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동안 중국선교가 시도되었음에도 만족할 만한 열매를 맺지 못한 가장 중요한 원인은 동기의 불순에 있었다고 생각된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중국선교가 성공하지 못하는 가장 큰 원인도 바로 선교의 동기가 순수하지 못한데 있다. 동기가 바르지 않고는 아무리 유능한 선교사를 파송하고, 탁월한 선교 전략과 방법론이 있어도 중국선교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중국선교사나 후원 교회 목회자들, 이모저모로 중국선교에 참여하는 목회자들을 보면 참담한 생각이 든다. 불순한 선교 동기를 갖고 있기에 효과적인 중국선교의 길이 있음에도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한국교회가 중국선교의 동기를 바꾸지 않는 한 중국선교를 성공적으로 수행할 길은 전혀 없다고 생각한다.
중국선교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불순한 선교동기는 과감히 버리고, 바른 선교동기를 가져야 한다.
1. 버려야 할 불순한 선교 동기 중국선교의 역사에서 불순한 선교 동기가 어떠한 해악과 실패를 가져왔는지를 냉철하게 되돌아보아야 한다.
1) 제국주의적 동기. 아편전쟁과 의화단의 난으로 상징되는 제국주의적 선교 동기는 지금까지도 중국선교의 넘기 힘든 장벽이 되고 있다. 서구 교회가 수 천명의 선교사와 거액의 선교비를 드리고, 153명의 선교사 순교자와 1,192 명의 중국인 순교자를 내고도 미미한 선교의 열매를 맺게 된 근저에는 제국주의적 선교 동기가 또아리를 틀고 있다.
서구제국주의는 서구교회의 중국선교 동기의 순수성과 방법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이론의 근거가 되고 있다. 오늘날도 제국주의의적 선교동기는 종교식민주의의 형태로 지속되고 있다. 종교식민주의적 동기로 선교를 하는 한 중국선교의 미래는 밝지 않다.
1940년 아편전쟁이 발발하자 선교사들은 이를 일대 전기로 생각하였다. 선교사들은 중국통의 자격으로 영국을 대신하여 적극적인 획책을 도모하였다. 1942년 청 정부는 전쟁에 실패한 후 영국과 굴욕적인 남경(南京)조약을 체결하였는데, 이 조약을 기초한 사람은 선교사 모리슨(J. H. Morrison)이었고 조약의 중문 원고는 구츠라프(C. Gutzlaff)에 의해 작성되었다. 영국 런던선교회에서는 ‘한 마음으로 은혜에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송한다’는 결의를 통과시켰다.
미국은 1844년 청 정부를 압박하여 망하(望廈)조약을 체결했고(이 조약에는 미국인이 통상구안에서 예배당을 건축할 수 있는 조항이 포함됨), 프랑스는 황포(黃捕)조약을 체결하였다.(이 조약에는 중국 정부에 예배당 보호의 의무를 강제하였다). 이렇게 함으로 식민주의자가 종교를 이용하여 공개적인 침략 활동에 종사할 수 있는 기초를 다지게 하였다. 1856년 영국과 프랑스는 제 2차 아편 전쟁을 일으켜 청조의 항복을 받아 미국과 러시아와 함께 천진조약(1858년)과 북경조약(1860년)을 체결하였다.
이들 조약은 기초에서부터 체결까지 거의 모두 각국 선교사의 참여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불평등 조약들의 체결로 인하여 선교사들이 중국 각지에서 선교할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하였다. 물론 모든 선교사들이 그 혜택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일부 선교사들은 중국에 대한 그들 본국 정부의 제국주의적 침략을 강력하게 반대했고, 일부는 그러한 침략이 선교 사역에 미치는 나쁜 영향들을 지적하였다.
제국주의적인 침략에 편승하였던 일부 선교사들의 행태는 바로 그들의 선교동기가 제국주의적인 침략에 있었다는 지탄을 면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제국주의적 선교동기는 1920년대의 반 기독교운동을 야기하였고, 중국인들로 하여금 기독교를 제국주의와 동일시하게 의식화시켰던 것이다.
2) 교파의 이식과 확장을 위한 동기. 과거 중국교회는 마치 교파 전시장 같았다. 1900년 의화단 사건 때 61개였던 교단은 1906년에 82개로 증가하였고, 1914년에는 교단이 170개에 선교사 5,978명, 신자는 253,210명이었다. 영국, 미국, 네델란드, 독일, 캐나다, 조선 등에서 선교사를 파송하였고, 교파로는 성공회 4개, 침례회 9개, 공리회(公理會) 4개, 신의회(信義會) 18개, 감리회 8개, 장로회 12개, 내지회(內地會) 12개, 기타종파가 13개 교파 등 70개 교파를 형성하였고, 예수가정, 소군교회, 참예수가정, 기독도화당 등 중국 독립 교회들도 세워졌다.
다양한 교파에서 중국에 선교사를 파송하여 선교한 것을 탓할 수는 없으나 그들이 중국에서 형성한 교파들은 순기능보다는 역기능이 더 많았다. 교파는 대부분 교파가 형성된 국가적 배경을 갖고 있다. 교파의 이식과 확장은 교파를 형성한 국가의 국익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러므로 교파의 이식과 확장은 제국주의적 선교의 변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후 기독교의 모든 교파는 강제로 해산되고 삼자교회로 통합되었다. 중국공산당이 교파를 제국주의의 변형이라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날 중국에 교파의 흔적은 있으나 외형상으로는 교파가 없다.
한국교회가 최근에 중국에 교파와 교단을 이식하려고 한 시도가 있었다. 연변조선족자치주에 조선족교회를 시찰회와 노회로 조직하여 관리한 경우도 있고, 연회와 지방회를 조직하려한 시도도 있었다. 한국교회는 특히 교파와 교단의 이식에 집착하고 있다. 한국교회는 선교비 지원을 앞세워 자기 교파와 교단을 이식하려고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심지어 총회의 선교정책에 교파 이식의 의도가 천명되어 있다. 예장 어느 교단은 <총회선교정책>에서 “본 총회 선교사가 세운 교회가 없는 지역은 본 교단 선교 정책과 그 목적에 부합한 원주민 교회를 설립하여 노회와 총회를 조직한다.”고 천명하고 있으며 동 교단 선교사들은 대부분 선교 현지에서 장로교 총회를 설립한다. 그들은 선교지에서 교파를 형성하는 근거를 사도행전 15장에 나오는 예루살렘 사도회의에서 찾는다. 그러나 예루살렘 사도회의는 선교지 회의라기 보다는 교파 본부와 선교사 사이의 의견 조율회의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어느 성결교 선교부는 각 선교지에 20개 이상의 교회가 설립되면 총회를 구성하도록 하고 있고, 각 선교지에 30개 이상의 교회가 설립되면 신학교를 설립하도록 하고 있다.
한국교회가 중국에 교파를 이식하고 확장하려는 것은 종교 식민주의적 발상이요, 제국주의적 선교의 부활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교파와 교단을 이식하려는 시도를 중국 정부는 물론 중국교회가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중국교회는 단호히 교파를 이식하려는 해외 교회들의 시도를 거부하고 있다.
필자가 교통하고 있는 OO교회가 심각한 재정난에 봉착했을 때 세계에서 단일교회로는 가장 크다는 교회가 속한 오순절 계통 교단의 신학대학교 교수가 방문하여 자기 교단이 되면 필요한 상당액수의 선교비를 매년 후원하겠다고 제의하였다. OO교회 지도자는 고뇌와 기도 끝에 그 제의를 거부하였다. 그 교단이 제공하는 선교비를 받으면 그 교단이 되어야 하고, 그럴 경우 결과가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선교비 때문에 해외 교회가 요구하는대로 교파를 받아들이는 교회도 있으나 그런 교회는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 관찰되고 있다.
하나님이 강권적인 역사로 교파를 무너뜨린 것을 바벨탑을 쌓듯이 왜 세우려 하는가?
3) 교회 정치와 목회에 이용하기 위한 동기. 한국교회 목회자들은 중국선교를 교회 정치와 목회에 이용하려는 유혹을 강하게 받고 있고, 좀체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교회가 중국에 선교사를 파송하고 후원하거나 중국교회를 선교비를 후원함으로 하나님이 교회를 축복하시고 부흥케 해 주시는 것은 귀한 일이다. 그러나 교회 정치에 이용하려 하거나 목회의 활성화를 위해 중국선교를 하는 것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중국선교를 실패하게 만드는 불순한 동기이다. 목회에 활용하기 위해 중국선교에 참여하는 것이 목회에 활력을 줄 수는 있으나 바람직한 중국선교를 제한한다는데 문제의 핵심이 있다.
선교사들이 후원 교회 목회자의 요구에 부응하려고 하면 중국선교는 엉망이 되고 말 것이다. 필자가 아는 어느 목회자는 중국선교를 섬기는 교회의 목회를 활성화하는데 활용하려는 의도가 있어서 후원을 제안하였음에도 중국교회를 연결시켜 줄 수가 없었다. 그 목회자는 한족가정교회에서 훈련시킨 사역자를 소개해주면 교회를 할 수 있는 건물을 매입해 주고 사역자의 생활비와 사역비를 후원해 주고, 1년에 한, 두 차례 교인들과 같이 방문하여 봉사하게 해 달라고 하였다. 그러나 한족가정교회는 그 제안을 거절하였다.
한국교회는 가시적인 결과를 추구하며 성급하게 열매를 요구한다. 한국교회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예배당 건축 등을 할 수밖에 없고, 교인들을 부당한 방법으로 모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정작 힘써야 할 사역은 하지 못하거나 엄두도 못 내게 된다.
2. 바른 동기 바른 선교 동기를 갖고 중국선교에 헌신한 선교사나 교회는 성공적인 사역을 하였다. 바른 동기는 바른 목표를 세우고, 바른 방법을 추구하게 한다.
1) 지상명령에 대한 순종. 중국선교의 동기는 주님의 지상명령(마28:19,20,막16:15,행1:8)에 대한 순종이어야 한다. 주님은 한국교회에 중국선교를 명하셨다. 주님은 중국교회를 들어 회교권 선교와 세계선교의 마무리를 하려고 하신다. 중국선교의 동기는 주님의 의도를 알고, 세계선교를 위한 섭리와 명령에 순종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2) 복음의 빚진 자로서의 보답. 바울은 자신을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복음의 빚진 자로 선교에 헌신하였다.(롬1:14)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 구속의 사랑에 빚진 자이다. 또한 중국을 통하여 복음을 받아들였기에 중국에 복음의 빚진자로서 중국선교에 임해야 한다. 복음에 빚진 자로서 중국선교에 임하면 공치사 할 일도 없고, 중국교회에 군림할 일도 없는 것이다. 복음에 빚진 자는 감사함으로 중국교회를 섬기는 일밖에 없다. 부채의 상환은 채권자의 요구대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교회가 복음에서 중국교회에 빚진자라면 중국교회가 원하는 대로 갚아야 한다. 중국교회가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복음의 빚을 군림하지 말고 섬김으로 갚아 달라는 것이다.
3) “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부르짖음에 대한 응답. 바울은 환상 중에 마게도냐인의 “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부르짖음(행16:9)을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인정하고 마게도냐로 가기를 힘썼다. 중국교회는 한국교회에 “와서 우리를 도우라”고 부르짖고 있다. 우리는 중국교회의 부르짖음을 외면하지 말고 응답해야 한다. 중국선교의 동기가 중국교회의 도와달라는 부르짖음에 응답하는 것일 때 중국교회를 주장하지 않고 섬기는 것이 될 수 있다. 도움을 빙자하여 중국교회를 주장하려 든다면 그것은 제국주의적 선교동기의 또 다른 변형일 것이다. 중국교회를 섬기려는 동기에서 중국선교를 수행할 때 중국선교의 길이 시온의 대로처럼 열릴 것이다.
첫댓글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