질로 인해 고통 받고, 사랑을 얻고자 하면 사랑으로 인해 고통 받으며, 심지어 깨달음을 얻고자 하면 깨달음으로 인해 고통 받는다. 무엇이든 얻고자 하는 것은 곧 괴로움을 가져온다.
사실은 지금 이 자리야말로, 지금 이 모습 그대로, 지금 내가 가진 것 그대로, 지금 이 상황 이 소유 그대로야말로 최고의 순간이며, 최선의 선택이고, 법계라는 진리의 부처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최상의 순간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상 구부득고는 언제까지고 나를 괴롭힐 것이다.
8) 오음성고(五陰盛苦)
경전에서는 인간의 괴로움을 사고팔고라고 하여 여덟 가지로 나누어 놓고 있으나, 생노병사 네 가지와 애별리고, 원증회고, 구부득고라는 앞의 7가지 괴로움을 요약하여 종합하면 결국 오음성고라는 한 가지로 귀결된다고 『증일아함경』「사제품」에서는 말하고 있다. 앞의 생노병사는 육체적인 괴로움이며, 애별리고·원증회고·구부득고는 정신적인 괴로움인 반면에 오음성고는 육체적·정신적인 괴로움 모두를 포함하고 있다.
먼저 오음(五陰)이 무엇인지를 간략히 살펴보자. 좀 더 자세한 설명은 뒷 장에서 있을 것이므로 여기에서는 간략히 그 의미만을 살펴보고 넘어가자. 오음은 오온(五蘊)을 말하는 것으로 우리 인간을 구성하는 물질적(색), 정신적(수상행식) 요소, 혹은 이 우주를 구성하는 다섯 가지 요소를 의미한다.
오음성고(五陰盛苦)는 ‘오온이 치성하는 데서 오는 괴로움’으로, 오온의 각각의 요소들에 집착하는데서 오는 괴로움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에게 괴로움이 생긴다는 말은 곧 다섯 가지 요소 가운데 한 가지가 괴롭다는 말로도 풀이할 수 있다. 그렇기에 이 다섯 요소를 살펴보는 작업은 고를 소멸하는 작은 실마리를 제시해 줄 것이다.
우선 첫째 색(色)이란 빛깔과 모양을 가지고 있는 물질을 말한다. 인간에게 있어서는 지수화풍 사대로 이루어진 육신을 말한다. 이 육신, 몸은 항상 하지 않으며 고정된 실체가 아니기 때문에 몸에 집착하면 곧 괴로울 수밖에 없다.
둘째로 수(受)는 인간의 정신작용 가운데 ‘느낌’이나 ‘감정’을 말한다. 느낌이나 감정 또한 인연 따라, 상황 따라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며 실체가 없다. 그렇기에 느낌이나 감정에 집착하는 것 또한 결국 괴로움일 뿐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좋은 느낌’이 끊임없이 이어지기를 바라며, 좋은 느낌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애쓴다. 사실 인간의 욕심과 탐욕은 ‘좋은 느낌’이 계속되기를 바라는데서 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싫은 느낌’이 오는 것을 싫어하고 멀어지려 애쓰는데도 멀어지지 않는데서 진심, 성냄이 일어나는 것이다.
셋째로 상(想)은 인간의 정신작용 가운데 개념, 표상작용 내지는 사유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쉽게 이해하면 인간은 자기 자신의 가치관이나 고정된 관념, 생각, 개념, 분별 등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을 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관념, 개념, 표상작용 또한 항상 하지 않으며 인연 따라 끊임없이 변해갈 뿐이다. 가치관도 끊임없이 변하고, 세계관도 변화하는 것일 뿐이다. 그런데 어떤 하나의 관념이나 개념에 얽매여 집착하게 되면 그로인해 괴롭다.
넷째로 행(行)은 욕구, 의지작용이다. 행은 본래 ‘형성하는 힘’이라는 뜻을 가진 말로써 인간이 업(業)을 짓게 되는 것도 이 행의 작용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의 의지나 욕구 또한 항상 하지 않으며 고정된 실체가 없기 때문에 이에 집착하는 것은 곧 괴로움이다.
다섯째로 식(識)은 분별, 인식 작용을 말한다. 우리에게 대상들이 어떤 존재라고 인식되는 것은 바로 이 식의 작용이 있기 때문이다. 나와 내 밖의 세계가 존재한다고 인식하며, 이런 인식이 있기 때문에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처럼 식 작용이 치성하게 되면 나와 세계를 항상 하거나 고정되게 있다고 착각함으로써 나와 세계에 집착하게 만들고 결국 괴로움을 몰고 오는 것이다. 즉 본래 나라는 존재는 실체가 없어 무아이며, 이 세계는 텅 빈 공일 뿐이지만 바로 이 식에 의해 분별인식 됨에 따라 나와 세계가 있다는 착각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오온이란 나와 세상에 대한 물질적, 정신적인 다섯 가지 요소로의 분류법이며, 이 다섯 가지 요소는 제각기 항상 하지 않으며, 고정된 실체가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나를 이루는 다섯 가지 요소인 치성하는 오온에 집착하게 마련이다. 이처럼 오음성고란 나를 이루는 요소인 오온(오음)에 집착하는데서 오는 괴로움이란 의미로, 다시 말하면 얻지만 얻은 것이 쉽게 무너지는데서 오는 괴로움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중아함경』「분별성제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현자들이여, 오음성고를 설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른바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그 자체는 이미 괴로움이라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오음성고를 설하는 것이다.” 즉, 오온(五蘊) 그 자체가 곧 괴로움이란 의미다. 자기 존재로 취해진 색·수·상·행·식이 각각 괴로움이라는 것으로, 이는 다시 말하면 자기 존재가 곧 괴로움이라는 의미이다.
경전에서는 자기 존재인 오온이 괴로움인 이유를 무상(無常)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잡아함경』 1권에서는 “색은 항상 하지 않는다[無常]. 항상 하지 않는 것은 곧 괴로움이요[苦], 괴로움은 곧 ‘나’가 아니며[無我], ‘나’가 아니면 또한 ‘내 것’도 아니다. 이렇게 관찰하는 것을 진실한 바른 관찰이라 한다. 이와 같이 수·상·행·식 또한 항상 하지 않는다. 항상 하지 않는 것은 곧 괴로움이요, 괴로움은 곧 ‘나’가 아니며, ‘나’가 아니면 또한 ‘내 것’도 아니다. 이렇게 관찰하는 것을 진실한 바른 관찰이라 한다.”고 말함으로써 오온은 항상 하지 않아 무상이며, 무상은 곧 괴로움이요, 괴로움은 곧 무아라고 설하고 있다. 즉 오온은 무상, 고, 무아라는 삼법인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즉, 나라는 존재를 구성하는 요소인 오온이 제각기 괴로움인 이유는 그것이 항상 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나를 구성하는 다섯 가지 요소인 오온은 어느 것 하나 고정되거나 영원하지 않으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기에 결국 ‘나’라는 존재는 그 자체로써 괴로움인 것이다.
쉽게 말해 나라는 존재는 다섯 가지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다섯 가지의 하나하나가 낱낱이 항상 하지 않고 고정된 실체가 없어 괴로운 것이라면 결국 그 다섯 가지의 집합체인 ‘나’라는 존재, 즉 오온 또한 결국 괴로움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대소승을 막론하고 ‘나’라는 것은 무상하고 무아인 것이기에 집착하지 말도록 이끌고 있다. ‘나’, ‘내 것’에 집착하는 것은 괴로움이며, 그것은 바른 관찰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끊임없이 ‘나’에 집착하며, ‘내 것’이라는 소유에 집착하고, 나아가 ‘내가 옳다’고 하는 생각이나 가치관에 집착한다. 우리가 느끼고 있는 모든 괴로움은 결국 ‘나’라는 오온에 집착하는데서 시작하는 것이다. 생노병사의 괴로움도 결국은 ‘나’라는 존재가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며, 애별리고와 원증회고, 구부득고 또한 ‘나’라는 존재가 좋은 것을 만나고 싶고, 나쁜 것에서 멀어지고 싶으며, 원하는 바를 얻고 싶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이 모든 앞의 7가지 괴로움은 결국 ‘나’라고 하는 치성하는 오온(五蘊)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2) 일체개고의 생활실천 - 무집착
이상에서 언급한 것처럼 일체개고, 즉 인간이 괴로운 이유는 나라는 오온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여덟 가지의 괴로움이 결국에는 ‘나’라는 아집(我執), 오온의 집착에서 생겨난다. 내가 늙지 않고 싶은 것에 집착하고, 병들고 싶지 않은 건강한 몸에 집착하고, 죽고 싶지 않은데 집착하며, 사랑하는 이와 늘 함께 하고자 하는데 집착하고, 미워하는 이와는 멀어져야 한다는 마음에 집착하고, 얻고자 하는 것을 얻어야 한다는 집착을 가지고, 결과적으로 ‘나’라는 오온에 집착하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모든 괴로움은 바로 집착에서 온다. 일체개고라는 현실의 통찰은 바로 모든 인간이 집착하고 있다는 전제 속에서 진리인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나라는 것에 집착하고 그렇기 때문에 그런 집착이 남아 있는 동안은 누구나 ‘일체개고’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체개고라는 괴로움의 현실을 넘어 고(苦)가 타파된 영원한 즐거움에 이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간단하다. 바로 집착을 놓아버리면 된다. 붙잡고, 집착해서 모든 문제가 시작되었음을 안다면 그렇게 집착하고 붙잡고 있는 것들을 놓아버리면 모든 문제는 종결되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스승, 역대의 조사 스님들께서는 한결같이 ‘놓아버려라’, ‘비우라’고 하면서 끊임없이 ‘무집착’, ‘방하착(放下着)’ 을 역설했다.
‘붙잡아서 괴롭다면 놓아버려라’ 이 얼마나 단순하고도 명쾌한 가르침인가. 놓아버리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그러면 문제는 끝났는가. 모든 괴로움을 없앨 수 있는 분명한 가르침이 주어졌으니 이제 행복한가. 그렇지 않다.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문제가 하나 발생한다. 집착을 놓아버려야 하는 것은 알겠는데, 도대체 '어떻게' 집착을 놓아버릴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방하착하라, 집착을 놓아라, 아상을 놓아라, 아집을 버려라, 욕심을 버려라, 마음을 비워라, 이거야 누구든 다 아는 사실이고, 정말 중요한 것은 도대체 그 어린아이도 다 아는 이 진리를 어떻게 실천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다.
그러면 이제 이 중요한 실천적인 문제를 하나하나 살펴보자.
집착을 비우라, 놓으라고 하는데, 그 집착을 비우고 놓으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
아주 기본적으로, 집착을 놓아버리려면 먼저 내가 집착하고 있던 바로 그 집착의 대상이 ‘그다지 집착할 만 한 것이 아닌 것’이 되면 가능해 질 것이다. 쉽게 말해 우리가 집착을 하는 이유는 ‘그것이 집착할 만 한 것’, ‘집착할 만큼 좋은 것’, ‘집착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집착하는 것이 아닌가. 어느 바보가 집착할만한 가치도 없는 것에 집착하겠는가. 즉 집착할 만큼 좋은 것이고, 집착했을 때 내게 무언가를 가져다주는 것이며, 집착할 만한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만약에 그동안 내가 집착하던 것들이 집착할 만한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증명된다면, 즉 그다지 집착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 증명된다면 아마도 그동안의 집착을 버릴 수가 있게 될 것이다.
집착하면 무언가가 나올 줄 알고, 집착하면 엄청난 무언가가 있을 줄 알고, 집착하면 그로인해 나에게 아주 좋은 것이 있을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까 그것이 집착할 만큼 매력적인 것이라거나, 집착할 만큼 그렇게 항상하는 것이라거나, 집착할 만큼 그렇게 좋은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당장에 그 집착을 거두어 들일 수 있고, 그 집착을 버릴 수 있을 것이란 말이다. 안 그런가. 집착할 아무 이유도, 매력도, 가치도 없는 것에 어느 바보가 집착을 한단 말인가.
그러면 어디 한 번 생각해 보자. 현재 내가 집착하고 있는 것들이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정말로 과연 집착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일까? 내가 집착하고 있는 대상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사람에 대한 집착, 사랑에 대한 집착, 물질에 대한 집착, 생각에 대한 집착, 종교에 대한 집착, 나에 대한 집착, 생명에 대한 집착, 돈과 명예, 권력, 지위 등에 대한 집착 등 아주 다양하다. 내 생각에 그런 것들이 ‘집착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내가 그것에 그렇게 집착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집착의 대상들이 사실은 집착할 만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사유해 보기 위해 이 모든 것들의 특징을 한번 살펴보자. 이상에서 언급했던 집착의 대상들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을까? 여기에서 다시 삼법인 강의의 첫 시간으로 돌아간다. 삼법인이야말로 근본불교교리에서 너무나도 중요한 것이니 다시 한번 간략히 짚어보자.
먼저 가장 큰 첫 번째 특징은 ‘그 모든 것들은 변한다’는 것이다. 제행무상이라는 것이다. 앞의 강설에서 살펴보았듯이 사랑도 변하고, 사람도 변하며, 돈도 명예도 권력도 변하고, 생각, 종교, 사상, 재산 등 이 모든 것들이 다 변한다. 우리가 집착하고 있는 대상들 중에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언제까지고 우리가 꽉 붙잡고 있을 수 있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그 모든 것들은 인연 따라 잠시 내게 왔다가 인연이 다하면 언젠가는 분명히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들이다. 분명히, 반드시, 절대로 사라질 수밖에 없다. 사라지지 않는 것,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우리가 ‘이것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바로 그 집착의 대상이 언젠가는 소멸되어 없어진다는 말이다. 집착이란 언제까지고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마음이다. 그런데 그 모든 집착하는 것들은 언제까지고 내 곁에 있어주지 않는다. 때가 되면 내 품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이 내 곁에서 벗어나는 것을 참을 수 없다. 그것이 바로 집착의 특성이니까. 여기에서 바로 아주 중요한 삶의 비밀스런 본질이 드러난다. 우리가 집착하는 모든 것은 변하며(제행무상), 그렇기에 우리가 무언가를 집착한다는 것은 곧 괴로움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일체개고)이다. 집착은 반드시 괴로움을 몰고 온다. 이것이야말로 영원한 진리이다.
사람들은 많은 돈을 꿈꾸지만, 돈이란 언젠가는 내 곁을 떠날 수밖에 없는 것일 뿐이다. 지위와 명예와 권력을 꿈꾸지만 언젠가 그것들은 내 품에서 사라져 간다. 내가 사랑하던 사람들과도 언젠가는 영원한 이별을 고해야 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들이 영원히 내 곁에 있어주길 바란다. 잠시 인연 따라 왔다가 인연 따라 갈 것이라는 것을 매 순간 잊어버리곤 한다. 만약 그 사실을 잊어버리지 않는다면, 그래서 잠시 인연 따라 그것을 쓰기는 할지언정 거기에 마음이 얽매여 집착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아주 자유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끝이 아니다. 우리가 집착하고 있는 대상들에는 아주 중요한 또 하나의 특성이 있다. 그것은 집착하고 있던 대상들이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점이다. 제법무아라는 점이다. 우리가 어떤 것에 집착하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에게 무언가를 가져다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떤 높은 명예나 지위에 집착하고 있다면 내가 그 지위에 오르는 순간, 우리는 나와 그 지위를 동일시하곤 한다. 나의 정체성이 바로 그 지위가 된다고 착각한다. 그리고 그 지위라는 정체성이 나를 높여준다고, 나에게 많은 것을 안겨준다고 착각을 하게 된다. 다시말해 아상(我相)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래서 거기에 집착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지독한 아집(我執)이다. 거기에 집착하고, 그 집착하는 것을 얻었을 때 우리는 그 집착의 대상과 나를 동일시하고, 그 동일시가 나를 어떤 존재로써 정체성을 심어주며, 그것이야말로 나의 어떤 실체성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나 자신의 어떤 실체성’을 경험하게 된다. ‘내가 진짜로 있다’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거기에 나라는 어떤 실체적인 것은 없다. 나라는 것은 무아(無我)이다. 그것이 나인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을 ‘나’라고 착각한다. 예를 들어 내가 사장이나 국회의원이 되었다고 생각해 보자. 그 때 우리 안에는 ‘사장’이요, ‘국회의원’이라는 자기정체성이 생겨나고, 나와 ‘사장’을 동일시하며, 나의 실체성이 ‘사장’ 혹은 ‘국회의원’이라고 착각하게 된다. 내가 어떤 그럴싸한 직업을 가진 사람이며, 내가 어떤 위치에 오른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동일시하게 된다. 그러나 사장이라는, 국회의원이라는, 선생님이라는, 성직자라는, 부자라는 그 이름에 어떤 실체성은 없다. 그것은 다만 이름일 뿐이고, 하나의 상징일 뿐이다. 그저 그렇게 이름붙이기로 약속했을 뿐인 것이다. 그렇게 약속했다고 해서 그것이 내가 되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나는 그저 나일 뿐이다.
성직자라고 하더라도 성직자라는 이름 속에 성스러움이나, 신과의 연결성이나, 깨달음 등이 들어 있는 것은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참된 성직자는 스스로 성직자라는 사실을 잊는다. 참된 성직이라는 것은 그 성직자라는 이름 속에, 수행자라는 이름 속에 그 어떤 실체적인 것이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말과 생각과 행동이라는 업, 행위 속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 행위가 바르지 않다면 그 사람이 아무리 승복을 입고 있고, 사제복을 입고 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그 알맹이는 성스럽지 못하다. 그리고 신이나 붓다는 껍데기를 보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알맹이를 본다.
다시말해 우리가 집착하고 있는 대상의 두 번째 특성은 그 어떤 것도 ‘고정된 실체’가 있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대상에 집착하는 이유는 그것이 어떤 고정된 것이어야 하고, 실체적인 것이어야 하며, 그로인해 우리에게 실질적인 어떤 것을 안겨주어야 한다. 고정된 실체가 없는 대상이라면 그야말로 아지랑이 같고, 환영 같으며, 신기루 같아서 겉만 그렇게 보일 뿐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것인데 거기에 집착할 이유가 있겠는가? 우리가 집착하는 이유는 그것에 어떤 실체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우리가 집착하는 그 모든 대상들에는 고정된 실체가 없다.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실체적인 것으로써 항상하지 않다. 그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며, 그 어떤 실체도 없이 다만 인연 따라 잠시 그렇게 보였을 뿐인 것이다.
인연 따라 사장도 되었다가, 인연 따라 국회의원도 되었다가, 상황 따라 아버지도 되고, 아들도 되고, 이웃사촌도 되고, 끊임없이 역할을 바꾸면서 변해갈 뿐, 어떤 한 가지 이름으로 어떤 한 가지 직업이나 모습으로 딱 정해져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실체화시키기 좋아하는 종교나 문화에서는 예를 들어 성직자가 되는 순간 그 사람에게는 절대불변의 그 어떤 실체적인 성직자로써의 무언가가 부여된다고 믿곤 한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그 어떤것도 실체화시키지 않는다. 모든 것은 제법무아다. 스님도 수행자의 길을 걷다가 환속하여 재가자가 된다면 그 사람은 재가자가 되는 것이다. 한번 스님은 영원한 스님이 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 어떤 사람도, 어떤 직위도, 어떤 것들도 고정불변한 실체적인 것은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두 번째의 사실, 즉 제법무아에 비추어 보았을 때 우리가 집착할만한 대상은 어디에도 없다. 실체적이라야 집착을 할 것인데, 꿈같고, 환영 같고, 아지랑이 같고, 신기루 같다면 누가 거기에 목숨 걸고 집착을 하려 하겠는가.
사실 우리가 지금까지 지키려고 애써왔고, 가지려고 애써왔으며, 목숨 걸고 지켜왔던 그 모든 집착의 대상들은 이러한 제행무상과 제법무아라는 두 가지 속성을 가지고 있다. 삼법인의 가르침에서 보면 제행무상과 제법무아인 모든 것들은 일체개고일 수밖에 없다고 한다. 항상 하지 않고, 끊임없이 변하며, 고정된 실체도 없이 다만 인연 따라 잠시 꿈처럼, 환영처럼 나왔을 뿐이라면 거기에 집착할 아무 이유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무상과 무아인 대상에 대해 집착을 함으로써 고(苦), 괴로움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삼법인이라는 가르침의 핵심이다.
이러한 삼법인의 가르침에 비추어 본다면 우리가 집착해야 할 대상은 어디에도 없다. 즉, 삼법인이기 때문에, 제행무상, 제법무아, 일체개고이기 때문에 집착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무상과 무아를 사유함으로써 내가 지금까지 집착해 왔던 바로 그 대상이 사실은 ‘집착할 만한 것’이 아님이 증명된다면, ‘집착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님이 증명된다면 자연스럽게 우리의 집착은 놓여질 것이다.
내가 그동안 집착하고 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삶 속에서 살펴보라. 그리고 낱낱이 그것의 무상성과 무아성을 사유해 보라. 무상과 무아를 사유하게 되면 저절로 그것에 집착하는 것은 곧 괴로움이라는 것이 증명될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것이 사실은 집착할 만한 것이 아니었음이 증명되면 저절로 그동안 붙잡고 있었던 것들을 놓아버릴 수 있게 된다. 그동안의 집착과 아집과 욕망들을 비워버리게 된다.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물론 바로 놓아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내 삶을 놓고 우리는 사유와 관찰을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문사수(聞思修) 해야 한다. 들었으면 그것을 사유하고 닦아야 하는 것이다. 나라는 존재, 내가 만드는 삶을 있는 그대로 관찰할 때 그 관찰의 결과 우리는 무상과 무아를 깨닫게 된다. 마음관찰은 이상에서 설명한 삼법인의 가르침을 그저 머릿속으로만 이해하고 있던 것을 넘어서서 온 존재로 체험하도록 이끌어 주고, 온 존재로 깨닫도록 이끌어 주는 수행법이다. 이러한 바른 관찰과 수행을 통해 무상과 무아를 바로 보고 깨닫게 되고, 그것은 곧 우리를 방하착으로 이끌며, 방하착은 곧 괴로움으로부터의 해방을 가져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혹자는 또 묻는다. 왜 놓아야 하는지는 잘 알겠는데, 구체적으로 놓는 방법, 비우는 방법 좀 알려달라고 말이다. 놓아버리고 싶은데 어떻게 놓아버려야 하느냐고 말이다.
집착을 놓을 때는 어떻게 놓는가?
그것은 마치 무언가를 결심하는 것과 비슷하다. 예를 들어 내일부터 아침에 운동을 해야겠다고 신년을 맞이하여 결심을 했다고 생각해 보자. 그 결심이 굳지 않은 사람이라면 하루 이틀 정도 실천하다가도 작심삼일이라고 몇 일 안가 금방 포기하고 말 것이다. 그러나 결심이 굳은 사람이라면 한두달이 아니라, 일년이라도 아니 평생이라도 그 결심이 섬과 동시에 바로 실천이 될 것이다.
그러면 결심을 굳게 하는데는 어떤 방법이 있는가?
그것은 필요성을 절감하는 것이다. 운동의 필요성을 스스로 깨달아 알고 절감했을 때 곧바로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제행무상과 제법무아의 사유를 통해, 마음관찰과 집중의 수행을 통해 집착을 놓아야 한다는 것을 절감했을 때, 방하착의 필요성을 깨닫게 되고, 곧바로 놓을 수 있는 의지력과 실천력이 생겨난다. 그 때는 이것 저것 따질 것도 없이 그냥 당연해서 하는 것이다.
이처럼 결심하는데 어떤 방법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결심을 하게 된 동기나 사유, 경험과 관찰이 필요한 것처럼 방하착하고, 집착을 놓아버리는데도 놓아버리는 특별한 방법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놓아버려야만 하는 이유, 사유, 관찰이 필요한 것이다. 집착을 왜 놓아버려야 하는가 하는 이유, 집착의 특성과 속성이 무엇인가하는 사유, 도대체 내가 집착하는 이것은 무엇인가하는 바른 관찰 등이 우리를 곧바로 ‘놓아버림’으로 이끄는 것이다. 억지로 놓는 것은 놓는 것이 아니다. 바른 이해와 바른 사유와 바른 관찰을 통한 바른 깨달음만이 바른 놓음으로 이끄는 것이다.
가만히 사유해 보라. 방하착을 화두로 삼고, 왜 집착을 버려야 하는지, 집착을 버려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내가 집착하는 그 대상이 과연 집착할 만한 것인지, 집착할 가치가 있는 것인지, 집착의 대상의 특성이 무엇인지, 그 대상이 무상, 무아의 특성이 있기는 한 것인지를 깊이 깊이 사유해 보라. 그러한 사유를 통해 저절로 방하착이 체험되어질 것이다.
3. 제법무아(諸法無我)
(1) 제법무아의 의미
앞에서 제행무상의 ‘제행’이 ‘모든 존재’, ‘모든 행’을 말한다고 했는데, 제법무아의 제법 또한 ‘모든 존재’라는 비슷한 의미를 지닌다. 여기 제법(諸法)에서 법(法, dharma)은 ‘존재’ ‘일체 모든 존재’라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일반적으로 법이라고 하면 ‘진리’, ‘진리의 가르침’ 정도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은데, 불교에서 ‘법’이라는 용어는 이외에도 ‘존재’, ‘일체 모든 존재’라는 의미로도 쓰여 진다. 예를 들어 삼법인에서 ‘법’ 은 ‘진리’ 를 의미하며, 제법무아에서 ‘법’ 은 ‘존재’ 를 의미한다.
무아(無我)는 ‘내가 없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나’라는 것은 나라는 개인 뿐 아니라, 모든 인간을 넘어서 일체 모든 존재를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고정된 실체로써의 본질적인 나라는 것도 포함된다. 즉 이 우주법계에 존재하는 일체 모든 존재는 고정된 실체로써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우리가 생각하는 본질적인 자아 또한 사실은 실체가 없는 것임을 의미한다.
여기에 이렇게 분명히 나라는 존재가 살아 움직이고 있음에도 왜 무아라고 하는가.
앞서 설명했듯이 일체 모든 존재는 인연 따라 만들어졌다가 인연이 다하면 소멸할 수밖에 없으며, 항상 하지 않고 끊임없이 변할 뿐이다. 항상 하지 않고 끊임없이 변한다면 지금의 ‘나’라는 존재는 무엇인가. 이 또한 잠시 잠깐 인연 따라 이런 모습으로, 이런 성격으로, 이런 몸뚱이를 받아 이번 생에 나왔을 뿐이다. 지금 나의 모습이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인연 따라 끊임없이 변해가는 억겁의 세월 가운데 찰나의 모습에 불과하다. 그러니 이처럼 연기법으로 운행되는 세상에서 제행이 무상한 가운데 피어나는 모든 존재는 무아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연기하기 때문에 무상이며 무아인 것이다.
이러한 제법무아는 연기법에 대한 공간적인 해석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제행무상은, 연기법을 시간적인 측면에서 보았을 때, 지금 보기에는 항상 할 것 같던 모든 존재들이 시간이 흐르고 나면 언젠가 소멸될 수밖에 없는 실상을 보여주는 가르침이었다면, 제법무아는 지금 이 자리에서 공간적으로 살펴보더라도 모든 존재는 실체적인 것이 아니며, 공한 것이라는 가르침을 보여주고 있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저홀로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으며, 서로 다른 모든 존재들과의 상호연관과 연기적인 도움을 통해서만 그 자리에 그렇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는 연기법의 공간적인 관점을 제법무아는 보다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2) 고정된 실체는 없다
제법무아는 한 마디로 모든 존재는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말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존재는 그것이 고정된 실체로써 있는 것이 아니라, 잠시 인연 따라 연기되어진 존재로써 인연가합(因緣假合)으로 있는 것이란 의미다.
인연가합이란 인연 따라 합쳐진 모습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실체로 있는 것이 아니라 거짓으로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법무아는 어느 하나 남김없이 이 세상의 모든 존재가 이처럼 거짓으로 잠시 인연 따라 생겨난 것이기에 인연이 다하면 흩어질 수밖에 없는 연기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음을 설한 것이다.
어떤 이들은 무아라고 하니 말 뜻 그대로만 보고 무아를 ‘나’ 혹은 ‘사람’에게만 한정하여 해석하는 경우도 있고, 혹은 나아가 유정물 정도로 확대하여 해석하는 경우가 있는데, 무아에서 ‘아’라는 것은 그야말로 이 우주법계의 일체 모든 것들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즉 생명 있고 없는 모든 존재를 포함하여 그 존재의 행위나 그 존재가 만들어내는 일, 감정, 사건 등을 모두 포함하는 의미라고 볼 수 있다. 그야말로 ‘일체 모든 것’이 고정된 실체를 가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사람이나 생명 있는 모든 존재도 무아이며, 나무나 풀이나 돌이나 지구, 태양, 우주 또한 고정된 실체가 아닌 무아이고,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 사건들,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온갖 일과 사람들의 감정들까지 모든 것이 고정적인 실체를 가지지 않는 것이라는 의미다.
예를 들어 여기에 자전거가 한 대 있다. 우리 눈으로 보기에는 분명히 존재하는 자전거이지만 연기법에서는 이 또한 무아라고 한다. 즉 ‘자전거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자전거는 인연 따라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실체가 없어서 공(空)한 것이란 의미다.
시간적으로 보더라도 자전거는 언젠가는 녹슬어 사라질 것이며, 공간적으로 보더라도 바퀴와 체인과 의자와 바퀴살과 모든 부속품들을 떼어놓는다면 그 순간 자전거는 자전거로써의 기능과 이름을 잃게 된다. 그것은 더 이상 자전거가 아니라 각각의 부속품들일 뿐이다. ‘자전거’라는 이름이 있기 위해서는 각각의 부속품들이 인연 따라 조화롭게 화합하여 서로를 붙잡아주고 서로를 의지해 줌으로써 각각이 있어야 할 곳에 서로에 의존해 있어야만 한다. 상호의존, 상의상관이라는 연기적인 모임이 없고서는 자전거가 생겨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내 앞의 자전거는 있기는 있되 실체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연기적으로 있는 것이다. 바로 이것을 일러 무아라고, 혹은 공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3) 나다 하는 아상의 타파
나라는 존재도 마찬가지다. 내가 보기에는 나라는 존재가 이렇게 엄연히 존재하며, 먹고 자고 마시며 움직이고 일을 하는 내가 있다. 불교에서는 이런 나까지를 다 부정하며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나라는 존재 또한 인연 따라 잠시 만들어진 가합의 존재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에서는 조금 더 구체적으로 내가 ‘나’라고 생각하는 존재가 왜 무아인지에 대해 조금 더 살펴보자.
보통 우리가 ‘나다’라고 하는데는 먼저 ‘내 몸’, 즉 육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어 ‘내것이다’고 하는 내 소유물에 대해 나라고 생각하고, 또한 ‘내가 옳다’고 하는 내 생각, 내 가치관, 내 견해나 사상 등을 나라고 생각한다. 이 외에도 ‘내 느낌’ ‘내 감정’이나 ‘내 성격’에 대해 나라고 느끼기도 한다.
보통 사람들이 ‘그 사람 어떤 사람이야?’ 하고 물으면 우리의 대답은 그 사람의 성격이나 외모나, 경제력이나, 능력 등을 말하곤 하는데 그것이 바로 그런 것들을 ‘그 사람’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그 모든 것들을 포함한 것을 ‘나다’ 혹은 ‘그 사람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 과연 그 모든 것들이 나인가.
내 몸이나 소유물이나 생각이나 성격이나 감정이 과연 실체적인 나인가?
먼저 내 몸이 나인가? 사람이라는 정체성, 남자라는 혹은 여자라는 정체성이 나인가? 나를 규정짓는 외모나 재능이 나인가? 내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태양과 흙과 바람과 비와 구름과 풀과 나물과 물과 부모님, 형제, 이웃들이 있어야지만 나 또한 존재할 수 있는 것임을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나라는 존재 또한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주적인 연기의 화합이 있어야지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아침에 먹은 음식물과 지난 과거에 먹었던 것들로 인해 지금의 내 몸은 인연 따라 유지되고 있는 것일 뿐이다. 또한 이번 생에 잠시 지난 생의 업과 인연에 따라 사람으로 태어났을 뿐이며, 남자로 태어났을 뿐이고, 건강한 몸으로 태어났고, 부잣집에 태어났고, 능력 있게 태어난 것일 뿐이지, 내가 어떻게 이번 생을 살아나가느냐에 따라 다음 생에는 사람이 아닌 동물이나 곤충으로 태어날 수도 있으며, 여자로 혹은 가난한 사람, 능력 없는 사람으로 태어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의 나를 규정짓는 요소들, 이를테면 ‘사람’이라거나 혹은 ‘남자’ 혹은 ‘외모’나 돈과 명예, 능력이나 재능 등이 나를 대변하는 실체적인 요소라고 볼 수는 없다. 이런 요소들은 끊임없이 변해가는 것일 뿐이며, 지금의 내 모습이나 외모는 단지 억겁의 윤회 속에서 잠깐 동안 빌려 쓰고 있는 껍데기에 불과한 것이다.
또한 우리가 나라고 생각하는 것에는 ‘내것이다’라고 하는 내 소유에 대한 것들이 있다.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을 나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내가 가진 것들, 내가 소유한 것들을 나와 동일시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내가 부자이거나, 좋은 차를 타고 다니거나, 좋은 집에 살거나, 소유한 것들이 많거나, 많은 통장 잔고 등은 나를 드러내는 아주 중요한 정보 가운데 하나다.
요즘 결혼정보회사 같은 곳에서는 동반자를 찾는데 필요한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데이터화 한다고 하는데, 아마도 우리가 ‘나다’ 혹은 ‘너다’라고 하는 아상(我相)의 총체가 바로 그 데이터 안에 다 들어있는 것이 아닐까. 그 데이터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그의 소유, 그의 재산 내역이다.
그러면 현대사회에서 나를 규정짓는 그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인 ‘소유물’이 바로 나일까.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들이 바로 나를 대변해 주는 것들일까.
그렇지 않다. 소유물들 또한 인연 따라 나에게로 오고 가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항상 하지 않는다. 길어야 100년도 소유하지 못하고는 다 버려야 할 것들일 뿐이다.
인간세상에서의 400년이 도솔천의 하루이고, 인간의 1,600년이 타화자재천의 하루라고 하니, 천상에서 본다면 인간세상의 100년이라야 찰나의 눈 깜짝 할 사이 밖에 되지 않는 시간일 뿐인 것을, 온갖 욕심과 집착으로 소유물들을 늘리려고 하지만 그것이 그야말로 눈 깜짝 할 사이의 헛된 꿈에 불과한 것일 뿐이다. 우리는 소유물들과 재산을 실체적인 내 소유라고 생각하겠지만 잠깐 사이에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공허하고 텅빈 것들일 뿐이며, 무아일 뿐이다.
그러면 ‘내가 옳다’는 내 견해가 나인가. 내 생각, 내 견해, 내 사고방식, 내 가치관, 내 세계관이 나인가.
그것들도 다만 살아가는 주변 환경과 사회적인 조건 속에서 인연 따라 생겨나는 것일 뿐이다. 해적의 자식에게는 해적 두목이 되는 것이 최고의 삶의 목적이라고 하듯이, 우리의 견해나 가치관은 내가 살아 온 사회적인 조건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들일 뿐이다. 그것이 아무리 견고한 ‘내 생각’이며, 견고한 ‘진리’라고 생각할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거나 ‘내 것’이 아니라 인연 따라 그렇게 믿고 있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부처님 진리에도 집착하면 그것은 더 이상 진리가 아니라고 했다.
100% 순수한 ‘내 생각’이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모두 배워 온 것이거나, 들은 것이거나, 책에서나 학교에서 얻어 들은 것들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생각이 ‘내 생각’이며, ‘내 가치관’이라고 여기고, 거기에 집착을 하지만 그것은 내 것이 아니며, 그것이 나인 것도 아니다. 인연 따라 다만 수많은 생각이 일어나고 사라질 뿐인 것이다. 그래서 그 어떤 사람도 절대적으로 선하거나, 절대적으로 악할 수는 없다. 인연 따라 어떤 상황에서는 선하고, 어떤 상황에서는 악할 뿐이지 절대선이나 절대악은 없다.
그러면 내 성격이 나인가?
그 또한 그렇지 않다. 성격도 끊임없이 변한다. 악하던 사람도 어떤 계기를 통해 개과천선하여 선하고 진중한 수행자로 거듭날 수 있고, 아무리 선하던 사람도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삶의 성숙을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면 부끄러운 죄인으로 변할 수도 있는 것이다.
보통 우리는 ‘그 사람 성격이 어때?’ 하고 물으면 ‘좋아’ 혹은 ‘별로야’‘나빠’라고 대답하곤 하지만, 어떻게 성격이 좋거나 혹은 나쁠 수가 있는가.
모든 성격은 서로 다를 뿐이지 좋거나 나쁜 것이 아니다. 어떤 성격을 좋거나 혹은 나쁘다고 규정짓고 거기에서 좋은 성격을 채택하기 위해 애쓰면서부터 성격에 대한 집착이 생겨나고, 그 집착에서 ‘내 성격’ ‘네 성격’이라는 구분이 생겨난 것이지, 본래 정해진 성격이란 없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내 성격’이라는 것도 정해진 어떤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해가는 과정 중의 한 모습일 뿐이다. 그러니 어떻게 성격을 가지고 나라고 할 수 있겠는가. 좋았을 때의 성격을 내 성격이라고 할 것인가, 나빴을 때의 성격을 내 성격이라고 할 것인가. 인연 따라 성격도 끊임없이 변할 뿐이지 정해진 성격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사람을 성격의 좋고 나쁨으로 판단해 좋아하거나 싫어한다는 것 또한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그 또한 제법무아를 모르는 어리석은 행이다.
그렇다면 내가 느끼고 있는 감정이나 느낌은 실체적인 것일까.
그것 또한 실체적인 것은 아니다. 슬픔, 기쁨, 우울, 질투, 들뜸, 아픔, 증오, 행복 등의 감정 또한 실체가 아니다. 인연 따라 수많은 감정들이 일어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할 뿐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사랑’의 감정이 생겼다가, 그 사랑이 이루어지면 ‘행복’의 감정이, 또 그 사랑이 떠나가면 ‘슬픔’, ‘아픔’ 등의 감정으로 바뀌었다가, 그 사랑이 다른 사람에게로 떠나가면 ‘질투’와 ‘증오’로 바뀌고, 그런 아픔에 사로잡혀 머물게 되면 심각한 우울을 경험하기도 하는 것이다.
처음 사랑의 인연이 생기기 전에는 아무런 감정도 느낌도 없었다가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서부터 온갖 풍랑 같은 느낌과 감정을 겪게 되는 것처럼 사람이 느끼는 감정이나 느낌 또한 고정된 실체가 없이 인연 따라 생겼다가 그 인연이 다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지는 것일 뿐이다.
가끔 보면 인연 따라 생긴 괴로움, 아픔, 증오, 우울 등의 감정에 사로잡혀 그 감정이 나를 지배하는 실체적이고도 언제까지고 계속될 감정으로 착각하여 너무 깊이 괴로움에 빠진 나머지 삶을 그르치는 경우도 보게 된다. 심한 우울증에 자살을 하게 된다거나, 증오 때문에 욱 하는 감정을 다스리지 못해 사고를 일으킨다거나 하는 모든 것들이 감정이 실체적인 것으로 착각하는데서 오는 현상들이다. 감정이라는 것 또한 제법무아로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거기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고, 인연 따라 오고 가는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한 발자국 떨어져 객관이 되어 주시할 수 있게 된다.
이처럼 제법무아의 실천은 나에 대한 집착, 견해에 대한 집착, 존재에 대한 집착, 물질에 대한 집착, 소유에 대한 집착, 심지어 감정과 성격과 현실에 대한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도록 이끈다. 그 어떤 것도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떤 것에도 집착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4) 불성은 없다
이렇게 제법무아에서는 모든 존재에 대해 고정된 실체가 없다고 보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제법무아에서 무아는 ‘고정적인 실체로써의 나’ 혹은 ‘본질적인 나’라는 것 또한 없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본질적인 나, 즉 불성(佛性)이나 여래장(如來藏), 참나, 진아(眞我), 대아(大我), 주인공 등도 과연 무아인가 하는 점이다.
보통 불교를 믿는 이들은 중생의 성품을 버리고 부처의 성품을 깨달아야 한다거나, 거짓나를 여의고 참나를 찾아야 한다거나, 불성을 깨닫고 주인공을 찾아야 한다고 배워왔다. 그렇다면 이는 지금까지 배워 온 사실과는 어긋나는 교리가 아닌가.
여기에서 불교를 공부하는 이들이 꼭 이해하고 넘어가야 할 근본법과 방편법의 이해가 대두된다. 즉 본질적인 가르침, 근본법의 가르침의 이해와 방편법에서의 이해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아니, 근본법과 방편법은 언뜻 보기에는 서로 어긋나는 것처럼 보인다. 정 반대의 길을 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존재가 본질적인 근본법에 귀일하도록 하기 위한 수많은 방편들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훗날 중국불교의 교판설에 입각해 본다면, 처음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신 뒤에 3.7일 동안 깨달음의 본질적인 세계를 그대로 직설하셨는데 그것이 너무 심오하고 어려워 이해하는 이가 많지 않아서 뒤에 다시 쉬운 방편의 설법을 하셨다는 대목이 나온다. 방편설은 바로 이러한 부처님의 자비에서 나온 가르침이다. (???)
조금 쉽게 비유를 든다면, 부처님께서는 언제나 근본법인 치우침 없는 중도(中道)를 설하셨지만, 유(有)에 집착하는 이에게는 무(無)를 설하고, 무에 집착하는 이에게는 유를 설함으로써 중도를 잘 실천할 수 있도록 방편을 쓰셨던 것이다. 진리의 산 정상에 오르는 근본법을 부처님은 언제나 설하시지만, 남쪽에 사는 이에게는 북쪽으로 올라가라고 해야 하고, 북쪽에 사는 이에게는 남쪽으로 올라가라고 해야 하는 것처럼 부처님께서는 근본법으로 가기 위한 수많은 설법에서 중생들의 근기와 여건에 맞춰 수많은 방편을 설하신 것이다.
제법무아의 가르침은 변할 수 없는 근본법의 진리이다. 그러나 근기가 낮은 중생들은 무언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을 찾게 마련이다. 무언가 본질적인 존재, 궁극의 존재에 의지함으로써 좀 더 쉽게 진리의 산에 오르고 싶어 한다. 그랬을 때 부처님께서 ‘아니다. 쉬운 길은 없다. 어려우면 포기해라.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는 사람만 나를 따르면 된다’고 했다면, 소수의 몇몇 수행자만이 깨달음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머지 많은 중생들은 무언가 의지할 것은 찾는다. 이 때 후대의 대승경전에서는 자비로운 방편으로 ‘그래 부처님께 의지해라. 일체 중생에게는 모두 불성이 있다. 네게도 불성이 있으니 네 안에 있는 불성에 의지해라. 네가 바로 부처다’라고 함으로써 많은 중생들에게 좀 더 쉽게 믿고 의지하며 다가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그러나 이런 가르침은 어디까지나 방편법임을 알아야 한다. 부처님 열반 후에 이런 가르침이 어디까지나 방편이었음을 망각하고 부파불교에서는 삼세실유(三世實有)라는 사상으로까지 정립되기에 이름으로써 다시금 대승불교에서는 부처님의 본질적인 가르침은 근본법으로의 회귀를 주장하며 삿된 가르침[실유]을 파하고 바른 것[무아, 공]을 드러낸다는 파사현정(破邪顯正)의 기치로써 공사상을 주창하기에 이른다.
그러면 도대체 불성이나 진아라는 말은 어떻게 나온 말일까.
이러한 방편을 쓸지라도 그에 합당한 논리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일체 모든 것은 무아라고 했다. 예를 들어 한 50%는 무아이고 나머지 50% 정도가 진아라거나, 99%는 무아이고 1%가 진아라고 한다면 무아와 진아의 구분은 엄밀해진다. 그런데 제법무아에서 말하는 제법은 100%를 말한다. 하나도 남김없이 100% 모든 것이 전부 다 무아라는 말이다.
이처럼 온 우주법계의 100%가 전부 순전히 무아라면 거기에 억지로 무아라는 이름을 붙일 이유가 없다. 다시 말해 100% 완전히 ‘무아’인 것은 100% 완전 ‘아’이기도 한 것이다. (???)
좀 더 풀어서 말하면, 우주 법계 전체에 고정된 실체가 하나도 없기 때문에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그 사실을 진리라고 하고, 그러한 진리가 머무는[법주] 곳을 법계라고 하며, 그러한 법주법계 전체는 그야말로 진리의 세계이고, 참의 세계이므로, 그것을 이름하여 진여, 참나, 자성청정심, 대아, 주인공, 불성이라고 이름 붙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
그런 의미에서 진여, 자성, 참나, 불성이라는 용어와 방편의 가르침이 나왔지만, 어디까지나 이것은 오해의 소지를 안게 된다. 사람들은 여전히 또 다른 실체적인 불성이나 진여나 참나를 떠올릴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것은 방편을 벗어나 외도의 길로 빠져들게 된다. 그러니 불성이라는 용어 또한 내 안에 어떤 불성이라는 고정된 실체가 있어서 그 불성을 발현시켜 내거나, 일깨우거나, 숨어있던 것을 튀어나오게 하는 개념으로 수행을 이해해서는 안 되며, 연기법과 무상, 무아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가능성으로써 이해되어져야 한다.
불교의 근본 가르침은 어디까지나 무아법이다.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본질적인 실체는 없다. 그것이 부처가 되었든, 열반이 되었든, 불성이 되었든, 여래장이나 진여가 되었든 그 어떤 것도 본질적인 실체라고 할 수는 없다. 부처며 열반이란 언어는 사실 언어를 초월하는 개념이다. 그렇기에 부처나 열반에 본질적인 실체라거나, 고정된 실체라는 수식을 붙이는 순간 부처나 열반은 사라지고 만다.
그러니 방편으로 불성이나 진여본성이나 주인공이나 일심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고 할지라도 거기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그것을 고정된 실체로 보거나, 어떤 실질적인 자아로 보는 순간 우리는 진리를 버리고 외도를 추종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불교의 어려움이 있다.
어떤 경전에서는 방편법을 또 어떤 경전에서는 근본법을 설하며, 어떤 스님께서는 주로 방편법을 또 어떤 스님께서는 주로 근본법을 설하다 보니 이해하기가 쉽지가 않다.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은 근본법에 대해 중심을 두고 방편법에 대해 이해할 수 있어야 하며, 방편법을 실천할 때에도 그 중심에는 근본법의 정신이 오롯하게 서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와 같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일체 모든 것들은 전부가 실체적인 자아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다만 인연 따라 잠시 모임으로써 그러한 모습으로 나타났을 뿐이다. 언젠가 그 모든 것은 사라지고 말 것이며, 지금 이 순간도 끊임없이 변화해 가고 있다. 이처럼 ‘일체 모든 것’들이 고정된 실체가 없으며, 무아라면 그 어떤 것에 집착할 수가 있을까. 내가 집착할 수 있는 일체 모든 대상들은 전부 무아이며, 고정된 실체가 없다. 그것이 ‘내 것’이라고 아무리 이름을 써 놓고 고집을 부려 봐야 어디에도 영원한 ‘내 것’은 없다. 내가 없을진데 내가 소유하는 것이야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삶의 모습을 살펴보면, 끝끝내 집착을 포기하지 못하며, 애욕과 욕심의 충족만이 살 길인 양, 돈과 재산과 소유를 늘리는 것만이 내 생에 가장 큰 목표인 양 아집을 버리지 못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가만히 세상 사람들의, 또 나 자신의 삶의 방식을 살펴보라. 삶의 원동력이 무엇인지 살펴보라. 어떤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가. 그것은 단 한 가지 아상(我相) 때문이요, 아집을 충족시키기 위함이다. 나를 위해, 내 소유를 늘리기 위해, 내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고되고 치열한 삶을 살아내고 있는가.
우리가 집착하고 욕심부리며, 아등바등거리고 잘 살아보겠다고 기를 쓰고 사는 그 모든 이유의 중심에 ‘나’가 있다[我相]. ‘나’에 대한 집착이 있다.[我執] 나를 위해 그렇게 애쓰고 살아왔다. 내 명예, 내 권력, 내 지위, 내 돈, 내 집, 내 차, 내 사람, 내 사랑, 내 자식, 내 가족, 내 나라, 내 회사, 내 소유, 내 생각, 심지어 나의 깨달음을 위해 우리는 이렇게 눈물겨운 삶을 살아내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이 무슨 날벼락 같은 소리인가. 내가 없다니. 제법무아, 나라는 존재의 실체가 없다니. 무아라는 가르침은 인류 역사, 인류의 정신사 속에서 가장 충격적이며 파격적인 가르침이다. ‘나’를 믿고 의지하며 나 하나 잘 되 보겠다고 살아왔던 모든 이들에게 죽음과도 같은 좌절을 안겨 주었다.
그러나 과연 이 사실이 우리에게 좌절을 의미하는 것일까. 공허감, 무력감, 허무주의 같은 슬픔만을 가져오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어리석고 얕은 사유 속에 헤매는 이들에게 이것은 일견 죽음과 비견되는 아픔을 가져다줄지 모른다. 그러나 조금만 깊이 사유해 본다면 제법무아의 가르침이야말로 우리에게 얼마나 큰 평안과 행복과 자유를 가져다주는지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무아이기 때문에, 내가 없기 때문에 내가 살아갈 이유도 없고, 내가 돈을 벌어야 할 이유도 없으며, 내가 사랑을 하고, 삶을 살아가며, 내가 일에 대한 성취를 하고, 내가 지고의 깨달음을 얻을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무아의 단편만을 본 단견(短見)에 불과하다. 무아이기 때문에 우리 삶은 어디에도 걸림이 없으며, 자유롭다. 내가 있다고 하면 나와 비견되는 상대가 있게 마련이고, 그것은 나와 상대의 차별을 가져온다.
상대방보다 우월하거나 열등하다는 차별에서 행과 불행이 생겨난다. 아무리 내가 잘나고 업적을 성취하고, 돈을 많이 벌고, 높은 자리에 오르더라도 역시 나보다 더 높은, 나보다 더 많이 가진, 내가 부러워할 만한 상대는 끝도 없이 널려 있다. 아무리 소유를 늘리고 권력과 지위를 높일지라도 나는 여전히 불만족스럽다.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이 있는 한 내 욕망은 충족되지 않는다.
설령 경제력에서 세계 1위의 자리를 차지했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의 행복이 1등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 사람은 정치가를 부러워할 지도 모르고, 혹은 발우 하나에 걸망 하나 짊어지고 어디로든 떠날 수 있는 자유로운 수행자를 부러워할 지도 모른다. 내가 있고, 내 소유가 있는 이상, 아상이 있는 이상 우리의 행복은 영원토록 실현 불가능하다.
나와 너라는 나뉨이 모든 불평등을 가져오고, 모든 폭력을 가져오며, 행과 불행을 가져오고, 일체 모든 다툼과 불만족과 탐심과 진심과 치심을 가져온다. 나와 너가 나뉘어 있는 이상 한 쪽이 옳고 다른 한 쪽은 그르며, 한 쪽은 좋고 다른 한 쪽은 나쁘며, 한 쪽은 부유하고 다른 한 쪽은 가난하고, 한 쪽은 진실하며 다른 한 쪽은 거짓이고, 한 쪽은 행복하며 다른 한 쪽은 불행할 수밖에 없다.
언제까지고 한 쪽은 다른 한 쪽을 부러워하고 질투한다. 나아가 이 종교는 진리이고 다른 종교는 거짓이며, 우리 나라는 옳고 다른 나라는 그르며, 내 편은 좋고 상대 편은 나쁘다. 거기에서 종교간의 갈등과 전쟁도 있고, 나라와 나라 사이의 전쟁도 있다. 또한 나뉨 속에서 탐심과 진심과 치심이 생겨난다. 내 것이 부족한 것 같으니 상대의 것을 탐낼 수밖에 없고, 나는 옳은데 상대는 나의 옳은 점을 인정해주지 않고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데서 성내는 마음, 진심이 일어난다. 이 모든 나뉨과 분별과 ‘나다’하는 아상이 바로 치심, 즉 어리석음이다.
이처럼 모든 다툼은 이쪽과 저쪽을 나뉘는 데서 생겨난다. 이쪽과 저쪽을 나뉘는 그 근본 바탕에 ‘나다’하는 아상이 있다. 아상이야말로 모든 다툼과 탐진치 삼독의 뿌리요, 행복과 평화와 평안과 자유와 열반에서 멀어지게 지름길이다. 나다 하는 아상을 버리고, 제법무아를 깨닫는 순간 우리의 삶은 나뉨과 다툼과 분열과 전쟁에서 놓여난다. 아집과 분노와 소유욕과 고집과 어리석음에서 벗어난다.
이처럼 제법무아는 우리의 삶을 다툼이 없는 완전한 평화로 이끈다.
그러면 제법무아의 실천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나’를 버리는 것이다. 나를 버리는 것은 나를 고집하지 않는 것이며, 내 것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고, 내 생각만이 옳다는 고집을 버리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이 바로 불교에서 끊임없이 무소유, 무집착, 무소득, 무분별, 무아를 설하는 이유다.
집착을 놓아라, 방하착하라, 욕망을 버리라, 소유를 최소화하고 만족을 늘리라, 본래 얻을 바가 없음을 알라, 분별하지 말라, 아집을 놓아라, 아상을 버려라, 편견과 선입견을 버려라, 번뇌를 놓아라 하는 이 모든 실천적 가르침의 원동력이자 근거가 바로 제법무아이다.
그야말로 제법무아는 일체 모든 것을 놓고 비우도록 이끈다. 놓고 비웠을 때 본래 텅 빈 공의 진리가, 연기의 진리가 꽃피어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놓아지는가. 놓고 비우고 싶지만 도저히 놓아지지도 비워지지도 않는데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무아를 이론적으로만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깨닫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바로 있는 그대로 관(觀)해야 한다. 현실을 치우침 없이, 사견 없이, 판단 없이, 분별 없이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지켜보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뒤에서 설하게 될 팔정도의 정념(正念)이요, 그러한 치우침 없는 관찰에서 나오는 바른 견해가 정견(正見)이다. 관 수행에 대해서는 뒤에 사성제와 팔정도, 사념처에서 좀 더 다루기로 한다.
이 두 가지, 제법무아에서 오는 비움과 관찰의 실천이 바로 지관(止觀)이요, 정혜(定慧)다. 지(止)는 애욕을 그치고, 집착을 멈추며, 분별을 놓아버리고, 아집과 아상을 비우는 ‘비움’과 ‘놓음’, ‘그침’의 수행이요, 관(觀)은 분별 없는 알아차림, 관찰, 깨어있음의 수행이다. 뒤에 계속해서 나오겠지만 이 두 가지 수행법이야말로 불교가 불교일 수 있도록 해 주는 정법의 기준이요, 수행의 핵심이다.
불교의 근거가 되며 진리의 법인이 되는 삼법인을 토대로 나온 실천적인 가르침이 바로 지관이기 때문에, 지관 수행이야말로 불교 수행의 핵심이요, 그것이 불교 수행법인지 아닌지를, 정법 수행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는 준거가 되는 것이기도 하다. 다시말해 모든 수행에 지관이 함께 하면 그것은 바른 정법의 수행이지만, 지관 수행이 함께 하지 않는 수행법이 있다면 그것은 외도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4. 열반적정(涅槃寂靜)
(1) 사법인의 관계 - 일체개고와 열반적정의 관계
이상에서 삼법인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상에서 살펴본 제행무상과 제법무아는 모든 존재에 대한, 나아가 이 우주에 대한 기본적인 통찰이요 특성임을 알았다. 무상과 무아를 벗어나는 것은 이 우주 어디에도 없다. 무상과 무아야말로 수레의 양 바퀴와도 같은 ‘법의 도장’ ‘진리의 도장’, 법인(法印)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행무상과 제법무아를 삼법인에서 제외시키는 경우는 없지만, 세 번째 법인이 무엇이냐 하는 점에서는 엇갈리곤 한다. 많은 책들이나 스님이나 교수님들께서도 삼법인을 설할 때 때로는 일체개고를 또 때로는 열반적정을 말하곤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맞는가. 보통은 열반적정을 빼놓아서는 안 된다고 한다. 그러나 열반적정을 넣자니 일체개고 또한 빠질 수 없는 법인이라 삼법인을 넘어 사법인(四法印)을 설하게 된 것이다.
그러면 과연 이 두 가지, 열반적정과 일체개고는 어떤 관계인가?
결론적으로 말하면 무상과 무아라는 두 가지 법인에 대한 깨달음과 통찰의 유무에 의해 나뉜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앞에서 설명한 두 가지 법인인 무상과 무아에 대해 무지하다. 그렇기 때문에 무상과 무아인 대상에 집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수행과 통찰을 통해 무상과 무아를 분명히 깨달아 알 수도 있다. 다시말해 무상과 무아라는 법인에 대해 우리가 분명한 깨달음을 가질 수도 있고, 깨닫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다음의 두 가지 법인이 나뉜다. 무상과 무아라는 진리를 깨닫지 못한 중생들은 모든 대상에 집착하고, 집착하기 때문에 괴로움이 생겨난다.
이렇듯 무상과 무아를 깨닫지 못한 중생들에게는 이 세상이 곧 ‘일체개고’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무상과 무아를 분명히 깨달아 안 사람은 더 이상 그 어떤 대상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그것이 집착할 만 한 것이 아니라 항상 하지 않고 고정된 실체가 아니란 것을 알기 때문에 그 어떤 것들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그는 이제 모든 속박, 구속, 번뇌, 집착, 욕망으로부터 자유롭다. 바로 이렇게 무상과 무아를 바로 깨달아 모든 욕망과 번뇌, 구속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고요한 적정(寂靜)의 상태인 열반(涅槃)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즉 무상과 무아를 바로 깨달아 안 이들에게 이 세상은 곧 ‘열반적정’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이처럼 일체개고와 열반적정은 서로 다른 특성이라기 보다는, 앞의 두 가지 법인인 무상과 무아에 대한 바른 이해와 깨달음의 유무와 관련된 법인인 것이다. 무상과 무아를 깨닫지 못했을 때는 일체개고일 수밖에 없고, 무상과 무아를 완전히 깨달았을 때 열반적정의 특성이 드러나는 것이다. 즉 무상과 무아를 체득하지 못한 이에게 이 세상은 일체개고이지만, 무상과 무아를 체득하면 곧 열반적정이 드러난다.
이런 점에서 삼법인만을 설한다면 일체개고 보다는 열반적정을 넣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중생세간의 특성만을 살핀다면 일체개고가 들어가야 하겠지만, 세간과 출세간의 특성을 두루 살핀 가르침이라면 마땅히 열반적정이 들어가야 옳을 것이다.
(2) 삼독의 소멸이 열반이다
열반이란 무상과 무아를 완전히 체득한 경지다. 그런데 앞서 삼법인은 연기법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했고, 이 세상 모든 것은 연기된 존재이기 때문에 그로인해 삼법인의 특성이 나타난다고 했다. 즉 연기되어진 모든 것은 곧 삼법인의 특성을 가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말해 열반이란 무상과 무아를 완전히 체득한 경지이면서 동시에 연기법을 완전히 체득한 경지를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연기와 무상과 무아를 깨닫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 세상은 끊임없이 인연 따라 변화하는 비실체적인 것들의 모임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나도 내 밖의 모든 대상들도 모두 텅 비어 있으며, 실체가 없이 인연 따라 일어났다 사라질 뿐이다. 그러나 우리 눈에는 그것이 실체하는 것처럼 보이고, 항상 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당장에 세상은 그렇다 치더라도, 이렇게 살아 숨쉬며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며 말하는 생생한 ‘나’라는 존재가 있지 않은가.
그러나 연기와 삼법인의 가르침에서는 그 모든 것이 무아라고 말한다. 그 어떤 것도 고정된 실체가 없다. 다만 인연 따라 연기하면서 변화할 뿐. 사실 우리는 ‘나’라는 어떤 고정적인 실체가 있다고 생각하니까 ‘나’에 집착하고, ‘내 것’에 집착하며, ‘내 생각’에 집착하는 등 끊임없는 아상(我相)과 아집(我執)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아닌가. ‘나’라는 상을 내세우고 집착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문제의 시작이다.
아상과 아집은 모든 번뇌의 근본인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을 가져온다.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세 가지 독소를 우리에게 가져온다. ‘나’와 ‘내 것’, ‘내 생각’에 집착하기 때문에 탐욕과 집착이 생겨난다. 내 것을 더 많이 늘리려 하고, 쌓아나가려 하는 탐심이 생겨난다. 또한 모든 것을 내 맘대로 하고 싶어하는 생각과 견해에 대한 탐심도 늘어난다. 뿐만아니라 내 것으로 소유하고 싶지만 그렇게 되지 않을 때, 내 생각대로 하고 싶지만 그렇게 되지 않을 때, 나에게 누군가가 욕을 하거나 비난을 할 때도 내 안에서는 불길처럼 화가 들끓는다. 이처럼 아상과 아집이 있을 때 우리 안에서는 진심(嗔心)이라는 화와 성냄이 일어난다. 이처럼 무아를 모르는데서 아상이 생겨나는데 이렇게 실체적인 자아가 없다는 무아의 이치를 모르고 ‘나’, ‘내 소유’, ‘내 생각’ 등이 있다고 고집하는 그것이 바로 치심(癡心) 즉 무지(無智)이다.
이렇게 연기와 무상과 무아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어리석은 치심이 일어나고, 치심은 곧 탐심과 진심을 가져온다. 이렇게 탐진치 삼독이 생겨나고 이렇게 생겨난 삼독은 더욱 더 우리를 옳아매며, 구속하고, 괴롭히는 것이다. 우리 삶의 모든 문제를 살펴보라. 탐진치 삼독에서 비롯되지 않은 것은 없다. 모든 문제며, 괴로움이며, 아픔이며, 슬픔들은 모두 탐진치 삼독이 원인이 되어 일어난다. 그리고 그 탐진치 삼독의 원인은 바로 연기와 무상과 무아에 대한 무지이다. 그래서 『상응부경전』에서는 말하고 있다. “탐심의 소멸, 진심의 소멸, 치심의 소멸, 이것을 열반이라고 한다”
(3) 열반적정의 의미
열반적정은 열반이 적정하다는 뜻으로, 열반은 적정과 동의어다. 열반은 니르바나(Nirvana)라는 말을 음역(音譯)한 것으로 타오르던 불길을 ‘확 불어서 꺼뜨린 상태’ 를 의미한다.
우리 중생들에게는 끊임없이 내면에 탐진치 삼독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다. 탐욕의 불길이 끊이지 않고 활활 타오르고 있으며, 조금만 참지 못할 일이 생겨도 성냄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며, 그 근본에는 어리석음이라는 무지의 불길이 불같이 타오르고 있다. 우리 인생 전체를 놓고 보더라도 이 불길은 끊임없이 타오를 지언정 단 한 순간도 꺼지지 않고 있다. 이 탐진치 삼독의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일시에 ‘확 불어서 꺼뜨린 상태’가 바로 열반적정의 상태다.
연기법과 무상과 무아를 깨달아 모든 탐욕이 사라지고, 성냄이 사라지고, 어리석음이 사라진다면 그 상태는 과연 어떤 것일까. 그 곳에는 지고의 안온과 평화와 고요가 저절로 피어난다. 다툼이 없는 완전한 무쟁(無爭), 분별이 없는 완전한 고요, 나뉨이 없는 완전한 평화의 상태가 될 것이다. 이처럼 아무런 괴로움도 없고, 투쟁도 없고, 분별도 없는 완전한 고요의 상태, 이것을 ‘적정(寂靜)’ 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열반적정의 상태다.
(4) ‘비움’으로 내 안의 열반을 일깨우라
현실세계는 여전히 괴롭다. 일체개고다. 그러나 이상세계의 모습은 열반적정이다. 아직 깨닫지 못한 중생에게 열반은 너무나도 멀다. 열반은 다른 고차원적인 사람들 얘기고, 치열하게 정진하는 스님들 이야기며, 나와는 전혀 상관 없는 뜬구름 잡는 것이 되어 버린다. 실제로 그래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깨달음을 포기하고 있는가. ‘적당히 복이나 짓고, 기도나 해야지 내가 어떻게 깨달음을 얻겠어? 열반이라는 말은 너무 거창하고 나에게는 너무 멀어’ 라고 말하고 있지는 않은가.
과연 그러한가. 열반이 그렇게 우리와는 먼 어떤 이상향이기만 한 것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포기해야만 하는 그런 특별한 근기의 수행자에게만 열려 있는 좁은 문이기만 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고맙게도 그렇지 않다.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을 얻고 보니 구제해야 할 중생이 없다고 하셨다. 이미 우리 모두는 깨달아 있다는 것이다. 이미 우리는 완전하며, 세상도 완전하다. 이미 우리는 부처요, 열반의 숲을 거닐고 있다. 이미 우리는 완전한 생명을 부여받았고, 완전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 누구도 완전한 평화, 완전한 고요, 완전한 행복을 부여받지 않은 사람은 없다. 수행을 해서 깨닫고 난 다음 얘기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우린 누구나 완전한 부처요,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이다. 이 말이 어떻게 들리는가. 도대체 이해되지 않거나,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손사레를 칠지 모른다. 우리는 여전히 불행하고 괴롭지 않은가. 그런데 어찌 이미 깨달아 있다고, 이미 열반적정 속에 살고 있다고 말한단 말인가. 이제 그 의문을 차근 차근 풀어보자.
열반이란 쉬운 말로 표현하면 ‘완전한 행복’ 정도로 표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런 행복은 어디에 있는가. 행복이란 어떤 상태를 말하는가? 돈이 많고, 집도 있고, 차도 있고, 높은 지위에, 수많은 온갖 소유물들이 넘쳐나는 그 상태를 행복이라고 할 수 있을까? 혹은 아무 일도 안 해도 먹고 살 수 있는 충분한 재산이 있는 상태를 행복 혹은 열반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세계 제일가는 부자일지라도, 세계 제일의 권력자라고 할지라도 그 사람이 행복한가? 그 사람이 열반이라는 큰 고요의 적정 속에 있는가는 별개의 문제다. 오히려 산 속에서 하루 한 끼를 연명하는 수행자에게서 적정을 볼 수도 있고, 부유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의 끼니 걱정 없이 농사짓고 사는 농부 가족의 단란함 속에서 행복을 찾을 수도 있다. 즉, 행복이란 외부적인 조건이나 어떤 특정한 상황 속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다. 똑같이 연봉 3,000만원을 받는 근로자일지라도 어떤 사람은 그 속에서 행복을 누리고, 어떤 사람은 그 속에서 불행을 느낀다.
선방이나 수련원에서 정진하는 수행자에게 선방은 적정과 고요를 가져다 주기에는 더없이 좋은 조건이다. 그러나 수행에는 관심도 없는 사람이 끌려가듯 선방에 들어가 앉았다고 생각해 보라. 차라리 중노동을 할 지언정 하루 종일 한 두끼밖에 안 먹으면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만 있으라는 것이 바로 생지옥이 아니고 무엇이랴. 같은 조건에서도 어떤 사람은 행복을 느끼고 어떤 사람은 불행을 느끼는 것이다. 그렇다면 행복이란 어떤 특정한 조건이나 상황 속에 있는 것이 아님이 보다 분명해졌다.
그러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것은 어디에도 있다. 어떤 특정한 상황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도 있다. 그렇기에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깨달음을 얻은 이는 지고의 안온과 평화를 느끼지만, 그렇지 못한 이는 아무리 좋은 조건 속에서도 불행과 괴로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어떤 조건 속에 행복과 적정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 속에 행복이 깃들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그 말은 다시 말하면 어디에도 행복은 있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불성은 어디에도 있으며, 다만 우리가 발견하지 못할 뿐이라고 하셨다. 열반, 적정, 행복, 평화는 이미 주어져 있다. 모든 상황 속에, 모든 조건 속에, 이 세상 어느 곳에도 완전한 행복은 갖추어져 있다.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그것을 깨달을 것인가에 있다. 행복을 누리지 못하던 마음 상태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마음 상태로 바꾸느냐에 있다. 열반적정이라는 완전한 행복을 보지 못하도록 막는 내 마음의 어떤 요소를 제거함으로써 지금 이 자리에서 열반적정을 경험하고 누리며 만끽할 수 있다. 행복은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누리고 만끽해야 하는 것이다. 저 멀리 있는 깨달음을, 행복을 얻고자 애쓰고 노력하면서 추구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열반을 누리고 만끽하면 된다.
그러면 이제 어느 정도 준비 작업이 마무리 되었다. 열반은 어디에도 있지만 우리가 그것을 보지 못할 뿐이라는 대 전제를 깔아 놓자. 이 열반의 특성은 비움, 텅 빔, 공성(空性)이다. 앞에서 열반은 무상과 무아와 연기를 깨닫는 지혜라고 했다. 즉 이 세상 모든 것은 항상 하지 않고 실체가 없으며 다만 인연 따라 잠시 꿈처럼, 환영처럼, 신기루처럼 오고 갈 뿐이라는 뜻이다. 그 말은 다시말해 이 세상에는 실체적인 그 어떤 것도 없으며, 텅 비어 있고, 공(空)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세상은 본래 텅 비어 있다. 본질에서 본다면, 진리의 관점에서 본다면 텅 비어 있다. 지혜의 관점, 부처님의 관점에서 본다면 텅 비어 있다.
그러나 어리석은 우리 중생의 관점에서 본다면 비어 있지 않다. 나도 있고, 남도 있고, 물질도 있고, 소유도 있으며, 모든 것이 우리 눈에 실체로써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본래는 텅 비어 있던 세상이 우리 중생의 눈에는 왜곡되어 실체하는 것처럼 보이는데서 모든 문제는 시작된다. 실체하는 것처럼 보이니까 거기에 집착을 하고 탐욕을 부리며, 계산하고 따져서 어떻게 하면 나에게 이익이 될까를 생각하고, 이기심을 충족시켜 나가며, 소유와 지식을 늘려 나가고 있지 않는가.
실체하는 것들을 내 것으로 만들려면 온갖 지식과 욕심이 필요하다. 그래서 현대사회에서는 끊임없이 배우고 또 배워서 남들보다 앞서가야 한다고 말하고, 더 많이 배워야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고 앞서갈 수 있다고 말하며, 무엇보다도 성공해야 한다는 강한 집념과 용기를 가지고 남들보다 앞서가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남들을 짓밟고 일어나는 것이 곧 성공이며, 남들과 함께 가는 것보다는 남들을 앞서가기 위한 온갖 지식들로 무장하도록 쇠뇌당하고 있다. 전혀 그것이 잘못된 쇠뇌인지도 모르면서. 이처럼 지식과 욕심을 찬양하는 사회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그러나 사실 본 바탕의 진리에는 비어있음과 공이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진리에 이를 수 있는지 답이 보이기 시작한다. 나 자신을 끊임없이 비워야 한다. 공에 가깝도록 비우고 또 비우는 작업을 해야 한다. 비웠을 때 열반이 가까워진다. 비웠을 때 내면 깊은 곳의 무한한 지혜의 가르침이 들려온다. 마음을 공의 상태로 돌려 놓았을 때 내면 깊은 곳에 잠자고 있던 불성(佛性)이 깨어난다. 삶을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내면의 부처님의 가르침들이 비로소 들려오기 시작한다.
사실 내 안 깊은 곳에서는 언제나 진리의 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내가 곧 부처이기 때문에, 사실은 지금 이 순간이 열반의 자리이기 때문에, 언제나 진리는 끊임없이 울려 퍼지고 있다. 다만 우리가 듣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면 왜 우리는 그 진리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가? 그것은 우리 안에 꽉 들어 찬 것이 많기 때문이다. 우리 내면이 온갖 욕심과 집착과 성냄과 무지와 생각과 번뇌와 아상과 이기로 꽉 차 있기 때문이다. 저 내면 깊은 곳에서 부처님의 맑은 음성이 들려오지만 그 위에는 더 많은 쓰레기 같은 것들이 복잡하게 채워져 있으면서 소리치고 아우성치기 때문에 진리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진리의 소식을 들을 수 있는가. 어떻게 해야 우리 내면의 불성을 일깨울 수 있는가. 어떻게 해야 열반적정이 우리 삶에서 드러나게 할 수 있는가. 어떻게 해야 완전한 행복에 이를 수 있는가. 비워야 한다. 내 안에 꽉 차 있는 온갖 것들을 비워내야 한다. 말끔히 청소해야 한다. 정화해야 한다. 집착과 번뇌와 욕심과 아상들을 모조리 치워 버려야 한다. 모두 비워내서 맑은 공(空)이 되도록 해야 한다. 그러면 비로소 내면 깊은 곳에서 들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비로소 불성이 깨어나고, 열반과 적정의 소식이 내면의 뜨락에 가득 찰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어디를 가든, 어떤 삶을 살든, 돈이 많든 적든, 어떤 조건 속에서도 항상 행복할 것이다. 항상 평안과 고요가 깃들게 된다.
(5) 열반에 모든 것을 맡기라
그러나 우리는 안타깝게도 비움의 삶을 살지 못하고 채움의 삶을 살려고 애쓴다. 그렇기에 우리 삶은 더욱 채워짐으로써 조금씩 윤택하고 아름다워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 더 많은 채움을 얻고자 끊임없이 전 속력을 향해 질주하는 삶이 되고 있다. 그 질주는 멈추지 않는다. 빨리 달려야 더 빨리 완전한 채움에 이를 수 있고, 남보다 더 많이 채워 부자가 될 수 있으니까. 그러나 부처님은 말한다. 그 무서운 질주를 멈추고 삶을 바라보라고.
이처럼 우리의 삶은 두 가지의 길이 있다. 비움의 길 혹은 채움의 길. 비움의 길은 진리의 길이며 부처님의 길이요, 채움의 길은 중생의 길이며 무지의 길이다. 부처님께서는 끊임없이 비움에 이르는 길을 우리의 내면에서 설법하고 계신다. 반면에 중생의 마음은 언제나 쌓고 채워나가는 길에 대해서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이 두 가지 길이 언제나 우리 삶에 놓여 있다.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는 전적으로 자신의 판단에 달렸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 기울일 것인가, 아니면 아상과 욕망에 기초한 내 생각과 판단에 귀 기울일 것인가. 그렇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불성의 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마음을 비웠을 때 찾아오는 열반과 적정의 소식은 어떤 방식으로 오는가.
그것은 일종의 직관(直觀)과도 같고, 어떤 영감(靈感)과도 같다. 우리는 직관적인 판단 보다는 생각과 기억과 지식을 조합해서 이끌어내는 판단이 더 정확하며, 더 과학적이고, 더 합리적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직관이나 영감은 도무지 믿을 바가 되지 못하며, 합리적일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 깊은 내면의 불성은 직관이나 영감 같은 방법으로 우리에게 삶의 지침을 매 순간 전달하고 있다.
우리가 더욱 신뢰하고 있는 생각이나 판단이 과연 올바른 것인가 따져보자. 생각이나 판단, 지식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과거에서 온다. 과거에 배워왔거나, 들어왔거나, 익혀왔던 것들을 조합하고 비교 분석함으로써 결론을 낸다. 그 비교 분석의 결론을 더욱 효과적으로 만들기 위해 우리는 온갖 정보와 지식들을 찾고 공부하면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여 더 많은 양의 정보와 지식을 조합하고, 더 많은 사람들을 찾아 가 묻고 배움으로써 인생의 수많은 문제들에 더 효과적이고 과학적인 답변을 내릴 수 있을 것이라 굳게 믿고 있다. 그렇기에 삶을 올바로 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배워야 하고, 지식을 늘려 가야 한다. 시간이 없다. 더 앞서가려면 더 많이 배워야 하고, 더 많은 정보를 머릿속에 꾸겨 넣어야 한다.
그러나 과연 그렇게 내린 결론이 항상 올바른 것일까? 만약 정보와 지식을 조합해서 내린 결론이 항상 올바르다면 많이 배운 교수나 높은 자리에 있는 경험 많은 경영자나 정치가의 결론이야말로 가장 뛰어나고 올바른 결론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가. 같은 문제를 가지고 정치인들은 여당 야당을 나누어 매 순간 다툰다. 서로 옳다고 주장하면서. 서로 더 많은 정보와 전문가를 통한 지식을 쌓았기 때문에 더 올바른 판단일 거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렇게 많은 정보와 지식을 가진 전문가 집단이 모인 정치판에서 야당과 여당의 의견은 언제나 엇갈린다. 그것은 대학 교수도 마찬가지고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한 그 분야의 전문가라도 마찬가지다. 언제나 의견은 엇갈릴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모든 문제는 그것 자체의 옳고 그른 것이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옳은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틀릴 수도 있으며, 나에게는 이 길이 최선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저 길이 최선일 수 있기 때문이다.
직장을 취직하려는 사람이 공무원에게 조언을 구하면 공무원의 길이 얼마나 좋은지를 말해 줄 것이고, 자영업자에게 조언을 구하면 자영업이 얼마나 자유로운 것인지를 말해 줄 것이며, 선생님께 조언을 구하면 선생님의 매력적인 장점을 들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가 그 사람들의 삶의 몫이며, 삶의 길이지 그것이 바로 나에게도 옳은 길인 것은 아니다. 그 사람은 그 사람 나름대로의 ‘자기다운’ 삶의 길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 자신만이 선택할 수 있으며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다.
그러한 자기다운 나 자신의 삶의 몫은 내 안의 깊은 내면의 선택만이 나의 길을 열어보여 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어떻게 나의 길을 다른 사람이 판단해 줄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어떤 길을 가려고 해도, 어떤 사람은 긍정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반대할 것이다. 어떤 직장을 선택하더라도 어떤 사람은 긍정하고 어떤 사람은 반대한다. 모든 사람이 긍정할 수는 없다. 그것은 지식으로, 정보의 조합으로, 기억이나 생각으로 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안의 불성만이, 내 안의 근원적인 자아만이 자기답게 피어난 자신의 길을 가도록 이끌어 줄 수 있다. (???)
생각이나 기억이나 지식은 겉보기에는 그럴싸해 보이지만 사실은 본질적이지 않다. 보다 근원적인 선택은 언제나 지식이나 생각이나 정보의 조합에 있지 않고 우리 내면의 깊은 곳에서 나온다. 다른 그 누구도 그 선택을 대신해 줄 수 없다.
절에 가서 스님들께 인생 문제를 상담해 보라. 사업을 확장해야 할지, 그만 두어야 할지, 혹은 이 직장을 선택해야 할지 저 직장을 선택해야 할지를 물으면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과 기억과 지식에 비춰 어느 한 길이 더 좋다고 조언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불교의 방법은 그렇지 않다. 불교의 방법은 지식과 경험과 기억을 모두 놓아버리도록 이끈다. 지식과 정보를 아무리 조합해도 전적으로 옳은 결론을 내기란 쉽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스님들은 문제를 상담해 올 때 어떤 특정한 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 스스로 그 답을 찾을 수 있도록 내면을 바라보는 방법을 알려 줄 뿐이다. 답은 스님이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만이 답을 내릴 수 있다. 스님들은 단지 그 방법을 알려줄 뿐이다. 그 모든 지식과 기억과 경험을 놓아버리고 내면 깊은 곳에서 나오는 자기만의 답변을 들을 수 있도록 이끌어 준다.
언젠가 한 사람이 찾아와 취직을 하려고 하는데, 두 곳에서 오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도저히 어느 한쪽을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이다. 몇 날 며칠을 생각하고 따져보고, 사람들 의견도 들어보고, 온갖 정보를 취합해 보았지만 도저히 결론이 나지 않는다고 하면서 어느 곳을 갔으면 좋겠느냐고 물어왔다. 당연히 결론이 나지 않는다. 그 비슷한 두 직장 가운데 어느 직장이 좋은지는 보는 견해에 따라, 취향에 따라, 사람에 따라 얼마나 다를 수밖에 없는가. 이 직장은 이것이 장점이지만 또 다른 점이 부족하고, 다른 직장 역시 하나는 좋지만 다른 하나는 부족하다. 그래서 이렇게 말해 주었다.
“지금까지 수없이 생각하고 판단하고 비교 분석해 왔지만 결론이 나지 않았다면 이제 그 모든 지식과 판단과 분별을 다 놓아버려라. 어차피 그것들은 근원적이지 않다. 그것은 지식으로 경험으로 정보로 답을 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의 내면에서 무엇을 진정으로 원하는지를 듣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려면 지금까지 했던 모든 분별과 지식들을 놓아버려라. 욕심도 비우고 바람도 비우고 좋고 나쁜 모든 판단과 분별도 비워버리고, 오직 내면의 소리를 들어라. 차라리 또 다른 정보를 얻는데 쓸 시간을 비움을 위한 기도와 수행에 힘쓰라. 그리고는 모든 것을 부처님께 맡겨라. 결정해야 할 시간이 다가올지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다만 모든 판단을 비우도록 하라. 그리고 결국 둘 중 하나를 판단해야 할 때가 되었을 때 그 때 생각하지 말고 그냥 마음 가는대로 저질러 발걸음을 옮기라.”
이 얼마나 비과학적인 방법인가. 아니 우리의 기존의 관념으로 보았을 때 이 말은 완전히 엉뚱하게 들린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과학적이고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라는 많은 생각과 지식들이 완전한가? 조금 더 깊이 삶을 유영해 보라. 조금 더 깊이 내면 속으로 직접 뛰어들어 보라. 우리는 언제나 내 안에 불성이 있다고 말하면서 왜 내 안의 붓다와 직접적으로 만나는 것을 꺼려하는가? 우리는 분명 내 안에 깃든 다르마의 소식을 들을 수 있다. 어떤 것이 진리이며, 어떤 것이 바로 지금 이 순간에 필요한 조언이고 판단인지를 다른 그 어떤 사람에게서도 아닌, 바로 나 자신에게, 바로 내 안의 붓다에게 법문처럼 들을 수 있다.
마음을 비웠을 때 비로소 내 안의 진리의 가르침이 피어난다. 텅 빈 공의 마음에서 직관과 영감이 드러난다. 그리고 그 직관은 마음의 표면에 드러난 지식이나 정보나 기억이나 생각이 아니라 더 깊은 불성의 선택이다. 우리는 어떻게 더 많은 지식을 쌓고, 더 많이 생각하고 판단하고 따지느냐에 노력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직관과 영감을 일깨우기 위해, 부처님의 소리를 듣기 위해 마음의 표면에 거추장스럽고 복잡하게 흩어져 있는 모든 기억, 생각, 지식, 욕망, 번뇌, 집착들을 놓아버릴 것인가를 위해 힘써야 한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지식과 기억과 생각에 휩쓸리며 이러저리 갈피를 잡지 못하고 삶의 방향키를 놓치고 산다. 언제까지 그러고 살 것인가. 당장에 본질로 뛰어들어야 한다. 당장에 어리석은 중생의 삶이 아닌 깨어있는 수행자의 삶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그것은 아주 단순하다. 생각과 지식과 욕망과 아상을 놓아버리고, 다만 단순하게 고요하게 느긋하게 여유롭게 삶을 관조하며 살면 된다. 악착같이 성공하려는 생각을 놓아버리고, 어떻게 되든 부처님께서 나를 이끌고 가라는 마음으로 내 안의 근본에 나를 완전히 내맡기고 살라.
열반적정이란 그런 것이다. 열반적정이 있다면, 그리고 그 열반적정의 삶이 내 안에도 있다면 마땅히 그러한 삶을 살아야지, 어리석은 괴로움의 삶, 일체개고의 삶을 살 이유가 없는 것이다. 열반의 삶, 적정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마음을 비우라. 무상의 가르침에 따라 어디에도 집착하지 말라. 무아의 가르침에 따라 아상과 아집을 모두 비우라. 연기의 가르침에 따라 인연 따라 모든 것을 맡기며 살라. 열반적정의 가르침에 따라 열반의 삶에 나를 완전히 내맡기고 가라.
이처럼 깨달음이나 열반은 어떤 높은 곳에 있는 별다른 세계가 아니다. 바로 우리 삶 속에서 구현해 나가야 할 현실의 생생한 모습이다. 마음을 비우면 열반이 드러나고, 마음을 채우면 괴로움이 드러난다. 마음을 비우고 열반의 성품, 깨달음의 성품, 부처의 성품에 모든 것을 내맡기고 자유롭게 주어진 삶을 살라. 내가 산다는 생각을 버리고 내 안의 불성이 살아갈 수 있도록 길을 터 주라. 생각과 지식에 얽매여 살지 말고 직관과 영감이라는 더 깊은 곳의 소리가 내 삶에 피어오를 수 있도록 하라.
참고자료 : * 불교의 핵심교리 논리적 체계(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