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40세 무렵에 산재로 요양치료 하는중에
집에서 발걸음으로 5분거리인 은평구 불광2
동(현, 불광1동) 에 있는 은평구립도서관에
다니게 되었어요.
주로 정기간행물실에서 신문등을 읽고, 다
본후에 종합자료실에서 각종 도서를 봤어요.
그러던 어느날 오후6시 정기간행물실 마감
시간에 여자 사서님이 책상에 의자를 넣다말고
20미터 정도의 거리에서 저를 바라다 보는
거예요.
처음에는 무슨 의미인지 모르고 무시했는데
2-3주에 걸쳐 계속 저를 향해서 멍때리는
것이였어요.
자꾸 신경쓰이고 웬지 궁금하여 정기간행물
실에서 신문을 보던중에 목근육의 긴장을 풀
려고 머리를 들어 정자세를 했는데 그녀와
저는 눈빛이 마주치고 말았어요.
그러더라도 제자리에서 근무하던대로 그냥
근무를 하면되는데 근무데스크를 빠져나와
달려가면서 출입문을 밀치고 외부로 가볐어
요.
저는 너무나 놀라고 그동안 잊고있던 40 세 되는 해에 30세
때에 저를 쳐다보고 달려가다가 넘어져 쓰러
진 음악선생님이 생각났어요.
다행히 쓰러진 그녀는 금방 일어나서 음악실
외부로 나가버렸어요.
당시 대한 천리교 본부의 수강원 음악선생님
이셨어요.
천리교는 일본 천리(탠리시)시에 있고 교조가
불교를 신앙하는 가정에서 신의 감응으로
천리를 가르치는 최초의 여성교주가 되었었
어요.
당시에 저는 아버지의 친구인 아버님의 따님
과 결혼하기로 한 정혼관계였어요.
일이 잘못되어 정혼관계가 깨지고 정신적으
로 너무나 힘들어 천리가 무엇인가 궁금해서
하계 수강원 교육을 받았어요.
특이하게도 천리교는 신악 신무라는 신의 가르
침을 노래하고 이에 맞춰 춤추는 종교였어요.
이것을 신악신무라고 하고서 신에 대한 외경
심이 가득하여 천리왕님을 찬양하는 종교였
어요.
고집부릴때, 교만하면, 화를내면, 미워하면
등등 이러하면 신체의 어느 부위에 각각 병든
다라고 천리대로 살아야 한다는 치병의 교리등
교조의 가르침을 알려주는 , 한마디로 천리에
어긋나면 신의 노여움을 받아 가난병고를 받으
므로 신의 가르침을 실천해야 한다는 신에
대한 " 외경심" 이 가득한찬 종교였지요.
천리왕님의 뜻을 따라 매사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감사하며 명량쾌활한 양기생활을
하라는 종교였어요.
그냥 천리님이나 천리신님이라하면 될테인데
천리왕님 이라고 왕자를 넣은것은 아무래도
일본왕을 의식하여 이름지어진것 같아요.
일본신도의 천왕을 내세운 군국주의 일제시대
엔 일제의 강압으로 종교정비령에 따라서
천리교는 일본신도의 하부조직으로 편입되고
일제패망한 이후에 다시 천리교로 환원되지요.
에스아이지, 일연정종 남묘호렌케교는 일연스님
을 본존님으로 모시고 일본천왕가의 수호신인
일본신도의 지존신이 본존님에게 절복했다는
경문을 신주모시듯 신앙의식을 할때마다 신주
를 모시지요.
일연스님이 임진왜란때에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왕실의 왕자였다 하지만 하여튼 일본은
하여튼 군국주의 냄새가 풍기는 천왕중심
의 군국주의 국가이지요.
에스아이지는 타종교를 인정하지않는 독
선의 종교이지요.
사람의 취향과 성격체질이 다르듯 종교도
자신에게 잘맞는 종교가 있는것이지요.
인본주의 자유민주사회에서는 다양성을
인정하여 공생공존해서 공존해야 민주
주의 국가이지요.
교리는 단순하고 제가 배울것이 별로 없고 치
병을 잘하는 종교로 알려져 환우들이 좋아하
는 종교였어요.
저는 환우들이 많고 일본종교라서 싫었어요.
잠시 인연이 되어 천리교에 머물다 증산도를
배우려고 천리교를 떠나가서 강증산을 신앙하
는 증산도의 교도가 되었지요.
지금은 증산도가 성추행등과 군사독재 박정희
를 신단에 모셨던, 부화뇌동하고 역사의식을
왜곡했던 관계로 종단차원의 사과를 요구하고
제가 증산도를 거부하고 발길을 돌렸어요.
전라도를 얼마나 무시했길래, 전라도에 인물이
없어서 불의에 항의할줄 모르는줄 일고, 그따위
박정희를 신단에 모시고 경배드리게 만들고,
전라도를 잘못봐도 한참을 잘못본것이지요.
이런 불의 한 일에 문제제기를 할 사람이 없어
서 제가 나서야 했습니다.
충효가문, 청백리가문, 불의에 항거한 가문의
후손이라서 저라도 나서야 했습니다.
천리교는 서울을 중심으로 대한천리교가 있고
부산을 중심으로한 한국천리교가 있어요.
이후에 대한천리교는 일본천리교와 무관하게
독립하려는 수원 성남을 중심으로 하는 지방
향파들이 대한천리교를 접수하고 이를 받아들
이기 힘든 반대파는 한국천리교에 합병귀속하
하지요.
제가 3개월 수강받고 서울에서 천리교를 일
으킨 모교회에 1개월 지냈는데 , 저를 사모하
고 내 곁에 따라와서 항상 제 주위를 맴돌 다
음악선생님이 고인이되어 화장골분을 금강에
뿌렸다고 전해들었어요.
제가 31세에 결혼하고 10년이나 지난때에
사서님이 고인과 똑같은 행동을하여 홀연히
고인이 떠오르게 되었지요.
그래서 저는 사서님께 관심을 갖을 수 밖에 없
었어요.
당시에 제 아내는 저의 산재요양을 받기위햐
고심하는 제게 도와주지도않고 저를 미워하
고 타박했어요.
부부는 일심동체라는대 너무 실망감이 컸고
제가 아내로부터 구박받기 싫고 눈치보기도
싫고 아내에 대해 너무 힘든 상황이였어요.
이런 상태여서 사서님께 마음이 끌렸어요.
저는 돈벌이를 못한다고 문전박대를 당하고
쫒겨다듯 해남으로 돌아오고 분하고 정나미
떨아져서 완전히 떠나와서 헤어지고 독립했
지요.
제가 큰아들과 이란성 쌍둥이로 아들만 셋이
네요.
애들이 어릴적엔 저를 무척 미워하고 전화도
잘 안받고 했는데 서울집을 찾아가서 큰아들
에게 전화번호를 알려달라고 말하니 두말없이
전화번호를 휴대폰에 메모해주더라고요.
큰 애는 여자친구와 사귀면 돈이 많이 소비된
다면서 여자친구를 만나지않는다 하였어요.
저는 여자친구를 많이 사겨봐서 여자를 보는
안목이 트였으면 좋겠는데 염려되네요.
큰 아들도 사회생활을사고 주위의 여자들이
어떤 심성으로 마음을 쓰는지 같은 남자로서
아버지인 저의 심정을 조금씩 이해되겠지요.
이렇게해서 사모하는 마음을 담아서 부부는
지아비 지어미의 마음이 있어야된다는
상대가 부족한 점이 있더라도 부모의 마음으
로 관용과 포용하여 상대를 감싸안아야된다는
편지를 사서님께 드렸어요.
당시에 개관2년의 도서관을 홍보하는 칼럼의
소식지에 문학박사이신 윤석우시인의 글이 실
렸는데 글을 쓴 자신도 뜻모를 난해한 문장으
로 염세주의의 글을쓰면서 은평구민을 무미건
조한 존재로 왜곡하는 문장을을 아무렇지도
않게 올렸어요.
그래서 제가 사서과장님께 왜 은평구민을
무가치하고 비하하는 글을 올렸느냐고 말씀드리
니 그렇다고 수긍하면서 이렇게 말씀해주시는
구민은 아무도 없었는데 감사하다면서 홍보과
에서 연유를 알아보라하셨어요.
홍보과 사서님은 개관2년밖에 안되는데
글을 써줄 사람을 섭외하기 힘들다고 양해를
구하였어요.
아무리 문학박사님이이 고교 국어교사님이지
만 너무하셨고 이런일들이 없기를 당부드리
고 말았어요.
전문분야가 아니지만 철학적인 글을 쓴다면
기본적인 철학을 이해해야 하지요.
그런데 이 ㅎ아 사서님은 황ㅅ원 사서뿐만 아
니라 사서과 직원들에게 모두 공개해버렸어요.
제가 그렇게 눈차리게 해줬는데 직원들과
담화하면서 자신은 매력이 있어서 남자들이
자신을 좋아하고 자신은 사랑받는 매력녀라
고 자랑하는거예요.
왜 편지는 당사자만 봐야지 개인의 사적감정
을 공개하여 망신주고 야속하게 하느냐고
제가 너무 힘들어지고 여인네들이 연정을 품
을때에 얼마나 사랑받고 싶어하는지 깨달아
지고 고인이 된 음악선생님이 더욱 많이 생각
났어요.
이런 애정문제로 감정이 상하면,서울 성동도
서관에서 사서와 이용고객이 자존심싸움에
법정까지 갔다면서 이 ㅎ아사서는 막내 여동
생 또래니까 양해를 구했왔어요.
이후 설날 연휴기간에 도서관에 전화해봤는
데 그녀가 전화를 받드라거요.
그전에 사서과에서 과장님은 저를 부르더니
과일을 주면서 같이 먹으면서 그 사서는 ㅇㅎ 여대 대학원을 나왔다면서 다른 직원들이 함께
담소하는것을 모르게 하라고 말씀하시고 저에
게 잘해주었지요.
사서과장님이 여성이다보니 신경쓸 수 밖에 없겠지요.
사서과장님께 그 사서님이 제 눈에 보이지않는 곳에서 근무
하길 바란다고 말씀드렸는데 진짜로 제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근무했어요.
사서과장님은 이후로 구립응암정보 도서관 관장으로 영전하였지요.
은평구는 초 중 고 가 많고 서울의 마지막 개발지이고 주택이 많아 문인 예술인 교사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지요.
지금은 고층건물과 아파트들이 많이 들어찼더라고요.
구립은평도서관이 군청이라면 응암정보도서
관은 면사무소 정도이고 그 아래의 작은 마을
도서관은 리사무소라고 이해하시면 되지요.
이렇게 각 구에는 대중소의 도서관이 있고
은평구는 어느 구보다 도서관이 많고 공공도서
관 건립에 관심을 갖고 예산을 많이 배정투자를 하지요.
은평구립도서관관 2001년경에 당시에 최첨단
으로 건축하고 서향의 비탈진 언덕에 지하층과 지상3층을 계단식으로 회랑모습
으로 지어지고 계단식의 지붕은 테라스가 되어
휴식공간으로 배치하였어요.
원래 장희빈의 고향 성장지이고 장희빈 가문은 아미산에 몇군데의 묘지가 있었던 장씨가문의 소유지였어요.
서편 앵봉산으로 해져무는 석양노을은 보기드
문 서울의 비경이고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로도
손색없는 아미산 불광근린공원에 자리잡아 회
랑식 계단으로 건측해 고색창연하고 넗은 개방
감등 건축대상을 받은 아름다운 건물이지요.
단점을 장점으로 만들고 고정관념을 바꿔버린
대한민국 건축대상을 받은 훌륭한 도서관이예
요.
은평구립도서관은 개인컴푸터가 있는 정보시설과 책단비라는 외부에 나가서 지하철에 대여반납 하는 서비스를 최초로
운영하는 도서관평가 전국1위를한 좋은 도서관입니다.
광주에서 제일 크다는 광주시립도서관이
서울의 구립도서관 보다 시설과 도서자료가
많지않고 모든면에서 실밍스러웠어요.
/그녀가 전화를 받더니 울먹이면서 제게 편지
를 보낸다고하여 제가 거절했지요.
"이제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절규하는듯 했어
요.
저는 너무 힘들었어요.
그 사서님은 알고보니 예비신부였어요.
결혼을 앞두면 괜히 잘하는 결혼인가 생각되고
남자가 그리워지나봐요.
이후로 신랑이 저의 집으로 전화왔어요.
전화받아보니" 불쾌하다" 고 하였지요.
저는 마음속으로 " 예비신부에게 관심을 갖고
많은 관심과 사랑을 해주고 간수를 잘할것이지 왜
나에게 전화하고 쪼잔하지? 이렇게 반문하싶
었지만 참았어요.
아픈 상처를 주는 서울이 싫어졌어요.
이런 상태로 가면신혼부부의 가정이 깨질 수도
있겠구나 싶어서 해남 고향으로 돌아왔어요.
/ 해남에서 3년을 기거하다가 옥시콘틴이라는 양귀비
마약성 약을( 수면 11~12시간과다수면) 먹지않으니
시간이 7-8시간으로 신체리듬으로 회복되었어요.
과다수면으로 10년가량을 허송세월했네요.
정상적인 사회생활를 해보려고 광주로 이사
하여 지금까지 지내네요.
2년전에 집 근처의 마트에서 케셔님께 야간에 수고한다고 인사말을 해주었고 이후로 오전시
간에 3번째로 볼 수 있어 계산하려 계산대에 이르니
그녀가 정신없이 저를 바라보더니 갑자기 계
산대를 벗어나 화장실쪽으로 빠른 걸음으로 가
버렸어요.
이렇게 고인이된 음악선생님처럼 영화의 한
장면같이 3번째이고 저는 너무 괴로웠어요.
저는 이런 일을 잊고싶었어요.
그녀에게 "거기때문에 죽은여자 천도위령제
를 모시게되었네요" 라고 다그쳤어요.
유난히도 다정히 제 이름을 부르고 대화를 하자고 말씀드렸는데 거절하여 마트안에서 항의했어요.
이후에 남자 메니저님이 대화를 원해서 대화
를 하게됐어요.
직원들의 교육에 필요하니 녹음을 원하니
두말없이 녹음을 하시라고 승낙했지요.
자초지종을 말하고 이런일가지고 그 케셔님
이 불이익받는 일이 없도록 하세요 라고
말씀드렸어요.
/저는 옛날일들이 회상됐어요.
저에게 사귀자고 하던 여자, 사랑의 질투를 부리고 신체접촉을 해오던 여자들, 신사복 정장을 했더니 멍하게 쳐다보던 여자와 심지어 뒤쫓아따라오던 여자등등 혼란스럽지요.
저에게 엄청나게 힘들게 하였던 여자 사서님이생각나서 은평구립도서관으로 전화
하니 신임 도서관장님께서 전화를 받았어요.
"0 0 0에피소드가 있는데 알고있어요?
"0 0 0 사서님은 잘계십니까?"
"네, 사서님은 마포 서강도서관, 관장님으로 있습니다."
"예! 그러면 0 0 0관장님하고 단짝 친구인
"0 0 0 여자사서님은 계세요?"
"네! 0 0 0사서님은 응암 정보도서관 의
관장님으로 있습니다.
초대 관장님도 잘 계십니다."
" 두 도서관, 전화번호를 알려드릴께요.
"예~"
엄무성 초대관장님을 비난하는 글을 은평구청
에 보냈거든요.
안면이 있어 가끔 함께 식사를 하던 젊은이가
예쁜 사서님을 좋아한다고 몇번 말을 걸었는데
고소를 하여 경찰서 유치장에서 2주간을 감금당했지요.
그래서 ( 기계적인 은평구립도서관의 형태를 시정을 바란다는 문서를 은평구청장에게 보냈어요.도서관 직원이면 문학직인데 그렇게 경찰서를 좋아하시면 도서관 직원들이 경찰관을 하고 도서관장님은 도서관장님은 경찰서장을 하면 되는거지요.
문학직인 도서관직원면 지성적으로 문제를
자체적으로 해결해야지, 같은 문학직 후손으
로서 정말로 창피하다.
그렇게 위기관리 능력이 없느냐?
도서관에 고건 서울시장이 시찰하는 사진이 걸렸는데 김일성 사진을 전시하는것과 뭐가 다르느냐?
이후에 또 경찰이 도서관에 출동하여 왔길래
밖에 계시던 도서관장님께 여춰봤어요.
"에~ 그 여성직원이 관심과 사랑받지 못해서
그렇지요, 그렇게 이해해주세요." 라고
도서관장님께서 말씀을 해주셨어요.- 참, 느긋
하고 인자하셨는데 엄무성 도서관장님이 생각
이 많이 나네요.
이렇게 , 0 0 0사서님의 에피소드는 구립
운평도서관의 비사가 되고 사서직원들의 교육
자료가 되었네요.
이윽고 0 0 0 도서관장님의 단짝 동료인
구립 응암정보도서관장님인 0 0 0님께 전
화하고 메모를 남겨드렸는데 전화가 왔어요.
"눈살시울 눈살시울 가슴못에
아리웁고 아리움고 괴옵나이다"
라는 문구를 핑크빛 색종이에 써서 드렸는데
다음날에 둘이 똑같이 핑크빛 상의를 입고
근무하였지요.
이게 뭐지 장난치고 놀리는가? 라고 생각
들었지요
이런 내용등 에피소드를 말씀드렸더니 금방
알아라리더라구요.
0 0 0 관장님은 남편하고 화목히 잘 사시냐
고 안부를 물었더니 잘 사신다고 했어요.
걱정되어서 안부전화드렸고. 여기는 광주인데
서울에 올라가면 관장님이 계신 도서관에 들
리어 담화를 나누고싶다고 하였더니 , 그러자며
혼쾌히 대답해주었어요.
그런데 여자들의 등살에 너무나 힘들고 정신
없아 골치아픈 일이 많아 아직도 들러보지못했네요.
/ 이런 사연으로 괴롭게 하지말라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서 천리교 광주혜창교회에서
고 황은혜 선생생께 위령제를 모시게 되었지
요.
먼저 선배님이신 달마산 도솔암 주지스님인
법조스딤과 미황사 금강 주지스님께 자문을
구하고 제가 다니던 증산도 도장 책임자에게
도장에서 천도제를 모시고 싶다고 물어보니
가족이 아니면 안된다고 하였어요.
이용관 천리교 회장님은 알고보니
이발 동인영수의 광산 이씨 가문이였어요.
이발 동인영수는 정여립옥사로광산이씨
가문이 거의 절단났었어요.
이발 당수는 고산 윤선도 가문과 혼인관계
로 이후로 윤고산선생님이 서인 노론에 강경
했지요.
그리고 곤재 정개청 선생님도 옥사의 희생자
가되어 고성정씨와 광산이씨는 연일 정씨와
결혼하지않지요.
연일정씨는 정몽주와 정철 계열로 파가 다르
고 정몽주의 후손들은 출사하지않고
향리에서 은거하였어요.
그러나 정철은 조정에 출사하여 정여립
사화의 조사관이 되어 술에 취해 희롱하면서
동인 1000여명을 학살한 책임자였지요.
정철의 옥사는 5.18과 동일한 학살자로 평가
받고있어요.
이후로 전라도는 역향으로 매도받지만 정철가
문은 호남의 4대 가문으로 성장하지요.
아마도 동인 남인들의 후손들은 정철과 정몽주
가문인 연일정씨와 절대로 결혼하지않는다는
묵시적으로 마음이있는것 같아요.
저희 가계도 연일정씨와 혼인한 기록이 없네
요. 아무래도 꺼림직 하겠지요.
정철은 같은 연일 정씨인 정몽주 가문의
어둠.흑막의혹이지요.
고려조정은 자체적으로 정화되지 못하여 귀족
들이 모든 땅을 빼앗아 농부들이 바늘 꽂을 땅이
없다할 정도로 하층민들이 힘들고 일부로 귀족들의
노비가 되는것이 편안했을 정도로 부패했지요.
당장에 개혁을 지배층인 귀족세력이 실천했어야
했어요.
자체적인 모순으로 대세적인 혁명이 일어나면,
아무리 기득권이 있더라도 혁명당하기를
피하려면 ,대세를 인정하는것이 순리에
가까운 현자라고 생각되네요.
천리, 지리, 인심에서 하나라도 소홀하면
정치가 되겠어요?
어느 왕조도 망할때는 어김없이 지배층이
부패하여 탐학폭정을 하다가 망했다는것이
역사의 교훈이지요.
기득권을 지키려고 하다가 혁명파에 의해
혁명을 당하게 되지요.
맹목적으로 극단적인 충효열이 인명을 해친다는것이
역사적인 진리이지요.
오직 절의를 지킨 충신으로 명예를 얻기위해
극단적인 반왕조투쟁으로 고려 왕실의 종친
왕씨들이 몰살당한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요?
절개도 공적대의인지 사적감정인지 올바른
절개인 " 직절"이 필요하지요.
우리 가계도상으로 광산 김씨와 연안 이씨등
서인과 가까운 집안과는 혼맥의 기록이 있어
요. 고경명 선비의 후손인 장택 고씨 집안
과도 혼맥이 있고요.
정철이 주도한 사화로 동인계열인 저의 가문은
피해를 빗겨갔어요.
도학사림의 도학연원, 원조가문이라서 감히
건들지 못했지요.
어계 조려 선생님은 절의표상이고
점필재 김종직 선생님은 사림영수이고
담헌 김극검 선생님은 모범선도 하셨지요.
모두 경남지역이 탄생성장지로서 어계선생은
함양 점필재 선생은 밀양 담헌 선생은 김해이고
서로 교유하여 훈척신인 관학사장 무리들의
퇴폐 성문화에 자극받고 각성하여 도덕사회
건설의 도의결맹을 맺어 도형도제의 도의 형제가
되어 도학사림의 원조인 "도학연원/이 된거죠.
점필재 선생께서 혼자서 단기간에 도학사림일으키는것은
불가능 했지요.
어계 조려 선생은 불의에 항거하여 은거함으로서
절의의 상징표상이된것 이지요.
선비가 되고 점필재 선생은 향촌에서 제자
를 양성하고 담헌 선생은 향촌에서 조정에 출
사한 선비관료들의 귀감으로서 모본적인 관료
정치를 하여 이끌어 가지요.
그런데 이런 사림관료들의 교유회맹하는것을 분경이라해서 엄격히 금지불인 했어요.
저희 선조님이신 담헌선생께서 분경치죄를
받아 고신환수를 당하기도 했지요.
이것은 사전에 붕당정치를 예방하려는 왕조의
의지이고 이후에 정암 조광조선생님이 지치주의의 도덕왕도정치를 주창하고 사림은
성장하여 선조대에 본격적인 도학사림의 정치
의 붕당정치가 열립니다.
선조님은 문종의 세자시절에 선농단에서 어울린 어릴적의 동무였어요.
그래서 왕실에 대한 반감도 없어고 쪼잔하게 비굴하지않고
청간하여 사림이 따랐어요.
융통성이 없으면 체용관계에서 용사하지 못하고 체(체면) 만
있는 경우로 당시에 고지식하지않고 용사를 잘하셨던 저희 선조이신 담헌 선생님을 조금이라도 닮았다면 사림의 사화(무오사화) 의 피해를 당하지않았을 수가 있었으리라 생각하니 슬퍼지네요.
초왕과 세조를 비유한 조의제문은 그냥 후대 사관이나 문집으로 기록을 보관했으면 좋았으리라 여깁니다.
서자나 노예의 자식을 천출이라하여 입신양명하여 괸직의 공을 이루어도 철저히 천출이나 소인배로 몰려 인간성 자체를 부정당하는 신분질서 사회에서 서출인 유자광과 담필재 선생는 정자에 걸어둔 유자광의 시를 점필재선생이 떼어버려서 원한을 품고있던 유자광에 의해서 연산군의 사화가 유발되지요.
신분질서의 귀족사관의 시대에서 하층민들은 천대받고 있다가 신분이 상승하면 구원으로 보복과 해악을 부린 경우가 유자광같은 행태였는데 과연 민중사관에 의한 점필재선생의 행위는 우리가 살아가는 자유민주시대엔 있을 수가 없는 일이지요.
연산군과 유지광은 평행이론처럼 모친에대한 애착어린 컴플레스가 있어서 두 인물이 만나서 사화인 보복심리로 상승되었던 것이지요.
참고로 유자광도 자신의 노모에게는 굉장한 효자였다고 전해오고 있지요.
담헌선생께서 유자광의 간계를 늘 주의하여 탄핵했지만 무산되고 말았지요.
담헌선생이 5년만 더 사셨다면 후배관료들을 잘이끌고
연산군에게 충심의 간언을 하여 조정을 무난히 잘 이끌 수
있었는데 안타까운 마음 뿐입니다
담헌선생은 부제학 대사헌등을 역임하시고 정이품이 되어서도 저축한 재산이 없어 국가조정에서 장지와 부대비용과 봉토를 특별히 하사받았어요.
조선시대의 청백리중에서 담헌선생처럼 저축둔 재산이 없는 청백리는 찾아볼 수 없어요.
그 폭군이라던 연산군도 이렇게 담헌선생을 인정해주었지요.
담헌공께서는 연산5년에 귀천하셨어요.
조금만 더 오래 사셨다면 사화의 피해를 예방할 수 있었겠지
않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스승을 지나치게 높이려는 탁영선생의 공명심이 사화를 사전에 감지하지 못한 이유가 됐으리라 분석됨니다
서인은 종실외척과 훈척신의 입장을 두둔하여 자신들의 권력확대를 추구하던 세력이였어요.
동인은 과거 명종때의
외척정치의 폐해를 들어 훈척들의 잘못을 편들지
않고 비판하는 세력이였지요.
군사독재 정권때에 당파싸움으로 조선이 망했다
고 하는데 붕당정치는 부정적인것보다는
긍정적인 측면이 훨씬 많았어요.
책임정치의 측면이 분명히 있었어요.
붕당정치가 무너진 정조 사후엔 외척이 발호
하여 매관매직하는 한 가문의 세도정치가
극성하여 본격적으로 조세저항하는 민란의
시대로 돌입하고 이 세도가문인 노론세력은
사대의 대상을 일본으로 바꾸어 친일부역을
하게된것이지요.
붕당정치가 사라지고 세도정치의 악행으로
일본의 식민지가 되지요.
/ 그런데 고 황은혜선생님이 충남 예산출신으로 회덕 황씨 가문의 처자였어요.
저보다 1개월로 생일이 늦은 동갑내기였어요.
회덕 황씨는 서인 노론인 송시열의 제자인
송준길의 수제자 가문이였어요.
저희 가문이 숙종의 환국정치로 노론세력에
게 핍박받아 고향인 장흥으로 귀거래사하지 못
하시고 완도군 소안도로 유배당하셨습니다.
저희 가문은 김해에서 명종 삼포왜란을 피하여 보성 조성 대곡리로 이거하여 보성장흥을 중심으로 세거하지요.
해남에도 소안 월항리 아래 김씨들이 세거하고
완도 서부에서 제1의 가문으로 알아주지요.
모두가 덕을 베풀고 정의롭게 하셔서 인정받
게 된거지요.
입도조 만정공 휘 김형연 할아버지께서는 중
앙조정에서 도의정리를 추구하던 마지막
진성정통 남인이셨어요.(행. 승정원 좌승지겸 경연 참찬관
천. 오위도총관 증.동지중추부사. 즉 귀양을 보냈지만 임금이 위로 해주었다는 의미입니다.
광해군때에 권력을 남용한 대북파는 인조
반정이후에 남인에 흡수되는등 이를
왕실이 있던 한양과 경기지역의 남인을
근기남인이라 히지요.
투쟁의 상대인 가문의 후손을 제가 천도위령
제를 모셔드린것은 무슨 조화인가요?
수강3개월과 한 솥밥먹던 1개월뿐인 처자를
위해서 천도제를 모셔드리게 된것입니다.
알 수 없는게 인연인가 봅니다.
같은 동인이셨던 광산이씨의 후손을 만나고
질긴 인연의 끈인 흐트러진 실타래를 풀어감
는 일인것 같습니다.
위령제를 모신 바로 다음주에 해남소재의 병원에서
"엉덩이 하트님" 의 사달이 났네요.
제가 사주에 도화살이 2개다 있어서 그렇다고 하더니
정말로 그런것같아요.
제가 불학불민하고 베풀어준 인덕이 부족한
모양입니다.
이글은 재정리하지않은 초고직필입니다.
오타가 많아 틀린 철자가 많네요.
많은 혜량을 부탁드립니다.
추후에 오타등을 고치겠습니다.
졸필을 끝가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