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대의(春秋大義)가 땅을 쓴 듯 없어졌으니
1694년(숙종20년) 10월 7일에 한포재 이건명 선생이 임금에게 올린 상소문 증 ‘춘추대의(春秋大義)가 땅을 쓴 듯 없어졌으니 나라를 지키려면 반드시 무너진 나라의 기강을 바로 잡으라’는 뜻의 간언이 매우 절실하여, 오늘날 부정선거, 사사로운 탐욕과 가짜뉴스와 거짓말의 범람 등으로 나라의 기강이 크게 무너져 위태로워진 우리 대한민국의 형편에서 반드시 미루어 경계로 삼을 만하여 여기에 발췌하여 강조한다.
『간사하고 흉악한 자들은 쫓겨나도 징계될 줄 모르고 착한 무리들은 한꺼번에 조정에 나아가도 영광으로 여기지 않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렇다면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면서도 장차 곽공(郭公)이 망하는 것을 구제하지 못하실 것이요, 주 부자(朱夫子)가 “국가의 억만년 왕업을 목전의 계책으로 삼는다.”라고 말한 것에 불행히도 가까울 것입니다. ··· 모의를 주장한 역적의 우두머리 또한 천벌을 면하여 아직도 목숨을 보존하고 있으니, 그렇다면 왕보(王甫)와 조절(曹節)이 당인(黨人)들을 마구 벤 일이나 주전충(朱全忠)이 청류(淸流)를 도륙(屠戮)한 일 또한 용서할 만한 것이 털끝만큼이라도 있다는 것입니까. ··· 왕법(王法)이 엄중하지 못하고 나라의 기강이 해이해져, 죄를 용서해 주자는 논의가 앞에서 경솔하게 나오더니 징계하여 처벌하는 법이 뒤에 행해지지 않았는데, 급기야 흉악한 역적들이 버젓이 천지 사이에 숨 쉬게 하여, 춘추(春秋) 대의가 땅을 쓴 듯 없어졌으니, 오늘날 조정이 장차 천하 만대에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 아, 사람의 생사와 나라의 흥망이 풍사(風邪)가 밖에서 엄습하거나 전쟁이 잇달아 발생하는 상황을 기다릴 필요 없이, 복심(腹心)이 먼저 무너지고 원기(元氣)가 날로 사라지고 있으니, 뒤에 비록 편작(扁鵲)과 창공(倉公)의 의술과 호걸의 재주가 있다 하더라도 다시 손댈 곳이 없을 것입니다.』
[주-1] 선을 …… 것이요 : 곽공은 춘추 시대 때 자기 나라를 잃고 조(曹)나라에 귀순한 임금인데, 제 환공(齊桓公)이 곽(郭) 땅에서 노닐면서, 곽공이 망하게 된 이유를 묻자, 부로(父老)들이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했다.[善善而惡惡.]”라고 대답하였는데, 이에 환공이 의아하게 생각하자, 부로들이 다시 “선인을 좋아하면서도 제대로 임용하지 않았고 악인을 미워하면서도 제대로 제거하지 못했으니, 이것이 바로 망하게 된 이유이다.[善善而不能用, 惡惡而不能去, 此其所以亡也.]”라고 설명하였다. 《舊唐書 卷70 王珪列傳》
[주-2] 왕보(王甫)와 …… 일 : 왕보와 조절은 후한(後漢) 영제(靈帝) 때의 환관으로, 서로 손발을 맞추어 대장군 두무(竇武)와 태부(太傅) 진번(陳蕃)을 죽이고 발해왕(勃海王)의 모반 사건을 꾸며 복주(伏誅)시켰다. 《後漢書 卷108 宦者列傳 曹節》
[주-3] 주전충(朱全忠)이 …… 일 : 당(唐)나라 애제(哀帝) 때, 권신(權臣) 주전충이 배추(裵樞) 등 조사(朝士) 30여 명을 백마역(白馬驛)에 집결시켜 하룻저녁에 다 죽이고 그 시체를 황하(黃河)에 던져 넣은 사건을 말한다. 당초 주 전충의 좌리(佐吏)였던 이진(李振)이 진사시(進士試)에 여러 번 응시하였으나 합격하지 못하자 조사들을 매우 미워하여 주전충에게 말하기를 “이 조사들은 늘 스스로 청류(淸流)라고 하니, 황하(黃河)에 던져 넣어 영원히 탁류(濁流)가 되게 하시오.”라고 하니, 주전충이 그 말을 따랐다. 《舊五代史 卷18 梁書 李振列傳》
[주-4] 죄를 …… 없어졌으니 : 1694년(숙종20)에 인현왕후 민비가 복위되자 희빈 장씨의 오빠인 장희재(張希載)가 이를 시기하는 희빈과 함께 인현왕후를 해하려는 음모를 꾸미다가 발각되어 사형을 받게 되었으나, 후환이 세자에게 미칠 것을 염려한 남구만 등 소론의 주장으로 사형을 면하고 제주도에 유배된 사실과 1689년 기사환국으로 정권을 장악하여 노론의 주된 인사들을 대거 죽이거나 유배 보내게 한 남인의 권대운(權大運)ㆍ목내선(睦來善)ㆍ김덕원(金德遠)ㆍ민종도(閔宗道)ㆍ이현일(李玄逸) 등이 유배되어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주-5] 풍사(風邪) : 육음(六淫)의 하나로, 바람이 병의 원인으로 작용하는 것을 이른다.
2024. 1.18. 素淡
*** 1694년(숙종20년) 10월 7일에 한포재 이건명 선생이 교리를 사직하고 겸하여 소회를 아뢰는 상소를 올렸다[辭校理兼陳所懷疏]. ***
삼가 아룁니다. 신은 재주와 학식이 보잘것없고 정세가 위축되어 실로 언관(言官)의 반열에 무릅쓰고 있기가 어려운 몸인데, 지난번에 엄명에 쫓긴 나머지 청환(淸宦)의 자리에 선발된 것을 사력을 다해 피하지 못하고 열흘 간 주선하면서 털끝만 한 보탬도 드리지 못하였으니, 부끄러움과 두려움이 깊이 쌓였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이번에 옥서(玉署 홍문관)에 제수하는 새로운 명이 기존에 벼슬하면서 성과를 거두지 못했던 신에게 또 내려졌습니다. 신이 스스로 돌아보아도 당황스럽거니와, 밝으신 성상의 조정에서 어떻게 이러한 벼슬을 얻을 수 있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신은 둔한 사람으로서 백 가지 중에 하나도 잘하는 것이 없이 단지 부형의 음덕에 힘입어 일찍이 금규(金閨)의 관적에 이름을 올렸으니, 성상께서 직임을 맡기고 조정 신료들이 기대하고 권면하는 바를 신에게서 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조상의 연고로 인해 가부(可否)를 묻지 않고 허실(虛實)을 헤아리지 않은 채 난대(鑾臺)와 승명(承明)을 마치 가정의 물건처럼 보면서 순서와 반열(班列)을 뛰어넘어 임사(任使)의 반열에 올려놓더니, 몇 달 뒤에 갑자기 이처럼 외람된 자리에 이르렀으니, 신의 부끄러운 마음은 이미 말할 것도 없거니와, 국체(國體)가 손상되고 관방(官方)이 문란해지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경연관(經筵官)에 선발되는 것을 세상에서 흔히 ‘영주(瀛洲)에 오른다’고 일컬으며, 논사(論思)하고 계옥(啓沃)하는 직임은 문학이 뛰어난 자를 뽑습니다. 그런데 신은 본래 어리석어 학문의 방법을 모르는 데에다 과거에 일찍 급제하여 곧바로 서책을 버렸던 터라 한번 어전에 오를 적마다 마지못해 남의 뒤를 따르긴 했습니다만, 은미한 말과 오묘한 뜻을 드러내 밝힌 바가 없었으니, 황공하여 땀이 몸을 적시는 것이 마치 깊은 못과 골짜기에 떨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언책(言責)의 직임은 옛날에 재상(宰相)에 견주었으며, 과실을 바로잡고 시비와 현부를 가려 논핵하는 일은 강직하고 방정한 자질을 바탕으로 합니다. 그런데 신은 본래 용렬하고 식견이 혼미하여 조정의 정사(政事)에서 부족한 점을 아는 바가 없는데도 분의(分義)를 두려워하여 뻔뻔스럽게 받들었습니다만, 정적(情迹)이 편안하기 어렵고 손대는 일마다 혐의스럽고 구애되어 여러 번 성가시게 해 드리기만 일삼다가 구차하다고 배척을 당했습니다. 이로써 본다면 신의 쓸모없는 실상이 남김없이 다 드러났으니, 어찌 그대로 다시 차지하고 스스로 처신할 바를 생각지 않음으로써 맑은 조정에 수치를 더할 수 있겠습니까.
지난날 유신(儒臣)이 상소하여 배척한 것은 말뜻이 매우 엄중하여 실로 예사로운 논열(論列)에 견줄 바가 아니었으니, 또 어찌 감히 죄를 더하여 낭패를 자초하는데도 돌아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에 감히 죽음을 무릅쓰고 천지와 부모 같으신 성상 앞에 호소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자애로운 성상께서는 신이 하나도 취할 만한 것이 없는 재주를 지녔고 매우 부득이한 형편에 놓였음을 헤아려 속히 체차(遞差)하시어, 관직을 중히 하고 사람들의 비난에 답하신다면 그지없이 다행이겠습니다.
신은 요즘 저보(邸報 조보(朝報))를 계속하여 받아 보다가 내심 놀라 어리둥절하였습니다. 지난번 우박이 내리는 재변(災變)이 마침 온갖 곡식이 익어 가는 때에 발생하여, 벼가 손상되고 전야(田野)가 처참해진 것을 이미 구제할 수 없는 지경인데, 금성(金星)이 자리를 이탈하고 겨울 천둥이 치는 재변이 거듭 나타나 역사책에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오늘날 밝으신 성상의 시대에 무슨 위망(危亡)의 징조가 있기에 하늘의 견책과 경고가 이처럼 매우 급하단 말입니까.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늘 보는 것에 익숙하고 위와 아래는 옛 습관을 편안하게 여겨, 대신(大臣)이 면직되기를 청하면서 옛 규례만을 따르고 근밀(近密)한 신하가 규계(規戒)를 아뢰면서 전적으로 고사(故事)를 폐기하고 있습니다. 재이(災異)를 만나 구언(求言)하고 반찬의 수를 줄이며 음악을 중지하는 것이 비록 형식적인 것 같지만 또한 거행하지 않으시니, 신은 모르겠습니다만, 전하께서는 자신을 반성하는 실제를 한가하고 홀로 계실 때에 이미 극진히 해서 다른 데에서 구할 필요가 없으신 것입니까. 아니면 재이가 누차 나타나는 일이 혹 기수(氣數)가 마침 그러한 데에서 나온 것이지 인사(人事)의 득실과는 무관하다고 여기시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다면 어찌 하늘의 포악함이 이와 같은데도, 군신 상하가 그럭저럭 세월만 보내며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고요히 지낼 수 있단 말입니까.
신은 참으로 우매하지만 망녕되이 속으로 헤아린 바가 있습니다. 전하께서 자신을 반성하는 실제를 이미 극진히 하셨다면, 마음에 발로되어 정사(政事)에 시행되는 것을 가릴 수 없는 점이 틀림없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조정으로 말씀드리면 기강의 무너짐이 이전보다 오히려 더하고, 백성의 곤궁함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데도 구중궁궐 안에서 단정히 팔짱을 끼고서 말소리와 얼굴빛을 바꾸지 않으시니, 자신을 반성하는 실제를 신은 믿지 못하겠습니다.
만일 기수(氣數)가 마침 그러한 때문이라고 하시면서 우선 목전에 위급함이 없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신다면, 신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열성(列聖)들께서 서로 계승해 오면서 깊은 사랑과 두터운 은택으로 민심을 굳게 단결시켰기에, 비록 중간에 변고를 겪었지만 나라 안에 문제가 없고, 5, 6십 년 동안 변방에 경보가 없어 북을 두드리는 일이 발생하지 않았으니, 대소(大小)가 화목하고 풍속이 순후하게 될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당화(黨禍)가 마구 일어나 양주(梁州)와 익주(益州)로 서로 나뉘어, 처음에는 다투어 빼앗더니, 마침내는 죽이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20년 전부터 번복(翻覆)이 서로 잇달고, 간사한 자와 바른 사람이 서로 배척하고, 출척(黜陟 물리치고 등용함)이 일정하지 않고, 거조가 전도되고, 기상이 저상되어, 국맥(國脈 나라의 명맥)의 손상과 인심의 분열이 이미 심각한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아, 사람의 생사와 나라의 흥망이 풍사(風邪)가 밖에서 엄습하거나 전쟁이 잇달아 발생하는 상황을 기다릴 필요 없이, 복심(腹心)이 먼저 무너지고 원기(元氣)가 날로 사라지고 있으니, 뒤에 비록 편작(扁鵲)과 창공(倉公)의 의술과 호걸의 재주가 있다 하더라도 다시 손댈 곳이 없을 것입니다.
생각이 이에 이르자 저도 모르게 마음이 섬뜩합니다. 전하의 밝으신 슬기로 조종(祖宗)이 물려준 막중한 업무를 받았는데, 3백 년 동안 공고했던 왕업(王業)이 마침내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줄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아, 하늘의 뜻과 사람의 일은 대개 알 수 있습니다. 그 위태로움이 이와 같고 그 징조가 이미 드러났는데도, 혹자는 “밝으신 성상께서 위에 계시어 나라 안에 걱정이 없고, 조정의 진퇴가 일시적인 통쾌함을 취하지만, 우리 왕조의 대세에 손상될 것이 없다.”라고 하니, 어찌 잘못된 말이 아니겠습니까.
신은 감히 다른 일을 널리 인용하지 않고 단지 오늘날 지극히 가까운 일만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조정은 기강이 의탁한 곳이고 정령(政令)이 나오는 곳으로, 공경(公卿)과 대부(大夫)ㆍ백집사(百執事 백관(百官))로부터 서리(胥吏)에 이르기까지 등위(等位)가 매우 분명하여 체통이 문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관리를 등용하고 버리는 것이 너무 갑작스럽고 형륙(刑戮)이 뒤따라 이르다 보니, 관부에 몸담고 있는 것이 마치 객관(客館)에 있는 것 같고, 귀중한 금자(金紫)를 형구(形具) 보듯이 하니, 명예와 지위가 어찌 가벼워지지 않을 수 있겠으며, 뭇사람이 어찌 업신여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임금은 신하에 대하여 의리가 천지에 통하니, 생사와 영욕은 분수상 도망할 곳이 없으므로, 의심스러우면 임용하지 말고 임용하면 의심하지 말아서, 반드시 심정과 뜻이 서로 통하고 성의(誠意)가 서로 미덥게 한 뒤에야, 지혜로운 사람은 사려를 다할 수 있고 용맹한 사람은 힘을 다할 수 있어, 모든 일이 다스려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백성은 굳은 의지가 없고 선비는 항심(恒心)이 없어, 외방(外方)에 있는 사람은 깊이 숨는 것을 지혜로 여기고 조정에 있는 신하들은 말없이 따르는 것을 계책으로 삼아, 당시에 용납되고 후세에 모면하려 하면서 오직 자기 일신만을 위해서 걱정하고 있으니, 어느 겨를에 나랏일을 담당하고 세도(世道)를 만회할 수 있겠습니까.
신이 삼가 보니, 전하께서는 영특하심이 천부적이고 성학(聖學)이 고명하여, 정사와 문변(文辯 문장과 변론)이 전대의 임금들을 능가하시니, 이는 진실로 제왕의 훌륭한 절목입니다. 그러나 이미 이러한 아름다운 덕목이 있는 가운데 또한 치우침이 있어, 영특한 기운이 너무 드러나 뭇 신하들을 경시하고, 덕을 지킴이 견고하지 못하여 기쁨과 노여움을 쉽게 드러내십니다. 이 때문에 부리는 신하들을 금방 아첨한다고 했다가 금방 어질다고 하면서 좋아하고 싫어하는 뜻을 일에 따라 옮기는 바람에, 간사하고 흉악한 자들은 쫓겨나도 징계될 줄 모르고 착한 무리들은 한꺼번에 조정에 나아가도 영광으로 여기지 않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렇다면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면서도 장차 곽공(郭公)이 망하는 것을 구제하지 못하실 것이요, 주 부자(朱夫子)가 “국가의 억만년 왕업을 목전의 계책으로 삼는다.”라고 말한 것에 불행히도 가까울 것입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여 나라를 다스리신 지 지금까지 20년인데, 오늘에 이르러 성상께서 마음속으로 깨닫고 확고히 결단하여 중전을 복위시키시자, 6년간의 이륜(彛倫)이 실추되지 않고 삼강(三綱)의 대의(大義)가 다시 밝아졌으니, 이는 실로 한(漢)나라와 당(唐)나라에도 없었던 일이고 서책(書冊)에 실려 있다는 말도 들어 보지 못했습니다. 온 나라의 신하와 백성들이 속을 썩이고 마음 아파하며 답답해하면서도 펴지 못한 지가 몇 년이었는데, 지금 마침내 다시 살아난 듯이 기뻐서 춤을 추고 있으니, 인심의 향배에서 하늘의 뜻을 알 수 있거니와, 사직(社稷)과 백성이 마침내 반드시 이에 힘입을 것입니다.
그러나 왕법(王法)이 엄중하지 못하고 나라의 기강이 해이해져, 죄를 용서해 주자는 논의가 앞에서 경솔하게 나오더니 징계하여 처벌하는 법이 뒤에 행해지지 않았는데, 급기야 흉악한 역적들이 버젓이 천지 사이에 숨 쉬게 하여, 춘추(春秋) 대의가 땅을 쓴 듯 없어졌으니, 오늘날 조정이 장차 천하 만대에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지난날 뭇 소인들이 정권을 도둑질하고 함정을 널리 설치하여 화심(禍心)을 품고 관리들을 어육(魚肉)으로 만든 일을 말씀드리자니 참혹하기만 합니다.
생각하건대, 그 모의를 주장한 역적의 우두머리 또한 천벌을 면하여 아직도 목숨을 보존하고 있으니, 그렇다면 왕보(王甫)와 조절(曹節)이 당인(黨人)들을 마구 벤 일이나 주전충(朱全忠)이 청류(淸流)를 도륙(屠戮)한 일 또한 용서할 만한 것이 털끝만큼이라도 있다는 것입니까. 더구나 ‘서문 밖’이란 말을 스스로 지어내어 감히 말할 수 없는 자리를 모해(謀害)한 실정과 자취가 환히 드러나, 귀신과 사람의 분개함이 극에 달했으니, 용서해 주자는 의논을 신은 진실로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아, 경장(更張)하는 날에 성상께서 진작하고 분발하여 윤기(倫紀)를 바로잡고 인심을 복종시키는 일에 있어서, 어찌 이 두 가지로 큰 결단을 삼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밝으신 명을 처음 내리셨을 때에는 부월(斧鉞)보다 엄하였는데, 의심하고 걱정하는 생각이 지나쳐 사사로운 은혜가 펴지고, 관대히 처리하자는 말에 미혹되어 왕법을 굽히셨으니, 어찌 그리도 전하께서는 의리를 붙잡아 세우고 호오(好悪)를 분명히 하시는 훌륭한 뜻이 처음보다 해이해져, 이리저리 돌아보며 의지하여 좇는 무리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것입니까. 이는 앞에서 말씀드린 ‘덕을 지킴이 견고하지 못하여 좋아하고 싫어하는 뜻을 일에 따라 옮김’이 어찌 까닭 없이 그런 것이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전하께서 본원(本原)을 확충하여 함양하고 유지하는 방법에 혹 미진한 바가 있어 일을 행하는 데에 차츰 이와 같이 된 듯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 반성하고 두렵게 생각하면서 처음의 뜻을 의심하지 말고 다른 말에 흔들리지도 마시어, 공의(公議)가 펴지고 국법이 행해지게 하신다면, 어찌 통쾌하지 않겠습니까.
엊그제 간신(諫臣)의 상소는 의리가 명백하고 공의가 사라지지 않은 것이요, 대신(大臣)이 인책(引責)하고 사죄한 것은 잘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신은 ‘옳다’고 하고 간관(諫官)은 ‘그르다’고 하는 가운데 가부(可否)를 서로 조절하여 지당한 결론을 도출하도록 힘써야 하는데, 하필이면 서로 겨루는 사람마냥 거취를 경솔하게 결정하여 스스로 일의 체면을 손상시킨단 말입니까. 성상께서 대신을 예로 우대하는 일을 지극히 하지 않을 수 없지만, 시비를 분별하는 일도 분명하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혹자는 “언관(言官 임원구)을 경계하고 책망하여 대신을 위안하는 방도로 삼아야 한다.”라고 하였지만, 신의 생각에는 대신의 뜻이 갈수록 더욱 불안해지고 언로의 막힘이 오늘부터 시작될 듯합니다.
지금의 나라 형편은 여러 차례 큰 병을 치른 사람과 같으니, 몹쓸 증세와 위태로운 조짐을 이루 다 꼽을 수 없는데, 가장 큰 문제는 탐욕스런 풍조가 높고 낮은 관리들 사이에 습관이 된 꼴이 안팎이 똑같다는 것입니다. 백성이 곤궁하고 나라의 저축이 텅 빈 것은 실로 여기에서 연유하였습니다. 지난날 대신이 여러 도(道)를 안렴(按廉)하자고 청하고, 또 감영(監營)과 병영(兵營)의 중기(重記)를 조사하자는 의논이 있었습니다. 이를 한 번 시행하는 것으로 반드시 모든 허실을 밝힐 수는 없겠지만, 이 의논을 과감하게 시행한다면, 경중(京中)의 모든 군문(軍門)에 저장되어 있는 재화에 대해 반드시 먼저 실제의 수효를 조사하게 할 터이니, 근본을 맑게 하고 말단을 다스리는 방도가 될 것입니다. 성상께서 백성들의 일을 염려하여 부역(賦役)을 견감하고 황전(荒田)에 재결(災結)을 인정해 주신 것은 훌륭한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입(歲入)이 이미 줄었으니, 공사(公私)의 수용(需用)을 진실로 절제해야 마땅하고, 절약에 관계된 모든 방도는 조금도 늦출 수 없습니다. 경덕궁(慶德宮) 보수공사가 해를 넘겨 가며 진행되고 있고, 비빈(妃嬪)의 저택은 값이 수천금을 넘는다고 들은 듯한데, 이는 모두 그만둘 수 있는데도 그만두지 않는 것입니다.
국조(國朝)의 먼 일은 신이 알지 못합니다만, 선조조(宣祖朝)의 경우, 여러 후궁(後宮)이 매우 많고 임금의 자손들이 가장 번성했는데도, 당시 집을 하사한 경우는 지금 일일이 손꼽을 수 있습니다. 만약에 모두 오늘날처럼 사치스럽고 화려한 집을 하사했다면, 국가의 경비를 장차 무엇으로 지급하였겠습니까. 선조(先朝)의 대군(大君) 저택은 사체(事體)가 자별합니다. 옛날 한(漢)나라 명제(明帝)가 말하기를 “짐(朕)의 아들들을 어찌 선제(先帝)의 아들들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모두 절반으로 줄이도록 하라.”라고 했으니, 이는 실로 후대의 임금들이 본받을 만한 것입니다. 하물며 비빈은 대군과 명예와 지위가 현격히 구별되는데, 전하께서 굳이 이곳에 정하신 것은 혹시 미처 깊이 생각하지 못하신 것입니까.
또 공주의 집에 잔치를 내리신 경우는, 친족과 돈목(敦睦)하려는 성상의 뜻을 볼 수 있습니다만, 이렇게 재이를 만나 비용을 절약하는 때를 당하여 도리어 잔치를 풍성하게 차리고 있으니, 이른바 하늘을 공경하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해서는 안 될 듯합니다. 지금은 기일이 이미 임박해서 하사하신 물건을 되돌릴 수 없지만, 선온(宣醞 사온서에서 빚은 술을 내림)과 사악(賜樂 풍류를 내림) 등의 일을 또한 마땅히 정지하신다면, 혹 몸을 닦고 반성하는 일단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아울러 살펴 받아 주소서.
[주-1] 교리를 …… 상소 :
1694년(숙종20) 10월 7일에 올린 상소로, 그 대략적인 내용이 《국역 숙종실록》 20년 10월 7일 기사에 보인다.
[주-2] 뜻밖에 …… 내려졌습니다 :
이건명은 1694년 10월 4일 홍문관 교리에 임명되었다. 《국역 숙종실록 20년 10월 4일》
[주-3] 금규(金閨)의 …… 올렸으니 :
조정(朝廷)에서 벼슬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금규’는 본래 한(漢)나라 궁문인 금마문(金馬門)으로, 학사(學士)들이 조서(詔書)의 하달을 기다리던 곳이다. 《사기(史記)》 권126 〈골계열전(滑稽列傳)〉에 “금마문이라는 것은 환서문(宦署門)인데, 그 문 곁에 동마(銅馬)가 있기 때문에 금마문이라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남조(南朝) 제(齊)나라 사현휘(謝玄暉)가 지은 〈시출상서성(始出尙書省)〉에 “이미 금규의 사적에 이름을 올리고 또다시 경연의 술을 마셨네.[旣通金閨籍, 復酌瓊筵醴.]”라고 하였다. 《文選 卷30 雜詩下》
[주-4] 난대(鑾臺)와 승명(承明) :
난대는 한림원(翰林院)을 가리키고, 승명은 한(漢)나라 때 임금의 침소(寢所)인 승명전(承明殿) 곁에 있던 승명려(承明廬)로, 시신(侍臣) 들이 직숙하던 곳인데, 여기서는 홍문관과 승정원을 가리킨다.
[주-5] 경연관(經筵官)에 …… 일컬으며 :
당 태종(唐太宗)이 문학관(文學館)을 열어 방현령(房玄齡), 두여회(杜如晦) 등 18명을 뽑아 특별히 우대하고 번(番)을 셋으로 나누어 교대로 숙직하며 경전을 토론하게 하였는데, 이를 세상 사람들이 등영주(登瀛洲)라 하여 신선이 산다는 전설상의 산인 영주(瀛洲)에 오르는 것에 비기며 영광으로 여겼다. 《舊唐書 卷72 褚亮列傳》
[주-6] 논사(論思)하고 계옥(啓沃)하는 직임 :
‘논사’는 학문이나 사물에 대한 견해나 사상 등에 관하여 논변하는 것이고, ‘계옥’은 선도(善道)를 개진하여 임금을 인도하고 보좌한다는 뜻이다.
[주-7] 언책(言責)의 …… 견주었으며 :
《문충집(文忠集)》 권66 〈상범사간서(上范司諫書)〉에 “국가의 득실과 백성의 이해와 사직(社稷)의 큰 계책을 보고 들으면서도 직사(職司)에 매이지 않는 것은 오직 재상만이 이를 행할 수 있고 간관(諫官)만이 이를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옛 법도를 배우고 도를 지닌 선비가 당시에 벼슬하여 재상이 되지 못하면 반드시 간관이 되었으니, 간관은 비록 지위가 낮지만 재상과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주-8] 5, 6십 …… 않았으니 :
한(漢)나라 때 저잣거리에 북을 설치하여 도적이 나타나면 북을 두드려 여러 사람에게 경보(警報)를 알렸다고 한다. 여기서는 외적의 침입을 알리는 경보가 없었다는 뜻으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로는 전쟁이 없었음을 말한다.
[주-9] 양주(梁州)와 …… 나뉘어 :
양주와 익주는 중국의 촉(蜀)나라에 있는 지역으로, 촉나라의 조론(朝論)이 분열된 것을 조선의 당쟁에 비유한 것이다. 《晦庵集 卷11 戊申封事》
[주-10] 20년 …… 잇달고 :
1674년(현종15)의 갑인예송(甲寅禮訟)을 계기로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정권을 장악하고, 1680년(숙종6)에 삼복의 변[三福之變]을 계기로 남인이 축출되고 서인이 다시 정권을 장악하고, 1689년에 희빈(禧嬪) 장씨(張氏) 소생을 원자로 호칭을 정하는 문제를 계기로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다시 정권을 장악하고, 1694년에 갑술옥사를 계기로 남인이 축출되고 소론과 노론이 다시 정권을 장악하여 환국(換局)이 잇따른 것을 말한다.
[주-11] 풍사(風邪) :
육음(六淫)의 하나로, 바람이 병의 원인으로 작용하는 것을 이른다.
[주-12] 편작(扁鵲)과 창공(倉公)의 의술 :
편작은 전국(戰國) 시대의 명의로 본래의 성명이 진월인(秦越人)인데 고대에 편작이라는 명의가 있었으니, 진월인이 그와 같다 하여 그 역시 편작이라 칭했다 한다. 창공은 한(漢)나라 때의 명의로 성은 순우(淳于)이고 이름은 의(意)인데 벼슬이 태창 장(太倉長)을 지냈기 때문에 창공이라 칭하였다.
[주-13] 금자(金紫) :
금인자수(金印紫綬)의 준말로, 고관(高官)의 별칭으로 쓰인다. 한나라 때 승상(丞相)과 태위(太尉) 등이 모두 황금 인장(印章)에 자색 수대(綬帶)를 띠었던 데서 온 말이다.
[주-14] 선을 …… 것이요 :
곽공은 춘추 시대 때 자기 나라를 잃고 조(曹)나라에 귀순한 임금인데, 제 환공(齊桓公)이 곽(郭) 땅에서 노닐면서, 곽공이 망하게 된 이유를 묻자, 부로(父老)들이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했다.[善善而惡惡.]”라고 대답하였는데, 이에 환공이 의아하게 생각하자, 부로들이 다시 “선인을 좋아하면서도 제대로 임용하지 않았고 악인을 미워하면서도 제대로 제거하지 못했으니, 이것이 바로 망하게 된 이유이다.[善善而不能用, 惡惡而不能去, 此其所以亡也.]”라고 설명하였다. 《舊唐書 卷70 王珪列傳》
[주-15] 국가의 …… 삼는다 :
개혁을 하지 않고 고식적으로 현실에 안주한다는 말이다. 《회암집(晦庵集)》 권24 〈여위원이서(與魏元履書)〉에 보인다.
[주-16] 오늘에 …… 밝아졌으니 :
숙종이 희빈 장씨를 총애하면서 인현왕후 민비(閔妃)에 대한 감정이 악화되어 1689년(숙종15)에 투기죄(妬忌罪)로 민비의 폐출을 명했다가, 뒤에 차츰 폐비 사건을 후회하고 남인(南人)에게 염증을 느끼게 되자 1694년에 환국을 단행해 남인을 몰아내고 남구만(南九萬)ㆍ신여철(申汝哲) 등의 서인을 대거 등용하여 인현왕후 민비를 복위시킨 것을 말한다.
[주-17] 죄를 …… 없어졌으니 :
1694년(숙종20)에 인현왕후 민비가 복위되자 희빈 장씨의 오빠인 장희재(張希載)가 이를 시기하는 희빈과 함께 인현왕후를 해하려는 음모를 꾸미다가 발각되어 사형을 받게 되었으나, 후환이 세자에게 미칠 것을 염려한 남구만 등 소론의 주장으로 사형을 면하고 제주도에 유배된 사실과 1689년 기사환국으로 정권을 장악하여 노론의 주된 인사들을 대거 죽이거나 유배 보내게 한 남인의 권대운(權大運)ㆍ목내선(睦來善)ㆍ김덕원(金德遠)ㆍ민종도(閔宗道)ㆍ이현일(李玄逸) 등이 유배되어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주-18] 뭇 소인들이 …… 일 :
1689년에 희빈 장씨의 소생을 원자로 호칭을 정하는 문제를 계기로 정권을 장악한 남인의 목내선ㆍ김덕원ㆍ민종도ㆍ민암(閔黯)ㆍ목창명(睦昌明) 등이 노론의 주요 인물들인 송시열(宋時烈)ㆍ김수흥(金壽興)ㆍ김수항(金壽恒)ㆍ민정중(閔鼎重)ㆍ김만중(金萬重) 등을 유배 보내 사사(賜死)되게 하거나 유배 중에 죽게 한 일 등을 말한다.
[주-19] 왕보(王甫)와 …… 일 :
왕보와 조절은 후한(後漢) 영제(靈帝) 때의 환관으로, 서로 손발을 맞추어 대장군 두무(竇武)와 태부(太傅) 진번(陳蕃)을 죽이고 발해왕(勃海王)의 모반 사건을 꾸며 복주(伏誅)시켰다. 《後漢書 卷108 宦者列傳 曹節》
[주-20] 주전충(朱全忠)이 …… 일 :
당(唐)나라 애제(哀帝) 때, 권신(權臣) 주전충이 배추(裵樞) 등 조사(朝士) 30여 명을 백마역(白馬驛)에 집결시켜 하룻저녁에 다 죽이고 그 시체를 황하(黃河)에 던져 넣은 사건을 말한다. 당초 주전충의 좌리(佐吏)였던 이진(李振)이 진사시(進士試)에 여러 번 응시하였으나 합격하지 못하자 조사들을 매우 미워하여 주전충에게 말하기를 “이 조사들은 늘 스스로 청류(淸流)라고 하니, 황하(黃河)에 던져 넣어 영원히 탁류(濁流)가 되게 하시오.”라고 하니, 주전충이 그 말을 따랐다. 《舊五代史 卷18 梁書 李振列傳》
[주-21] 서문 밖 :
1691년(숙종17) 2월 29일 대신(大臣)과 비변사의 신하들을 인견(引見)한 자리에서 호조 참판 이의징(李義徵)이 도감 파총(都監把摠) 유자삼(柳自三)에게 들었다고 하면서 “1690년 겨울에 김정열(金廷說)이 시골에 내려간다 하고는 서문(西門) 밖에 숨어 살며 늘 나라를 원망한다.”라고 한 것을 가리키는데, 민유중(閔維重)의 형 민시중(閔蓍重)의 집이 서문 밖에 있었고, 김정열은 바로 민유중의 비장(裨將)이었다. 《국역 숙종실록 17년 2월 29일, 20년 윤5월 26일》
[주-22] 엊그제 간신(諫臣)의 상소 :
사간 임원구(任元耈)가 1694년(숙종20) 10월 3일에 올린 상소로, 우의정 윤지완(尹趾完)이 일신의 화복은 돌아보지 않고 오직 국가를 위한 대의만 생각해야 할 것인데, 그의 지론(持論)은 구차한 것이 많았고, 끝내는 또한 인현왕후 민비가 폐출될 때 죽기로 마음먹고 극력 간쟁하지 않고 억지로 인피(引避)만 일삼았던 권대운을 놓아주자고 청했다는 이유로 윤지완을 탄핵한 것이다. 《국역 숙종실록 20년 10월 3일》
[주-23] 대신(大臣)이 …… 것 :
우의정 윤지완이 사간 임완구의 탄핵 상소로 인하여 그날로 인혐(引嫌)하고 도성을 나간 것을 말한다. 《국역 숙종실록 20년 10월 3일》
[주-24] 혹자는 …… 하였지만 :
1694년(숙종20) 10월 4일 주강(晝講) 때, 박세채가 우의정 윤지완을 탄핵한 사간 임원구의 상소에 대해 “대관(臺官)의 말은 진실로 중도에 벗어난 것이니, 오직 전하께서 대관을 경계하여 책망하고 대신을 위로하여 안정시켜 잘 재량하여 처리하시기에 달렸습니다.”라고 하였다. 《국역 숙종실록 20년 10월 4일》
[주-25] 중기(重記) :
사무를 인계할 때 넘겨주는 문서를 말한다.
[주-26] 지난날 …… 있었습니다 :
남구만(南九萬)이 1694년 7월 23일에 외방 영문(外方營門)과 추생읍 중기(抽栍邑重記)를 서로 살펴 탕패(蕩敗)가 심한 자의 처벌 문제 등을 임금에게 아룄는데, 이것을 가리키는 듯하다. 《承政院日記 肅宗 20年 7月 23日》
[주-27] 경덕궁(慶德宮) …… 있고 :
《국역 숙종실록》 19년 6월 7일 기사에, 당시 경덕궁에 한창 수리하는 역사가 있다는 내용이 보이고, 또한 같은 해 9월 24일 기사에, 당시 경덕궁을 수리하면서 지나치게 사치하는 것이 많다고 지적한 내용이 보인다.
[주-28] 한(漢)나라 …… 했으니 :
이 내용은 《후한서(後漢書)》 권10 상 〈마왕후기(馬王后紀)〉에 나온다.
[주-29] 전하께서 …… 것 :
인조(仁祖)의 동생인 능원대군(綾原大君)의 옛집을 수천금을 들여 사서 영조의 어머니인 최 숙의(崔淑儀)의 제택으로 정한 것을 말한다. 《국역 숙종실록 20년 10월 7일》 《국역 약천집(藥泉集) 16권 의정부 우의정 신공(申公) 묘지명》
[주-30] 공주의 …… 경우 :
숙명공주(淑明公主)의 여러 아들이 장차 공주를 위해 헌수(獻壽)하려고 하자, 숙종이 듣고 잔치 도구를 내리고 또한 선온(宣醞)하고 사악(賜樂)하도록 명하였다. 《국역 숙종실록 20년 9월 7일》
[주-31] 잔치를 …… 있으니 :
원문 ‘풍향예대(豊享豫大)’의 ‘풍(豐)’과 ‘예(豫)’는 모두 《주역(周易)》 64괘 중의 하나로, 풍은 성대한 모양을 뜻하고, 예는 화락한 모양을 뜻한다. 본래는 안락하고 풍요로운 태평성대의 모습을 뜻하는 말이었으나, 후세에는 궁중에 경사가 있을 때 성대하게 의식을 거행하는 뜻으로 전용(轉用)되었다. 《周易 豐卦, 豫卦》
<출처 : 한포재집(寒圃齋集) 제3권 / 소차(疏箚)>
ⓒ 전주대학교 한국고전학연구소ㆍ한국고전문화연구원 | 서종태 채현경 이주형 전형윤 강지혜 (공역) | 2016
辭校理兼陳所懷疏
伏以臣才學蔑裂。情勢憫蹙。實難冒處言議之列。而頃者迫於嚴命。不得抵死力避淸塗極選。周遊於一旬之間。絲毫無補。媿懼罙積。不意玆者。玉署新a177_370c命。又下於已試蔑效之身。臣自顧惝怳。不知何以得此於聖明之朝也。臣以駑下。百無一能。徒藉父兄之蔭。早通金閨之籍。聖上之所驅策。朝臣之所冀勉。非取於臣。惟先之故。不問可否。不諒虛實。鑾臺承明。視若家庭之物。超序越班。進備任使之列。數月以來。驟濫此極。臣心之媿恥。已不足言。而國體之損傷。官方之隳廢。爲如何哉。夫經幄之選。世稱登瀛。論思啓沃。文學是取。而臣本倥侗。學不知方。早竊科第。旋抛書冊。一登前席。黽勉隨後。而微言奧義。無所發明。惶汗浹身。若隕淵谷。言責之任。古比宰相。繩糾激a177_370d揚。剛方是資。而臣本殘劣。見識昏謬。朝政闕失。無所省知。嚴畏分義。强顔承受。而情迹難安。觸處嫌碍。累事瀆擾。斥以苟且。以此觀之。臣之無用實狀。畢露無餘。其何可因仍復據。不思自處。以益淸朝之羞哉。至於向日儒臣之疏斥。語意深重。實非尋常論列之比。則又何敢增其罪戾。自取顚隮而莫之恤乎。玆敢冒死呼籲於天地父母之前。伏乞聖慈。俯諒臣才器之一無可取。情勢之萬不獲已。亟賜鐫改。以重名器。以謝人言。千萬幸甚。臣於近日。續接邸報。竊有所驚惑者。向者氷雹之灾。適及於萬寶垂成之日。禾a177_371a穀之殘敗。田野之愁慘。已無可救。而至於金星之失次。冬雷之發作。疊見層出。史不勝記。今日聖明之世。有何危亡之兆。而上天譴告。若是其切急乎。然而人情狃於常見。上下恬於故習。大臣之乞免。只循舊例。近密之進規。專廢故事。遇灾求言。减膳撤樂。雖似應文。而亦且不擧。臣未知殿下修省之實。已盡於燕閒幽獨之地。而不待他求耶。抑以爲灾異之屢見。或出於氣數之適然。而不關於人事之得失耶。不然何天之疾威如此。而君臣上下悠泛度日。寂然無毫髮之動耶。臣誠愚昧。妄有所隱度者。殿下修省a177_371b之實。旣已盡矣。則發於其心。施於其政者。必有不可掩者。而以言乎朝政則紀綱之廢頹猶加前日。生民之困悴日甚一日。若是而端拱九內。不變聲色。則修省之實。臣未之信也。若謂之氣數之適然。而姑以無目前之危急爲幸。則臣有說焉。我國家列聖相承。深仁厚澤。固結民心。雖中經變故。而方內無缺。五六十年之間。邊鄙無警。桴鼓不起。庶幾大小輯睦。風俗歸厚。而不幸黨禍橫生。梁益相分。始於傾奪。終至誅殛。廿載以來。翻覆相仍。邪正互斥。黜陟靡常。擧錯顚倒。氣像愁沮。國脉之斲傷。人心之泮渙。已到十分a177_371c地頭。嗚呼。人之死生。國之興喪。不必待風邪之外襲。兵革之相尋。腹心先潰。元氣日鑠。則後雖有扁倉之技。豪傑之才。無復着手處矣。思之至此。不覺寒心。豈料以殿下之明聖。受祖宗之付畀。三百年鞏固之業。終至於莫可收拾之境耶。噫。天意人事。槩可見矣。其危如此。其兆已著。而或者以爲聖明在上。國內無虞。朝著之進退。取快於一時。而無傷於本朝之大勢。則豈不謬哉。臣不敢廣引他事。只以目今切近者言之。朝廷者。紀綱之所托。政令之所出也。上有公卿大夫。下有百執事。以至胥吏。等威甚明。體統不紊。a177_371d而今也用捨太遽。刑戮隨至。官府之居。如處傳舍。金紫之貴。若視刀鋸。名位安得以不輕。衆庶安得以不侮哉。君之於臣。義通天地。死生榮辱。分無所逃。而疑則勿任。任則勿疑。必使情志流通。誠意交孚。然後智者可以殫其慮。勇者可以竭其力。而庶事可理也。今也民無固志。士無恒心。在外之人。以深藏爲智。在朝之臣。以循默爲計。取容於當時。圖免於後世。惟恐其身之不自謀。何暇擔當國事。挽回世道哉。臣竊覵殿下英睿出天。聖學高明。政事文辯。凌駕前辟。此誠帝王之盛節。而旣有其美。亦有其偏。英氣太露。輕a177_372a視羣下。執德不固。喜怒易形。是以任使之臣。乍佞而乍賢。好惡之意。隨事而隨移。以至奸凶屛黜而不知懲。善類彙征而不爲榮。然則善善惡惡。將無救於郭公之亡。而朱夫子所謂國家億萬斯年之業。以爲目前之計者。不幸近之矣。殿下之臨御出治二十年于玆矣。及至今日。宸衷感悟。乾剛廓然。坤位復正。六載之彝倫不墜。三綱之大義復明。此實漢唐之所未有。簡冊之所未聞。擧國臣民所以腐心痛毒欝抑而莫伸者。凡幾年矣。而今乃歡欣鼓舞。若復更生。人情所存。天意可見。社稷靈長。終必賴之。然而a177_372b王章不嚴。國綱解紐。原恕之論。輕發於前。懲討之法。不行於後。至使惡逆偃息於覆載之間。春秋大義。掃地盡矣。今日朝廷將何以有辭於天下萬世乎。向者羣壬竊柄。機穽廣設。其所以包藏禍心。魚肉搢紳者。言之慘毒。惟其賊魁之主張其謀者。亦逭天誅。尙保首領。然則甫節之芟刈黨人。全忠之屠戮淸流。亦有一毫之可恕耶。况自做西門外之說。謀害不敢言之地。情迹昭著。神人憤極。則容貸之議。臣實未曉。噫。更張之日。聖上所以振作奮發。正倫紀而服人心者。豈不以斯二者。爲大節拍乎。明命初下。嚴於鈇鉞。a177_372c而疑憂之慮過而私恩伸。寬大之說惑而王法屈。何殿下扶義理明好惡之盛意。有懈於初。而顧瞻依附之徒。接迹而起。則向所謂不固隨移之病。豈無其由而然耶。臣恐殿下本原之地。所以充養而維持者。或有所未盡。而措諸事爲。其漸如此。伏願聖明反顧惕慮。毋貳於初志。勿撓於異說。使公議得伸。國法得行。豈不快哉。日昨諫臣之疏。義理明白。公議不滅。大臣之引咎摧謝。可謂得矣。然而大臣曰是。諫官曰非。可否相濟。務歸至當。何必輕决去就。自損事面。有若相較者乎。聖上之優禮大臣。不可不至。而a177_372d是非之別。亦不可不明。或者以爲警責言者。爲慰安大臣之具。則臣恐大臣之意。轉益不安。而言路之杜塞。自今日始也。今之國勢。如人之屢經大病。敗證危兆。指不勝屈。最是貪饕之風。大小成習。內外同然。生民之困極。國儲之蕩然。實由於此。向日大臣以按廉諸道爲請。且有監兵營重記考出之議。因此一擧。雖未必盡得虛實。而此議果行。則京中諸軍門財貨之藏。必須先使閱實。可爲澄本治末之道矣。聖上軫念民事。賦役之蠲减。荒田之給灾。可謂盛意。歲入旣縮。則公私需用。固宜撙節。而凡係省約之道。不容a177_373a少緩。似伏聞慶德營緝。役至兩歲。妃嬪第宅。價溢數千。此皆得已而不已者也。國朝遠事。臣未及知。而至於宣廟朝列御甚衆。麟趾最繁。而其時賜第。今可歷指。若皆如今日之侈麗。則國家經費將何以支給耶。先朝大君之宅。事體自別。昔者漢明帝之言曰。朕之子豈得與先帝子比。皆令半之。此實後辟之所可則。况妃嬪之於大君。名位懸別。而殿下之所以必占於此者。或未及深思耶。且主家錫宴。可見聖上敦親之意。而當此遇灾省費之時。乃有豐亨豫大之擧。其所謂敬天者。恐不如是。今則期日已a177_373b迫。錫與之物。雖不可還追。而至於宣醞賜樂等節。亦宜停止。則或可爲修省之一端也。伏願殿下並賜察納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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