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피니즘이란 무엇인가
4. 앞피니즘과 등반성
어느 문화나 그 문화 본래의 성질은,
즉 본질을 지키는 것을 당연한 과제로 삼는다.
음악은 음악성을 문학은 문학성으로 평가한다.
더 나아가 인간은 인간성을 유지하는 것에 가치를 부여하듯
알피니즘도 등반성이라는 본래의 성질이 있다.
그렇다면 등반이 본래 지향하고 있는 것,
등반성은 무엇이며,
그것을 평가하는 기준은 무엇이어야 하나,
산의 높이,
올라간 정상의 수,
등정에 걸리는 시간,
과연 알피니즘의 본질과 경향을
스포츠의 그것처럼 계량화 하여 평가 할 수 있을까.
A, 불확실성(uncertainty)
알피니즘은 산의 불확실성에 대한 도전과
극복을 전제로 한다.
불확실성은 불안전하고 불확실한 상황,
불가항력이고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을 말한다.
소쉬르의 몽블랑 등정이 빛을 발하는 것은
그가 26년간이나 전인미답의 불확실성을 향해
펼친 집념과 열정 때문이다.
오늘날 각종 편의성을 도모해
불확실성을 극소화 시키려는 시도가 늘고 있다.
그러나 탐험에서 온갖 안전장치를 동원하면 할수록
탐험 본래 모습과 가치는 사라지고
종국에는 일종의 도보여행처럼 되고 말듯이,
알피니즘에서 불확실성이 없으면
등반 본래의 모습은 사라진다.
그래서 진정한 등산은
길이 끝나는 곳에서 시작된다는 말이 있다.
기존의 길을 벗어나 불확실 하지만
자기만의 길(방식)을 찾아 오를 때,
진정한 등반의 의미를 찾게 된다는 것을 암시 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등반성은 높이나 개수가 아니라
한 등반가가 극복한
불확실성의 과정을 들여다보아야 알 수 있다.
각종 편의성을 동원해 얻은,
겉으로 들어난 등정의 결과나
올라간 숫자만으로는 등반 성을 평가 할 수는 없다.
열편의 작품을 쓴 소설가가
한 작품을 쓴 소설가보다 무조건 위대하다고 할 수 없다.
그렇듯 여러 개의 봉우리를 올랐다고
무조건 강한 등반가로 평가될 수는 없는 것이다.
단 한 작품이라도 우리를 감동시킨 소설가가 있듯이
한차례의 등반으로도
우리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등반가가 있다.
b. 곤란성(difficulty)
등반가가 산의 다양한 자연조건과 맞서려면
극복해야할 어려움의 정도가 있다.
등반가는 그 곤란성을 극복함으로써 성취감에 젖는다.
그러나 장비와 기술의 발달과 등반 체력의 향상은
과거보다 현저히 그 곤란성의 정도를 떨어트렸다.
에베레스트가 낮아졌다는 말을
오늘날 경량화 된 산소통과 고정로프,
그리고 친절한 셰르파에 이끌려 오르는 사람들이 겪을
곤란성이 과거보다 현저히 떨어졌음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곤란성은 상대적 개념이다.
체력과 기술이 열악한 사람과
경험이 많은 등반가가 경험하게 될 곤란성은
같은 산, 같은 루트를,
같은 시간 속에서도 각기 다르다.
중학생이 초등학교 달리기에서 우승한 것을
자랑삼을 수는 없듯이,
등반가가 산에서 극복한 곤란성을
다른 등반가와 단순 비교 할 수는 없다.
곤란성은 산과 등반가 자신의
일차적인 관계로부터 성립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극도의 불확실성과 곤란성을 극복한
6천미터급 거벽 등반가들이
8천미터급 등정 자들에 비해 저평가되는 현실을
곤란성의 몰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산의 고도는 등반의 어려움을 설명하는데,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다.
고도(Altitude)보다는 산의 불확실성과
곤란성에 솔직하게 맞서는 태도(Attitude)가
등반에서는 더 중요한 것이다.
C. 창의성
하나의 산을 놓고 볼 때,
선택할 수 있는 루트와 올라가는 방법은 무수히 많다.
만약 정상 등정만이 목표라면,
그중 가장 쉬운 한 루트 외에는 선택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알피니즘의 본질이
불확실성과 곤란성의 극복에 있는 한,
새로운 루트와 새로운 방식의 추구는 필연적인 과정인데,
여기서 창의성이 요구된다.
창의성은 등정주의에서
등로주의를 발전시킨 원동력이며,
현대 알피니즘의 등반 영역을 무한히 넓혀준 정신적 토대다.
라인홀드 메스너가 위대한 이유는
그가 단지 높은 산을 여러 개 올랐기 때문이 아니다.
그가 때로는 무산소로,
때로는 단독으로,
때로는 아무도 오르지 않았던 루트로,
산을 오르며,
끊임없이 창조성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정한 등반가는 산이라는 화폭에
자기만의 그림을 그리는 원화의 주인공으로 비유된다.
그것을 똑같이 따라한 다음 등반가의 그림은
제2등이 아니라 모사에 지나지 않는다.
등정주의의 등반가는 언제나 남이 밟은 정상을 오르지만
창조적 등반가는 언제나 자신의 루트로 정상을 오른다.
5. 등정주의와 등로주의
1886년 에드워드 윔퍼 일행에 의해
마터호른(4.478m)이 등정 되면서
알프스의 미답봉은 더 이상 오를 곳이 없어 졌다.
그 무렵 엘버트 프레드릭 머메리(Albert frederick Mummery)가
'의지가 있는 곳에 길이 있다며'
보다 변형된 루트를 찾아 나섰다.
이른바 머메리즘(Mummerism)이 여기서 탄생한다.
등정이라는 결과보다,
오르는 과정을 중시하는 이 사조를
우리는 등로주의라고 부른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상 등정에 집착하는 등반을 꼬집어
등정주의라고 부르게 되었다.
알피니즘의 역사는 한 마디로
등정주의에서 등로주의로의 변천사다.
히말라야에서도 마찬가지다.
1964년 중국의 대규모 원정대에 의해,
마지막 8천미터급 봉우리
시샤팡마(8.027m)마저 초등정 되자.
등반가들은 8미터 고소에서 새 길을 찾아 나선다.
그리하여 안나푸르나 남벽,
에베레스트 남서 벽에 잇따라 새 길이 뚫렸다.
등로주의란 말에서 로는 단지 루트가 아니라
방식의 의미로 발전되어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정,
단독등정,
동계등정 등으로 이어졌다.
이제 등로주의는
단순히 형식의 문제가 아니라 정신의 문제이다.
형식은 등로주의로 표방하고 있지만,
그 정신과 내용은
다분히 등정주의적인 등반은 구분되어야 한다.
소설 촐라체의 작가 박범신씨가 어느 칼럼에 쓴 아래 글은
결과주의에 빠진 우리 산악 계에 시사하다 바가 크다.
"산악인들이 고산에 오르는 방법은 일반적으로 두 가지다.
첫째는 이른바 극지법 등반 으로,
히말라야 같은 큰 산을 등반하기 위해 본거지를 설치하고,
차례로 캠프를 세우면서 정상에 도달하는 방법으로
흔히 등정주의 등반이라고 한다.
극지법 등반은
높은 정상에 오르는 것이 최종적인 목표이므로
그 목표를 위해 방대한 장비와 물자,
그리고 세르파와 같은 많은 전문 인력들이 동원된다.
이 등반에서 가치의 중심은 등반과정에 있는 게 아니라
얼마나 높이 오르는가 하는 최종목표의 높이 서열에 있다.
극단적으로 비유하자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보다 높은 곳을 정복하는 것이
최고의 가치인 등반 방법이다.
힐러리 경이 에베레스트를 정복한 이후,
세계 산악계에서
거의 사라져가고 있는 전근대적 등반방법이다.
두 번째 방법은 알파인 스타일이 있다.
등로주의 등반이라고 명명되기도 하는
알파인 스타일의 등반에서
가치의 중심은 최종 높이가 아니라 등반과정에 있다.
일반적인 코스보다 더 위험한 새로운 코스를 선택해
타인이나 장비의 도움을 최소화해서
오로지 오르는 사람의 고유한 판단과
감각에 의존해 정상을 오르는 실존주의적 등반방법이다.
오늘날 세계 등반계의 추세는
단연코 이 등로주의에 방점이 찍혀있다.
삶의 길이라고 뭐 다르겠는가.
자본주의적 무한 경쟁이 세계를 지배하게 된 세상에서,
우리가 그 경쟁의 게임 속으로 뛰어들 때,
먼저 주체적으로 결정해야 할 것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등정주의 이데올로기로 무장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릴 것 없이
오직 높이의 최고를 겨냥할 것인가,
아니면 남과 상대적으로 경쟁해가는
높이 서열에 대한 목표는 차선으로 미뤄 두고,
그것보다 먼저 주체의 고유성을 쫓아
내가 원하는 봉우리를 찾아
그것을 내 에너지와 판단력에 따라 오르고,
그런 다음 그것을 내 봉우리로 삼는 것에
더 가치를 둘 것인가.
선택은 물론 각자의 몫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 모두가 각개약진으로 뛰고 달렸던,
삶의 산행에서 보편적으로 선택했던 방법은
단연코 극지법, 곧 등정주의 등반 방법이었다.
일단 높이에 따른 정상만을 염두에 두고,
오로지 일등만을 향해 달렸던 이 전 근대적인 등산 방법은,
개발 이데올로기의 강력한 지원을 받으면,
아이로니컬 하게도
조용한 아침의 나라 백성이었던 우리 모두의
가장 보편적인 삶의 방법으로 차용됐다.
이 방법의 삶에선 오직 매출 목표나
직위의 서열 같은 외형적인 가치만이 존중됐고,
그래서 게임의 룰은 무력화되기 일쑤였으며,
자신의 정체성을 전제하기 않기 때문에
높은 산을 올라도 더,
더 높은 봉우리가 보일뿐 만족감에 이르기는 어렵다.
삶이 추구하는 등산은 스포츠와 다르다.
바구니에 공을 집어넣는 숫자의 서열만으로
성공과 실패가 결정된다는 식의 이데올로기는
인간의 다양성과 위대성을 송두리째 부정하거나
한정시키는 결과에 닿을 뿐이다.
어떤 높이에 도달하든지 간에
인간은 내면 가치에 따른 만족감을 수반하지 않는 한,
행복해 지지는 않는다.
중요한 것은 나의 정상이다.
삶에서, 모든 이가 다 에베레스트를 오를 수는 없다.
세계엔 얼마나 봉우리가 많은가,
높든 낮든 상관없이,
내 본원적 지향에 따라 나의 정상을 찾아내는 것이
만족감을 얻는 일차적 관문일 것이고,
그 다음엔 그것을 향한 나만의 길을 찾아내고 오르는 것이
성공으로 가는 이차적 관문일 것이다."
6. 알피니즘은 무상의 행위인가?
오늘날 한국의 고산 등정 자들은
사회로부터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이것은 야구나 축구, 골프선수들이 받고 있는
부러움과는 다른 차원의 관심이다.
스포츠선수에 대한 부러움은 겉에 드러난 것들에 있으나,
등반가에 대한 존경은 인격 내면을 향하고 있다.
고산 등반가들이 이처럼 존경을 받게 된 이유는
어떤 대가나 보상을 요구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인간성 실현을 위해
고난을 마다하지 않는 모습 때문이리라.
이럴 때 일찍이 프랑스의 리오델 테레이가 말한
무상의 행위로서의 알피니즘은 제 빛을 발한다.
한국 등반가들이 세계고봉에서 펼친 활약상은
매스 미디어에 의해 국민들에게 전달되어 왔다.
수없는 피침의 역사를 살아온 한국 사람들에게
때로는 개척정신의 상징으로
때론 민족적 자긍심을 드높인 영웅적 성과로 소개되었다.
어떤 경우는 매스컴의 성공적인 등반 기를 위해
기획되기도 하면서
도전과 극복을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가
관련 산업들과 맞물려 성장해 왔다.
그리고 지금 우리 앞에는 상업주의로 무장된 매스컴과,
그 매스컴의 계량화 한 알피니즘으로 학습된 시청자들과,
그 시청자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려는
등반가들이 악순환의 고리를 엮어가고 있다.
불확실성과 곤란성과 창의성은 어디로 가고,
온갖 편의성을 동원한 원정대들이
TV의 상투적인 내레이션에 맞춰 움직이고 있다.
등로주의를 외치던 등반가들은 어디가고,
순수 알피니즘을 고수하던 등반가들마저
더 이상 알피니즘은
무상의 행위 일수 없다고 박탈감에 빠졌다.
요즘과 같은 물질문명의 사회에서
행위 뒤에 주어지는 정신적, 물질적 보상효과는
알피니즘을 지속 시킬 수 있는 순기능일수도 있다.
그러나 알피니즘 행위 뒤에 따르는 보상과,
처음부터 그 보상을 목적으로 한 것과는
동기부터 결과 까지 명백하게 다르다.
알피니즘의 보상효과에 대한 오해는
알피니즘을 상업화 스포츠로 전락 시키는
역기능으로 작용한다.
알피니즘 본래의 정신과 규범을 잘못 이해하는 한
이런 도덕적 해이는 계속될 수밖에 없다.
아무리 물질문명이 고도화 되더라도,
등반가들이 그들 사회로부터 받는 존경은
무상의 행위 일 때 생명력을 가진다.
무엇보다 알피니즘의 진정한 보상은
자신의 정체성과 삶의 의미를 찾는 것에 있으며
이것이야 말로 그 어떤 대가를 치르고도 바꿀 수 없는,
산이 등반가에게 주는 최고의 보상이다.
알피니즘이란 무엇인가.
알피니즘은 산과 사람이 만나 형성된 관계이다.
알피니즘이 스포츠적 요소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스포츠로 볼 수 없는 것은
그 주관적인 세계와 과정의 정신 때문이다.
산에는 심판과 규칙이, 그리고 관객이 없다.
등반가는 스스로 찾아 올라간 험한 산에서
스스로 규칙을 정하고,
스스로가 심판이면서 관객이 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등반가는 왜 산에 오르는가. 하는 질문에
자신이 산이라는 화폭에 그린
자신만의 그림으로 답해야 한다.
알피니즘을 불확실성과 맞서서 얻는 깨달음이라고
정의하는데 동의한다면,
진정한 등반가란 산의 불확실성을 극복하면서
그 과정에서 자기발견의 경지에 이르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알피니즘은
인간의 산에 대한 자기 인식이기도 하다.
한편 알피니즘은 불확실한 삶을 헤쳐 나가는 한 방법이다.
우리 삶이 불확실하듯
알피니즘의 세계도 불확실성을 전제로 한다.
알피니즘은 불확실한 인생에서 무엇을 극복하고,
무엇에 순응하며,
또 무엇을 포기할 것인지,
그런 인생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첫댓글 휴~~~ 도영아 ~ 넌 이글 다 읽었니? ... 등반도.. 삶도... 인간관계도.. 모두가 순수성을 잃어 가고 있다는거겠짐? ... 물질 문명이 발달되면서 가져다 주는 결과물들이 아닐까? ... 그치만 선덕여왕에서 유신과 같은 절대로 잔머리굴리지 않는 인간... 진실 하나로는 살아갈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그래도 유신을 닮고 싶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아궁... 뭐가 이리 횡설 수설일꼬?...ㅋㅋㅋ... 이미 잘 나있는 길을 사람들의 뒷통수만 보면서 오르느니....인적이 없는 새로운 길을 갈때의 환희를 우리는 알지... 누구의 삶을 부러워하기 보다는 나만의 작은 행복을 그릴수 있는 시간도 그리 길지 않으니..ㅎ 욜씨미..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